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2014. 7. 26. 18:10




3년 전에 1번을 쓰고 들어간 글을 겨우 3편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홀가분하다...







운동을 위한 실용글쓰기 1 : 글쓰기의 일반적 기본
운동을 위한 실용글쓰기 2 : 주장하는 글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3> 기록하고 설명하는 글 : 기획안, 회의록 등

 

  설명하는 글이라고 하면, 보통은 ‘설명문’을 많이 떠올리게 된다. 교과서 등에 등장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운동을 하다가 써야 하는 ‘설명하는 글’은 그런 산문 형태의 글은 아닐 때가 많다. 뭐, “○○라는 개념/제도는 이런 것이다.”라는 설명글을 쓸 일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것에는 인터넷검색이나 자료 편집의 기술이 더 요구될 때도 많다. 여기에서는 기록하고 설명하는 글로 ‘기획안’과 ‘회의록’을 설명하려고 한다. 기획안이나 회의록은 보통 우리가 ‘글쓰기’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글들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이것들이 ‘글’이기는 한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기획안과 회의록이 활동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글의 종류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획안과 회의록은 둘 다 회의에 관련된 글이다. 기획안이 회의 등을 하기 전에 자료로서, 함께 보고 논의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라면, 회의록은 회의의 결과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글이다. 둘 다 정보의 전달을 목적으로 쓰는 글인 셈인데, 회의록이 실제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와 결론 등을 정리하고 설명하는 것이라면 기획안은 우리 머릿속의 구상, 계획, 제안하고 싶은 아이디어 등을 설명하는 것이다.


기획안과 회의록 역시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에서 제시한 내용으로부터 예외는 아니다. 쓰는 사람, 읽는 사람, 매체.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 경우 매체는 기획안이나 회의록이 이용되는 환경, 사용처라고 넓게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읽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정보는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읽는 사람에게 정보가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인가? 쓰는 사람이 설명하고 전달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정보는 무엇인가? 이제부터 이러한 설명하는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라도 설명해보겠다.

 

 

① 기획안

 

기획안은 말 그대로, 일을 기획한 것을 정리한 문서이다. 기획의 대상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대외활동, 워크샵이나 MT, 토론회, 캠페인… 몇 년 이상의 활동을 다루는 기획안도 있을 수 있고 일회성 30분짜리 행사를 다루는 기획안도 있을 수 있다. 하다못해 친구들과 1박2일 놀러갈 때도 어디를 갈지, 몇 명이 가는지, 돈이 얼마나 드는지, 뭘 하고 놀지 등의 계획을 짠다. 기획안이란 본질적으로 그것과 그리 다르지는 않다.


기획안을 어떤 경우에 쓰고 어디에 쓰이는지부터 생각해보자. 기획안은 보통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고자 하는 활동, 할 활동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설명하고 공유하기 위해서 쓴다. 그리고 그 공유를 바탕으로 여러 논의가 이루어지고 계획을 수정하게 된다. 또한 그렇게 수정한 기획안에 따라 활동이 이루어진다. 다른 단체 등에 기획안을 보냄으로써 활동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도 한다. 즉 기획안은 ① 논의를 위한 기초 자료 ② 활동할 때 지침 ③ 타 단체나 외부로의 전달 등의 용도로 쓰인다. 이런 용도들을 보면 기획안이 하나의 ‘설명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안의 구성에 정답은 없다. 어떤 활동이냐, 어떤 용도냐에 따라 어느 정도 수준의 세밀함이 요구되는지, 어떤 항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지가 달라진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몇 가지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내용들을 제시하겠다.


기획안의 구성은, 일단은 육하원칙을 떠올려보면 된다. “누가, 언제,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왜”. 물론 여기에서 ‘어떻게’나 ‘무엇을’ 안에 다종다양한 정보들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기획안의 항목들은 그 자체로 기획안의 개요가 될 것이다. [1.취지 2.장소 3.내용] 등…. 우선은 뭐, 기획안에는 당연히 활동의 이름이 들어갈 것이다. 이름은 기획안 제목에 들어가기도 하고, 중간에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가 논의하고 활동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이므로 이름을 잘 짓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보통은, ‘왜’이다. 즉 이 활동을 제안하게 된, 이 활동을 하려고 하는 이유 또는 배경. 활동의 취지라는 형태로 표현하기도 하고, 배경 설명을 우선 한 뒤에 활동의 목표를 제시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언제’와 ‘어디서’, 즉 시간과 장소가 있다. 이는 기획안에 상대적으로 짧게 들어갈 때가 많지만, 그런 주제에 많은 고려를 요구한다. ‘왜’가 우리 내부의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라면, 시간과 장소는 외부의 요건에 가장 많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 부분에는 활동하는 기간을 포괄적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일시를 다 넣는 경우도 있다. 장소 자체가 활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장소 후보는 몇 개의 안을 마련해두는 것이 좋다. 집회신고라든지 대관신청이라든지 날씨라든지 상황에 따라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장기간 활동을 기획하는 경우는 전체 기획안에서는 별도의 장소 서술을 하지 않거나, 포괄적으로 지역만을 서술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을’과 ‘어떻게’는 활동의 내용과 방법을 뜻한다.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정보들이 들어가게 된다. 행사라면 행사의 구체적인 진행 순서, 토론회라면 담을 주제와 내용 등이 들어가야 한다. 대규모의 기획안이라면 활동 방법에 대한 총론부터 각론까지 요구되기도 한다. 기획안은 실제 활동을 위한 제안이므로, 일의 진행순서나 일정표를 첨부하기도 한다. 예산이나 재정에 관한 항목도 들어간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항목들은 처음에는 가장 생략할 일이 많은 것이기도 하다. 아이디어 논의를 위한 초안 수준에서 구체적인 진행 순서나 내용이나 일의 진행순서 등을 담을 필요는 없다. 예산을 생략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조정해서 더 풍성하게 보충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으니, 처음 기획안을 만들어볼 때 너무 겁먹지는 말자. 외부로 보내는 기획안에서는 분량과 가독성, 보안을 위해 일부러 생략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누구’가 있다. 이는 물론 활동을 누가 하는지를 말하며, 기획안을 제안하고 논의하고 실행에 옮기는 우리들 자신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구체적인 행사의 참가자가 누가 될 것인지,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지를 적어줘야 할 때도 있다. 또한 다른 단체에 제안하는 경우, 어떤 단체들이 참여해서 어떤 역할들을 함께하길 기대하고 요청하는지 명확하게 적을 필요가 있다.


아래는 토론회 기획안의 예시이다. 일의 진행 순서 등 좀 더 채워지면 좋을 것들이 눈에 띄는데, 동시에 그런 부분을 생략해서 어떤 내용의 행사를 하려는 것인지는 더 눈에 잘 들어오기도 한다. 이처럼 기획안에서 어떤 부분을 더 세밀하게 하고 어떤 부분을 간략하게 할 것인지는 장단점이 있으므로 그때그때 고려할 문제이다. 여러분이 이런 내용의 행사를 준비한다면 기획안을 어떻게 쓸지 한 번 생각해보시면 좋겠다.

 

<학교 휴대전화 규제 문제 관련 청소년인권 토론회 기획안>

1. 행사명 청소년인권 토론회 <학교, 휴대폰금지압수 괜찮?>

 

2. 행사 취지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하거나 압수하는 등의 일은 사실 몇 년 전부터 벌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2007년은 특별히 휴대폰 금지 및 압수 문제가 표면에 드러나고 사회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전지역 교장단은 <휴대전화 안 가져오기 운동 결의대회>를 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수원 청명고등학교에 대해 휴대폰을 전면 금지하는 교칙 조항이나 휴대폰을 압수하는 등의 행위는 인권침해이니 시정하라는 권고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4월 14일에 열렸던 <미친 학교를 혁명하라> 청소년인권 집회도 그 요구사항 중 하나로 “휴대폰 등 소지품 검사 압수 폐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한겨레와 방송3사 등의 언론이 학교의 휴대폰 금지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처럼 휴대폰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작 휴대폰 금지에 대한 논쟁지점의 설정과 내용 있는 토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각 단체들도 뚜렷하게 입장을 내놓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휴대폰 문제에 대한 이 사회의 담론은, 오직 언론에 나온 단편적인 인터뷰와 인터넷 뉴스에 달린 별 내용 없는 덧글들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휴대폰 문제가 명백한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 휴대폰 문제에 대하여 교사단체, 학부모단체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의 입장을 듣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3. 행사 일시와 장소

2007년 6월 3일 일요일 오후 2시 (변경될 수도)

??? (미지센터, 청소년문화의 집, 전교조 서울지부, 노동사목회관, 대학교 등 검토 중)

 

4. 토론회 패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1인 (참교육실장이나 학생생활국장으로 요청)

참교육학부모회 1인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1인 (청소년)

인권단체나 사회단체 활동가 1인 (인권운동사랑방, 문화연대 등에 요청)

 

5. 진행

◎ 사회자가 5분 정도 학교 휴대폰 문제에 관한 올해 상황을 정리하고 행사를 열게 된 취지를 설명. (5분)

◎ 청소년 -> 교사 -> 학부모 -> 인권사회단체 순으로 약 3분씩 자기 입장을 간단히 정리하여 발제. (15분)

◎ 사회자가 발제 내용에 따라 쟁점을 하나나 둘 뽑아 패널들에게 질문을 하여 토론을 시작하고 각 패널들이 자유롭게 주고 받는 토론. 사회자는 논의를 벗어나거나 이야기가 계속 공전할 때만 개입. 시간이 다 되면 사회자가 짧게 정리. (1시간)

◎ 질의응답 및 플로어 참여 자유토론 (20분~30분)

 

6. 예산

장소대여료 (0원~10만원)

다과 및 음료수 (1만원)

각 패널 토론비 (3만원~6만원 문화상품권 등으로 지급)

약 5만원~17만원 예상됨.

