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서 '연대'는, 대체로는 제 개념에서는 '운동과 운동 사이의 협력'이라는 의미로 쓰려고 합니다. 그냥 다 '협력'이라고 쓰고 싶지만 '연대'라는 말이 통용되는 말이니 아직은 사용되는 언어에 따라야겠지요.
0 시작하며
실은, 굳이 이런 글을 안 쓰려고 했습니다. 자기 주장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제가 최소한의 신뢰와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예, 뭐 자기가 주장한 만큼 그걸 책임지고 해나가겠지요. 어차피 올해 안에, 길게 봐야 올해 말 ~ 내년 초 사이에 병역거부를 앞두고 있는 저로서는, 실천이 담보되기만 한다면 굳이 청소년운동이나 아수나로에 관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를 아수나로 활동가라고 생각하고 아수나로가 어떤 청소년운동을 해야 하는지 깊이 있게 사유하고 자기 삶을 투자해가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수나로의 화석'인 저에게는 축복 아니겠습니까. 거기다 대고 그 사람들이 제 입맛에 맞는 사유와 주장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듯 보이는 글을 던지는 것은 과욕이겠지요.
그러나 피엡님의 요구도 있었고… 여튼 간에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자칫하면 그냥 '무시'하는 걸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 (일시적이든 어떻든) 퇴장하더라도 특정한 주장을 주도적으로 주창해온 사람으로서의 역할은 다 해야겠지요. 그게 이후까지 이어질 논쟁의 시작을 담당하는 역할이든, 아니면 새롭게 제기되는 지배적 주장에 대해 상대역이 되어서 패배하는 역할이든.
물론 가능하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논쟁에서 저와 비슷한 입장의 주장을 제출해주기를 바랍니다만, 그럴 분은 아무래도 없을 것도 같습니다. 열심히 서명을 받으러 다니느라 매일 매일 녹초가 되고 있는 둠코라거나, 수원 일을 하면서 서울에 서명까지 도와주고 있는 난다에게 그런 걸 부탁하는 것은 아무래도 염치 없는 짓이지요. 이미 아수나로를 떠나서 좀 더 자유로운(??) 청소년활동가로 살고 있는 따이루에게 부탁하기도 그렇구요. 그래서 그냥 분당 한글 타자 700타를 자랑하는 제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 틈틈이 꾸벅꾸벅 졸면서라도 글을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0.5 논의의 방식
저는 사실 운동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주장이 옳은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운동에 관한 주장 중 상당수가 '검증 불가능'하니까요. 물론 '틀리지 않아야 할' 필요야 있겠지요. 하지만 명백한 오류나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은, 어떤 주장을 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주장의 맥락과, 그 주장이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주장의 효과가 뭐냐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따라서 저는 이 논쟁에서 특별히 논리적인 오류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아니라면 그 주장이 "틀렸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뭐 지금 논점이 되고 있는 게 별로 '틀린'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저는 다만 그 주장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제 주장의 지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지향이 저의 지향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떤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주장에 가해진 비판에 대해서, "그 비판은 이 주장과 배치되지 않는다, 이 주장을 반박하지 않는다, 이 주장을 기각하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건 때로는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비판이란 건 어떤 주장을 논리적으로 부정하거나 기각하는 게 아니라, 그 주장이 강조하고 있는 것, 그 주장의 효과에 대한 비판일 경우도 많거든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논리적으로 더 정교한 주장을 펼침으로써 논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진 않습니다. 오히려 더 핵심적인 문제는 저와 비슷한 위치에 서서 저와 비슷한 것들을 보고 있고(혹은 이 글을 읽으면서 보게 되고) 저와 비슷한 지향에 동의-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느냐 하는 거죠. 저는 지금까지 청소년운동에 뛰어들어서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반적으로 누구나 제가 보고 있는 현실과 비슷한 현실을 보고 저의 지향과 비슷한 지향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은연중에 믿고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게 이번 논쟁을 통해서든 운동의 전 과정을 통해서든 경험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그건 결국 제가 청소년운동에 대해 세운 관점조차도 저의 개인적 특질에서 비롯된 면이 더 크다는 뜻이고, 그건 제 개인의 역사에서는 굉장히 해묵은 비극을 재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의 역사는 여러분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 테니까 이 논쟁에서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도입부가 쓸데없이 장황해졌네요. 본론은 좀 간결하게 써보겠습니다.
1 역사적 사건 선택의 편의성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때로는 매우 편리한 일입니다. 수많은 역사의 사례 중에서 어떤 사례만을 골라서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고, 또 그러는 것도 '오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주장에 분명 '개연성'을 줍니다. 하지만 그 '개연성'을 '필연성'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 또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저도 종종 역사적 사례를 끄집어내곤 하지만, 그건 "이게 가능하다"라는 믿음을 주거나 선동을 하기 위한 것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러시아 혁명이 여성 억압이나 차별을 제거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베트남 혁명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동을 연구하면서 베트남에서의 혁명이 여성 억압이나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여전히 공사 영역에서 가부장적 차별과 배제가 계속되고 있음을 밝힌 논문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예로,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자유시장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을 어떻게 약화시켰는지 일본인의 예를 들면서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같은 책 같은 챕터에서 미국 등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매커니즘으로 인종적인 차별과 격차가 계속 유지되는 모습을 암시하는 듯한 문장도 적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러시아 혁명기의 대안적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혁명 이후 소비에트연합(소련)나 중국에서의 교육의 폐해들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이 경우에는 또 소련이나 중국이 사회주의였냐 아니였냐 하는 소모적인 개념 논쟁에 돌입하겠지만요.) 아니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나이에 따른 차별이나 아동에 대한 억압이 약화된 모습으로 계속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의 이야기가 공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벤포스타 같은 실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벤포스타는 망했다구요?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러시아 혁명기의 대안적 교육 실험이나 파리 코뮌은 뭐 안 망했나요? 역사 속의 사례란 그런 덧없는 편의성이 있지요.
2 68혁명?
잠깐 68혁명 이야기나 해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68혁명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베트남전이라는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를 읽어낼 것입니다. 그러나 68혁명을 경험하고 그 지반 위에서 논의를 펼친 사람들은 오히려 다른 문제설정을 제기하기도 하지요. 마르크스주의자 내지는 사회주의자인 사람들도 그래요. 그런 주장은 68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계급적 관점을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강조점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68혁명을 '반자본주의'라거나 '노동자 파업'이라는 키워드만을 강조해서 이해할 때 많은 것들이 누락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요. 예컨대 피엡님의 글과 달리 교육 문제에 대한 불만을 68혁명의 도화선으로 보는 해석도 많습니다. '욕망'과 '혁명'이라는 문제로 68혁명을 이론화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 같은 것도 그렇구요.
