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0. 10. 2. 09:13

어쩌다보니 청소년 관련 제 글 하나도 실린 책입니다 ^^;;



[책의 유혹]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렇게나 생생하게

『집은 인권이다, 이상한 나라의 집 이야기』, 주거권운동네트워크 엮음, 도서출판 이후, 2010년

손낙구

“당신은 ‘집’을 생각하면 어떤 단어들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나요?” 3년 전 이맘 때 주거권운동네트워크 웹진<진보복덕방>이 내게 물었다. 난 간단명료한 네 글자로 답했다. “걱정거리.” 다시 생각해봐도 절묘한 대답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사를 다녔을까?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손가락이 한참 접힌다. 통계청이 조사한데 따르면 한국인 셋 중 두 명이 5년에 한 번씩 이삿짐을 싸고 있다. 수도권에서 셋방 사는 사람은 더 심해서 열 중 여덟 명이 5년마다 이사를 다니고, 그 중 다섯 명은 2년에 한번 씩 방을 옮겨가며 살고 있다.

익숙해진 걸까, 체념한 걸까. 떠돌이 삶도 수십 년 계속되면 적응되는 걸까, 힘든 일일수록 기억에서 빨리 지우는 현명한 뇌 덕분에 면역력이 생긴 것일까. 원래 한국인은 집단으로 역마살이 낀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아주 오랜 옛날 선조들이 유목생활을 했고 그 피가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일까…. 집 없으니 나가라면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그렇게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웹진 <진보복덕방>기사를 모아 엮은 책 『집은 인권이다, 이상한 나라의 집 이야기』에서는 대답한다, “아니다”라고.



혼자서 1,083채를 소유한 사람과 2년에 한번 씩 이삿짐을 싸야하는 무주택자에게 집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264미터높이의 <타워팰리스> 69층 펜트하우스에서 구름을 벗 삼아 사는 사람과, 땅속에서 곰팡이와 동거해야하는 (반)지하방 거주자에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같을 수 없다고 얘기한다. 똑같은 주택소유자라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한 채에 120억 원이 넘는 집에 사는 사람과, 인천시 강화군에서 9만 원짜리 집에 사는 사람에게 집이 어떻게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집에서 황금알을 뽑아내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월세 보증금을 마련하는 데만 20년이 걸리는 사람들, 그래서 내 집 마련의 꿈도 상속해 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라한다. 왜 이사를 다닐 수밖에 없는지, 계약기간과 상관없이 집주인이 어떻게 세입자를 몰아세우는지, 그나마 주거 임대차보호법이 왜 빛 좋은 개살구인지,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를 얘기한다.

마치 환자가 의사에게 증상을 호소하듯 말한다. 집 없이 셋방을 떠돈다는 것이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프고 시린 삶인지, 용역 깡패를 동원한 뉴타운 재개발과 강제철거에 내몰린 가난한 사람들이 왜 망루에 올라야했으며, 누가 왜 어떻게 그들을 불에 타죽게 했는지 얘기한다.

사람이 비닐하우스에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반)지하에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한다. ‘소리 나지 않는 인간’, ‘관속에 누운 것 같아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인고시원 사람들과 쪽방사람들을 이야기한다.

문손잡이가 손에 닿지 않기 때문에 문이 닫히면 꼼짝 없이 갇혀 버릴까봐 평생 방문을 닫지 않고 살고 있는 중증장애인에게 현재 한국 사회의 집이란 무엇인가 또박 또박 짚는다. 성소수자에게, 독립 하려하거나 독립을 강요당한 청소년에게 집이 얼마나 고통을 주고 있는지 호소한다. 월세나 전세 계약서도 쓰지 못하고 마음 졸이며 살아야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의 집은 어떤 집인가 묻는다.

서른다섯 살이 안 된, 결혼 안 한 여성에게는 왜 전세자금을 대출 해 주지 않는지 묻는다. ‘ 홈리스주소를 정원벤치로 하여 투표권을 부여하라’는 미국 연방법원 판결을 소개하며, 우리나라에 서는 노숙인에게 집이 없다는 이유로 투표권을 박탈하는 것이 헌법정신에 맞는 지 묻는다.

이 책의 장점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실의 기록이란 점이다. 대다수 글은 자신이 겪은 일을 직접 쓴 것이다. 상당수는 말한 것을 풀어 쓴 것이다. 취재를 거쳐 기록한 것조차 거의구술에 가깝다.

셋방살이나 (반)지하방 생활의 어려움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똑같은 셋방살이 라도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 장애인, 가출청소년, 비혼 여성 등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조사나 기록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집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만큼 생생하고 자세하게담은 책은 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인권의 관점에서 집을 바라보고 주거권을 실현 할 수 있는 실험적 대안도 여러 가지 제시되고 있다. 대안 역시 큰 담론이나 거대 정책 차원보다는 ‘작은 시도’의 성격, 즉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다. 인간적인 개발을 꿈꾸는 장수마을 대안 개발 프로젝트가 대표적인데, 미완의 대안이지만 매우 값진 시도다. 주택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는 물론이고 주택정책을 설계하는 정책입안자들에게 문제를 보는 지평을 넓혀주고 연구와 정책 상상력의 씨앗을 틔워 줄 귀중한 기록이다.