 


기획안의 포인트는 정보의 전달과 공유이다. 그런 점에서 기획안은 내가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또 읽는 사람에게 이것이 어떻게 읽힐지 많은 고려를 해야 하는 글쓰기이다. 내가 이 기획안을 회의 자리에서 받는다면, 이걸로 충분할까? 또 무엇이 궁금할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가면서 쓰는 것이 좋다. 잘 쓴 기획안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나 제안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고 그 사람이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아이템이 된다. 그리고 기획안도 혼자 쓴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과 의견을 반영하여 함께 완성해간다고 생각하자. 처음 논의를 위한 기획안을 쓴다면, 아예 어떤 항목과 정보가 들어가면 좋을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람마다 궁금한 부분이나 판단에 필요로 하는 정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는 제안을 받는 사람들에게 맞춤형 기획안을 작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기획안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 더 독자에 맞춘 글쓰기가 가능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② 회의록

 

회의록이야말로 우리가 활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는 종류의 글일지도 모르겠다. 회의에서 나온 발언, 회의의 내용, 결과를 기록한 것을 회의록이라고 한다. 그냥 “회의 기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회의록은 작성하여 이메일로 구성원들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인터넷게시판에 올려두기도 하며, 또는 다음 회의에서 자료로 첨부가 되기도 한다.


회의록은 가장 일상적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회의란 우리가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공통의 의견을 만들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견과 결정을 제대로 기록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기록을 해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각자의 기억력에만 의존을 해야 하고, 기억력이 나쁘거나 건망증이 있는 사람이 활동에 펑크를 내면서 각종 트러블이 발생하고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현실에서는 회의록을 작성해서 공유해도 이런 일이 적지 않다!) 회의록에 잘못 기록된 게 있으면 나중에는 그것이 다툼이나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회의록 작성을 맡는다면 중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회의록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속기형 회의록이고 다른 하나는 요점정리형 회의록이다. 속기형 회의록은 회의에서 나온 발언들을 모두 기록하는 방식이다. 모든 말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말투를 바꾸거나 윤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건 주된 내용은 모두 담는 것이다. (법원이나 정부기관의 회의록이 이런 방식으로 작성되곤 한다.) 조금 더 덜 힘들게 회의 중에 나온 반복된 발언이나 농담 등은 일부 생략하고 주된 논의의 내용만 따라가며 속기하듯이 작성하는 방법도 있다. 요점정리형 회의록은 각 안건에서 굵직하게 논의된 내용과 결론만 적는 방식이다. 회의록을 쓰는 사람의 취사 선택과 편집 능력이 요구되는 방식이라 하겠다. 여기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안건의 내용과 결론만 적는 간단한 형태가 있는가 하면 각 안건에 무엇이 쟁점이 되었고 이 쟁점이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까지 설명하는 형태도 있다. 어떤 회의록이든 회의 시간과 장소, 참가자, 무슨 회의였는지 등은 기본적으로 기록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시작해보자.


속 기형 회의록을 쓰는 것은 보통 회의의 논의가 중요할 때이다. 논의의 흐름이나 누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 토론의 맥락 등이 중요하고 기록할 필요가 있을 때면 속기형 회의록을 작성한다. 또는 논의가 복잡해서 결론을 간단히 요약하기 어렵고,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논의의 맥락과 결론을 이해시켜야 할 때도 속기형 회의록을 작성한다. 아니면 그냥 그 자리에서 논의를 정리해가며 기록하기가 어려워서 나중에 정리할 목적으로 속기형 회의록을 선택하기도 한다. 구글드라이브 등 공동으로 회의록을 실시간 작성하는 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그런 경향도 생겨났다. 속기형 회의록에서 중요한 것은 집중력과 기록 속도, 기억력 등이다. 아무리 속기형이라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속기를 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실시간으로 듣고 취사선택하여 편집해가며 쓰는 성격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논의에 대한 이해와 판단력이 은근히 많이 요구된다.


요 점정리형 회의록은 단체 회의에서 쓰는 일반적인 회의록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우리의 글쓰기 능력이 필요한 회의록이기도 하다. 요점정리형 회의록에 들어가야 할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안건이 무엇이었는지, ② 안건에서 주되게 논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③ 결론은 무엇이었는지. 이 3가지만 잘 기록해도 요점정리형 회의록은 다 쓴 셈이지만, 당연히 말만큼 쉽지는 않다. ②가 특히 어렵다. 무엇이 주되게 논의된 것이며 기록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사람마다 기준도 다르고 만만치 않은 내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정 어렵다면 일단은 ③번, 결론만이라도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해보자. 결론 부분에도 역시 육하원칙이 어느 정도 적용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기로 했는지. 물론 안건에 따라서는 누가라든지 어디서 등을 생략해도 좋은 안건들도 있다. 안건 논의가 끝난 후에 결론이 뭔지 한 번 문장의 형태로 정리를 해보자고 하는 것도 회의록을 쓸 때 정리를 수월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②의 내용을 판별하는 몇 가지 팁이 있다. 예를 들어 회의 참가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논쟁을 벌인 쟁점 사항은 무엇이 쟁점이었으며 누구와 누구가 어떤 입장 차이로 논쟁을 벌였는지 기록하는 것이 좋다. 쟁점이 아니었어도 ‘우려사항’이라고 지적한 것이나 활동을 진행하면서 ‘염두에 둘 것’으로 언급한 것은 기록하는 것이 좋다. 결론에 이르게 된 핵심적인 논거가 있다면 그것도 적자.


회 의록을 쓸 땐 매체는 크게 신경 쓸 것은 없다. 속기형으로 쓸지, 요점정리형으로 쓸지 정도만 고려하자. 헷갈릴 때는 이를 미리 함께 확인하고 회의를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나의 회의록에서 안건에 따라 어디에는 속기형을, 어디에는 요점정리형을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의록에서 ‘쓰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나 혼자가 아니라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 모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회의의 내용을 ‘내가’ 무엇을 선별하여 기록하고 전달할지 생각해야 한다. 내가 무슨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정보인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회의록의 어려운 점이다. 최종적으로 회의록 작성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역시나 ‘읽는 사람’이다. 이 경우 읽는 사람은 회이에 참석하지 않은 제3자이거나 미래의 회의 참석자들이다. 나중에 가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회의록을 보게 될 때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한두 달 뒤에 이 회의의 내용을 다시 본다면 무엇을 궁금해할까, 무슨 정보를 찾으려 할까 상상해가며 쓰는 것도 회의록을 내실 있게 만드는 요령이 될 것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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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1. 8. 24. 19:31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2> 주장하는 글 : 성명, 논평, 칼럼, 토론문 등


주 장하는 글은 운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쓰게 되는 글이다. 운동을 한다는 건 어떤 주장을 하며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주장하는 글이라고 다 똑같을 리야 없다. 단체의 입장을 발표하는 글, 개인적으로 쓰는 글, 언론에 발표하는 글, 토론회 때 쓰는 글 등등이 같을 수야 없다. 쉽게 말하면 글을 다 쓰고 나서 제일 밑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라고 붙는 것과 “공현”이라고 붙는 것과, 한 10명 모인 토론회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과 수만명이 읽는 신문 지면에 실리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는 주장하는 글의 종류를 대표적인 3가지로 나누어보았다. 하나는 단체의 입장을 발표하는 성명과 논평이다. 성명과 논평은 단체 회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단체의 정해진 입장을 알리는 글이며, 동시에 언론 등을 통해 사회에 전달하고 발표하는 글이다. 두 번째는 칼럼이나 언론기고문이다. 이 글은 개인의 명의로 언론에 글을 기고하여 발표하는 형태의 글이다. 가장 전형적인 논설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발제문이나 토론문이다. 발제문이나 토론문은 개인적이라는 점에서는 칼럼과 비슷하지만 발표 방식이 언론에 직접 전문을 싣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성명이나 논평과 비슷한 점이 좀 있다. 주로 토론회와 같은 행사를 할 때 자료집에 실린다.

이제부터 이러한 주장하는 글을 쓸 때 유의해야 할 점이나 자잘한 방법 같은 걸 설명하도록 하겠다. 이 중 어떤 글이든 내가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에서 제시한 원칙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잊지 않도록 하자.



① 성명/논평


성명/논평에 관해서, 우선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부분부터 짚고 넘어가겠다. 그건 바로, 대체 성명과 논평의 차이가 뭐냐는 것이다. 사실, 어떤 글이 성명이냐 논평이냐 하는 것을 구별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둘의 성격을 비교하기는 쉬운 편이다. 그러니 일단은 그 정도 설명에서 만족하도록 하자. 성명이 어떤 사안에 대해 더 강하게 주장하고 외치는 거라면, 논평은 어떤 사안에 대해 조금 더 차분하게 분석하고 평하는 것이다. 성명은 요구 사항이 비교적 뚜렷하고 논평은 주장이나 입장은 드러나지만 요구 사항을 그렇게 뚜렷하게 적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성명은 상대적으로 길고 완결된 글이고, 논평은 상대적으로 짧고 간결하다.

성명/논평은 단체의 성격과 색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글이며, 또한 보도자료 등에 첨부하여 주장을 표현하거나 행사에서 주장하는 바를 밝힐 수 있는 글이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 직접 활동을 할 여력이 없을 때는 우선 성명이나 논평으로 입장과 주장을 정리해두고, 그걸로 대충 면피를 하곤 한다.(별로 좋은 관행은 아닐지도 모른다.) 성명/논평은 ‘연명’(성명서 내용에 동의하고 거기에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것)하는 단체가 많을수록 영향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연명을 받아서 발표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단체들이 연명해서 성명/논평을 내는 것은 그 활동의 주체가 되는 핵심 단체들을 드러내주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다. 열심히 성명 쓰고 제안하고 활동하는 건 1, 2개 단체인데, 언론에 “133개 시민사회단체들은…”이라고 나가면 그 1, 2개 단체 입장에선 좀 억울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사안에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발표를 해야 할지 역시 생각해볼 문제이다.