68혁명에 대해서 좀 더 활동가스러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68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청소년운동이나 대학생운동 조직이 없었을까요? 학생 자치 조직은요? 청소년-대학생들의 이해관계를 주장하고 활동하는 조직은요? 우석훈-박권일 말마따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10대 20대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계속 토론하고 공론을 형성하는 문화는요?
사실 저도 68혁명에 대해 그렇게 깊게 공부해보지는 않았지만, 중고등학생들도 학교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동맹휴업을 한 투쟁에서 중고등학생들의 광범위한 조직화가 사전에 없었다고 보는 건 좀 비현실적일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프랑스의 경우에는 68혁명의 발단은 대학교 여자 기숙사에 남학생들이 출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대학을 점거한 사건이었다고들 하지요. 또 그 이전부터도 리옹, 파리, 기타 여러 지역의 학생조직들이 교육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소책자를 배포하고 활동을 벌여왔습니다. 10대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알려진 바가 적지만, 중고등학생들의 경우에도 이러한 조직과 운동이 꽤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조직화된 기반이 없었다면 68혁명은 한국의 촛불시위마냥 거리에서 광장에서만 벌어지고 학교 등에서 전면적으로 벌어지지 못했겠지요.)
그렇다면 베트남전쟁 운운 하기 전에 68혁명이 가능했던 그런 기반에 주목해보는 건 어떨까요? 굳이 68혁명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제 입장은 그래요. 10대 청소년들이 입시경쟁에 과도하게 내몰리고 종속되는 조건을 바꾸고, 학교 안에서 자치나 표현, 결사의 자유 등을 어느 정도는 보장받고, 자신들의 집단적-계급적(여기서 '계급'은 '미성년 계급'에 가깝습니다.) 욕망과 이해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일정 부분 이루어져야 68혁명 비스무레한 거라도 가능할 거라는 거죠. 청소년운동이 그런 '혁명'과 같은 형태의 사회 변화를 꿈꾸든 꿈꾸지 않든 간에, 그런 것(청소년들 삶의 조건 변화, 교육의 변화, 조직화)을 실현시키는 게 운동의 일차적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추신하자면, 저는 역사가 구체적인 부분에서 재현적이거나 반복적이라는 전제에 그리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대대적인 대중운동이나 혁명이 촉발된 적이 많기나 하나요? 이라크전 반대나 걸프전 반대가 뭐 얼마나 그런 걸로 이어졌나요? 베트남전 반대 말고 그런 사례를 그다지 들어본 적이 없네요. '유럽에서 반전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라는 소식이야 많습니다만. 그리고 그런 걸 과학적인 방식으로 예측하거나 해석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과거에 이랬으니 미래에도 이럴 것이고 그러니 우리는 이래야 한다.'라고 말하는 건, 추상적/원리적인 부분에서는 해볼 법하지만, 구체적인 부분에 적용하면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2008년에 그렇게 대대적인 시위로 이어질 거라고 예측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있나요? 제가 2008년 촛불집회나 2002년 촛불집회 등의 경험을 가지고서 그런 대대적인 사회적 운동을 통해서 청소년운동으로 유입되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이모씨처럼 찌질하고 같이 활동하기에 문제가 많더라, 라고 일반화해도 될까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개연성 있는 설명도 저는 제시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욕 먹기는 딱 좋고 또 별 의미도 없는 주장이네요. 여하간 그런 점에서 저는 '혁명'에 관해서는 차라리 박노자 씨 식의 태도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만.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414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464 )
3 청소년 조직화?
피엡님은 이렇게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직화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 다른 반자본주의 운동들에 참여함으로써 조직력을 키우는 데 보탬이 된다고 적고 있지 않느냐구요. 그런데 피엡님의 그 글에는 사실 두 층위가 혼동되어 있습니다. 그게 피엡님의 고의인지 실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글 안에서는 '미조직 청소년들을 조직할 방법'과 '이미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신감이나 힘'에 대한 내용이 섞여 있어요. 그 둘을 구분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일단 '미조직 청소년들을 조직'하는 데에 반자본주의적인 운동에 참여하는 게 그다지 큰 효과는 없습니다. 2008년 촛불집회 수준으로 대대적인 운동, 미조직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집회가 아니라면요. 사회 전반의 정세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동의하긴 하지만, 상당수 청소년들은 신문도 뉴스도 잘 보지 않는 상황에서, 그게 체감될 만큼의 대대적인 수준의 변화가 아닌 이상 과연 얼마나 영향이 있을까요? 청소년들이 과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화 약속을 받아낸 것을 알고서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활동에 나설까요?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 가지 의문들이 계속 듭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미조직 청소년들이 촛불집회에 나오고 하다가 지금은 잘 안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건 과연 청소년들이 이명박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차이를 재봐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교육상황의 변화 같은 영향이 더 클까요? 만약 사회 전반의 변화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마치 시민들이 승리한 것 같은 분위기가 가득 차있을 때, 학교 현장에서 미조직된 학생들의 저항의 움직임 등이 작게라도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일단 알려진 수준에서는, 우리는 조직화된 청소년들(밤의마왕이라거나...)의 운동 외에는 그런 것을 보지 못했는데, 단순히 묻혔기 때문일까요, 어떨까요?
경험적으로도, 아수나로도 2006년에 '전쟁에 반대하는 청소년들' 같은 활동을 했지만 미조직 청소년들이 반전 운동 등을 통해 조직화된 경우는 본 적은 없긴 하네요. 청소년들의 사회 운동 참여나 사회 참여 전반이 틀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연대 활동을 통해 조직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 가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조직화를 하고 운동을 벌임으로써 그런 여러 분야의 사회 운동에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것도 더 활발해질 수 있겠지요.
그럼 '이미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신감'은 어떨까요. 이 부분은 그나마 경험적으로나 설명적으로나 설득력이 있긴 합니다. 저는 만약에 다른 어떤 운동은 성공하는데(무상급식이라거나?) 청소년운동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인 현실을 보며 매일매일 열등감도 느끼고 짜증도 느끼겠지만, 예, 어떤 분들은 다른 운동이 성공하는 걸 보고 혹시 청소년운동에도 자신감을 얻으실지도 모르겠네요.
