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좀 다르게 편집해서 언론사에라도 기고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여유가 나지 않아서
그냥 초고 쓴 그대로 올린다.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새움 |
새움출판사 『이방인』 번역 사태 돌아보기
올해 봄, 반짝 주목을 받았다가 지금은 거의 잊힌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른바 『이방인』 번역 논쟁. 2014년 3월, 새움출판사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새로 번역해서 내면서 지금까지의 『이방인』 번역이 ‘오역’이라고 대대적으로 마케팅을 한 것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까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책 띠지에 크게 써넣었고, 출판사는 “25년간 속아온 번역의 비밀”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소설 본문만큼의 분량을 들여 ‘역자노트’를 덧붙였는데, 이
‘역자노트’란 김화영씨의 번역본을 자신의 번역과 비교하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새움출판사 번역본의 역자인 ‘이정서’씨는
이와 함께 몇 가지 주장을 내놓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살해동기는 ‘태양 때문’이 아니라 ‘정당방위’이며, 또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 남자는 레몽의 애인과 남매 관계인 것이
아니라 “기둥서방”(이정서의 표현이다.), 곧 비밀 애인 관계이고 레몽은 악한 사람이나 ‘양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정서씨는
이런 주장을 하면서 한국 사람들만 “김화영의 오역으로 인해 그렇듯 철저하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화영씨만이 아니라 다른 역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여러 차례 발언했다. 이정서씨가 무어라고 주장했는지, 이정서씨의 말
일부를 직접 인용하여 소개해보겠다.
“지금 뫼르소가 총을 쏜 가장 큰 이유는 '눈을 찌르는' 칼날 때문인 것이다. 그 번쩍이는 칼을 든 사람은 앞에서 친구(레몽)를 잔인하게 찔렀던 바로 그 위험한 사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 바로 정당방위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뫼르소가 아랍인을 왜 쏘았을까?'라는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다. 그러나 앞의
번역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건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25년 동안 우리는 저 엉터리 번역에 우리의
사고를 지배당해 온 것이다.” (『이방인』, 이정서 역, 새움출판사. 4쇄. p.208.)
“특히 살인 동기가 태양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이방인>에 대한 모독과 다름없기 때문에 길게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김화영의 오역으로 인해(여기서의 오역은 총을 쏘는 장면이 아니라 뒤의 재판 과정중 뫼르소가 답하는 장면을 말한다) 현실
속의 ‘정당방위’라는 의미가 거세된 것이고, 프랑스인들은 그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움출판사 블로그에 게재된 「<이방인> 번역자 이정서 긴급 인터뷰 : 뫼르소의 살해 이유는 태양 때문이 아니었다.」)
“번역 오류 때문에 우리에겐 부조리 개념 자체가 황당하게 돼버렸다. 주인공이 왜 살인을 했는지 이유가 분명한데 태양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한다.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 사내는 레몽을 농락한 여자(무어인)의 오빠가 아니라 기둥서방이었다.
까뮈는
무어인과 아랍인을 분명히 구분했고 실제로도 그렇다. 무어인은 스페인계 아랍인이다. 때문에 여자와 사내는 결코 남매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뫼르소의 살인에는 이래저래 정상참작의 여지가 많았는데도, 기존의 도덕과 종교, 법체계에 의해 그는 사형당하고
만다는 게 부조리의 실체다. 프랑스인들은 알았지만 우리는 몰랐다. 기존 역자가 쳐놓은 관념의 그물에 독자들은 무방비로 끌려갔던
것이다.” (김환기 기자, 오마이뉴스, 2014.04.07.,「카뮈의 <이방인>이 어려운 이유, 이것 때문이었다 -
새움출판사, 기존 번역 비판하며 출간... "그동안 '부조리' 잘못 이해해"」)
이러한 주장과 함께 출간된
새움출판사의 『이방인』. 그 출간 직후의 전개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아실 것 같다. 로쟈씨가 ‘sirènes’에 관련된 내용을
예로 들며 이정서씨의 주장을 비판했으며 “<이방인>의 역자 이정서는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라고 밝히면서 여러
언론들도 이를 보도했다. 그리고 이정서씨가 자신이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가 맞다고 인정함에 따라, 언론들은 출판사 대표가
익명으로 자신의 출판사에서 번역서를 내면서 다른 번역자를 강력하게 공격한 사실을 놓고 ‘노이즈마케팅’, ‘도덕성 논란’ 등의
표현을 쓰며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잠시 뒤에 말하겠지만, 나는 이러한 규정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본다.)
