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Let me Introduce 청소년인권운동

공현 2010. 9. 28. 21:02


청소년인권과 청소년인권운동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쓴-

아니 정확히는 옛날에 쓴 글 두개를 편집해서 합친 다음에 마무리 부분만 새로 추가한 글;;



Let me Introduce 청소년인권운동


‘미성년자’라는 굴레


청소년들에게는, 법적으로 붙어 있는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미성년자”라는 이름입니다. 민법에서는 만 20세 미만, 청소년보호법에서는 만19세(사실상 연20세) 미만, 공직선거법에서는 만 19세 미만 등등으로 그 기준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소년들은 “미성년자”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요? 미성년자라는 말은 ‘아직 성년이 아닌 사람’, ‘아직 완성된 나이가 아닌 사람’, ‘미성숙한 나이의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이건 마치 장애인을 “비정상인”이라거나 “부족한 사람”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 같은, 괴악한 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별적인 말이란 거죠.

어떤 사람들을 “미성년자”로 이름 붙이고 “미성년자”로 대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미성년자”라고 불릴 때 그 사람들은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삶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다른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의 강요를 당해야 합니다. 학교에 다니며 교육받아야 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정치 참여 같은 문제에서는 전사회적 왕따를 당합니다. 그들은 학교의 교육과 가족의 보호․통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하니까, 성숙한 사람들이 그들을 때려서라도 잘못을 고치려 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항은 있을 수 없죠. 왜냐하면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이 항상 더 옳을 텐데. 그러니까 학교를 운영하든 자기 삶의 진로를 결정하든 정책을 결정하든, 그들은 쏙 빼놓고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들은 혹시 무슨 사고를 저지르거나 무슨 사고를 당할지 모르니까 밤에는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보호자의 허락 없이 돌아다니거나 외박을 하거나 하면 안 되죠. 돈을 주거나 돈을 벌 수 있게 했다간 잘못 쓸 수도 있으니까 조금씩조금씩 용돈만 주거나 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미성숙한 사람들이니까 일을 하더라도 그건 사회 경험을 하고 배우는 것이고, 돈을 조금만 주거나 좀 함부로 대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다.

미성숙한 그들을 사회는 ‘보호’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니까 혹시 책이나 그림이나 영화 같은 걸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잘못된 걸 따라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도 다 미리미리 금지해둬야 합니다. 성행위? 섹스하다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거나 하면 어떻게 책임을 지겠습니까? 당연히 다 금지해야죠! 그렇게 미성숙한 사람들에게 성욕이나 성적 자유?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특히 한국에서 더 두드러지는 건데, 그들에게는 한 가지 더 무거운 짐이 지워집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이라는 짐이죠.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미성년자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인재’로 만들기 위해서, 경쟁은 옵션이 아닌 필수입니다. 한국처럼 먹고 살기 힘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청소년들의 현실이 바로 청소년인권 문제입니다. 그래서 청소년인권 문제로 가장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들이 학교와 가정에서의 문제이고, 그에 더해서 노동, 정치, 문화 등의 분야들이 다루어집니다.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미성년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차별과 폭력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이고,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청소년들을 선도해야 한다.’라는 인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동, 청소년들의 인권 담론도 세계적으로 보면 보통 이들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에서, 아동 청소년들이 인격체로 존중받고 참여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동보호나 청소년보호 담론과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사이에 긴장 관계가 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청소년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청소년들의 인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어른들의 편견이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고 모순라며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한국의 청소년인권운동


한국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은 주로 학교와 교육에 관한 저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딱 청소년인권운동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청소년들이 사회에 저항했던 몇몇 대표적인 사건들을 살펴봐도 그러합니다. 1920년대 30년대의 학생들의 항일운동 속에 같이 끼어 나왔던 식민지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나, 1980년대 중후반에 학생회장 직선제를 외치고 보충수업철폐를 외치고 학교민주화를 외쳤던 중고등학생들의 운동이나 대체로 그 문제의식은 학교와 교육제도를 향해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들(일제강점기의 식민지 문제, 군사독재와 민주화 문제, 노동자와 철거민 등 계급문제 등)들이 밀접하게 결합해있기는 하지만요.