여하간에 저는 '이미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운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특별히 반대하거나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활동회원 중에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고, 그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욕망이 있을 테니까요. 그런 욕망을 전체주의적으로 억압할 게 아니라면, 아수나로 안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그런 활동에 어울려 다니는 것은 나쁜 일도 아니고 막을 일도 아니겠지요.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경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얻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요. 피엡님의 글이 아수나로 차원에서의, 혹은 청소년운동 차원에서의 연대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하는 근거나 아니면 그런 활동의 방식과 방향을 이야기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요.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보면 어떨까요? 현대자동차 노동자 투쟁이 승리하는 것과 어느 한 학교에서 학내시위가 일어나서 목표한 변화를 일정 부분 달성하는 것, 둘 중에 뭐가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까요? 저는 당연히 자기와 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투쟁인 후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굳이 사회 전체의 분위기나 변화나 청소년 활동가들의 자신감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청소년운동이 아닌 '반자본주의 운동'(특히 리비아나 반핵 등)을 이야기하는 건 왜일까요? 청소년운동 안에서 성과를 만드는 게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더 좋은 일일 텐데 말이죠.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이런 두 가지 전제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겁니다.
ⓐ청소년운동이 아닌 '어떤 반자본주의 운동'이 성공하고 승리할 확률이 뚜렷하게 더 높다.
ⓑ청소년운동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만들지 못하지만 '어떤 반자본주의 운동'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만들 수 있거나 청소년 활동가들의 가슴에 뜨거운 것을 심어줄 수 있는 특수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우월한 운동이다.
물론 저는 두 전제 모두에 비판적입니다.
저는 "청소년 활동가가 다른 반자본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그 반자본주의 운동이 성과를 냄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에 대해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그 효과는 청소년 활동가가 청소년운동에 힘을 쏟고 성과를 얻음으로써 얻는 것과 크게 다른 거냐구요. 그리고 그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냥 청소년운동에 좀 더 집중해도 되지 않냐구요. (더 집중하라고 강요하기 위한 논리는 아닙니다. 오해는 마세요. 앞서 '다양한 청소년 활동가들의 다양한 욕망'의 차원에서는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피엡님의 글은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년운동은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므로 청소년활동가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청소년운동이 아닌 다른 운동의 승리를 경험하자."랄까요? 이렇게 요약하는 건 물론 제 폭거겠지만, 그렇게 읽히는 부분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요. 저라면 청소년운동이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니까 더 청소년운동에 힘을 쏟자, 라고 할 텐데요.
아, 그런데 반대로 (2008년 촛불집회처럼?) 그런 운동들이 패배했을 때 상실감이나 좌절감을 느끼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궁금하기는 합니다. 굳이 따지면, '이길 거 같은 싸움'만 골라서 참여하지 않는 이상은, 별로 승률이 좋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4 청소년운동에만 매몰되어 있어?
이것도 일종의 역사(?) 해석의 편향성일 수 있는데, 저는 청소년활동가들이 오히려 청소년운동에 너무 몰입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아수나로 활동하는 활동회원 중에 아수나로 외에 다른 사회단체나 다른 운동에 발 하나 안 걸친 사람이 절반이나 될까요? 아수나로나 청소년운동의 압장에서 청소년인권이나 청소년운동에 대해서 공부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자기 삶의 주된 걸로 삼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들 하세요? (물론 아수나로가 상근비 한 푼 못 주면서(끽해야 월 5만원 주면서) 이런 걸 요구하는 게 부당하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이야기로 들어가면 우리가 아수나로가 어때야 한다거나 아수나로 사람들이 어때야 한다거나 하고 논의하는 모든 게 와장창 무너지니까, 우리 그러지는 맙시다.)
다들 아수나로 하면서의 경험들을 어떻게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전태일 열사 노제 노동집회 간다고 다들 안 와서 아수나로 서울지부 공부모임 무산된 적이라거나, 촛불집회나 동성애자 쪽 행사 있다고 해서 아수나로 회의 시간 조정하던 기억들이 더 생생하네요. 수원지부나 경남중부지부는 또 어떤가요. 수원지부는 수원촛불을 통해, 경남중부지부는 노동자 투쟁 등에, 지역에서의 운동 사안들에 열심히 참여하고 같이 하고 있지요. (저는 이런 것들도 지역적 특성상 지역운동과의 관계 유지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저는 오히려 "아수나로/아수나로 활동회원들은 지금보다 더 청소년운동에 몰입해야 한다"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자기가 최소한의 소양과 성실성과 신뢰를 갖춘 청소년활동가도 되지 못하면서 '좌파'나 '진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분들을 가끔 보는데, 그럴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지요. 뭐, 그분들이 스스로 청소년운동을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이런 류의 활동을 활발히 하는 청소년단체가 아수나로 뿐이라서 가입해서 회원으로서 발만 담그고 있고 싶으신 거라면 제가 어쩔 도리야 없습니다.(그래서 청소년운동이 좀 더 다양해지고 외연이 넓어져야 한다니깐요. '아수나로'가 아니라.) 그럼에도 저는 그런 분들에게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라면 이 집회 저 집회 다니거나 이 현장 저 현장 지지 방문 가기 전에, 직접 활동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맡아서 뛰어들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지만요.
그리고, 물론 연대를 추상적인 차원에서 사고하는 분들은 잘 생각하지 않는 부분이겠지만, 저는 지금 아수나로가 다른 운동에 연대하니 어쩌니 할 상황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청소년운동에만 더 몰입해야 연대할 것도 더 많아진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 성급하게 이 문장에서 또 예단하는 분들이 있을 텐데, 여기에서 연대할 상황이 아니라는 말은 아수나로가 조건이 어렵기 때문에 아수나로 혼자 살아남기도 빠듯하다, 이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일단 지금 같은 규모와 역량의 청소년운동이 어느 운동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표한다고 해도 그 영향력이나 의미는 코딱지 만큼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노동자운동으로 비유하면 '금속노조'가 조직적으로 결의를 모아 참여를 선언하는 모습과, 한 50명 규모의 노동운동 서클 하나가 지지를 표하고 참여를 선언하는 모습을 비교해보세요. 후자에 자족적 의미 외에 어떤 의미가 있으려나요? 지금 같은 규모의 청소년운동이 어디 집회에 대오를 이루어 참여한다고 해서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에 얼마나 차이가 생길까요.