● 프랑스에서 온 답변
그렇게 4월 이후로 언론의 관심은 시들해졌다. 하지만 그 이후, 언론에는 채 보도되지 못한 이야기가 또 있다. 새움출판사
블로그 댓글란에서는 그 뒤에도 이정서씨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었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들은 이정서씨가 제시한 세세한
오역 지적에 관련된 것에서부터, 카뮈의 철학을 포함한 『이방인』에 대한 이해, 그리고 특히 한국만 프랑스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검증까지 포함해서 이루어졌다. 이정서씨의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나 출처 등을 제시하며 논쟁을 벌인 것은 주로
‘고마해라’, ‘indifference’, ‘한말씀’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각종 쟁점들이나
이정서씨가 ‘고마해라’씨를 지목해 이기언 교수라고 짐작한다고 한 것 등 기이한 언행이나 해프닝들은 다 소개하지는 않겠다.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논쟁이 격해지자 이정서씨가 자신의 『이방인』 해석을 제시하며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이방인』을
출판한 프랑스의 유명한 출판사다.)에 전화해서 물어보라고 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정서씨는 그러면서 “제가 하는 말(혹은 번역)이
틀렸다면, 그 즉시 저는 제 책 전부를 수거해서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새움 출판사 대표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며 독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혹세무민'했다고 석고대죄할 것입니다. 물론 교수님들의 명예를 훼손한 데 따른 법적
책임도 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고마해라씨와 indifference씨가 정말로 프랑스에 문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고마해라씨와 indifference씨는 프랑스카뮈연구회(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에 이 사안에 대해 문의를 했고, 프랑스카뮈연구회 회장이자 카뮈 연구자인 스피켈(Agnès
Spiquel)씨가 5월 중순에 답변을 했다. 스피켈씨는 “아랍인들 중 한 명이 레몽 옛 정부의 남자 형제”라고 답하여 이정서씨의
‘기둥서방설’을 부정했고, 살인동기에 관련해서는 “만약 뫼르소 바깥에서 생각해본다면, 아랍인이 칼을 빼들었으므로 정당방위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을 볼 때, 카뮈는 우리가 뫼르소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길 바랐”다고 하며
그런 관점에서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답변을 보내왔다. 참고로, 스피켈씨는 갈리마르 출판사가
펴낸 카뮈 플레이아드 전집 편집에도 참여한 경력이 있는 학자이다.
그러나 이정서씨는 자신의 공언을 지키지 않았다.
