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소설 - 파본의 해탈

공현 2008. 1. 11. 14:24

2005년 여름즈음에 쓴,


"쨍!"  그러니까는... 문학상 마감일에 맞춰서 다 써보겠다고 열심히, 열심히 치면서 지금까지 써온 소설들을 마구 짜깁기한... 좋게 말하면 지금까지 작품들의 총체? -_-;;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김수영의 이 선언(?)에 대해서 혹자는 "현실은 참여의 풍자, 무참여의 해탈 사이의 양자 택일을 요구한다"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풍자가 아니면 자살,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 오늘도 풍자해내는 주인공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결국 파괴와 죽음의 상태에 이르는, 해탈해서 미쳐버린 주인공을 만들어냅니다...








파본의 해탈



  "쨍!"
  박살남. 산산조각. 그런 느낌으로 하얗게 흩어지는 조각들. 땅에 널브러진 수박조각. 번지는 물기.
  유리 깨지는 소리에 놀란 듯 잠시 멍하니 있던 소녀는 천천히 몸을 쪼그린다. 소녀는 먼저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맨손으로 집어서 모은다. 깨진 접시에 그려져 있던 꽃이 날카롭게 꺾여 있다. 접시 속에 갇힌 꽃이 답답하다. 조각을 주워 모으는 소녀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어느새 베었는지 소녀의 왼쪽 검지 손가락마디에서는 피가 나고 있다. 소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불안한 눈길로 밤 12시까지는 혼자 있을 집 안을 살피며 접시를 주워 모은다.
  소녀가 접시를 깨는 일은 오래간만이다. 소녀는 얼굴을 찌푸린다. 소녀는 접시를 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머리가 어지럽고 현기증이 난다. 감기는 일상적이다.
  접시조각을 모두 부엌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소녀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 조각들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피가 간혹 한 방울씩 바닥에 떨어진다. 소녀는 소녀의 피로 새로 그려진 빨간 꽃무늬들과 함께, 접시조각들을 아파트 밖에 있는 쓰레기장에 버린다. 쓰레기들로 잘 덮어서 접시조각들이 보이지 않게 한다. 그러고 나서야 손에 어린 붉은 빛을 알아차린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살짝 핥는다. 조금 흐려진 붉은 색깔이 손가락에 번진다.
  띠띠띠 띠-.
  집 앞에서 별 의미 없이 초인종을 눌러본다. 잠시 깨져나간 운명을 감상한다. 초인종의 전자음은 참 가볍게도 베토벤을 연주한다. 운명이 울리는 동안 소녀는, 벽에 붙어있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계단에 켜진 노란 불이 얼룩진 벽면과 거울의 금들을 타고 번지고 있다. 입시학원가구할인판매…… 전단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문이 비친다. 방학동안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비친다. 검은 눈동자가 비친다. 처진 눈가가 비친다. 살진 편인 볼에 여드름자국 몇이 비친다. 오므린 입술이 비친다. 얼굴이나 몸에 비해 길고 얇은 목이 비친다. 벽이 비친다. 벽에 있는 돌기들에는 때가 끼어있고 먼지 덩어리가 매달려 있다. 벽은 불빛을 받아 오렌지색을 띠고 있다. 지저분한 분위기다. 구석에는 빈 우유 상자와 담배꽁초가 흩어져 있다. 벽에는 오줌 얼룩도 있고 가래침 얼룩도 있다. 핏자국 같은 것도 있다. 눌려 죽은 벌레의 날개는 벽에 박제되어있다. 붉은 피가 같이 묻어 있는 것은 모기 시체다. 거울의 금 부분에서 비친 형상들은 일그러진다. 금이 가고 여기저기 먼지가 낀 거울 속에서 시간도 잠시 흐릿해진다.
  소녀는 오른손을 넣어 우편함을 뒤적인다. 금속빛, 회색, 차가움, 그 위에 붉게 쓴 우편함이란 글씨가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선명하다. 의류할인판매80%세일새개장폐업창고대방출. 자극적이고 요란한 전단지 몇 장만 고개를 내밀고 있는 우편함 입 속에 손을 넣어 샅샅이 훑어본다. 매끌매끌한 종잇장이 두서넛. 노란 종이에 파랗고 까만 글자. 수도요금지로, 우유대금지로. 손에는 요금지로용지들 뿐이다.
  소녀는 왼손 검지를 핥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어지럽게 울렁이는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억지로 자리 잡고 누운 소파다. 세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는 소파다. 나무 무늬 팔걸이에는 땅콩 껍질 조금과 사탕 포장지가 놓여있다. 땅콩 껍질들은 이상한 모양의 조각들로 부서져 있다. 사탕 껍질은 가운데가 비스듬히 찢어진 오렌지에 녹색 잎사귀를 달고 있다. 언제쯤 먹고 버려 둔 건지 소녀는 기억하지 못한다.
