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들어온꿈2008. 8. 14. 04:55
계약직-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김명환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나는 껌을 씹지 않는다.
컵라면도 통조림도 먹지 않는다
봉지 커피도 티백 보리차도
드링크도 탄산음료도 마시지 않는다
물티슈도 내프킨도 종이컵도
나무젓가락도 볼펜도 쓰지 않는다

눈이 하얗게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
아스테이지에 돌돌말려
빨간 리본을 단
장미 한 송이 받아들고

나는 울었다
내가 불쌍해서
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들이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제복을 입고 스카프를 두르면
어느 삐에로의 천진난만한 웃음보다
따뜻하고 화사하게 웃어야 했지만
웃으면 웃을수록
자꾸자꾸 눈물이 났다

사는 것이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구차하고 비굴하고
가슴이 미어질 줄은 몰랐다

KTX 여승무원이 되고나서야 나는
이 세상이
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들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흐르고 넘쳐
자꾸자꾸 밀려오는
파도란 것을 알았다


--------------------------------

어색한 휴식
                           김명환

나는 오이에게 미안하다
나이 스물이 되면서
이 땅의 시인이려면
민주화운동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나는 고추에게 미안하다
나이 서른이 되면서
이 나라의 시인이려면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나는 호박에게 미안하다
자식노릇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아버지는 늦도록 고생만하시다 돌아가셨다
나는 콩에게 미안하다
어머니는 집도절도 없이
몇 년을 떠돌아 다니셔야했다
나는 토마토에게 미안하다
아내는 첫아이를 낳고도
남편 얼굴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딸기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늦게 본 아들 녀석이
쑥쑥 자라는 걸 보면 가슴이 뿌듯하다
내 철들 무렵 바라본 세상은 암흑이었다
지금은 새벽동이 터오고 있다
나는 가지에게 미안하다
조합 활동을 하다 시골 역으로 쫓겨나고
오랜만에 휴식을 갖는다
길에서 벽돌을 주워오고
산에서 흙을 퍼 나르고
베란다에 작은 화단을 만들었다
오이 고추 호박 콩 토마토 딸기
가지 부추 파 생강 수박 참외 상추
채송화 맨드라미 사르비아 양분꽃
봉숭아 해바라기 이름 모를 들꽃들
내 불쌍한 화초들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가 잔인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게 휴식은 어색하다
나이 마흔을 바라보며
나는 어색한 휴식을 즐긴다



----------------------------------------------------------------------------------------


경향신문에 난 <비정규직의 애환·농촌현실 고발…노동문학, 다시 숨을 쉬다>(07.08.23.)라는 기사를 보고서 김명환 씨의 시에 흥미가 생겨서 찾아봤던 시들인데...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홍보물을 하나 만들다가 생각이 나서 다시.
Posted by 공현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바람

    2008.08.19 17:56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