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0. 10. 13. 23:10

[페미니즘인(in)걸] ‘여성+청소년=여성청소년’이란 공식을 넘어서자

복합차별에 대해 아시는지?

발새


사실 페인걸은 매번 복합차별을 다루었었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울 것은 없지만 한번 제대로 다뤄보자는 취지로, 이번 페인걸 주제, 복합차별이다.

지하철 난투극

60이 넘은 여성과 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둘이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이 찍힌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배경이 지하철이라 “지하철 난투극”이란 이름이 붙었다. 처음 동영상이 올라왔을 때는 ‘어린 것이 싸가지 없다’던 네티즌들은 나중에 그 여성청소년이 자신이 실수한 것에 대해 거듭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여성이 폭언을 한 상황을 듣고 여중생 vs 할머니의 싸움에서 여중생 편을 들었다. 싸움의 발발은 그 여성청소년이 신발의 흙을 실수로 옆의 그 사람의 옷에 묻힌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한 가지 조건을 비틀어 보자. 실수로 옷에 흙을 묻힌 사람이 여성 청소년이 아니라 성인 여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남성 청소년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조건에서도 그 사람은 폭언을 했고 몸싸움이 일어났을까? 영상 속의 사람은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두 가지 약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틀을 각각 들이대면 보이지 않던 이 상황은 여성-청소년이라는 틀 안에서 제대로 보여 진다. 이렇게 두 가지의 복합된 차별은 합집합이라기 보단 교집합의 문제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




청소년 인권 운동과 여성 운동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여성 청소년이 겪는 문제는 여성운동과 청소년 운동이라는 단일한 틀로 잘 담아 지지 않는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내부에서도 여성 청소년들은 종종 소외된다. 청소년 인권 운동의 중요 의제인 두발이나 체벌 등은 여성청소년보다는 남성 청소년에게 더 압박스러운 것들이다. 반면 여성 청소년에게 예민한 사안인 외박이나 섹스, 임신 등은 어느새 뒤로 밀려난다.

여성운동 속의 여성 청소년들의 존재는 더욱 미미하다. 결혼, 출산, 취업 등 여성 운동에서 주목해온 의제는 주로 성인 여성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번 더 여성청소년들이 복합차별의 대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청소년운동+여성운동=여성청소년운동’이란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성 청소년들이 겪는 차별은 여성 청소년 고유의 경험이다.

청소년과 여성의 사이에서

너희는 안 꾸며도 예쁜 나이다. 화장할 시간에 공부나 더 하렴.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교사들한테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청소년기가 안 꾸며도 예쁜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굴에 여드름 나고 한창 살찌는 신체 나인데 말이다. 이런 어조는 여성청소년에게 ‘여성’보다 ‘청소년’이 되라는 말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연애나 성에는 관심을 갖지 말고 외모를 치장하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 순종적인 청소년 말이다.

하지만 이런 교사들에게서 조금 시선을 돌려보면 어떤가. 소녀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노골적으로 판매하는 대중매체, 외모로 서열을 매기곤 하는 또래 여자 친구들. 여성 청소년들이 마주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청소년으로서의 이미지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 청소년들은 청소년은 물론 ‘외모에 치장하는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존재하기를 요구받는다.



여성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이 두 가지 이미지는 몹시 상반되는 것이라 양쪽의 장단을 맞추기가 힘겹다. 아침 등교 시간에는 학생부의 눈을 피해 긴 치마를 입었다가, 학교에 오면 다시 바느질을 해서 짧은 미니스커트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공부만 하던 모범생들이라도 수학여행을 갈 때면 탱크 탑에 미니스커트를 입는 센스도 있어야 한다. 이 둘 중 한 가지라도 놓치는 순간 공부밖에 모르는 찌질이와 생각 없이 노는 날라리 중 하나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위 사진:여러번 바느질한 교복치마


언어를 잃어버리다

나도 청소년기를 복합차별의 대상인 여성 청소년으로서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에 담고 싶은 나의 차별 경험담이 없었다. 나의 외모는 지금이나 그때나 성별 구분이 잘 안 된다. 그래서인지 학교를 다닐 때 난 철저하게 청‘소년’이었던 것 같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난 차별받을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차별에 대한 이렇다 할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청소년기에 차별당한 일이 없다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사건들을 언어로 바꿔 기억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다. 경험하는 모든 일은 적절한 언어가 있어야 제대로 기억된다. 감정의 결을 표현하는 데도 사랑, 우정, 동경 등 많은 단어가 동원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단어가 없다면 감정을 언어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나는 청소년기에 내가 당한 차별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나지 못했고 나의 경험들은 반편이가 되어 여성이나 청소년으로서 겪은 일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큼직하게 기억에 남는 일이라도 있었으면 그 일을 다시 복합차별을 관점에서 재구성해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복합차별이란 새로운 단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험을 기억으로 바꾸는 길목에서 옳은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실 곳곳에서 일어나는 복합차별은 복합차별이라는 단어를 만나지 못한 체 당사자들의 언어 뒤로 숨어버리고 있다.

약자들은 자신을 설명할 단어를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그 말이 참 실감난다.
덧붙이는 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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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22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12일 22:48:4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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