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비판에 대한 비판

공현 2009. 10. 17. 15:56

비판 批判  명사
 
발음〔비ː-〕  
[명사]
1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힘.
비판을 받다
비판이 일다
비판이 제기되다
신랄한 비판을 가하다.

2 <철학>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며, 그 존재의 논리적 기초를 밝히는 일.
[관용구] 비판의 날을 세우다
[북한어]원칙적이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기풍을 세우다.

 

 


일단 '비판'이 위와 같다는 의미임을 숙지하고 들어가자. 단, 일반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따짐." 중에서 그름을 따지는 쪽으로 많이 사용한다.

 

 

1
많은 사람들이 "대안 없는 비판 =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공식을 사용한다. 즉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비판만 하는 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소리인데, 도대체 그게 왜 성립하는지 나는 우선 언어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비 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말은 비판의 목적이 비판이란 말이며 이는 그 비판이 그 자신 외에 아무런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반면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비판은 문자 그대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소리지, 그 비판의 목적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개념의 내포상 그 둘이 일치하지 않는다. 외연으로 공통된 부분은 분명 있지만 그것이 '일치'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함 관계(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면 대안 제시 같은 귀찮은 것은 없을 가능성이 높으므로)라면 모를까.
그런 관계로 나는 그 둘을 동시에 비판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개념으로서 각자 비판해보고자 한다.


2
세상에 과연 '비판을 위한 비판'이 얼마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이 말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는 상대방의 목적을 예단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 를 들어 악플을 다는 것 자체가 삶의 낙이요 그 자체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다는 악플은 악플을 위한 악플이다. 마찬가지로 비판 자체가 삶의 낙이요 그 외에는 어떠한 목적 의식도 없이 그냥 글로 쌈박질하거나 트집 잡는 게 재밌어서 비판하는 것이 비판을 위한 비판이다.
별 생각 없이 그냥 "비판을 위한 비판"이란 말을 종종 쓰는데, 적어도 그렇게 함부로 쓸 말은 아니다.
비 판은 본래 어떤 기준-준거에 근거하여 어떤 주장 등을 까는 것이다. 분석하고 무엇이 그른지 조목조목 따지는 것이다. 일단 어떤 일관된 가치관-기준을 견지하며 뭔가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목적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을 위한 비판", 하고 싶어도 하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 비판이라는 게 뭔가를 딱 보고 "맘에 안 든다." "뭔가 잘못되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보통 수행하게 되는 귀찮은 작업인데, 그런 생각이 드는 과정을 생략하고 "비판하자~"해서 비판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도 쉽지 않다는 거다. 그건 마치 "다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from 『폴라리스 랩소디』)라는 질문을 연상케 한다. 한 현상의 목적이 단지 자기자신일 수 있다니, 이런 자기완결적이어서 아름다운 녀석을 봤나!

여하간 세상에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이란 말을 그대들은 너무 남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3
대안 없는 비판, 하니까는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다. 전에 환경운동가 한 분이, "아니 한 달에 활동비 70만원 받고 겨우겨우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 사람들한테, "그렇게 반대할 거면 대안정책을 a, b, c까지 자세하게 제시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 공무원들이랑 연구원들은 월급 100만원 넘게 타면서-. 우리가 대안의 방향은 제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책이나 법안을 자세하게 다 짜내라는 건 직무유기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뭐 이런 여담은 일단 대충 기억만 해두길.
본 론으로 들어가서, "대안 없는 비판"이 잘못인가, 과연? 대안 없는 비판은 물론 질문일 뿐 답이 아니라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하지만 질문으로서는 완전하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그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인지 자체를 놓고 논쟁이 붙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비판을 전개한 사람은 그 부분이 잘못되었으니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반드시 따라붙는 게 "어떻게 고칠까?"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의 방향은 비판을 한 이가 제시한 비판이 근거하고 있는 가치관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해답이 굳이 비판 안에 제시되어야 하는가? 기실, 소위 말하는 "대안 없는 비판"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자 이런 게 잘못되었어. 동의해? 동의하면 어떻게 고칠지 생각 좀 해보자. 어쩔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권유하는 것이다.
대안 제시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년놈으로 몰아붙이는 것 좀 그만하자. 만일 그대들이 그런 식으로만 반응한다면, 결국 그대들은 스스로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귀찮으니 비판한 사람이 알아서 대안도 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래 이거 잘못되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게 당연한 거 아냐? 다른 게 가능해? 있으면 말해봐." 대충 이런 거다. 아주 전문적인 지식이 대안에 필요하지 않은 이상은 자신의 상상력과 사고력 부족, 게으름을 탓하는 게 나을 거다. 그리고 앞 여담에서 말했듯이 대안의 abc까지 다 나올 필요는 없다. 어떠어떠한 대안이 있을 수 있는지는 정도는 조금만 머리 굴리고 상상력 발휘하고 조사해주면 알 수 있다.
어차피 완전한 대안은 있기가 어렵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딱 떨어지는 정답"에 익숙하다 보니 대안제시에도 완벽주의 강박관념에 찌들었는지 왜 이리 겁이 많은지. 이보세요, 완전할 필요는 없어요. 완전하려고 노력은 해도.
우스개소리인지, 예전에 학회에서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 "그래서 뭐 어쩌자고"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공리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래서 공리주의 무작정 밀어붙이면 되는 걸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그냥 어쩔 수 없는 걸까? 적어도 공리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공리주의의 폐해들을 억제하려는 노력들을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4
그러니까 결론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란 말은 함부로 쓸 말이 아니란 것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 그 잘못된 걸 어떻게 고칠지 꼭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열 심히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비판을 위한 비판 같네요." 같은 말 한 마디만 툭 던지는 사람 보면 짜증이 백회혈을 뚫고 치솟는다. 왜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하는지 이유를 우선 대라고 하고 싶고, 그리고 내 비판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멋대로 판단하고서 말하지 말라고 해주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내 나름 일관된 가치관을 관철시키기 위한 비판만 해왔다.
"대안 없는 비판이다."라면서 욕하는 것도 좀 그만두자. (아, 그 사람한테 추가질문으로 "그래서, 그쪽이 생각하는 대안은 뭐죠?"라고 물을 수는 있지만 말이지.) 뭔가가 잘못된 걸 알았으면 그걸 어떻게 고칠지 같이 고민해야지, 도대체가 "잘못된 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자고? 배째."식으로 나오면 어쩌잔 거냐. 설령 인간 사는 곳에서 서로에게 상처주는 일, 악 같은 것들이 완전히 없어질 수 없고 또 없어지면 오히려 안 좋다고 하더라도, 그걸 줄이고 없애려는 노력조차 않고 순응해버릴 거면 대체 왜 사는 거냐. 그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결국. - 게다가 그 근거가 상당히 비겁하다는 점(어쩔 수 없는 것=바꿀 수 없는 것=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잘못된 것에 순응)에서 차라리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보다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