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0. 10. 2. 09:13

어쩌다보니 청소년 관련 제 글 하나도 실린 책입니다 ^^;;



[책의 유혹]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렇게나 생생하게

『집은 인권이다, 이상한 나라의 집 이야기』, 주거권운동네트워크 엮음, 도서출판 이후, 2010년

손낙구

“당신은 ‘집’을 생각하면 어떤 단어들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나요?” 3년 전 이맘 때 주거권운동네트워크 웹진<진보복덕방>이 내게 물었다. 난 간단명료한 네 글자로 답했다. “걱정거리.” 다시 생각해봐도 절묘한 대답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사를 다녔을까?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손가락이 한참 접힌다. 통계청이 조사한데 따르면 한국인 셋 중 두 명이 5년에 한 번씩 이삿짐을 싸고 있다. 수도권에서 셋방 사는 사람은 더 심해서 열 중 여덟 명이 5년마다 이사를 다니고, 그 중 다섯 명은 2년에 한번 씩 방을 옮겨가며 살고 있다.

익숙해진 걸까, 체념한 걸까. 떠돌이 삶도 수십 년 계속되면 적응되는 걸까, 힘든 일일수록 기억에서 빨리 지우는 현명한 뇌 덕분에 면역력이 생긴 것일까. 원래 한국인은 집단으로 역마살이 낀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아주 오랜 옛날 선조들이 유목생활을 했고 그 피가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일까…. 집 없으니 나가라면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그렇게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웹진 <진보복덕방>기사를 모아 엮은 책 『집은 인권이다, 이상한 나라의 집 이야기』에서는 대답한다, “아니다”라고.



혼자서 1,083채를 소유한 사람과 2년에 한번 씩 이삿짐을 싸야하는 무주택자에게 집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264미터높이의 <타워팰리스> 69층 펜트하우스에서 구름을 벗 삼아 사는 사람과, 땅속에서 곰팡이와 동거해야하는 (반)지하방 거주자에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같을 수 없다고 얘기한다. 똑같은 주택소유자라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한 채에 120억 원이 넘는 집에 사는 사람과, 인천시 강화군에서 9만 원짜리 집에 사는 사람에게 집이 어떻게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집에서 황금알을 뽑아내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월세 보증금을 마련하는 데만 20년이 걸리는 사람들, 그래서 내 집 마련의 꿈도 상속해 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라한다. 왜 이사를 다닐 수밖에 없는지, 계약기간과 상관없이 집주인이 어떻게 세입자를 몰아세우는지, 그나마 주거 임대차보호법이 왜 빛 좋은 개살구인지,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를 얘기한다.

마치 환자가 의사에게 증상을 호소하듯 말한다. 집 없이 셋방을 떠돈다는 것이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프고 시린 삶인지, 용역 깡패를 동원한 뉴타운 재개발과 강제철거에 내몰린 가난한 사람들이 왜 망루에 올라야했으며, 누가 왜 어떻게 그들을 불에 타죽게 했는지 얘기한다.

사람이 비닐하우스에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반)지하에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한다. ‘소리 나지 않는 인간’, ‘관속에 누운 것 같아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인고시원 사람들과 쪽방사람들을 이야기한다.

문손잡이가 손에 닿지 않기 때문에 문이 닫히면 꼼짝 없이 갇혀 버릴까봐 평생 방문을 닫지 않고 살고 있는 중증장애인에게 현재 한국 사회의 집이란 무엇인가 또박 또박 짚는다. 성소수자에게, 독립 하려하거나 독립을 강요당한 청소년에게 집이 얼마나 고통을 주고 있는지 호소한다. 월세나 전세 계약서도 쓰지 못하고 마음 졸이며 살아야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의 집은 어떤 집인가 묻는다.

서른다섯 살이 안 된, 결혼 안 한 여성에게는 왜 전세자금을 대출 해 주지 않는지 묻는다. ‘ 홈리스주소를 정원벤치로 하여 투표권을 부여하라’는 미국 연방법원 판결을 소개하며, 우리나라에 서는 노숙인에게 집이 없다는 이유로 투표권을 박탈하는 것이 헌법정신에 맞는 지 묻는다.

이 책의 장점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실의 기록이란 점이다. 대다수 글은 자신이 겪은 일을 직접 쓴 것이다. 상당수는 말한 것을 풀어 쓴 것이다. 취재를 거쳐 기록한 것조차 거의구술에 가깝다.

셋방살이나 (반)지하방 생활의 어려움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똑같은 셋방살이 라도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 장애인, 가출청소년, 비혼 여성 등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조사나 기록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집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만큼 생생하고 자세하게담은 책은 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인권의 관점에서 집을 바라보고 주거권을 실현 할 수 있는 실험적 대안도 여러 가지 제시되고 있다. 대안 역시 큰 담론이나 거대 정책 차원보다는 ‘작은 시도’의 성격, 즉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다. 인간적인 개발을 꿈꾸는 장수마을 대안 개발 프로젝트가 대표적인데, 미완의 대안이지만 매우 값진 시도다. 주택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는 물론이고 주택정책을 설계하는 정책입안자들에게 문제를 보는 지평을 넓혀주고 연구와 정책 상상력의 씨앗을 틔워 줄 귀중한 기록이다.

