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청소년시국선언문에 대한 공현 개인의 정리 겸 비평

공현 2009. 6. 1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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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자.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고 가사노동은 여성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사회.
여성단체들이 독재적인 정권에 의한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며 시국선언을 발표한다.
그들의 시국선언문 중 일부이다.


"무엇이 우리를 부엌에서 뛰쳐나와 민주주의를 걱정하게 만들었습니까?"
"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과 직면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무거운 집안일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합니다."
"
우리는 순수한 여성들이고, 정치적 색을 띠지 않은 백색의 종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압니다. 진정한 민주정치가 무엇인지를요."


청소년시국선언문 을 보는 내 기분이 어떤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는가?
2차 수정 버전과 비교해본다면야 다른 단체들의 수정 의견을 받아들여서 상당부분 바뀌긴 했지만,
(2차 수정 버전에는 "우리는 이념이 뭔지 모릅니다. 아직 정치적 색을 띠지도 못한 그저 백색의 종이일 뿐입니다." "우리는 아직 어려 거짓 속에서 진실을 보기 힘들지만," 등의 표현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종안에도 내가 여성에 빗대어서 말한 저 세 개의 표현은 엄존한다.


그리고 또,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나 구절이 더 있다.

"그저 부모님이 주신 밥을 먹고 건강하게 학교를 다니면 그걸로 되는 줄 알았던 우리는 이제 ‘가진 자’ 와 ‘못 가진 자’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화합이나 상생이 아닌, 대립과 갈등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 알게 되면 좋은 것 아닌가?;; ㅡㅡ;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어째서 '민주주의'가 무너진 것인지,
그에 대한 설명도 해명도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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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청소년시국선언 페이지에 들어가면 자동 재생되는 동영상의 첫 마디는 이렇다.
"현 청소년들의 순수한 염원이 현 이 시국선언을 꽃피우게 했습니다. 청소년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는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청소년시국선언이란 행위는,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정치 활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시국선언문의 뉘앙스는, 청소년시국선언을 적극적 정치활동으로 의미화하기보다는,
정치 활동이 아닌 윤리 활동으로 의미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행위는 정치색을 떠난 것이요, 사상을 떠난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윤리적 선의 실현을 위한 것이다. 순수한 것이다.
(순수하다는 강조는, 순수와 비교되는 불순한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불순한 것은 무엇인가?)
오, 물론 정치는 윤리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정치는 윤리와 다르다. 밀가루와 라면이 분리될 수 없지만 다르듯이.
정치는 논쟁 가능하고 상대적이며 공공적이다.
윤리는 논쟁 불가능하고 절대적이며 사적이다.
(윤리적 사안이 논의되기 시작한다면, 그건 이미 원칙적으로는 정치의 영역이고 대상이다.
* 인권담론에는 윤리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는 인권들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실천은 정치적인 것이다.)

청소년시국선언 내용 작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분들은, 청소년시국선언에 대해서 비난을 보내는 우파들에게 반발할 것이다. 청소년은 꼭두각시가 아니라 주체적인 존재이며 스스로 행동하는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저 시국선언문의 내용과 뉘앙스에 100% 동의한다면, 그분들의 주장은 곧 한계에 부딪쳐 돌아설 것이다.

그분들은 청소년들이 '특정하고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사회/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상황에서는 사회/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학업에 매진하는 게 옳다고 말할 것이다.
그분들은 이 사회에서 '윤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설지언정, 이 사회의 '윤리'를 바꾸는 '정치'에 나서는 일은 반대할 것이다.

다음 문장의 모순어법을 이해하신다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청소년은 꼭두각시가 아니고 교과서에서, 학교에서 배운대로 사는 존재이다!" (????????)
"청소년은 꼭두각시가 아니라 백색의 종이이다!" (???????????)
"청소년은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순수하고 선량한 국민이지만 정치적 주체는 아니다!" (?????)


b
내가 청소년인권운동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또 작년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확고하게 정리한 생각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항일독립운동이든 민주화운동이든 미군장갑차 사건이든 광우병쇠고기 문제든
무슨 사회적으로 커다란 건수에 대해서 참여해서 목소리를 열심히 내는 것만으로는 청소년들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직접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회적 지위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실천은 평가절하되거나 다르게 받아들여질 뿐이다.