적어도 ‘기둥서방설’에 대해서는 틀린 것이 너무나 명백했는데도 말이다. 프랑스카뮈연구회를 가리켜 “듣도 보도 못한 단체의 명의를
끌어와 현지에 문의 메일을 보냈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다고 하고, ‘번역’이 아닌 ‘해석’의 문제를 묻는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반응했다. 바로 자신이 그 해석의 문제에 대해 프랑스에 물어보라고 먼저 이야기한 상황이었기에 놀라운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정서씨는 그 뒤로도 자신의 주장을 전혀 철회하지 않고, 이제는 ‘카뮈로부터 온 편지’라는 소설 형식으로 자기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이 소설은 그 분량의 대부분이 ‘역자노트’에 실린 내용이나 기존에 이정서씨가 해오던 주장들을 반복해서 싣는 데
쓰이고 있다. 요컨대 귀 막고 자기 말만 반복하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 이후에는 법적으로 정당방위가 성립할 수 없음을 검토한 미국
로스쿨 논문을 제시하자 ‘정당방위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걸 보니 정당방위로 이해하고 논의해왔다는 증거이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거나, 오역을 지적하자 “저는 불어전문가가 아닙니다.”, “제가 전문적으로 설명드릴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는 등, 더
이상 토론이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나는 지난 4월부터 이 논쟁에 관심을 가져왔고, 온라인에서 벌어진 주요한 논쟁들은 대부분 쫓아가며 읽어왔다. 누구는 내가 이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을 놓고 사적인 원한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사적인 원한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첫번째로는 내가 『이방인』을 좋아하는 독자이기 때문이었고, 두번째로는 이정서씨의 주장 방식이나 태도가 내 ‘버튼’을 눌리게 만드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역을 개선할 수 있다면 독자로서 환영한다는 우호적인 마음으로 이 논쟁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 가면 갈수록, 이정서씨의 주장은 동의할 수도 옹호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히 ‘권위에 도전하는 약자’ 위치에 자신을 놓으면서 정작 자신의 주장이 불성실하고 오류투성이인 것에다가 자신의 해석이 ‘정답’이라고 우기는 모습은, 나를 정말 화나게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새움출판사의 『이방인』 번역에 관한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정서씨의
『이방인』에 대한 주장이 어떤 오류들을 가지고 있는지 정리해둠으로써 그 해악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지금도 이정서씨의 『이방인』에
대한 주장이 원래 옳은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고, 그 분들에게 적어도 그 주장이 어떤 오류를 갖고 있는지 정도는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새움출판사 『이방인』 번역 사태가 토론의 자세로나 논리적으로나 너무 많은 문제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하나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함이다.
● 토론에서의 문제점 1) 논리적 불성실
이정서씨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한국에서는 『이방인』에 대해 A라고 이해한다.
(2) 프랑스에서는 『이방인』에 대해 B라고 이해한다.
(3) 한국과 프랑스의 이해가 다른 것은 한국어 번역 과정에서의 (김화영과 다른 역자들의) 오역 때문이다.
이는 소설에 대한 ‘해석’이나 번역의 차이가 아니다. 더 정확히는 해석의 차이가 오역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며, 각각의
사실들을 검증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만일 해석의 차이가 번역에 좌우된 것이었다면, 한국어 번역본으로만 『이방인』을 읽은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가 A라고 이해해야 하고, 프랑스 원어로 『이방인』을 읽은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가 B라고 이해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일단 (1)번은 자세하게 따지지는 않겠다. 이정서씨의 상당히 피상적인 주장(‘설명이 안 되는 부분을 부조리라고 포장해왔다’는
등)이나 줄거리 요약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한국의 『이방인』 이해에 관한 자료를 조사해보거나 카뮈 철학에 대한 연구 자료를
공들여 공부해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를 확실하게 알 방도는 없다. 더군다나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방인』에서 피살된
아랍인이 레몽의 옛 애인의 ‘기둥서방’이라는 식의 해석을 한 경우는 없는 듯하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본격적인
문제는 (2)부터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프랑스카뮈연구회로부터 온 답변이 이정서씨의 주장과 모순된다. 또한 논쟁 과정에서
한말씀씨가 프랑스 공영라디오 방송 France Culture의 <Le Gai Savoir> 2012년 10월 21일
방송을 인용하며 프랑스에서도 『이방인』의 줄거리에 대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해하고 있음을 제시했다. 반면 이정서씨는
프랑스에서 일반적으로 『이방인』이 자기가 주장한 대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전혀 제시한 바가 없다.
