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편 https://gonghyun.tistory.com/1274
★ 식사
제네바에 오는 걸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한 건 식사였다. 물가가 아주 비싸다는 이야길 여럿에게 들었는데... 체류 예산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된 요소였다. 게다가 말도 잘 안 통하는데 레스토랑에서 주문 같은 걸 잘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고. 그런 주제에 나는 또 맛있는 건 찾아 먹어야 성에 차는 인간이니...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하루 식비는 30-40CHF 정도 선(한국 돈으로 3만 6천원~5만원)에서 해결이 되었다. 그것도 같이 간 사람들에게 좀 사 주거나 적당히 괜찮은 걸 먹으면서 그랬고, 더 아끼려고 했다면 아마 가능했을 것이다. 처음엔 한 끼당 3만원까지도 각오했었는데 그보다는 덜했다.
식비를 아끼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건 역시 숙소 조식. 조식이 포함된 걸로 숙박했기 때문에 매일 아침 숙소 1층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먹을 수 있었는데, 식빵, 크로와상, 바게트, 치즈들, 버터, 잼, 과일, 시리얼, 쥬스, 커피를 맘껏 먹을 수 있었다. 거기서 배불리 먹고 나서니까 점심 등은 좀 간소하게 먹어도 됐다.
(숙소 조식)
또한 커피도 대체로 아침에 여기에서 자동 원두커피 기계로 내려서 텀블러에 담아서 들고 다니며 마셔서 돈이 들지 않았다. 본심의 진행 중에 팔레 윌송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한 번 사 마셨는데, 이때 2.1CHF이 들었다.(0.1CHF는 종이컵 값) 근데 그 한국 편의점들에 있는 그런 자동원두커피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맛은 없었다. -_-
두 번째 요소는 '카페테리아'였다. 보통의 식당이 아니라 UN이나 기관 등에 딸려 있는 카페테리아... 한국으로 치면 구내 식당? 그런 곳들은 비교적 가격이 저렴했다. 예를 들어, 팔레 윌송 1층 카페테리아에서 베지테리안 누들과 감자튀김을 먹으니 13.5CHF였다. 보통 식당 메뉴판을 보면 음식 하나에 18-20CHF 정도는 되는데 말이다.
(팔레 윌송 카페테리아에서 먹은 베지테리안 누들 메뉴와 감자튀김. 제네바 식당들에서는 재료가 뭔지 대체로 다 메뉴판에 적어 놓고, 카페테리아에도 베지테리안 메뉴들이 한두 개씩 있어서 편했다.)
더 자세히 제네바에서의 식생활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월요일 점심에는 점심으로 다른 시민단체 사람들과 같이 피자를 사서 먹으며 회의를 했다. 피자와 음료 등을 적당히 나눠서 사다 보니 내가 피자 1판 값을 냈는데, 피자 1판이 30CHF였다. 그런데 피자도 1판으로 2명이 배불리, 조금 적게 먹는다면 3명도 먹을 수 있으니 꽤 저렴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채 피자로 주문했더니 가지와 버섯 등이 토핑으로 올라갔다. 피자는 매우 맛있는 편. 한국에서도 나폴리 정통 피자라고 하는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피자의 90% 정도 수준의 맛이었다.)
월요일 저녁에는 한국에서 갖고 온 컵라면을 먹었다. 끓는 물은... 숙소 1층에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그 자판기에서 뜨거운 물(Hot water)을 1CHF에 팔았다. ㅎ... 그거 2컵 사서 넣으니 대충 컵라면 하나 채울 수 있더라. 그거에다 마트에서 사온 6.6CHF짜리 '밥샌드위치'(재료 구성을 보면 참치주먹밥인데, 생긴 게 샌드위치처럼 삼각형이다.)를 먹었다. 합쳐서 8.6CHF로 먹은 셈이다.