단순히 힘이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라는 걸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죠. 예컨대 지금 아수나로와 좀 활동력 있고 조직력 있는 여성단체가 만나서 전면적인 연대를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겠습니다만, 대체로 여성단체에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후원이나 도움을 받는 게 훨씬 많겠지요. 필요하다면 후원과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관계에서 건강한 연대 관계가 유지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 그런 부담감 없이 집회에 참가하거나 지지방문을 하는 정도의, 얄팍한 수준의 연대를 하면 되는 걸까요? 하지만 그런 경우에조차도 대개는 비대칭적이고 불공평한, 아니 운동의 사회적 영향력과 힘을 고려하면 오히려 '공평한' 모습이 연출되곤 하지요. 우리는 3.8여성대회에 가지만 여성단체들은 학생의 날 집회에 안 오는 그런 모습이요. (하지만 우리는 여성단체로부터 후원을 받을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게 그런 다른 운동 단체들의 잘못이라고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지금 청소년운동의 조건이 그렇다는 겁니다. 마치 '연대'가 당위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며 그런 당위를 설파하고 설득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요. 물론 활동가들 몇 명은 그런 식으로 설득하고 움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특히 집단이) 그런 식의 당위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두 번째로, 청소년운동에만 더 몰입해야 연대도 더 많아진다는 이야기인데요. 얼핏 잘 이해가 안 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참 어떻게 보면 자명한 건데 말이죠. 요컨대, 청소년활동가로서 자신의 위치와 관점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더 많은 연대의 기회와 지점들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기웃기웃거리는 사람보다는 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다, 이런 부분을 같이 하자고 제안해야겠다, 이런 게 보이는 사람(조직)이 그런 자기 정체성 속에서 더 많은 연대를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조직)에게 연대 활동은 어느 '외부'로 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활동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유하자면 자기애가 확고하게 있어야만 연애(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잘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할까요.
그리고 실제로 청소년운동 자체만으로도 연대의 폭은 넓습니다. 지금까지 경험이 있는 것만 꼽아보아도, 지문날인-정보인권, 청소년노동, 교육-대학-교사-등록금-예산, 표현의 자유, 문화운동(청보법 등), 여성 청소년,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전시 아동-청소년 ... 등등 참 많지요. 이렇게 청소년운동에만 더 몰입하고 청소년운동 안에 있는 중요한 의제들, 다른 운동들과 공유하는 지점들을 발전시켜야 청소년운동으로서 다른 운동들과의 더 많은 연대가 가능해지는 것인데, 이런 부분에는 소홀하면서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결국 청소년운동으로서의 어떤 활동과 연대를 하자는 말이 아닌 것 같네요.
5 비전 없음?
'아수나로 운동의 비전없음'이 만약에 아수나로 ― 또는 아수나로 안에서 일부 활동회원들이 가지고 있는 청소년운동에 대한 인식과 전망이 충분히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가리키는 말이라면 대다수의 아수나로 활동회원들이 당연히 동의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미 2009년 총회 때부터 그 이야기가 매 총회 때마다 나왔었고, 그래서 저번 총회의 결정에 따라 기본원칙 작업이나 뉴페 교육 작업 등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건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과 시도지, 새삼스레 2년 동안 주욱 되어온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인 것처럼 꺼내드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아수나로 운동의 비전없음'이 아수나로가 자본주의에 도전하지 않고 있다거나 연대운동 참여(정확히는 피엡님 글의 표현에 따르면 반자본주의적인 운동들, '현대차와 홍익대에 이어 각 대학 비정규직 투쟁, 아랍 지역의 혁명 지지, 핵 반대에 적극 참여')를 하지 않고 있어서 그렇다는 건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아수나로가 그런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굳이 꺼려하면서 활동의 영역을 좁히고 있다면 그런 얘기도 해볼 법도 합니다만, 그런 적도 없을 뿐더러, 아수나로는 정확히 말하면 '해야 하는/하고 싶은 활동들을 역량이 쫓아가지 못해서 허덕이고 있는' 것뿐이지요.
흔히들 오해하시는데, 활동은 말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활동의 역량은 소모적이고 유한한 겁니다. 역량은 유한하고 역량의 재생산과 확장(조직화)은 아수나로 자체에 맡겨져 있는 거죠. 그러므로 그런 연대운동을 벌인다는 건 아수나로의 제한된 역량을 어떻게 소모하고 재생산할 거냐, 하는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꼭 연대를 강조하는 분들은 그런 연대운동을 통해 아수나로의 역량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커질 거라는 듯이 낙관하더군요.
좀 더 덧붙이자면, 저는 우리가 공유해야 하는 건 '청소년운동의 정당성'과 '이 운동을 하는 것이 사회 변화에 유의미하다'라는 경험-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최종적인 이상의 달성 가능성' 같은 게 아니라요. 홍세화 씨가 얼마 전에 학생인권조례 이야기를 하면서 볼테르가 그랬다고 했었나, 세상에 열성적인 사람이 몇 있는데 그 중 둘이 광신도와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광신과 사익 추구는 그 목적 안에 이미 열성이 내재되어 있다구요. 하지만 우리가 가려는 민주주의나 인권이나 진보나 사회변혁의 길은 그 안에 열성이 내재되어 있지 않고 의지로 열성을 채워나가야 한다구요.
저는 사실 제시되는 목표와 비전 속에 이미 '열성'이 내재되어 있고 그 비전(좀 더 정확히는 '최종적 이상의 달성 가능성과 그 달성을 위한 행동 지침')에 의해 열성을 부여받고 운동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패나 독단의 문제를 비롯해서 위험성을 품고 있다는 생각도 하구요. 그리고 사람이 과연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는 건가, 사람을 움직이고 버티게 하는 것은 '이해관계'-'욕망'과 '가치'와 '의미'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도 좀 있지요.(그래서 우리가 공유해야 하는 건 '정당성'과 '변화에 유의미'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애초에 서로 증명 가능한 건 아닌 거 같으니 이정도만 던져두겠습니다.
저는 아수나로가 다른 운동과 어느 정도 대등하게, 그리고 유의미한 청소년운동 단체로서 충분한 기능을 할 수 있게 자격과 힘을 갖춰나가는 데 집중하자고, 청소년운동에 더 몰입하시라고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일단 '아수나로에 오는 사람들이라도 잘 붙잡기 위한 뉴페 교육 시스템 등의 확립'이라거나(부산 총회 때, 그리고 그 전 총회 때도 나왔던 얘기죠.) '동네 단위나 학교 단위에서의 청소년 조직화 방법' 등을 좀 더 머리 싸매고 같이 만들어보자구요. 지 앞가림도 못하면서 연대에 적극 참여하자고 하는 건 자족적인 활동밖에 안 돼요.
6 사족
평학과 전교조와 청소년다함께와 교육공동체 나다와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과 피엡님과 밤의마왕님과 발칙한님과 야우리시민님과 기타 등등에 대한 온갖 증오를 끌어안고 곱씹고 있는 시절이라서, 그런 증오가 글에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정중하게 쓰긴 했습니다만, 글 중간중간 어느 부분들에는 다소 날이 서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글이 얌전하고 친절해보이더라도 그건 이 글을 읽을 다른 회원 분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일 뿐이니까 그런 것에 너무 속지는 마세요.
