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꿈

조계산 안개 속을 뚫고 생환

공현 2009. 5. 14. 00:06


순천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갔었다.

(강연 전에 동천에서 바람과 데이트를 하다가 동천에 한 발이 빠지기도 했다 -_-;;;)
 


뭐 강연은 적당히... 어느 정도 잘못된 정보와 예상으로 인한 문제들이 있긴 했지만 큰 무리는 없이 끝냈다.

(갈수록 강연 기본 스킬도 느는 것 같다. 안정적으로 잘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참에 하루 이틀쯤 놀다 오려고, 순천에서 하루밤 자고 다음날에 선암사-조계산-송광사 코스를 갔다.
아침에 합류한 누리도 포함해서 3명. 아침부터 비가 내려서 길이 순탄치 않을 것 같았지만, 빗발도 약했고 선암사까지 가니까 비가 그쳐서 그냥 가기로 했다.

하얀 꽃들이 뭉쳐서 피는 꽃나무를 보면서 이게 무슨 꽃일까, 벚꽃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는데 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암사에 지나치게 많이 걸려 있는 연등이 좀 부담스럽다는 생각과...
바람의 여고 시절 땡땡이의 추억들을 들으며

선암사까지만 해도 참 좋았는데-




선암사 다음에 송광사로 가는길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게...

작은굴목재로 가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새로 조성된 생태야외학습장인지 뭔지...

가는 새로 만든 거 같은 넓은 길로 빠져서- 거기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큰굴목재라는 데로 빠졌는데, 이게 도저히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수 있는 코스가 아니다. 본격 산행. 암벽등반까진 아니지만, 경사도 심하고 바위 투성이...
대체 이 큰굴목재가 송광사 가는 길이 맞긴 한 건지, 그리고 우리가 그 중간에 목표로 하고 있는 보리밥집을 거치는 건지 긴가민가하면서도 걷고 또 걸었다. 대체 왜 이쪽 길은 이정표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건데?

그렇게 점점 올라가다가보니 높이는 높아지고...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꿈꾸는 것 같은 산행...이라고 말하면 굉장히 멋있겠으나
매우 땀 나고 다리 아픈 산행이기도 했다.
특히 가장 체력이 떨어지고, 구두를 신고 온 바람은 계속 뒤쳐지는 게 매우 힘들어보였다.


어찌어찌 1시간이 넘게 걸려서 큰굴목재를 넘고, 보리밥집까지 이르렀는데
보리밥집들은 다 문을 닫았다 어째 -_- 아무리 두들겨도 아무도 안 나오고, 통화권이탈이라서 전화기도 안 터지고...
안개는 자욱하고... 보리밥집 세 개가 다 문을 닫아서 무슨 폐가 같은 느낌 =_= 그런데 집 밖에 있는 세숫대야에는 물이 졸졸 계속 흘러나와서 넘치고 있었다.

귀신에 홀린 느낌이랄까, 무슨 김전일 만화나 공포물의 한 장면 같은...



그래서 허탈한 마음으로(조금 허기진 마음이기도 했다.) 송광사를 향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때 시간이 3시 50분 정도.
남은 거리는 이정표에 따르면 3.7km.
약 2시간...

안개도 끼고, 비도 왔고, 산인 걸 감안하면 어두워지는 시간은 5시반에서 6시 정도.


어두워지면 비까지 내려서 미끄러운 이 산길을 내려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는 게 최우선 과제가 되어버렸다.
이때부터는(뭐 이전부터도 힘들었지만) 이건 뭐 여행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산타기...
안개가 자욱해서 10m 바깥도 보이지 않았고, 가져온 물도 다 마셨다.
배가 고파도 과자를 먹으면 목이 메이니까 박하사탕을 먹으며...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


평소라면 거의 30분 걸릴 거리를 20분만에 가고,

"조계산인 요산 점수생 인오"(이 사람이 세워놓은 설명판 같은 게 여기저기 세워져있다. 요산이라니, 스스로 인자(仁者)라는 건가?  * 누리한테 당당하게 지자요산 인자요수라고 했는데, 사과한다. 인자요산이 맞다 -_-)라는 사람이 써놓은 이정표에는 25분 걸린다는 거리를 18분만에 주파하는...

나름 목숨을 건 산행이었다 -_-;;

왠지 다리도 아픈데, 어깨도 아프더라.
다리에 쥐가 날 것 같다는 예감이 퍼뜩퍼뜩 스쳐지나가고, 쌓일대로 쌓인 젖산에 다리 근육이 이완되지 않는 걸 몇번이나 느꼈지만, 그런 위기의식 덕분인지 쥐 한 번 안 나고 산을 다 내려왔다.

생명의 위협도 위협이었지만,
무슨 지리산이나 설악산도 아니고, 장마철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데,
조계산에서 조난 당했다고 하면, 살아돌아가더라도 그건 또 얼마나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까 하는 마음에 필사적이었던 것도 같다.
근데 정말 그 안개 속에서는 우리가 살아서 오늘 안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퍼뜩퍼뜩 했다.



그렇게, 송광사 뒤쪽 경내에 도착했을 때가 5시 20분경.
송광사 바깥쪽으로 나온 시간이 5시 40분 정도였다.



송광사 바깥쪽 풍경. 여기에서 산채정식과 동동주를 먹었다.
생환 후에 먹는 밥이 얼마나 맛있던지...



밥을 다 먹고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서 순천 버스터미널 부근에 도착한 시간이 8시 20분 정도?
원래 기차라도 타고 서울로 곧장 오려고 했지만, 우리와 같이 한 누리가 해남을 가야 하는데(이 인간은 장기 남도여행 중.) 해남 가는 버스가 끊겼다고 해서, 그냥 셋이서 모텔에서 잤다.

모텔에서 미스 홍당무를 봤는데 재밌더라. 혹시라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리뷰.




여하간 그렇게 선암사-야외학습장-큰굴목재-보리밥집-송광사로 이어지는 코스를
거의 아무런 산행 준비도 없이, 비 내리고 안개 낀 날에 돌파한 것이었다 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