화요일 점심은 팔레 윌송 카페테리아에서 먹었고, 저녁은 좀 돈을 써서... 외식을 결의한 사람들 대여섯 명이 꼬나방 역 근처 베트남 음식점에 갔다. 거기에서 두부 요리 19CHF짜리와 사이드로 주문할 수 있는 볶음면(팟타이 같은 거였다) 5CHF짜리를 해서 24CHF어치를 먹었다. 맥주도 한 잔 했는데, 이건 월요일에 피자 값을 나에게 빚진 다른 분이 사주셨다.
수요일 점심은 나시옹 근처에서, 굿네이버스 제네바협력사무소 사람이 소개해 준, 어떤 공공기관 1층 카페테리아에서도 샐러드 등 해서 2개 메뉴를 선택하여 18CHF으로 먹었다. 저녁은 월요일과 같은 피자가게에서, 돈을 모아서 피자로. 내가 부담한 돈은 20CHF.
(카페테리아에서 먹은 두부와 퀴노아 등이 들어간 베지테리안 메뉴. 왼쪽엔 피자라고 생각하고 주문했는데 뭔가 피자랑 달랐던... 치즈와 야채 등이 들어간 요리)
목요일 점심은 일정이 모두 다 끝난 뒤 숙소에서 짐을 찾아 나와서 숙소 앞 영화관-쇼핑몰에 딸려 있는 푸드코트에서 먹었다. 롤 등을 먹었는데 24CHF가 나왔다. ㅎㄷㄷ
저녁은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먹었는데, 공항 안쪽의 레스토랑은 찾아보니 가격이 매우 높다고 했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뢰스티 같은 스위스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는데 발품을 팔아봤지만 적당한 식당을 찾지 못했다. (보안검색대를 지나서 출국장엔 혹시 좀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하로 통하는 계단 바로 위에 있는 피자리아...(이름이 Al Volo Pizzeria 였던가?)에서 오믈렛을 먹었다. 가격은 19CHF. 화이트와인 1잔은 곁들였는데 이건 4CHF 정도 했다.
내가 마트에서 주먹밥을 사 먹었듯이, 마트에서 빵과 치즈, 롤, 그리고 과일 등을 사서 2-3명이 같이 먹으면 1인당 10CHF 이내에서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듯했다. 실제로 월요일 점심-저녁에 일행 중 다른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먹기도 했고.
★ 물가와 쇼핑
이미 적었듯이 식당 등에서 물가는 최소 15CHF, 제대로 배부르게 먹으려면 20-30CHF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트(슈퍼마켓)에서는 어떨까? 일단 비교적 저렴하다는 인상이었다. 예를 들어 생수가 숙소 자판기에서는 500ml짜리를 2CHF에 팔았는데, 마트에서는 2L짜리 생수 6개 묶음을 4CHF 정도에 파는 식이었다. 허허... 그리고 큰 환타 1병이 2CHF 정도였으니 한국과 큰 차이가 없는 셈. 과일이나 빵도 그렇게 비싸진 않았다.
스위스가 한국보다 임금 수준이 많이 높고, 물건들의 물가는 그렇게 비싸지 않으니, 스위스 내국인으로 살기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임금도 높고 노동력이 직접 투입되는 종류의 일(레스토랑이나 호텔 등)의 가격이 비싼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19일 목요일에 UN아동권리위원회 심의 일정을 모두 마친 뒤 마트에서 선물 쇼핑을 했다. 선물용 초콜렛 큰 거 6개 정도, 치즈 조금, 그리고 샤슬리 품종 화이트와인 1병 등을 샀는데도 총 60CHF 정도밖에 안 됐다. 마트 물가는 확실히 식당 등에서 겪던 것보다 싸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 그런데 공항에 가 보니 공항 면세점 등에서 초콜렛은 아주 많이 팔고 있었고, 초콜렛은 그냥 공항 면세점이나 마트에서 살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아 참, 그리고 편의점이 없는 것 같았다. 주유소 같은 데 딸려 있는 슈퍼마켓이 외관상 편의점과 비슷해 보이긴 했지만 한국에 널려 있는 24시편의점과는 확실히 다른 듯했다. COOP이나 MIGROS 같은 마트는 공항이나 기차역이나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지만 편의점이랄 만한 곳은 없었고, 끓는 물이나 전자레인지 이용을 기대했던 나에겐 아쉬운 일이었다. 주먹밥이나 롤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을 수 있었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은데. (결국 갖고 갔던 햇반 하나는 그대로 다시 들고 돌아왔다. 전자레인지 쓸 곳이 마땅치 않아서. 카페테리아들에는 전자레인지가 있기는 했다. 사전에 몰라서 못 들고 갔지만.)
