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4. 5. 14. 10:28
(5월 13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권단체 간담회에서 '평등한 애도'라는 주제로 발제했던 글을, 한두 줄 보완했습니다.)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감정


  다른 사람의 일에 대체로 무덤덤하고,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는 슬퍼하지 않는 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며칠간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끊임없이 소식을 전해오는 미디어 때문일까. 마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가 뒤집히고 가라앉고,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바로 옆에서 목도한 것 같은 착각. 그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행태들에 대한 분노. 그리 슬프지 않은 나도 충분히 안타까움과 암울한 감정을 느낄 만했다.

  그리고, 왠지 그럴 것 같았지만, 참사 이후부터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생겼다. “미안해 아이들아”, “채 못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등등, 속이 뒤틀릴 것 같은 말들이 온 사회를 덮기 시작했다. 내 트위터 타임라인만 해도, 도대체 내가 팔로잉한 사람 중에 이렇게 짜증나는 사람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였다. 내 눈에는 무례 또는 오만 또는 차별로 보이는 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유통되는 것을 보면서, 웃었다. 야, 이렇게 할 일이 많구나. 하하.

  그래도 간간이 한 마디씩 투덜거린 것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는 무언가 비판을 하거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유족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도하고 참담해하고 있는데 굳이 선을 긋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욕 먹을까봐 무서웠던 것도 맞다. 그렇게 타이밍을 보면서 한 달이 되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언론에서, 온라인에서, 거리에서, 청소년활동가인 내 속을 뒤틀리게 하는 이야기들을 숱하게 접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6만원을 받고 동원됐다는 허위 주장부터, “미안하다 애들아”하는 현수막까지. 그렇게 참으면서 쌓은 짜증과 분노가 밖으로 폭발을 할지, 속병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설명


  저런 것이 왜 문제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다. 이해하기 쉽게 유비추론이 가능한 예시를 들어보겠다. 장애인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해 “비장애인으로서 똑바로 하지 못해서 장애인들에게 미안하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상당히 기이할 것 같지 않은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게 “남자들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하고 성폭력을 가리켜 “꽃이 짓밟혔다” 같은 표현을 쓰면, 거슬리지 않는가?

  본래 “미안하다”라는 말 자체가 너무 이 상황 저 상황에서 쓰이는 것이기는 하다. 어쩔 때는 죄책감, 어쩔 때는 안쓰러움, 어쩔 때는 부끄러움 등, 미안하다는 말이 담고 있고 대표하는 감정은 많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이 어떤 경우에 어떤 틀을 거쳐서 "미안하다"라는 말과 형식으로 표현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은 맥락에서라면, 나는 “미안하다”라는 말이 주체가 객체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잘못을 하고 구체적인 책임이 있는 책임자가 하는 말이라면 별로 위화감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추상적인 집단이 집단에게 하는 말이라면 한 번 더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비청소년들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진 만큼,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개개인들의 권능이 얼마나 된다고 책임이 있다고 하겠냐만…. 계량과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비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권력과 책임이 있다는 평가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와 사람들이 “미안하다 아이들아”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어쩌면 그 간극은 '정치적인' 문제일 것이다. 비청소년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꿔야 할 문제 상황으로 인식하고 청소년들을 평등하게 간주(가정)하고 대우할 것인가.

  다시 예를 들어보겠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분명히 여성보다 권력이 크다. 특히 각종 의사결정 과정인 정부나 의회, 그리고 조직들의 상층부는 남성 비율이 압도적이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평가해도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이 목숨을 잃거나 폭력에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남성들이 “남자로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성과 여성의 자리에 비장애인과 장애인, 자본가와 노동자(또는 돈이 많은 사람과 돈이 적은 사람), 미국이라면 백인과 흑인을 넣어도 마찬가지이다.>

 ― 이 주장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에도 위화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집단 전체를 볼 때 사회적으로 더 책임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주체화하는 논리와 맥락을 바탕으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권력이 조금 더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소수자에게 자신이 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평등을 선언한 관계에서라면 좀 어색한 모양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이 사회의 이런 문제를 함께 바꿔가자고 말하는 것과 ‘어른들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나는 ‘어른들’이 뭘 해주고 못 해주고 할 권력이 있기나 한지, 어떤 오만인 것은 아닌지도 의심스럽지만.

