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것같은꿈

배신을 마주하며

공현 2020. 4. 21. 16:38


부질없는 질문.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이었다면, 다른 성격의 사람이었다면, 더 잘했더라면 다른 결말이 가능했을까? 내가 청소년운동을 더 크게, 더 자원이 많게, 더 체계적으로 만들었다면 어쩌면 그랬을 텐데. 내가 부족해서 또 이런 결과를 맞은 것일까.

(내가 유한하고 인과에 매인 인간임을 거부하려 드는) 비합리적이고 자기중심적 논리란 건 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시간은 물론, 예전부터도 결국 가장 많이 탓하고 원망하고 책임을 물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에게였다. 가장 많이 운 것도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였다.

그러다가 다시 이런 생각이 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된다.
나는 이런 인간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청소년운동을 했지. 오만하고, 고독하고, 비틀린 인간이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그렇다면 나는 부족한 것이 아니라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 “평생/계속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겠다.”라는 약속 내지는 발언을 남겼지만 지금은 곁에 없는 사람들이 참 많다. 씁쓸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특히 더 원망의 감정이 들지는 않는다. 대개는 진지하게 결의를 모으는 것이었다기보단 술자리 발언이었거나 집회 등에서 격앙된 와중의 발언이었던 탓이다. 너무 광범위한 약속이었던지라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면도 있다. 또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이더라도, 떠나면서 남은 이들에게 미안해하고 생계이든 뭐든 자기 사정을 이야기할 때면 그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그보다는 “적어도 OO년까지는 이 지부를 책임지겠다.” 또는 “OO 담당을 맡겠다” 같은 말을 해놓고 잠수를 탔던 사람들, 세월호 분향소를 지켜야 한다며 몇 명 오지도 않을 게 뻔한 학생인권침해 규탄 기자회견에 불참하던 사람, 밀양에, 강정에 간다면서 맡은 일을 내팽개치던 사람들이 더 원망스럽다. “이러이러한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보자.”라고 해놓고 정작 그 단체 일에는 별 열의가 없었던 사람들을, 두고두고 미워하며 살아간다.(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아수나로도 어느 정도는 그런 식으로 떠안았다고 기억한다.)

뭐랄까... 평생 청소년인권운동 하겠다고 말하더니 어느샌가 사라진 사람들은 옆에 서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훌쩍 떠나버린 정도의 느낌이다. 그에 비해, 그렇게 뭔가 구체적인 걸 약속하거나 맡기로 하고 저버린 사람들은, 이 운동을 같이 지탱하고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 맞잡았던 손이 뿌리쳐지고, 나눠 들었던 짐이 버려진 느낌이다. 길에 남은 사람들은 무너져 있는 짐을 주워서 흙먼지를 털고 또 짊어진다. 가끔은 너무 무거워서 몇몇은 버려두고 다시 걸음을 뗀다. 나중에는 왜 그런 것들을 다 챙기지 않았느냐고 욕을 먹겠지.


때론 세상이, 부작위에 무책임함에 너무 관대하다는 것이 나를 숨막히게 만든다. (폭력 같은 보편 도덕적 문제와는 성격이 다를지 몰라도) 나눠 들었던 짐을 내팽개치는 것, 분담했던 것을 외면하는 것, 공유했던 꿈을 가벼이 여기는 것, 꿈꾸게-믿게 만들었던 말들을 배반하는 것은 충분히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인데... 남을 꿈꾸게 만들고, 꿈을 공유해놓고, 그 꿈을 버리는 것은 내 기준에서는 충분히 파렴치하고 폭력적인 일이다. 상처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불편함이라든지 개인의 소중함이라든지 뭐 그런 따위의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일에는 가장 무감각하더라는 것이, 나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 꿈꾸게 만든 것에 대한 책임, 혹은 공유했던 가치에 대한 예의. 그런 것들이 버려질 때, 나는 모멸감을 느낀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가 슬픔과 상실감 다음으로 느낀 것도 모욕감이었던 것 같다. 그럴 때 나는 문자 그대로 ‘좌시할 수가 없다’. 운동에서 지켜져야 할 원칙을 형해화하고, 운동의 가치를 폄훼하고 속물적인 것으로 만드는 행동 앞에서 분노는 나에게는 의무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키고자 했던 운동의 가치도 원칙도 힘이 매우 작다는 것을 직면하게 됐고, 포기하고 수용해야만 하는 현실들이 선택을 강요했다. 모멸감에 패배감이 더해졌다.

