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꿈

성폭력 | 피해자 중심주의 | 2차 가해/피해

공현 2015. 2. 21. 00:23

성폭력 | 피해자 중심주의 | 2차 가해/피해

 

 

이 글은 ‘성폭력’과 그를 둘러싼 몇몇 개념들에 대해서 많은 정보 부족과 오해가 있기에, 이 문제를 정리해두기 위해서 쓴 것이다. 기존의 여러 논의들을 참고하여 쓰지만, 어느 정도는 내 해석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참작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컨대 성폭력 개념에 관해서는 법적인 개념과 운동사회 안에서 쓰이는 개념 사이에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혼용되는 여러 용어들의 정리를 주로 시도했으며, ‘피해자 중심주의’와 같은 복잡한 개념에 대해서는 내가 활동해온 단체들 안에서 논의해온 것이 반영되어 있는 등, 여러 맥락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길 권한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나 투명가방끈 등 내가 활동하는 단체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성폭력

 

․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일종이다. 특히 성적인 표현과 행위에 관련된 자기결정권의 침해이며, 원하지 않는 성적인 표현이나 행위를 하거나 당하지 않을 소극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려고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은 보통 성폭력으로 보지 않는다.) 이는 성적 접촉이나 성관계를 의도한 접근뿐만 아니라, 성의 표현 및 행위에 관련된 비난과 공격 등도 일부 포함한다. (예 : 상대 여성을 위축시키고 위협하기 위한 의도나 맥락을 가지고 성적 표현을 하는 것)

 

․ 남성중심적 사회 구조 속에서 성폭력의 피해자는 높은 비율로 여성이다. 바꿔 말하면, 여성은 남성보다 성폭력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가해-피해자의 수적 비율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와 해석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외형상 동일한 사건처럼 보이더라도 남성이 당했을 때와 여성이 당했을 때 그 의미는 다를 수 있으며, 연애 각본이나 성역할 이데올로기 등은 성폭력을 조장한다. 물론 남성 역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여성 역시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 성폭력의 하위 범주로서, 직접적 강제력이나 폭행, 위협에 의한 강간, 신체접촉 등을 ‘성폭행’이라 부른다. 성폭력과 혼동하지 말 것. ‘성폭행’은 대체로 강간을 가리킬 때만 쓰이며 국어사전에도 강간의 다른 말로 실리기도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성기 결합 성교를 중심으로 둔 개념으로 좀 더 넓혀서 성적인 신체접촉 등을 포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성폭행’과 일부 교집합을 가지는 개념으로서, 성적 수치심 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치 않는 신체접촉이나 성적 언행을 가리켜 ‘성추행’이라고도 한다. 성폭력 중에서도, 지위 등을 이용하여 성적 수치심이나 굴욕감을 주는 언행이나 원치 않는 성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성희롱’이라고 부른다.(성희롱은 본래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이라는 의미였으며, 이는 직장에서의 지위 등 권력관계가 개입하여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밖에 다른 유형의 언어적 성폭력 등이 있을 수 있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성폭력-성폭행-성추행-성희롱은 행위의 강도나 악질성에 따른 위계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의 경중은 논할 수 있으나 이는 피해자의 경험과 사건의 내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할 문제이다.

 

․ 물리적인 강제력, 폭력, 언어폭력, 협박 등이 동원되지 않더라도 성폭력은 성립할 수 있다. 가령 형법에서도 ‘추행 목적의 유인’을 성폭력범죄에 포함시키고 있다.(물론 형법상 ‘유인’은 이후 사실적 지배관계에 두는 것을 포함하기는 한다.) 강제력에 의하지 않더라도 거짓말이나 속임수에 의해서 원하지 않는 형태의 성적 관계를 맺도록 한 경우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점에서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피임과 콘돔 사용을 요구했는데 남성이 콘돔을 썼다고 거짓말을 하고 사용하지 않은 채 성관계를 한 경우도 성폭력일 수 있다.)

 

․ 넓은 의미에서,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범주가 존재한다. 예컨대 과거 이화여대 축제에 고려대 남학생들이 집단 난입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반복되자 이화여대 학생들은 이를 남성에 의한 집단적인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당시 가해자들의 언행(“이대생은 우리 것”) 중에는 성폭력인 것이 있으나, 행위 전체를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당시 제기된 남성성과 여성성 구도 위에서 남성 집단이 여성 집단의 공간과 행사를 침해한 것이라는 해석에 따른다면, 이를 젠더 관계에 바탕을 둔, 성폭력을 포함하고 있는 ‘성-폭력’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 등을 포함하며, 여러 가지 성적 구조와 배경에 기반을 두고 일어나는 폭력 전반을 가리킨다.