그것은 '나이가 20세 미만인 어느 국민들'의 민주주의일지언정
청소년의 민주주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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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시국선언임에도 '시국'의 내용으로 청소년들의 상황이 포함되지 않은 것 또한 서글픈 부분이다.
이는 이 선언 내용 작성을 주도한 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의 상황을 '시국'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명박 정부 이후의 '시국'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었다면 이명박 정부 이후의 변화된 청소년 상황에 대해 썼으면 될 문제인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청소년들의 문제는 '시국'으로 포함될 수 없다는 내면화된 차별적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사소한 문제와 큼직한 문제, 사적 문제와 공적 문제의 구별-차별이랄까.

미림 씨가 쓴 시국선언 논의 게시판에 쓴 글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하지만 반대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선거권이나 두발문제는 따로 다뤄져야한다. 이번 선언은 현 정권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것에 강력한 비판 메세지가 담겨야한다"
는 것이였고 만약 이부분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선언을 동참하신 단체나 개인분들이
선언하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처음 초안에는 들어가 있던 청소년 선거권 내용이 빠지는 것에 대해
한 청소년이 비판하는 글을 게시판에 올리면서,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내용은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거기에 김용제님(시국선언문 작성에 참가한 청소년)이 단 덧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명박의 폭압정치는 느끼는 정도의 차는 있지만 대부분의 깨어 있는 청소년들이 강한 반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부정하지 않으실거라고 봅니다.
반면에 청소년 선거권은 이치적으로도 한 쪽의 의견이 맞다고 확정할 수 없는 사안이며,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그 의견이 매우 분분한 사안입니다.



이 두 논리에 따르면 청소년들 관련 내용이 시국선언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다.

1. 청소년들의 상황은 민주주의나 반민주주의에 해당되지 않는다.
2. 청소년들의 인권/권익 문제는 '대부분의 깨어 있는 청소년들'이 동의하는 문제가 아니라 의견이 분분한 사안이다.

... 참, 이 둘 다 서글픈 말이다.
대부분의 깨어있는 청소년들이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깨어있는'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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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에 대해, 덧글들과 글들 등에서 나타나는 몇 사람의 태도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


우선, 이 시국선언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시국선언문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몇 명의 청소년들의 생각일 수는 있어도 시국선언에 동참한 3000명의 생각은 아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 시국선언문을 올려놓고 서명을 받았다면 3000명이 여기에 동의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초안과는 확 달라진 글이 시국선언문 최종안이 된 마당에 말이지.
더군다나 시국선언문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청소년들이면서도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게시판에서 적극 의견 개진을 했지만 제대로 논의도 되지 못한 경우들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게시판도 꼼꼼하게 살펴봤는데, 홍보가 많이 된 후반부에 이르기 전에는, 게시판에 올라온 의견들에 답하는 덧글을 단 사람들은 희망 아이디 아니면 시국선언문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이었다.
그 의견이 시국선언에 대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게시판에 올라왔지만 시국선언문에 반영되지 못한 의견들은, 3000명의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반영되지 못한 걸까? 아니면 시국선언문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몇몇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반영되지 못한 걸까?


아, 나는 이 시국선언문이 3000명의 것이 아니라고 해서 폄하할 생각은 없다. 여하간에 시국선언문이 현 상황에서 담고 있는 대체적인 정신과 방향성에 3000명이 동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문구 하나하나, 디테일한 표현 하나하나까지 포함해서 시국선언문 전체를 그냥 3000명의 생각이라고 포장하지 말았으면 할 뿐이다. 그냥 솔직하길 바랄 뿐이다.

중간에 시국선언문 내용이 전면 교체된 것은, 그냥 살만 붙인 것도 아니고 요구안도 다 바뀐 것은,
오히려 민주주의로 말한다면 절차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 어떤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알쏭달쏭하다.



