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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30 어느 파본 이야기
어설픈꿈2008. 1. 30. 23:50

어느 파본 이야기



 구석진 골목길 가로등 아래나 공터 등에는 저절로 조그만 쓰레기장 같은 것이 만들어지곤 한다. 그래서 때로는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맙시다”와 같은 내용의 조잡한 간판이 나붙기도 하지만, 그런 것을 만들어 줄 사람도 없는 버려진 곳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쓰레기장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놓여있곤 한다. 음식물. 비닐. 깡통. 유리병. 휴지. 구멍 난 양말. 깨진 유리조각. 컵라면 용기. 책.
 분리수거 같은 것은 무시한 채 널려있던 쓰레기들 속에서 문득 네모난 무엇이 일어섰다.
 검고 수수한 표지에 먼지가 묻어있다. 책장 틈에는 생선뼈다귀가 끼어 있다. 싸구려 종이로 만들어진, 제법 두께 있는 책이다.
  그것은 파본이었다. 파본. 인쇄·제책이 잘못되거나 파손되거나 하여 온전하지 못한 책을 이른다. 파본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그 중에서도 심각한 편이었다. 97, 98쪽은 두 장씩 있었으며 100쪽은 누락되어 있었다. 100쪽 이후로는 글자들이 조금씩 뭉개져 있기까지 했다. 그리고 접힌 채 잘못 잘린 책장의 남는 부분이 세 조각, 삐져나와 있었다.
 그것은 약 5개월 전 서울의 출판사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흘 전 대학교 앞 한 서점 서가에서 팔렸다. 그것을 샀던 사람은 화를 냈고, 출판사에 문의해서 새 책을 얻었다. 파본인 그것은 버려졌다.
 그것은 본래부터 호기심 많은 책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만든 사람에게 찾아가 어째서 자신은 파본이 된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자신의 탄생이라든가 본질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그런 그것에게 그것에 붙어 있던 생선뼈다귀가 말해줬다.
 수도에는 커다란 출판사가 있어. 모든 책은 그곳에 있는 장인의 손에서 인쇄되어 나오지.
 그 이야기는 그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수도로 가기로 했다.
  다른 책들은 보통 자기 힘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에게는 삐져나온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들은 서가에 꽂혀 있을 때는 접혀 있어서 눈에 띄지 않았고 또 그것 자신도 그 부분을 자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샀다가 버린 사람이 그 부분을 펴둔 채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그 잘못 잘린 종이 부분이 세 방향으로 넓게 삐져나와 있었다. 그것은 그 부분을 다리처럼 움직여서 천천히 기어갔다.
 그것은 사람들 발길에 차이거나 찢어지지 않게 길 구석으로만 다녀야 했다. 동네 아이들 손에 잡혀서 딱지가 될 뻔한 일도 있었다. 강아지와 고양이들에게 붙들린 적도 있었다. 자동차에 몰래 올라타기도 했다. 비가 오면 젖지 않게 건물로 들어가서 피했다.
 여기일 거야.
 여전히 생선뼈다귀를 낀 채, 더욱 꼬질꼬질해진 책은 마침내 아주 높이 솟아 있는 건물 앞에 이르렀다. 그곳은 인쇄소까지 한 건물에 있는, 거대한 출판사였다.
 1층에서는 인쇄 기계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실례지만, 장인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그것은 한쪽에 쌓여있는 책들에게 물어봤다. 책들은 깊이 잠들어 있어서 대답해주지 않았다.
 2층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뭔가 많은 종이들을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실례지만, 장인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아무도 그것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바빴다.
 그것은 낑낑대며 가까이 있는 책상 위로 올라갔다. 계속 다리 역할을 해준 삐져나온 종이 부분은 이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책상 앞에서는 단발을 단정하게 늘어뜨린 여자 한 명이 원고를 읽고 있었다.
 실례지만, 장인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여자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것을 봤다. 그러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넌 더럽구나. 그 생선뼈다귀는 뭐니? 이런, 게다가…
 여자는 그것을 위아래로 뜯어보는 듯했다.
 넌 파본이구나.
 예. 파본입니다. 그래서 장인에게 왜 제가 파본인지 물어보러 왔습니다.
 왜 파본이냐니? 그런 데 이유 같은 건 없어. 파본은 그저 파본이야.
 여자의 미간에 더 깊은 주름이 파였다.
  장인님은 꼭대기 층에서 이 출판사의 모든 걸 조율하시지. 사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장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완벽한 능력에 대한 경외를 표하는 거야. 그분의 손으로 움직이는 이 출판사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거든. 지금 파본이 그런 분을 만나겠다고?
 그런 완벽한 곳에서 왜 파본이 나온 걸까요?
 어… 글쎄. 음….
 턱을 괴고 고민에 빠진 여자를 두고 그것은 책상에서 뛰어내렸다.
 3층, 4층, 5층…. 그것은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이 건물은 대체 얼마나 높은 걸까?
 그것은 질문했다.
 글쎄.
 생선뼈다귀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에 대한 답은 어차피 둘 다 모르는 일이었다.
 낮, 그리고 밤. 다시 낮. 다시 밤. 그것은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생선뼈다귀는 계속 그것에 끼어 있었다.
 좀 지치는군.
 결국 그것의 다리가 모두 너덜너덜 닳아서 못 걸을 즈음, 그것은 꼭대기에 도착했다.
 더 이상 계단이 없군. 그럼 여기가 꼭대기겠지?
 아마도.
 그것은 닫힌 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기다렸다.
 낮, 그리고 밤. 다시 낮. 다시 밤. 며칠이 지나고, 문이 열렸다. 염소수염을 기르고 배가 나온 노인이 나타났다.
 실례지만, 혹시 여기가 꼭대기입니까? 그리고 당신이 장인이십니까?
 오.
 노인은 그것을 보았다.
 여긴 꼭대기가 아니란다.
 그것은 실망했다. 이제는 더 이상 기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 뒤편으로 또 다른 계단이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은 장인에게까지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난 장인이라고 불리지.
 그것은 안도했다. 이제는 더 이상 기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것은 장인에게까지 온 것이었다.
 16세기에 태어나서 18, 19세기쯤부터 그런 이름으로 불렸지. 아마도. 좀 기억이 희미하군. 그래, 무슨 일이지?
 왜 제가 파본인지, 왜 제가 파본으로 태어났는지 알고 싶어서요.
 흠, 그것, 어려운 질문이구나.

