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것같은꿈

어째서인지 눈마새 인용으로 시작하는 푸념

공현 2010. 3. 7. 02:38


"나는 달라. 나는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 길로 온 거야. 적을 죽이기 위해 죽이는 것과 내가 살기 위해 죽이는 것은 겉모양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일이야. 이 길의 끝에 죽음이 있겠지만, 그건 내가 사는 방식이야. 왕의 변경백으로서 사는 방식이지. 그때문에 나는 전쟁에 얽매어 있어도 전쟁에서 자유롭다."
-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4권.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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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적대시하거나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그 수가 꽤나 많은데, 최근에는 뭐 반은 농담이었지만 "그러니까 행실을 바르게 하고 다녀 새꺜ㅋㅋㅋㅋㅋ"라는 요지의 말을 들었다. 뭐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나를 까는 이유는 다양하긴 하지만...

오늘 문득 그 사람들은 나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하필 새삼스레 그러겠냐마는. 하기야 나도 그 사람들의 절망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겠지.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희망보다는 절망이라는 말이 어딘가를 스쳤다. - 이건 철학적이거나 논리적 고찰이라기보다는 문학적, 비유적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 이것이 표현이라면 이 표현의 본질은 무엇일까? - 그러므로 우리의 차이는 절망을 안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절망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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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초 "생활의 예술화" -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나의 의미는 이미 내 안에서 불완전하지 않고 내 삶은 이미 가치 있고 소중한 것임을 알기에, 나는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더이상 삶에 의미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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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활동에 얽매어 있어도 활동에서 자유롭다. 아니, 적어도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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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간혹 나에게서 비인간성, 허무, 무의미를 발견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일종의 몰이해나 오해라는 생각이 들지만, 또 어쩌면 삶은 허무-무의미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분명한 일이라서, 제대로 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하기사 나야말로 누구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하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닥 할 말은 없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