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나는 약자를 부정한다

공현 2010. 3. 20. 18:32




  '약자'라는 개념은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일단 거칠게 나눠보면 사회적으로 볼 때 객관적 조건상 약한 사람을 약자라고 하는 경우가 있고,(사회적 약자) 특정한 영역이나 분야에서 능력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밀리는 사람을 약자라고 하는 경우가 있고,(능력적 약자) 심리적 인간적으로 그 존재가 약한 사람, 그러니까 예컨대 자존감이 낮다거나 한 사람을 약자(심리적 약자)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셋은 현실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며 사회적 약자는 능력적 약자, 심리적 약자가 될 가능성이 높고 심리적 약자가 능력적 약자의 현상을 보일 개연성도 있으나, 그렇다고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는 것도 아님은 분명하다.

  우리가 "약자를 긍정해야 한다"라거나 "자신의 약자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보면 조건상 약자인데 그 자신의 위치에서 생각하지 않고 강자의 입장을 내면화해서 말하는 '존재를 배반한 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약자인 자신에 대해 자존감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를 부정하게 되는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약자이더라도 자신의 가치를 긍정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거나, 자신도 사회적으로 약자인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에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즉 이 말은, 내가 사회적 약자라는 현실을 직시하라, 내가 사회적 약자이지만 심리적 약자가 되진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강자이기 어렵다, 뭐 이런 류의 메시지를 담은 말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종종 기가 막힌 방식으로 전용되거나 기가 막힌 논리로 발전하고 만다. "우리 모두가 (심리적) 약자잖아. 서로가 서로 배려해야지." [우리 모두가 약자라는 말은 사회적 약자라는 뜻이지, 그게 우리 모두가 심리적 약자란 뜻도 아니고, 그게 우리가 서로 상처를 주는 것을 막는 근거가 되는 건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사회적) 약자잖아. 내가 잘 못하는 건(=능력적/인간적 약자인 건) 당연해.", "나는 (심리적) 약자인데 왜 나를 배려하지 않아?" 등등. 그런 말을 접할 때면 짜증과 함께 팍 드는 생각이, 약자를 긍정해야 한다는 말이 자신이 약자인 것을 정당화하는 게 될 수 없다 또는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세계와 마주하는 인간이 약하다는 건 그 자체로 부정적 의미이다. 약함은 무능이다. 생존이든 독립이든 자유이든 관계맺기든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약자에게 나를 약자로 만드는 조건(그것이 외적이든 내적이든)은 변화,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이런 말이 모든 인간이 완전하고 최고의 정점에선 강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님은 다들 아시겠으나.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이 약자임을 인식하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는 약자라고 하면 약자에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약자로 만드는 사회적 구조를 바꿈으로써 약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사회적 약자가 사회적 강자가 되려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현재의 사회적 룰 속에서 자기가 강자가 되는 방법이 있고(소위 스펙쌓기, 신분상승), 현재의 사회적 룰 자체를 바꿈으로써 모두를 강자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운동) 어느 쪽이건 자신이 현재 약자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시작하는 것이기는 한데, 뭐 내가 지지하는 건 후자이기는 하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그 전제는 심리적 약자에서 먼저 벗어나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능력적 약자에서도 최대한 벗어나는 것이 좋기도 하다. 약자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약자들은 사실 약자로 남고 피해를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까지도 든다.(별로 윤리적인 감정은 아니겠지만.) ─ 니체 철학이 딱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니체가 '약자의 도덕'을 비판하는 것에는 동의하는 측면이 있다.

  요는, 자신의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이 자기가 약자란 걸 좋아하게 되라는 말로 이해되는 건 잘못이라는 거다. 자기가 무능하다는 걸 자랑스러워하지 말라.
  어쨌건, 자신이 약자라는 건 자기가 좋아할 일이 아니다. 그 좋아할 일이 아닌 것의 성격은 사회적, 능력적, 심리적 차원에서 각각 다른 문제이긴 한데... 약한 것은 부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얘기하는 건 단지 부정의 방식에 대한 논의일 뿐이다.
  나는 약한 것을 부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