내가 죽으면 나의 고통이 조금은 전해질 수 있을까? 이토록 무엇도 공유할 수 없어서 이 세상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죽을 계획도 세워봤고, 죽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지도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봤다. 그러나 결국 내가 짊어진 짐에 대한, 같이 꿈을 꾸자고 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나에겐 죽는 일도, 죽지 않기 위한 발악도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켜야 하는 것도 해야 할 일도 너무 많으니까. 단적인 예로, 내가 죽으면 아마 다른 멤버들에게 남은 상처 때문에라도, 지음은 이어갈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모멸감과 패배감에 무력감이 더해졌다.

패배감과 무력감은 오히려 익숙한 것이었고 해서 더 쉽게 적응했지만.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하겠다.”라는 말에 워낙 자주 배신당해서일까. 그런 말보다는 차라리 “네가 운동을 위해 이러이러한 역할을 해라.”, “네가 이만큼을 희생해달라.”라고 요구하는 말이 더욱 나에게 기대를 품게 만든다. 나의 준칙에서는, 남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 또한 그만큼 이 운동에 애정을 가지고 있고 자기도 그만큼은 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약속보다는 요구가 더욱 기대를 품게 만드는 것이 동료란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동안 받아온 요구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마음 한켠에서 더 큰 기대를 키워왔다. 서로가 의지할 수 있고 요구할 수 있는 관계라고 믿었다. 부담이 곧 그만큼의 진실함이라고 의지했다. 요구를 담보 삼아,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 왔다. 나는 그것이 부당하다거나 불건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모습들이나 기대들이 잘못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비겁함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어떤 사건은 과거의 일들로까지 소급되어 그 의미를 교란시킨다. 현재의 결말이 이렇다면, 그럼 그때 그 일은 대체 뭐였을까. 이 말은 어떤 마음으로 했던 것일까. 누군가는 이런 얄팍한 마음으로 한 얘기였는데 내가 과대해석을 한 것일 뿐이었을까. 그 모든 이해도 신뢰도 결과적인 거짓이 되어버린다. 너에게, 그들에게, 나는,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 과거는 두렵고도 슬픈 것이 되었다. 상실감이 크지만, 단순한 상실감이 아니다. 그 기억이, 우리가 쌓아온 역사가, 떠올릴 때마다 변색되고 뒤틀리고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길을 걷다가 현기증과 구역질이 나고 글을 쓰다가 눈물이 난다. 상담사 선생님은 침습적 사고라고 했다. 잘 모르겠다. 침습당할 별도의 나의 삶 같은 것이 있기는 할까. 딛고 있던 모든 것들과 나 자체가 너덜너덜한 것에 가깝지 않을지.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는 항상 이야기 속을, 노랫말 속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내 사유는 죄다 인용과 활용이다. 내 운동을 지탱해온 노래들 중 하나에 “날 수 없는 그대는 걸어서 가자. 절망과 만나면 손을 잡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그동안 이 구절이 함께 걷는 동료와 손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절망과’ 손을 잡는 것이라고. 날 수 없다는 이 절망과 손을 잡고서 걸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정치적 권리 침해 학교 규칙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던 날 밤, 저녁밥을 먹고서 계속 울었다. 울 때는 혼자 울어야 다른 사람 눈치도 안 보고 맘 편히 울 수가 있다. 그렇게 홀로 울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실은 별로 슬프지도 않으면서 슬픈 척하고 자기 연민에 취해 있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일종의 루틴이 된, ‘무한의 검제’를 외웠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며. 다만 혼자 검의 언덕에서 철을 두드린다.’ 이건 나에겐 절망과 손을 잡는 주문이다. 그러고 나니 보고서를 마저 쓸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나아가는 방식이다.


나는 평생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겠다는 말 같은 것은 거의 한 적이 없다. 그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이유는 내가 청소년인권활동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청소년인권활동가인 이유는, 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이렇게도 말한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지 않게 될 때가, 곧 신변을 정리하고 죽을 때일 것이다.” 평생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것이 내 삶이다. - 이런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받거나 공유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어 주길 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건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이겠지만, 그래도 남에게 요구할 수 있는 종류의 사고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것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차라리 결함이나 질병에 가까울 것이다.) 그저 다른 사람들도 내가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이해하기를,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올바른 삶의 방식임을 인정해주길 바랄 뿐.

내가 습관적으로 나 자신을 가장 많이 탓하고, 원망하고, 책임을 묻게 되는 이유가, 언제나 나는 책임을 요구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나는 나와 같이 책임질 사람이 있다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물론 지금도 몇 명 있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