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오답 승리의 희망에 대해

공현 2008. 1. 11. 13:44
(2006년 1월에 쓴, 오답 승리의 희망 창간호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의 글입니다.)




오답 승리의 희망이란 이름은 뭐 바라나기 군이 지은 거고...
어찌어찌하다보니 엠덴의 오답 승리의 희망 홈페이지에 오답 승리의 희망 신문이 얹히게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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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신문을 구상한 사람으로서 대략 끄적여봅니다. 이건 창간사 아닙니다.







왜 지하신문인가?


  처음에 하고 싶은 것은 게시판 만들기였습니다. 대학교에 대자보 게시판이 있듯이...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기 글이나 구호 같은 걸 갖다 붙일 수 있는 게시판을 원했습니다. 아마 그 안을 입안했던 게 작년(2005년)초였던 것 같은데, 학생회에 건의를 넣어도 미적미적 의지가 없고 등등의 이유로 제대로 되질 않던 차였죠.
 그러던 게 우여곡절 끝에 신문의 형태까지 왔군요. 뭐 그 과정에는 교내 학생 자치 신문이 교감의 압력을 받은 사건 등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옛날부터 "신문이 나오면 어떨까?" 같은 생각을 했지만 금전상 이유 같은 걸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뭐, 이러쿵저러쿵해서 결국 내게 된 거죠.
그렇다고 게시판 건을 포기한 건 아닙니다만.


 제가 "기사 없는 지하신문"을 생각한 건, 두 가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는 좀 떠들어보고 싶은데 공적으로 떠들 창구, 광장이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현재 학교에서 언론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실에 앉아서 떠든 투덜거림은 쉬는시간 끝나는 종이 띠리리리링(곡명 : 소녀의 기도) 침과 동시에 그냥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ㅅㅂㅅㅂ 거려도 찌질이 짓 이상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적인 영역의 비판, 비난, 뭐 그런 것들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릴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게시판이었고, 지금은 기사 없는 신문입니다. 곧, 학생들의 생각, 삶, 그런 것들을 모두 받아서 실어보고 싶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학교나 현실 욕한 것만 싣고 싶지만 그건 너무 "노려보는 눈동자"가 될 테고 또 재미도 없을 것이며 공정함의 부분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비판적인 글, 살면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들, 하고 싶은 말, 뭐 그런 것들을 다 받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의식이 바로 왜 이 신문이 당당하게 지하신문을 표방하는지에 관한 답입니다. 소로우를 모방하자면 "언론을 부당하게 탄압하는 사회에서 정의로운 언론이 있을 곳은 역시 비합법적 지하다." 글을 익명으로 실을 수 있도록 하자고 한 것도 그때문입니다.



오답 승리를 꿈꾸며

  정명(正名) 사상이라는 게 있습니다. 공자라는 노회하신 짱구님이 말씀하신 건데요. 사람은 자기 이름에 맞춰 살아야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소리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작명소 가서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중략)... 청소년은 청소년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학생다운 건 뭘까요? 중고등학생의 경우는, 공식적으로는 술담배 안 하고 게임 내지 컴퓨터는 적당히(즉, 대략 일주일에 한 시간 쯤?)하고 22시까지는 기본으로 학원, 학교, 독서실, 집 등에 처박혀서 공부하는 겁니다. 여기서 공부는 수능 공부일 수도 있고 자격증 따는 걸 수도 있고 실기 공부일 수도 있죠. 가끔 어떤 분들은 학습 명목으로 파견근로도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글쎄요 여하간 반항 안 하고 노예 도덕(참고도서 : 도덕교육의 파시즘(김상봉 지음)) 배워가면서 인생을 유예하는 행동양식이죠, 학생다움은. 그리고 그래놓고 나중에 밤 새며 시험 공부한 거, 선생님들한테 맞은 거, 선배들한테 기합 당한 거, 시험 죽 쑨 거, 그런 것들을 추억이라고 간직하죠. 물론 이건 공식적인 이야기고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술이라거나 오락실, 영화, 적당한 음란물 시청 등은 허용되고 있고, 또 그게 또 다른 의미에서 학생다움이 되고는 있습니다만. 여하간 그것도 공부하기 위한 재충전 시간으로서의 놀이로밖에 인정 못 받는 거 아닙니까? 청소년다운 것도 비슷하죠. 어른이 틀린 소리 해도 어른 앞에서는 자존심이고 양심이고 다 굽히고 말대꾸하지 말고 '예의' 지키고 말입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니까 알바 임금도 제대로 못 받는 게 당연하구요. 18세 선거권도 없죠. 나머지는 학생다움과 대동소이.
  이게 이 사회가 '정답'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어떤가요? 우리들의 행복은, 욕망은 어떤가요?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꿈틀거림.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이미 벗어나 있는 우리들. 그들의 등 뒤에서 그들을 욕하고 술담배 가끔 빠는 분도 있고. 불온한 책이나 만화책을 읽어대죠. 불온한 노래를 듣죠. 우리들의 생활 자체가 '오답'인 경우가 얼마나 많나요? 또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거품처럼 보글보글 끓고 있는 그 수많은 반감들. 정답에 대한 부정들. 자유!
그래서 오답 승리입니다. 정명에 대항하는 오답입니다. 그리고 희망입니다.

 이 오답승리의 희망을 통해 "우리도 말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오승희라는 매체의 메시지는 언론 자유 그 자체입니다.
 우리에게도 생활이 있다. 우리도 답답하면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 우리도 불만이 있다. 우리도 비판할 수 있다. 우리도 생각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입이 있고 글을 쓸 손이 있다!
 사설이나 편집부 코너 등을 통해서 은근히 이런 메시지를 포함해서 편집부의 사상을 전파할 생각이기도 합니다. -_-


  이미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학생회를 법제화해도, 두발자유를 외쳐도, 언론 자유를 외쳐도, 이 사회의 학생들에게는, 학교에는, 뿌리깊게 냉소적 좌절감이 박혀있는지도 모릅니다. 무력한 순응주의가 뿌리내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해봐야 하는 겁니다. "우리도 말할 수 있다!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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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승희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물론 이 신문과는 전혀 관계 없죠. 우연히 이름이 같을 뿐. 바라나기 군의 말대로 사죄를 드려야 할는지...
 여하간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되어 오승희 님의 시 중 한 편을 올려봅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야송/오승희

그대여,
희망을 갖게나
하늘에 소망을 두고
과거에 집착하면
앞을 보지 못한다네

눈물은 흘리되
좌절은 말게나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지 않던가
다시 시작하여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