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저번주에 자퇴서를 냈는데…

공현 2011. 10. 14. 18:23

저번주에 자퇴서를 냈는데…


  저번주에 자퇴서를 냈습니다. 아직 처리가 됐는진 모르겠습니다. 흠… 민망하네요. 뭐 김예슬 씨 마냥 거창하게 글을 쓸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 이게 그냥 단순히 개인 사정상 자퇴는 아니니 만큼 얘기를 하긴 해얄 것 같아서, 굳이 또 이런 걸 써붙입니다. 독창성도 없군요. 민망하지만. 꾹꾹 눌러 담아 1장 안에 끝내보죠. 사실 2장은 붙이기도 힘들어요.

  제가 대학을 그만두는 이유는, 일단은 대학서열체제와 입시경쟁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고 이번에 병역거부를 결심하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청소년운동을 해왔습니다. 왜 그, 두발자유라거나 학생인권조례라거나, 일제고사 반대라거나 선거연령 인하라거나 그런 거 있잖아요. 그 굵직한 의제 중 하나가 입시폐지입니다. 입시경쟁교육, 대학 입시에 초중고 교육이 종속되어 있는 상황을 바꾸자는 거죠. 그러면서 수능 자격고사화라거나 대학평준화라거나 학력․학벌차별금지 같은 여러 가지 것들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저는 애초에 서울대에 오기 싫었습니다. 학벌을 비판하면서 최상급의 학벌을 가진다는 거, 영 그렇잖아요? 결국은 지원하고 입학했지만 말입니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영향이 있었지만, 뭣보다 제가 확신이 없었고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죠. "대학 가냐 마냐가 중요한 문제일까? 청소년운동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 아닐까? 그래도 대학을 성적에 맞게 가놓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대학에 와서도 문제의식은 계속 커져갔습니다. "서울대 학생"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에 발붙이기도 어려웠습니다.
  어떤 분들은 "서울대 온 건 내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입시체제가 정당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저 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보다 더 노력해도, 저보다 그 학문에 대한 감도 지식도 뛰어난데도 성적은 낮은 친구도 있었고, 여러 측면에서 저보다 더 남들에게 가치가 있는 사람 같은데도 입시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우연히 제가 입시에 적합한 소질과 능력을 가졌던 것뿐 아닐까요? 아님 시험 볼 때 운이 좋았을 뿐 아닐까요? 또, 대입에 종속된 교육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건 굳이 제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익히들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학교에서 저를 제 시험 성적으로 보는 게 싫었습니다. 사람을 문제풀이 점수로 '평가'하는 시스템, 그건 어쨌든 '공정'할 수도 '인간적'일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서열화나 입시 문제는 대학 교육 차원에서도 악영향이 있습니다. 등록금 문제도 서열화와 초과수요 문제와 깊은 인과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의 관심과 적성을 잘 알지도 못하고 성적 맞춰 가는 학생들도 많고,(저처럼 우물쭈물하다가 오는 경우도 있고;) 이른바 '지잡대' 학생들이 감당해야 하는 열등감, 그런 데서 비롯되는 여러 교육불가능성들 등등 문제가 많죠. 따져보면 서울대가 강의의 종류가 다양하고 질이 좋다는 것도 일종의 특혜이고 차별인 것 아닐까요. 사회에서의 학력․학벌 차별 문제는 굳이 더 말할 것도 없을 테죠. 저는 그 모든 것에, 문제제기하고 저항하고 싶은 것입니다.

  쓰다 보니 거창해졌지만, 그냥 서울대 별로 오고 싶지 않았던, 학교도 잘 나오지도 않았던 웬 놈이, 등록금 낼 돈이 없어서 그만둔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맨날 수업 빼먹고 F 받고 과 행사도 참여 안 하던 사람이 막 그만둔다고 크게 떠들자니 민망하긴 하군요. ㅠㅠ 실은 대학에 계속 학적을 유지하던 이유 중 하나가 군대 문제였는데, 이번에 병역거부로 마음을 굳히게 된 것도 계기였습니다. 병역거부는 원칙적으론 군휴학도 안 되어서 이미 일반휴학을 꽉꽉 채워 쓴 저로선 어차피 일단 그만둬야 하거든요. (병역거부 얘기는 궁금하시면 나~중에 소견서 같은 걸 봐주세요. 분량상;)
  일단 지금은 이렇게 그만두고, 병역거부 마치고 출소한 뒤에 그때 가서 재입학해서 공부할지 말지 고민해볼까 합니다. 그때는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으면 훨씬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공부해볼 수도 있을 텐데요. 서울대 법인화도 철회되어 있으면 백만배 좋을 겁니다. 대학이 법인화되고 기업화되는 흐름은 결국 대학서열화나 차별을 더 뚜렷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대학 다니고 싶은 상황과는 거리가 더 멀어질 것 같거든요. 솔직히 법인화 추진 과정이나 본부 점거한 분들 징계 때린 것 보고 얼마나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던지….

  저 혼자 튀어보겠다고 이러는 건 아닙니다. 올해 수능철에 맞춰서, 고3 또는 19살인 청소년들 중 대학을 안 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대학입시거부선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스무살 이상의, 대학을 안 갔었거나 그만둔 사람들이 <대학거부선언>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도 거기에 같이 하는 활동의 일환이고, 그걸 알리려는 목적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는 있지만, 제가 여러분도 같이 자퇴하자거나 뭐 그런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대가 무슨 절대 다녀선 안 되는 악의 소굴인 것도, 서울대 다니는 게 무슨 죄 짓는 것도 아니니까요. 저는 죄책감을 요구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하기사 이런 글 하나 보고 갑자기 대학 때려치워야겠다고 결심할 분도 별로 없겠지만요.) 다만 이걸 보고 여러분이 서울대 재학생/졸업생이라는 게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주시고 입시경쟁에 대해 학벌 사회와 대학 교육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자명한' 입시와 교육과 대학 체제에, 물음표를 던지고 싶은 거니까요. 그리고 대학을 자퇴하지 않더라도 여기에 공감하고 동의하셔서 함께해주신다면, 정말정말 좋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