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꿈

정답강박증 - '중도적인' 혹은 '균형잡힌' 혹은 ...

공현 2012. 1. 3. 21:46

옛날에 2007년 초에-
같이 활동하던 중학생 분 부모 만나고서 좀 열받아서 막 썼던 거친 글인데 ^^;
문득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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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교육의 무시무시한 폐해 중 하나는 "정답" 강박증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의견을 묻는 말에도 자신이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그럼 감정에 시달린다.
그 결과로 흔히 도출되는 것이 "니 말도 옳다."라는 황희 정승식 태도, 혹은 "균형잡힌 시각" "중도적 입장" 같은 것들이다. "이 의견도 저 의견도 일리가 있고 장단점이 있다." 야 그런 말을 누가 못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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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스로를 보편화시키려는 욕망은, 정답 강박증의 주요 증상이다. 즉 자신의 말은 누가 보더라도 어느 정도 동감을 해야만 한다는 욕망이다. 그런 욕망이 자신의 의견을,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의견으로만 만들게 한다. 치우친 의견은, 한쪽에는 정답일지 몰라도 다른 여러쪽들에게는 오답이 되리란 걸 아니까 그런 식으로 적당히 양비양시론을 이야기하는 거다. "다른 의견도 포용해야지." "다 맞는 말이잖니."
상대주의는 분명 인식론적으로 옳은 면이 있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상대주의는 불가능한 주장이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마치 시험지를 앞에 둔 수험생처럼 '보편적인 관조자'의 입장에 서기 때문에 느끼지 못한다.

대체 왜 스스로를 보편화시켜야만 하는 건지. 당신은 역사인가? 당신은 세계인가? 당신은 신인가? 왜 스스로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발악하는 건가?
당신은 왜 당신이 놓여있는 상황과 당신의 가치관과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가?
당신은 왜 당신의 의견을 말하기 전부터 미리 당신의 의견이 '조정'당할 것을 걱정하고, 사회의 보편적인 입장에 서려고 하는 건가?

이런 식의 보편화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의 발현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가치관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가치판단을 중지하는 것이며 실천과 선택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걸 무시하고 보편적인 판단을 내리려드니까 왜곡이 있을 수밖에. 애초에 세상에 정답 따위가 어디있단 건가? 왜 그렇게 소심해?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시각" 따위는 세상을 관조하는 존재(그래서 세상을 어느 정도 바라보고 바라본 것을 말하는 입장을 취하려고 시도하는 일부 언론들은 이런 태도를 일정 부분 견지하지만)에게나 의미있는 것이지 실제로 그 세상에서 살아가고 그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당신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관찰자인 동시에 유지자이며 창조자이다. 관찰 자체도 창조이고 참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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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동시에 이건 스스로에게는 정답 강박증 외에는 아무런 가치관이나 의견이 없다는 현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한국사회는 현재 분배를 우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명박 씨를 지지하고,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보수적인 사회유지 - 전체주의적 논리를 펴고, 생태 보호를 이야기하면서 경제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여러 번 봤다.

좀 일관된 자기 가치관과 세계관이 없이 파편화된 말들을 주워섬기지 말라고 해주고 싶다.
의견이 없으면 의견이 없다고 하든가- 결국 답안지를 백지로 낼 수는 없으니까 대충 '정답'을 써내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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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나는 거기에서 기만을 읽는다.
" 균형잡힌 시각", "중도적 태도", 그런 "정답"을 말하려는 사람들은 실천적으로는 보수적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는 그런 보수성이 '중도'이고 현실적인 것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 자체의 분위기와 담론이 변동하지 않는 한 먼저 바뀌려 하지 않는다.
정답 강박증들은 뉴라이트나 보수세력들 또한 치우친 시각을 가졌다고 말하며 좋아하지 않겠지만, 실천적으로는 그들에게 동조하고 그들과 유사한 사고를 보여준다. 그것이 지배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부 친은 그런 "균형적인 관점"을 말하면서도 정책에 대한 뉴스를 보고 '영세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발언을 하며 화를 낸다. 그리고 내가 "평등을 착취가 종식된 상태로 정의하기도 해."라고 했더니 "그건 저 사람들의 논리인데..."라면서 나를 우려스럽게 보던 부친을 잊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
이 얼마나 기만적인 보수성인지.
그렇게, 정답 강박증은 이 사회의 보수성을 구성하는 몇몇 요소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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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이기 위한 중도" "좌우에 치우치지 않기 위한 균형" 따위는 의미가 없다. 좌/우라는 분류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척도일 뿐이며, 다른 척도들도 마찬가지다.
당 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말하고 당신의 가치관을 명확히 해서 세계관을 구축해보자. 만약 그러고도 당신이 "중도적 입장"이라고 불린다면, 즉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위치에 섰더니 결과적으로 중도가 되었다면 그 중도를 긍정할 수 있겠지.
자신이 좌가 되는지 우가 되는지, 진보가 되는지 보수가 되는지, 신좌파가 되는지 구좌파가 되는지 그런 걸 미리 신경쓰고 자기 입장을 정한다는 게 웃기지 않은가? 결국 자기 입장이 먼저 있고 그게 나중에 사람들(자기를 포함해서)의 척도에 의해 그렇게 분류되는 게 원칙적으로는 맞지 않은가?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곳에 섰더니 극단적/급진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지만, 그게 욕이나 칭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곳에 설 뿐이니까, 극단적/급진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그걸 옮길 이유는 없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바꾸려면, 그 생각을 측정하는 것만으로는 힘들걸?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측정당하는 것만으로도 벌벌 떤다, 수험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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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적(중용이라는 기만적 말도 있다)이란 말과 극단적이란 말을 사람들은 자주 쓴다.
그러나 "중립"은 "중립적인가 중립적이지 않은가"의 척도로 보면 한 극단에 서있다. 척도의 문제란 소리다. 그리고 극단이면 또 어떤가.
극단과 중립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익숙하냐 익숙하지 않냐, 편하냐 불편하냐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쓴 것일 뿐이다.
"넌 너무 극단적이야."
정답 강박증과 평균성, 의견없음을 그런 식으로 속이려 드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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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과 점진이 어느 시대에나 있지만 나는 점진론에 가깝다. 바뀌어야 한다는 건 동의하지만 천천히, 절차에 따라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뭐 자기 친구랑 그걸 놓고 맨날 언쟁한다나.
그러나 급진이냐 점진이냐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내게는 너무나 우습게 느껴졌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앞에서 온몸으로 부딪고 있는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온 힘을 다해 하더라도 세상이 코딱지만큼밖에 안 움직이곤 한다는 걸 안다. 아니 그냥 재채기 좀 하고 말려나.
세 상이 천천히 바뀌어야 하는지 빨리 바뀌어야 하는지를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면 그런 걸 말해줘라. 나는 그런 위치가 아니라서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할 필요를 별로 못 느끼겠다. 이 거대한 체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실천을 다 할 뿐이다.
결국 이런 태도도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뭐가 "정답"이라고 말하는 그런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점진이건 급진이건 - 물론 일반적으로는 점진이 더 "정답"에 가깝게 받아들여진다.)
스스로를 실천하는 존재, 역사를 만드는 존재로 보지 않는 사람들을, 마치 시험지에 답 써넣듯이 세상을 말하는 사람들을, 정답 강박증이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