누구도 집 없이는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루의 3분의 1 이상은 집에서 생활을 한다고 보면, 집에 얽힌 이야기는 사람의 생활과 인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람 대다수가 집 때문에 죽고 사는 마당인데, 정치와 학문은 물론이고 사회운동도 집 문제를 자신의과제로 삼는데 소홀 했던 게 솔직한 현주소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각 분야에서 진정한 사회발전을 꾀하는 이들에게도 자신을 비추고 성찰하는 거울이자, 집 문제를 실질적으로 고민하고 연구 할 수 있는 훌륭한 지침서가 되는 책이다.


덧붙이는 글
손낙구 님은『부동산계급사회』저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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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20 호 [기사입력] 2010년 09월 28일 23:12:29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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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9. 8. 15. 03:14

[만의 인권이야기] 독립의 꿈을 가로막는 것들

주택정책에서 주거권은 없어

민선


살만한 집에 살려면...

이번 달 말일로 현재 사는 집 계약이 끝난다. 2년 전 9월 1일 친구와 함께, 이곳 신림동 반지하 집에 둥지를 틀었다. 4개월 동안 얹혀 지낸 빈 지하방, 곰팡이 냄새가 벽마다 눅눅하게 배어있던 ‘암굴’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낑낑대며 모은 돈으로 보증금을 마련해서 내 스스로 집을 구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월세를 포함한 생활비의 무게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사 왔던 그 날 밤, 자축 술 한 잔에 뭔가 꽉 찬 기분을 느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덧 2년이 지나가 다시 집을 구하기 위해 한동안 부동산과 직거래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어떻게든 보증금을 좀 높여서라도 월세 부담을 줄였으면 좋겠고, 창문을 좀 열고 지낼 수 있으면 좋겠고, 빛과 바람이 더 잘 들어왔으면 좋겠고, 자기 집에 너무 애착이 커서 건건히 간섭하는 주인집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2년 동안 지내면서 자연스레 생긴 집에 대한 바람들이다. 그런 바람들이 이루어지기에는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독립,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요즘 집을 알아보면서 예전 기억들이 떠오른다. ‘언젠가는 꼭 독립해야지’ 마음은 가득했지만 이를 시도하기에는 막막해서 늘 꿈만 꿨었다. 20대 후반이 되면서 좀 더 내 스스로의 삶을 살고 싶어 무작정 부모님의 집에서 나왔다. 일을 하며 모았던 돈 몇 푼에 당장 ‘집 같은 집’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시원을 들어가 볼까 생각했지만 작은방 한 칸에서 지내기 위한 비용을 월마다 부담하게 되면 계속 고시원에서만 살아야 할 것 같았다. 달랑 트렁크 하나를 끌며 걷다 문득 멈춰서 빽빽이 솟아있는 건물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 몸 하나 쉬게 할 공간이 없다는 설움, 그것이 집이란 공간을 상실했다는 첫 느낌이다. 그런 내게 지하방이지만, 곰팡이냄새가 가득했지만, 화장실이 밖에 있어 불편했지만 그래도 당장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러나 지하방에서의 생활은 잠자는 것 외에 없었다. 빛을 받지 못하고 눅눅하게 지내다보니 몸에서 곰팡이가 필 것 같았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살만한 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든다. 누구나 집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붕과 벽으로 둘러쳐있다고 집이 되지는 않는다. ‘집’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살만한 집이기 위해서는 햇빛도 받아야 하고, 물과 전기, 가스같이 생활에서 꼭 필요한 서비스가 보장되어야 하고, 피곤한 몸을 쾌적하게 누일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이 있어야 하고... 물리적인 여건 외에도 부담 가능한 적절한 비용이나 지역사회와의 연계 등 사회경제적인 여건도 충족되어야 한다.

위 사진:대한주택공사 홈페이지에 그려진 도시에는 휘황찬란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재산권으로서의 집, 딱 그만큼인 현실

집다운 집에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은 허리가 휘다 못해 부러질 것처럼 무겁다. 아끼고 아껴 독하게 저축을 한다고 해도 안정적으로 점유하기 위해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가 나온다. 살만한 집에 살고 싶다는 꿈, 이것이 현실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최근 “집값 상승이 심상치 않다”, “서민들이 내 집 마련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보도는 한 숨만 더 깊이 쉬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한 숨 짓게 한 상황에 대한 책임은 바로 부동산 투기부양정책만 적극적으로 펼친 정부에 있다.

한국사회에서 집은 재산권을 보장하는 수단이고, 집에 대한 정책은 재산권을 강화하는 정책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강부자’들에게 선물로 준 종합부동산세 완화,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폐지, 각종 개발 규제 완화는 집값 폭등과 그에 따른 전세 값 폭등을 초래했다. 대출을 받든, 월세로 허덕이면서 살든, 좀 더 싸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이주를 하든 그 몫은 고스란히 ‘집을 소유하지 못한 죄’가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온다.


2년 뒤 나는...

단지 공급과 수요, 가격 조정만 고려하는 주택정책에서 적극적으로 ‘주거권’을 보장하는 정책, ‘누구나’, ‘살만한 집에’, ‘살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집 때문에 고단한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살만한 집, 집다운 집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데, 2년 뒤 집은 나에게 또 어떤 부담으로 다가올까.


