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6. 2. 9. 16:15



[성명] 누리과정 예산 빵꾸나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 무상교육은 인권이다! 정부는 교육재정을 책임지고 마련하라!


박근혜 정부의 억지 속에 누리과정(만3~5세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공통으로 운영하는 교육과정) 예산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무상보육 할 테니 낳아만 달라"라고 했던 대선후보 시절의 공약은 온데간데없고,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지 않은 교육청에는 수사에 감사까지 해가며 압박하고 있다. 막무가내로 교육청에게 예산 돌려막기(?)까지 종용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제대로 교육권을 보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는 한지 의심스럽다. 정부의 이런 태도 탓에 교육재정과 교육자치 전반이 위협을 받고 있으며 당장 청소년들의 권리에도 악영향이 예상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미 누리과정 예산을 교육청들에 다 지원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봐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올해 정부가 교육청들에 분배한 '교부금'은 누리과정이 확대 시행되기 이전과 비교해서 거의 차이가 없다. 법령만 바꿔서 '이 중에 누리과정에 쓰라'고 적어놨을 뿐, 제대로 예산을 지원한 것이 아니다. 정부는 교육청들에 빚이라도 내라고 하고 있지만, 이미 지난 몇 년간 그런 미봉책으로 버텨오다가 한계에 이른 상황이다. 지역 교육청들을 대책도 없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할 셈인가?

교육청들 중에는 이미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한 곳들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편성한 5곳 중 4곳에서는 대신 방과후 학교 지원 등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지 못했고, 저소득층 지원 예산이나 인건비를 편성하지 못한 곳도 있다. '빵꾸난' 누리과정 예산을 무리해서 마련하다보니 다른 예산들에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교육재정이 부실해지고 청소년들의 교육권 상황이 열악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교육청들이 무리하게 빚을 낸다면 이런 위험성은 더 커질 것이다.

물론 중앙정부와 지역정부(교육청 등)는 누리과정을 포함해서 청소년들의 교육권을 보장할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다. 다만, 현재 제도상 재정에 대한 책임은 중앙정부가 더 많이 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더군다나 박근혜 정부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대로 된 소통과 협의도 없이 계속해서 막무가내로 교육청을 탓하고 윽박지르고만 있다. 박근혜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고 누리과정 등이 잘 시행되게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더 문제가 생기게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정부가 예산에 관해 기초적인 산수도 할 줄 모르고 당장의 문제만 떠넘기려고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악의를 가지고서 교육청들을 괴롭히고 교육자치를 약화시키기 위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누리과정을 비롯한 각종 공교육은 우리의 권리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공공의 재정 확보가 필수이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은 청소년(어린이)의 양육과 교육에 대해 가능한 한 광범위한 지원이 부여되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으며, 초등교육을 비롯하여 교육 전반을 무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모든 청소년들이 차별 없이 교육권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또한 누리과정을 포함하여 교육에 드는 비용을 공적으로 부담함으로써 부모 등 친권자·보호자들은 양육의 부담을 덜 수 있다. 청소년의 교육과 삶이 친권자 개인의 경제력과 의지에 달려 있을수록 청소년은 그들에게 삶을 의존할 수밖에 없고, 친권자 역시 자신이 청소년을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하고 희생한다고 느낄수록 청소년들을 더 지배하려 들 위험성이 높다. 그러므로 양육과 교육을 사회가 책임지는 것은 친권자와 청소년 사이의 더 건강하고 평등한 관계를 위해서도 필수 조건이다. 

정부는 먼저 이러한 권리 보장의 의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명확히 숙지하고, 진지하게 어떻게 예산을 편성하고 어떻게 무상보육‧무상교육을 실시해나갈지 논의하고 계획해야 한다. 선거 때는 표를 얻기 위해 그럴 듯한 공약을 걸고, 당선 후에 정부는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은 매우 우려스러우며, 중요한 인권 문제를 왜곡시키는 행태이다. 이 때문에 어린이집·유치원·학교 등의 노동자들, 친권자들, 그리고 청소년들이 불이익을 입고 불안을 느끼고 있다. 지금이라도 남탓하기를 중단하고 누리과정 예산 등 교육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할 책임이 박근혜 정부에게 있다.

 - 정부는 교육청들에 대한 부당한 압박을 중단하고 누리과정 예산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소통과 협의에 나서라!
 - 정부는 무상보육‧무상교육 확대 등 보편적 교육권 보장을 위해 충분한 교육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라!


2016년 2월 9일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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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15. 7. 30. 02:22
대학거부 그 후대학거부 그 후 - 10점
한지혜 외 지음/교육공동체벗
『대학거부, 그 후』 : 행복하냐고 묻기 전에

나 역시 대학거부선언에 참여했던 대학거부자이다. "대학거부선언"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대학을 거부한 이유였고, 두 번째로 많이 들었던 질문은 부모/가족은 어떻게 반응했는지였으며, 세 번째로 많이 들었던 질문이 바로 이거였다.