성명/논평을 쓸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 “어떤 것을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명/논평은 개인의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단체의 주장을 발표하는 것이라서 어떤 내용을 쓰거나 쓰지 않는 것이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명/논평은 단체의 개성과 성격을 드러내는 것임을 잊지 말자. 성명/논평을 쓰기 전에 정리해 두어야 하는 질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사안을 우리는 어떤 성격의 사안으로 이해하고 규정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주장하기로 했는가? 어떤 정책에 대해서라면, 찬성인가, 반대인가, 부분적 찬성/반대인가? 책임을 묻는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반드시 언급하거나 설명해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얽힌 복잡한 사안일 경우 각각 비중은 어느 정도로 다루어야 하는가? (심지어 문단의 개수나 분량까지도 생각해가며 써야 할 때도 있다!)

특히 입장이 딱 찬성 반대로 나눠지지도 않고, 다양한 입장들이 다양한 표현과 어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으며,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성명서의 입장과 주장을 표현 하나에서부터 분량까지 잘 컨트롤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교원평가제와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 입장이 현재 안에 대한 찬/반인지 교원평가 자체에 대한 찬/반인지, 대안은 어떤 형태로 제시할 것인지, 전교조의 입장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현재 정세 돌아가는 걸로 볼 때 이런 말은 필요하긴 하지만 비중을 줄이는 게 좋겠다든지, 여하간 이런저런 골치 아프고 미묘한 조정이 필요해지고는 하는 것이다.


성명/논평을 쓸 때 여러분은 얼마든지 창의적인 표현이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성명/논평의 틀을 지나치게 딱딱하게 정해놓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재미가 없고, 단체의 개성도 잘 드러나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전혀 안 잡혀서 막막한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여기에서 ‘일반적인’ 성명/논평의 순서 정도는 소개하겠다.

성명서의 첫 머리에는 보통 성명서 전체의 방향과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어떻다.” 거기에서 어떤 말을 사용해서 이 사건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규정하고 있는지를 읽는 이가 알게 하고, 또 이 사건에 대해 대충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밝히는 것이다. 신문 기사의 ‘리드’(리드 : 신문의 뉴스 기사에서 본문의 앞에 그 요점을 추려서 쓴 짧은 문장.)를 떠올리면 어떤 내용을 넣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성명서를 쓰게 된 배경, 즉 사건의 개요를 간추려서 넣어줘야 한다. 성명서를 읽는 사람들이 사전에 알아야 하는 정보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앞부분에 들어가 줄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간에 잘 알려진 사건이거나 아니면 생략해도 무방한 정보는 안 쓰기도 하고, 짧은 논평 등에서는 간단한 한 문장 정도로 요약하기도 한다.

그 다음에는 그 사건에 대한 해석과 분석을 쓴다. 즉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좀 더 파고들어서 심층적인 분석을 써줘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보충수업을 강제로 하지 않은 교사가 사학재단에 의해 해임당한 사건에 대해서, 이는 학생인권과 진정한 교권이 상충되지 않으며, 억압적인 학교 구조 안에서 교사와 학생이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쓴다거나 뭐, 기타 등등…. 이 분석 속에도 물론 성명/논평을 발표하는 단체의 주장과 입장이 반영될 것이다.

성명의 경우에는 마지막에 주장과 요구사항이 들어가곤 한다. 요구를 하는 대상이나 책임을 묻는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하며, 요구의 내용도 구체적이면 좋다. 독자의 편의를 고려한다면, 써주고 나서 다시 한 번 전체 요지를 몇 줄로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논평의 경우에는 특별히 요구사항을 정리하기보다는 전체적인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래서 우리의 입장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우려를 표한다.”, “다시 한 번 충고한다.”, “지적한다.” 같은 어휘가 자주 사용된다.-_-)

여기까지가 가장 일반적인 성명/논평의 구성 방식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사건의 성격에 따라, 성명/논평의 성격에 따라, 얼마든지 참신한 성명/논평을 만들 수 있다. 성명/논평은 논리적인 글이지만, 꼭 딱딱한 논리적 표현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비유나 패러디 등을 알맞게 활용하는 것은 성명/논평을 더 널리 읽히게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상대방의 말이나 다른 글 등의 형식을 차용하는 패러디는 성명/논평에 곧잘 사용되는 인기 있는 방법이다.


성 명/논평을 쓸 때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바로 개인의 ‘문체’ 문제이다. 하나의 글은 아무래도 한 명이 쓰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다. 여러 명이 한 문단씩 써서 글을 조립한다면, 오 내용이 중언부언 겹치게 되고 글이 뒤죽박죽이 되기 일쑤일 것이다. 그러나 성명/논평은 한 사람 개인의 글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인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성명/논평을 쓸 때는 지나치게 개인의 문체나 스타일이 반영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성명/논평을 한 개인이 쓰고서 바로 발표하는 일은 별로 없다. 쓰고 나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가며 고치는 작업도 여러 번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다면 한 개인의 문체나 스타일이 지나치게 반영되는 것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쓸 때부터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제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명/논평이 어떻게 발표되고 읽히는지를 염두에 두는 것 역시 성명/논평을 어떻게 쓸지, 성명/논평의 분량을 어떻게 할지 등을 정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성명/논평이 발표되는 방식은 크게 다음의 3가지다. ▲ 언론에 배포해서 보도 ▲ 단체 홈페이지, 이메일 등을 통해 ▲ 직접 인쇄하고 배포.

마지막의 직접 인쇄, 배포하는 방식은 과거 외국에서는 많이 이용된 듯하지만 요즘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배포용이라면 전단지 형태로 더 알아보기 쉽게 꾸며서 만드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모임 안에서 나눠주거나 돌려 읽기 위해 성명을 인쇄하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행사에서는 성명 자체를 낭독하는 경우도 있다. 관련 기관에 성명/논평을 팩스로 보내는 경우도 있고. 그러므로 성명/논평은 그 분량이 2페이지(즉 양면 인쇄했을 때 1장 안에 들어가도록)를 넘지 않는 것이 좋으며, 길어도 3~4페이지 이내의 분량이어야 한다.

성명/논평이 언론에 발표될 때는 성명/논평의 전문이 실리는 경우는 많지 않고 보통은 일부를 인용하여 실리곤 한다. 따라서 성명/논평을 쓸 때 이 점을 고려한다면, 딱 한 문장이나 두 문장으로 이 성명/논평의 핵심적인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문구를 강조해서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 때로는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고려하여 일부러 선정적이거나 재치 있는 표현 등을 넣기도 한다. 생각해보라. “입시가 사형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와 “입시가 원인 중 하나가 되어 죽음에 이른 청소년들의 수가 적지 않다.” 중에 어느 쪽이 더 언론에 잘 보도되겠는가? (뻔한 소리지만, 사실과 다른 표현, 억지스러운 표현, 반감을 살 표현을 사용하는 건 무리수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체 홈페이지나 이메일 등 웹을 통해 배포하는 방식이 있다. 웹의 유연한 특성상 이 방식의 경우에는 별로 고려해야 할 점이 많지는 않다. 여기저기 퍼나르는 게 중요할 뿐이다. 다만 사람들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줄바꿈을 자주 하거나 문단과 문단 사이를 충분히 띄우거나 이미지를 첨부하는 등의 노력을 하는 것, 혹은 웹의 특성을 활용해서 관련된 링크를 함께 삽입하는 것 등은 유효하다.



<성명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라!

이 땅에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는 오래전부터 무시당해 왔다. 특히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가 확산되면서 이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과민 반응들은 그런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청소년들의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치사찬란한 태클을 걸고있는 정부와 일부 언론들에게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짜증의 마음을 듬뿍 담아 전달한다.

잠 시 과거를 상기하자면, 2003년에도, 2005년에도 청소년들의 집회에 대해 정부는 까칠하게 반응했었다. 법을 개정해서 ‘미성년자’를 집회에 동원하면 처벌하는 조항을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교육부와 교육청에서는 교사들과 장학사들을 동원해서 청소년들의 내신등급제 반대촛불집회와 두발자유 집회 참가를 봉쇄하려고 했었다. 많은 언론들이 청소년들의 집회 뒤에 배후세력이 있을 거라고 떠들어댔으며, 청소년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왔다.

2008 년, 올해에도 발전은커녕 퇴보한 뻘짓들만 눈에 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들에 대해 사람들의 반대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촛불집회가 점점 커지자, 교육부와 교육청은 또 ‘감수성이 예민하고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집회 참가를 막도록 하는 지침을 학교로 내려 보내고 있다. 교사들을 동원해서 집회장 주변에 배치하고 학생들이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돌려보내는 괴악한 짓도 여전하다. 몇몇 언론들은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를 놓고 “연필 대신 촛불”을 들었네 어쩌네 하면서 배후세력이 있을 거라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보도를 일삼고 있다. 또한 연예인들이 몇 마디 하니까 10대 팬들이 무작정 따라 나왔다, 아직 미성숙하고 충동적이어서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에 속은 거다, 등등 헛소리를 하며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려 하고 있다. 청와대는 한술 더 떠서 놀이문화가 없어서 청소년들이 놀러 나오는 거라는 이상한 분석을 내놓으며 청소년들을 어떻게든 '정치적이지 않은' 존재로 규정하려 애쓰고 있다.

