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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교과부의 학교 독재구역화? 학생은 노예가 아니다

공현 2011. 1. 20. 18:00

교과부의 학교 독재구역화 ?

학생은 노예가 아니다

공현



2011년 1월 17일 월요일 오전 10시 40분 경, 교육과학기술부(이주호 장관, 아래 교과부)에서 학교장의 자의적 권한을 강화하고 학생 인권에 부정적이며 특정 형태의 체벌을 허용하는 내용의 시행령 개악 조치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이 번쩍 깼다.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진즉 들었으나 이렇게 급하게 발표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더군다나 청소년들,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시늉조차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주 중에 입법예고까지 한다는 이야기에 기가 막혔다.(하긴 언제 한 번이나 교육정책 같은 걸 정하면서 학생들 의견을 들은 적이나 있었나.) 교육과학기술부가 17일 발표한 것의 제목은 ‘인성 및 공공의식 함양을 위한 학교문화 선진화 방안’이었는데, 가히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버금가는 사기적인 작명이었다.

‘학교자율’의 독재성

뜬금없는 역사 드립 하나. 중고등학교 때 국사나 세계사 같은 걸 배우다보면 이런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 중앙 정부의 권한이 약해지고 지방의 호족들, 귀족들이 마음대로 자기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르게 되면, 사람들은 더 심한 폭정과 착취에 시달릴 수 있다고. 물론 신분제 사회의 귀족 정치와 민주주의 사회의 분권화, 지방자치는 근본적으로 그 질과 방식이 다르므로, 이런 이야기를 단순히 현대에 적용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의 초중고등학교들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그런 사례가 적용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학교자율화’가 이명박 정부의 특허품인 것 같지만 사실 ‘학교자율’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0년에 두발자유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온라인 서명과 운동이 불붙던 시절, 교육부는 두발규제를 학교들이 자율적으로 학교구성원들과 합의해서 결정하라는 ‘학교자율’ 지침을 발표했다. 2005년 두발자유 운동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 이후에 체벌을 비롯하여 온갖 인권을 침해하는 학교의 관행과 제도들에 대해 문제제기 했을 때도 교육청과 교육부는 ‘학교자율’, ‘학교장 재량’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아니, 그 이전에 1990년대에 강제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이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 나올 때부터, 그것은 학교의 자율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교자율’, ‘학교장재량’은 많은 경우 학교가, 학교장이, 학생들의 자유와 인권을 짓밟을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는 것을 의미했다. 마치 중세 유럽, 귀족들이 자기 장원 안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마음대로 주민들을 지배한 것처럼. 호족들이 자기 세력이 미치는 영지 안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것처럼. 이명박 정부는 이를 ‘학교자율화’라는 정책 이름까지 붙여 더욱 노골적으로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번 발표는 그 절정이다. 교과부가 발표한 시행령 개악 안에서 가장 문제가 큰 조항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제31조의5(학생의 권리보장 지원) ② 학교의 장은 교육기본법 제12조 제3항에 의하여 교원의 교육․연구 활동 및 학생의 학습활동을 보호하고, 학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제1항에 따른 학생의 권리 행사의 범위를 학칙으로 정할 수 있다.”

아예 학생의 권리 행사 전반을 학교장이 모호한 이유만 가지고 자의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조항이다. 상상해보라. 만약 근로기준법에 “(근로자의 권리보장 지원) 회사의 사장은 회사의 영업활동 및 사원의 근로를 보호하고, 회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근로자의 권리 행사의 범위를 사규로 정할 수 있다.”라는 조항이 명시된다면 어떻겠는가? 물론 현실의 회사에서는 자의적으로 노동자들의 권리를 마음대로 침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를 완전히 합법화해주고 사장에게 자의적 포괄적 권리 제한 권한을 위임하는 이런 입법이 대단히 반인권적이며 비상식적이라는 것을 두말할 것 없다.

교과부는 이것이 학교장의 독재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 아마도 새롭게 고치려는 시행령 안에는 학칙을 제‧개정 할 때는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는 조항 역시 있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교과부는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라고만 했을 뿐, 그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나 형식은 역시 학교에서 알아서 마음대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 학생들의 참여가 형식적인 참여, 들러리 서기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처럼 학교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우습게 아는 모습에서 학생들은 어떤 것을 학습하게 될까?

인권을 보장하고 존중하는 것은 사회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인권을 불가피하게 제한해야 할 경우에도 내용적으로 절차적으로 엄격한 원칙과 조건들이 있다.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28조에서 역시 정부가 학교 규칙이 학생의 인간적 존엄성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운영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때문에 학교장이 자의적으로 인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하는 것,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학생인권의 보장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권을 무슨 장식품 정도로 우습게 아는 것이다.

위 사진:1월 19일 교과부 앞에서 청소년들이 긴급 항의 기자회견 하고 있다.