덧붙이는 글
민선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65 호 [기사입력] 2009년 08월 12일 17:38:52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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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방에 거주하는 가정인데요

    우리도 나름대로 적적하고 외로운 사정이 있어 서로 이해되는 사람이 있다면

    식구처럼 지내보고 싶어서 올렸어요

    오는분에게도 경제적으로든 잠시 휴식을 취하든 도움이 되면 좋구요

    어떤 사정이든 서로가 자세한 대화후에 만나보고 결정하면 좋겠어요

    풍요롭게 살아서도 아니며 단지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는것이 아니라 우리도 식구가 늘어사는 재미도 느끼고 해서 좋을것같아서에요

    생활비부담없이 무료로 거주하며 내집처럼 편하게 지낼분이면 좋겠어요

    http://blog.daum.net/rufchqhdms00/28

    블로그에 오셔서 긴 내용 읽어보시고 연락주세요

    진지하게 올리는 글이니 장난성이나 함부로 올리는 추측성오해의 덧글 올리지 말아주세요..물론 단순히 이글만 보시는분 입장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어요.하지만 꼭 필요한분도 계시고 서로 도움이 되기도 하답니다^^

    2009.08.16 12:12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9. 6. 23. 21:42
[기고]세들어 사는 자유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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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치마네 집
추측하건대 우리 가정은 독일에서 중산층쯤 될 것이다. 소득이 적으면 세금도 적은 나라에서, 우리가 번 돈의 절반 정도만 우리 지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우리는 어쩌면 중산층 중에서도 약간 안정된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총수입의 30%가 세금으로 나가고, 20%는 건강보험과 연금으로 나간다(나머지 20%는 고용주가 부담). 중소기업에서 평사원으로 첨단기기를 개발하는 남편이 우리 수입의 대부분을 벌어들인다. 프리랜서로 고건축을 실측하고, 틈틈이 글을 쓰는 나는 돈도 많이 못 벌거니와 수입이 일정치 않아서 경제계획을 세우는 데에 쓸모가 없다.

우리는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돈을 많이 벌려고 머리를 싸매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재산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돈보다는 시간을 벌겠다는 개념으로 살았다. 그때 우리는 남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생활하느라고 알뜰하게 절약하며 사는 습관을 들였다. 그때의 최저생활비를 쓰던 습관이 가계가 안정된 오늘까지도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 돈이 항상 남는 인생을 살고 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돈 쓸 일이 적어서 그렇다.

그런 연유에서 나는 새로운 일감이 들어오면, 그 일로 인해 버는 돈의 액수보다 그 일로 인해 향상되거나 감소되는 삶의 질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남편과 나는 돈 안 되는 일이라도 마음만 있으면 오랜 시간 정성을 바칠 수 있고, 신념만 있으면 내 돈 들이는 일에 망설임이 없으니 이 세상에 무서운 게 적은 편이다.

운명처럼 주어진 가난과는 달리, 스스로 선택한 가난은 불편하지 않다. 곤궁한 분야와 도수를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선택한 가난'은 '가진 자의 호사'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떤 수준부터 '가진 자'가 되는 것일까? 각자 결정할 몫이다. 가진 건 희망 하나 밖에 없었던 빈털털이 학생부부 시절부터 우리는 '가진 자'라 자처했다.

이렇듯 우리 부부가 돈과 물질에서 자유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독일의 임대용 주택 제도에 있지 않나 싶다. (독일의 임대용 주택에는 개인소유의 월세주택과 국가나 공영기관이 관장하는 임대주택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운다는 '내 집 장만'이라는 일생의 계획이 우리에겐 없었다. 빈손으로 만나 가정을 이룬 젊은 부부가 통일 독일의 지독한 불경기의 터널을 헤쳐나가느라고 곤궁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국제결혼 커플인데다가 앞으로 각자 전공을 살려 일을 할 희망을 가지고 있었므로 나중에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살게 될지, 미래가 불투명했다. 이 불투명한 미래를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의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되도록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은 우리에겐 집을 사서 어딘가에 정착한다는 발상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또한 독일에 살면서 굳이 내 집을 살 필요도 없었다. 독일은 임대용 주택의 보급율이 높고 세입자의 권리가 잘 보장되어 있는 편이어서 내 집 없이 사는 일에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처럼 보증금이 자주 올라서 정기적으로 몫돈을 마련해야 하거나 쫓기듯 이사를 다녀야 하는 형편이라면 우리도 이를 악물고 내 집부터 장만했을 것이다. 내 집이 없다하여 세입자의 인권, 즉 인간의 주거권이 무시되는 사회에서라면 우리는 같은 돈을 가지고도 자유 운운할 여지도 없이 생존투쟁에 내몰렸을 것이다.