  참사 희생자에 대한 구도를 “어른”과 “아이”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아이”를 “못 다 핀 꽃”이라고 하는 것도 설령 자연스러운 생각일지 몰라도, 잠자코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라도 문제나 잘못이 있을 수는 있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희생된 사람들을 가리켜서 '착한 아이들' 등으로 이름 붙이고 묘사하는 것도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나는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아이들’, ‘미안하다’ 구도가 청소년들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사회의 산물이고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 문제에 대해 제대로 문제의식이 공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은 이런 문제의식을 ‘청소년보호주의’ 문제라고 명명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와 연관해서 나이주의나 가족주의 구도도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러므로 이 애도 역시 평등하지 않다.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청소년 대중 일반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넓은 의미의 청소년운동 안에서도 과연 이런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는지 묻는다면, 다소 회의적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널리 공유하고 조직화하는 것이 청소년운동의 지난한 숙제이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 “미성년자 석방하라” 등의 구호가 튀어나오던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눈앞에 떨어진 숙제.


첨언

  청소년보호주의는 비청소년들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이 있다. 세월호참사의 사망자 중 50여명은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며, 분명히 비청소년들도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이 ‘아이들’로 주로 불리고 기억될 때, 그 많은 사람들은 한 켠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 사건은 더군다나 단순히 청소년들이 많이 죽은 것이 아니고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단체로 여행을 가다가 일어난 사건이라서 주로 단원고 학생들만 부각이 되고 단원고 학생이 아닌 사람들은 청소년이든 아니든 다소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정부나 언론이나 눈에 띄는 집단을 먼저 챙기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그냥 ‘희생자’, ‘생존자’, ‘사람’으로만 묶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각각의 다른 역사와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기억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대할 때 “아이”와 “어른”이라는 위치가, 꼭 필요한가? 또는 바람직한가?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대로 수용해도 좋은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걸 접할 때마다 부자연스럽고 무례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삐그덕거린다. 다른 청소년활동가들 중 상당수도 그런 마음을 호소한다. 특별히 민감한 것이 아니라, 그 구도에 깔려 있는 차별과 불평등을 읽어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의 종착지는 어쩌면 ‘미성년자’, ‘청소년’이라는 말과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일 것"이라고 활동가들끼리 이야기하곤 한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 사회의 애도 방식을 보며, 다시 한 번 그 말이 떠올랐다.


(노파심에서 이야기하지만, ‘아이’라는 어휘 자체에는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어쩌면 ‘청소년’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느낌의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용례에서는 ‘아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더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때가 많지만, 쓰임새와 맥락이 문제이지 ‘아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아이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청소년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니 근데 그러고 보니 왜 저런 현수막 등은 다 반말질이지?)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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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 깊게 파고들면 순진무구한 아이 희생자와 타락하고 세상에 물든 어른들의 잘못이라는 식의 구도 자체를 더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2014.05.14 20:31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1. 6. 18. 06:27
경희대 교지 고황 81호에 실은 글입니다.  http://www.khkh.net/








학생인권조례, 보호와 인권이 대립되지 않는 교육을 꿈꾸다




차별의 가장 부드러운 얼굴?

혹시 선생님… 당신은 환자를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약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정의의 아군인 자신이 지켜주고 있다…. 그 감각이야말로… 바로 차별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차별이란 누군가를 업신여기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환자를 지키려하고 있어요…. 이것도 어떤 의미론 차별입니다…. 즉 당신은 환자를 자신보다 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위선입니다….
- 사토 슈호,『헬로우 블랙잭 9』


  “‘보호’의 반대말은 뭘까요?” 내가 인권교육이나 강연을 나가서 곧잘 던지곤 하는 질문이다. 나오는 대답들은 여러 가지다. “비보호”(교통표지판?), “방임”, “방치”, “책임”, 그리고, “자유”나 “인권”까지. 이 중 뭐가 정답일지 고민하는 것은 부질없다. 애초에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리 답이 나오기 마련일 질문이기 때문이다. 보호를 하는 입장의 사람인지, 보호를 받는 입장의 사람인지,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보호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지, 여러 입장과 생각에 따라서 ‘반대말’은 다르게 그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통해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보호”의 반대말이 “자유”나 “인권”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보호라면, 그건 그리 좋은 보호가 아니라고. 누군가를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보다 못한 존재, 약한 존재, 못난 존재로 생각할 때, 차별은 시작된다. 보호 또한 비슷하다. 보호는 자신보다 못하고 약한 존재에게 해주는 것일 때가 많다. 또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 보호는 차별의 가장 부드럽고 세련된 얼굴이 된다.