  반대쪽에는 강아지 인형 하나가 놓여있다. 노란색 몸에 검은 귀를 가진 강아지 인형의 얼굴은 웃고 있다. 덥수룩한 털을 가진 인형은 배를 깔고 엎드려 있다. 소녀는 개를 기른 적이 있다. 작은 시츄였는데, 배를 만져주면 누워서 네 다리를 늘어뜨리곤 했다. 몇 년 전부터 없다. 흰 살을 드러내고 있는 문짝의 나무 합판은 그 흔적이다. 그 이후로 소녀의 부모님은 동물을 기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인형만을 사줄 뿐이다.
  돈은 돈 대로 들고, 잘 죽잖아. 인형 같은 게 낫지, 차라리.
  소녀는 전단지들을 쓰레기통에 쑤셔 박는다. 휴지를 몇 장 뽑아서 바닥에 점점이 남아있는 핏자국 몇을 벅벅 긁어낸다. 수박도 깨끗이 닦아낸다. 붉은 색 개미 한 마리가 벽을 기어가는 것이 눈에 띈다. 더듬이를 흔들며 꼼지락거리는 그것은 퍽 귀엽다. 소녀는 간혹 개미들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곤 한다.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에서 끼익거리는 소리가 난다. 작은 방에는 갈색 책상 하나 침대 하나 녹색 옷장 하나가 좁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소녀가 몸무게를 싣자 침대 매트리스가 억눌린 신음을 토한다. 열려 있는 옷장 안에서 약상자를 찾아본다. 아까 감기약을 꺼내 먹었었는데, 어디다 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타이레놀은 별 효력이 없다. 그러다가 소녀는 자신이 상처가 났다는 걸 모르고 있을 때는 아픔도 잘 의식하지 못했는데 상처를 본 뒤에야 아프다고 느끼는 것이 문득 우습게 여겨져 약상자 찾기를 그만둔다. 조금 갑갑함을 느낀다. 약상자 대신 옷을 찾아본다. 검은색 장식 없는 수수한 짧은 소매 셔츠가 눈에 띈다. 바지는 조금 헐렁한 검은 코르덴이 잡혔다.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가 클 것이라면서 좀 큰 옷들을 사주지만, 옷들은 소녀에게 항상 크다. 바지 아랫단이 바닥에 쓸린다. 발뒤꿈치에 밟히는 것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습관적으로 책상 앞에 앉았지만 소녀는 손을 놓고 멍하니 주위를 둘러본다.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쨍-. 접시 깨지는 소리. 귀울음이 조금 울린다.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본다. 문득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을 보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햇빛 속에 먼지가 빛나고 있다. 하얀 점들이 빙글빙글 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모레가 개학이었지. 그리고…
  소녀는 자판위에 손을 가져가 아무 키나 누른다. 검게 죽어 있던 컴퓨터 화면이 깜빡거리며 살아난다. 소녀는 하얗게 떨고 있는 화면을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쁘게 숨을 쉬는 화면. 신경을 긴장시키는 검은 글자의 떨림. 소녀는 고개를 휘휘 젓고 눈을 깜박이며 귓가에 울리는 접시 깨지는 소리를 떨치려 한다. 소녀는 문득 졸음이 의자 등받이에서부터 등을 타고 머리로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고개를 흔들어 어떻게든 졸음을 쫓아본다. 소녀는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아무렇게나 두들겨 무의미한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만들어냈다가 지우기를 되풀이한다. 한숨을 살짝 쉰다.
  서울에서 태어나 성격이 부드러우신 아버지와 다소 엄하신 어머니 밑에서…
  상투적이야, 작게 중얼거리며 지워버린다.
  집이 망해서 빚 때문에 초등학교 2학년 때 시골로 야반도주를 하여 몇 달 동안 학교도 다니지 않으며 시골 생활을 했는데, 그때 평소 바라왔던 시골 생활을 만끽했음에도 자신이 시골 아이들 속에도 진정으로 섞여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솔직하게 썼다가 어머니에게 혼났던 것을 떠올린다. 책상 위에 삐딱하게 엎드린다.
  어릴 적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귀한 접시를 깨고…
  점점 더 자기소개서가 엇나가는 것을 자각하고, 소녀는 눈을 감아 버린다.
  의욕없음의욕없음의욕없음의욕없음의욕없음의욕업
  소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이런 문자열들을 화면에 띄웠다가 다시 지운다. 머릿속 한 부분이 마비된 것 같다.
  소녀는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지만 자기소개서에 쓸 수 있을 만한 문장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자기소개서는 일종의 광고라고 소녀의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소녀는 자신이 과연 팔려나갈 가치가 있는 상품인지 의심스럽다. 팔려나가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 대학교가 지원자를 선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1,000자 내외(띄어쓰기 포함)로 기술하여 주십시오.
