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인권오름]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야 할까 - 가출소년 따이루, 자유를 찾아 집을 나오다

공현 2008. 1. 10. 12:41

[내 말 좀 들어봐]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야 할까

가출소년 따이루, 자유를 찾아 집을 나오다

따이루
신발을 걸치고 도망쳐 나온 그날

난 2006년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을 해왔다. 집에서는 '어린 것이 뭘 아냐,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빨갱이들한테 휘둘리지 말고 학교나 열심히 다녀라, 쪽 팔린다' 이런 반응이었다. 가족들은 몇 달 저러다 말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근데 몇 개월이 지나도 애가 점점 더 빨개지는 것 같고 머리만 커지는 것 같으니깐 태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통금시간이 생기고, 컴퓨터를 할 때마다 감시를 받고, 통화 내역도 조회하고, 주변 친구나 활동가들 연락처를 여기저기서 모아서 연락망까지도 은밀히 만들었다. 난 이걸 블랙리스트라고 부른다. 학교에 전화해서 내 학교생활과 친구에 대해 알아내는 건 기본이었다. 집이랑 학교가 나도 모르게 나에 대해 통화하는 것도 물론이구. 너무 화가 났다. 나를 통제하고 보호하려고만 하고, 나와 대화는 하려 하지 않는 그런 자세와 행동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뒤가 캐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고 화가 났다.

그런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기분 나쁘다, 문제 있는 거 아니냐'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네가 잘했으면 내가 이러겠냐면서 오히려 나한테 화내고……. 쥐뿔도 없는 나는 그냥 닥치고 가만히 있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 사람들로부터 독립할 힘도, 돈도 그 무엇도 없었으니깐. 그렇게 싸우다 지고, 외출금지 당하면서 겨우겨우 살았다.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던 따이루~


2007년 11월 11일에 큰 집회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뉴스에서 경찰이 집회를 원천봉쇄하고 강경대응 하겠다 어쩌겠다 하면서 난리를 쳐서 엄마아빠는 내가 저기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일요일에 교회 갔다 어디도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와! 특히 집회는 절대 가지 마!”라고 경고를 했다. 순간 급당황;; 하지만 가고 싶었던 집회고, 무조건 집회 가지 말라고 협박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더 짜증났다. 그래서 정성 가득 감동적인 편지를 한 장 써놓고 집회에 갔다. 편지 쓰면서 집에 가면 욕먹고 일주일 정도 외출금지 당할 거라고 대충 예상은 했었다. 통금 10분전. 집회 끝나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여는데 집안 분위기가 완전 얼음장이었다. 아빠가 나를 죽일 듯이 째려보더니 어디 갔다 왔냐, 왜 갔냐, 왜 엄마아빠 말 씹고 가냐, 죽고 싶냐면서 취조와 협박을 하셨다. 난 완전 쫄아서 개미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다 오늘은 참는다는 듯이 “이제부터 무기한 외출금지다. 엄마아빠 있을 때만 허락받고 컴퓨터 켜고 숙제만 해라. 텔레비전 보지 말고 성경말씀 읽어라!” 헐;; 이런 표정으로 문 쪽에 얼어붙은 채 가만 서있었다. 그때 방에서 날 째려보던 아빠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더니 내 머리를 잡아당겨 내동댕이치면서 패기 시작했다. 마음이 얼어서 그런지 아주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근데 눈물이 줄줄 흐르더라. 무서웠다, 아빠의 그 살기어린 눈빛이. 그때 엄마가 외치더라구. “왜 애를 패요? 차라리 내보내요.” 그 순간 난 본능적으로 신발을 걸치고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는 지금 얹혀사는 집으로 달려갔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돈 나갈 구멍은 많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집을 나오고 나니 하나에서 열까지 다 힘들다. 그 중에 좀 더 많이 힘든 것 중 하나는 텅텅 빈 지갑!

