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성장통

공현 2008. 1. 8. 11:58

 성장통

 (2004년에 처음 쓰고 2005년 초에 수정한 글)


 사람은 평생을 걸쳐 성장하는 걸까. 여하간, 배우고 자라난다는 것은 평생 동안 이루어지는 일이다. 요즘 유행하는 '평생 교육'이란 게 허언은 아니다.

 나는 기껏해야 17년 정도 산 것 뿐이지만, 그 기간이 그렇게 살아온 내게는 결코 짧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국민(초등)학교 입학이 엊그제 같은데."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내게는 어쩐지 이상해 보인다. 그렇게 삶을 헛되이 살아왔단 말인가? 물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추억들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의 삶이란 것도 짧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런 순간적인 상기를 떠나서 곰곰이 되짚어 보면, 아니 그 전에도 내게는 삶이란 가득 찬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소한 일들도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학교생활이 즐겁다거나, 아침마다 자신이 살아있는 걸 느낀다거나, 피할 수 없는 건 즐겨야 한다는 둥의 것들을 "헛소리!"라며 일축해버릴 정도로 밝지 않은 편인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것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다른 극단인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는 허무주의와도 통하는, 그 극단. 그래서, 조금은 덤덤하게 내 삶은 가득 차 있고, 그 의미들로 나는 성장하고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가지로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 '랑이'의 분갈이를 한 적이 있었다. '랑이'란 건 내가 데리고 있는 화초에게 붙여놓은 이름이다. 무슨 난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서 난아, 란아, 등으로 부르다가 좀 더 귀엽게 '랑이'로 부르고 있다. 그 애를 주시면서 할머니께서 닷새나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물을 주라고 하셨는데, 한 사흘에 한 번 씩 주니 쑥쑥 커서 화분 두 배만큼 커서 더 자라지를 못하기에 분갈이를 해줬다. 확실히, 새롭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주제넘게도 "더 이상 깨고 나올 세계는 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시기가 있었다. "질적으로는 더 나아질 게 없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 바보 같았다. 아직도 내 앞에는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도 말이다.

 

 어찌 되었건, 내 교우 관계는 전에도 좁았고 지금도 여전히 좁다. 다만, 전에는 더 좁았었고 지금은 그나마 비교적 넓다고 할 수 있다. 전국에 내 친우는 둘 뿐이란 말을 당당하게 했을 정도이니. 나머지는 그저 지인으로 남거나, 혹은 지인과 붕우의 중간쯤 되는 친구들이었다. 17년 살면서 진정한 벗이라는 소리를 붙일 만한 사람이 둘 뿐이었다는, 조금 건방진 소리다. 학급의 경우, 부모님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애들은 좋아하는데 걔가 애들을 피해요."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으니. 좋게 말하면 마이 페이스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회성 부족 정도 될 것이다. 쓰는 시를 가지고 자의식 과잉이라는 소리를 문학 선생님께 듣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자기 세계에서 사는 것"이었다.

 지금, 나는 이래저래 불안하다. 내 행복을 타인에게 의존하면, 불안해진다는 자명한 이치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것에도 익숙해진다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나에게 그런 식의 것은 새로운 세계이다. 또 하나의 사춘기, 라는 것이려나.


 내 사춘기라는 것은, 사실상 초등학교 때부터 "pre 사춘기"란 소리를 부모님이 하실 정도로 이르게 왔던 것 같다. 특히 자기 내부로 향하는 성향―내성적인 것과는 조금 다르다―은 일찍부터 발달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나만 그랬는지, 아니면 나는 모르는데 사실은 다들 그러는 건지, 여하간 나는 남의 인생 같은 것은 잘 모르니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위에서 말한 또 하나의 사춘기라는 것은, 2단계, 곧 타인에 대한 문제이다. 예전에는 꽤나 흐릿했던, 내가 향하고 싶지 않아 했던 불분명한 대상들을 향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년 체육대회 때, 나는 "심심함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쓰레기를 주우며 돌아다녔다. 그건 단지 교장 선생님이나 체육 선생님이 자주 하는 "버리지 말고 주웁시다." 같은 소리가 듣기 지긋지긋해서 한 것일 수도 있고, 정말 심심하고 눈에 거슬려서 한 것일 수도 있다. 내 마음 속에는 선생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여기 이렇게 주웠다."면서 대들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기도 했고, 또 여기저기 널려 있는 과자 봉지나 아이스크림 봉지 같은 것들이 눈에 거슬리기도 했다. 그런 오기 비슷한 마음은 내게는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도 정말 순전히 내 마음 내키는 대로의 일이었다. 하지만, 종종 그런 식의, 다른 사람 말을 빌리자면 '기행'(?)을 해왔지만, 요즘 들어서는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쓰레기를 주우면서도 "내 몸에서 쓰레기 냄새가 나면 어쩌나."라든가 "내가 이상해 보이려나." 같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한편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마음 한 구석으로 타인에게 내 행복을 의지하는 방식을 알게 모르게 몸에 익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새로 배우는 방식이란 것은, 그 전까지의 마이 페이스와는 궁합이 잘 맞지를 않아서, 종종 이런 저런 곳에서 충돌하곤 한다. 그리고, 그 충돌이 만든 충격이 내 세계를 점점 부숴 나가는 것을 느낀다.
  예를 들자면, 언제부터인가 내 독백에 나타나기 시작한 "당신"이나 "그대" 같은 2인칭들. 그것들은 정확히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원형을 현실에서 찾자면 후보를 한두 명 들 수도 있겠지만, 나 자신도 딱 꼬집어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저 그 사람들이 내게는 중요한 사람들이란 것말고는.