  소녀는 그 문장을 보면 노려보며 자판을 신경질적으로 때린다. 귓가에 환청처럼 전에 가식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예, 고객 여러분께 저희가 오늘 소개해드릴 상품은……. 그 너머로 접시 깨지는 소리가 찡― 하고 울리고 있다.
  소녀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마우스 커서를 들이밀고 컴퓨터 폴더 속을 뒤적거린다. 그러다가 문서 파일 하나를 연다.



  구석진 골목길 가로등 아래나 공터 등에는 저절로 조그만 쓰레기장 같은 것이 만들어지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와 같은 내용의 조잡한 간판이 나붙기도 하지만, 그런 것을 만들어 줄 사람도 없는 버려진 곳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쓰레기장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놓여 있곤 한다. 음식물. 비닐. 깡통. 유리병. 휴지. 구멍 난 양말. 깨진 유리조각. 컵라면 용기. 책.
  분리수거 같은 것은 무시한 채 널려있던 쓰레기들 속에서 문득 네모난 무엇이 일어섰다.
  검고 수수한 표지에 먼지가 묻어있다. 책장 틈에는 생선뼈다귀가 끼어 있다. 싸구려 종이로 만들어진, 제법 두께 있는 책이다.
  그것은 파본이었다. 파본. 인쇄·제책이 잘못되거나 파손되거나 하여 온전하지 못한 책을 이른다. 파본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그 중에서도 심각한 편이었다. 97, 98쪽은 두 장씩 있었으며 100쪽은 누락되어 있었다. 100쪽 이후로는 글자들이 조금씩 뭉개져 있기까지 했다. 그리고 접힌 채 잘못 잘린 책장의 남는 부분이 세 조각, 삐져나와 있었다.
  그것은 약 5개월 전 서울의 출판사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흘 전 대학교 앞 한 서점 서가에서 팔렸다. 그것을 샀던 사람은 화를 냈고, 출판사에 문의해서 새 책을 얻었다. 파본인 그것은 버려졌다.
  그것은 본래부터 호기심 많은 책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만든 사람에게 찾아가 어째서 자신은 파본이 된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의 탄생이라든가 본질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그런 그것에게 그것에 붙어 있던 생선뼈다귀가 말해줬다.
  수도에는 커다란 출판사가 있어. 모든 책은 그곳에 있는 장인의 손에서 인쇄되어 나오지.
  그 이야기는 그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수도로 가기로 했다.
  다른 책들은 보통 자기 힘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에게는 삐져나온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들은 서가에 꽂혀 있을 때는 접혀 있어서 눈에 띄지 않았고 또 그것 자신도 그 부분을 자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샀다가 버린 사람이 그 부분을 펴둔 채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그 잘못 잘린 종이 부분이 세 방향으로 넓게 삐져나와 있었다. 그것은 그 부분을 다리처럼 움직여서 천천히 기어갔다.
  그것은 사람들 발길에 차이거나 찢어지지 않게 길 구석으로만 다녀야 했다. 동네 아이들 손에 잡혀서 딱지가 될 뻔한 일도 있었다. 강아지와 고양이들에게 붙들린 적도 있었다. 자동차에 몰래 올라타기도 했다. 비가 오면 젖지 않게 건물로 들어가서 피했다.
  여기일 거야.
  여전히 생선뼈다귀를 낀 채, 더욱 꼬질꼬질해진 책은 마침내 아주 높이 솟아 있는 건물 앞에 이르렀다. 그곳은 인쇄소까지 한 건물에 있는, 거대한 출판사였다.
  1층에서는 인쇄 기계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실례지만, 장인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그것은 한쪽에 쌓여있는 책들에게 물어봤다. 책들은 깊이 잠들어 있어서 대답해주지 않았다.
  2층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뭔가 많은 종이들을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실례지만, 장인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아무도 그것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바빴다.
  그것은 낑낑대며 가까이 있는 책상 위로 올라갔다. 계속 다리 역할을 해준 삐져나온 종이 부분은 이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책상 앞에서는 단발을 단정하게 늘어뜨린 여자 한 명이 원고를 읽고 있었다.
  실례지만, 장인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여자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것을 봤다. 그러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넌 더럽구나. 그 생선뼈다귀는 뭐니? 이런, 게다가…
  여자는 그것을 위아래로 뜯어보는 듯했다.
  넌 파본이구나.
  예. 파본입니다. 그래서 장인에게 왜 제가 파본인지 물어보러 왔습니다.
  왜 파본이냐니? 그런 데 이유 같은 건 없어. 파본은 그저 파본이야.