체벌과 출석정지 제도

교육부에서 과거에 체벌에 관해 규정했던 것 등을 살펴보면 체벌은 ‘신체적 고통을 주는 방식의 처벌’로, 거기에는 도구나 신체를 이용하여 때리는 행위나 반복적 지속적으로 불편한 자세나 행위를 하게 함으로써 고통을 주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된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일반논평에 따르면, 그러한 체벌들을 포함해서 그밖에 굴욕적 모욕적 처우 또한 근절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과부는 이번에 갑자기 이른바 “직접/간접체벌”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오면서 직접체벌은 허용하고 간접체벌은 금지하겠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없던 분류법을 새로이 창작한 것인데, 직접체벌은 교사가 직접 때리는 체벌이고 간접체벌은 직접 때리지는 않는 체벌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든 간접체벌의 예시를 보면 손들고 서있기, 엎드려뻗쳐, 운동장 돌기 등이 있는데, 시행령 개악안 등을 보면 정확히는 직접 때리는 행위만을 금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때리지만 않으면 어떤 체벌을 주더라도 괜찮은 게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소위 ‘기합’, ‘얼차려’를 전면 허용하겠다고 한 셈이다.

교과부의 작명 센스만 보면 마치 때리는 체벌은 좀 더 심한 것이고 학생들을 ‘굴리는’ 체벌은 간접적인 것, 덜 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체적 고통을 준다는 의미에서 이 두 체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또한 ‘굴리는’ 체벌이 더 안전하다거나 덜 고통스럽다는 근거도 없다. 세상에 잔혹한 ‘기합’, ‘얼차려’들이 얼마나 많던가. 오히려 2007년에 ‘오리걸음’ 체벌을 받다가 사망에 이른 학생, 2010년 ‘앉았다 일어났다’ 체벌을 받다가 사망에 이른 학생 등 이러한 ‘굴리는’ 체벌이 건강에 더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직접체벌”, “간접체벌”이라는 분류와 이름 붙이기 자체가 꼼수이고 기만인 셈이다. 교과부의 방침은 체벌의 방법에 관해 조금의 제한을 뒀을 뿐, 그저 “체벌을 계속하겠다.”라는 선언에 불과하다. 학생들에게 고통을 주고 신체적․물리적 폭력으로 누르는 교육이 아닌 교육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벌점제까지 적용하겠다고 하니, 학생들을 점수와 폭력, 이중으로 옭아매겠다는 것이다.

체벌을 허용하겠다는 발표가 학생들을 폭력으로 통제하고 억누르기 위한 것이라면, 새로 도입하겠다고 한 ‘출석정지’ 제도는 열외인 학생들을 배제하기 위한 장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학교에서는 학교의 눈 밖에 난 ‘찍힌’ 학생들을 사소한 규정 위반이나 벌점제를 이용해서 사회봉사 징계나 특별교육이수 징계를 통해 학교 밖으로 돌리는 경우들이 있다. 좀 심한 경우에는 아예 강제전학, 퇴학을 시켜버리기도 한다. ‘출석정지’ 제도는 그 징계의 내용은 특별교육이수와 비슷하지만, 징계기간이 ‘무단결석’ 처리된다는 점이 특별교육이수와 다르다. 따라서 출석정지 제도를 악용하면 이는 ‘찍힌’ 학생들을 손쉽게 학교에서 배제시켜버리는 제도로 악용될 수 있다. 학교장이 학칙으로 마음대로 학생들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 한 내용과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학교의 징계는 첫째,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등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행동의 잘못을 알고 변화하고 다시 학교에 돌아올 수 있게 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하고 둘째,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출석정지 제도는 특별교육이수와 내용적으로는 다를 것도 없으면서, 학생이 성실하게 그 징계 기간 동안 특별교육프로그램 등을 이수하더라도 ‘무단결석’ 처리되게 하는 제도이다. 말 그대로 학생들의 변화와 복귀, 예방 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학생들을 내쫓기 위한 제도인 셈이다.

출석정지 제도가 특별교육이수보다 더 강한 징계로 분류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제도는 일상적으로 수업시간에 수업을 방해하거나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는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징계도 아니다. 지금 학교 징계 제도에서 바뀌어야 할 점은 이런 ‘강화된’ 징계 제도를 도입하는 게 아니라 징계의 공정성과 민주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방법 아닐까?


노예와 학생 사이


다소 단순화된 도식이지만,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불복종에 관한 글에서 학생과 교사 사이의 복종과 주인과 노예 사이의 복종은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학생과 교사 사이의 관계, 혹은 학생과 학교장 사이의 관계가 과연 노예와 주인 사이의 관계에 비교해볼 때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최근 진전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와 체벌금지 조치 등은 학생들의 인권운동이 아주 조금의 성과라도 거두면서 이런 모습에 변화가 생기는가 했지만, 이런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교과부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악’이라는 수를 내놓았다. 이번 교과부의 발표를 보면 학생들의 모습과 책에서 읽은 노예의 모습이 자꾸 겹쳐 보인다. 학생들의 권리를 자의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학교장, 그리고 그 학교장의 명령과 통제에 따라 폭력과 추방을 이용해 학생들을 관리하고 억압하는 교사들. 학생과 교사의 관계와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다르다는 지적은, 차라리 ‘달라야 한다.’는 당위명제로 읽어야 하는 것일까?

세계인권선언 전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맞선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적 반란에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권이 법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필요하고…” 그러나 교과부가 만들려는 법은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교장의 손에 인권을 침해할 권한을 ‘합법적으로’ 안겨 주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권이 법에 의해 오히려 침해당하는 지금, 우리에게는 폭력적 반란이 필요하단 말인가? 글쎄, 그게 폭력적 수단이건 아니건 간에, 학생들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저항이 필요한 때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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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35 호 [기사입력] 2011년 01월 19일 21:2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