  ‘차별의 가장 부드러운 얼굴로서 보호’는 청소년들의 삶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청소년보호법을 생각해보라. 얼마 전 국회에서는 만16세 미만 청소년들이 밤 12시 이후에 온라인게임을 할 수 없게 강제로 접속을 차단하는 이른바 ‘셧다운제’가 담긴 청소년보호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누가 봐도 분명히 청소년들을 규제하는 형태의 제도인데도 ‘보호’의 이름을 달고서 청소년들을 게임으로부터 보호하겠다, 청소년들의 수면권을 위한 것이다, 라고 입법 이유를 말하는 역설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또한, 2003년 전까지만 해도 청소년보호법은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물로 지정하고 성소수자들의 커뮤니티 등에 청소년 접속을 제한했다. 청소년들이 혹시 ‘사고’라도 칠까봐 보호하기 위해서 이성교제를 금지하고 스킨쉽을 처벌하는 학교의 교칙 같은 것들도 ‘보호’가 어떻게 인권침해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예이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광화문 등 촛불시위가 일어나는 일대를 청소년 통행 금지 구역으로 지정해야 한다. 청소년들을 불법 시위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라는 조갑제 씨의 드립 역시 ‘보호’가 ‘차별’이자 ‘규제’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학생인권조례, 존중과 참여로 보호를 넘어

  2010년 10월, 경기도에서는 한국에서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인권의 구체적인 기준과 내용, 그리고 개선 방안을 담은 최초의 법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크다. 이후 서울, 광주, 전북, 전남, 강원도, 경남, 충북, 제주 등 여러 지역에서 교육청이나 시민단체들의 주도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서울에서는 얼마 전 서울시민 1%의 서명을 모은 주민발의가 성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일보 등 일부 언론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미성숙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학생들을 성인과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인권 포퓰리즘이라고 사설까지 써가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동아일보가 2010년 7월 2일에 실은 사설을 보면 마지막 문장이 이렇다. “학부모와 교사들이 실력 열정 도덕심을 가져야만 우리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다.” 인권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야 한단다. 이런 논리는 ‘보호’가 ‘인권’의 반대말, 즉 ‘차별’이 되는 정점을 보여준다.
(덧붙여 말하자면, 동아일보는 같은 사설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방임’이라고 표현하며 오도하고 있지만, 사실 학생인권조례 안에는 학생들의 권리로서 폭력과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학생들이 필요한 상담이나 교육, 복지, 보호를 제공받을 권리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보호가 차별이 되지 않는 경계선, 보호가 인권의 반대말이 아니라 인권의 동반자이자 부분집합이 될 수 있는 그 경계선은 바로 ‘존중’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보호를 받는 사람을 약하고 못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할 때, 일방적인 규제나 시혜가 아니라 보호받는 사람의 참여 속에서 그 의견과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때, 보호받는 사람이 주체가 되고 권리로서 보호를 누릴 때, 보호는 비로소 ‘차별의 부드러운 얼굴’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학생인권조례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차별적인 청소년보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실마리를 본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의 기본적인 인격을 존중하도록 하는 동시에,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 보장, 학생들의 학교 운영 참여 보장, 교육정책에 대한 참여와 의견 반영 보장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학교는 학칙을 개정하거나 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학생들이 참여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학생들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을 보장받으며 자유롭게 의견을 밝히고 여론을 형성하며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교육청 역시 학생참여위원회 등의 기구를 통해서 교육정책을 결정할 때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

  비록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과 교육과 관련된 분야에만 적용되지만, 이러한 제도는 앞으로 한국 사회에 학생들, 청소년들의 실질적 참여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청소년특별회의, 청소년참여위원회 등 이른바 ‘청소년 참여 기구’가 있어왔지만 실질적으로 청소년들의 의견을 반영하기보다는 일부 모범생들의 스펙 쌓기로나 사용되는 등 처음의 취지와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학생들의 참여를 권리이자 (교육청과 학교 등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는, 작은 교육정책에서부터 시작해서 초중고등학생들, 그리고 청소년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참여할 수 있게 되는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측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학생인권조례가 단순히 학생들에게 인권을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주체적인 활동을 촉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이후, 학칙 개정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 반영을 위해 학생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하도록 한 사례들이 늘고 있다.

