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노동운동이 중심운동이라고?

공현 2009. 4. 8. 12:09



"노동운동이나 빈민운동은 '정치경제 계급'의 운동이다. 젠더 운동이나 청소년, 장애인 운동은 그 성질이 다르다. 애초부터 minority라고나 할까."




오승희 편집을 열심히 하다가, 하기 지겨워져서 길지 않게 쓴다.


노동운동을 '계급운동'(또는 '변혁운동')으로 규정하면서 여타의 운동과 다른 성격을 지닌 운동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는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 반대는, 단지 운동과 운동 사이의 위계 관계와 그로 인해 생기는 폐해들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이 사회 근본 구조를 건드리는 변혁운동이라고 생각되어야 할 하등의 특별한 이유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한다면 진지하게 수용하려고 해보겠다.
(노동운동이 계급운동으로서 변혁운동의 성격을 띄고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 라는 당위 주장은 기각이다. 당위는 현실이 아닌 목표일 뿐이다. 노동운동이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난 후, 또는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다시 생각해보겠다.)


1. 먹고 사는 문제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 문제이며 따라서 경제적 문제가 가장 근본이므로 노동운동이 사회변혁의 기본적 핵심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 계급은 자본가-노동자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여성의 계급성, 아동의 계급성, 장애인의 계급성 등에 대해 이미 이런저런 이야기가 된 상태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그렇게 단순히 자본가-노동자의 관계로 구성되지 않는다. 노동자들 또한 그렇게 단순히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사회에서 경제적 문제가 노동자이거나 빈민이라는 이유 등으로 크게 결정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노동자나 빈민의 지위 자체가 여성이거나 아동이거나 장애인이라는 것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아 결정되며, 어떤 노동자이고 어떤 빈민인지도 그런 것들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의 성격과 가치 또한 그런 것들에 의해 결정되고, '노동'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가정에서의 재생산이건 교육이건)은 '노동'을 사회변혁의 핵심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노동운동이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을 모두 포괄하게 되면 그때는 진정으로 그것이 '변혁운동'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되면 이건 더 이상 노동운동이 아니다.
따라서 '경제적 문제'는 곧 '노동 문제'라는 관점이야말로 '먹고 사는 문제', '경제적 문제'를 제대로 보지 않은 것이다.


2. 노동운동은 사회구조를 직접 타격하고 다른 운동들은 사회적 인식과 문화를 바꾸려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 예컨대 여성운동에서 여성들의 가사노동이나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의 지위 문제에 맞서 싸우는 건 경제적이며 사회구조를 직접 공격하는 투쟁이다. 여성들이 조직화되어서 비임금가사노동에 대해 파업을 선언해도 마찬가지고, 청소년들이 교육을 거부하거나 집단적 가출 투쟁을 조직해도 사회구조를 직접 타격하는 투쟁이다. 무엇은 사회구조이고 무엇은 '문화/인식'이라는 구별 자체에서 뚜렷한 기준이 보이지 않는다. 사업장에서 파업하면 경제투쟁이고, 학교에서 파업하면 문화투쟁인가? 두발자유나 입시폐지 캠페인은 문화투쟁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알리는 캠페인은 경제투쟁인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 가치생산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사회를 정지시키는 실질적 힘이 된다고들 떠드는데, 사실 그런 식이라면 사회를 정지시키는 건 간단하다. 여성들이 모든 가사노동에서 총파업을 선언해도 사회는 곧 정지할 거다. 청소년들이 모든 교육에서 거부를 선언하고 실천해도 사회는 곧 정지할 거다. 장애인의 경우는 애초부터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있으니까 '거부'가 좀 애매하긴 한데, 만약 이 땅의 모든 장애인들이 노동할 것과 교육 받을 것을 선언하고 전국적인 점거에 나서도 사회구조는 바뀔 거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가치생산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정지하는 게 아니라 그냥 수가 많아서 그렇단 거 아님? -_- 왜냐하면 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노동'들은 노동자들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3.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같은 이론의 문제에 대해서
- 이건 뭐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없다. 마르크스가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설파하고 계급의 철폐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하는 노동운동을 주창했다고 해서, 그 이론을 바탕에 둔 노동운동은 보편적 운동이라는 뭐 이런 건데, 그렇게 따지면 페미니즘도 충분히 그런 인류 보편의 이상을 밑그림으로 둔 이론이고, 장애인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의 경우 아직 이정도로 체계화된 이론은 없지만.


4. 현실적인 동력의 문제에 대해서
- 이건 어느 정도 수긍은 할 수 있지만 경험적인 문제라서 논리적으로 딱히 뭐라 말하긴 어렵다. 그러니까, 노동운동은 현실적으로 수만 수십만의 조직화된 노동조합원-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있기에 다른 운동보다 더 사회를 뒤엎을 힘이 강하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이나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조합들을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긴 한데 말이지.
여하간에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자-농민들을 동력으로 삼아서 사회 혁명이 발발해온 여러 사례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농민이 아니라 학생-교사들이 주축이 된 혁명 같은 것도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유사한 선례도 없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가 '혁명'이고 어디까지는 '혁명이 아닌 변화'인지에 대한 민감한 구별이...)
여하간 이건 역사적인 경험을 가지고 하는 주장인 건데, 정작 20세기 이후 주요 경제대국으로 자리잡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거대 노동자 조직에 의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경험을 주장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사실 이 논리는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에 대해 가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거라서 뭐라 말하기 어렵다. 혹시 모르지. 노동자들이 아니라 다른 걸 기반에 둔 조직이 더 큰 힘을 가진 혁명 세력으로 등장할지. 이건 결국 숫자와 급진성의 가능성 문제인데, '급진성'으로 따지면 현재 노동자들은 그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여하간에 노동운동이 근본 변혁 운동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뭔가를 가지고 오면 기꺼이 논의해보겠지만,
그런 뭔가가 저 위에 제시한 이야기들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라면, 나는 노동운동이 변혁운동이고 근본운동이며 정치경제계급운동으로서 핵심에 있다는 주장에 가차없이 실질적 근거 없는 허위라는 딱지를 붙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