위악적인 게 위선적인 것보다 좋은 법이죠.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하니까요. (거리서명 받을 때만 빼고)
0 시작하며
실은, 굳이 이런 글을 안 쓰려고 했습니다. 자기 주장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제가 최소한의 신뢰와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예, 뭐 자기가 주장한 만큼 그걸 책임지고 해나가겠지요. 어차피 올해 안에, 길게 봐야 올해 말 ~ 내년 초 사이에 병역거부를 앞두고 있는 저로서는, 실천이 담보되기만 한다면 굳이 청소년운동이나 아수나로에 관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를 아수나로 활동가라고 생각하고 아수나로가 어떤 청소년운동을 해야 하는지 깊이 있게 사유하고 자기 삶을 투자해가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수나로의 화석'인 저에게는 축복 아니겠습니까. 거기다 대고 그 사람들이 제 입맛에 맞는 사유와 주장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듯 보이는 글을 던지는 것은 과욕이겠지요.
그러나 피엡님의 요구도 있었고… 여튼 간에 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자칫하면 그냥 '무시'하는 걸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 (일시적이든 어떻든) 퇴장하더라도 특정한 주장을 주도적으로 주창해온 사람으로서의 역할은 다 해야겠지요. 그게 이후까지 이어질 논쟁의 시작을 담당하는 역할이든, 아니면 새롭게 제기되는 지배적 주장에 대해 상대역이 되어서 패배하는 역할이든.
물론 가능하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논쟁에서 저와 비슷한 입장의 주장을 제출해주기를 바랍니다만, 그럴 분은 아무래도 없을 것도 같습니다. 열심히 서명을 받으러 다니느라 매일 매일 녹초가 되고 있는 둠코라거나, 수원 일을 하면서 서울에 서명까지 도와주고 있는 난다에게 그런 걸 부탁하는 것은 아무래도 염치 없는 짓이지요. 이미 아수나로를 떠나서 좀 더 자유로운(??) 청소년활동가로 살고 있는 따이루에게 부탁하기도 그렇구요. 그래서 그냥 분당 한글 타자 700타를 자랑하는 제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 틈틈이 꾸벅꾸벅 졸면서라도 글을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0.5 논의의 방식
저는 사실 운동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주장이 옳은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운동에 관한 주장 중 상당수가 '검증 불가능'하니까요. 물론 '틀리지 않아야 할' 필요야 있겠지요. 하지만 명백한 오류나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은, 어떤 주장을 볼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주장의 맥락과, 그 주장이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주장의 효과가 뭐냐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따라서 저는 이 논쟁에서 특별히 논리적인 오류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아니라면 그 주장이 "틀렸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뭐 지금 논점이 되고 있는 게 별로 '틀린'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저는 다만 그 주장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제 주장의 지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지향이 저의 지향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실제로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떤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주장에 가해진 비판에 대해서, "그 비판은 이 주장과 배치되지 않는다, 이 주장을 반박하지 않는다, 이 주장을 기각하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건 때로는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비판이란 건 어떤 주장을 논리적으로 부정하거나 기각하는 게 아니라, 그 주장이 강조하고 있는 것, 그 주장의 효과에 대한 비판일 경우도 많거든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논리적으로 더 정교한 주장을 펼침으로써 논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진 않습니다. 오히려 더 핵심적인 문제는 저와 비슷한 위치에 서서 저와 비슷한 것들을 보고 있고(혹은 이 글을 읽으면서 보게 되고) 저와 비슷한 지향에 동의-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느냐 하는 거죠. 저는 지금까지 청소년운동에 뛰어들어서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반적으로 누구나 제가 보고 있는 현실과 비슷한 현실을 보고 저의 지향과 비슷한 지향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은연중에 믿고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게 이번 논쟁을 통해서든 운동의 전 과정을 통해서든 경험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그건 결국 제가 청소년운동에 대해 세운 관점조차도 저의 개인적 특질에서 비롯된 면이 더 크다는 뜻이고, 그건 제 개인의 역사에서는 굉장히 해묵은 비극을 재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의 역사는 여러분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 테니까 이 논쟁에서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도입부가 쓸데없이 장황해졌네요. 본론은 좀 간결하게 써보겠습니다.
1 역사적 사건 선택의 편의성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때로는 매우 편리한 일입니다. 수많은 역사의 사례 중에서 어떤 사례만을 골라서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고, 또 그러는 것도 '오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주장에 분명 '개연성'을 줍니다. 하지만 그 '개연성'을 '필연성'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 또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저도 종종 역사적 사례를 끄집어내곤 하지만, 그건 "이게 가능하다"라는 믿음을 주거나 선동을 하기 위한 것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러시아 혁명이 여성 억압이나 차별을 제거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베트남 혁명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동을 연구하면서 베트남에서의 혁명이 여성 억압이나 차별을 없애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여전히 공사 영역에서 가부장적 차별과 배제가 계속되고 있음을 밝힌 논문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예로,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자유시장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차별을 어떻게 약화시켰는지 일본인의 예를 들면서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같은 책 같은 챕터에서 미국 등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매커니즘으로 인종적인 차별과 격차가 계속 유지되는 모습을 암시하는 듯한 문장도 적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러시아 혁명기의 대안적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혁명 이후 소비에트연합(소련)나 중국에서의 교육의 폐해들을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이 경우에는 또 소련이나 중국이 사회주의였냐 아니였냐 하는 소모적인 개념 논쟁에 돌입하겠지만요.) 아니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나이에 따른 차별이나 아동에 대한 억압이 약화된 모습으로 계속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의 이야기가 공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벤포스타 같은 실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벤포스타는 망했다구요?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러시아 혁명기의 대안적 교육 실험이나 파리 코뮌은 뭐 안 망했나요? 역사 속의 사례란 그런 덧없는 편의성이 있지요.
2 68혁명?
잠깐 68혁명 이야기나 해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68혁명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베트남전이라는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를 읽어낼 것입니다. 그러나 68혁명을 경험하고 그 지반 위에서 논의를 펼친 사람들은 오히려 다른 문제설정을 제기하기도 하지요. 마르크스주의자 내지는 사회주의자인 사람들도 그래요. 그런 주장은 68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계급적 관점을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강조점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68혁명을 '반자본주의'라거나 '노동자 파업'이라는 키워드만을 강조해서 이해할 때 많은 것들이 누락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요. 예컨대 피엡님의 글과 달리 교육 문제에 대한 불만을 68혁명의 도화선으로 보는 해석도 많습니다. '욕망'과 '혁명'이라는 문제로 68혁명을 이론화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 같은 것도 그렇구요.