올 해에는 경찰과 검찰까지 가세해서, 5월17일에 휴교시위를 하자는 문자를 얼토당토않게도 “업무방해”니 어쩌니 하면서 수사하겠다고 하고 있다. 정말이지 이런 발언을 하는 인권의식 미성숙한 검찰총장부터 인권교육을 시켜야 한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경찰이 문자메시지를 추적해서 학교까지 찾아가서 학생들을 만나 문자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 교장을 만나고 왔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는 짓이며, 이미 인터넷에서는 ‘미성년자가 촛불집회 참가하면 사법처리 된다.’라는 식의 사실과는 다른 공포 조성 유언비어가 떠도는 판인데, 이에 대해 경찰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도 대체 경찰이나 교육청, 교육부를 비롯해서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것인가? 경찰이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청소년들의 정당한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고 있는 교육청 같은 애들을 막는 것 아닌가 싶고, 만일 정말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교육하고자 한다면 교육부, 교육청, 학교는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적극적으로 “여러분에게는 평화적인 집회를 만들고 거기에 참여할 권리, 발언할 권리가 있습니다.” 같은 류의 캠페인이라도 전개해야 하지 않나 싶다. 자신들이 정말 민주 정부이고 인권 경찰이라면 해야 할 일들과는 정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는 저 안타까운 정부기관들은, 정말이지 언제까지 그따위로 할 건지 모르겠다. 답이 안 나온다.

또 한 아수나로는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적 인식들이 비단 정부나 경찰, 일부 언론들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 청소년들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보호주의, 청소년들을 ‘철없는’ ‘충동적인’ ‘미성숙한’ ‘미래로 유보된’ 존재로 보는 인식들은, “학업에 열중해야 할 청소년들조차 거리로 내모는 정부”라는 표현 속에도, “철없고 순진한 아이들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미국산 쇠고기 반대 주장에서도, “어른들이 잘 해야 하는데 잘못해서 어린 학생들이 거리에 나왔다.”라는 탄식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은 광우병이 아닌 미래입니다.”라고 적힌 피켓에서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를 여는 주최측의 “미성년자들은 부모동의서가 없으면 연행당할 수도 있습니다.”, “밤 10시 이후 청소년들은 자진 귀가 조치시킵니다.”라는 안내 문구에서도, 모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 국도 가입한 아동권리협약 등은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의견반영권 등을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을 비청소년들과 대등한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는 것은 분명 이 사회에 커다란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열린우리당이든 한나라당이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의견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이 사회는 전반적으로 청소년들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 ‘특별한’ 시선을 보내왔다. 비단 정부나 언론 뿐 아니라 많은 ‘어른들’과 때로는 몇몇 ‘청소년들’ 또한 청소년들을 평등한 정치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그 결과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직간접적으로 억압하고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것, 그리고 청소년들의 행동 자체에 반대하진 않더라도 그 행동의 의미를 뭔가 특별하고 예외적이고 시혜대상인 것으로 위치시키거나 그 행동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 등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 지만 청소년들은 누가 내몰아서 나온 것도 아니고, 학업에만 열중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마냥 철없고 순진하지도 않고, 부모동의서가 없다고 연행당한다거나, 밤 10시 이후에 집회장에서 쫓겨나야 할 이유도 없고, 미래가 아닌 현재에 살고 있다.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과 평등하게 연대하는 운동의 주체이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거나 사회를 ‘물려받는’ 그런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청소년들은 정치적 권리를 가진 인권의 주체이자 정치의 주체이며, 최근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나 학교자율화 조치 등의 정부 정책들에 대해 스스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경찰, 검찰, 교육청,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와 언론들, 그리고 행사 주최측과 참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정부와 언론 등은 청소년들의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등 정치적 권리 행사를 위축시키고 깎아내리는 모든 조치와 발언을 취소하고 이에 대한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하라.

1. 현재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행동 등에 개입하고 있는 주최 측과 참가자들은 청소년들을 보호주의적, 시혜적, 차별적 태도로 대우하지 말고 평등하게 대우하라.

청 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이러한 요구가 실현될 수 있도록, 국가인권위 진정이나 다른 항의/불복종 활동,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대응팀 구성, 청소년들이 평등한 주체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캠페인과 발언 등을 뜻을 같이 하는 단체들과 함께 적극 조직하고 계획할 것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2008년 5월 8일


이 성명은 지금까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발표한 성명 중에서도 '그나마' 널리 알려지고 웹에서 ‘펌질’이 된 성명들 중 하나이다. 물론 2008년 촛불 정국이라는 시의적 상황 때문에 여러 촛불모임, 게시판, 아고라 등에 ‘펌질’이 될 수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이 성명 자체로도 촛불 정국에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입장과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는 좋은 성명이라고 할 수 있다. 찬찬히 읽어보며 평가해보자.



② 칼럼 등 언론기고문


칼 럼 등 언론기고문은 글 전문을 언론을 통해 대중에 공개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가장 잘 써야만 하는, 부담 백배의 글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글의 질이 떨어지거나 글의 소재가 별로 주목 받을 만한 내용이 아니면 아예 언론에 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의 문체와 발상, 그리고 단체의 주장 등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도 쓰기 어렵다.

하지만 언론기고문이 언론에 실릴 경우에는 그만큼 그 글을 읽는 사람들도 많고 또 주장을 최대한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부담스러움과 어려움에 상응하는 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잘 써야 하고 쓰기 어렵지만 잘 써서 잘 발표할 경우에는 효과가 큰 글”이라는 것이다. 뭐, 언론기고문을 써서 숱하게 언론에 실려도 완전 무반응인 경우들도 많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화제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떨 때는 욕을 먹을 수도 있는 게 언론기고문이다. 따라서 언론기고문을 쓸 때는 한층 더 꼼꼼하게 주제와 개요를 검토하고 준비해서 써야 할 것이다.


언론기고문은 다른 그 어떤 글보다도 ‘독자’를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독자가 가장 많고 독자층이 가장 폭 넓은 글이기 때문이다. 언론기고문을 쓸 때는 우선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주제에 관해 어떤 예비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라. 웬만큼 많이 공론화가 되어서 대다수가 알고 있는 사안이 아닌 이상은 사안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지 말고, 간단한 설명이라도 넣는 게 좋다. 사람들 대다수의 생각과 어긋나는 주장을 해야 할 때라면 설득력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많은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막연한 ‘일반인’이 아니라 기고하는 언론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며 그 사람들은 그 주제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예컨대 「조선일보」 독자와 「경향신문」 독자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조선일보」에서 여러분의 글을 실어줄 일도 별로 없겠지만…) 뭐, 「레디앙」처럼 활동가들 좌파들만 주로 읽는 좌파 오타쿠스러운 언론이나 「교육희망」, 「우리교육」처럼 교사들이 주로 읽는 언론의 경우에는 좀 더 독자층을 좁게 상정해도 될 것이다.


또한 언론기고문에서는 매체 특성 역시 고려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분량과 문체이다. 보통 일간지 등 지면에 글이 실리는 언론에서는 원고지 10매 이내(A4로는 1장 이내)로 글을 써야만 한다. 종이 지면이 대단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문체 역시 간결한 문체를 사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문에 실리는 글에 간결하고 딱딱한 문체를 요구하는 것이 답답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신문지면의 한정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간지나 월간지 등 잡지 형태의 매체의 경우, 일간지와 마찬가지로 한정된 종이 지면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일간지보다는 제약이 적다. 일간지처럼 한 면 안에 글 여러 개를 배치해넣는 방식이 아니라 책자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월간지 등에서는 일간지보다 더 심층적이고 자세한 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소한 원고지 20~30매 이상의 글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왠지 모르게 간행물이 나오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긴 원고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컨대 월간지가 원고지 20~30매 이상을 요구한다면 계간지는 원고지 40~50매 이상을 요구하는 식이다.

반면, 인터넷 언론의 경우에는 이러한 분량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인터넷 지면은 지나치게 길거나 지나치게 짧지만 않다면 글의 분량에 크게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글이 A4로 2장 분량이든 4장 분량이든, 그 인터넷 언론의 서버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인터넷 언론에서는 문체에 대해서도 다소 관용적인 편이다.

마지막으로, 언론기고문은 글이 언론에 실리고 배포되는 시점을 고려해야 한다. 글이 간행물이 언제 나오고 배포되는지 이것저것 계산해야 할 것이 많다. 이에 관해서는 아예 글 중에서 글을 쓰는 시점을 명확히 밝히거나, 아니면 읽는 사람이 글을 읽는 시점에 맞춰서 쓰는 방법이 있다.


그밖에 언론기고문을 쓰는 법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나는 언론기고문은 특별히 표준화된 형식이라는 게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뭐 그냥 일반적인 논설문 식으로 서론 본론 결론이라거나, 두괄식 등 여러 방식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칼럼 등 언론기고문은, 여러 가지 형식이 가능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모양새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여러 가능성을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 언론기고문은 개인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경우가 많은 만큼 각 개인의 문체와 사상이 잘 드러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다만 언론기고문은 보통 개인의 이름을 달고 발표하더라도 "(단체 이름) (직함) (누구누구)" 이런 식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독자들은 이를 단체의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므로, 단체의 입장과 개개인의 개성을 적절히 균형을 잡아서 쓰는 것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단체에서 사업의 일부로 회의를 거쳐서 기획적으로 기고하는 언론기고문의 경우에는 단체의 공식 입장 역시 녹아들어가도록 써야 한다.



③ 발제문, 토론문


발제문과 토론문은 토론회에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야기할 내용과 요지를 정리해서 쓰는 글이다. 이 역시 통상의 주장하는 글과 큰 차이는 없다. 오히려 성명서나 칼럼에 비해서 별다른 제약 없이 쓸 수 있는, 형식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줄글로 써도 되고, 짤막짤막하게 "~임." "~라고 생각함." 같은 문장들을 주욱 이어 붙여서 토론문을 만들어도 된다. 경우에 따라선 자료들과 그 자료에 대한 분석, 해석만 잔뜩 제시한 발제문도 있다. 형식이 자유로운 만큼, 그 안에서 자신이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최대한 충실하게 담아내면 훌륭한 발제문 및 토론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제문과 토론문 역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그 원래의 의미는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 정리해두고 넘어가자. 발제문은 토론을 시작할 때 해당 주제에 관해 정리하고 토론할 거리와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다. 그리고 토론문은 그 발제문에서 제시한 자료와 토론 거리 등에 대해서 특정한 의견을 밝히는 글이다. 즉 발제문은 단순히 주장하는 글이 아니라 토론에 필요한 자료, 방향, 내용을 제시하는 글이며, 토론문은 이 발제문을 보고 쓰는 글이다. 상대적으로 발제문이 길이가 더 길고 토론문이 길이가 더 짧을 때가 많다.

