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사람이 되어라”와 “학생도 사람이다”

공현 2011. 5. 18. 05:21


“사람이 되어라”와 “학생도 사람이다”


공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 「사람이 되어라」는 한국의 학생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 애니메이션 속에서 학생들은 모두 사람이 아닌 원숭이이다. 교문에 커다랗게 박힌 글자가 수백 학생들의 등굣길을 내려다보고 있다. “먼저 사람이 되어라.” 먼저 사람이 된 선생님이 아직 사람이 되지 못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 학교에서 말 잘 듣고 남을 도우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곳. “대학 가서 사람 되자.”라는 급훈이 걸려 있는 곳. 「사람이 되어라」에서 그리고 있는 학교의 모습이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인 원철이는 숲에서 학교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는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사람이 된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원철이에게 오히려 화를 낸다. “니 맘대로 사람이 되면 어떻게 해! 사람은 대학 가고 나서 되는 거야!”라고 호통을 치며 체벌을 하는 선생님. 학교를 뛰쳐나온 원철이는, 사람 안 될 거냐고 어서 학교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어른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전 이미 사람이에요!”


나는 종종 “학생도 사람이다!”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에서 학생인권 캠페인 같은 것을 하곤 한다. 최근에는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운동을 하다보니 거의 매일 같이 3개월 동안 하루 6~8시간씩 캠페인을 했다. 그러다보면 지나가던 사람에게서 “아니, 그럼 학생이 사람이지 돼지에요?” 같은 장난스러운 질문을 심심찮게 받곤 한다. 가끔은 “「사람이 되어라」에서 보니까 원숭이던데요.” 하고 대답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말할 것도 없겠지만, “학생도 사람이다!”라는 말이 학생들이 생물학적으로, 지금까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현생 인류)가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오히려 생물학적으로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사람으로 대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학생을 사람대접하지 않는 사회

학생들이 사회적으로 사람대접을 못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선 학생 ― 청소년들은 우리 사회에서 직접적으로 ‘폭력’을 당해도 되는 몇 안 되는 집단 중에 하나이다.(다른 집단으로는 군인 정도가 있겠다. 군인의 경우, 직접 때리는 구타는 금지되어 있지만, 얼차려나 기합은 가능하다. 교도소에 수감된 수감자들의 경우, 때리는 것이나 ‘기합’을 주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구속구를 채우거나 독방에 가두는 것은 가능하다.) 그나마 최근에 서울, 경기도, 강원도 등은 학교에서 체벌 완전 금지를 선언했고 교육과학기술부 또한 법령을 개정하여 학교에서의 때리는 체벌은 금지한다고 발표한 것도 큰 진전이다. 그러나 여전히 가정이나 학원에서는 반(半)합법적으로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많은 학교에서 체벌이 일어나고 또 묵인되고 있다. ‘오리걸음’, ‘앉았다 일어서기’ 등의 기합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학생들까지 있는데도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기합’ 같은 형태의 ‘때리지 않는’ 체벌은 계속 허용(조장?)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학생 ― 청소년들은 자신과 관련된 사안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권리를 원천 봉쇄당한 몇 안 되는 집단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질적으로는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더라도 절차적으로라도 의견을 제시하고 투표나 공청회나 기타 여러 형태로 자신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은 나이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투표권을 가지지 못하며, 이에 더해서 정당 가입, 정치 활동 등을 포괄적으로 제한당한다. 최근에 온라인게임 셧다운제 때문에 위헌소송을 검토하다가 안 건데, 심지어 자신의 기본권 침해 문제에 대해 헌법재판을 청구하려고 해도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또한 청소년들은 주민발의나 주민투표 등, 법적으로 유효한 서명에 참여할 수도 없게 되어 있다. 교육 정책이나 청소년 정책을 결정할 때 정부에서는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 절차조차 제대로 가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학생회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아니라 학생들의 ‘특별 활동’의 한 종류로 규정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밖에도 하나하나 청소년들의 ‘당연한’ 일상을 뜯어보면 참 당연하지 않은 일이 많다. 예컨대 성적이 공개되거나 성적표가 보호자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발송되는 모습이라거나,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할지 말지를 정할 때 본인의 동의를 묻는 게 아니라 보호자의 동의를 묻는 모습은 어떠한가? 학교에서 일어나는 자의적 소지품 검사는 어떠한가?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무작정 위험한 물건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며 경찰이 소지품 검사를 한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일까? 극장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고 해서 극장 직원이 관객의 휴대전화를 압수한다면, 얼마나 화가 날 것인가? 어른들이 폐에 질환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증서를 가지고 있고 담배를 살 때 폐 질환이 없으며 담배를 피어도 건강에 큰 해악이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면? 종교재단이 세운 회사라고 해서 직원들이 전부 다 그 종교 의식에 강제로 참여해야 한다면?



