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병역거부소견서 초안 :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한다는 현실을 바꾸고 싶습니다

공현 2011. 11. 30. 14:43


<병역거부소견서>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한다는 현실을 바꾸고 싶습니다


  11월 18일, 할아버지 병환 등 때문에 대구에 있는 와중에, 수원에 제가 사는 집에 징집영장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19일에 대구에 온 애인이 영장을 전해줬습니다. 11월 29일이 입영일이었지만, 입영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병역거부를 한 것이지요. 병역거부를 한 이유, 예 소위 '소견서'를 길게 쓰고 싶진 않습니다.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이기도 하고, 그간 제가 너무 많은 말로 사람들을 속여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속여 온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지만, 저 자신이 사람들을 속이는 일에 슬슬 지쳤거든요.

  제가 대체 언제부터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되었는지 돌이켜보았습니다. 국가주의․전체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열다섯살 즈음이었습니다. 모두 같은 옷을 강제로 입히고, 같은 머리모양을 강요하고, 개인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교육을 하는 학교생활에서부터 문제의식은 시작됐습니다. "사회(국가)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사회(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필요최소한의 것들뿐이다. 내 자발성과 동의에 기초하지 않은 희생이나 애국을 강요하는 것은 이상하다. 우리는 국가의 부속품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싹트면서, 이미 "군대"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박노자씨의 책 등을 통해서 고등학교 때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열심히 하던 고3 때, 우연히 오정록씨의 병역거부소견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소견서의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서 박혔습니다. 그 소견서가 뭐 특별히 미문으로 되어 있거나 한 건 아니었을 것이고,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하고 군사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 명료하게 키워나가던 시기에 만난, 생생한 병역거부자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병역거부자들의 존재에 대해 안 뒤로, 제 마음 속에는 항상 병역거부라는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 선택지는 어느 순간 저에게 당연한 것, 징병검사에서 면제라도 받지 않는 이상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처럼 자리 잡았습니다.(그리고 저는 징병검사에서 1급을 받아버렸지요.) 병역특례나 해외봉사 같은 여러 선택지들을 애써 생각해보려 했지만, 그런 많은 '대체복무'들도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 나름의 특별한 기능이나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 뒤에는 마음이 멀어졌습니다.

  저에게 병역거부는 단순히 윤리적 결단은 아닙니다. 저는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했던 이래로 항상 저를 활동가로 생각해왔습니다. 활동가란 단지 개인의 윤리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 정치적인 실천을 하는 사람이지요. 병역거부 역시, 뭐 그걸 비록 청소년인권운동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마찬가지의 실천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우리 사회의 병역거부자 기록에 숫자 하나를 더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전쟁 훈련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수감됨으로써, 개인의 인권을 다양성을 더 존중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 우리 사회가 평화에 가까워지고 인간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일에 코딱지만큼의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만나는 이들에게 제가 병역거부자라고 말하면서,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군대와 군사주의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존재로 살고 싶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의 병역거부 소식을 듣고 병역거부소견서를 읽고 마음이 움직였듯이, 저의 실천이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되길 바라면서요.
  뭐, 군대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것 맞습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군대에 가기 싫은데 군대를 가야만 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안 가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군대에 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군대에 가기 싫은 사람들, 적지 않을 테지요. 그런 분들에게도 저의, 그리고 우리들의 병역거부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닥치고 보니, 병역거부는 제 삶에서는 제가 사회적 소수자가 되는 하나의 선택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앞으로 제 삶의 어떤 가능성들은 제한하고, 어떤 가능성들에 더 집중하게 만드는 선택이 되겠지요.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후회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병역거부는 제가 바라는 제 모습대로 살기 위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십년 이십년 삼십년 후에, 군대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어떻게 했노라고 이야기하고 싶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면 역시 병역거부가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군대에 복무하고 제대를 해서 살아가는 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다른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춰봤습니다. 제가 처음 만났던 병역거부소견서, 오정록씨의 병역거부소견서에서 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끝내겠습니다. "저는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입영영장보다 병역거부를 먼저 만났기 때문입니다."



2011년 11월 30일







병역거부소견서도 '초안'이라고 다는 이 성실함(???)
좀 더 다듬어보고 오늘 저녁이나 내일 쯤 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