지나가는꿈

'갈증'

공현 2008. 12. 15. 20:15

어렸을 때 내가 장래 희망하는 직업으로 적어 냈던 것은 '과학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직업이라기엔 상당히 막연한 카테고리이긴 한데, 뭐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한 답안이었다.


그렇지만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그렇게 식상하진 않았는데,

뭐랄까 어렸을 때부터 세계가 도대체 왜 이따위로 생긴 건지, 알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고 그런 욕망이 '과학자'라는 막연한 카테고리를 추구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과학의 인식론적 한계를 다룬 철학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고

중학교 무렵부터는 철학이나 인문학 쪽으로 방향이 돌아서기 시작하다가

고등학교 때는 "세계과 왜 이따위로 생겼나"와 "사람(또는 나, 또는 너)은 왜 이렇게 사나", 그리고 "이 사회는 왜 이렇게 굴러가나"라는 문제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인문학, 사회학 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던것 같다.

하지만 방향과 분야를 바꾸더라도 그 밑바닥에 있는 '갈증'은 다르지 않다.



'갈증'은 목마름이다. 목마름은 절실한 것의 은유로 생각되지만, 사실 꼭 그렇진 않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참을 만하지만 애매한 목마름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내 '갈증'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전부터 나는 또 다른 느낌을 경험하고 있다.
그건 어떤 사상, 어떤 공부도 내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는 느낌이다.

내가 더 이상 공부할 게 없다거나 알고 싶은 게 없다는 느낌은 아니다. 나는 푸코나 들뢰즈 가타리나 아렌트나 스피박에 대해 공부하고 싶고, 지젝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공부들이 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해소할 수도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내 삶에서 그런 학문과 사상들은 더욱 부차적인 정보/수단의 위치로 격하되었다.
   왜일까? 내가 그 동안 적지 않은 지식들(그러나 결코 깊지는 않은)을 접수해와서일 수도 있고, 내가 '철학'을 배운 이후로 추구해온 이해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세상을 시시하게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이미 실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천들 속에서 생겨나는 다른 결의 이야기들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내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은 남이 한 말 중에는 없고,
내가 스스로 정보를 생산해냄으로써만 내 '갈증'을 좀이라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나의 오만일까?


하지만 그런 오만에 입각하여 나는 이런저런 내용들을 메모하고 기록하고 쓰고 정리하고 있다.


본래 갈증은 외부로부터 수분이 유입되어야 하는 것인데
나 자신이 만들어낸 수분으로 내 '갈증'을 해소하겠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내 콧물을 마시거나 내 오줌을 마시면 목마름이 덜해질까?

이건 더 이상 '갈증'이라는 은유를 붙일 수 있는 게 아니거나
아니면 그런 방법으로도 내 '갈증'이 해결될 수 없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하지만 이제 '갈증'이 해결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다만 살아있을 뿐이며 살아갈 뿐이다.갈증은 나의 욕망의 방향을 표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