‘덜 된 존재’와 인간 사이에서

물론 학생인권 문제는 지난 10년을 주욱 훑어보면, 많이 개선되었다. 학생인권을 외치는 사회적 운동이 시작된 지가 거의 15년 안팎이니까 비교적 단기간에 이루어낸 뿌듯한 성과인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여러 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는 성과이기도 하지만 또한 많은 숙제를 청소년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안겨주고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는 등 지역별로 다른 학생인권 정책을 펴면서 지역간의 격차, 학교간의 격차도 커지고 있다. 같은 나라에서 어느 지역은 학생들의 학칙 개정 참여를 보장하고 어느 지역은 전혀 보장하지 않는가 하면, 같은 동네에서도 어느 학교는 야간자율학습이나 보충학습을 강제로 시키고 어느 학교는 완전히 자율로 하는 모양새다.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느냐, 어느 학교에 입학했느냐, 어느 선생님들이 있느냐에 따라서 오락가락 하는 권리라면,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그건 차라리 복불복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아직 제대로 건드리지 못한 인권 문제도 많이 있다. 예컨대 UN아동권리위원회는 2003년, 한국의 지나치게 경쟁적 교육환경이 아동의 발달권 등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므로 개선하라고 권고했던 바 있다. 두발자유, 강제적 자율보충학습, 학생자치,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 쉴 권리 등 최소한의 학생인권이 어느 정도 개선되고 나면 그 다음에 부딪치게 될 주된 인권 문제는 바로 교육 문제일 것이다. 교육 정책 자체가 인권 침해가 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 권리나 경제적 권리(‘알바’라고 불리는 노동의 문제나 주거권 등) 같은 문제와 청소년보호법 같은 청소년 정책의 문제도 중요한 학생인권, 청소년인권의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다.

지금도 학생인권을 이야기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학생이 어디서 머리를 염색하느냐부터, 심지어는 강제 자율보충학습, 강제 종교의식 참여, 성적 차별 등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옹호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모여서 얘기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학교 안에서 기본적인 언론․표현의 자유, 양심․사상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자고 하는 것을 가지고서도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육 정책의 문제나 정치적/경제적 권리 등을 이야기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상상하기도 두려울 정도이다.

하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게, 깊게 가져보면 어떨까. 청소년들의 정당 가입이나 정치 참여 등, 이미 유럽, 남미 등 여러 다른 나라들에서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북서유럽 또한 68혁명 등 학생들의 많은 요구와 행동, 그리고 사회적 갈등을 겪으면서 학생인권 상황이 개선될 수 있었다. 1968년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고 시위를 하는 68혁명의 와중에 영국의 청소년들이 발표했던 요구안을 보면 지금의 한국 학생들이 요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자유롭게 조직을 결성․가입하고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움 없이 학교나 교사에 대한 불만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의 동의서는 학생 의사가 아니므로 정당하지 않다”, “우리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체벌은 없어져야 한다”, “양심에 반하는 종교교육이나 예배는 거부돼야 한다” 등등. 한국 역시 학생들, 청소년들의 “우리도 사람이다”라는 외침과 행동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원숭이’, 아니 ‘덜 된 존재’(미성년자) 취급받는 학생 ― 청소년들이 ‘사람’이 되는 제대로 된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