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4. 5. 14. 10:28
(5월 13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권단체 간담회에서 '평등한 애도'라는 주제로 발제했던 글을, 한두 줄 보완했습니다.)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감정


  다른 사람의 일에 대체로 무덤덤하고,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는 슬퍼하지 않는 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며칠간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끊임없이 소식을 전해오는 미디어 때문일까. 마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가 뒤집히고 가라앉고,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바로 옆에서 목도한 것 같은 착각. 그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행태들에 대한 분노. 그리 슬프지 않은 나도 충분히 안타까움과 암울한 감정을 느낄 만했다.

  그리고, 왠지 그럴 것 같았지만, 참사 이후부터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생겼다. “미안해 아이들아”, “채 못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등등, 속이 뒤틀릴 것 같은 말들이 온 사회를 덮기 시작했다. 내 트위터 타임라인만 해도, 도대체 내가 팔로잉한 사람 중에 이렇게 짜증나는 사람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였다. 내 눈에는 무례 또는 오만 또는 차별로 보이는 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유통되는 것을 보면서, 웃었다. 야, 이렇게 할 일이 많구나. 하하.

  그래도 간간이 한 마디씩 투덜거린 것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는 무언가 비판을 하거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유족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도하고 참담해하고 있는데 굳이 선을 긋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욕 먹을까봐 무서웠던 것도 맞다. 그렇게 타이밍을 보면서 한 달이 되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언론에서, 온라인에서, 거리에서, 청소년활동가인 내 속을 뒤틀리게 하는 이야기들을 숱하게 접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6만원을 받고 동원됐다는 허위 주장부터, “미안하다 애들아”하는 현수막까지. 그렇게 참으면서 쌓은 짜증과 분노가 밖으로 폭발을 할지, 속병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설명


  저런 것이 왜 문제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다. 이해하기 쉽게 유비추론이 가능한 예시를 들어보겠다. 장애인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해 “비장애인으로서 똑바로 하지 못해서 장애인들에게 미안하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상당히 기이할 것 같지 않은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게 “남자들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하고 성폭력을 가리켜 “꽃이 짓밟혔다” 같은 표현을 쓰면, 거슬리지 않는가?

  본래 “미안하다”라는 말 자체가 너무 이 상황 저 상황에서 쓰이는 것이기는 하다. 어쩔 때는 죄책감, 어쩔 때는 안쓰러움, 어쩔 때는 부끄러움 등, 미안하다는 말이 담고 있고 대표하는 감정은 많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이 어떤 경우에 어떤 틀을 거쳐서 "미안하다"라는 말과 형식으로 표현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은 맥락에서라면, 나는 “미안하다”라는 말이 주체가 객체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잘못을 하고 구체적인 책임이 있는 책임자가 하는 말이라면 별로 위화감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추상적인 집단이 집단에게 하는 말이라면 한 번 더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비청소년들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진 만큼,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개개인들의 권능이 얼마나 된다고 책임이 있다고 하겠냐만…. 계량과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비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권력과 책임이 있다는 평가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와 사람들이 “미안하다 아이들아”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어쩌면 그 간극은 '정치적인' 문제일 것이다. 비청소년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꿔야 할 문제 상황으로 인식하고 청소년들을 평등하게 간주(가정)하고 대우할 것인가.

  다시 예를 들어보겠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분명히 여성보다 권력이 크다. 특히 각종 의사결정 과정인 정부나 의회, 그리고 조직들의 상층부는 남성 비율이 압도적이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평가해도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이 목숨을 잃거나 폭력에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남성들이 “남자로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성과 여성의 자리에 비장애인과 장애인, 자본가와 노동자(또는 돈이 많은 사람과 돈이 적은 사람), 미국이라면 백인과 흑인을 넣어도 마찬가지이다.>

 ― 이 주장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에도 위화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집단 전체를 볼 때 사회적으로 더 책임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주체화하는 논리와 맥락을 바탕으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권력이 조금 더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소수자에게 자신이 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평등을 선언한 관계에서라면 좀 어색한 모양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이 사회의 이런 문제를 함께 바꿔가자고 말하는 것과 ‘어른들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나는 ‘어른들’이 뭘 해주고 못 해주고 할 권력이 있기나 한지, 어떤 오만인 것은 아닌지도 의심스럽지만.