 인생의 얼마쯤은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최소한으로 잡아도 1/3이나 1/4 쯤. 하지만, 연극으로 맡겨진 일이라고 해도 죽을 때까지 내가 하고 싶은, 내가 애착을 가지는 역이라면 그것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 자체도 역할일지언정, 그렇게 느끼는 마음만큼은―. 그런 것들 중에 "타인과 직접 관계된 것"이 추가된 것뿐이라고 생각해보지만, 새로운 역을 소화해낸다는 건 그리 쉬운 게 아니다.


 화초가 자라고 자라서 화분 벽에 뿌리를 부딪쳐, 좁은 틈새에서 몸부림칠 즈음에야 분갈이를 해주듯이, 혹은 그 몸부림으로 화분을 깨고 나가듯이, 알을, 세계를 깨는 데에는 나름대로 아픔이 필요할 것이다. 뼈가 성장했는데 근육 등이 따라오지 못해서 느낀다고 하는 성장통처럼, 그 성장이라는 것이 약간 괴리가 있다면, 알게 모르게 부풀어올라 갑자기 터지려고 한다면, 아픔이라는 것은 반드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이유 없는 아픔에 놀라거나 불안해하기 쉽지만, 그 아픔이라는 것도 나름대로 견딜 만한 맛은 있다. 아픈 것에도, 우는 것에도, 상처 입는 것에도 의미는 있으니까 말이다.
 특히 성장에 대한 불안감. 사실 타인에 대한 불안은 어릴 때부터 항상 내 안에 있어왔던 것 같다. 다만, 지금까지는 불안했기 때문에 피했지만, 요즘은 불안해도 부딪치는 식이랄까. 그래도 내 불안이란 녀석은, 나를 민감하게 만들고 평소라면 입지 않을 상처를 스스로 입어버리게 하곤 한다. 침대에 누운 채 "분에 넘치는 걸 바라고 있어." 같은 말을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려보기도 한다. 나는 결국 나 혼자임을 알면서도 타인에게 의지하고 행복을 바라고 있으니, 정말 분에 넘치는 욕심이라고, 상처만 입을 뿐이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산다는 건 매번 분에 넘치는 것을 바라보며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미래라던가 꿈이라던가 하는 것은, 현재의 내게는 분명 분에 넘치는 것일지 모르니까는 말이다. 또, 새로운 의미, 성장이 없이 아프지 않은 것보다는, 아픔도 있지만 기쁨도 있는, 그런 성장 쪽이 더 풍요로운 삶인 것도 같다. 항시 무표정한 것보다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わたしの世界, 夢と戀と不安でできてる."(카드캡터 사쿠라 오프닝 플라티나 中) "나의 세계, 꿈과 사랑과 불안으로 만들어져 있어."랄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걸 보면, 내 어느 한 구석은 마치 내 삶을 이야기를 보듯이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이상한 소리이긴 하지만. 여하간, 이 성장통, 불안이 나를 불행하게 할지, 혹은 행복하게 할지(아마도 둘 다라고 생각하지만)는 아직 모르지만, 나는 계속 성장하고 싶다. 완성된 삶, 성장하지 않는 삶이 있다면, 그건 이미 사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가 될 수도 없는 재미없는 것일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말이다. 어른이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나는 피터팬 신드롬 같은 구석이 조금 있어서,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계속 성장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랑이에게 신경 써서 물을 준다. 어린아이인 채로 성장하고 싶다는 건, 역시 억지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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