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걸음걸이, 출발로에서 (2007.08.)

공현 2008. 1. 30. 13:19
명동을 방황하고, 을지로를 방황하고, 청계를 방황하고, 종로를 방황하고,
뎀셀브즈를 방황하고, 501번을 방황하고, 기억 속의 노래들을 방황하고, 너의 심상 속을 방황하고,
누군가가 만든 서사물 틈새를 방황하고, 녹두거리를 방황하다가,

오르막길에서 찾았어요. 내가 찾고 있지 않던 무언가를.


그래, 걸음걸이.

내 주위에서만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이야기하던 그 걸음걸이.

그동안 왜 이렇게 걷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았더니,
그건 내가 어느새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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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文友에게
너를 문우라고 감히 부르는 것에 대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어.
감히 나한테 질문할 자격이 생긴다면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저것 있지만, 아마 그럴 자격도 여유도 기회도 없을 테지.
그래도 종종 내 블로그에 들어와봐서는 다음에 논술 토론 모임에서 한 마디씩 이야기하곤 했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들어오지도 않을 테니까, 아마.
아 아, 그때는 정말이지 논리라든가 개념이라든가 제시문의 조각들을 가지고 노는 게 너무너무 재미있었는데, 너나 상욱이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너희도 그런 걸 놀이처럼 사랑하고 즐겨주었다면, 기쁠 거야, 분명히. 하지만 그걸 논술시험 준비 정도로 생각했다면 조금은 서운할지도 모르겠어.


굳이 여기에 읽지도 않을 이야기를 쓰는 건 예전에 네가 썼던 편지에 대해 코멘트할 거리가 생겨서야.
그 당시에는 잘 설명하지도, 이야기하지도 못했던 것에 대해 설명하고 채색하고 소리를 입힐 언어가 생긴다는 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쩌면 즐거운 일일지도 몰라.

그래, 네가 점심시간에 항상 혼자 걸어다니는 나를 보면서 내가 일부러 다른 사람들을 멀리 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있는 것 같다고 썼었잖아. 그게 안타깝다고.
그때는 그거에 대해서 그다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한 것 같아. 그렇지만 지금은 알 거 같아. 내가 왜 그런 식으로 존재했는지.

걷 는 속도가 너무 달랐던 거야. 점심시간의 교정에서, 대개들 내 곁을 추월해서 지나쳐 갈 수 있을 뿐, 대개는 나랑 같이 걷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과 걸을 때는 항상 내 쪽에서 걸음걸이를 빨리 해야만 했지. 그쪽이 '보통'이니까.
'보통'이 라는 건 굉장히 중요한 거야. 단지 언어가 다를 뿐인 것에 대해서, '보통'인 사람들은 그걸 '어렵다'고 이름 붙이고 자기 걸 '쉽다'라고 이름 붙일 수 있어. 내가 최근에 몸 담고 있는 계통에서는 그런 걸 "대중적이다" "대중적이지 못하다"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해.
여하간 나는 그때 너무나 관찰할 게 많았고 느낄 게 많았고 사유할 게 많았고 정리할 게 많았어.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걸음이 필요했지. 이모 독일어 선생님의 말을 인용하기는 징그럽고 싫지만 - 말테의 수기 식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보는 것을 배우고 있다."인 거야.
하지만 내 걸음에 맞춰주는 사람은 없었어. 나한테 맞추라고 은연중에 요구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사람들의 '보통'이니까, 그게. 그런 다름을 간파하고 협상을 제안하는 사람도 없었지. 다만 나는 무성하게 퍼져가는 소문 속에서 '구경'(관찰이 아냐.)에 노출될 뿐이었어.
나도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의 걸음걸이에 맞출 수 있어. 내가 좋아했던 몇몇 사람들에게는 종종 그렇게 하곤 했지. 좋아하지 않더라도 요구되는 경우에는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렇게 하기도 했고. 잘은 모르겠어,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은 내 걸음을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어쩌면 그 사람들은 조금씩은 내 쪽에 맞추어줬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몇몇 사람들을 빼면 대개는 내 걸음걸이에 맞춰주려 하거나 아니면 협상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야. 그 사람들에게 걸음걸이는 너무나 절대적인 '보통'이거든. 사실, 걷는 속도, 걸음걸이란 게 정말 사람들 사이에 별로 차이가 안 나는 것들 중에 하나잖니. - 그 '보통'들 속에서는. 장애인-비장애인의 틀이 아니라 장애인-정상인, 의 틀에서는.
결국 단순한 소리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걸음걸이에 대한 협상을 제안할 여유가 없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럴 이유도 생각도 없었던 거겠지.

걷 는 속도라는 건, 삶에서 정말 커다란 요소야. 흘러가는 인파들 속에서 그 속도에 맞춰주지 못하면 여러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이야. 그리고 인파 속이 아니더라도, 걷는 속도가 다른 건 엄청나게 눈에 띄고 말아. 자동차 운전을 배울 때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맞춰야 하는 건 법정 제한 속도 같은 게 아니라 다른 차들의 속도라고 배운대. 다른 차들의 속도에 어느 정도 맞추지 못하는 게 훨씬 위험하다더라.


흠, 여하간 본론으로 돌아가면 - 나는 그때 내 걸음을 접어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너희'와 유리된 거야.

후회하진 않아. 아, 물론 전에 편지에 썼다시피 너 같은 사람이 부럽긴 했어. 지금도 부럽지. 내가 되지 못하는 것이고, 내가 가지지 못하는 것이니까. 설령 후회하거나 나에게 별 아쉬움이 없더라도, 내가 되지 못한 가능성 - 가지 않은 길 - 가지지 못하는 것들 - 그런 것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부러움을 느끼게 되곤 해. 그래 예컨대, 나는 네 글이 부러웠어. 강모 선생님한테 나랑은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네 글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글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 그 부러움이란 게 보통 쓰는 말과는 좀 다른 의미겠지?

오늘 내 걸음을 '발견'했어. 그래서 겨우 다시 이해했어. 한 번 이해했던 걸 말야. 그래서 새로운 심상도 봤어. 이것저것. 달무리도 봤구.


아직도 시를 쓰니? 수필은? 혹시 소설도?
지금도 그렇게 정답적이진 않을 거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넌 아마 작가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읽고 싶다.
그럼 잘 쓰면서 지내길 바래. 정말로, 아직도 쓰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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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에 보면 베포는 숨 한 번 쉬고 빗자루질 한 번을 한다고 하지만,
나는 숨을 두 번 세 번 들이쉬고 내쉴 동안 겨우 한 걸음을 디뎌요.
느린 걸음은 엄청 불안해요. 휘청휘청거려요. 빨리 걸을 때랑은 전혀 딴판이죠.
하지만 그래도 느린 걸음은 넘어지지 않아요.
넘어지기엔 너무 느리거든요.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너'는 내 이런 걸음을 이해했었을까요?
모르겠어요. '너'가 누군지도.
그냥, 걸을래요.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걸을 때는 또 빨리 걸어다녀야겠지만 - 서울 사람들은 참 빨리 걷는답니다.

여하간, 걸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