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것같은꿈

이렇게 살다가 안 되면 죽으면 되지만, 아직은 죽지 않고 활동하려고 하는지라

공현 2019. 12. 29. 20:56

 

* 이것은 위로를 구하는 글이 아닙니다. 비슷한 사람이 있는지는 궁금하긴 합니다.

구체적인 묘사 등은 없지만 생과 사에 대한 이야기와 자살에 대한 이야기이니, 그런 이야기가 불편하신 분은 더 읽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미적인 이유로 역순으로 쌓는 시도를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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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살 사고의 빈도가 늘었습니다. 예전 그때처럼 시도 때도 없이 드는 정도는 아닌데, 며칠에 한 번 정도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곤 합니다. 그런 이유로 쉰 지도 2년이 채 안 됐는데 효율이 나빠진 건가 걱정도 되네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전이랑은 좀 양상이 다른 것 같습니다. 지친 건 지친 건데, 일이 많아서 지쳤다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지쳤다고나 할까요.

오랜 옛날부터 느껴왔던, 저는 인간으로 받아들여지고 관계 맺기에 무언가 결함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자꾸 선명해집니다. 단순히 타인과 다른 것이라면 공존할 수 있겠지만, 저는 제가 비인간적인 존재, 비윤리적인 인간이라고 평가받는단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많습니다.(그걸 얼버무리기 위해 거짓말과 연기를 하곤 하지요.) 피해의식일 가능성을 부정하진 못합니다만...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그건 자승자박일 뿐이라 이만 줄이겠습니다.

청소년운동에서 같은 목적의식을 공유한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저와 같은 방식으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동의 준칙을 세우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일이 최근에 좀 많았습니다. 답답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요. 뭐, 근본적인 문제야 전과 동일합니다. 지쳤다는 것. 지친 이유와 분야가 좀 다를 뿐.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쉬는 게 효과적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며칠 정도 사람들을 되도록 안 만나고, 사람을 직접 상대하지 않는 일을 하고 글을 쓰는 것 등에 집중하면 좀 나아질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약을 받으라거나 상담을 받으라는 권유도 몇 번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자살 사고나 죽고자 하는 욕구를 줄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걸 누그러뜨려버리면 나중에 삶을 마감할 힘이 모자랄 수도 있으니까요.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욕구와 끝내고자 하는 욕구의 병립이 저를 저답게 만든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또 그런 과정에서 제가 청소년운동에 대해 가진 목적의식이나 제 삶의 방식이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평가받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살다가 죽겠지요. 청소년운동에서 할 과업들이 많기에, 스스로 만족할 만큼 해낼 수 있게 제 삶이 길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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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쯤부터 자살 사고 혹은 좀 더 강한 충동을 자주 느끼곤 했습니다. 평소처럼 그냥 밤을 새거나 너무 피곤해서, 누가 일을 펑크내고 저한테 부담이 쏠려서 한번씩 '아 힘들어, 죽고 싶다' 하고 생각이 드는 수준이 아니라, 걸어가면서 버스를 타면서 자려고 누우면서 회의 자리에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딱히 괴롭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롭게 추진하던 대중조직 기획이 위태로웠고, 주3-4일의 일자리를 갖게 되어 임노동 근무와 활동을 병행하던 중의 일인데, 그저 제가 너무나 많은 일을 해 왔고 앞으로도 너무나 많은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았고 모두 막막하게 느껴졌지요.