★ UN아동권리위원회 심의 대응 : 위원들 미팅 등
이제 본격적으로 UN아동권리위원회 심의 대응에 대한 이야길 해 보자면...
일단 국제아동인권센터 등에서 위원들과의 소통 등을 많이 맡아 주셨기 때문에 아주 상세한 절차 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는 점을 말해 두고, 실제로 내가 한 것들 등을 위주로 적겠다.
- 위원들에게 전달할 로비 문서 작성 : 이미 제출한 민간보고서나 UN아동권리위 과거 권고, 쟁점목록 등을 참고하여 위원들에게 강조해서 전하고 싶은 이슈나 이런 질문+권고를 해 달라는 요청을 정리해서 사전에 작성하고, 한데 모아서 위원들 만나기 며칠 전에 메일로 보내 두었다.
- 위원들과 미팅 : 아동권리위원회 위원들 중에서 3명인가 4명인가가 대한민국 심의를 주로 담당하는 TF팀이다. 이들이 대한민국 보고서 등 관련 자료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우선적으로 질문 기회 등을 가진다. 나머지 위원들은 자료를 다 숙지하지는 않는 것 같고, 원한다면 심의에 참석하는 식이다.
이번에 제네바로 간 시민단체 사람들은 우선 TF팀과의 미팅 일정을 먼저 잡았고, TF팀 외의 위원들에게도 시간 되면 만나달라고 이메일을 보냈다. 이를 위해 아동권리위원회 위원들의 전공이나 이력, 과거 다른 국가 심의에서 주로 무슨 주제에 대해 관심 갖고 질문하는지 등을 사전 조사했고, 그 주제를 위주로 만나서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했다. 이번에는 18일 오전에 TF팀 위원 2명과 미팅을 가졌고, 17일에 필립 쟈페, 앤 스켈턴 위원과도 미팅을 했다. 필립 쟈페 위원은 체벌, 아동학대, 아동참여 등에 관심이 많은 걸로 파악돼서 그 주제로 이야기했고 앤 스켈턴 위원은 소년사법제도 등에 관심이 많은 걸로 파악돼서 그 주제로 이야기했다. 그 밖에도 특정 이슈에 대한 특별보고관들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TF팀 위원 2명과 미팅)
(필립 쟈페 위원과 미팅)
미팅 요청을 하는 이메일 등 연락을 하는 데는 딱히 자격 조건은 없다고 한다. 다만 만나 줄지 말지는 위원들 맘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뢰도가 있거나 한국 시민단체를 좀 대표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야 잘 만나 줄 듯싶다. UN아동권리위원들은 대체로 NGO에 우호적인 태도였다. 또한 사전심의 등에서 접한 아동 당사자 이야기를 중요하게 기억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 위원들을 만나는 일정이 주로 팔레 윌송에서 진행됐는데, 팔레 윌송이나 팔레 나시옹이나 들어가려면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사전에 온라인으로 PASS 발급을 신청했고 UN본부에서 수령했다. 근데 나는 신청할 때 현지 지형을 잘 몰라서 팔레 윌송에서 발급받는다고 신청했는데, 16일에 UN아동권리위원회 30주년 행사를 보려고 팔레 나시옹에 가서 PASS를 달라고 했더니 "당신은 윌송에서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복으로 발급 못 해 줍니다."라고 해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좀 우겨서 어찌저찌 PASS를 받았다. 어디서 PASS를 발급받는지 등을 잘 확인해 두도록 하자.