발제문을 쓸 때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어투는 피하는 것이 좋다. 물론 발제문에서 주장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발제문은 단순히 주제를 설명하기만 하는 글도 아니고, 특정한 입장과 주장이 없이는 좋은 발제문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출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입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제문은 어디까지나 토론의 시작을 여는 글이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해버리면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않겠는가.

토론회는 대개는 발제자 1~2인이 발제를 하고 토론자들이 각자 자기 입장에서 토론을 발표하고 그 다음에 플로어 토론을 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발제자가 발제를 한 뒤에 바로 플로어 토론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발제자가 1~2인일 때야 뭐 어려울 것 없겠으나, 발제자가 여럿일 경우에는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발제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발제자가 여럿일 경우 각각의 발제자들은 어떤 성격의 발제자인지 파악하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교수 등 학계 사람, 정부 관계자, 활동가는 각각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 발제를 할 것이다. 또는 한 사안을 놓고도 교사, 학생, 학부모의 입장에서 발제는 다를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해서 토론회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에 맡는 발제문을 쓰면 된다. 토론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발제와 토론을 할 때 한 가지 팁을 전하자면, 절대로 토론회를 할 때 발제문이나 토론문을 줄줄 읽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이고 토론회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안다. 시각장애인이나 외국인이나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주최 측에 요청해서 점자책이든 컴퓨터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 파일이든 통역이든 요청하면 될 일이다. 여하튼 토론회에서 자기 발제문과 토론문을 줄줄 읽는 것은 토론회를 매우 지루하게, 여러분의 발제/토론 시간을 의미 없는 시간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토론회에서 발표할 때는 자기 주장에서 중요한 부분만 골라서 압축적으로 하도록 한다. 인상 깊은 일화나 예시를 들면 아주 좋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일부러 발제문 및 토론문에는 쓰지 않고 토론회 현장에서 발표할 이야기를 하나 정도 준비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글을 그대로 읽지 말라는 것은 시간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발제 및 토론을 발표하는 시간은 길어야 20분, 짧으면 5분 정도 주어진다. 20분이라고 해도 A4 용지로 대여섯 페이지 정도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분량이고, 5분이라면 A4 용지로 한 페이지 얘기하면 끝난다. 그러므로 글을 그대로 읽지 말고, 발표할 때 어떤 부분을 강조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두 번째 팁. 발제자와 토론자를 3, 4명 이상 요구하는 '그런 류의' 토론회들은 미리 준비된 발표자들의 발제 및 토론만 1시간씩 이어지는 게 부지기수이다. 준비하는 사람들이 어찌어찌 계획을 짤 때 시간을 40분 정도에 맞추더라도,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대개 자기 시간을 넘겨 발표하기 때문에 1시간을 넘는 게 다반사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오는 청중들은 대개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해도 따분해하고 집중력을 잃고 있기 십상이다. 발제문과 토론문을 위트 있고 재미있게 쓰고 발표를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해보자. 아 물론 아주 엄숙한 학자들이 모인 학계 발표회 같은 데서는 역효과가 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뭐든지 독자들과 청중들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발제문과 토론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발제문과 토론문은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자들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기도 하다. 보통 어떤 토론회를 할 때는 단지 토론회를 여는 게 아니라 기자들이 그 토론회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보도하도록 계획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명 및 논평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발제문과 토론문 역시 기자들이 뽑아서 쓸 만한 간결하고 핵심적인 문구가 부각되도록 쓰는 것이 좋다. 그 부분은 발표를 할 때도 강조하도록 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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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11. 8. 24. 19:26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

<1>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

  이런 상상을 해보자. 여러분은 지금 난생 처음으로 ‘성명서’라는 걸 쓰기 위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근데 대체 뭐라고 써야 할지 앞이 깜깜하다. 단체의 입장은 회의에서 이미 확인했다. 그래서 결론에 뭐라고 쓸지는 대충 감이 잡힐 것 같다. “이러이런 걸 철폐하라고 하면 되는구나. 대안으로 이런 걸 요구하자고 했지.” 그런데 결론을 먼저 써놓고 나니 할 말이 없다. “아 우리 단체가 이렇게 주장한다고 몇 줄 쓰면 되지 대체 뭘 쓰란 거야?!” 막막한 마음에 회의록을 보자 “~~이런 부분을 짚어야 할 듯.” “A가 B가 아니라는 걸 강조해야 해.” 뭔 놈의 회의록에 요구사항들만 많다. 짚긴 뭘 어떻게 짚으란 거야? ㅅㅂ!
  그런 분들을 위해서 운동을 위한 실용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 글은 운동에서 많이 쓰게 되는 몇 가지 유형의 글들에 있어서, 시대의 명문장가 타이틀을 딸 정도로 잘 쓰게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럭저럭 욕 안 먹을 정도로 쓸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운동을 위한 실용적인 글들도 글은 글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선 모든 글쓰기에서 공통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들을 피해갈 수는 없다. 제1편은 글쓰기의 일반적인 기본에 대해 알아보자.
  글을 쓴다는 건 뭘까? 자아와 개성의 표현이라거나 우주의 영감을 수신하여 원고지에 글자를 심는 일이라거나… 그런 소리는 집어치우고, 지극히 심플하고 평범하게 말하면 그건 문자로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심플한 정의에서부터 글에서 빠질 수 없는 기본적인 3요소를 생각할 수 있다. ① 글을 쓰는 사람 ② 글을 읽는 사람 ③ 매체. 운동을 하면서 쓰는 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까 우선 여기에서는 글쓰기의 기본으로 이 3가지 요소를 고려하며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①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쓸 때는 글을 쓰는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이 말에 여러분은 “글 쓰는 사람은 나잖아. 바로 여기 있는데 뭘 더 생각해?”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다. 여러분은 글을 쓸 때 글을 쓰는 여러분 자신을 잘 모른다. 실제로 글을 쓰다보면, 어이없게도 “내가 대체 뭘 쓰려고 한 거지?”라는 의문을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고려한다는 것은 “내가 이 글로 대체 뭘 전달하려고 하는 건지”를 확실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가 대체 뭣 때문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쓰는 건지 헷갈려 하며 쓴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난감한 경험을 줄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그래서 이 부분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바로 주제이다. 주제란, 궁극적으로 자기가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대략 1~2문장 정도로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물론 한 글 안에 하나의 메시지만 담는 경우는 별로 없고, 주제는 복합적일 때가 많다. 예컨대 아래의 짧은 글만 보아도 글 안에서 전달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단 하나의 메시지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학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체벌금지 해야 한다」
/ C모님 / 체벌금지 관련 한겨레 신문 기고문 최종안

요 즘 들어 체벌금지에 대해서 얘기가 많이 나온다. 교육감이 새로 뽑힌 탓인지 서울, 경기, 강원도에서는 이미 체벌금지를 추진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확실히 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입장에서 느끼기에 학교에서의 체벌은 문제가 심각하다. 나 같은 경우도 교사들의 체벌이 학교 가기 싫은 이유 중 0순위로 생각하고 있다. 누가 그걸 사랑의 매라고 생각하겠나.
체 벌은 폭력이다. 내 주위 어른들이 학창시절 교사에게 맞은 것들을 생생하게 재현까지 하면서 말하는걸 보면 그런 폭력의 경험이 기억에 오래남긴 남나보다. 최근 서울에서 일어난 ‘오장풍’ 사건을 두고 “아직도 저런 체벌이 있나?”라고들 말하지만, 이런 폭력들이 학교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정말 ‘경찰은 뭐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들이 있을 정도다. 그건 어느 몇 명의 교사들의 일탈 행동이 아니라, ‘청소년/학생들은 때릴 수 있다’라는 생각 자체에서부터 비롯된 문제다. 오장풍처럼 손으로 학생들을 퍽퍽 날려보내지 않더라도, 단 한 대를 때리고 기합을 주는 것에서부터 이미 문제가 있다.
교 육감들이 체벌금지 정책을 내놓으면서 사회에서 학교의 체벌만을 문제 삼고 있는 요즈음에도, 가정에서의 체벌은 잘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학교에서의 체벌도 꼭 없어져야하는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빈번하게 자주 일어나는 가정에서의 체벌도 없어져야 한다. 학교에서의 체벌이 나쁘다는 논리가 가정에 체벌만 비켜갈 순 없다.
공 익광고에서는 가정이 우리의 안식처인 양 이야기하지만, 어떤 학생들에게는 학교보다 더 무서운 곳일 수도 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폭력을 몸으로 깨닫고, 학교에서 맞고 오면 가정에서도 또 맞고, 교사에게 맞고 오면 잘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고 오히려 체벌을 부추기는 것도 가정이다. 학교나 가정이나 체벌이 있는 이상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을 학습시키는 곳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폭력은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아동학대 수준까지 가야 폭력으로 인정할까?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체벌을 ‘사랑’이니 ‘교육’이니 하는 게 우리나라인데, 특히 가정에서의 체벌은 학교의 체벌보다 ‘사랑’이라 포장하는 것이 더 심각하다.
학 교에서의 체벌금지는 꼭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왜 가정에서의 체벌금지는 이야기조차 되지 않는 것인가. 가정이든 학교든 학원이든, 청소년들을 인간으로 본다면 체벌은 사라져야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체벌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고 일단 사건 하나 터졌으니 막고 보자는 식으로는 정말 청소년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 글에서 주제가 뭔지, 전하고 싶은 부수적인 메시지들은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연습문제다. 킁. 어쨌건 주제를 생각하며 글을 쓰라는 건, 결국에 이 글로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개요’를 짜라는 것이다. 개요는 쉽게 말해 내가 이 글을 어떻게 써내겠다는 계획표 같은 것이다. 논술 학원에서 가르치듯이 “서론 - 본론1 - 본론2 - 결론” 이런 식으로 개요를 짤 필요는 없다. 그런 개요는 논설문에는 적절할 수 있으나 가끔 그런 형식을 벗어난 논설문도 있고, 논설문 외의 글들도 그런 형태를 따를 필요는 없다. 어떤 글은 결론 내용이 제일 앞에 나오기도 하고 어떤 글은 그런 방식의 개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분이 어떤 글을 쓰든, “나는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이런 이야기를 이런 순서로 해서 이렇게 써야겠다.”라는 대략적인 계획은 필요한 것이다.
  글쓰기에 숙련되면 그런 개요를 머릿속에 넣어둔 채로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지만 아직 미숙할 때는 직접 눈으로 확인 가능한 형태로 메모해두는 게 좋다. 개요를 짜지 않고 일정 분량 이상의 글을 쓰다보면 “어라 내가 뭘 이야기하려고 했더라?” 하며 당황하게 되는 상황을 겪게 될 것이다. 개요가 있다면 그럴 때 개요를 확인해보면 되지만 개요가 없다면 혼란스러운 글이 되고 만다. 물론 글을 쓰던 중에 삘 받아서 짜뒀던 개요를 무시하고 글을 써내려갈 수도 있다. 개요는 자기가 이 글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워놓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획을 가진 채 써가다가 계획을 수정하는 것과, 애초에 계획도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② 글을 읽는 사람
  불행한 이야기이지만, 미숙한 글쓴이들은 대부분 글을 읽는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당장 눈앞의 하얀 모니터 화면과 깜빡거리는 커서 혹은 하얀 원고지와 씨름하기도 벅찬데 그 너머에 눈에 안 보이는 독자들을 상상하는 건 의외로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이 궁극적으로는 “이 글은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가”라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어떻게 쓰지?”라는 고민이 독자의 존재를 가려버리기 십상이다.
  사실 여러분에게 글쓰기의 일반론으로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항상 “독자를 생각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이 매우 위대한 예술가이며 작가여서 예술적이며 상식 파괴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다. 이상처럼 “13인의MB가도로를질주하오”라고 써도 된다. (그게 인정받거나 팔릴지는 별개로) 하지만 일단 우리는 실용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실용 글쓰기에서 이상의 시처럼 쓰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실용 글쓰기의 경우에는, 독자를 생각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망한다.
  그럼 독자를 생각하는 글쓰기는 어떤 것인가?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이 글의 예상독자/가능독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 독자들은 어떤 정보를 알고 있나? ▲ 나는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싶은가? 등등.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벗어나 벅차게 사랑할련다.」
/ R모님 / 학생 연애 탄압 관련 언론 기고문 초안