"대학거부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 혹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으냐"

사람들은 사회에서 정해놓은, 주류의 길을 벗어나겠다고, 아니 단지 벗어나는 게 아니라 비판하고 거부하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에게 다들 묻는다. 당신들은 과연 그렇게 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냐고...

그 질문의 의도는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너네가 잘 살 수 있겠냐는 비웃음과 비아냥의 의미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정말 그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기대감을 갖고 묻는 것이리라. 하지만 어떤 의도이든 간에 번지수가 틀렸다. 대학거부선언은 "난 대학 졸업장 없이도 행복하게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라는 자신감의 표출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학력을, 출신 학교로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이 대학 입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잘못되었으며 우리가 거부하고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대학거부'를 외치는 일이다. 그러므로 대학거부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사회가 대학졸업장 없이는 차별을 받고, 불이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회라는 것을 말이다.


대학거부자들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것은 여전히 문제를 그들 개인의 몫으로만 돌릴 뿐이다. 그들에게 대학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라고 은연중에 요구하는 것이다. 대학거부선언이 담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잘라내는 태도이며, 거부선언을 한 입장에서는 벽 앞에 가로막히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대학거부선언은 '말걸기'다. 함께 바꾸자는.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느냐"는 질문은 그 말걸기에 대한 차가운 거절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포장도 낭만도 하나 없이

그들은 대학거부자들에게 행복하냐고 묻지 말라고 한다. 사실, 그럼 대학을 다니고 졸업하는 이들은 행복한지부터 물어야 공정할 것이다. 『대학거부, 그 후』는 대학거부 이후의 삶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한다. 거부자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또 겪어보니 그 이상으로 단단한 사회의 벽에 부딪히며 살아나간다. 고민은 더 많아지고 불안은 더 커진다.

많은 고졸 성공담이나 고졸 청년들의 씩씩한 삶을 주제로 한 책들은 대개 대학을 안 가도 잘 사는, 혹은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사회적 차별과 불안한 조건보다는, 그 속에서도 살아나가는 건강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사람들은 어쨌건 이겨내고 살아나갈 테니.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력, 학벌 차별 속에서, 대학 중심의 사회 속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한 기록과 고백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는, 예뻐 보이려는 포장이 없다. 차라리 '진솔해 보이려고 하는' 포장이 있을지언정 말이다. 대학거부에 대한 낭만적 태도도 없다. 읽다보면, 뭐랄까, '건조한 슬픔' 같은 게 느껴진다.


『대학거부, 그 후』를 읽고, '역시 대학거부를 하면 힘들게 사는구나' 하고 동정하는 것은 부적절한 반응일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더라도, 필자들이 대학거부자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함께하자고 제안하는 것 같다. 여럿이 함께할 때,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행복하냐고 묻기 전에, 행복해져 보라고 요구하기 전에, 당신은 대학거부선언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지부터 답해야 한다. 먼저 질문을 던진 쪽은, 자기 삶을 걸고 거부선언을 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http://gonghyun.tistory.com2015-07-29T17:22:240.31010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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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 9. 20. 16:33





http://blog.naver.com/communebut/20138034384
<오늘의교육> 7,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후일담인데...
7월 중순이었나- 평등교육학부모회 사람을 만났는데 제가 범국민교육연대에 저 메일 보낸 거 가지고 안에서 말이 많다고 하더군요. 대충 뭐 저걸 공개하고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느니 어쩌니 하는??
그래서 웃으며 이미 <오늘의교육> 원고에 넣어버려서 공개했는데, 라고 했었다지요. >_<
내가 저거 공개 안 하거나 부끄러워 할 줄 알았나;;
에휴. 부끄러워 해야 할 게 누구인지.


p.s. 다행히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는 최종 성사되었습니다! ^^ 이 글은 6월 말 쯤에 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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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바동거립시다

-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과정에 대한 평가

 

윤종(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gonghyun@gmail.com

 

 

 