(팔레 나시옹에서 진행된 UN아동권리위원회 30주년 행사. 빔으로 트위터 해시태그 실시간 수집해서 띄워 주길래 나도 열심히 써서 청소년 참정권 등의 메시지를 올라가게 만들었다. ㅎㅎ)
(나시옹의 UN본부)
(팔레 윌송. 아래는 와이파이)
(팔레 윌송 앞에는 호수가 펼쳐져 있어서 전망이 아주 좋다.)
- 현지에서 대응하러 온 시민사회단체들끼리 만나서 누가 위원들 미팅에서 어떻게 이야기할지 등을 조율했는데, 사실 이건 오기 전에 미리미리 했으면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빠듯한 일정 속에서 하려니... 그러나 사전에 일정 맞추고 회의하는 그게 잘 안 됐던 것이라 뭐, 누군가의 잘못은 아니겠고... ㅠㅠ
자료 같은 경우도 잘 수합이 안 되어서 현장에서 새로 작성하고 가공하고 그런 것이 많았고, 전달하는 일 등을 맡은 활동가들이 매우 고생하셨다. 앞으론 미리미리 준비를 잘해서 가면 좋을 텐데.
현지에서 거의 매일같이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이 회의를 했고, 위원들도 만나고 회의도 하고 매일같이 하려니 매우 피곤한 일정이었다. 회의 장소는 주로 굿네이버스 사무실, CAGI 사무실 등을 빌려서 진행했다. 급할 땐 UN본부의 카페테리아나 소파에 모여 앉아서 하기도...
(많은 회의를 한...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등이 있는 건물 입구. 팔레 나시옹 근처에 있다.)
★ UN아동권리위원회 심의 대응 : 본 심의 현장
(팔레 윌송 앞에서 19일 오전 심의에 가려고 입장을 기다리는 중. 10시부터 심의 시작인데 NGO는 9시 30분부터 입장 가능하다고 해서 어이없어 하던 중이다. 정부 대표단은 일찍 들여보내줬기 때문...)
18일 오후 3시-6시, 19일 오전 10시-오후 1시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본 심의가 진행됐다. 심의는 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위원들이 한국 정부 대표단에게 질의와 지적을 하고 이에 대해 한국 정부 대표단이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미처 답변을 다하지 못한 내용은 심의 종료 후 48시간 내에 서면으로 답변을 제출해야 한다. 한국어 동시통역이 제공된다.
본 심의 일정 중 시민사회단체들은 현장에 앉아서 (1) 속기 (2) (한국에서 모니터링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위원들에게 이런 내용 말해달라, 한국 정부의 이런 답변은 거짓이다, 같은 메시지 전달하기 를 주로 한다. 속기와 더불어 영어-한국어 통역 내용 중 잘못된 통역이나 왜곡을 잡아내는 일도 했다. 나는 속기를 맡아서 했고, 본 심의 종료 후엔 속기 내용을 바탕으로 언론에 배포할 보도자료 초안을 작성했다.
(심의가 시작되기 직전)
위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대체로 2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직접 위원한테 가서 말하는 것이다. 시민사회단체들도 본 심의가 진행되는 회의장에 함께 앉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중간에 가서 말을 거는 건 비교적 쉽다. 말로 다 못 하겠으면 종이에 관련 사항을 적어서 주면서 말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위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다. 이건 사전에 미팅을 할 때 위원들에게 심의 중에 이메일을 보내도 되는지 물어봐서 오케이 한 위원들에게 쓴 방법이었다. 위원들이 노트북을 펼쳐 놓고 심의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메일을 보내면 확인을 하면서 심의에 대응하게 하는 게 가능하다. 이번 심의 때는 예를 들어 한국 정부가 이야기하는 '간접체벌'이 도대체 무슨 개념인지, 그래서 한국 학교에서 체벌이 금지됐단 건지 안 됐단 건지 헷갈려하는 위원에게 간접사진 관련 사진 자료와 함께 설명을 보냈다. 다만 이건 사전에 양해를 구한 위원에게만 쓸 수 있는 방법이다.