  여자의 미간에 더 깊은 주름이 파였다.
  장인님은 꼭대기 층에서 이 출판사의 모든 걸 조율하시지. 사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장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완벽한 능력에 대한 경외를 표하는 거야. 그분의 손으로 움직이는 이 출판사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거든. 지금 파본이 그런 분을 만나겠다고?
  그런 완벽한 곳에서 왜 파본이 나온 걸까요?
  어… 글쎄. 음….
  턱을 괴고 고민에 빠진 여자를 두고 그것은 책상에서 뛰어내렸다.
  3층, 4층, 5층…. 그것은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이 건물은 대체 얼마나 높은 걸까?
  그것은 질문했다.
  글쎄.
  생선뼈다귀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에 대한 답은 어차피 둘 다 모르는 일이었다.
  낮, 그리고 밤. 다시 낮. 다시 밤. 그것은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생선뼈다귀는 계속 그것에 끼어 있었다.
  좀 지치는군.
  결국 그것의 다리가 모두 너덜너덜 닳아서 못 걸을 즈음, 그것은 꼭대기에 도착했다.
  더 이상 계단이 없군. 그럼 여기가 꼭대기겠지?
  아마도.
  그것은 닫힌 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기다렸다.
  낮, 그리고 밤. 다시 낮. 다시 밤. 며칠이 지나고, 문이 열렸다. 염소수염을 기르고 배가 나온 노인이 나타났다.
  실례지만, 혹시 여기가 꼭대기입니까? 그리고 당신이 장인이십니까?
  오.
  노인은 그것을 보았다.
  여긴 꼭대기가 아니란다.
  그것은 실망했다. 이제는 더 이상 기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 뒤편으로 또 다른 계단이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은 장인에게까지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난 장인이라고 불리지.
  그것은 안도했다. 이제는 더 이상 기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것은 장인에게까지 온 것이었다.
  16세기에 태어나서 18, 19세기쯤부터 그런 이름으로 불렸지. 아마도. 좀 기억이 희미하군. 그래, 무슨 일이지?
  왜 제가 파본인지, 왜 제가 파본으로 태어났는지 알고 싶어서요.
  흠, 그것, 어려운 질문이구나.



  글은 여기에서 끝이다. 소녀는 의자 밑에서 주섬주섬 휴대전화를 주워든다. 머뭇머뭇 숫자를 하나하나 누른다. 매너모드에 억눌린 전화기는 버튼이 틱하고 눌리는 단조로운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기억에 의지해 10자리 수를 완성해나간다. 소녀는 친한 사람들의 연락처는 휴대전화 메모리에 맡겨두지 않고 외워둔다. 통화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려놓고 잠깐 심호흡을 한다. 꾹― 필요이상으로 길게 통화를 누른다. 액정화면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림이 나타난다. 0:01, 0:02, 초세기. 유행한다는 컬러링 하나 없이, 뚜― 뚜― 하는 단순한 신호음이 울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에― 그러니까, 희진이구나.”
  소녀는 살짝 안도한다. 소녀는 전화를 걸 때마다 어떻게 운을 떼야 좋을지 막막하다. 저쪽에서 먼저 알아들어준 것에 안도한다.
  “응. 어떻게 지내?”
  “뭐 나야. 대학도 방학이고. 집에서 책이나 붙잡고 뒹굴거리고 있지. 요새 말로 방굴러데시라고 하던가. 무슨 일이야. 연락 안 하던 녀석이.”
  소녀에게는 그 말이 조금 탓하는 것처럼 들린다.
  “평소에 연락 안 해서 미안. 음, 그런데 선배가 저번에 쓴 글 말인데….”
  다소 험하게 써온 LP-8200의 통화감은 약간 멀다.
  “어떤 거 말하는 거?”
  귀에 휴대전화를 밀어붙이다시피 하며 목소리를 잡아낸다.
  “왜, 그 교지에 낸다고 쓰고서 결국 안 냈던 거. 파일 제목에 ‘파본 이야기’라고 달려있는 거.”
  “응, 뭐라고? 아, 그거….”
  “그 이야기 완성된 걸로 있어?”
  “너한테 완성본 없어?”
  “응. 내 건 도중에 끝나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
  “그러니까… 파본이 계단을 다 올라가서 만나서 질문을…….”
  “아, 거기인가. 뭐, 알았어. 메일로 보내줄까?”
  황급히 대답한다.
  “아니. 저….”
  컴퓨터 화면은 어느새 검은 바탕에 윈도우 로고가 떠있는 화면보호기로 전환되어 있다. 벽을 타고 기어가는 붉은 개미에 시선을 준다. 덤으로 파리 한 마리가 창틀을 기고 있다. 귀에 울리는 유리 깨지는 소리를 떨쳐내듯이 말을 내뱉는다.