나는 동성애자다. 동성애자지만, 뭐 다를 거 없는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다. 동성애 혐오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가끔 나를 걸고 넘어진다. 아니 뭐, 그냥 청소년집단을 걸고 넘어진다. 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드 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경수-태섭 커플을 보고 부러워서 흑흑 했었는데, 이 드라마를 보고 불편하신 분이 있었나보다. 뭐 영화 ‘친구사이?’의 마지막 키스신에서 한 외국인이 ‘하나님의 보편적 세상시청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계신데 안 두렵냐’라는 말이었지만, 뭐 나한테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했었는데 뭐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 왜 없을까. 하면서 이야기를 봤는데 세상에 가관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책임져라.’ 아, 어디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이 대책없는 구호를 보면 분노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학교는 청소년을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조차 결정할 수 없는 존재로 무성적인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친구가 동성애자임을 알면 써서 내게 하라는 이반검열이 그렇고, ‘불건전한 이성교제’ 처벌이 바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이기 때문에 받는 억압과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이 어우러져 상상도 할 수 없는 억압에 시달린다.
수많은 학교의 징계규정에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징계하는 규정이 있다.
불 건전한 이성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 그 두 어절 뭣도 아닌 단어 때문에 나는 나의 정체성도 부정당하고 (‘이성교제’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 거지.), 나의 사랑조차 부정당하고, 나 자신조차 부정당한다. (그래 그게 아니라면 난 게이니까 그래, 학교에서 애인 만들어서 뽀뽀하고 키스해도 상관없는 거지?)
이제 좀 집어치우자 그 단어. 그 이성애중심주의적이고, 연애탄압적이고, 순결이데올로기에 빠져있는 그 단어.
이제는 좀 게이여도, 좀 문란해도 봐줘라.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내 사랑에 대한 결정권은 내가 가진다.
걱정하지마라, 아 걱정된다면 콘돔사용법이나 제대로 알려주고, 제대로 된 성교육이나 해라. 음순 음경 운운하는 그 따위 성교육이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을 부르는거니까.
이제 좀 다시 보길 바란다. 100일, 500일, 1000일되서 축복해주지 못할망정 연애도 못하게 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게 뭐하는 짓인가.
이제 내가 연애를 해도, 그게 설상 남자여도 걔랑 성관계를 가져도 상관없는 ‘미성숙한 이성교제’라는 단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연애를 하고 있는 수많은 헤테로 커플들과 게이, 레즈비언 커플도


  이 글은 독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글을 쓰게 된 배경이나 여러 용어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마구 던져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 중 다수가 이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또한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내용은 거의 없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거나 긴가민가하고 있던 독자들도 설득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어휘나 정보를 섞어가며 불친절하게 글을 쓰는 경우는 비교적 그 잘못이 명백한 편이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서 우리는 ‘독자에게 적합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두발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학생들이 주로 읽는 매체에 실리는 글과 정부 관계자가 읽을 글, 어른들이 읽을 글은 서로 다른 어조로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해야 할 것이다. 학부모들이 주로 읽게 될 매체에 “두발자유를 위해 학생들이 투쟁에 나서야 합니다!”라는 글을 쓰는 것보다는 “학부모들이 두발자유를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입니다.”라고 쓰는 게 더 독자에게 적합한 글쓰기일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단체 내부 사람들끼리 읽을 기획서나 제안서를 쓸 때와, 외부의 사람들이 읽을 기획서나 사업 설명을 쓸 때는 다르게 써야 할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는 일부러 불친절하고 막 나가는 글을 쓰기도 한다. 아니면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을 생략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몇몇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글들은 독자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불친절한 글은 사람들이 잘 읽지도 않을 뿐더러 읽더라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잘 전달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③ 매체
  매체는 쉽게 말해 글이 어떤 형태로 어떻게 발표되고 전달되는 글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가장 대표적으로 매체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분량이다. 나에게 허락되어 있는 혹은 요구되는 글의 분량은 얼마인가? 분량은 글의 주제와 메시지, 전개 방식 등등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또한 그밖에도 이 글이 인터넷 언론에 실리는 글인지, 신문지면에 실리는 글인지, 책에 들어가는 글인지, 토론회 자료집에 실리는 글인지, 말로 옮겨야 하는 강연이나 연설문인지, 이메일로 보내는 글인지, 첨부할 사진은 칼라인지 흑백인지 등등 여러 가지 매체의 형식들을 고려하는 글쓰기를 해야만 한다.
  매체를 고려하는 글쓰기 또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예컨대 시의성 있는 사건에 대해 신문 칼럼 형식으로 쓴 글은 “최근의” 등의 표현을 사용하거나 시의성 있는 사건에 대한 소개로 글의 도입부를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몇년 몇십년 동안 간행되고 팔릴 목적으로 만들어내는 책에 실릴 글에 그런 표현이나 도입부를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분량과 발표형식, 전달시기 등이 매체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다. 이런 여러 매체를 고려한 글쓰기는 구체적으로는 기고문(칼럼 등), 성명서, 토론회 발제문/토론문 등등을 설명하면서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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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9. 4. 5. 12:34

계간 청소년문학 2008년 여름호...인가 실렸다고 했나?;

여하간 어느 정도 면식이 있는 이계삼 선생님의 글. 읽으면서 확실히 '글쓰기'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다지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논술능력이 필요한 것일까? - 이계삼(밀성고 교사)

 

 

 01.

  제목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 글의 제목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정리한 러시아 민담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서 따왔습니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지요. 파홈이라는 욕심 많은 농부가 새 땅으로 이주해갔는데, 그곳 촌장이 1000루블만 내면 아침부터 해 떨어질 때까지 걸어 돌아오는 데까지를 모두 주겠다고 합니다. 파홈이 환장을 해서 정신없이 내달리다가 해 떨어질 무렵 목표지점에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는데, 결국 거기서 쓰러져 죽고 맙니다. 죽은 파홈의 시신을 일꾼들이 땅을 파서 묻었는데, 파홈에게 정작 필요했던 땅은 제 시신을 묻을 만큼의 자리면 됐다는 겁니다.
  이 글을 부탁받고 며칠 이런저런 생각을 굴려가다가 문득 저 러시아 민담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쳐왔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사람에게는 과연 얼마만큼의 논술 능력이 필요한 것일까” 라는 질문이 간절해 집니다. 논술 교육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모습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이야기처럼,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고발하지 않고 마지못해 따라가고 있는 허위의 행렬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초등학교까지 논술교육이 내려가 있지만, 사실 초등학생들, 특히 저학년에게 책읽기와 글쓰기를 논술 중심으로 가르치는 것은 범죄적인 행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등교육에서 이루어지는 논술 교육은 지금보다 훨씬 후퇴한 자리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좋은 삶’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면 굳이 긴요하지 않은 능력을, 그것도 중등 교육 과정에서, 그 문제를 출제한 교수들도 엉터리 답안을 제출하기 일쑤인 이 고난도의 시험을 강요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논술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급격히 커졌습니다. 아시다시피 2008년부터 시행된 대입제도와의 관련 때문이지요. 지금은 오락가락하는 중이지만, 입시에서는 어떻게든 2008년 이전보다는 앞선 자리를 차지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는 하루 동안의 학력고사로 '한 방'에 입시를 끝내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제는 3년동안의 내신과 수능시험과, 논술․면접과 같은 대학별 고사까지 치러야합니다. 내신과 수능은 그나마 학교 교육과 연관이라도 있지만, 입시 논술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따로 반을 만들고, 별도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를 두고 ‘옥상옥(屋上屋)’이라고 하지요. 집 위에 집을 올리고, 거기에 또 집을 올리는 형국입니다. 교사는 지치고, 학생들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육의 집’은 위태로워집니다.
  그래도 논술은 그 자체로는 '좋은 거' 아니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육 현장에 잘 뿌리내리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지만, 무어든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것이 실제로 활용되는 사회적 맥락이고, 그것의 영역과 범위의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적정선’을 지켜주는 것은 그래서 몹시 중요한 것입니다.
  "가장 감미로운 것들도 가장 시어빠진 것이 될 수 있다네. 백합꽃이 썩을 때 잡초보다 훨씬 나쁜 냄새를 풍긴다네." 이런 시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한계치를 넘어서면 그 순간부터는 파괴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이 논술이란 놈이 저 구석진 자리가 아니라 입시를 향한 꼭짓점에 자리 잡고 있다보니, 이 놈이 중요한 것들을 빼앗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의 문학적 상상력, 감수성과 관련해서 논술은 상당 부분 이들을 잠식하고 퇴화시킬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글은 그것들의 관계도를 조금이나마 밝혀보려는 시도입니다.