  참사 희생자에 대한 구도를 “어른”과 “아이”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아이”를 “못 다 핀 꽃”이라고 하는 것도 설령 자연스러운 생각일지 몰라도, 잠자코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라도 문제나 잘못이 있을 수는 있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희생된 사람들을 가리켜서 '착한 아이들' 등으로 이름 붙이고 묘사하는 것도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나는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아이들’, ‘미안하다’ 구도가 청소년들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사회의 산물이고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 문제에 대해 제대로 문제의식이 공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은 이런 문제의식을 ‘청소년보호주의’ 문제라고 명명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와 연관해서 나이주의나 가족주의 구도도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러므로 이 애도 역시 평등하지 않다.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청소년 대중 일반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넓은 의미의 청소년운동 안에서도 과연 이런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는지 묻는다면, 다소 회의적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널리 공유하고 조직화하는 것이 청소년운동의 지난한 숙제이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 “미성년자 석방하라” 등의 구호가 튀어나오던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눈앞에 떨어진 숙제.


첨언

  청소년보호주의는 비청소년들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이 있다. 세월호참사의 사망자 중 50여명은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며, 분명히 비청소년들도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이 ‘아이들’로 주로 불리고 기억될 때, 그 많은 사람들은 한 켠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 사건은 더군다나 단순히 청소년들이 많이 죽은 것이 아니고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단체로 여행을 가다가 일어난 사건이라서 주로 단원고 학생들만 부각이 되고 단원고 학생이 아닌 사람들은 청소년이든 아니든 다소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정부나 언론이나 눈에 띄는 집단을 먼저 챙기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그냥 ‘희생자’, ‘생존자’, ‘사람’으로만 묶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각각의 다른 역사와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기억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대할 때 “아이”와 “어른”이라는 위치가, 꼭 필요한가? 또는 바람직한가?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대로 수용해도 좋은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걸 접할 때마다 부자연스럽고 무례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삐그덕거린다. 다른 청소년활동가들 중 상당수도 그런 마음을 호소한다. 특별히 민감한 것이 아니라, 그 구도에 깔려 있는 차별과 불평등을 읽어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의 종착지는 어쩌면 ‘미성년자’, ‘청소년’이라는 말과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일 것"이라고 활동가들끼리 이야기하곤 한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 사회의 애도 방식을 보며, 다시 한 번 그 말이 떠올랐다.


(노파심에서 이야기하지만, ‘아이’라는 어휘 자체에는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어쩌면 ‘청소년’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느낌의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용례에서는 ‘아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더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때가 많지만, 쓰임새와 맥락이 문제이지 ‘아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아이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청소년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니 근데 그러고 보니 왜 저런 현수막 등은 다 반말질이지?)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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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 깊게 파고들면 순진무구한 아이 희생자와 타락하고 세상에 물든 어른들의 잘못이라는 식의 구도 자체를 더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2014.05.14 20:31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4. 3. 28. 11:10

http://www.redian.org/archive/68571





교육도 연대도 '평등'에서 시작해야

[반론] 서윤님의 레디앙 칼럼 글에 대한 반론



By   /   2014년 3월 28일, 9:50 AM 



제가 활동하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2014년 3월 21일, “반핵과 탈핵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여러분께, 질문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아수나로 인천지부가 3월 20일에 열린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 김익중 교수 초청 탈핵 강연>에서 이 행사의 표어 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배포한 전단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같은 내용을 온라인에도 게시한 것입니다.


그 뒤에 아수나로의 회원이며 페이스북 녹색당 그룹에도 가입되어 있던 이가 그 글을 페이스북 녹색당 그룹에 올리면서 페이스북에서 논쟁이 촉발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글을 행사 주최 단체들 중 인천환경운동연합, 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YWCA 등의 홈페이지에도 올려뒀습니다.