  “지금 만날 수 있을까?”
  “응? 뭐…. 그러지. 그럼…”
  대강 시내 편의점 한 곳에서 약속을 정한다. 앞으로 30분. 소녀는 화장실에 가 거울 앞에서 얼굴에 묻어 있는 잠을 대강 씻는다. 어째서 씻어야 하는지 같은 건 따지지 않는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자고 일어나면 얼굴을 씻으라고 배웠을 뿐이다.
  소녀에게 선명한 기억은 무언가의 일로 혼날 때뿐이다. 무언가가 나머지 투명 수채화 같은 즐거운 기억들을 죄다 불투명한 색으로 덧칠한 건지도 모른다. 세수를 하며 머리카락이 목 뒤에 조금 있는 화상 흉터를 가리도록 잘 정리한다. 오른쪽 귀 뒤쪽에 있는 꿰맨 자국도 한번 만져 본다. 소녀가 어렸을 때, 집 부엌에서 작은 불이 나서 이 상처를 입었을 때의 기억도 약간의 통증과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혼내는 어머니의 모습뿐이다.
  소녀는 검은 구두를 골라 신고 집 밖으로 나온다.
  소녀는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벽에 붙어있는 벌레 시체 자국들의 숫자를 센다. 모기 한 마리. 파리 한 마리. 파리는 좀 드문 일이다. 모기 두 마리. 하루살이 한 마리. 모기 세 마리. 하루살이 두 마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룩들도 많다. 아무래도 모기가 가장 많은 것 같다. 녹색으로 불이 들어와 있는 비상구 표시가 보인다. 그 안에서 하얀 사람이 뛰쳐나오려고 하지만, 움직이지 못하고 그 안에 정지해 있을 뿐이다.
  생태계의 균형을 운운하며 벌레들을 다 죽이면 안 된다는 사람들도 모기들은 다 죽이고 싶어 하겠지. 하지만 모기약을 팔기 위해서라도 모기들을 완전히 박멸하는 일은 없을지 몰라.
  소녀는 계속 걸어간다. 문득 걸음을 멈춘다. 바닥에는 얇고 반투명한 날개가 구겨져 있다. 주름 잡힌 동체에는 별 손상은 없어 보인다. 여름이면 창틀에 쌓인 어제, 하루살이들처럼, 일상적으로 흩어져 있는 죽음들 중 하나를 바라본다. 조금 전에 벽에 덕지덕지 도배되어있는 그런 죽음들을 일일이 세면서 지나쳐왔듯이. 적자생존. 인형이 살아남는 세상.
  잠자리들을 멸종시키지 않는 목적은 아이들에게 붙잡히게 하기 위한 걸까.
  소녀는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옷을 입고 골목길을 지나간다. 갑자기 소녀는 걸음을 멈췄다. 머리 위로 무언가 동물 같은 것이 휙 지나가는 듯한 기척. 소녀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본다. 하얀 달이 슬쩍, 구름 사이에서 턱 끝을 내밀었다. 소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큰길로 나오자 갑자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소녀는 조금씩 젖어간다. 간판들과 상호들이 소녀 곁을 떠다닌다.  전봇대에는 전단지들이 간판을 대신하고 있다. 전파사, 철물점, 다방, 편의점, 병원, 미용실, 배관공, 동물병원……. 다시 걸음이 멈춘다. 25시. 사랑하는 동물. 가족 같은 동물―. 상투적인 선전문구가 유리벽에 스티커로 붙어있다.
  약간 걸음을 재촉하다보니 커다란 역 간판이 보인다. 마침 기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요란한 소리가 역 밖까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002한일월드컵 공의 모습 위에 글자가 빛난다. 역 광장을 간판불이 조금 어둡게 밝히고 있다. 간판에 박혀있는 공이 비에 가려서인지 희끄무레하다. 사람들의 숨소리가 그 아래를 지나다닌다. 낮에는 조금은 더 선명했을 것이다. 검은 그림자 몇이 저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
  소녀는 사거리에서 하얀 줄무늬 횡단보도를 건너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검은 아스팔트는 찻길인 것 같아서 하얀 선만 밟는다.
  옷가게, 병원, 이런 저런 간판불빛들이 희미하게 지나간다. 시내라면 여러 번 돌아다녀봐서 머리보다 걸음이 알고 있다. 이쯤, 하면서 고개를 들면 알고 있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 앞에 노란 간판이 보인다. 비는 그쳐가고 있다.
  편의점에 들어서도 종업원은 특별히 인사를 하지 않는다. 편의점 안에서는 이미 그 사람이 와있다. 여전히 긴소매 옷을 고집하고 있는 듯하다. 대학에 가더니 기르기 시작한 머리는 이제 어깨까지 온다. 그런 느낌이 소녀에겐 약간 낯설다. 그 사람은 컵라면을 한 손에 들고서 인사를 해온다. 소녀도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저런, 다 젖었네.”