68혁명에 대해서 좀 더 활동가스러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68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청소년운동이나 대학생운동 조직이 없었을까요? 학생 자치 조직은요? 청소년-대학생들의 이해관계를 주장하고 활동하는 조직은요? 우석훈-박권일 말마따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10대 20대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계속 토론하고 공론을 형성하는 문화는요?
사실 저도 68혁명에 대해 그렇게 깊게 공부해보지는 않았지만, 중고등학생들도 학교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동맹휴업을 한 투쟁에서 중고등학생들의 광범위한 조직화가 사전에 없었다고 보는 건 좀 비현실적일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프랑스의 경우에는 68혁명의 발단은 대학교 여자 기숙사에 남학생들이 출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대학을 점거한 사건이었다고들 하지요. 또 그 이전부터도 리옹, 파리, 기타 여러 지역의 학생조직들이 교육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소책자를 배포하고 활동을 벌여왔습니다. 10대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알려진 바가 적지만, 중고등학생들의 경우에도 이러한 조직과 운동이 꽤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조직화된 기반이 없었다면 68혁명은 한국의 촛불시위마냥 거리에서 광장에서만 벌어지고 학교 등에서 전면적으로 벌어지지 못했겠지요.)
그렇다면 베트남전쟁 운운 하기 전에 68혁명이 가능했던 그런 기반에 주목해보는 건 어떨까요? 굳이 68혁명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제 입장은 그래요. 10대 청소년들이 입시경쟁에 과도하게 내몰리고 종속되는 조건을 바꾸고, 학교 안에서 자치나 표현, 결사의 자유 등을 어느 정도는 보장받고, 자신들의 집단적-계급적(여기서 '계급'은 '미성년 계급'에 가깝습니다.) 욕망과 이해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일정 부분 이루어져야 68혁명 비스무레한 거라도 가능할 거라는 거죠. 청소년운동이 그런 '혁명'과 같은 형태의 사회 변화를 꿈꾸든 꿈꾸지 않든 간에, 그런 것(청소년들 삶의 조건 변화, 교육의 변화, 조직화)을 실현시키는 게 운동의 일차적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추신하자면, 저는 역사가 구체적인 부분에서 재현적이거나 반복적이라는 전제에 그리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대대적인 대중운동이나 혁명이 촉발된 적이 많기나 하나요? 이라크전 반대나 걸프전 반대가 뭐 얼마나 그런 걸로 이어졌나요? 베트남전 반대 말고 그런 사례를 그다지 들어본 적이 없네요. '유럽에서 반전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라는 소식이야 많습니다만. 그리고 그런 걸 과학적인 방식으로 예측하거나 해석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과거에 이랬으니 미래에도 이럴 것이고 그러니 우리는 이래야 한다.'라고 말하는 건, 추상적/원리적인 부분에서는 해볼 법하지만, 구체적인 부분에 적용하면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2008년에 그렇게 대대적인 시위로 이어질 거라고 예측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있나요? 제가 2008년 촛불집회나 2002년 촛불집회 등의 경험을 가지고서 그런 대대적인 사회적 운동을 통해서 청소년운동으로 유입되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이모씨처럼 찌질하고 같이 활동하기에 문제가 많더라, 라고 일반화해도 될까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개연성 있는 설명도 저는 제시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욕 먹기는 딱 좋고 또 별 의미도 없는 주장이네요. 여하간 그런 점에서 저는 '혁명'에 관해서는 차라리 박노자 씨 식의 태도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만.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414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464 )
3 청소년 조직화?
피엡님은 이렇게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직화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서 다른 반자본주의 운동들에 참여함으로써 조직력을 키우는 데 보탬이 된다고 적고 있지 않느냐구요. 그런데 피엡님의 그 글에는 사실 두 층위가 혼동되어 있습니다. 그게 피엡님의 고의인지 실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글 안에서는 '미조직 청소년들을 조직할 방법'과 '이미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신감이나 힘'에 대한 내용이 섞여 있어요. 그 둘을 구분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일단 '미조직 청소년들을 조직'하는 데에 반자본주의적인 운동에 참여하는 게 그다지 큰 효과는 없습니다. 2008년 촛불집회 수준으로 대대적인 운동, 미조직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집회가 아니라면요. 사회 전반의 정세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동의하긴 하지만, 상당수 청소년들은 신문도 뉴스도 잘 보지 않는 상황에서, 그게 체감될 만큼의 대대적인 수준의 변화가 아닌 이상 과연 얼마나 영향이 있을까요? 청소년들이 과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화 약속을 받아낸 것을 알고서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활동에 나설까요?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 가지 의문들이 계속 듭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미조직 청소년들이 촛불집회에 나오고 하다가 지금은 잘 안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건 과연 청소년들이 이명박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차이를 재봐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교육상황의 변화 같은 영향이 더 클까요? 만약 사회 전반의 변화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마치 시민들이 승리한 것 같은 분위기가 가득 차있을 때, 학교 현장에서 미조직된 학생들의 저항의 움직임 등이 작게라도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일단 알려진 수준에서는, 우리는 조직화된 청소년들(밤의마왕이라거나...)의 운동 외에는 그런 것을 보지 못했는데, 단순히 묻혔기 때문일까요, 어떨까요?
경험적으로도, 아수나로도 2006년에 '전쟁에 반대하는 청소년들' 같은 활동을 했지만 미조직 청소년들이 반전 운동 등을 통해 조직화된 경우는 본 적은 없긴 하네요. 청소년들의 사회 운동 참여나 사회 참여 전반이 틀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연대 활동을 통해 조직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 가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조직화를 하고 운동을 벌임으로써 그런 여러 분야의 사회 운동에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것도 더 활발해질 수 있겠지요.
그럼 '이미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자신감'은 어떨까요. 이 부분은 그나마 경험적으로나 설명적으로나 설득력이 있긴 합니다. 저는 만약에 다른 어떤 운동은 성공하는데(무상급식이라거나?) 청소년운동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인 현실을 보며 매일매일 열등감도 느끼고 짜증도 느끼겠지만, 예, 어떤 분들은 다른 운동이 성공하는 걸 보고 혹시 청소년운동에도 자신감을 얻으실지도 모르겠네요.