참고로, 이 글에서 녹색당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2012년 선거 당시 이 구호에 대해 아수나로가 문제제기한 적이 있으며 이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았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이 된 행사 홍보물 이미지)

(사건의 발단이 된 행사 홍보물 이미지)


이에 대해 서윤님이 이런 글(관련 글 링크)을 레디앙에 쓰셨더군요. 일단 여기에서 교사와 학생 관계를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예시”라면서 끌어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탈핵운동 단체들이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있는 관계도 아니구요. 혹시 탈핵운동 단체들이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신다면 정말 후덜덜, 무서운 일입니다만. 글 전체를 살펴보면 아무래도 교육 문제를 주로 이야기하고 싶었고 탈핵운동의 표어 이야기가 그냥 예시인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런데 그럼 해당 표어에 대한 논쟁 이야기를 굳이 가져올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논변이 산만하고 예시가 부적절하며 추상적인 개념에 휘둘린 글이라 하겠습니다.



평등은 교육의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여하간 해당 글의 가장 주된 논지가 “교사와 학생은 평등할 수 없으며 위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교육을 부정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니 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서윤님은 평등이라는 개념이 너무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런 개념을 들고 오면 여러 논의들을 무력화시킨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이 글이 상위 개념들을 끌어와서 논의를 거칠게 퉁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서윤님은 한편으로는 ‘평등’이나 ‘교육’ 같은 개념을 본인이 생각하는 좁은 의미로만 쓰고 있습니다. 예컨대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도 도대체 무엇이 평등인지, 같게 대하는 것이 평등인지 다르게 대하는 것이 평등인지, 사용할 때 세밀한 정의가 필요한 개념입니다. 그런 논의 없이 ‘평등’을 ‘동일’하거나 ‘등가의 교환(호혜)을 할 수 있는 관계’라는 협소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 글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이 글이 ‘역할’과 ‘위계’를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와 학생은 학교-교육에서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역할이 다른 것이 곧 상하관계, 위계를 만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역할과 자리의 다름이 교사를 학생의 ‘윗사람’으로 위치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완전히 평등한 관계란 건, 내가 보기엔 호혜적 관계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베풂의 질과 양이 거의 동등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라는 주장도 ‘베풂의 질과 양’을 대체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왜 그게 ‘동등’해야만 ‘평등’한 건지, 마치 자명한 것처럼 적혀 있지만 저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게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 활동보조인은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지만 장애인에게 보조를 받는 것은 별로 없으니 장애인과 위계적인 관계를 맺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서로 평등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 안에서도 그다지 서로에게 ‘동등한 질과 양의 베풂’을 주고받지 않고 있는 경우를 더 많이 보지 않습니까?


원래 인간관계 안에서 얻는 이익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질과 양을 평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만약 교사가 학생과 함께 교육에 참여하는 일에서 보람과 기쁨과 삶의 의미를 느끼고 또 그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그 관계에서 교사는 충분히 많은 것을 얻고 그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있습니다.

굳이 ‘배움’의 관점으로만 그 ‘호혜’를 평가하려 드는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현실 속에서 ‘지적 권위’ 등의 문제를 얘기한다면 같이 고민을 나눠볼 만도 하겠습니다만…. 추상적이면서도 자의적으로 정의된 호혜니 평등이니 하는 말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위계가 없으면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는 단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등한 관계 속에서 교육을 이루려는 수많은 학생들과 교사들(또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 서윤님에 따르면 후배, 후임자, 자녀 등과 그 상대 역할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다가올 이야기지요.