독일에선 총가구의 57%가 자기 소유가 아닌 임대용 주택에 살고 있다. 이는 EU의 임대용 주택 평균 보급율인 37%을 훌쩍 웃도는 수치로서 그리스나 스페인의 20%와 비교하면 근 세 배나 된다. 유럽에서 독일보다 임대용 주택 보급율이 높은 나라는 65%의 스위스가 유일하다. 독일과 스위스는 유럽에서도 가장 잘사는 나라축에 속한다. (이상 2001년도 통계)

독일에는 전세라는 제도가 없다. 전부 월세다. 입주할 때 월세의 2-3배 되는 금액의 보증금을 집주인이나 은행에 맡겨 두었다가 이사나갈 때 하자가 없으면 도로 돌려받는다. 집의 위치, 상태에 따라 월세의 적정가격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독일의 가정에선 평균적으로 매달 408유로를 월세로 지출하고 이는 가계순수입의 23%에 달한다. 임대용 주택의 크기가 평균 70평방미터이니 평방미터당 6유로 정도 되는 셈이다. 그러나 월세는 지역에 따라 값이 차이가 나고, 같은 도시에서라도 위치와 건물 상태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뮌헨의 중산층이 사는 주거지의 월세는 평방미터당 10유로 정도 된다. 가난한 가정에는 주거보조금이 지급된다. 총 가구의 9%에 달하는 3백4십만 가구가 국가로부터 주거보조금을 받고 있다. 가난한 사람도 숨을 쉬고 밥을 먹어야 하듯이, 가난한 사람도 인간답게 주거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월세를 인상하는 수준과 방법도 법의 제약을 받으며, 해약하는 조건도 엄청나게 까다롭다. 때문에 집주인이나 어떤 국가정책도 세입자를 함부로 쫓아낼 수 없다. 게다가 1년에 80유로 남짓하는 회비를 내고 세입자 조합에 가입하면 임대용 주택의 모든 사안에 대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입자 조합에선 회원을 대신하여 법정투쟁을 벌여주기도 하고, 국가정책이 세입자의 권리를 유린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지 감시하고 여론화한다. 이런 이유에서 독일의 평균 세입기간은 12년이다. 한번 이사 들어가면 보통은 강산이 한 번 변하도록 산다는 뜻이다. 21년 이상 한 집에서 사는 가구도 전체의 4분의 1이나 된다. 그러니 세입자가 바로 그 공간의 주인인 셈이다.



세입자의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그가 몸 담은 공간에 대한 주인의식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여지를 건물 또한 제공해야 한다. 독일의 임대용 주택은 아파트든 연립주택이든 단독주택이든, 개인 소유의 월세주택이든 국가가 관장하는 임대주택이든, 완전히 빈 집으로 임대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세입자는 목욕탕과 화장실, 그리고 벽과 바닥만 정비된 빈 집에 들어와 가구는 물론 전등까지 자기 취향대로 달아서 쓰다가 나중에 이사 나갈 때 다시 떼어서 들고 나간다.

건물의 수명이 인간의 수명보다 길다는 전제하에, 각양각색의 취향을 가진 사용자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이해는 건축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 독일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할 때 나는 주택설계 시간에 '공간의 유동성'이란 단어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암만 특정한 건축주를 위하여 설계한 건물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그 집에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서 살 때에 다른 방식으로 가구를 배치하고 다른 성격의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인간의 보편성을 염두에 둔 유동적인 설계라야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학생들이 설계를 해가면 교수들은 남의 집 침실과 맞붙어 있는 거실을 도면에서 찾아내어 굵은 연필로 동그라미를 치며 소음문제로 이웃 간에 불화를 조성하는 요소라고 가르쳤다. 건축으로 인해 이웃 간에 또는 가족 간에 특정한 관계가 강요되기도 하고, 건축으로 인해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친해질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사실을학생들은 자신들이 실지로 설계해 간 도면을 바탕으로 배웠다. 학생들이 주거단지를 설계하면 교수들은 크고 작은 면적의 가구들이 적절하게 섞였는지, 다양한 형태의 주거가 가능한지를 검사하며, 빈부가 양분되고 게토로 변하는 현상은 건축가의 책임이라고 가르쳤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일의 임대용 주택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주거공간으로서 온전히 제구실을 할 수 있는 이면에는 이렇듯 전문가 교육에서부터 세세한 법규의 입안과 실행에 이르기까지 세입자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일관성 있는 국가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오가며 내각이 수없이 바뀌는 와중에도 이런 정책이 초지일관 고수되는 그 바탕에는 인간의 주거권을 인간의 기본권으로 인정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두텁게 깔려 있다.

독일의 실정을 더욱 실감나게 보여드리기 위해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자. 한국에서 보낸 시간의 두배가 되는 35년을 독일에서 살면서 난 여러 형태의 임대용 주택을 경험했다.

내가 청소년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살던 첫 아파트는 당시 서독의 수도였던 본 외곽의 조용하고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연립주택이었다. 우리까지 모두 네 가구가 살았는데 70년대에 지은 평범한 건물이었지만 교수나 변호사라는 이웃의 직업으로 보아 중류 이상의 주거환경이었던 것 같다. 이웃들이 참 친절했다. 한번은 집주인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우리가 길 쪽으로 난 테라스에 빨래를 널어서 법을 어겼다는 경고장이었다. 나는 그때 독일어가 약해서 옆집에 사는 변호사에게 들고 가서 물어봤더니 그는 그 자리에서 집주인에게 편지를 써서, 테라스와 길 사이에 있는 나무를 당신이 세입자의 허락 없이 베어낸 이후로 빨래가 보이는 거라고, 당신 잘못이라고 대신 항의를 해줬던 것이 생각난다.