(2)가
증명되지 않은 시점에서 (3)을 증명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지도 않았고 그 반대의 증거만
있으니, ‘이해가 다른 이유’란 애초에 논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정서씨가 역자노트 등을 할애하며 가장 힘을 쓰고 있는 것이
남의 번역을 지적하는 일이므로 이정서씨의 카드는 (3)뿐인 셈인데, 이조차도 부실하다. 예컨대 이정서씨는 김화영씨나 다른 역자들이
‘무어인’과 ‘아랍인’이 인종적으로 다른 것을 포착하지 못하고 오역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정서씨의
번역도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뒤에 적겠으나 이 둘은 인종적으로 다르지도 않다.) 그리고 다른 번역자의 것과 이정서씨의 번역을
비교해 봐도, 전자에서는 뫼르소의 발포동기가 ‘태양 때문’으로 읽히고 이정서씨의 것에서는 ‘정당방위’로 읽힐 만한 결정적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역자노트’ 등을 읽어봐도 뚜렷하게 어떤 문장이나 어떤 번역이 해석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인지는 상당히
불분명하다. 이정서씨는 이에 대해 ‘전반적인 장면’, ‘인물에 대한 오해’ 같은 말들을 하지만 정작 줄거리 이해에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디가 문제인지 잘 짚지 못하고 있다. 이는 번역이 매끄럽게 잘 되었는지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문장이 매끄럽게
옮겨지지 못했더라도 줄거리 이해에는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고, 문장을 잘 다듬어놨더라도 단어 하나를 정반대의 뜻으로 옮겨서
줄거리 이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정서역에서도 역자의 해석에 맞춰서 오역을 한 경우 등이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렇더라도 큰
줄거리 이해에 별 문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이정서씨의 『이방인』 오역-해석에 관련된 주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가 빈약하거나, 없다시피 하다. 무엇보다 큰 불성실은 이정서씨가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응당 해야 했을 사전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구체적인 쟁점에서도 드러난다. 이정서씨는 레몽의 옛 정부는
무어인(Mauresque)이고 뫼르소에게 피살된 사람은 아랍인(Arabe)이므로 혈연관계일 수 없으므로 아랍인은 비밀애인,
‘기둥서방’이었다는 주장을 편다.(이른바 ‘기둥서방설’이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Arabe’와 ‘Mauresque’는
인종적으로 명백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정서씨에게 반박하면서 제시한 자료들로 밝혀진 것에 따르면
‘Mauresque’는 무슬림 여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비유하자면, ‘조선인’과 ‘한국인’이라든지, ‘북방유목민족’과
‘거란민족’ 또는 ‘양키’와 ‘미국인’이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여러 자료들로 프랑스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것이
‘번역’에서 비롯된 해석의 차이가 아님은 한층 더 명백해졌다. 그러나 이정서씨는 이를 제대로 조사하거나 알아보지 않고 둘은
인종적으로 다르며 혈연관계일 수 없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이 주장을 고집하고 있다. 이정서씨는 자신의 생각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밟지 않았으면서도 그것을 확신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주장들을 하면서 그가 내세우는 논거는 사실 단
하나다. 바로 자신의 『이방인』 해석이다. 자기가 읽어봤더니 이렇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원문을 보십시오.”라는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정서씨의 해석은 사실은 여러 부분들이 ‘원문’보다는 그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출간된 ‘역자노트’에도 포함되어 있는 ‘마리편지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정서씨는 “마리가 내게 편지를 보내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결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그 일들이 시작되었다. 어쨌든, 어떤 것도 과장해선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쉬운 일이었다.”(이 뒤에는 수감 생활 중 경험들이 나온다.)라는
문장을 들며 마리가 뫼르소에게 보낸 편지에 어떤 것도 과장해선 안 된다는 말을 쓴 것이라고 ‘추리’한다. 그러면서 마리는 예심을
맡았던 ‘차장검사’에게 속아 넘어가서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뫼르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라고 해설한다. 이정서씨는
새움출판사 블로그에서 이에 관해 뫼르소가 마리의 편지 때문에 법정에서 제대로 증언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추가로 밝혔다.(“만약
마리의 이런 편지가 없었다면 아마 뫼르소는 사건과 관계된 중요한 진술들(…)을 했을 게 분명합니다.” (새움출판사 블로그,
「카뮈<이방인> 레몽의 여자와 아랍인 사내의 관계는?」) 물론 “어떤 것도 과장해선 안 된다고 한다면”이란 구절을,
단지 뫼르소가 자기 경험을 서술하기 전에 덧붙이는 말이 아니라 마리의 편지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나, 이 때문에 마리와 뫼르소가
제대로 증언을 못했다는 주장에는, 이정서씨의 상상력 말고는 딱히 근거가 없다. 역자가 정답인 것처럼 제시하기에는 과도한 해석이다.