  작년 부천 소사고등학교에서는 학칙개정심의위원회 회의에 학생들의 참관을 거부당하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연일 시위를 하면서 회의 참관을 관철시켰고 학생들의 입장이 더 많이 반영된 학칙을 이끌어냈다. 최근 남양주 가운고등학교에서는 학칙 개정을 위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전혀 밟지 않던 학교 측을 상대로 학생회에서 직접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학칙 개정을 하도록 요구하여 학생들의 요구가 반영된 새로운 학칙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인권은 보호와 대립되지 않는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이기 때문에, 인권과 대립되는 보호란 것은 그 사람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보호라는 말이다. 그런 보호는 ‘차별의 부드러운 얼굴’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존중과 참여로 보호주의를 넘어서는 길, 보호와 인권이 화해하는 교육, 학생인권조례로 열어가고자 하는 학교와 사회의 모습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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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4. 25. 01:39

청소년보호법, 도대체 넌 누구냐?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보호주의팀

(난다, 주댕, 개굴, 엠건이 청소년보호법을 함께 공부하고 정리한 글이에요. 짝짝짝~^^)


□ 청소년보호법의 탄생

- 1997년 청소년보호법(청보법)이 제정됨.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고(인터넷을 통한 매체들의 생성, 유통의 범람 가능성) 청소년들이 사회나 문화 속에서 주체로서 한참 등장하기 시작하자,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기에 이름. 



□ 청소년보호법의 주요 내용

○ 핵심 개념들부터 짚어볼까?

청소년: 만 19세 미만의 자(생일이 아니라 연 나이로 계산. 그러니까 20살이 되면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도 청보법 올가미에서 벗어난다는 말쌈~)

청소년 유해약물등: 주류, 담배, 마약류, 환각물질, 중추신경에 작용하여 습관성, 중독성, 내성 등을 유발하여 인체에 유해작용을 미칠 수 있는 약물 등 청소년의 심신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는 약물.

청소년 유해물건: 음란한 행위를 조장하는 성기구 등 청소년의 심신을 심각하게 훼손할 우려가 있는 성관련 물건. 청소년에게 음란성, 포악성, 잔인성, 사행성 등을 조장하는 완구류 등.

청소년 유해업소:

- 출입․고용금지업소: : 청소년의 출입과 고용이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으로 인정되는 업소. 노래방, 사행행위영업, 무도장업, 음성대화 또는 화상대화 매개업, 유해매체나 유해약물 등을 제작, 생산, 유통하는 영업 등

- 고용금지업소: : 숙박업, 이용업, 목용장업, 비디오물소극장업 또는 게임제공업, 유독물영업, 만화대여업 등

• 청소년 통행금지/제한구역

- 청소년에게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는 구역으로 청보법 시행령에 규정을 두고 있음.

- 금지구역은 24시간 통행 금지, 제한구역은 일정시간 동안 통행이 금지되는 구역을 말함. 다만, 친권자, 후견인, 교사 기타 당해 청소년을 보호할 수 있는 보호자를 동반하는 때에는 통행할 수 있음.

• 청소년 유해행위

△성적 접대나 이러한 행위의 알선․매개

△접객 행위

△영리 또는 흥행의 목적으로 음란한 행위를 하게 하는 행위

△영리 또는 흥행의 목적으로 장애기형 등 형상을 공중에게 관람시키는 행위

△청소년에게 구걸을 시키거나 청소년을 이용해 구걸하는 행위

△청소년 학대 행위

△손님을 거리에서 유인하게 하는 행위

△이성혼숙을 하게 하는 등 풍기 문란 영업행위나 그를 목적으로 장소를 제공하는 행위

△다류를 조리․판매하는 업소에서 청소년으로 하여금 영업장을 벗어나 다류를 배달하는 행위를 하게 하거나 이를 조장 또는 묵인하는 행위

청소년 유해매체: 청소년보호위원회 또는 각 심의기관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판단하여 고시한 매체물

청소년유해매체물의 심의기준(법 10조)

• 청소년에게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선정적인 것이거나 음란한 것

• 청소년에게 포악성이나 범죄의 충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

• 성폭력을 포함한 각종 형태의 폭력 행사와 약물의 남용을 자극하거나 미화하는 것

• 청소년의 건전한 인격과 시민의식 형성을 저해하는 반사회적․비윤리적인 것

• 기타 청소년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에 명백히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것

청소년은 성적 욕구를 느끼면 안되나? 범죄 충동은 매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 폭력을 미화하거나 시민의식을 해치는 것은청소년에게만 금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선정성, 폭력성, 반사회성, 비윤리성 등등 이 모든 모호한 기준을 판단하는 건 도대체누구야?