그에 반해서 우리는 참 저자세였다.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시게 되어 집을 비워줄 때 우리는 엄청나게 법석을 떨며 집을 수리해줬다. 내부의 벽만 흰색으로 칠해주면 되는 것을 부모님은 집주인이 트집을 잡아 2달 월세에 준하는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까봐, 아니 혹시 더 많은 돈을 덤테기 씌울까봐 겁이 나서 많은 친지들에게 민폐를 끼쳐가며 벽 뿐 아니라 라지에터와 문까지 새로 칠하고, 마루바닥도 기계로 싹 갈아서 반짝반짝하게 니스칠을 해놓았다. 그때 집주인이 너무 놀랍고 좋아서 입이 떡 벌어졌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칼스루에 공대에 입학하면서 나는 대학 기숙사에 들어갔다. 남녀학생 15명이 한 단위를 이루어 부엌과 화장실, 샤워실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나는 처음에는 남학생들이 옆 칸에서 샤워하는 것이 영 거북했는데 나중에는 샤워하면서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할 만큼 스스럼없어졌다. 학생들은 부엌에 딸린 식탁에서 늘 만났고 주말에는 돈을 모아 함께 요리를 하기도 했다. 마침 서구의 젊은이들 사이에 자유분방한 기운이 물결치던 때라 우리는 문란하다면 문란하다고 할 파티도 열면서 참 재미나게 살았다. 나는 9평방미터의 작은 독방에다 2층짜리 가구를 만들어서 아래층은 침대로 위층은 널널한 제도책상으로 썼다. 그 방에서 토끼도 기르면서 한 일 년 잘 살다가 편싸움에 말려들어 지지고 볶다가, 마침 남자친구가 자기 부모님 집의 위층에 있는 방 두칸짜리 집이 비게 되었다고 꼬시는 바람에 기숙사에서 나왔다.

새로 이사간 동네는 칼스루에 변두리에 있는 서민들의 마을이었다. 어느 집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다 하면 아줌마들이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큰 소리로 소통하며 재빠르게 전파하는 마을이었다. 내가 이사간 집은 50년대에 지은 서민용 주택이었고 한 층에 한 가구씩 세 가구가 살았다. 집주인인 남자친구네는 2층에 살았고 1층과 3층은 세를 주었다. 내가 살았던 3층은 비스듬한 지붕 밑 공간으로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예쁜 집이었다. 창가에 놓은 화초가 물만 주어도 탐스럽게 자랐다. 화장실은 옛날 주택이 그렇듯이 층계의 반을 내려간 곳에 붙어 있었다. 마당에는 식용으로 기르는 토끼장과 비둘기장이 있었다. 건물 뒤쪽에 바짝 붙어서 남자친구의 이모네 집이 있었다. 남자친구의 어머니와 이모부는 젊은 시절에 집 짓는 문제로 크게 싸운 이후로 평생 서로 말을 섞지 않고 살았다. 몇년 후에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집을 찾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집 거실에서 기르던 토끼와 잉꼬를 남자친구에게 주고 나왔다.

다음번 집은 대학식당 게시판에 붙은 쪽지를 보고 찾았다. 학생들 여럿이 아파트 하나를 빌려서 방 하나씩 쓰고 사는 주거공동체였다. 물리과 남학생 셋이서 살다가 하나가 결혼으로 나가게 되어 후임을 구한다는 쪽지에는 되도록이면 여학생을, 그것도 요리가 취미인 여학생을 희망한다는 소리가 적혀 있었다. 시대가 어느 시댄데 이렇게 오해 받기 딱 좋은 쪽지를 게시판에 붙여놓은 두 남학생들을 만나보니 정말로 순진했다. 마침 남성에게 지쳐 있던 나는 나이도 어리고 어리버리 순진무구한 남학생들을 보고 안심했다.

그 집은 1850년대에 지은 노동자용 주택이었다. 그 동네는 집값이 싸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이 많이 주거했다. 1층에서 양품점을 하는 이태리인 라이아노씨가 가끔씩 베르디의 오페라를 밖에까지 들리게 크게 틀어놓을 때는 여기가 독일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2층과 3층에는 대학생들의 주거공동체가 있었고, 4층에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노동자 가족이, 5층 꼭대기에는 집주인의 조카인 대학생이 혼자 살았다. 손바닥만한 뒷마당의 한 구석에는 해가 안 드는 꽃밭이 하나 있었는데, 다른 곳에 사는 집주인 아줌마는 그래도 자주 와서 정성껏 가꿔주었고, 우리는 마당에 앉아서 다른 층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꽃을 바라보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나는 이곳에서 보냈다. 같이 사는 남학생들과는 마치 오누이처럼 지냈다. 그들의 친구들인 물리과 학생들과 내 친구들인 건축과 학생들이 노상 북적거리는 집에서 우리는 파티도 많이 했다. 빨갛게 고추장 양념해서 오븐에 구운 삼겹살과 야채튀김은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잘 살다가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내가 그 중의 한 남학생과 정분이 난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남학생과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골치가 아파서 그 집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신문 광고를 보고 집을 구했다. 새로 이사간 집의 1층에는 아들만 여덟을 둔 가난한 트럭운전사의 가족이 살고 있었고, 2층에는 건축과 남학생 한 명과 내가 살았다. 그 남학생의 복도를 통해서 내 공간으로 들어가는 구조였는데, 화장실은 함께 썼지만 각자 부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은 완전히 따로 한 셈이다. 1823년에 수공업자가 지은 오두막집인 그 집에는 목욕탕이 없어서 나는 근처의 수영장에 다녔다. 옛날 고리짝에 가난한 사람이 지은 집답게 얼마나 외풍이 세고 추운지 부엌에 있는 유리컵에 밤새 쩡쩡 금이 갔다.