  “선배도….”
  “뭐, 나야 항상 그렇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보자고 하구.”
  그 사람은 대뜸 그렇게 묻는다.
  “그냥 좀….”
  소녀는 진열대에서 삼각김밥을 하나 꺼내서 돈을 치른다. 편의점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는 것이 어딘지 이상하게 보일 것 같다. 점원은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선배.”
  “응?”
  “전에 말한 그 친구 분은 어떻게 하고 있어? 그, 디자인과에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한다던가.”
  “뭐, 아직도 이래저래 불만이 가득하지. 자기가 왜 구걸을 해야 하냐면서.”
  “에에.”
  “구걸이라. 결국 회사 입장에서 사원이란 것도 일종의 상품 아니겠어. 채용해서 잘 쓸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니까. 카탈로그랄까 광고랄까. 그런 게 입사원서나 이력서의 성격이겠지.”
  컵라면에 나무젓가락을 담그며 말을 잇는다.
  “소비자는 상품을 소비하지만 가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소비자의 구매력이야말로 역시 일종의 상품일지도 모르겠네.”
  “…….”
  소녀는 잠깐 동안 말없이 삼각김밥을 먹는다. 참치마요네즈맛이 부드럽게 혀에 닿는다. 비에 젖은 옷이 몸에 차갑게 달라붙는다.
  “선배는, 대학 들어갈 때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썼어?”
  “자기소개서라…. 너도 그럴 때인가 그러고 보니.”
  후루룩. 라면을 입안에 넣는 소리가 잠깐 말소리를 가로챈다.
  소녀는 그 사람에게 어중간한 감정을 품고 있다. 존경하는 언니라는 느낌일 수도 있고, 동류의식일 수도 있다. 다만 소녀에게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을 삼순이라고 부르지 않는 몇 안 되는 또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소녀는 드라마 주인공의 이름 같은 것을 별명으로 삼고 기뻐할 생각은 없다. 소녀는 단순히 김희진이라는 이름 때문에 김삼순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그 사람과는 고등학교 때 같은 동아리에 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인기드라마 때문에 소녀는 보통 삼순이로 불리고 있었다. 외모도 닮았다고 했다. 소녀의 어머니는 대학에 들어가면 성형수술이라도 하자고 하지만 소녀는 그럴 생각이 없다.
  “자기소개서라. 뭐, 자존심과의 타협이었지.”
  잠깐 삼각김밥을 먹으며 옛날 생각을 하던 소녀는 오른쪽 입술 끝만을 밀어올리고 말하는 그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대학 입맛에 맞는 사람처럼 비쳐지게 쓸 것이냐, 아니면 내가 쓰고 싶은 대로만 쓸 것이냐. 결국 뭣도 아닌 어중간한 자기소개서를 만들어냈지만. 하긴 애초에 대학을 간 것 자체가 자존심과의 타협이었으니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는 협박에 굴한 걸까, 난.”
  표정은 더욱 비대칭적으로 일그러진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든다.
  “선배의 그 이야기 자체가 자기소개는 될 수 없을까.”
  그 사람은 그 말을 듣더니 놀라는 기색도 없이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 대학교에서는 보통 부정적인 자기소개서는 싫어한다고 하던데. 뭐, 다 그런 것이려나.”
  “역시 상품 소개, 란 건가…. 그럼, 대체 우리는…”
  그 사람은 응, 하며 소녀의 말을 자른다. 고개를 끄덕이고 라면을 마저 삼킨다.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엔 말야. 대학을 나오고서도 항상 주변에는 고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나름대로 자존심인 거겠지, 그게. 아직 취직도 못했지만 그래도 계속 서류에는 고졸이라고 내고 있어. 그게 공문서 위조로 걸릴 일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
  “그게 언제까지 갈진 모르겠지만. 난 영원히, 굶어 죽더라도,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 그 사람도, 그리고…”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서 소녀를 보지 않는다. 눈앞의 허공을 바라보는 가는 눈매 속에서, 컵라면을 들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있는 모습에서 조금 어두운 냄새가 난다. 그 사람은 이제 혼잣말을 하고 있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소녀는 그 사람의 목이 길다는 걸 새삼 느낀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 그 사람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예전에도 종종 들었다는 게 기억난다. 소녀는 무심코 자신의 가느다란 목에 손을 가져간다.
  편의점의 에어컨 공기가 춥게 느껴진다. 비에 젖은 몸이 살짝 떨린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옷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비는 그쳐 있다. 소녀는 거리를 걸어오며 가로등과 간판들에 의지해서 글을 읽는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더니 어느 한 층에서 멈췄다.