계획된 출가가 아니라서 모아둔 돈도 없고,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나 인맥도 없고, 알바를 하려고 해도 노동부의 허가증이 필요한 나이여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다. 지금 얹혀사는 곳은 신림이고 학교는 구로여서 학교를 가려면 버스와 지하철을 타야 해서 차비도 많이 든다. 밥 사먹느라 또 돈 들고……. 수입은 없는데 지출만 생기다보니 빚이 몇 만원이나 생겨버렸어. 거기다 앞으로 급식비에, 학교운영지원비에, 고등학교 가려면 입학금에 교복 값, 준비물 값, 소풍·수련회비도 내야 하는데……. 아프면 병원비도 내야하고 계속 얹혀살기 그러니까 월세도 내야 하는데……. 아무리 아껴 살아도 돈 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 내가 공부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우울했다. 그래서 무상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간절히 느끼고 있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간절히 원했던 것 중 하나가 무상교육이었는데, 엠비(MB)가 되셨으니 투잡(two job) 뛰어야 겨우 학교 다닐 것 같다─┌이런……. 아픈 것도 걱정이다. 특히 의료보험적용 힘든 치과. 난 이가 성하지 않은데, 아파도 돈이 없어서 병원 못갈 생각하니깐 너무 싫어 미칠 거 같다. 투잡도 모자란 것 같다. 추가 부업으로 인형 눈이랑 봉투도 열심히 붙여야겠다!

두 번째로 날 힘들게 하는 건 보호! 알바를 하려 해도, 핸드폰을 만들려 해도 보호자 동의가 없으면 어쩔 수가 없다. 보호자동의 없이 할 수 있는 게 손꼽힐 정도다. 그나마 엄마와 옛날에 했던 약속 중 하나가 '고등학교 입학에 한해서 보호자 동의를 해 준다'여서 고등학교 갈 돈만 되면 갈 수는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이고 내가 할 일들인데 나보다 왜 보호자가 중요한 걸까? 내가 가고 싶은 길과 부모님이 갔으면 하는 길이 다른 건 당연한 거잖아. 둘은 분명 서로 다른 인격체니깐!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도 축소판도 아닌 한 인격체잖아. 그런데도 청소년에게는 선택할 권리도,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만들어 나갈 권리도 없다.

“걸리면 집에서 쫓겨나.” 청소년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활동을 할 수는 없을까?


이런 세상에서 나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 막막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세상은 돈 없으면 죽으라고 하니 더 막막해진다. 그러고 보니 왜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이런 미친 세상으로부터는 우릴 보호하지 않는 거지? ㅋㅋ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야 할까

가출 후 선생님의 중재로 엄마와 협상(?)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협상은 그냥 엄마와 나의 생각 차이만 확인하고 별 진전 없이 끝났다. 그렇게 두 달이나 지났다. 정해진 것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면서 살다보니 그런지, 사는 게 불안정해서 그런지 폐인생활 모드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엄마에게 메일을 보냈다. 엄마는 건강하게 지내라는 말만 하셨다. 그래서 직접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양보안을 내놓았다. 그러다 인권운동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엄마는 '통금 7시!'를 계속 주장했다.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통금시간이 오후 7시면, 친구들하고 놀지도 못하고 인권운동을 하지 말라는 거랑 다름없다-_-

하지만 이 협상에서 인권운동 하는 걸 인정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오직 깡 하나만 갖고 하는 이런 불공정한 협상에서 이 정도 성과를 건져 내다니, 부라보~ 노동자들이 회사랑 싸우는 거랑 청소년이 집이랑 싸우는 거는 상당히 비슷하다. 노동자나 청소년이나 ‘깡’ 하나밖에 가진 게 없으니까. 기계를 멈추고 서비스를 중단할 ‘깡’, 집을 나올 ‘깡’. 그나마 노동자들은 빈약하게라도 법의 보호를 받지만, 가출한 청소년은 법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청소년의 가출할 권리, 독립적으로 살 권리도 노동자의 파업권 이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 아닐까. 이 권리를 당당하게 쓸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나와 부모님의 생각 차이는 두 달 정도의 가출로는 뛰어넘기 힘들 것 같다. 집에 들어가는 조건인 ‘무조건적인 오후7시 통금’에 동의할 수 없기에 난 여전히 집을 나와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독립해서 사는 걸 꿈꾸고 있다.

