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꿈

수필 - 어린왕자, 가방, 짐

공현 2008. 1. 11. 13:40

어린왕자, 가방, 짐


(2005년 3월에 쓴 "가방, 짐"이라는 수필을 제목만 고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기 위해 버려야 했던 몸뚱이. 긴 여행에 갖고 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인 그 몸.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당시, 그것이 내게는 대단히 인상적인 표현이었던 것 같다.
  의식이 있는 것들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짐을 짊어지고 걸어간다. 크리스트교의 「천로역정」에서는 그런 것이 "죄 짐"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꼭 그것을 죄라고 표현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죄 짐을 벗기 위한 여행은, 불교나 힌두교의 업을 벗고 해탈하기 위한 수행과 비슷해 보인다.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사상과 연관지어 볼 때에, 짐을 벗어놓는 비유는 아집을 버리고 근원의 신에게 귀의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에 거의 관용적으로 쓰이는 듯하다.

   그 무엇이든, 아무 속박 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 "∼로서 존재한다."라는 것 자체, 정체성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속박인 것이다. 우리에게 짊어지고 있는 짐의 무게가 없다면, 우리들은 땅 위에 발을 디딜 수도, 발자국을 남길 수도 없을 것이다. 짊어진 짐이 무거울수록 남겨진 발자국은 깊기 마련이다. 소위 위인으로 세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 시절이 불우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도 걸어갈 수 있는 사람만이, 정말로 세상에 크고도 깊은 발자국을 남길 수 있는 것이리라.

  별로 돌아가기 위해 뱀에게 물려 무거운 육신을 버리려 했던 어린 왕자. 날기 위해서는 육신이라는 짐조차 버릴 필요가 있겠지만, 한편으로 육신 없는 자들 - 유령이라던가. - 은 육신을 갖기를 원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짐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가능한지 자체도 의문일뿐더러, 정작 그런 상태에 이르면 사람들은 그 또한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아무 짐도 지지 않겠다는 선택에 따르는 짐, 자유라는 이름의 부자유, 혹은 자유를 가장한 허무가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그저 지구 위의 육신만을 벗어놓으려 했을 뿐이다. 그는 장미와 소혹성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육신을 벗어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정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고서는 어린 왕자가 부럽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자기 편한 대로 그 때 그 때 멋대로 정한, '최소한의 짐' 을 바라거나 하는, 제멋대로의 욕심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어린 왕자가 뱀에게 물리는 고난을 짊어지고서, 또 저 별의 무게를 짊어지기 위해 돌아갔음을 기억해야 한다.

  욕망에는, 자유에는,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말하곤 한다. 그 말이 사회적인 의미에서 자유를 속박하려는 의도로 사용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그 책임이라는 것에는 동감하는 바이다. 무엇을 선택하건 우리는 그만큼의 것을 짊어지게 된다. 방향성 없는 자유라는 잠재된 상태를 벗어나서, 자유가 구체화되는 순간, 선택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그 자유는 속박된 자유가 된다. 무위(無爲)를 선택하더라도 그만큼의 짐이 따라오니, 산다는 건 혹독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고독. 만일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는 것에 따라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나 상처 같은 것들을 두려워하여 자기 자신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고독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신 혼자 살면서 부딪힐 여러 문제들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외로울 때에도 전혀 위로 받을 수 없는 슬픔을 짊어져야 한다. 관계를 맺는다는 선택에 대해서도 짐은 따르지만,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선택에도 짐은 따른다. 장미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싶은 사람은, 장미를 위해 유리를 씌워 주고 물을 줘야 한다. 자생하는 장미를 보려는 사람 또한, 적어도 장미가 피어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전능하지 않은 이상,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자는 없으며, 자기 편한 만큼의 짐만 짊어지고 살 수 있는 자 또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래도 나는 무엇엔가 얽매여 살 것 같으다."(황동규, 「어떤 개인 날」) 라고 노래하나 보다.
 