누구도 집 없이는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루의 3분의 1 이상은 집에서 생활을 한다고 보면, 집에 얽힌 이야기는 사람의 생활과 인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람 대다수가 집 때문에 죽고 사는 마당인데, 정치와 학문은 물론이고 사회운동도 집 문제를 자신의과제로 삼는데 소홀 했던 게 솔직한 현주소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각 분야에서 진정한 사회발전을 꾀하는 이들에게도 자신을 비추고 성찰하는 거울이자, 집 문제를 실질적으로 고민하고 연구 할 수 있는 훌륭한 지침서가 되는 책이다.


덧붙이는 글
손낙구 님은『부동산계급사회』저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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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20 호 [기사입력] 2010년 09월 28일 23:12:29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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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9. 6. 13. 01:47

예~전에 새내기 새로배움터였나 무슨 세미나였나를 할 때... 장애인 관련해서 커리를 짜달라고 해서 이러쿵저러쿵 발췌작업을 하다가 블로그에 보관해뒀던 부분이다.

김도현 씨의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는 여러 가지로 내 운동에도 영감을 주었던 책인 동시에,
좀 많은 부러음(;)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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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사회 이전의 농업 노동과 가내 수공업은 노동을 하는 주체 나름의 작업 방식과 속도, 노동 시간이 유연하게 보장되었고, 노동 규율은 그러한 노동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생산량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한 개인은 대개 하나의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의 전 과정을 통합적으로 수행했으므로, 이러한 노동에 대해 자신만의 통제권을 일정하게 실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동의 형태 속에서 손상된 육체를 지닌 사람들, 즉 사지의 일부가 불완전하거나 청력 또는 시력을 잃은 사람들, 지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보여졌던 사람들 역시 ‘가족 공동체’ 또는 ‘장원 공동체’라는 집단적 노동력의 일부로 통합되어, 나름의 속도와 방식으로 농업과 가내 공업 내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토플리스E.Toplis는 《장애인에 대한 복지의 제공, Provision for the Disabled》에서 특히 농인과 맹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느리게 변화하는 산재된 농촌 공동체에서 성장해온 맹인과 농인들은 특별한 준비 없이 보다 쉽게 그러한 사회들에서의 노동과 삶에 동화되어 욌다. 농인은 다른 모든 아동들도 얼마간의 형식적인 가르침을 수반한 관찰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농업적 직무들을 혼자서 수행하는 시기 동안에는 그다지 직업의 폭을 제한받지 않았다. 시각 장애도 혼잡하지 않고 익숙한 농촌의 환경들 내에서는 덜 위험했으며, 반복적인 촉각의 기능과 관련된 일상의 직무들은 특별한 훈련 없이도 학습하고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 사회의 환경은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랬다. 근대적인 노동의 환경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근대적인 공장 내에서 노동을하는 사람은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였고 부품이었다. 작업 방식은 획일적이었고 기계의 속도에 사람이 맞춰야 했다. 노동 시간과 휴식 시간, 식사 시간, 언제 일을 시작하고 언제 끝낼 것인가 까지 강제적으로 정해졌으며, 이러한 과정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주가 정해놓은 노동 규율을 따라야 했다. 생산량은 사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목표치로 사전에 정해졌다. 개인의 노동은 대부분 전체 생산 과정의 극히 일부분만을 분절적으로 수행했고 그러한 각각의 노동을 전체로 통제하는 것은 별도의 관리자이거나 심지어 보이지 않는 손(시장)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 방식은 이전의 느리고 자율적이며 유연한 직무 패턴을 전면적으로 깨뜨리게 된다. 토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공장 노동에 진입하지 못하고 부랑자로 떠돌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노동의 형태를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며, 어떤 면에서 부랑자가 되는 것은 하나의 저항 방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동적인 방식의 저항자들 내에는 사지의 일부가 불완전한 사람, 농인, 맹인, 지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보여졌던 사람 등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들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을 토지로부터 이탈시키는 과정과 더불어 이들을 임노동 관계로 포섭하기 위한 국가의 강제 수용과 훈육이 진행된다. 서구의 역사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구빈원workhouse은 바로 이러한 거리의 부랑자들을 수용했던 강제 노역장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의 효과적인 훈육과 나태의 방지를 위해서,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류할 필요성을 느끼게된다. 핵심적인 목표는 ‘새로운 노동에 적응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적응할 수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질서를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따를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고, 후자를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시설을 만들고자 했다. 즉 일을 할 수 있는 몸the able bodied를 선별하기 위해 일을 할 수 없는 몸the disabled bodied를 명확히 규정하고자 했고, 이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장애disability’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즉 근대 사회에 들어 생겨난 장애인이라는 구분은 임노동 관계로의 포섭 가능 여부에 따라, ‘불인정不認定 노동’ 계층이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으로부터의 배제 과정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점점 더 심화되어갔다. 기계의 발전 및 생산 과정의 효율화 속에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생산할 것을 강제할 수 있었다. 엄격한 시간 계산과 표준화된 동작 연구를 기초로 노동의 표준량을 설정하는 테일러 시스템Taylor system과 여기에 중단 없는 생산 흐름을 강제하는 컨베이어벨트를 결합시킨 포드주의Fordism 생산방식은 하나의 생산방식이면서 동시에 근대적 노동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노동이 더욱 더 합리화되고, 육체의 정밀한 기계적 동작과 더 빠른 연속성의 반복을 요구받게 되자 손상된 육체를 지닌 사람들,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 더욱이 그들의 육체적 손상에 합리적 편의reasonable accommodation를 제공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직무를 수행하기에 더욱 부적합했으며 임노동으로부터 점점 더 배제되어 갔다. 그래서 산업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표준적인 노동자의 육체에 부합하지 않아서 노동력이 효과적으로 지워지고 임노동으로부터 배제되는, 장애인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냈다.


