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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1 장 그르니에 - 어느 개의 죽음 (2)
흘러들어온꿈2009. 2. 11. 02:47

2004년에, 장그르니에 씨의 "어느 개의 죽음"을 읽고서 썼던 글이네요.


옛날 블로그에서 발견하고 집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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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전에도 말했다시피, 장 그르니에 전집이 나온 바 있었으나 현재 절판된 상태.

그래서 4개, 일상적인 삶, 까뮈를 추억하며, 어느 개의 죽음, 섬, 을 뽑아서,

장 그르니에 선집, 이란 이름으로 나온 녀석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지요.

장 그르니에 책은, 적당히 어려우면서 적당히 이해할만하고, 적당히 사색적이면서 적당히 감성적이고..(그만해!)

여하간 수필로서는 귀감 중의 귀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전형적인 프랑스 수필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들이 많긴 하지만, 형식이 전형적이라고 해서 훌륭함이 그리 퇴색되진 않겠지요. 소설에 맨날 대립구도가 나온다고 대립구도가 등장하는 어느 명작의 가치가 퇴색되진 않잖습니까. (예가 참 너무 일반적인 것 아냐..;;)

장 그르니에 씨 것,

수필 외의 다른 장르 쓴 건 읽어보질 못해서 말 못하겠고..-_-

 

 

 

 

 

(음.. 아래는 숙제랍시고 두들긴 녀석을 조금 각색(?)한..)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적인 시선

 

 

 실존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존재에게는 그 자신만의 죽음이 있기에 그 자신으로 성립할 수 있다. 존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부재를 통해서이다. 사실 살아가는 주위,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죽음이라는 사건은, 그에 대해 그 전에는 생각하지 않던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고 빈 자리를 통해 존재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된다. 존재는 죽음을 통해 소멸하지만 그 흔적은 그 후에도 남는다. 우리는 그 흔적 - 그림자를 붙들고서 비어있는 자리를 재구성해보려고 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런 시도 끝에 이르는 것은 부재라는 현실 앞에서의 어떤 종류의 체념, 망각 - 무뎌짐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녀석의 삶을 정리해 보고 싶"어서, "또 하나의 삶을 마련해 주고" 싶어서 글을 쓰면서도, "사랑했던 존재의 그림자 밖에는 드러내지 못"한다며, 필자는 글을 쓰면서도 다시 한 번 자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중한 것을 잃고 살아남는 일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법한 일이다. 만남은 헤어짐을 내포하고 존재는 파괴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존재한다는 인과가 있는 이상 그 인과가 끊어져서 사라질 가능성도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 벗, 가족, 선물, 아끼는 책. 우리가 애착하는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상실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에도 사소하게는 어머니가 사주신 모자, 목걸이, 아끼던 책부터 크게는 내 주위의 생명들까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겼으나 잃을 수밖에 없던 것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것은 어쨌건 간에 "살아남는" 일이고, 또 괴로운 일이다. 과연 소중한 것을 잃고도 살아남은 우리들의 삶은 정녕 사는 것인가? 하여, 필자는 "소유한 것에 대한 초연함에 그치지 않고 사랑하는 대상들에 대해서도 초연함을 지녀야 한다."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곳곳에서 그에 대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개의 진실


그렇기 때문에 이 텍스트들이 개에게 주는 지위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지금은 없는' 존재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우리는 종종 과장과 단정을 일삼는다. 그러나 필자는 사라진 존재에게 장점들을 갖다 붙이는 것을 그에 대한 의무를 벗어나기 위해 치르는 값싼 대가이자 위선이라고 말한다. 글에 드러나는 개에 대한 찬양은 죽어버린 그의 개 - 타이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개 전반, 혹은 동물 전반에 대한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러한 긍정적인 서술의 바탕은, 개들이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데에 있지도 않다. "개들은 우리와 똑같다."라는 서술은 개를 신화로 만들지도, 개를 격하하지도 않는다. 그저 계속 물으면서, 살아있는 실존으로서 개를 인간과 같은 지위에 놓을 뿐이다. "하지만 녀석과 같은 동물도 기다림 속에서, 즉 번민 속에서 살지 않았을까?"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그것이 필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여기 담긴 진실의 핵심이다.