  내가 곧잘 듣는 소리 중 하나가 바로 가방에 관한 것이다. 학교 가방 속을 거의 가득 채워서 다니기 때문인데, 키도 작은 편인 녀석이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이 제법 눈에 띄는 모양이다. 무겁지 않느냐는 소리부터 키가 안 큰다는 소리까지, 가방에 관해 이런저런 충고를 듣게 된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보조 가방까지 하나 옆에 달고 다니니 더욱 그렇다. 한 번은, 여행을 갈 때에 침낭, 코펠, 옷 등을 잔뜩 집어넣어서 가방을 너무 무겁게 하는 바람에 고작 몇 km 걷는 길에도 금방 지쳐버린 적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가방을 가볍게 싸들고 다니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된다거나 키가 큰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키가 크고 싶지 않아서 가방을 무겁게 짊어지고 다녔던 것도 같다. 아니면, 단지 욕심만 많아서 이것저것 책을 많이 집어넣고 다니는 것일지도. 가학적인 발상, 혹은 학교 다니는 것이 좋아지고 싶지 않다는 비뚤어진 발상의 결과물인지도. 나도 내 속을 잘 모르니까, 명확한 답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가방을 메고 있을 때, 그 무게를 느낄 때, 나는 내가 떠 안고 있는 이런저런 걱정거리나 가치 같은 것들을 실감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일전에 가방에 관해 내가 휘갈겨놓은 시 한 줄을 보니, "시집은 무거워서 두 권 밖에 못 넣었구요, 교과서는 여덟 권이나 넣었어요" 라고 되어 있다. 들고 다녀야 하는 교과서가 내게는 꽤 불만인 것은 사실이다. 가방이 무겁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짐이 꼭 필요한 것이라 해도, 확실히, 가득 채운 가방을 등에 메고 걸어갈 때면 어깨와 등에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호흡이라는 간단한 행동에도 부담이 걸려버린다. 어깨를 쓸어대는 가방 끈의 느낌, 가볍게 흔들리며 등을 두들기는 종이의 무게, 그런 것들은 때로는 나를 채찍질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실제로도 나를 금방 지치게 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그 가방을 가볍게 하려면 얼마든지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것에 집착하고 있고, 그 집착을 놓아버릴 용기가 없기 때문일 뿐이다. 자기 스스로 짊어진 것들에 대해 때로는 싫증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자의로 짊어진 것에 대해서는 입으로만 불평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욕심에 짓눌리는 꼴이니 말이다.
  실제로 내 가방 속의 내용물에 대해 언급하자면, 교과서나 공책 같은 내용물도 반 이상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사상서, 시집이라거나 수첩, 잡상 공책, 습작을 인쇄한 종이 같은 물건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모두 내게 소중한 것들이다. 교과서의 경우에도, 좀 덜 소중하더라도 결국 내가 그것들에 집착을 하고 있으니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이리라. 소중한 것들이 들어 있으니, 가방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게 어깨를 파고들어도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짊어져야 하는 가방에는, 짐 보따리에는,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혹 짐을 덜어내는 일이 있더라도, 행여 실수로라도 정말로 소중한 것들을 버려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이 미처 다 짊어질 수 없는 짐을 다 싸들고 나선다면 아마 몇 걸음 못 가 넘어지고 말 것이다. 가끔은 훌훌 털어 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다. 허나, 그렇다고 자기 짐을 그 때 그 때 편한 대로 내팽개쳐버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깨끗하지 못한 일이다. 자살이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자살은 죽는 이의 입장에서는 깨끗할지 모르지만, 남겨진 자, 살아남은 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깨끗하지 못하다. 그 사람이 남겨둔 찌꺼기를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시체 처리나 장례식 같은 문제뿐 아니라, 친인을 잃은 슬픔, 빈자리의 공허감 등이 남겨진 자들의 짐에 더해진다. 자살이 용감한 행동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는 '적당히' 다. 자신이 걷고 싶어하는 거리가 있다면, 그 거리를 걸을 수 있을만한 짐을 싸들고 걸어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그렇다고 오래 오래 걷겠다고 가방을 텅텅 비운다면, 그 사람의 삶에는 가치 있는 것, 유의미한 것들은 적어질 것이다. 대체 어디까지가 적당한 것이냐고 물으면, 역시 그것도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기 가방의 무게와 부피, 그리고 내용물을 어떻게 하느냐가, 그 삶을 결정짓는 데에 결정적인 것일 테니까는.

  결국 자기가 살아가면서 짊어질 짐에 대한 선택에 의해, 우리는 역시 그 만큼의 삶의 의미를 짊어지게 된다. 자,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길 때면, 시간이 날 때면, 혹은 지쳐서 쉬고 싶을 때면, 잠시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놓고 살펴보자. 그 곳에 들어 있는 사랑이나 이상, 꿈, 의무, 가치, 그런 것들 중에서, 거짓된 것들은 없는지, 괜히 무게만 더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자. 한때는 가치 있어 보여서 집어넣었던 것이 지금은 무가치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버리느냐 계속 간직하느냐 또한, 자기 자신이 선택할 문제이다. 자기별의 장미꽃이 자신에게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어린 왕자처럼, 신중한 마음으로, 자신의 가방 속을 반성해보자. 계속 걸어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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