여하간에 저는 '이미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운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특별히 반대하거나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활동회원 중에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고, 그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욕망이 있을 테니까요. 그런 욕망을 전체주의적으로 억압할 게 아니라면, 아수나로 안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그런 활동에 어울려 다니는 것은 나쁜 일도 아니고 막을 일도 아니겠지요.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경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얻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요. 피엡님의 글이 아수나로 차원에서의, 혹은 청소년운동 차원에서의 연대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하는 근거나 아니면 그런 활동의 방식과 방향을 이야기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요.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보면 어떨까요? 현대자동차 노동자 투쟁이 승리하는 것과 어느 한 학교에서 학내시위가 일어나서 목표한 변화를 일정 부분 달성하는 것, 둘 중에 뭐가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까요? 저는 당연히 자기와 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투쟁인 후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굳이 사회 전체의 분위기나 변화나 청소년 활동가들의 자신감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청소년운동이 아닌 '반자본주의 운동'(특히 리비아나 반핵 등)을 이야기하는 건 왜일까요? 청소년운동 안에서 성과를 만드는 게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더 좋은 일일 텐데 말이죠.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이런 두 가지 전제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겁니다.
ⓐ청소년운동이 아닌 '어떤 반자본주의 운동'이 성공하고 승리할 확률이 뚜렷하게 더 높다.
ⓑ청소년운동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만들지 못하지만 '어떤 반자본주의 운동'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만들 수 있거나 청소년 활동가들의 가슴에 뜨거운 것을 심어줄 수 있는 특수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우월한 운동이다.
물론 저는 두 전제 모두에 비판적입니다.
저는 "청소년 활동가가 다른 반자본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그 반자본주의 운동이 성과를 냄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에 대해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그 효과는 청소년 활동가가 청소년운동에 힘을 쏟고 성과를 얻음으로써 얻는 것과 크게 다른 거냐구요. 그리고 그 둘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냥 청소년운동에 좀 더 집중해도 되지 않냐구요. (더 집중하라고 강요하기 위한 논리는 아닙니다. 오해는 마세요. 앞서 '다양한 청소년 활동가들의 다양한 욕망'의 차원에서는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피엡님의 글은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년운동은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므로 청소년활동가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청소년운동이 아닌 다른 운동의 승리를 경험하자."랄까요? 이렇게 요약하는 건 물론 제 폭거겠지만, 그렇게 읽히는 부분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요. 저라면 청소년운동이 성과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니까 더 청소년운동에 힘을 쏟자, 라고 할 텐데요.
아, 그런데 반대로 (2008년 촛불집회처럼?) 그런 운동들이 패배했을 때 상실감이나 좌절감을 느끼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궁금하기는 합니다. 굳이 따지면, '이길 거 같은 싸움'만 골라서 참여하지 않는 이상은, 별로 승률이 좋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4 청소년운동에만 매몰되어 있어?
이것도 일종의 역사(?) 해석의 편향성일 수 있는데, 저는 청소년활동가들이 오히려 청소년운동에 너무 몰입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아수나로 활동하는 활동회원 중에 아수나로 외에 다른 사회단체나 다른 운동에 발 하나 안 걸친 사람이 절반이나 될까요? 아수나로나 청소년운동의 압장에서 청소년인권이나 청소년운동에 대해서 공부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자기 삶의 주된 걸로 삼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들 하세요? (물론 아수나로가 상근비 한 푼 못 주면서(끽해야 월 5만원 주면서) 이런 걸 요구하는 게 부당하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이야기로 들어가면 우리가 아수나로가 어때야 한다거나 아수나로 사람들이 어때야 한다거나 하고 논의하는 모든 게 와장창 무너지니까, 우리 그러지는 맙시다.)
다들 아수나로 하면서의 경험들을 어떻게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전태일 열사 노제 노동집회 간다고 다들 안 와서 아수나로 서울지부 공부모임 무산된 적이라거나, 촛불집회나 동성애자 쪽 행사 있다고 해서 아수나로 회의 시간 조정하던 기억들이 더 생생하네요. 수원지부나 경남중부지부는 또 어떤가요. 수원지부는 수원촛불을 통해, 경남중부지부는 노동자 투쟁 등에, 지역에서의 운동 사안들에 열심히 참여하고 같이 하고 있지요. (저는 이런 것들도 지역적 특성상 지역운동과의 관계 유지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저는 오히려 "아수나로/아수나로 활동회원들은 지금보다 더 청소년운동에 몰입해야 한다"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자기가 최소한의 소양과 성실성과 신뢰를 갖춘 청소년활동가도 되지 못하면서 '좌파'나 '진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분들을 가끔 보는데, 그럴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지요. 뭐, 그분들이 스스로 청소년운동을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이런 류의 활동을 활발히 하는 청소년단체가 아수나로 뿐이라서 가입해서 회원으로서 발만 담그고 있고 싶으신 거라면 제가 어쩔 도리야 없습니다.(그래서 청소년운동이 좀 더 다양해지고 외연이 넓어져야 한다니깐요. '아수나로'가 아니라.) 그럼에도 저는 그런 분들에게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라면 이 집회 저 집회 다니거나 이 현장 저 현장 지지 방문 가기 전에, 직접 활동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맡아서 뛰어들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지만요.
그리고, 물론 연대를 추상적인 차원에서 사고하는 분들은 잘 생각하지 않는 부분이겠지만, 저는 지금 아수나로가 다른 운동에 연대하니 어쩌니 할 상황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청소년운동에만 더 몰입해야 연대할 것도 더 많아진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 성급하게 이 문장에서 또 예단하는 분들이 있을 텐데, 여기에서 연대할 상황이 아니라는 말은 아수나로가 조건이 어렵기 때문에 아수나로 혼자 살아남기도 빠듯하다, 이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일단 지금 같은 규모와 역량의 청소년운동이 어느 운동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표한다고 해도 그 영향력이나 의미는 코딱지 만큼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노동자운동으로 비유하면 '금속노조'가 조직적으로 결의를 모아 참여를 선언하는 모습과, 한 50명 규모의 노동운동 서클 하나가 지지를 표하고 참여를 선언하는 모습을 비교해보세요. 후자에 자족적 의미 외에 어떤 의미가 있으려나요? 지금 같은 규모의 청소년운동이 어디 집회에 대오를 이루어 참여한다고 해서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에 얼마나 차이가 생길까요.