이정서씨는 이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갖추지는 않고, ‘소설이라면 이래야 한다’며 마치 자기와 동일하게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설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인 양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정서씨 자신의 소설 해석을 근거로 한 ‘번역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와 한국의 이해가 오역 때문에 달라졌다는 것을 논증할 수가 없다. 오직 다른 사람들과 이정서씨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간혹 보면 이정서씨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논쟁에 나선 많은 사람들이 이정서씨에게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근거를 제시해달라고 수차례 주문을 했으나
무시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정서씨는 처음부터 자신이 근거를 대기 힘든, 너무 높은 허들을 넘어야 하는 주장을 내질렀다.
이처럼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을 하지 않고 이미 확인된 사실과 자료들을 인정하지 않는 그의 불성실함은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 토론에서의 문제점 2) 불명확
이정서씨는 논쟁 과정에서 타인의
논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논지를 정확히 말하지 않는 모습을 곧잘 보였다. 이는 정작 필요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거나 감정적인 표현만 반복하는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새움출판사-이정서씨는 상황을 정리하는 글을 올리며 로쟈씨가 “이정서의 번역을 구글번역기 수준이라고 비판”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로쟈씨가 쓴 문제의 글을 보자.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이렌
소리와 뱃고동 소리」, 로쟈의 저공비행 블로그, 2014.04.06.)
보다시피 로쟈씨가 ‘구글 번역’을
언급한 것은 이정서씨가 타인의 번역을 ‘탄핵’하며 단언한 논리를 비판하면서이다. 즉 이는 이정서씨의 번역관 또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번역 비판에 대한 이야기이지, ‘이정서의 번역을 구글번역기 수준’이라고 한 게 아니다. 이런 오독은 여기저기서 반복된다. 예컨대
이정서씨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인데 자기 ‘번역’에는 문제가 없지 않냐고 한다. A 번역과 B 번역 둘 다 가능하다고
지적하자, B 번역이 틀렸고 A 번역이 맞다는 소리냐고 반문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명확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정서씨 자신의 주장도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정서씨의 ‘정당방위설’만 해도 그렇다. 이정서씨는
처음에는 뫼르소의 발포 동기가 정당방위이며 ‘태양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모독’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법정에서 정상참작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가, 또 피살당한 아랍인이 ‘기둥서방’이라는 해석과 정당방위 문제가 따로 떨어지지 않은 문제라는
주장도 했다. 이러한 불분명한 주장은, 뫼르소의 심리 상태를 논하는 것인지 법리적 문제를 논하는 것인지 아니면 뫼르소가 ‘악한을
처단’했다는 도덕적 정당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 확실히 알기가 어렵다.
처음부터 ‘번역’의 문제와 ‘해석’의 문제를
별다른 연결고리 없이 뒤섞은 것도 이정서씨였다. 또한, 사람들이 이정서씨의 오역-해석에 관한 주장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 이정서역 『이방인』이 읽기에 제일 낫다는 사람들의 평이 많다고 반박을 하거나 ‘그래서 김화영 게 오역이 아니란 말이냐’라고
반문하는 것도 그러한 행태의 하나이다.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정서씨 번역의 질이나 김화영씨 번역의 질이 아니라, 이정서씨의
‘오역 비판’ 그리고 ‘오역 때문에 프랑스와 한국이 『이방인』을 다르게 이해해왔다’는 주장의 오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의 논지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자신의 논지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토론이 발전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대의 주장을 알아듣지 못할 뿐더러, 반박당한 본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명확한 해명이나 철회 없이 입장이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쟁점인지 정리가 잘 안
된다는 점에서, 이는 논리적인 불성실만큼이나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 토론에서의 문제점 3) 권력 논리, 진영 논리
마지막으로 이정서씨는 자신의 이런 불명확하고 불성실한 주장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권력 논리’와 ‘진영 논리’를 들고 온다.
이정서씨의 오역-해석 주장을 반박하는 이들은 모두 “기존 번역을 지키려고 하는 수구세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김화영씨의 권위
때문에 사람들이 ‘속아왔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 번역에 갇혀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정서씨 자신은 불문학계의
권력에 도전했기 때문에 부당한 탄압과 비난을 받는 약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비밀을 들춰내고 진실을 밝히려고 분투하는 투사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정서씨가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을 때나 가능한 소리이다.