그 밖에도 Child Rights Connect라는 현지 단체가 위원들과 연결 등을 주선해주기도 하고 메시지를 대신 전해준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그 단체에서 대응 방법과 절차 등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긴 했지만, 그래도 현장에서는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실제로는 이 단체를 거쳐서 위원에게 전달하지는 않았다.
질의를 하고 한국 정부 대표단이 답변을 하는 형식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느낌엔 위원들이 정부 대표단에게 의미 있는 답변을 바로 받는 걸 기대하고 질의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들이 관심 가지는 이슈, 문제의식이 어떤 건지를 전달하고 한국 정부에게 경각심을 가지라고 촉구하는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중간중간에 답변을 추궁하기도 했고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리고 한국 정부 대표단 답변 역시 꽤나 성의가 없어서 기존에 제출했던 보고서와 답변서를 그대로 읽기도 했고,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을 안 내놓고 동문서답 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본 심의에서 질의가 나온 이슈는 대체로 최종 견해 중에도 언급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 영어 능력이 필요해
이번에 간 일행들이 모두 외국어 능력이 갖춰진 사람들만 있던 건 아니었고 나를 포함해서 영어로 대화를 거의 못 하는 사람들도 2-3명 있긴 했다. 그래서 영어를 좀 더 잘하는 사람들에게 순차 통역을 부탁하는 식으로 위원들에게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쟈페 위원 미팅 때 아동 참여에 대해 내가 더듬더듬 영어로 말을 직접 준비해서 해 봤지만... 미리 준비했음에도 너무 버벅거려서 역시 난 하지 말아야겠단 자괴감만 들었다.)
이번엔 그렇게 하긴 했지만 역시 이런 대응을 하러 외국에 가려면, 영어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 가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영어로 설명을 했다면 예를 들어 10문장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을, 한국어로 말하고 다른 사람이 영어로 통역을 해 주려 하다 보니까, 아무리 사전에 내용 공유도 하고 준비도 했어도 6문장 정도밖에 말을 못 전한다. 그러나 위원들 미팅은 보통 1시간 이내로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지고, 전달할 이슈와 내용은 너무 많기만 하다. 그러니 영어로 직접 말을 못 해서 낭비된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또한 위원들과 미팅 때는 따로 통역이 제공되지 않으므로 위원들이 하는 영어를 직접 듣고 이해해야만 한다. 나는 한 명의 위원과만 만날 때는 집중하니까 어찌어찌 내용 파악이 됐지만, 여러 위원들을 만나고 좀 넓은 데서 소리가 조금만 울려서 잘 안 들리게 되면 50% 정도밖에 내용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만 했다.
UN아동권리위원회 같은 이런 UN인권기구 심의 대응을 가려면, 해당 이슈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야 하고, 또 그 전에 작성한 민간보고서나 쟁점목록, UN인권기구-체제의 성격 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영어 실력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마지막으로... 같이 간 일행들 중 몇몇 분들은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이슈에 대해서 위원들이 질의를 하고 최종 견해에 반영되게 하는 것에 매우 열심이셨다. 그에 비해서 나는... 물론 내가 이야기하는 이슈가 중요하고 위원들이 알고 지적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위원들에게 하나하나 다 전하는 데 열성적이지는 않았다.(내가 전달하려고 준비해 간 이슈는 참정권, 표현-집회-결사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종교의 자유 + 학생인권 등이었다.)
왜냐면... 설령 UN아동권리위원회 권고가 나온다고 해도 한국 정부가 그대로 따르지도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결국 권고가 나오는 것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운동을 잘 만들어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러 이슈들이 다 중요한데, 당연히 필요하고 중요한 이야기는 전달하려 노력했지만, 딱 내 이슈를 좀 더 강조하려고 애쓰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막연하게... 활동가에게는 이런 국제기구가 운동에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레퍼런스일 뿐이지만, 변호사/지원자 등은 더 이런 국제기구에서의 한마디에 더 큰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워 보았다. UN아동권리위원회 대응 등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자세와 사고방식의 차이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