그래도 이 집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취 있는 집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낡은 마루바닥을 사포로 갈아내고 하얗게 페인트 칠을 했다. 내가 직접 만들거나 길에서 주워온 가구를 이용해서 깔끔하고도 정다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에 나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벽, 천장, 바닥은 물론 문짝과 창틀까지 하얗게 칠한 옛날 집에서 웅웅대며 달아오르는 석탄난로라니! 이렇게 완벽한 나의 왕국이라니! 창밖에 눈이라도 흩날리는 날이면 나는 난로 위에서 주전자가 자글거리고 노란 테이블보 위의 연두색 찻잔에서 김이 소르르 올라오는 분위기에 취해서 책을 읽다말고 나도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 집에서 사는 동안 나는 그 정분난 남학생과 결혼을 했고, 신혼을 여기서 보냈다. 내가 임신을 하자 우리는 아쉽지만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했다. 아무리 내 취향에 맞는 집이라고 해도 목욕탕도 없는 추운 집에서 아기를 기를 수는 없었다. 이 집은 우리가 이사 나간 몇 년 뒤에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철거되었다. 훗날 문화재 주택에 관한 내 박사논문이 좀 더 일찍 나왔더라면 이 집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싶어서 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또 한편으론 문화재에 대한 안목이 없던 시절에 오리지날 마루바닥을 박박 긁어내고 흰 페인트칠을 해버린 나의 무지가 무안스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 다음에 이사간 집은 10가구가 사는 전형적인 임대용 주택이었는데 큰 길가에 있어서 면적에 비해 월세가 쌌다. 하지만 방음이 잘 된 창문을 닫으면 차길의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았고, 그 큰 길만 건너면 성의 아름다운 공원과 호수와 숲이 나왔으므로 우리는 그 집을 사랑했다. 집 앞의 공원을 우리의 개인 공원인양 늘 애용하고 자랑했다. 처음으로 더운 물이 나오는 목욕탕이 있는, 제대로 된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얻은 기쁨에 우리는 공간 꾸미기에 정성을 바쳤다. 그 공간에 딱 어울리는 가구를 우리 손으로 만들었다. 좋은 가구를 살 돈이 없기도 했지만 파는 가구 중에서 맘에 드는 것도 없었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남편은 큰 아이가 동생의 방해를 받지 않고 레고놀이를 할 수 있도록 방에 층을 하다 더 만들어 주었다. 그 집에서 우리는 아이 둘을 낳고 10년 이상을 살았다. 소시민 공무원들이 주를 이루는 이웃들은 깐깐해서 가끔 트러블이 생기긴 했지만 대체로 선했고 특히 우리 아이들에게 잘해줬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아침이면 우리집 현관문 앞에는 누가 갖다놓았는지도 모르는 초코렛 선물들이 수북히 쌓여 있곤 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뮌헨에 새 직장을 구했다. 남편은 6개월의 수습기간 동안 혼자서 뮌헨에 살기 위하여 손바닥만한 방 하나를 얻었다. 그 방에는 침대와 옷장 냉장고가 구비되어 있었으므로 임시거주처로서는 알맞았다. 그렇게 가구가 딸린 방의 경우엔 세입자 보호법이 적용되지 않아서 집주인이 아무런 이유 없이 2주일의 말미를 주고 해약할 수 있다.

남편의 수습기간이 무사히 끝나고 전가족이 뮌헨으로 이사하려고 했을 때 칼스루에의 옛 집을 해약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10년 이상 산 세입자의 경우 해약통고 기간이 쌍방 9개월이나 되었다. 오래 거주한 세입자를 집주인이 갑자기 쫓아내는 것을 막자는 것이 그 취지인데, 형평성을 따르다 보니 세입자들이 갑자기 이사 나가기에 곤란한 일이 생겼다. 우리는 후임 세입자를 우리가 직접 찾아서 대주고 먼저 나올 수 있었다. 그후에 개정된 법에 의하면 집주인과 달리 세입자들은 항상 3개월의 해약통고 기간만 지키면 된다.

당시에 뮌헨에선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여서 우리는 집을 찾느라고 고생했다. 아직 칼스루에에 살던 내가 신문을 보고 전화를 돌려서 집주인이나 복덕방에 시간약속을 해놓으면 남편이 퇴근 후에 집을 보러다녔다. 좀 괜찮다는 집은 세입자들이 어찌나 몰리는지 가망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은 케이블티비와 주차장이 없다는 점, 거실로 쓸 큰 방이 없다는 점 때문에 경쟁이 덜 심했다. 우리는 어차피 티비와 자동차가 없고, 공간상의 약점 정도는 건축을 하는 부인이 충분히 카바할 수 있다는 남편의 설명에 집주인이 혹해서 우리에게 집을 빌려주었다. 남편의 회사가 근처에 있어서 내가 집에 있는 날은 남편이 점심을 먹으러 들어와서 우리는 아침, 점심, 저녁을 온 식구가 함께 하는 날이 많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집은 1900년에 지은 5층짜리 문화재건물인데, 약 20가구가 서로 눈인사만 하는 정도로 간격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처음 이사 왔을 때 나는 윗집 할머니와 크게 싸운 적이 있는데 지금은 서로 마주치면 인사는 하는 사이가 되었고,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면 나나 아이들이 받아서 들어다주기도 한다. 1층에는 변호사 사무실과 디자이너 사무실이 있다. 아이들이 딸려 네 식구나 되는 '대가족'은 우리 밖에 없고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커플이거나 독신들이다. 각 집의 면적도 30평방미터에서 100평방미터까지 다양하다. 지하실에는 세탁기가 없는 세입자들을 위하여 동전 넣고 작동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서 우리도 이불보를 빨거나 빨래가 밀릴 때에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집에 들어와 살면서 이 공간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가구를 설계하고 직접 만드느라고 2년 이상 정열을 바쳤다.