02.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저는 며칠 동안 틈틈이 교무실 캐비닛에 보관해 두었던 아이들의 글을 꺼내 읽었습니다. 저 또한 다른 여러 국어 선생님들처럼 글을 써서 같이 읽고 나누는 수업을 비교적 오랫동안 해 왔는데요, 우연한 계기로 아직 제 손에 남아있는 아이들의 글쓰기 공책들입니다. 졸업하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이 녀석들은 지금 어디서 잘 살고는 있는지 그리워지기도 했고, 새삼스럽게도 국어 선생이라는 자리가 참 복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연히 한 학생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논술반을 운영하면서 아이들과 여러 권의 책을 돌려읽으며 서로 짤막한 독후감들도 나누었는데, 포리스터 카터라는 미국 작가가 쓴 체로키 인디언의 후예인 ‘작은 나무’라는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책의 독후감의 일부입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통나무. 밤톨만한 영혼. 머릿속이 숫자로 가득 찬 내 모습과 닮은 것 같다. 남을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욕심. 애써 찾아내려 하지 않아도 마치 우연히 그런 것처럼 눈이 닿는 자리에 욕심이 묻어있는 듯하다. 충분히 안 쓰고도 살 수 있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이 말은 가시가 되어 때맞춰 고개를 들곤 한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어린아이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친구가 뒤떨어져 있으면 어딘가에 서서 기다려주는 마음이 있었던 그때. 앞서든 말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쓸쓸히 뒤에 혼자 남지만 않는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사실 이 생각은 해볼 겨를조차 없었다. 친구들도 나처럼, 따라잡을 수 있도록 기다려줬으니까. 내 것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를 손에 넣으려고도 해보았지만, 그 일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욕심 탓에, 어떤 것을 얻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내 영혼은 얼마만할까? 욕심을 가질수록 마음을 다친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다친 그 마음도 '영혼의 마음'이 분명하다. 마음을 다치지 않고 얼마든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 영혼이 아닐까 싶다. 영혼을 이해한다면….

  이 글은 책에 대한 짧은 독후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시적인 여백과 울림을 가진 아름다운 에세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으니 그 학생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 학생은 시골 교회 목회를 하시는 아버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독일로 유학을 가시는 바람에 7년간 독일에서 살았습니다. 약사였던 어머니가 생계를 잇기 위해 자식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습니다. 그 학생은 말수가 적지만, 진중하고 사려깊은 여학생이었습니다. 문제는, ‘스피드’를 강조하는 한국식 교육에 좀처럼 적응을 못했다는 거지요. 언어영역 시험 100분 동안 좀처럼 60문제를 다 풀지 못해서 항상 낮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책도 아주 느리게 읽었습니다. 그래도 처절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아 늘 보기 안쓰러웠습니다.
  다행히 논술 수업은 재미있게 따라왔습니다.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다른 아이들에게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날카로운 통찰도 보여줬고, 위와 같은 빼어난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이 써내는 논술글은 보기가 안타까웠습니다. 논술은 뼈대가 단순한 글입니다. 제시문이 말하는 바에 대해 설명하고, 제시문간의 연관관계를 밝히고, 그에 바탕해서 자신의 주장을 예증하면 되는데, 이처럼 생각이 많고, 생각과 생각간의 매듭은 느슨하되 그 속에 풍부한 서정을 감추고 있는 학생들, 그것들의 졸가리를 세울 지성은 아직 배양하지 못한 학생은 논술을 끔찍하게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그 학생은 아예 논술문에 대한 답을 써 내지 못하거나, 질문이 원하는 서너 가지 요소 중에서 자신에게 와 닿은 한 두 문제에 대해 깊숙한 이야기를 하다가 분량을 다 채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의 에세이를 읽는 일은 경탄의 연속이었지만, 논술문 첨삭은 정말로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재수를 하면서까지 한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심리학 공부를 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이를 포기하고 아버지가 계시는 독일로 곧장 유학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요. 가끔 연락이 오는데 그곳 대학생활에 다행히 잘 적응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03.

  대개 백일장에서 상을 타오는 학생은 모범생들이고, 그래서 학업 성적과 글솜씨의 상관성이 높을 거라 생각하시는 분이 많을 듯합니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서 직접 겪어보면 실상은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백일장 입상용(用) 글’이 따로 있고, 거기에서 상을 타오는 학생들은 백일장 입상에 필요한 문법을 잘 체득하고 있습니다. 읽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잘 짜맞추어진 감동 없는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글이 좋은 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제가 보기엔 학교 교육에서 학업 성적과의 상관성이 제일 낮은 것이 바로 글쓰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찍부터 바른 글쓰기 교육을 위해 애써온 한국글쓰기연구회 선생님들이 펴낸 책들이 있습니다. 중학생들의 글은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보리), 고등학생들의 글은 <날고 싶지만>(보리)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것은 뜻밖에도 실업계 학생들이 정말 생생하고 진솔한, 감동적인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은 제게도 비슷한 체험들이 있습니다. 제가 교사 생활하면서 읽었던 가장 감동적이고 우수한 글들은 논술이나 백일장과 같은 강력한 보상 체제가 작동하는 틀 속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좋은 글’들은 가정 형편이나 성적이 좋지 않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생각이 많음에도 나름의 감수성을 다치지 않고 지켜온 학생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스스럼없이 써 내는 그런 글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도 떠오르는 글들이 몇 편 있습니다. 우리 학교뿐 아니라 지역에서도 거의 싸움 분야의 ‘통’(아마 한자어 統(통)에서 유래된 듯한데, 도시에서는 ‘짱’이라고 부르는 것을 여기선 ‘통’이라고 합니다)으로 통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끔 술이 덜 깬 채로 등교해서 종일 엎드려 있기도 했는데, 그 친구가 3학년 독서 시간에 쓴 글이 생각납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나는 원치 않았는데, 중학교 때부터 서열을 재기 위한 싸움에 종종 불려나갔다. 그 때의 고요한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싸움이 끝나면 내 주먹은 피에 젖어 있었고, 나를 따르는 친구들도 늘어났지만, 이상하게 싸움이 싫어졌다. 지금 나는 일생토록 함께 하고픈 존경하는 선배가 있는데, 그분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

  이 글을 읽어주던 시간, 여학생들이 껌뻑 넘어가고, 녀석은 붉어진 얼굴로 연신 손사래를 칩니다. 아마도 녀석은 그 글을 통해 제 맘속에 똬리 틀고 있던 소망, 이를테면 남자들의 약육강식의 힘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픈 꿈을 꾼 겁니다. 실제로 그 학생은 소망처럼 기능대학에 진학했는데, 군제대후에 취업해서 착실하게 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른 한 여학생의 글입니다. 역시 성적은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그 글은 밀양장에 내다 팔기 위해 콩이야 팥이야, 산나물을 뜯어 보자기에 싸서 시내로 나오는 할머니들로 가득 찬 아침 등교 버스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었습니다. 지금도 제게 잊혀지지 않는 부분은 “팔걸이에 나란히 매달린 자기의 희디 흰 팔목과 시커멓게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팔이 너무나 대조되어서, 문득 처연한 슬픔이 몰려와서 할머니의 그 검고 거칠한 손을 어루만져주고 싶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여학생의 글이 떠오릅니다. ‘열등감’이라는 주제로 글쓰기를 했는데, 손에 땀이 많이 채이고, 유독 까칠까칠해서 친구들과 손을 잡지 못하고, 좋아하는 이와 악수할 일이 생기면 자신이 싫어지기까지 했다는 학생의 글입니다. 이 글은 제가 월간 <작은책>에 투고하느라 워드로 직접 입력해서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데, 아래는 그 글의 끝부분입니다.

  ……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동안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다음과 같은 사실 말이다. '남과 악수하는 일은 끔찍해요' ― 사실은 악수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기분좋은 일이었다. '그 누구와든 손잡기 싫어요' 사실은 ― 그 누구든 손을 잡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 손이 미워요' ― 사실 나는 누구보다 내 손을 사랑한다. 단지 남이 내민 손을 잡을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나는 이 소재거리를 갖고 쓸 내용을 생각하는 동안 내내 울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남에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일이 그동안 나에게는 엄청난 심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한 글자 두 글자 나의 '손'에 대해 적어가면서 하루 종일 내 '손'을 쳐다보고 끔찍한 기억들을 반복하는 동안 어느새 나는 무덤덤해져 있었다. …… 조그만 희망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나는 용기에 대해 생각한다. 내 '손'을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는 그 용기 말이다. 내가 만일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이라면, 온통 일그러지고 뒤틀린 피부를 가진 사람의 얼굴을 맨 먼저 쓰다듬을 것이며, 내가 만일 가장 부드러운 손을 가진 사람이라면 살가죽이 뼈에 붙은 메마르고 앙상한 아이의 몸을 맨 먼저 어루만지리라. 나는 소망한다. 남을 위해 내가 먼저 손 내밀 수 있기를.