이정서씨의 주장 자체가 반박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부적절한 태도이다. 이정서씨의 태도는 때로는 음모론 신봉자의 태도와 닮아있는 듯
보인다. 이정서씨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할 때 곧잘 ‘원문을 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 정작 자신을 비판하는 의견을 대할 때는
그 의견 자체나 그 의견이 근거로 든 ‘원문’ 또는 자료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권력이나 진영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혹시 이정서씨가 같은 텍스트를 보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이정서씨와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세상살이의 지혜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권력 논리’에 조금 더 살을 붙여서 ‘진영 논리’도 등장한다. 김화영 대
이정서라는 구도를 스스로 설정해놓고, 이정서씨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김화영씨를 옹호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진영 논리가 일단 깔려 있다. 그 위에, 출판사 간의 이해관계 문제가 더해진다. 이정서씨는 인터넷서점에 안 좋은 평이 남겨지거나,
새움출판사 블로그에서 이정서씨와 논쟁을 벌인 사람들을 보통 두 가지로 지칭한다. ‘불문학도’ 아니면 ‘알바’. 거대 출판사에서
돈을 주고 고용한 알바들이 조직적인 음해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다. 정작 이정서씨의 지인들이나 새움출판사
마케터 아이디 등으로 댓글을 달거나 서평을 쓰거나 별점을 준 경우들은 여럿 밝혀졌다는 것이 희극적이다.
그래, 어쩌면 출판사와 연관된 사람들이나 ‘알바’들이 무작정 별점을 깎거나 안 좋은 글을 쓴 경우도 있을 수 있을 터이다. 악플이나 인신공격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이 이정서씨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김화영씨의 번역에 오역이나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이 이정서씨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앞서 살펴봤듯이, ‘김화영씨 번역에 오역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정서씨의 주장은 옳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프랑스문학 전문가가 아니며 김화영씨라는 불문학계의 권위를 비판했다는 것이 곧 그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나를 특히 화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이정서씨의
이런 논리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권위에 비판하고 도전하는 것이 보장받아야 한다고 믿으며, 약자가 옳은 주장을 하는데도 부당하게
묵살당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런 정의 감각을 이용해서, 옳지 않은 주장을 옳은 주장으로 둔갑시키고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더욱 잘못이다. 결국 그런 행동은 사람들에게 냉소적 태도를 가지게 함으로써 역으로 옳은 주장을 하고
의미 있는 비판을 제기하는 약자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정서씨는 주장에 대한 비판과 반박 외에 특별히 부당한
압박을 받거나 구체적인 불이익을 입은 것이 없다. 이정서씨 자신이 인신공격성 표현들을 먼저 쏟아내며 허술하면서도 무리한 주장을
했으니, 그에 대해 다소 격한 반박이 제기되는 것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정서씨가 부디 권력 논리나 진영 논리 뒤에 숨지 말고,
자기 주장을 반성적으로 검토해보기를 바란다.