우리가 다음에 살 집은 어쩌면 뮌헨 교외의 단독주택이 될 수도 있고, 시내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건물의 상층일 수도 있고, 어쩌면 노인과 장애인이 공동으로 주거하는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 지금 혼자 사시는 시어머니를 언젠가 우리가 모시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아이들이 둘 다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고 우리 부부 둘만 남으면 더 작은 아파트로 줄여서 갈 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변화하는 상황에 적합한 임대용 주택을 구하게 될 것이다. 자가용이 없는 우리가 자동차 조합에 가입하여 자동차가 필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상황에 맞는 사양의 렌트카를 빌려쓰듯이.

그리고 그 다음에 남편과 내가 살 집은 벌써 정해져 있다. 뮌헨 시내에 있는 우리 소유의 연립주택이다. 우리는 지금 다달이 은행빚을 갚아나가고 있는 중이다. 연금만으로는 우리 세대의 노후가 심히 불안하니 다른 방법의 노후대책을 병행하라는 정부의 권고도 있고, 나중에 자식들이나 사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적어도 오십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우리가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늙을 것일지를 결정하고 경제적인 계획을 세워서 준비해야 한다는 자각이 들어서 우리는 드디어 내 집을 사기로 한 것이다. 노년에 월세라도 굳으면 그게 어디냐?

비싼 집을 장만하느라고 오랜 시간 쪼들리며 사는 것은 인생에서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서 본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내 또래의 독일 친구는 무리해서 집을 사느라고 어린시절의 행복을 앗았던 부모에게 한이 맺혀서 유산을 받자마자 복수하듯이 그 집을 팔아치우기까지 했고, 또 어떤 부모는 자식에게 집 한 채씩 물려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느라고 대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의 학비를 제대로 대주지 않아 두고두고 사이가 벌어진 것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형편에서 매달 편안하게 갚아나갈 수 있는 금액을 미리 정하고 그 한도에서 집을 찾았다. 그랬더니 그 돈으로 (우리가 임대용 주택에 내는 월세에 준하는 이자를 무는 대출금으로) 살 수 있는 집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임대용 주택에 비해서 형편 없이 수준이 낮았다. 그때 우리에겐 저축했던 돈이 좀 있어서 집값 전액을 대출할 필요도 없고, 또 당시의 주택대출 이자율이 4%미만으로 낮았는데도 그랬다.

그러던 중에 우리 부부는 어떤 집을 발견하고 한 눈에 반했다. 뮌헨 시내 빅투알리엔 재래시장 근처에 있는 고옥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또 가격이 보통보다 4분의 1정도 싸다는 점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싼 이유는 그 집이 빈 집이 아니라 지금 다른 세입자가 살고 있어서 그랬다. 그런 집에는 소유주가 당장 들어가서 살 수 없다는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건설회사가 그 건물을 통째로 사서 보수공사를 벌일 때 거기 살던 일부 세입자들은 보상금을 받고 집을 비워줬고 일부 세입자들은 보상금을 마다하고 그 집에서 계속 살기로 했다. 건설회사는 그 건물을 주택별로 분할해서 따로따로 팔았는데 빈 집은 비싸게 팔았고, 세입자가 있는 집은 싸게 팔았다.

주인이 단 한 사람이었던 건물이 여러 명의 소유주에게 분할, 매각되는 경우에 기존의 세입자들은 향후 10년간 그 집에서 살 권리를 가진다. 세입자 보호법의 일환이다. 즉 지금 사더라도 앞으로 10년 후에나 우리가 그 집에 이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내 집 장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고 '재산 증식'의 범주로 분류되어 세금에 대한 불이익도 많았다. 재산을 증식하기 위한 목적으로 본다면 이 집은 구매가격에 비해서 월세가 터무니 없이 낮아서 영 손해나는 장사였다. 그렇지만 재산 증식이 목적이 아니라 직접 거주하려는 목적을 가진 우리에겐 그 집이 노후의 보금자리로서 마음에 들었으므로 우리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에 이르렀다.