□ 청보법 때문에 나타나는 장면들

• 청소년 유해 매체물 표시, 포장, 판매 금지/ 등급 또는 나이 제한 표시

• 청소년 구입을 제지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한 무인판매장치에 의한 전시 금지

• 방송시간 제한, 방송 제한 조치

• 광고 선전 제한

• 노래방, 찜질방 등 청소년 고용이나 출입 또는 시간 제한

• 청소년 통행금지, 제한구역의 지정

• 사이트 접속, 게임물 등 차단

• 청소년 유해행위 처벌

• 기타 등등

☞ 이 모두가 가능해지려면 불심검문(경찰, 업소 주인 등),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이나 선도위원회 활동(청소년선도 띠를 두른 분들이 준 사법권력으로 기능), 사전심의(자율규제라는 이름으로 청소년 유해성 여부를 미리 판단) 등이 이루어지기 마련.



□ 청소년보호법의 역할

: “너희에겐 보호라는 올가미가 필요해!”


○ 엄청 쫀쫀한 왕 중의 왕 - 청보법

- 청보법은 ▸유해매체, 유해약물, 유해물건 등이 청소년에게 유통되는 것 ▸유해업소에 청소년이 출입․고용되는 것 ▸청소년을 폭력학대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통해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음.

- 왕 중의 왕: 청소년 유해성 여부를 판단할 때, 영비법(영화및비디오의진흥에관한법률) , 음반·비디오물및게임물에관한법률 등 다른 심의 법률에 우선하여 적용. 그만큼 유해성을 판단하는 청소년보호위원회의 힘이 막강.

- 왕 쫀존 시스템: 청보법은 국가에서 가정까지 이어지는 청소년 관리․통제 시스템을 만들어두고 있음. 가정과 사회에는 청소년을 제지, 선도해야 할 책임을 부여하고 있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는 규제 의무를부여하고 있음. 무엇보다 일상 곳곳에 ‘금지된 것’을 탐하는 청소년에 대한 감시의 눈길이 번득이도록 만들었다는 점, 청소년스스로도 이 시선을 의식하고 조심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말 쫀쫀하다고 볼 수 있음.


○ 청소년보호위원회

- 청소년 유해성 여부를 심의, 규제하기 위한 정부기관. 다른 심의기관이 청소년 유해 여부를 심의하지 않을 경우 심의를 요청할 수있는 권한 부여. 유해매체물 관련 단체에 자율 규제를 요구하고, 결정 내용의 확인을 청보위나 각 심의기관에 요청할 수 있도록함. 


○ 청보법은 누구를 겨냥하고 있나?

- 청소년보호법의 1차 규제 대상은 비청소년임.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청소년을 통제하는 효과를 낳게 됨. 처벌되거나 처벌의 위협을받는 것은 비청소년이지만, 이로 인하여 원하는 표현물을 보고 듣고 읽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청소년임. 또한 청소년은 금지된물건, 금지된 장소 등에 접근할 때 비로소 자신이 청소년임을 인식하게 되고 통제와 감시 시선을 의식하면서 자기검열을 하게 됨.게다가 이 법을 위반한 청소년에 대한 불심검문, 보호처분 등이 가능해짐.

예) 청소년 통행금지구역, 그 파생 효과

=> 구역 안에 들어갔을 때 청소년은 사회가 허락한 공간 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청소년임을 알게 됨.

=& gt;청소년 통행을 금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업주들에게도 유리하고 여성의 성을 매수하는 이들에게도 유리함. 청소년의 존재는 가족의존재를,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환기시키는 존재. 따라서 청소년이 그 구역에서 사라질 때 그 구역은 더 자유롭게 성업할 수 있음.

=> 국가가 청소년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이 보이게끔 하는 선전 효과.