단순히 힘이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라는 걸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죠. 예컨대 지금 아수나로와 좀 활동력 있고 조직력 있는 여성단체가 만나서 전면적인 연대를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겠습니다만, 대체로 여성단체에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후원이나 도움을 받는 게 훨씬 많겠지요. 필요하다면 후원과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런 관계에서 건강한 연대 관계가 유지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 그런 부담감 없이 집회에 참가하거나 지지방문을 하는 정도의, 얄팍한 수준의 연대를 하면 되는 걸까요? 하지만 그런 경우에조차도 대개는 비대칭적이고 불공평한, 아니 운동의 사회적 영향력과 힘을 고려하면 오히려 '공평한' 모습이 연출되곤 하지요. 우리는 3.8여성대회에 가지만 여성단체들은 학생의 날 집회에 안 오는 그런 모습이요. (하지만 우리는 여성단체로부터 후원을 받을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게 그런 다른 운동 단체들의 잘못이라고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지금 청소년운동의 조건이 그렇다는 겁니다. 마치 '연대'가 당위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며 그런 당위를 설파하고 설득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요. 물론 활동가들 몇 명은 그런 식으로 설득하고 움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특히 집단이) 그런 식의 당위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두 번째로, 청소년운동에만 더 몰입해야 연대도 더 많아진다는 이야기인데요. 얼핏 잘 이해가 안 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참 어떻게 보면 자명한 건데 말이죠. 요컨대, 청소년활동가로서 자신의 위치와 관점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더 많은 연대의 기회와 지점들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기웃기웃거리는 사람보다는 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다, 이런 부분을 같이 하자고 제안해야겠다, 이런 게 보이는 사람(조직)이 그런 자기 정체성 속에서 더 많은 연대를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조직)에게 연대 활동은 어느 '외부'로 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활동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유하자면 자기애가 확고하게 있어야만 연애(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잘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할까요.
그리고 실제로 청소년운동 자체만으로도 연대의 폭은 넓습니다. 지금까지 경험이 있는 것만 꼽아보아도, 지문날인-정보인권, 청소년노동, 교육-대학-교사-등록금-예산, 표현의 자유, 문화운동(청보법 등), 여성 청소년,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전시 아동-청소년 ... 등등 참 많지요. 이렇게 청소년운동에만 더 몰입하고 청소년운동 안에 있는 중요한 의제들, 다른 운동들과 공유하는 지점들을 발전시켜야 청소년운동으로서 다른 운동들과의 더 많은 연대가 가능해지는 것인데, 이런 부분에는 소홀하면서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결국 청소년운동으로서의 어떤 활동과 연대를 하자는 말이 아닌 것 같네요.
5 비전 없음?
'아수나로 운동의 비전없음'이 만약에 아수나로 ― 또는 아수나로 안에서 일부 활동회원들이 가지고 있는 청소년운동에 대한 인식과 전망이 충분히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가리키는 말이라면 대다수의 아수나로 활동회원들이 당연히 동의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미 2009년 총회 때부터 그 이야기가 매 총회 때마다 나왔었고, 그래서 저번 총회의 결정에 따라 기본원칙 작업이나 뉴페 교육 작업 등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건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과 시도지, 새삼스레 2년 동안 주욱 되어온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인 것처럼 꺼내드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아수나로 운동의 비전없음'이 아수나로가 자본주의에 도전하지 않고 있다거나 연대운동 참여(정확히는 피엡님 글의 표현에 따르면 반자본주의적인 운동들, '현대차와 홍익대에 이어 각 대학 비정규직 투쟁, 아랍 지역의 혁명 지지, 핵 반대에 적극 참여')를 하지 않고 있어서 그렇다는 건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아수나로가 그런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굳이 꺼려하면서 활동의 영역을 좁히고 있다면 그런 얘기도 해볼 법도 합니다만, 그런 적도 없을 뿐더러, 아수나로는 정확히 말하면 '해야 하는/하고 싶은 활동들을 역량이 쫓아가지 못해서 허덕이고 있는' 것뿐이지요.
흔히들 오해하시는데, 활동은 말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활동의 역량은 소모적이고 유한한 겁니다. 역량은 유한하고 역량의 재생산과 확장(조직화)은 아수나로 자체에 맡겨져 있는 거죠. 그러므로 그런 연대운동을 벌인다는 건 아수나로의 제한된 역량을 어떻게 소모하고 재생산할 거냐, 하는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꼭 연대를 강조하는 분들은 그런 연대운동을 통해 아수나로의 역량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커질 거라는 듯이 낙관하더군요.
좀 더 덧붙이자면, 저는 우리가 공유해야 하는 건 '청소년운동의 정당성'과 '이 운동을 하는 것이 사회 변화에 유의미하다'라는 경험-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최종적인 이상의 달성 가능성' 같은 게 아니라요. 홍세화 씨가 얼마 전에 학생인권조례 이야기를 하면서 볼테르가 그랬다고 했었나, 세상에 열성적인 사람이 몇 있는데 그 중 둘이 광신도와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광신과 사익 추구는 그 목적 안에 이미 열성이 내재되어 있다구요. 하지만 우리가 가려는 민주주의나 인권이나 진보나 사회변혁의 길은 그 안에 열성이 내재되어 있지 않고 의지로 열성을 채워나가야 한다구요.
저는 사실 제시되는 목표와 비전 속에 이미 '열성'이 내재되어 있고 그 비전(좀 더 정확히는 '최종적 이상의 달성 가능성과 그 달성을 위한 행동 지침')에 의해 열성을 부여받고 운동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패나 독단의 문제를 비롯해서 위험성을 품고 있다는 생각도 하구요. 그리고 사람이 과연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는 건가, 사람을 움직이고 버티게 하는 것은 '이해관계'-'욕망'과 '가치'와 '의미'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도 좀 있지요.(그래서 우리가 공유해야 하는 건 '정당성'과 '변화에 유의미'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애초에 서로 증명 가능한 건 아닌 거 같으니 이정도만 던져두겠습니다.
저는 아수나로가 다른 운동과 어느 정도 대등하게, 그리고 유의미한 청소년운동 단체로서 충분한 기능을 할 수 있게 자격과 힘을 갖춰나가는 데 집중하자고, 청소년운동에 더 몰입하시라고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일단 '아수나로에 오는 사람들이라도 잘 붙잡기 위한 뉴페 교육 시스템 등의 확립'이라거나(부산 총회 때, 그리고 그 전 총회 때도 나왔던 얘기죠.) '동네 단위나 학교 단위에서의 청소년 조직화 방법' 등을 좀 더 머리 싸매고 같이 만들어보자구요. 지 앞가림도 못하면서 연대에 적극 참여하자고 하는 건 자족적인 활동밖에 안 돼요.
6 사족
평학과 전교조와 청소년다함께와 교육공동체 나다와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과 피엡님과 밤의마왕님과 발칙한님과 야우리시민님과 기타 등등에 대한 온갖 증오를 끌어안고 곱씹고 있는 시절이라서, 그런 증오가 글에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정중하게 쓰긴 했습니다만, 글 중간중간 어느 부분들에는 다소 날이 서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글이 얌전하고 친절해보이더라도 그건 이 글을 읽을 다른 회원 분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일 뿐이니까 그런 것에 너무 속지는 마세요.
위악적인 게 위선적인 것보다 좋은 법이죠.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하니까요. (거리서명 받을 때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