꽃을 사들고 우리의 세입자에게 인사를 하러 갔던 날, 우리는 기절할 뻔했다. 우리의 세입자는 돈 잘 버는 젊은 회계사라는 건설회사 직원의 말과는 달리, 나이가 60세 된 가난한 화가였던 것이다. 고령의 세입자는 더욱 각별하게 법으로 보호 받는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 노인네들에게 특별히 힘들다는 사실을 감안해서이다. 그러므로 10년 후면 70이 되는 우리의 세입자는 그가 원하는 한 영원히 그 집에 살 권리가 있는 셈이다. 소유주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의 행사란, 시에서 책정한 적정수준으로 월세를 유지하는 길 뿐이다. 만약 10년 후에 그가 내는 월세가 시세보다 훨씬 낮으면, 그는 같은 월세로 어디 다른 데 가서 비슷한 수준의 집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고, 그것은 세입자를 내보낼 수 없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고 법대로만 살면 별 큰 손해는 없을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서 겁이 났다. 그리고 우울했다. 그간 긍지를 가지고 지켰던 자유로운 정신은 다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우리가 여차하면 얼마나 손해를 보게될지 계산기를 두드리며 전전긍긍했다. '우리가 이 돈을 어떻게 모은 건데, '하는 생각마저 들며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혔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세입자는 우리에게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로써 우리의 죄의식마저 자극했다. 남편과 나는 신경이 곤두서서 집 얘기만 나오면 늘 큰 소리를 내며 다퉜다.

그러다가 결정이 시간이 왔다. 우리가 집을 사기 전에 건설회사에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이는 동안 거기 사는 세입자들은 삶의 질에 지장을 받는 만큼 월세를 탕감받았는데, 공사가 끝났으니 월세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림과 동시에 적정월세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인상해야할 시점이 온 것이다. 스스로 셋집에 사는 우리로서는 그 돈을 받아야만 은행의 빚을 갚아나갈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집을 살 때 지불한 공사비를 월세에 포함시킬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겐 있었다. 마당과 지하실을 정비하고, 엘리베이터와 발코니를 새로 설치함으로써 주택의 질이 확실하게 상승되었기 때문이다.

공사비를 감안해서 법대로 계산기를 두드렸더니 월세가 한꺼번에 두 배로 뛰는 수치가 나왔다. 나도 살림하는 사람인데 한꺼번에 두 배는 너무하지 않은가? 그래 봤자 적정월세를 넘지 않는 금액이지만 혹시 우리의 화가 가족은 갑자기 그 돈을 낼 수 없어서 스스로 나가지는 않을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일이 아닌가? 우리에게도 우리의 재산을 정직하게 지킬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내 머리속에서 오락가락했다.

남편이 재촉하듯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또 부부싸움이 날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내심 그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대답을 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재산을 정직하게 지킬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
남편은 뜻밖에도 망설였다. 잠시 후에 그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한꺼번에 두 배는 너무하지 않은가? “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남편의 눈을 쳐다봤다. 그가 내 눈길을 피했다.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래, 한꺼번에 두 배는 너무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남편을 안아주고 싶었다. 그간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평생 힘들게 모은 공동의 재산을 소홀히 여긴다고 상대가 화낼까봐 겁이 나서, 자기 생각이라기보다는 상대의 의중이라 추측되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대의 속물근성을, 아니 상대의 마음에 비치는 내 속물근성을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렇고 저런, 치사하거나 고상한 사고의 터널을 거쳐서 우리의 자세를 정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월세를 10년에 걸쳐 서서히 올려나가기로 결정했다. 10년 후에 적정월세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로 했다. 우리는 자선사업을 하려고 집을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정당한 방법으로 노후를 준비하는 것 또한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정도라면 세입자인 상대편과 소유주인 우리의 손해를 적절히 분배하는 공정한 선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건의 당사자들인 세입자와 소유주가 각기 손해를 봤다면, 도대체 이익은 누가 본 것일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때 가서 우리의 세입자가 계속해서 그 집에서 살겠다고 한다면? 그래도 괜찮다. 그가 적정월세를 내는 한 우리는 그 돈을 받아서 다른 임대용 주택에서 살면 되기 때문이다. 혹시 또 아는가? 강산이 한번 변한다는 그때쯤 되어서 우리는 그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싶을지도 모른다.

가진 게 하나도 없었던 젊은 시절부터 '가진 자'라 자처했던 나는 나이를 먹어 생활이 나아지면서 도리어 '잃을까봐 겁내는 자'의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잃을 것이 있는 오늘날 ' 가진 자'의 자긍심을 지키는 일이 진짜로 가난했던 지난날보다 더욱 어려움을 고백한다.

우리의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 약간의 금전적 손해를 감수함으로써 우리는 '가진 자'의 자긍심을 되찾고 내 집으로 인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나는 우리 세입자에 대한 죄의식은 그대로 간직하기로 했다. 법적으로 지은 죄가 없더라도 내가 그들의 공간을 빼앗은 것을 인정하고 미안해 하는 것이 사람된 도리라 생각한다.

어떤 국가정책이 내 재산을 불려주는지에만 정신이 팔려서, 내 재산을 불리는 과정에서 주거권을 잃은 사람들이 다섯 명씩이나 참혹하게 죽어나가도 법치를 들먹이며 나와 상관 없다고 자위하는 사람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겁내는 자'가 되어 영원히 허덕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싸다. 각자 결정할 몫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가난을 선택할 여지가 없이 정말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이 세상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잊지는 말고... 그들의 기본권이 유린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에 대한 위협이라는 사실을 아주 잊지는 말고...



SH공사 사보에 송고한 글의 원본입니다.
출처: 빨간치마네집 블로그(http://www.hanamana.de/hana/index.php?option=com_content&task=view&id=188&Itemid=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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