□ 청보법에 따라 떠오르는 의문들


1) 청소년의 심신에만 독자적으로 유해한 영향을 주는 매체, 약물 등은 존재하는가?

- 청소년기의 생물학적, 심리적 특성을 일반화할 수 있나. 개인 단위로 접근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사실 사춘기라는 규정조차 거짓으로 꾸며낸 시기는 아닐까?

- 청소년 유해약물로 지정된 것은 (유해성 판단에 대한 세부 논의는 제쳐두고서라도) 청소년에게만 유해한 것은 아닐 것임. 성장기 청소년의 건강에 더 해를 미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차이보다는 유해약물이 건강에 미치는 해악이 갖는 동일성이 더 크다고 봐야 함. 또 어떤 신체적 조건에 놓인 청소년과 어떤 질환에 걸린 비청소년의 동일성이 더 클 수 있음. 그런데 청소년 대상만을 규제하는 것은 청소년들에겐 제대로 된 판단력이 없다는 차별적 인식을 퍼뜨리고 있는 것 아닌가.

-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된 것은 폭력성, 선정성 등이 주로 이유로 제시되는데, 이는 청소년을 우발적, 충동적 범죄를 잘 저지르는 위험한 존재로 은연중에 그려내고 있음. 


2) 유해 매체, 어떻게 규제하는 게 맞나?

- 청소년에게 특별히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매체가 있든 없든, 나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나쁜 매체는 있을 수 있음. 그렇다고그걸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는 것은 괜찮은가? 표현 자체를 금지하고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아니면 표현물에 대한 비판을통해 규제(사회적으로 도태시키는 것)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예) 포르노에 대한 규제 시도

캐 서린 맥키넌(Catharine Mckinnon & 안드리아 드워킨(Andrea Dworkin)은 반포르노 조례 제정운동을 전개.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로 간주하여 포르노업자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조례는 표현의 자유제한이라는 더 큰 해악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성평등의 이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연방법원에 의해 위헌판결을 받음.

그녀들이 제시한 포르노 판단 기준은 아래와 같음.

△ 여성이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성적 대상이나 상품으로 묘사된 경우

△ 여성이 수치나 고통을 즐기는 성적 대상으로 묘사된 경우

△ 여성이 강간당하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된 경우

△ 여성이 묶이거나 신체적으로 상해를 당한 상태에서 성행위의 대상으로 묘사된 경우

△ 여성이 종속되거나 노예의 모습으로 성적 대상으로 묘사된 경우

△ 여성의 신체가 부분화되어 그 부분으로 여성이 축소된 경우

△ 여성이 본래 창녀인 것처럼 묘사된 경우

△ 여성의 성기가 사물이나 동물에 의해 삽입되는 것을 묘사한 경우


☞ 이에 대해 김도현 교수(서강대 법대)는 포르노가 자행하는 ‘해석폭력’에 대하여 즉자적, 물리적 폭력으로 대응하는 현행 청보법은정의롭지도 못하고 실효성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음. 해석폭력에 대해서는 해석폭력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것. 포르노의 문제점에 대한비판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야 하고, 왜 문제인지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왜곡된 재현에 대해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해주는것이야말로 청소년들이 원하는 ‘진정한 보호’일 수 있음. 


3) 청보법은 실제로 청소년을 보호할 수 있는가?

- 청보법은 청소년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보장하지 않음. 청소년들을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경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제해버리는 셈. 그 바람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보지 못했던 청소년들은 또 다른 삶의 계획이 아니라 도피로서의 가출이나 성매매 문화, 상업적 놀이문화를 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정작 ‘보호’가 필요한 곳에 청보법은 없다: 금지된 청소년 유해행위는 청보법이 아니라 다른 법률에 의해서도 충분히 규제 가능. 학교와 가정 등에서 이루어지는 진정으로 유해한행위는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음. 고용 제한 업소를 통해 청소년 일자리를 실질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외려 비공식 노동을증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청보법은 청소년들을 무력화시킨다: 청소년을 계속 약자인 상태로 고정시켜 버리고 비청소년이 대신 보살펴주는 일방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청소년을 취약한 존재로계속 강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함. 필요한 정보, 필요한 자원에 접근하고 성찰하고 자기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기회를제공할 때 청소년의 힘은 커질 수 있음.