1990년대 후반 PC통신과 인터넷에 힘을 얻어 본격적으로 등장한 청소년인권운동 역시 처음에 가장 많이 얘기되었던 이슈는 강제자율학습과 강제보충수업, 체벌, 두발복장규제 등 학교에서의 인권침해들이었습니다. 또, 청소년인권운동을 한국 사회에 알린 큰 사건이었던 2000년 두발자유화운동인 ‘노컷운동’ 역시 학생인권 분야의 운동이었지요. 아직 청소년들이 ‘미성년자’로 이름 붙여지고 사회 전반에서 차별받고 인권을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나 청소년인권에 대한 체계적 주장들은 부족했었고, 주장하는 내용도 좀 오락가락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는 이와 함께 만18세 선거권이나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이야기, 청소년노동-아르바이트에 대한 이야기, 청소년보호법에 대한 불만 등도 막 시작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서 ‘청소년인권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2000년대 초중반은 여러 가지 청소년인권 모임이나 단체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여러 가지 청소년인권운동의 이슈들이 사회적으로 제기되던 시기입니다. 두발자유, 체벌금지, 0교시 반대, 학생회 법제화, NEIS 정보인권, 입시경쟁반대, 종교자유 등을 꼽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청소년인권운동이 많은 어려움에 부딪힌 시기이기도 합니다. 돈도 없고 마땅한 공간도 없는 현실, 시간이 지나면 나이를 먹어서 지속되기 어려운 운동의 태생적 조건, 운동을 위한 이론의 부재, 축적되지 않는 운동, 학교와 사회의 탄압 등등. 특히 다른 운동들과는 달리 운동의 당사자들이 시간이 지나면 나이를 먹고 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버려서 운동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은 청소년인권운동의 계속되는 고민거리입니다. 한때는 자발적으로 생긴 청소년인권모임 중에 3년을 넘게 버티는 곳이 없다는 게 정설일 정도였으니까요.(단체의 주요 구성원들이 고1 혹은 중3 때 시작해서 고2, 고3 때까지 활동을 하고, 수험생활 때 본격 돌입하거나 졸업을 하게 되면 모임이 망하는;;)

2005년, 2006년은 그러한 청소년인권운동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해온 주체들이 과거 운동을 평가하고,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 토론이 이루어졌던 시기이고, 그 결과 청소년인권운동을 안정적으로 해나가는 단체와 연대체를 만들기 위한 시도들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조금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셈입니다. 그 이후 2008년 촛불집회와 교육감 선거, 일제고사 등을 거치며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운동이나 교육정책에 관한 운동 등은 더욱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민간에서 교육청에서 추진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 역시 이러한 청소년인권운동의 성과라고 해야겠지요. 물론, 다른 한편으론 이명박 정부 이후로 여러 학생인권 현실과 교육 상황들이 후퇴하고 운동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합니다.


보편적이지만 부문적인, 부문적이지만 보편적인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다보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게 됩니다. ‘청소년은 소수자인가?’라는 질문인데, 참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입니다. 왜냐면 청소년들은 그 권력관계나 인권 상황들을 보면 사회적 소수자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어쨌건 청소년이거나 과거에 청소년이었었으며 지금 청소년인 사람도 언젠가는 청소년이 아니게 된다는 점에서 청소년 문제는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소년인권운동은 부문적인 문제인 동시에 보편적인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청소년들을 단지 ‘미래의 기대주’로 보거나 ‘우리 운동이 더 오래 가기 위해선 청소년들을 조직해야 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걸 보면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청소년들을 지금 여기에서 같이 운동을 하고 인권과 사회 문제를 얘기하는 동등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쉽게 말을 놓고 하대를 하는 어른 활동가들과 종종 마찰을 일으킵니다. 일종의 소수자로서의 감수성인 셈이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이 언젠가 청소년이 아니게 되고 또 다른 삶을 살게 될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시선을 마냥 나무랄 수만은 없어서, 가끔은 그냥저냥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거나 그런 걸 이용해먹기도 합니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청소년들의 인권 문제는 소수자 문제로서도 보편적 문제로서도 굉장히 중요한 의제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정치에서, 경제에서, 문화에서 청소년들이 인간으로 대우받고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다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직접 하지 않는 분들이라도, 지금 자신이 청소년이 아닌 분들이라도, 청소년인권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라는 궁색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