  제가 생각하기에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유롭고 너그러운 분위기입니다. 이 글을 잘 써서, 이 글로써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을수록 훌륭한 글이 태어납니다. 점수나 서열의 척도로 사용되지 않고, 그 어떤 보상과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어떤 것이든 다 받아들여지는 너그러운 분위기와 자유로움. 이것은 글쓰기에서 나머지 모든 요소를 다 합쳐도 좋을 만큼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글쓰기는 언어를 매제로 하여 체험을 이미지와 형상으로 그려내는 작업입니다. 이미지와 형상이 작용하는 영역이 넓을수록 예술적이고, 글쓴이 자신의 지평을 넘어서는 초월성을 획득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지금 학생들이 목을 매야 하는 논술문은 실은 최하급의 글입니다.
  저는 학생들이 쓰는 가장 가치로운 글로 일기를 꼽습니다. 일기는 자신이 자신에게 바치는 글이기에 그 어떤 글로도 담을 수 없는 진정성이 있습니다. 일기는 자신을 표현하고, 치유하고, 성장케 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삶의 비전으로 이끌어줍니다. 일기를 통해서라면, 그 누구든 자신에게는 일급의 문필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육 현장에서는 논술의 압박으로 인해 저런 류의 글쓰기는 숨쉴 공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직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입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글쓰기만이 강조됩니다. 바탕과 끄트머리가 뒤바뀐 것입니다.


04.

  논술문 쓰기는 물론 미덕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논술 수업에서 요약하기와 메모하기를 가장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텔레비전 토론을 보면 참 엉터리가 많습니다. 그건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 기록해 놓지 않고, 대충 제 방식대로 알아들은 뒤에 제 하고픈 이야기를 할 차례만 노리다 보니 맥락에도 맞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가 횡행하는 것입니다. 제시문을 잘 뜯어읽고 요약하고, 그것들의 맥락을 갈무리하면서 찬찬히 메모하는 과정에서 민주시민의 중요한 자질이 일깨워집니다. 그것은 또한 고등 학문 탐구에도 매우 긴요한 지적인 자질을 훈련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 정도의 훈련이란 굳이 논술고사라는 거창한 '틀'이 아니더라도, 중등 교육 과정 속에 얼마든지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상처받는 것들이 너무 많고, 그 상처는 크고 깊습니다.
  논술은 상상력을 빼앗습니다. 상상력이란 이를테면 해리포터와 같은 판타지,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공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상상력은 간단히 말하면, 주어진 인식의 지평을 넘어 존재하는 세계의 형상을 그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꼭 미래나 비현실을 향해가는 것만은 아니고, 과거를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날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논술문 쓰기는 아이들을 일단 주어진 ‘틀’에 굴복하게 만들면서부터 출발합니다. 아이들은 ‘틀’에 굴복하고, 논제가 요구하는 금 바깥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구속감을 경험함으로써 모르는 새 상상력을 억압하게 됩니다.
  논술은 교양의 의미를 왜곡시킵니다. 논술에 찬동하는 분들은 어쨌건 책읽기와 사색, 토론이 바탕이 되는 논술 교육은 교양을 배양하는 효과적인 틀이 될 것이라 주장합니다만, 그것은 교양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교양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지식을 얻고, 고전을 두루 섭렵해서 배양하는 것이 교양이라면 논술 교육은 어쨌건 교양 교육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교양은 좀 다른 개념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 사회의 자칭 지도층들, 강부자, 고소영들은 왜 이렇게 ‘교양’이 없을까요?” 요컨대, 제가 생각하는 교양의 맥락에서는 우리 사회 자체가 실은 무교양의 극치입니다.
  자신을 헌법이 정한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통치권자가 아니라, 회사 사장(CEO)으로 규정하고, 국민을 직원으로 여기는 우리 대통령의 언행을 한번 봅시다. “못생긴 마사지걸이 써비스가 더 좋다”, “오케스트라 노조는 금속노조소속이다. 왜냐하면 바이올린 줄이 쇠로 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대통령 후보 시절이지만, 이런 천박한 농담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수없이 주억거렸습니다. 지난 총선 때 14석을 얻은 ‘친박연대’라는 정당을 보셨겠지요. 아무리 총선용으로 급조한 정당이고, 의석이 급해도 그렇지, 정당 이름을 그렇게 지을 수가 있는지, 지금도 그 이름을 들으면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수치심이 느껴집니다.
  논술문을 잘 하는 것과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가장 좋은 교양인은 타인을 아픔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덕성일 뿐, 남들이 잘 못 읽어내는 어려운 책을 줄줄 읽고, 따박따박 제 주장을 글로써 펼치는 훈련을 하는 것으로 연마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가르친 졸업생인데,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 학생의 미니홈피를 우연히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학생은 미니홈피에 자신의 모의고사 점수와 등급을 계속 올려놓고 있었습니다. 좀 실망을 했지요. 논술문도 아주 잘 써 냈고, 나중에 명문대학에 진학했는데, 사실 그런 행동은 제가 볼 때는 교양 없는 행동입니다. 아마, 미니홈피나 카페 등에서 자신의 성적을 공개하고, 서로 상의하는 풍토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것은 논술 교육이 그나마 추구하는 교양정신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교양은 삶의 덕성이고, 그것을 잴 수 있는 척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상상력을 억압하고, 교양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우리 사회의 논술 열풍은 그래서 반교육의 극치입니다. 한마디로, 논술은 상위 30% 학생들을 줄 세우기 위한 방편이고, 학생들의 지적 능력의 극히 협소한 부분을 감별해 내는 기제에 불과합니다.


05.

  교양을 쌓고, 문학적 상상력, 문학적 감수성을 키우는데 제일 좋은 길은 책을 많이 읽는 것에 있지는 않는 듯합니다. 책을 빨리, 많이 읽는 것이 남다른 재능인 것처럼 떠받드는 풍조가 있지만, 그건 허깨비같은 소립니다.
텍스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만큼만 반응합니다. 단순하게 비유하자면, 위장(胃腸)과 소화능력과의 관계와 비슷한 것이고, 허용범위를 넘어서는 음식물은 건강에 치명적이듯, 독서량도 그러합니다.
  저는 필사(베껴쓰기)와 낭독을 권합니다. 실제로 저는 고등학생 시절, 일기장에 그날 문제집을 풀다가 발견한 좋은 시나, 소설의 구절이 있으면 종종 옮겨 적곤 했습니다. 이런 체험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눈으로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텍스트의 ‘육체성’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옮겨 적은 시들은 20년이 된 지금도 기억이 나고, 그 시를 보노라면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윤동주, 신동엽, 김수영, 김소월, 박재삼, 김광균 님의 시들,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 김승옥의 '무진기행', 조세희의 ‘난․쏘․공’, 최인훈의 ‘광장’의 구절들. 다들 문제집에서 만났지만, 이들은 지금도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입니다.
  베껴쓰는 것과 함께 낭독은 또한 텍스트의 육체성을 느끼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저는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시나 소설 텍스트를 통으로 끝까지 함께 읽는 일을 즐겨합니다. 낭독은 읽는 이와 듣는 이에게 눈으로 묵독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기쁨과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길어 올립니다.
  중요한 사상가로 이반 일리치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만년에는 중세 사회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그분이 밝힌 바에 따르면, 중세 때의 ‘읽기’와 지금의 ‘읽기’는 매우 달랐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일리치는 12세기의 수도사 성(聖) 빅토르 휴라는 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휴와 같은 중세 수도사들은 마치 수도원의 포도밭에서 딴 포도의 맛을 음미하듯이 온 몸으로 글을 낭독하면서 한 줄 한 줄 ‘맛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면서 또한 텍스트가 담고 있는 진리를 ‘육화’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이에 반해 오늘날의 독서는 '하이퍼스페이스 속의 수음행위' 같은 것으로 변해버렸다고 일리치는 말합니다. 


06.

  이제 이야기를 좀 정리해야겠습니다. 논술은 중등 교육과정이건, 고등학문 탐구를 위한 준비를 위한 지적 훈련이건 협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되풀이하여 말씀드리지만, 글을 쓰고 읽는 것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롭고 너그러운 분위기입니다. 낭독과 필사는 논술의 요약하기와 메모하기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이 교양을 쌓고,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키우는데 훨씬 가치롭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교육 현장에서 되살려져야할 것들입니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논술 능력이 필요한 것일까요. 파홈에게는 제 육신이 묻힐 만큼의 땅만이 필요했듯, 사람에게는 자신을 정확히 알고,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표현할 정도의 논리적 직관만 있으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촛불시위 때 인상적으로 보았던 구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광우병 쇠고기 먹고, 민간의료보험으로 치료 못 받고 죽으면, 화장해서 대운하에 뿌려주오.” 이 시국에 담긴 문제들의 기본 구조를 인식할 수 있는 논리적 직관, 이를 저런 위트 있는 문구로 드러내는 표현능력, 그리고 이를 들고 직접 광장으로 나와 외칠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요? 물론 쉽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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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장군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선생님과 함께 하는 학생들은 행복하겠습니다.
    자유롭고 너그러운 시공간을 함께 하므로.

    2009.04.06 12:16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러게요 ^^ 저도 이계삼 선생님한테 배웠으면 좋았을 텐뎅 킁

      2009.04.06 12:18 신고 [ ADDR : EDIT/ DEL ]
  2. 비밀댓글입니다

    2010.03.16 16:3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