 

․ 성폭력은 드물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며, 충분히 일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고, 가해자의 인성이나 의도와도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다. 인간관계는 다양한 폭력의 가능성을 안고 이루어지며, 성적으로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는 더더욱 쉽게 성폭력이 일어난다. 우리는 단체 안에서 형법상 성폭력범죄나 강간 등에 비하면 훨씬 더 넓은 범주로 성폭력을 규정한다. 이는 성폭력이 범죄이든 아니든, 법적 문제를 떠나서 우리가 스스로 규율하고 고쳐나갈 사회적 문제이며 관계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해자 역시 성폭력 가해자라는 판단을 자신에 대한 심각한 인격적 비난이나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 역시 사건의 원인을 가해자의 인성만으로 돌리거나 필요 이상으로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누구나 성폭력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 피해자 중심주의

 

․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사건을 해석하고 해결함에 있어서, 특히 여성인 피해자의 관점과 경험을 중시할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 사건을 대할 때 남성중심적인 통념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으며, 사건이 성폭력인지 아닌지 해석하는 데도 남성 또는 가해자의 관점이 많이 반영되어왔다. (예 : “여자가 모텔에 따라 들어갔으니까 성관계에 동의한 거 아냐?”, “어깨에 기댄 것 정도가 왜 성폭력이야?”) 피해자 중심주의는 이런 현실 속에서 성폭력을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한 장치이다.

 

․ 피해자 중심주의는 사건 해석에 있어서 가해자의 의도보다는 피해자의 경험과 관점을 중심에 둔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우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등의 언행을 막으며, 피해자의 피해 호소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해석하려는 노력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물론 피해자의 주관을 절대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주관 - 경험과 감정과 해석에 대해 충분히 질문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주관에 객관적인 성폭력 개념을 적용시켜 봤을 때 그 사건을 성폭력이라고 할 만한지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설령 성폭력이 아니더라도 다른 형태의 성차별이나 반인권적 행위일 수 있으므로,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서 충분한 이해와 논의가 필요하다.)

 

․ 피해자 중심주의는 종종 사실관계의 확인 없이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의 말만을 믿는다는 것으로 오해를 받는다. 현실에서는 성폭력 사건에서 최대의 어려움은 사실관계의 확인일 때가 많아서 특히 더 논란이 된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사실관계의 확인을 하지 않거나,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관계 파악은 당사자나 목격자들의 진술이나 기타 증거들을 살펴서 판단한다. 애초에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피해자’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사실관계 확인 과정에서 피해자가 부당하게 비난받거나 위축되지 않도록 유념하며, 또한 사실관계 확인 후에 그 사실의 맥락과 의미를 해석할 때 적용된다. 동일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해석은 여성-피해자의 입장이 남성-가해자의 입장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 : 한 쪽에서는 애정의 표현인 것이 당한 입장에서는 폭력이 될 수 있다.)

 

․ 사건 해석에 관한 ‘피해자 중심주의’ 외에도, 성폭력에 관련해서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당하거나 조사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고 사건 해결에서 피해자의 치유에 초점을 맞추는 피해자를 중심에 둔 접근방법 등의 개념이 존재한다.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성폭력 사건뿐만 아니라, 지배적인 차별 구조가 개입되어 일어난 반인권적 행위 문제에서는 마찬가지로 피해자 중심주의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반 인권적 행위 내규 <◎ 적용과 범위> 중 4항 “반인권적 행위 중에서 성폭력과 같이 이 사회의 반인권적이고 지배적인 인식과 구조가 뿌리깊게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대해선, 피해자의 ‘주관적 피해 인식’에 기반한 사건 해결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를 따른다.”]

 

 

◎ 2차 가해/피해

 

․ 2차 피해는 성폭력 피해자가 사건 해결 과정에서 모욕, 비난, 책임 전가, 괴롭힘이나 불이익, 신상정보 공개, 훼방 등을 당하여 피해를 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피해를 주는 것을 2차 가해라고 부른다. 2차 가해는 피해자에 대한 인권침해일 뿐만 아니라, 본 사건에 대한 해결을 방해하고 피해자 또는 잠재적 피해자들을 위축시키며, 사건을 호소하고 해결 절차를 밟는 것을 어렵게 한다.

 

․ 성폭력에서 2차 가해의 역사는 매우 뿌리 깊다. 특히 피해를 입은 여성이 먼저 유혹한 것 아니냐고 하거나, 여성이 유별나게 예민해서 호들갑이라고 하거나, 피해를 입은 여성을 더럽혀진 것처럼 비난하는 등의 일은 비일비재하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은 명백한 2차 가해에 해당한다. 또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을 근거 없이 거짓말쟁이로 단정짓거나, 별다른 사실 근거 없이 가해자를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옹호하고 피해 호소를 무조건 불신하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2차 가해로 본다. 그리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거나 축소시키려는 목적으로 해결 절차를 훼방놓는 것을 2차 가해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 2차 가해는 본 사건의 가해자에 의해 일어나기도 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조사자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제3자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 사실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확인하는 것이나, 성폭력 여부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2차 가해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태를 띠고 관계없는 피해 여성의 평소 행실을 논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되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그 내용과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다.(예 : 사실관계 조사에서 누락된 중요한 문제가 있고 조사가 불충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2차 가해가 아니겠지만, 썸 타는 사이에 기습키스를 한 것이 무슨 성폭력이냐 피해자가 유달리 예민한 것이라고 하면 상황에 따라선 2차 가해일 수 있다.) 또한 조사 과정에서 역시 의식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피해자 책임론 등을 내포한 질문 또는 발언을 하여 2차 가해를 하지는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