스스로는 일종의 소진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해 오던 모든 것을 지속할 에너지가 다 떨어졌다고 느꼈고 게임식으로 말하면 행동 포인트가 0을 넘어 음수가 되어 있는 기분이랄까요. 제 머릿속에서는 논리적 해결책으로 죽음이 제시되어 계속 염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죽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려면, 그걸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논리', 말하자면 그것과 관계없이 제 에너지나 삶을 이어가려는 욕구가 더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2018년 4월 한 달을 쉬었습니다. 직장의 양해를 얻어서 연차 휴가를 몰아 써서 3주 정도 출근도 하지 않았고, 활동도 쉬었습니다. 그 탓에 국회 앞 청소년 참정권 농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를 못했습니다.(농성장 근처에서 개 산책은 많이 시켰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해야 할 역할들도 많았을 테고 농성단이나 새로 찾아온 분들을 조직화해야 했는데 제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하필 타이밍이 그렇게 된 것은 저로서도 무척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달 정도 쉬고 나서 에너지도 많이 생겼습니다. 원래부터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으며 목적의식도 계속 있었기에 4월 마지막 주 내지 5월 무렵부터는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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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때 청소년운동을 시작한 뒤로는 자살 사고는 제법 드물게 됐습니다. 매진하고 열중할 목적이 생겼고, 그래서 사는 게 꽤나 재미 있어졌거든요. 제 삶만으로는 다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니까, 오래도록 삶을 끝내지 않으면서 추구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활동가로 사는 것은 유희로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입니다. 매우 전인적인 활동이기도 하고요. 지속 가능성이나 생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비록 자살을 생각할 일은 적어졌다고 하더라도, 사실 제가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청소년운동을 하며 그렇게 살다가 정 살 수 없게 되거나 살 길이 완전히 막히면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뭐, 제가 더 오래도록 활동하지 못하고 일찍 죽을수록 아무래도 청소년운동에는 아깝고 아쉬운 일일 것입니다.(죽음이 운동의 구심점이 되거나 후원 모집에 보탬이 되는 요소도 계산해 볼 수 있지만, 역시 활동가 하나의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이 큰 법이지요.) 그러나 오로지 제 삶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그건 그저 제가 원하는 대로 살던 삶의 일부인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다가 더이상 그러지 못하게 되면 죽는 것은 딱히 나쁠 것 없이 받아들일 만한 마무리입니다. 더 오래 살고 더 오래 활동하기 위한 노력을 할 의지는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한계가 오면 이 삶을 끝낼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청소년운동에 더 열중할 수 있었습니다. 본래의 유래와는 다릅니다만 저는 그런 것도 '메멘토 모리'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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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렵 한동안은 자살 사고를 안고 살았습니다. (예전에는 자살 사고라는 말을 몰라서, 자살 충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걸 뭐라고 부를지 몰랐습니다만, 지금 와서 명명하자면 넓은 의미에서 자살 사고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살 사고라고 부르는 유형과 비슷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삶이 힘들어서, 괴로워서 그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를 구속하는 본질도 없이 삶이 이토록 자유롭다면, 죽는 것 또한 하나의 삶의 '진로'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나의 모든 것을 멈추고 사라지게 하는 것에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계속 살아가려는 욕구와 끝내려는 욕구는 나의 안에 계속 공존하는 것이고, 그저 살아가려는 욕구가 상대적으로 강하지 못하면 끝내고 싶어질 뿐이라고 자평했지요.


그리고 저는 자살은 죽음의 방식 중 아름다운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이 삶, 끝내는 것만이라도 나의 의지로 할 수 있다면 나름대로 괜찮을 것입니다. 자살을 '자유 죽음'이라고도 하는 이유이지요. 생물로서 진화의 과정에서 나에게 내재하게 된 생존 본능에 반항하는 인간이 되는 것도 의미 있고요. 물론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오는 죽음을 수용하는 것에도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제 성격에 더 맞는 것은 아무래도 자유 죽음 쪽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저는 더 잘 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사회적 스트레스 때문에, 상황상 내몰려서 하는 자살은 사실상 사회적 타살이란 의견에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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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삶의 문제를 사유하고 시작했을 때부터 죽음은 제 삶에 당연하게 자리했습니다. 생의 허무함을 직면한 이후로 사는 금기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선택 대상이 되었고요. 종결 어미와 마침표가 문장의 일부이듯, 죽음은 삶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추측에 열렬히 찬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