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꿈

약간 늦은 답장

공현 2012. 3. 6. 16:27







혜영씨는 항상 편지를 새벽에 쓰는군요. 그것도 습관일까요? ㅎㅎ


며칠은 대구에 가서 부모님이랑 있었고, 또 며칠은 여행도 했고, 며칠은 몸살이 나서 누워있었고, 그러다가 답장이 많이 늦었어요. 어느새 봄이 다 됐네요.



발렌타인데이, 그날밤은 결국 홍대에 사는 다른 친구 집에 가서 신세를 졌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꾸역꾸역 일어나서 부천 법원에 갔지요. 그때 말했던 거 같은데, 병역거부로 수감이 되는 친구의 선고공판이었습니다. 법정에서 구속이 되어 눈앞에서 사라진(?) 친구를 보내고...


그날은 기분이 우울하고 싱숭생숭하기도 했고, 하루종일 숙취 때문에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저는 술을 좀만 많이 먹으면 몸이 다음날 바로 숙취를 호소하는 솔직한, 다른 말로는 술이 별로 세지 않은 타입이라서요. 혜영 씨는 숙취 같은 건 괜찮으셨는지...



저는 요즘에 운동을 좀 정리하고 일을 줄여나가고 일정이 없이 살다보니 몇 년 동안 봉인해두었던 오덕오덕한 성향들이 마구마구 표출이 되고 있습니다. 라노벨도 많이 읽고, 만화책도 많이 읽고, 게임도 많이 하고 그러고 살고 있어요. 혜영씨를 만나서 오타쿠 아니세요? 이랬던 것도, 말하자면 그렇게 활성화된 오타쿠 세포가 발동한 산물인 셈입니다.

하지만 저의 내공은 사실 얕습니다. 그때는 술 마시고 그냥 막 아는 척했지만, 마크로스도 본 편은 한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돼요. '섭렵'이라고 할 수준은 못되죠. 혜영씨랑 더 수다를 떨기 위해 마크로스를 섭렵해볼까 싶군요. 그 명성은 익히 알고 있어요.




혜영씨가 마지막에 꺼낸 카드는, 당위가 아니라 뭘까요? 애정공세? ㅎㅎ

저 같은 경우는 마지막에 꺼내는 카드는 당위라기보다는, 욕망입니다.

  - 내 욕망, 내가 바라는 게 이거야. 그리고 난 이걸 위해서 이렇게 하고 싶어. 당신이 바라는 건 뭐야?,  이런 거죠. 그래서 저는 누가 나를 욕해도 아 그러시군요, 그래서 어쩌라구요? 하고 웃어 넘길 수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일종의 스케일이 큰 이기주의자 같은 것이려나요?


그래서 저랑 계속 보게 된다면, 저는 앞으로 혜영씨한테 이것저것 부탁을 할지도 몰라요. 이거 좀 해주시지 않을래요? 이러면서. 그러면서 때로는 대놓고 때로는 은연중에 혜영씨의 욕망과 저의 욕망을 조정하고 협상하려고 할 거예요. 저한테 다른 사람과 같이 함께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겁니다.



슬슬 편지를 마무리해야 할 거 같습니다. 회의 중간에 딴짓하면서 쓰던 거라, 회의가 끝나가는 지금 얼른 마쳐야겠어요.

저도 혜영씨가 별로 걱정된다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혜영씨는 솔직히 저보다 훨씬 잘, 잘 살 거 같아요. 사람들이랑 잘 부대끼고 잘 만나고 그러면서. 혜영씨도 저를 별로 걱정하실 필요는 없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만은 조~금만 걱정 좀 해주세요. 으헝.



수감되기 전에 또 만날 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다시 연락해요.


2012.03.05. 경칩 다음날... 맞나?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