그리고,
희망은 계속해서 시국선언문을 희망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의 참여로 썼다는 걸 강조하며 희망의 영향은 별로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희망이 처음 청소년시국선언을 제안하면서 올린 시국선언문 초안에 반영되어 있는 표현과 생각들, 그 코드들에 맞는 청소년들이 이 시국선언 운동에 모이는 게 자연스럽다는, 당연한 생각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실제로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던 청소년들이 시국선언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주저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시국선언문 초안의 내용과 뉘앙스 때문이었다. 운동은 제안자의 코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 나는 희망이 시국선언의 내용이나 뉘앙스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해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은 대변자이거나 판을 까는 사람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b

분명히 가장 좋은 모양새는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던 청소년 아니면 여하간 대략 이런 의견을 가진 중 누군가가 시국선언문 작성 공개 온라인 회의도 참가하고, 그 내부에서 수정안이 나오기 전부터 발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먼저 몇 가지 사정 설명을 하자면, 희망 사람이 아수나로 게시판에 청소년시국선언 제안을 한 시간은 6월 4일 목요일 밤 11시경이었다.
그리고 아수나로 서울지부는 6월 5일부터 서울인권영화제에 참가하고 있었고, 6월 6일이나 7일에 했어야 할 정기회의도 인권영화제에 다 같이 가기로 해서 1번 쉬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때문에 논의가 늦어졌고,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는 청소년 개인이 단체의 결정 없이 참가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인권영화제 가느라 + 희망이 제안하면서 올린 시국선언문 초안의 내용이 워낙 참가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라서 적극적인 참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개인이 게시판을 통해서, 그리고 시국선언문 작성 회의에 참가하는 다른 청소년들 중 일부를 통해서 의견을 전달하는 일은 있었다.)

단체라는 게 보통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진 못한다.
앰네스티 같은 단체는 무려 런던까지 연락을 해서 의견이 오고가고 조율이 된 후에야 입장 발표를 한다지 -_-;
뭐 아수나로가 앰네스티처럼 의사결정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급할 때는 긴급 결정 시스템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6월 4일 밤 11시에 들어온 제안을 2~3일만에 처리하지 못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일요일에 있던 아수나로 전체온라인회의에서 회의에서 물어봤을 때도, 내용상 좀 참가하기가 애매해서 지부별 논의도 필요하고,
내용이 대폭 수정되지 않으면 어렵다는 의견들이 많았고...

그러다가 아수나로 서울지부에서 겨우 회의를 하고 입장을 정리해서 글로 쓴 게 화요일(9일)이었다.

시간상 그냥 가만히 있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 마디라도 의견을 내는 게 옳다는 판단에 의견서를 올리고/보냈다.
(희망에서는 이게 청소년 전체를 대표하는 시국선언도 아니고, 다른 내용의 시국선언을 발표하시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만약 청소년시국선언이란 이름으로 선언이 발표된다면 이게 청소년 아니면 최소한 민주주의나 이른바 '진보/개혁'적 청소년들 대부분을 대표하는 의견인 것처럼 다루어지고 받아들여질 거라는 건 자명했다.)

이처럼 시간적인 문제로만 이야기한다면, 닷새전에야 시국선언 운동 제안을 한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 안 할 수 없기에,
굳이 시간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고 싶진 않다.



그러나 여하간에 그렇게 올린 의견서에 대해서 그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덧글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 글이 올라온 시점과, "이 수정의견에 동의하는 단체들과 사람들은 이와 같은 수정 의견이 받아들여질 경우 청소년시국선언에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습니다."라고 쓴 것에 대해서만 덧글로 논란이 있었다는 것도,
 참 서글픈 일이다.





#b

나는 청소년시국선언 운동에 동의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고생하고 준비한 분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저 현재 발표된 청소년시국선언문이 담고 있는 한계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한계들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후에 발표되는 청소년'시국'선언은 내게 덜 안타까운 것이길 바란다.
애초에 '시국' 선언이란 것 자체가 가지는 한계를 무시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