  그 층에는 커다란 방 하나만 있었다. 커다란 창문이 있었고 의자와 책상이 하나씩 창가에 놓여 있었다. 노인은 그것을 책상 위에 두고는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봤다.
  완벽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그것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결점이 없는 것이겠죠.
  보통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러나 결점이 없는 것은 결점이란 요소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완벽하지 않은 것 아닌가?
  생선뼈다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완벽한 체제를 위해서는 파본과 같은 완전하지 못한 요소가 필요하지. 그래, 자네는 자네 친구인 그 생선뼈다귀처럼, 우리의 소비자들에게는, 체제에는 별 쓸모도 없는 물건이야. 그러나 그런 쓸모없는 물건, 잘못된 물건이 있어야만 체제는 완벽해지는 거라네. 고유의 가치 같은 게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건 우리가 알 바 아냐. 자네는 무가치한 것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만들어진 거야.
  그것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우리는 일부러 완벽한 체제에 반(反)하는 존재들을 만들지. 아주 조금. 그것이 시스템을 완벽하게 할지니. 완벽이란 모순된 것이지.
  그것은 조용히 노인의 깡마른 얼굴을 바라봤다. 뱃살과는 대조적인 얼굴을.
  창문 하나가 갑자기 검게 변했다. TV로 변한 창문은 1층 인쇄소의 한 구석인 듯 보이는 곳을 비췄다. 그곳에서는 기계들이 종이를 삐뚤빼뚤하게 자르고, 책의 한 면을 찍지 않고, 글자를 뭉개가며 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래, 자네는 일부러 파본으로 만들어진 거야.
  창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대량으로 똑같은 책을 찍어내지. 그리고 거기에 약간의 변화를 줘. 일단 요즘은 보통 좋은 지질에 화려한 표지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네처럼 수수하고 옛날 느낌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지. 그건 단지 취향을 맞춘다는 걸까. 그것만으로는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아. 파본을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별로 없지만, 그런 좋아하지 않는 물건도 있어야 다양성이 있는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하는 걸세.
  그것은 생각을 하는 듯 잠시 침묵하더니 답했다. TV 속에서는 변함없이 파본이 생산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군요.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밖으로 나갈 텐가? 자네 같은 무가치한 책은 이 출판사에 있어선 소용이 없으니. 아, 이젠 걸어갈 수 없겠군…. 그럼, 자, 안녕히 가게.
  노인은 그것을 창밖으로 던졌다.
  오래간만에 즐거웠다네.
  노인의 작별인사를 뒤로 하고 그것은 비에 젖으며 떨어져 내렸다. 오랜 시간을 낙하해서 그것은 땅에 닿았다. 그것은 이미 죽은 책이었기 때문에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종이가 비에 점점 더 젖어갔다. 싸구려 종이에서 잉크가 번져갔다. 생선뼈다귀는 떨어지면서 어딘가로 튀어나갔다. 검은 물이 흘러내렸다.
  비에 불은 종이가 자동차 바퀴에 산산이 찢어졌다.



  소녀는 글을 다 읽고 씁쓸하고도 묘한 기분을 느끼며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잊고 있던 귓가의 유리 깨지는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현기증은 점점 심해진다. 손가락의 상처가 아파온다.
  비를 맞았기 때문인 걸까.
  어두운 골목길.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문득 그 사람이 해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래, 요즘 도시전설이랄까. 그런 괴담이 유행하는 것 같더라.
  너무나도 현대적인 괴담. 요약하자면 하나는,
  요즘 주택가에서 자주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는 아이가 울고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 아이의 울음소리에 무슨 일이 있나 나오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쳐놓은 함정이다. 이 시대는 그런 사람들을 제거해가며 이루어진 것이다. 그 증거로 목이 쉬도록 온종일 짖던 동네 개들은 하나하나 없어지고 있다. 개들이 고양이를 쫓아내기 때문이다. 어둠을 짖는 개들은 하나하나 잡혀나가고, 갇혀나가고, 죽어나가고 있다.
  라는 것이다.
  소녀는 몸을 떨게 만드는 오한을, 서늘한 느낌을 애써 잠재워보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괴담이라기보다는….
  다른 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도시의 빌딩 숲에 사는 현대판 모글리가 있다는 소문. 마치 도둑고양이나 떠돌이 개처럼 먹을 것을 구하며,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도시에서 야생적으로 살아가는 고아의 이야기.
  이 이야기라면 소녀도 예전에 친구들에게서 들어봤다.
  슬프다고 할까, 무섭다고 할까. 진열장 속에서 꿈꾸는 낭만일까.
  갑자기 소녀는 걸음을 멈췄다. 머리 위로 무언가 동물 같은 것이 휙 지나가는 듯한 기척. 소녀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본다. 하얀 달이 슬쩍, 구름 사이에서 턱 끝을 내밀었다. 소녀는 비를 맞은 뒤 몸이 안 좋기 때문인지 심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그 사람은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한 걸까.