가출 후에 찾은 길

가출을 한 후에 얻은 게 은근히 많다. 미역국 안 질기고 적당히 담백하고 고소하게 끓이는 법, 김치볶음밥 타지 않고 맵지 않게 만드는 법, 김치찌개 고소하고 얼큰하게 끓이는 법, 쓰레기를 반으로 줄이는 법, 빨래를 깨끗이 냄새 안 나게 하는 법, 청소 빨리 잘 하는 법 등등과 같은 생활의 지혜를 배웠다. 당장 내 앞의 일들과 좀더 먼 미래에 대해 계획도 세우고 의지도 다졌다. 나를 지지해주고 힘들 때 도와주고 필요할 때 태클도 넣어주는 진짜 친구들도 만났고, 집에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추억들도 만들었다. 그리고 8만3천원의 빚(ㅋㅋ). 가장 큰 건 '나'를 찾으려 노력했고 '나'를 찾을 길을 발견했다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꿈꾸는 세상, 내가 원하는 가치관을 자유롭게 외치면서 난 나를 찾아 나갈 거다.

가출 후 힘들어 하면서도 좋아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건 분명 이 사회에서 가장 따뜻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가장 폭력적으로 될 수도 있는 공간이다. 가족이 나에게 주었던 보호와 억압의 벽을 부수고 나온 지금! 앞으로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지금이, 내가 보이고 내가 개척하는 이 길이 좋다. 후회는 없다.

[끄덕끄덕 맞장구]
집을 나온 뒤 친구네에 얹혀살며 두 달이란 긴 시간을 보낸 따이루. 워낙에 단단하고 활기가 넘치는 사람이라, 자유가 주는 달콤함과 여유 때문인지 때론 배짱이 정말 두둑해보여 큰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막막함과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건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10대 때 청소년 인권을 포함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다 가족들이 말리거나 금지해 활동을 접는 청소년을 여럿 보았습니다. 가족에게 생존과 교육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의 처지에서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부모의 뜻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게 자식 된 도리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선, 부모와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는 사회에선, 청소년은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편견을 버리지 않는 사회에선 더더욱 그렇겠지요. 그래서인지 인권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조건을 약속받기 위해 거리로 나선 따이루의 싸움이 더욱더 힘겨워 보이고 안쓰럽습니다.

대개 부모와의 갈등 때문에 집을 나온 청소년에게는 철없는 아이, 반항적인 아이, 위험에 빠지기 쉬운 아이라는 시선이 따라붙습니다.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생고생하지 말고 양보하고 집으로 들어가라’라는 충고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백기 투항하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삶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하는 열망이나, 사실 그/녀들이 부모와의 싸움에서 아무런 패도 내밀 수 없는 약자라는 사실은 간단히 잊힙니다.

최초의 둥지를 떠나온 청소년은 아무 자기 보호막도 없이 차가운 거리에 서고 살아남기 위해 위험하거나 착취적인 관계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다행히 따이루는 피신에서 가출, 독립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을 지지해주고 먹을거리도 챙겨주는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있는 집 청소년은 유학이다 연수다 해서 부모와의 갈등을 잠시 회피할 수 있겠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거리로 나온 청소년들은 어떨까,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집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이든, 청소년이 주어진 둥지를 떠나 독립적으로 새 둥지를 만들 권리가 보장된다면, 그 세상은 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안락한 삶 때문에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부모가 지어준 둥지를 떠나지 않으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요즘, 안락함을 포기하는 대신 자기 길을 찾아 나선 따이루가 더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이 싸움에서 따이루가 꼭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뜻도 용기도 열망도 꺾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따이루가 좀더 유리한 위치에서 부모와의 협상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그 버티는 시간 동안의 고단함을 지켜보고 힘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배경내]
◎ 따이루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입니다.
인권오름 제 86 호 [입력] 2008년 01월 09일 11:5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