 

 

 

보편성 + 개별성 -> 인간성


 여기서는 개에 대한 사회적인 태도를 말하는 듯싶다가, 갑자기 자기 개의 살아생전 이야기를 하고, 또 개가 죽은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의 정서를 넋두리처럼 늘어놓더니, 어느 순간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에 이르는, 이 많은 단상들은 산만하지 않다. 그것은 그 전체를 관통하는, 바로 그 하나의 진실과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 때문이다. 이 진실과 사건이 보편성과 개별성을 모두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어느 개의 죽음"("타이오의 죽음"이라거나 "내 개의 죽음"이 아니다!)이라는 보편성과 사건적인 개별성을 모두 갖춘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이리라.
 소위 인간적인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의 수난사", 중 "고난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행한 미약한 반항"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반항 속에서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하기에 반항의 모습이 인간적인 '사랑'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모든 존재가 개별성과 보편성의 양면을 모두 지니고 있어야 하고 또 그렇다는 점을, 우리는 자주 간과하곤 한다. 그러므로 이 책에 드러나 있는 시선이야말로 인간적, 아니 존재적이라고(인간이 소위 짐승보다 나은 게 뭐가 있겠나! 이런 용어가 오히려 더 타당할 것이다.)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이 책이 지닌 매력의 실체다.
 

 

시선의 미묘한 거리감

 

 소중한 것을 잃은 상황에서 필자가 진실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필자의 직업 탓일지도 모른다. 철학자라는 직업은 회의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그의 말들이 밑도 끝도 없는 회의와 차가운 철학적 사유 이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여기에서 그가 유지하는 미묘한 거리감각 때문이다. 사건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고, 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은, 그 둘을 조금씩 오가는 단 한 발자국의 거리감, 그것이 인간의 온기와 철학적인 오묘함을 모두 놓치지 않게 해준다. 여기에 서술된 "개의 죽음"은 일회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이 텍스트가 보편적인 곳까지 이르는 사유가 되는 것은, 그가 그것들을 붙잡고 질문하려는 자세를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그 질문이 독자의 마음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두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구체적 삶과 추상의 만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적절한 시점에서의 시선이 갖가지 상반되는 것들, 영원과 덧없음, 삶과 죽음, 행복과 슬픔을 모두 논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들을 뛰어넘어서 신적인, 초연한 자세를 취하지 않을 것. 그는 초극을 바라지 않는다. 서술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글귀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기도와 같은 성질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결국 하려던 말은?

 

결국 이 모든 단상 끝에 제시된 마지막 단상(90)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외로우므로 사랑하자, 라고.

 

"우리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할 마음을 지닌 대상을 사랑하자. 보잘것없는 설득력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우리가 보다 나은 존재라고 믿지도 말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커튼을 걷고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서둘러 그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자. 만일 그 손을 거두어들인다면 당신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오직 사랑이란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가 말하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종교적인, 오만한 사랑도 아닐 것이고 추상적인 사랑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들, 똑같이 살아있는 실존들 사이의 사랑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시선이 이런 저런 영역을 넘나들고 나서 얻은, 다소 식상해보이지만 또한 솔직한, 이 책의 맺음말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제시된 단상들이 이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 텍스트들은, 하나의 주제를 향해 치달아가는 글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중심을 놓고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글들이다. 따라서 그 자체들은 각각 독립된 방향으로 나가는 하나의 걸음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어떤 잠언집, 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뭐, 어떻게 읽는지는 그 사람에게 달린 것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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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혹시나 해서 "까뮈를 취억하며"를 검색창에 써본 1人

    2009.02.13 21:3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