근본적으로는 ‘교사와 학생’ 관계가 없으면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그렇습니다. 일단 학습자의 경험에 중심을 둔 교육, 무형식 교육 등을 다루는 여러 교육학적 논의들이나 탈학교론의 주장을 깨끗이 무시하는 셈이지요. 혹시 지극히 ‘학교화’된 고정관념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아래 엄기호님의 논의도 역으로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평등한 관계여야 비로소 교육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대화는 어떤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가. 평등한 관계에서만 대화가 일어나요. 너와 내가 평등하다고 가정할 때만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수 있어요. (……) 그런데 지금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평등한가요? 우정의 관계인가요? 여러분도 처음에 교사가 됐을 땐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에 대학원 논문을 쓰면서 교사들 인터뷰를 해 보면 선한 마음으로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100이면 100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해요. 여러분 중에도 아마 그런 분들 많을 거예요. 그런데 이게 그냥 애들한테 가서 장난치고 떡볶이 사준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친구 같은 교사가 되려고 할 때 제일 필요한 게 우정의 관계이고, 우정의 관계는 평등을 전제로 하죠.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면서 학생과 교사를 평등한 우정의 관계로 안 바라봤어요. 친구라기보단 ‘큰형님’이 되려 했죠.” (엄기호, 〈당신은 학생에게 얼마나 ‘유용한’ 존재인가?〉, [오늘의 교육 제13호(2013년 3․4월호)])


엄기호님의 주장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엄기호님은 이 앞에서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평등’하다고 이야기합니다.(서윤님이 혹시 이것이 자신의 ‘상징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서 굳이 덧붙여둡니다.) 그리고 평등해야만 교육이 가능하다고 하지요.

저는 엄기호님의 논리 전개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논의가 교사와 학생 사이의 평등이라는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성실하게 성찰한 결과이며 ‘들을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사와 학생 관계가 평등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평등한 관계에서 교육이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평등은 1차적으로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징적 평등’에 불과하다구요?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는 것은 바로 실질적으로 서로에 대한 존중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평등은 누군가가 더 열등하고 미성숙한 존재라는 편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역할’의 차이 등을 ‘위계’, ‘상하관계’로 간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등한 관계에서의 만남과 대화와 경험을 통해서 교육이 이루어지지는 것입니다.

서윤님이 학생인권조례 공청회에서 들었다는 학생 분의 발언은 아마 그런 생각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아마 청소년운동을 하는 활동가들 사이에 큰 이견이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자크 랑시에르 등의 논의도 좀 더 붙여보고 싶은 욕심이 들지만 분량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은 보호주의를 반영하고 활용한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표어 문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이 표어가 아이들에 대한 ‘보호주의’를 활용한 것이고, 탈핵운동 내의 아동․청소년관(觀)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후로는 그냥 ‘청소년’이라고 쓰겠습니다. 10대 또는 0대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해주십시오.)

그 결과 청소년들을 탈핵운동의 주체에서 배제하는 문구가 되었구요. 물론 이 문구 하나 때문에 청소년들이 배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구를 포함해서 탈핵운동,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사회 전반의 청소년관 자체가 청소년들을 배제하지요. 이 문구는 단지 그런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시이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청소년이 무력하고 약한 희생자, 어른들이 책임지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존재로 불려나오고 있다고 봅니다. 청소년, 실제로 보호대상 맞습니다.

그런데 비청소년도, 실제로 보호대상이 맞습니다. 이건 누구도 모르지 않을 텐데요. 특히 방사능 물질의 경우, 정도차가 있을지언정 모두에게 해롭고 모두가 보호받아야 합니다. 왜 굳이 “아이들”을 콕 집어서 쓰는지,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지배적 관념에 편승하는 것은 아닌지 따지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론 서윤님의 말처럼 좀 더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위계’ 속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주장 아닐까요? 그것은 보호나 보장을 시혜로 보는 것이니까요. ‘보호’가 위계와 차별의 이유가 되고, 누군가를 주체에서 배제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이유가 되며, 누군가를 보호대상의 자리에만 위치시키는 ‘보호주의’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A4 1쪽의 짧은 글이지만, 그것으로도 우리의 문제의식이 충분히 전달되리라 믿었습니다. 사회운동을 해온 사람들이라면, 청소년 보호주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도, 적어도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차용하는 것의 문제점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제기만으로도 전반적인 청소년관을 성찰할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했던 모양입니다. 설명이 참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이 문제제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징후는 실은 2012년부터 있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2012년 글입니다.