 노인은 그것을 집어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더니 어느 한 층에서 멈췄다.
 그 층에는 커다란 방 하나만 있었다. 커다란 창문이 있었고 의자와 책상이 하나씩 창가에 놓여 있었다. 노인은 그것을 책상 위에 두고는 의자에 앉아서 창 밖을 바라봤다.
 완벽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그것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결점이 없는 것이겠죠.
 보통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러나 결점이 없는 것은 결점이란 요소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완벽하지 않은 것 아닌가?
 생선뼈다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완벽한 체제를 위해서는 파본과 같은 완전하지 못한 요소가 필요하지. 그래, 자네는 자네 친구인 그 생선뼈다귀처럼, 우리의 소비자들에게는, 체제에는 별 쓸모도 없는 물건이야. 그러나 그런 쓸모없는 물건, 잘못된 물건이 있어야만 체제는 완벽해지는 거라네. 고유의 가치 같은 게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건 우리가 알 바 아냐. 자네는 무가치한 것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만들어진 거야.
 그것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우리는 일부러 완벽한 체제에 반(反)하는 존재들을 만들지. 아주 조금. 그것이 시스템을 완벽하게 할지니. 완벽이란 모순된 것이지.
 그것은 조용히 노인의 깡마른 얼굴을 바라봤다. 뱃살과는 대조적인 얼굴을.
 창문 하나가 갑자기 검게 변했다. TV로 변한 창문은 1층 인쇄소의 한 구석인 듯 보이는 곳을 비췄다. 그곳에서는 기계들이 종이를 삐뚤빼뚤하게 자르고, 책의 한 면을 찍지 않고, 글자를 뭉개가며 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래, 자네는 일부러 파본으로 만들어진 거야.
 창 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대량으로 똑같은 책을 찍어내지. 그리고 거기에 약간의 변화를 줘. 일단 요즘은 보통 좋은 지질에 화려한 표지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네처럼 수수하고 옛날 느낌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지. 그건 단지 취향을 맞춘다는 걸까. 그것만으로는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아. 파본을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별로 없지만, 그런 좋아하지 않는 물건도 있어야 다양성이 있는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하는 걸세.
 그것은 생각을 하는 듯 잠시 침묵하더니 답했다. TV 속에서는 변함없이 파본이 생산되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군요.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밖으로 나갈 텐가? 자네 같은 책은 이 출판사 안에 있어선 소용이 없으니. 아, 이젠 걸어갈 수 없겠군…. 그럼, 자, 안녕히 가게.
 노인은 그것을 창 밖으로 던졌다.
 오래간만에 즐거웠다네.
 노인의 작별인사를 뒤로 하고 그것은 비에 젖으며 떨어져내렸다. 오랜 시간을 낙하해서 그것은 땅에 닿았다. 그것은 이미 죽은 책이었기 때문에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종이가 비에 점점 더 젖어갔다. 싸구려 종이에서 잉크가 번져갔다. 생선뼈다귀는 떨어지면서 어딘가로 튀어나갔다. 검은 물이 흘러내렸다.
 비에 불은 종이가 자동차 바퀴에 산산히 찢어졌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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