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와 불평등 -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
저자 | 박권일, 홍세화, 채효정, 정용주, 이유림, 이경숙, 문종완, 김혜진, 김혜경, 공현
교육공동체 벗, 14000원
제가 오랫동안 구상, 기획해 온 #능력주의 비판 책을 드디어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능력주의 비판 논의를 담은 책이야 이제는 적잖게 찾아볼 수 있는데요. 이 책의 세부 포인트를 꼽자면, 한국 상황에 천착하여 교육, 시험, 대학, 노동, 페미니즘 등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다뤘단 점, 그리고 능력주의 비판 논의에 입문하기 좋은 책이라는 점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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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크게는 능력주의와 나이주의 두 가지 체제-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청소년 억압이 자본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드러내는 고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능력주의는 학교-교육제도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마치 학력·학벌주의의 대안인 것처럼 거론되기도 하죠. 하지만 사실은 학력·학벌주의란 능력주의의 일종이고,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시험/평가체제와 서열화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능력주의 자체를 타파해야만 합니다.
능력주의 비판 다음에는 아마 나이주의 비판 작업을 구현해야 하겠지요. 저한테 그럴 기력과 시간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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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비판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이야기 하나는, 능력주의가 내세우는 프레임이 사람들을 오인시킨다는 점이었습니다. 능력주의라고 하면 보통 ‘개인’, ‘공정’(기회, 절차)을 내세우고 그런 가치들을 강조한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실 능력주의는 개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공정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죠. 깊게 따져 보면, 능력주의는 평가하고 선발하는 측, 국가/사회/기업이 더 유능한 인력을 뽑고 승진시키는 게 이익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됩니다. 능력주의는 개개인들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공정한 기회와 절차란 능력 있는 사람을 더 잘 가려내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능력주의는 지극히 전체주의-공리주의적인 체제,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평가하고 선발하는 권력을 가진 측의 편의를 위한 체제입니다.
능력주의 비판론을 펴면 자주 돌아오는 질문이 “그럼 어떻게 사람을 뽑아야 하는가?”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건 사람을 선발하고 배치해야 하는 정부나 기업이 해야 할 고민이죠. 선발되는 입장인 사람들까지도 나서서 그런 걱정을 하며 능력주의를 옹호합니다. 이렇게 권력을 가진 측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 ‘뽑히는 쪽과 뽑는 쪽’으로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닌, ‘(뽑는 쪽의 위치에 이입해서) 뽑히는 쪽과 안 뽑히는 쪽’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거야말로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도 들어요. 부당한 차별이 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경쟁을 과열시키지 않으면서 잘 들어맞는 사람을 선발하고 배치하고 훈련시킬 방법을 고민할 책임은 1차적으로는 국가/기업 등의 권력-조직들에게 있겠죠. 그래서 ‘어떻게 뽑아야 하나’를 묻기 이전에, 개개인들이 알아서 능력을 갖추어 뽑히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바꿔야 하며, 기업 등의 조직이 자기 구성원을 성장시키고 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할 책임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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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능력주의 비판 이야기를 할 때 자주 듣는 또 다른 질문이 소위 ‘우리 안의 능력주의’ 같은 이야기였어요. 자기도 은연중에 능력 많은 사람, 적은 사람을 나누는 것 같고, 능력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 같다는 고민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경험적으로 느끼는 능력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잘못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흐르고, 또 한편으론 그런 자연스러운 것들까지 문제란 건가 생각도 들죠.
물론 그런 경험과 생각이 능력주의에 우호적 요소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일상적 평가 등을 곧바로 능력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호승심, 경쟁심리, 인정욕 등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게 경쟁 위주의 교육이나 제도 등이 옳다는 의미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주의는 사회 체제이자 이데올로기이고, 개인의 의식이나 감정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 글에서 능력주의를 이루는 6개의 논리를 명시해 놓았는데요. 바꿔 말하면 이 6개의 명제와 그에 근거한 장치들이 갖춰진 체제가 능력주의라는 말이고, 일부 요소(예를 들어 내가 좀 더 능력이 있다고 느끼는 동료와 협업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거나)만으로는 능력주의라고는 할 수 없다는 취지도 있습니다.
- 개인에게 속하는 능력(지능/재능과 노력 또는 성취)이 존재한다.
- 능력은 시험과 같은 적절한 절차로 정확하게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다.
- 현대 사회는 (학교교육 등을 통해) 동등한 출반선, 즉 성장과 능력 발휘의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한다.
- 각자의 능력은 오직 개인의 책임이다.
- 사회의 불평등과 차등은 (대부분)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는 것, 즉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는 정당하고 바람직하다.
(*관련해선 ‘평가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다’라고 말하며, 권력화된 평가를 벗어난 해방적 평가를 모색하는 이경숙의 《시험국민의 탄생》에서의 논의를 참고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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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능력주의 비판과 극복이 앞으로 청소년운동은 물론 교육운동의 (어쩌면 노동운동 역시) 주요 과제이자 지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벌이 아닌 능력” 같은 말이 더는 나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대학평준화 운동이 다시 시동을 걸고 있는 상황인데 능력주의 비판 논의와 적극적으로 연결되었으면 합니다. 그 과정에 이 책이 기여하면 더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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