  소녀는 다시 밤길을 걸어간다. 아파트가 보인다. 쓰레기장이 보인다. 달이 제 모습을 다 드러낸다.
  그리고 쓰레기장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림자 하나가 보인다.
  그림자는 쓰레기 속을 뒤적거린다. 소녀는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붙잡고 애써 숨소리를 내지 않으려 한다. 소녀는 걸음을 멈추고 멀리서 그걸 바라보고 있다. 소녀는 자신이 얼마나 그렇게 서있었는지 휴대전화시계로 시간을 확인해보고 싶지만 달빛과 그림자는 소녀를 굳어진 그대로 못박아둔다.
  그림자는 한참을 부스럭거린다. 마치 느릿느릿 춤을 추듯이 쓰레기봉투 사이를 돌아다닌다. 건물 그림자에 가렸다가, 다시 나타났다가, 그런 움직임이 반복된다. 그림자는 때론 어딘가를 향해 손짓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주위를 살펴보는 것 같기도 하다.
  달이 구름 사이로 숨었다. 갑자기 그림자가 사라졌다.
  소녀는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한참 후에야 주위를 살피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본다. 가슴은 계속 두근거리고 있다. 두근거리는 것에 비례하여 현기증이 심해진다. 걸음도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 그림자가 소녀가 상상 속에서 본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있던 것인지 소녀는 알 수 없다. 쓰레기장의 쓰레기봉투들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지만 그것이 어떤 짐승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다. 쓰레기들 속에서, 소녀는 자신이 버렸던 접시 조각들을 발견하고는 허리를 굽힌다. 그 조각들을 집어 올리는 손은 두근거리는 가슴에 맞추어 떨린다.
  소녀는 그 조각 몇을 들고 집에 돌아온다. 아무도 없는 집에 초인종을 눌러본다.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
  들끓는 이마 속에서 단어들이 흘러간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방바닥에 조각들을 던져 놓는다. 작게 울리는 소리. 가슴은 계속 두근거리고 있다.
  소녀는 자신의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해본다. 잘 되지 않는다. 소녀가 초경을 하고 까닭모를 수치심을 느낄 때보다 더 두근거리는 가슴. 중학교 때 짝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었을 때보다 더 두근거리는 가슴. 어질어질한 머리. 아픈 손가락. 차가운 몸. 큰 옷.
  소녀는 가만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접시조각 중 손바닥만한 것 하나를 들어 벽에 던진다.  조각은 더 작은 조각들로 부서진다. 소녀는 접시 조각들을 부순다. 숨이 가빠지려는 걸 애써 억누르며 서두르거나 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부순다. 건조대에 있던 접시도 두세 개 꺼내서 깨뜨린다. 접시 조각들이 사방으로 튄다. 접시에 그려져 있던 꽃들은 소녀의 손길에 다 꺾여버린다. 갑자기 기억난 듯 문 밖으로 나가서 비상구 표시도 발로 차서 부순다. 그 안의 사람이 그제야 뛰쳐나온다. 다시 방에 돌아와서 접시를 부순다. 조용하고도 차분하게. 그렇게 한참 유리를 잘게, 잘게 조각낸다.
  길게 숨을 내쉰다.
  지친 소녀는 방에 들어가서 피가 흐르는 손으로 그 사람의 글을 컴퓨터에 타이핑하기 시작한다. 소녀는 그 결말을 고쳐버릴 생각이다.
  소녀는 오늘 그 사람이 한 마지막 말을 상기하며 자판을 두들긴다.
  “한 시인이 이렇게 말했지.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노인은 그것을 창밖으로 던졌다.
  그러나 그것은 떨어지던 도중에 아래층 창틀에 걸려 건물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 방에는 난로가 피워져 있었다. 그것은 생선뼈다귀에게 무어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생선뼈다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약간의 조각을 비틀어 난로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비록 비에 조금 젖은 종이였지만 불은 잘 붙었다. 그것은 불이 붙은 채로 난로 밖으로 굴러 나왔다.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출판사는 며칠 동안 불탔다.



  소녀는 자기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아 방바닥에 눕는다. 붉은 개미 몇 마리가 소녀의 팔다리로 기어오르는 간지러운 느낌을 어렴풋이 느낀다.
  예, 선배.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에요.
  한참 뒤, 소녀의 부모님이 들어와서 온통 흩어져있는 접시 조각들을 보고 뭐라고 외치는 것이 들려온다. 하지만 소녀는 또렷하지 못한 의식으로, 다만 귀울음이 들려오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계속 누워있을 뿐이다. 소녀에게는 역시 큰 옷을 입고서, 쓰러져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