- 보호주의에 대한 반대는 모든 ‘보호’, 아니 지원의 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아님. 단, 보호라는 것이 청소년을 약자의 상태로 고정시키는 것에는 반대하는 것. 보호의 철회가 아니라 보호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기때문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보호와는 다른 것이어야 함. 누군가가 보호의 대상으로만 고정될 때 통제가 허용되기 마련. 청보법과보호주의는 청소년의 미성숙함을 전제로만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음.


4) 청보법이 다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될 가능성은 없는가?

- 청보법 자체가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객체화하고 있고 청소년의 욕망과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측면에서,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세대간 연대를 막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미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봐야 함.

- 대개 유해성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폭력성, 음란성, 선정성, 사행성 등을 떠올리지만 ‘반사회성’은 잘 떠올리지 못함. 반사회성은 청소년의 정치성을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

예)1997 년 8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서울민주청년단체협의회의 계간 회원지 <서울청년> 8호를 청소년유해매체물로고시한 적이 있음. 노동자연대가 펴낸 소책자도 반사회성을 이유로 유해매체물로 지정된 적 있음. 이 사례를 볼 때, 청소년유해성을 기준으로 정치사회 관련 출판물에까지 청보법 확대 적용이 가능해질 수 있음.

- 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조갑제는 야간 광화문을 청소년 통해제한구역으로 정하자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음.


5) 비청소년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 청소년 보호를 명분으로 청소년과 성인 모두의 생활세계 전반을 감시하고 처벌할 수 있게 되었음. 생활세계 전반이 감시망 아래놓이게 됨. 비청소년은 청소년 보호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으로 짓눌리고 자기 삶과 인권을 반납하는 일들도 일어남.

- 세대간 분리와 불평등: 성년과 미성년을 기준으로 두 세계를 인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새로운 적대전선이 형성. 청소년의 세계가 순수의 세계인 양 허구화.다양한 문화경험 차단. 또한 청소년은 보호의 객체로, 비청소년은 보호의 의무자로 만듦으로써 평등한 관계를 원천적으로 배제

- 하나의 도덕이 지배하는 사회: 국보법이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함으로써 비로소 개인이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했다면, 청보법은 청소년 유해에 관심을표하고 통제함으로써 비로소 윤리적 시민권이 획득할 수 있도록 함. 사실상 특정 집단의 도덕적 히스테리를 청소년 보호라는 명분으로포장하는 것이기도 함.

-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도록 함 : 자체 ‘가위질’유도.


6) 보호주의를 넘어선 지원은 어떻게?

- 청소년의 사회, 경제적 위치를 고려할 때 그이들에게 독자적으로 필요한 지원은 무엇일까? 보호주의를 넘어서면서도 청소년에게 필요한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 어떤 맥락에서 보호가 동원될 때, 보호주의로 전환될까?

1) 사람이 가진 보편적 욕구를 청소년에게는 인정하지 않을 때

2) 청소년을 너무 특별한 존재로 일반화할 때(일반화는 대상화와 같은 말)

3) 청소년 당사자의 의사가 존중되지 않을 때

4) 청소년에게 기회 자체를 차단할 때

5) 어떤 부족함 또는 어떤 실수를 청소년이란 존재 전체의 무능력, 미숙함으로 곧장 등치시킬 때

6) 구조나 타인의 잘못을 청소년의 미성숙함, 잘못으로 돌려버릴 때


- 보호주의는 채찍뿐 아니라 당근을 제공하고 있기도 함. 그렇다면, 보호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런 ‘당근’을 주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청소년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물어야 하나?

[예 1]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비청소년보다 가볍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음. 훈방이 된다거나 형사처벌을 받는 대신보호처분(사회봉사, 보호관찰, 소년원 송치 등)을 받기도 함. 가벼운 형사처벌이 이루어지는 것은 청소년기에 자유의 박탈이 가져올수 있는 기회의 제한, 심리적 영향 때문. 대신에 형사처분보다 더 사법적 엄격성이 덜 요구되기도 함.

[예 2] 성을 판매하는 10대 여성이 있을 경우, 현재는 그 여성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10대의 성을 매수한 성인만을 처벌하고있음. 보호주의에 기반한 청소년성매매방지특별법이 10대 여성에게는 처벌을 피할 통로를 열어주고 있는 셈.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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