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고향

공현 2008. 1. 13. 22:41

고향

 (2005년 5월)


 고향이란 단순하게는 태어나서 자란 곳을 의미하지만, 고향이라는 한 마디가 지니는 함축적 의미는 그보다 더 크다. 근원, 원류, 바탕을 둔 땅, 가장 친숙한 곳…. 인간의 고향은 기본적으로는 10개월 가량을 자란 어머니의 자궁일 터이고, 또 자란 집, 자란 고장일 테지만, 사람들이 '고향'을 더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는 점은 곧잘 확인된다. 고향은 주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향을 결정짓는 데는, 거기에서 몇 년 살았노라는 객관적인 문제보다는 내가 그 곳을 어떻게 느끼는지 등, 주관적인 문제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평생을 한 곳에서 살더라도 그곳을 고향이라 말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렇듯 고향은 주관적인 것이며, 한층 확장되면 고향은 영적이다. 예를 들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를 읊은 천상병씨의 고향은 저 하늘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향수, 노스탤지어에 곧잘 지배당한다.

 이상을 추구하는 것, 이상 세계를 동경하는 마음도 향수와 같은 색조를 띤다. 노천명씨가 그리는 사슴을 예로 들자면,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보는 것은 이상지향적이지만, 그것을 잃었던 전설에 대한 향수라고 하지 않는가. 유치환씨의 푸른 해원을 향한 깃발은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아닌가. 사실 향수와 이상에 대한 소망은 친숙한 것(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것(미래)에 대한 소망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대립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분명 비슷한 색조를 띤다. 인간이 추구하는 미래란 결국 과거로부터 온 것일까? 그렇다기보다는, '현재가 아닌 것'을 지향하는 측면에서 볼 때 그것들이 같은 류일지도. 과거는 추억으로 덧칠되고 미래는 기대로 덧칠된다.



 예전에, 주민등록초본을 동사무소에서 떼어 왔는데 두 장이나 나왔다. 변덕스러운 행정구역 변동 - 지방의회가 평소엔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조례들 말이다. - 도 기록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이사를 다닌 기록들이다. 다른 여러 사정상 나보다 더 많이 이사를 다닌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널려 있을 것이다. 주민등록초본을 떼면 수 장이 나오는 사람들 말이다.

 아무래도, 그런 사람들은 고향을 잃기 십상이다. 나도 고향을 잃었다고 할 수 있으려나. 내 고향은 어딜까?

 처음 태어난 곳은 서울이며, 아주 어릴 때를 보낸 것은 서울이었다. 가장 토속적으로 산 것은 군산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 고등학교 1, 2학년을 보낸 곳이 익산이다. 그나마 가장 익숙한 곳, 가장 오래 산 곳은 익산이겠지만, 익산이라는 장소에 대해 어떤 애착 같은 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기차를 타고 익산을 지나칠 때도 나는 번번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곤 한다. 다만 익산에 살고 있는 사람 몇 명을 떠올리며, 마치 어린 왕자가 있어서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반짝이듯이 익산이라는 곳에 약간의 색을 입혀볼 수 있을 뿐. 그건 전주건 서울이건 마찬가지다.

 역시 관습적인 고향의 이미지와 연관지어서, 향토적인 기억들을 끄집어낸다면 그 기억들은 군산시 대야면 내덕리에 집중되어 있다. 볏단들을 쌓아서 논에 기지를 만들던 일, 소 똥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종종걸음을 치던 일, 레밍턴이라고 새겨진 에어건을 들고 참새를 잡겠다며 다니던 일, 개미들에게 둘러싸인 일, 집 뒤 대나무숲에서 대나무를 베어다가 칼을 만들던 일, 옆집 형이 맨발로 다니다가 대못에 찔린 일….  나는 도시와 농촌을 모두 겪으며 성장한, 뒤처진 사람들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대해서도 별 애착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지리적인 의미에서 고향을 찾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고향은 주관적인 것이라,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좋게 보자면 지역색이나 지역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도 되고, 나쁘게 보자면 연고지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다. 내 고향은 차라리 책들 속이거나 컴퓨터 통신망 속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극단적으로, 고향따위는 없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늘 아래 어디든, 내 마음에 드는 곳은 그 때 그 때 다 내 고향이라고 하기로 하자. 고향을 붙박아둘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 고향은 저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내 고향일까?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든다.



 산업화니 도시화니 핵가족화니, 하면서 이제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여하간 지리적인 의미의 고향이란 점점 사라져가는 추세다. 그에 따라 심리적으로 이런저런 문제들도 나타나는 모양이지만, 고향이 없어서 좋은 점도 있다. 잃은 것도 있고, 얻는 것도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고향에 얽매이지 않고 온 세상을 다 고향으로 삼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있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주민등록초본을 뗄 때마다 종이를 한 뭉치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낭비 같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