“SNS에서 ‘아이들에게 핵없는 세상을, 녹색당’이란 구호가 적힌 작은 손현수막을 들고 있는 사진이 있었는데, 어떤 청소년 단체에서 이에 대해 ‘청소년과 아동에 대한 보호주의가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사무처에서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생겼다. (……) 다음날 아침에는 ‘청소년과 함께 핵없는 세상을’이라고 수정된 손현수막이 사무처에 도착했고, SNS에 바로 사진이 올라갔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 어리둥절하고 있으니깐, 옆자리에 앉아있는 청소년 운동을 했던 활동가가 말을 걸어주었다. 본인도 그 청소년 단체의 지적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들을 껴안고 가야한다고.” (송준규, 〈풀뿌리들의 놀이터〉, [공동선 104호]. (관련 글 링크) 에서 인용.)


“청소년과 함께 핵 없는 세상을!”이라니, 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표어입니까? “아이들에게”를 바꾸다보니까 나온 괴작인 셈입니다. 게다가 “청소년과 함께”라니, 그 ‘함께하는’ 주체에서 청소년이 떨어져나왔다는 문제점은 고스란히 안고 있습니다. 아이를 청소년으로 바꾼다고 될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저는 오히려 ‘어린이’보다는 ‘아이’라는 말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아이’라는 말 자체를 갖고 태클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실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청소년운동도 껴안고(?) 가야 하니까”라는 얕은 발상에서 나온 표어라고 할 만합니다. (옆자리에 앉아있었다는 청소년운동을 했다는 활동가가 누군지 궁금합니다. 저랑 면담 좀 하실래요? ^^)


저는 “아이들”이 “다음 세대”를 뜻한다는 변호가 기만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표어를 보거나 들었을 때, 수백년이나 수천년 후에 40대, 50대, 60대 모습을 한 미래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은 나이가 적은, 청소년의 모습으로 떠올릴 겁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순수함, 무고함, 약함, 보호해주어야 할 대상. 결국 이 표어가 보호주의적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며 청소년을 동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활용하고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읽힐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은 인정을 해야 합니다. 포스터와 홍보문구에서 보이듯 ‘내 아이’, ‘내 자녀’, ‘우리 아이’를 내세우는 것과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탈핵을 주장하는 분들이 거론하는 것이 주로 2030년 탈핵인 것으로 압니다. 다소 유보적 입장의 정당도 2040년을 이야기하더군요. 독일은 2022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먼 미래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룰 수 없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나요? 저는 실제 내세우는 정책을 봐도 그렇고, 저 표어의 효과 면에서도 그렇고,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를 가리킨다는 변명은 문제제기를 피해가려는 불성실한 답변일 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대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은 ‘아이들’이라는 표현으로 제대로 전달되는 것 같지도 않고, ‘아이들’이라는 표현으로만 전달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연대’도 평등에서부터


이 글을 통해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말하자면, ‘평등’이나 ‘위계’나 ‘교육’이나 ‘아이들’ 등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쓰다가 그것 자체에 경도된 나머지 인정할 부분마저 간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 담지는 못했지만, 저는 탈핵운동을 포함하여 환경-생태-녹색운동에 청소년보호주의나 청소년 차별의 문제가 상당히 뿌리 깊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생태-녹색운동뿐만 아니라 교육운동이나 여러 영역에도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교육단체, 환경단체 등이 다수 참여하는 ‘아이건강국민연대’가 청소년 게임셧다운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습이 대표적 예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청소년운동과 마찰을 빚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청소년운동은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비판을 하고, ‘평등’을 요구하겠지요. 교육뿐 아니라 연대 역시 ‘평등’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저 이번에 간단한 글을 하나 써서 우리의 문제의식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아마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탈핵운동을 하는 분들 등이 청소년운동과 연대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우리의 문제의식에 동의한다면, 다시 한 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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