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공현 2008. 1. 12. 17:24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 포함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처럼 그 어원에 대한 학설은 매우 다양하다. 생각할 思(사)와 부피 量(량)을 합친 ‘사량’에서 사랑의 어원을 찾는 학설로 비추어 보면, 사랑은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양으로 정의해 볼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은 사랑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건 대상에 대한 생각으로 사랑은 이루어지고, 완성되어간다. (그러나 단순히 생각하는 양 자체로 사랑을 정의하기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또 다른 학설은 불사른다는 뜻의 ‘살’과 명사파생접미사 ‘앙’의 합성어로 사랑을 보는 관점이다. 사랑을 일종의 불타오르는 감정으로, 우리에게 있어 가장 보편적인 이성간의 사랑을 개념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영문인 'love'는 기쁘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인 ‘LUBRE'에서 시작한다. 사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감정에 대해 중점을 둔 말로서, 사랑으로 기쁨이라는 감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대해 단순히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내가 무언가와 관련하여 기쁨을 느낀다는 것만으로 사랑을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기쁨을 얻었다고 해서 그 음식을 내가 사랑한다고 하기도 어렵다.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어떤 존재를 그 자체로서 온전히 긍정하는 감정이나 태도라 할 수 있다. 긍정이란 사전적으로 이야기하면 무언가가 그러하다고,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대상에게 어떤 당위(“그래야 한다.”“그래선 안 된다.”)를 요구하지 않고 그 대상이 실존하는 그대로를 옳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서의 긍정은 단순히 수동적인 “그렇다.”는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지지이자 지원이며 주는 것이고 돕는 것이다. 또, 긍정을 하되 온전히 긍정한다는 것은 그 존재를 수단인 동시에 목적으로 존중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온전한 긍정인 사랑과 부분적이고 수단적 긍정인 ‘욕망’, 또는 소유욕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종종 듣게 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잘못된 사랑은 사랑과 욕망을 혼동하는 데서 온다. 욕망은 사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물건을 좋아하듯이 사람을 좋아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다. …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타인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리면 한갓 욕망에 떨어지게 된다. 성숙한 사랑은 언제나 타인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김상봉, 『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도서출판 길, 2005, 264-265쪽.)


  이와 같은 긍정의 행위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발현된다. 첫째, 사랑의 대상이 인간인 경우, 사랑은 보통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다. 긍정한다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을 지지하는 것이며, 인간의 목적 ―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좋은 것”은 “행복”이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굳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행복을 추구한다고 간주될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에 적용된다. 둘째로, 어떤 추상적인 대상을 사랑하는 경우는 곧 그 추상적인 것의 실현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진리나 자유를 사랑(긍정)하는 것은 진리나 자유라는 추상적·이상적 존재의 구현을 바라는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존재는 결국 특수한 맥락 안에서의 개별적 구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는 등의 형태로 표현된다. 음악이라는 보편자는 근본적으로 구체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작곡자나 연주자)과 그것을 듣는 청자가 있어야 성립하고 실현되기 때문에 그 둘 중 어느 쪽을 맡더라도 음악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사랑의 정의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자면 사랑은 ‘무언가/누군가를 긍정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감정이나 태도’이다. 즉,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 또한 행복해하는 것이며 이상이 구현되는 것을 통해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이다. 사랑을 정의할 때 자기 자신의 행복 또한 포함시켜야 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체성과 개성, 자신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1996, 28쪽.)이기 때문이다. 즉 맹목적으로 자신을 부정하고 희생하는 태도 또한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랑’을 정의하면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는 매우 넓어진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애정이 지나쳐 강요와 속박이 되어 자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는 그 애정이 상대의 주체성을 존중하지 않는 일그러진 욕망으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사랑도 이와 같은 정의로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의 경우 자살을 죄악시한다. 이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성경 창세기 1장 31절)에서 독해할 수 있듯이 기독교의 신은 자신의 피조물 그 존재 자체에 좋아하고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할 일만 해야 한다는 논리다. 기독교와 달리(실은 기독교에서도 때때로), 예를 들어 간디와 같은 경우, 신을 인격체가 아닌 추상적인 존재로 이해한다면 신에 대한 사랑은 그 신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이 추상적 존재로서의 신을 자신 안에, 그리고 세상에 구현하는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혹 연인 간의 질투 등을 들어 이와 같은 단순한 정의를 비판하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다시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고자 하는 것을 구별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사랑받고자 하는 감정이 종종 결합된다는 것만으로 사랑의 정의에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을 포함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고자 하는 것은 분명 별개의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상황에 따라 결합되기도 하고 결합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은 자기애의 외화라고 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너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너는 이런 나를 인정하지 않는 건가?” 연인 사이의 관계에서 이런 것이 종종 관찰되나 연애감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 둘이 함께 있으리란 법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그 사람을 떠난다는 식의 이야기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곧 이 둘의 결합에는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으나 필연성은 없다. 사랑받기 원하는 감정은 근본적으로 자기애의 작용에 뿌리를 두는 부수적인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이 있다. 연인 사이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 가족 사이의 사랑,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 물건에 대한 사랑, 추상적 개념에 대한 사랑 등 그 수많은 것들을 모두 ‘사랑’이란 개념으로 묶기 위해서는 사랑도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의 정의에 대해 많은 이견(異見)이 있겠으나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한 것은, 사랑은 긍정/부정의 틀에서는 긍정의 감정이라는 것, 그리고 긍정 중에서도 단순히 수단적인 긍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건, 자신을 온전히 내주고 싶은 마음이건, 어떤 것의 실현을 추구하는 마음이건 그것이 무언가를 수단인 동시에 목적으로 긍정하는 마음이라는 점은 공통된 것일 터이다. 사랑은 어떤 존재를 온전히 긍정하는 감정이나 태도라는 정의라면, 비록 모호하게 보일 수 있을지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이라 일컬어지는 감정과 태도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