● 이정서씨가 잘못한 것
나는 프랑스어라고는
‘봉쥬르’와 ‘쁘띠’와 ‘꼼시꼼사’밖에 모른다.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정서씨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프랑스어나 프랑스문학에
문외한이다. 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의 수준에서 논리에 대해 알고 있으며,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뭔지 조금은
알고 있다. 그리고 외국어능력 이전에 그런 부분에서 이정서씨의 주장이 불충분하거나 부적절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더 널리 알기를
바란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프랑스어를 모르고 프랑스어 원문 『이방인』을 읽어본 것도 아니기에 이 논쟁을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프랑스어를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그동안 프랑스어를 알고 많은 자료를 제공해준 (이정서씨를
포함한) 많은 분들 덕분에, 이제 누구나 관심이 있다면 이 논의를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 됐다. 그러니 이
글이나 다른 텍스트들을 통해 한번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다른 사람의 주장의 논지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정서씨의 전적을 볼 때 십중팔구 이 글도 오해를 받을 것 같다. 그러니 분명하게 해두자면, 나는 이정서씨의 『이방인』 번역이 잘 되었는지 잘 못 되었는지 관심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정서역 『이방인』을 사서 다시 읽어봤을 때도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새로운 번역 때문이 아니라, 과거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매력과 울림을 다시 한 번 느꼈던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는 김화영씨나 다른 역자들의 번역이 잘 되었는지 잘 못 되었는지도 관심이 없다. 그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 내가 처음 읽었던 『이방인』을 번역해준 역자 분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더 나은 번역을 찾기 위해 프랑스어나 카뮈에 대해 잘 아는 분들이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번역을 해준다면 일개 독자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정서씨는 ‘오역 때문에 한국에서만 프랑스와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는 주장을 했고, 이 주장은 그 근거가 빈약하고 이미 틀린 것으로 밝혀진 부분도 많다. 이정서씨가 자기 생각에 더 나은 번역을 선보이고 자기 나름의 상상을 가미한 해석을 하는 건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런 해석을 글로 써서 발표한다면 폭넓은 공감과 동의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별 해악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고 근거도 빈약한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것은 잘못이고 해악이 된다. 더군다나 그런 내용을 내세워서 광고를 함으로써 책을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것은 더더욱 큰 잘못이다.(이정서역 『이방인』은 내가 샀을 때 벌써 4쇄가 팔리고 있었는데, 이는 출판계의 불황이라는 조건이나 『이방인』은 이미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고 그 중에서도 새움출판사의 것은 가격이 매우 비싸다는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적게 팔린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책임을 지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방인』 논쟁 초기에 언론사들이 이정서씨가 새움출판사 대표임이 밝혀지자 도덕성 논란이 일고 있다고 보도한 것은 핀트가 어긋났다. 출판사 대표가 자기 출판사에서 자기 책을 내는 것은 물론 일종의 전문가 윤리에는 어긋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 저자, 편집자, 출판사의 전문가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검증을 하는 시스템을 교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규칙/방법론’을 훼손한 것이지, 도덕적인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도덕성 문제는 이정서씨의 주장 그 자체에 있었다. 사실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필요한 검증도 없이 하면서 다른 역자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정서씨가 새움출판사 대표였든, 대표가 아니었든, 변함없이 잘못된 일일 것이다.
나는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씨가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새움출판사의
이정서역 『이방인』은 소설 원문에 맞먹는 분량이 ‘역자노트’에 할애되고 있다. 그 덕분에 다른 『이방인』 단행본들이 모두 1만원
미만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데 비해, 분량이 2배인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13,800원이라는 높은 가격이 매겨져 있다.
나도 그 책을 산 한 명의 독자로서 말하는 건데, 가격 절감 차원에서라도 최소한 ‘역자노트’를 떼어내거나 억지스러운 주장들을 대폭
삭제하는 것이 어떤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중심 홍보 문구는 당연히 빼야 하고 말이다.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씨가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나는 이정서씨가 먼저 스스로 말한 대로 책을
전량 수거하고 폐기 처분하고 석고대죄하는 것까지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최근에는 그가 계속 아집을 부리는 것을 보니
그렇게라도 하라고 요구해야 하나 싶을 지경이지만….
토론에 필요한 일정한 태도나 룰이 지켜지지 않으면,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대화가 반복된다. 서로 그냥 자기 할 말만 하는 인터넷에서의 흔한
‘키보드배틀’이나 댓글 달기와는 달리, 분명 말을 주고받고 있기는 한데, 전혀 진척이 없는 답답한 상태. 새움출판사
블로그를 비롯한 여러 장소들에서 그런 걸 너무 많이 보다보니 참 가슴이 갑갑했다. 우리가 모두 프랑스어를 알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모두 이런 토론의 조건과 자세에 대해 알 필요는 있지 않을까? 이정서씨부터 좀 이런 것에 대해 알아보시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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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글이 있는 곳
'모레스크' '아랍' 논쟁에 관한 글 http://joube.egloos.com/9181800
이방인 번역 논쟁 관련한 indiffrence님 블로그 http://indindi.eglo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