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폭력에 민감해지기

공현 2008. 4. 9. 09:52
 

  학생간 폭력에 대해 OO의 부탁으로 짤막하게 쓴 것



폭력에 민감해지기

수나야마 노리코라는 한 예술가는, 길이가 10m는 될 법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퍼포먼스 작품 <숨막히는 세상 A Sultru World>라는 것을 세상에 보인 적이 있다. 이 작품 앞에는 “치마 속으로 들어오시면 여성의 속옷이 보입니다.”라는 푯말이 있으며, 치마 속에는 손전등이 있어서 관객은 위에 있는 여성의 속옷을 비춰볼 수도 있다. 결국 여성의 속옷이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 치마 속으로 들어가는 관객은 성폭력을 저지르는 셈이다. 작품이 관객에게 직접 성폭력을 지시하지 않음에도, 관객은 치마와 의자와 푯말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성폭력에 가담한다. 작가는 이렇게 폭력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상황을 묘사했지만, 한국에서 전시될 때(다른 나라라고 별반 다를 리는 없으나) 이런 의도가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게 성폭력이라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폭력에 노출된다. 신체적, 물리적 폭력으로는 부모와 교사의 기합이나 체벌(이라는 폭행, 혹은 고문)은 물론이며 다른 애랑 싸우고 들어왔을 때 “더 때리지 바보 같이 맞고만 있었냐.”라고 나무라는 몇몇 어른들, 게임이나 영화 등에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되는 폭력들 등을 꼽을 수 있다. 신체적 물리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폭력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이 있다. 학교 하나만 들여다보더라도 시험을 보고 사람들에게 점수를 매기는 것, 그 점수에 따라 차별 대우를 하는 것, 수업시간이면 몇 cm 더 높은 교단에 선 교사가 권위를 독점하는 것, 애국조회라거나 국기에 대한 맹세 등. (다른 예로 뭐가 있을지 질문)

이렇게 폭력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다는 것은, 폭력에 둔감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폭력에 길들여진다는 표현이 적당할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이른바 ‘가해학생’이라고 낙인찍히는, 폭력을 직접 행하는 당사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이 일어날 때 혹은 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것을 무시해버리거나, 두려움 또는 귀찮음 때문에 애써 방관자(또는 폭력에 대한 소극적 지지자)의 자세를 취하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폭력에 민감하지 않다는 뜻이다. 폭력에 민감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폭력이 일어날 때 그것을 직접 제지하거나, 그럴 만한 조건이 되지 않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그 폭력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뜻한다. 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권력(경찰, 교사, 부모)에 호소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그것이 때로는 더 큰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자신의 옆에서 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을 ‘견딜 수 없는’ 만큼의 감수성이 있어야 귀차니즘이나 공포를 뛰어넘어 행동할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