(김도현(2007),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1부 장애를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발전과 장애 문제」.  pp.69-73.)


 


 “우리의 신체성身體性 자체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이는 1960~1970년대 일본의 급진적 장애인 운동에서 핵심을 형성했던 푸른잔디회青い芝の會 등의 뇌성마비 장애인 단체들이 외쳤던 정치적 구호이다. 동의대학교 유동철 교수가 앞서 언급한 <장애운동의 성과와 과제>라는 글에서 “중증 장애인들은 자본주의적 경쟁 원리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생활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며, 따라서 속성상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 역시 그러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인식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애인들의 실존實存 자체가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있다는 주체적 인식은 장애인들이 자본주의에서 배제‘당하고’ 있다는 수동적․객체적 인식과 그 질을 달리한다. 단순히 배제만이 문제라면, 장애인들을 현재의 사회에 통합시키면 된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 자체가 장애인의 실존 자체와 충돌한다면 그러한 통합은 새로운 체제,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장애 문제 해결의 대원칙처럼 얘기되고 있으며, 누구도 별 이의를 달지 않는 방향성이 바로 사회 통합social integration의 실현이다.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철저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 왔기에 그 역방향으로의 진전인 통합을 얘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회 통합이 어떠한 조건에서, 누가 누구에게로 통합됨을 이야기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어야 한다.

   사회 통합과 비슷한 맥락에서 사용되어 온 주류화mainstreaming이라는 개념, 그리고 여기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정상화nomarlization라는 이념은 결국 비주류인 장애인이 주류인 비장애인의 사회에, 비정상인 장애인이 정상적인 비장애인의 삶의 양식에 맞추어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의 통합은 장애인에게 또 다른 고통과 딜레마를 안겨 줄 뿐이다. 이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지원과 장애인 주체의 노력 속에서 일부의 장애인은 ‘정상화’되어 비장애인의 삶과 함께 흘러가게 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일부의 장애인은 여전히 그 외부에 남게 될 것이며, 이는 잘 해야 장애인 대중 전체에 대한 새로운 분할과 이에 기반을 둔 더욱 공고한 배제가 만들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녀평등이라는 구호 속에서 여성은 남성이 차지했던 세계로 편입되고 있지만, 남성도 여성이 머물렀던 공간으로 함께 진입하지 않을 때 어떠한 상황이 벌어졌는가를 우리는 비판적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성은 공사公私 분리라는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성적 분업 구조 속에서 기존의 성 역할과 새로운 사회적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슈퍼 우먼’이 되기를 강요받아왔다. 장애인의 사회 통합 역시 장애인의 몸이 지닌 차이와 경험을 고려한 속에서 비장애인 세계와 장애인 세계의 상호 통합의 과정이어야 하며, 이런 과정에서 노동에 대한 정의와 관념, 경쟁과 효율성의 원리, ‘조금이라도 더 빨리’라는 속도의 문화는 전면적인 혁신과 재조정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장애인이 지금까지 건설해 온 문명 가운데 장애인에게 가장 적대적인 문명의 하나임에 틀림없는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는 과정을 불가피하게 거쳐가야만 할 것이다.

   푸른잔디회의 「행동 강령」 중 마지막 다섯 번째는 “우리들은 비장애인의 문명을 부정한다”이다. 근본주의와 분리주의에 기반한 극단적 입장이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이러한 강령은 앞의 설명과 결합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 보자면 결코 극단적이지 않다. 극소수의 국지적인 사례를 논외로 한다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모든 문명은 비장애인 중심의 문명이었다. 즉 이러한 강령은 자본주의 문명이 비장애인 중심의 문명 중 마지막이 되어야 함을, 새롭게 건설될 세계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건설해나가는 문명이 되어야 함을 가열ㄹ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3부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의미와 가치.
「반자본 운동으로서의 장애인 운동」. pp.201-204.)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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