왜 곽노현 교육감 놔두고 주민발의를 하려고 했나

2010년 10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를 만들기 위해 활동해 온 지 1년, 아니 학생인권 보장을 위해 활동해 온 지 5년 반 만의 ‘성과’였다. 하지만 특별히 축배를 든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청소년활동가들 사이에는 약간의 당혹감도 감돌았다. 이렇게 쉽게 통과될 조례가 아닌데, 하는 당혹감. 학생인권조례를 만드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갑갑했던 순간순간들이 떠올랐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은 우리에게 분명히 성과였지만, 일종의 ‘무력감’을 동시에 안겨 주었던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자문위원회에서, 학생참여기획단에서, 공청회장에서, 거리에서 그 ‘개고생’을 하고 주먹구구식 교육청 행정과 형식주의에 휘둘리기도 하고, 집회의 자유와 두발 자유 등을 가지고 그렇게 치고받고 했던 과정이 있었기에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발의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도의회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노력은 정말 별 의미가 없는 것만 같은 느낌을, 많은 청소년활동가들이 느껴야만 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상곤 교육감이 집회의 자유를 명시한 조항 등을 흐려 놓은 안으로 발의를 했을 때도 그랬고,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도의회에서 삽시간에 통과가 됐을 때도 그랬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에도 골치 아픈 일들은 많았다. 가장 대표적으로,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이 학생들에게, 교사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래서 통과 직후에는 “두발 자유 조례”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오해도 많았다. 교육청과 학교에서 학생인권조례 내용을 배포하고 교육과 홍보를 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들을 우려해서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전부터 학생들에게 홍보해야 한다고 경기도교육청에 요구했지만, 교육청에서는 아직 제정되지 않은 조례를 홍보할 수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교육청의 입장과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인권조례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학생들이 학생인권조례를 알지 못하는 현실도 답답했다. 교육청과 지역의 여러 단체들 사이에 학생인권조례 정착을 위한 공조와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 점도 아쉬웠다.

 

서울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주민발의로 하고자 한 것은 이런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에서의 경험과 현실적 어려움들 때문이었다. 교육청이나 서울시의회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보다 후퇴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고, 또 서울시민들에게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더 많이 알리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다른 움직임이 필요했다. 두발 완전 자유화 등이 명확하게 들어간 좀 더 나은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다. 조중동문 등을 비롯한 언론들의 학생인권 반대 공세에 대한 고려도 없진 않았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주민발의는 무엇보다도 운동에 대한 강제였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게을러지지 말고 계속해서 거리에서, 조직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학생인권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할 의무를 부여했다. <경향신문> 3월 특집 <아직도 먼 학생인권> 같은 것들도 어떻게든 학생인권을 공론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제안하고 함께 준비한 기획이었다. 또한 주민발의는 학생인권에 대해 소극적으로 찬성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던 여러 단체와 개인들에게 ‘학생인권 쪽박 차는 꼴 보기 싫으면 서명 모으세요’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6개월 안에 8만 2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야만 한다는 조건을 걺으로써, 각계각층의 지역운동, 시민운동, 종교운동, 노동운동 등이 학생인권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한몫을 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셈이다.

 

 

절반의 성공

그래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의 목표는 달성했을까? 일단 거리로 나가서, 여러 행사장에서, 다양한 시민들을 만나서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이야기하고 설명하는 일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거리 서명을 시작한 2월부터 5월까지, 못해도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설명을 했을 것이다.

 

주민발의 과정에서, 어디 서명해 줄 곳 없나 하는 필사적인 마음으로 찾고 연락한 끝에, 이전에는 학생인권운동에 대해 잘 모르고 결합하지 않았던 여러 새로운 단체들, 사람들도 발굴해 낼 수 있었다. 종교의 자유 조항을 보고 종교계 등이 힘을 실어 주었고, 어린이책시민연대 역시 학생인권조례에 열의를 보였다. 온라인에서도 SNS와 블로그 등을 통해서 많은 누리꾼들이 학생인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학생인권을 위해 글을 올리고 서명을 모아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온갖 노력의 결과,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가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무엇보다도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주민발의 과정에서도 제정 이후에도 가장 큰 힘이 되어 줘야 할 교육운동의 움직임이 소극적이었다. 전교조 서울지부는 처음에 회의 과정에서 주민발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최대 3만, 최소한 2만 정도를 목표로 세웠으나 서울지부 조합원 숫자만큼의 서명도 모으지 못했다. 또한 서울의 여러 지역에 터를 둔 수많은 ‘풀뿌리’ 교육단체들과 교육시민단체들 중에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에 참여한 단체들은 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물론 그 단체의 활동가들이나 간부들은 대체로 서명을 했다. 그러나 단체 차원에서 힘을 실어 주진 않았다).

 

 

안이함과 절박함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이 글은 어쩌면 교육운동을 좀 까는 글일 수 있다. 하지만 먼저 좀 착해 보이기 위해서 자기반성부터 해 보겠다. 나 역시 2010년까지만 해도 이 주민발의에 대해 다소 안이했다. 뭐랄까, 그래도 교육운동을 비롯해서 이른바 ‘민주·진보·개혁’ 운동 안에서 학생인권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의와 관심이 있을 거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던 것이다. ‘학생인권 문제가 공론화된 지가 10여 년이고, 학생인권법이나 학생인권조례 등의 이야기가 나온 게 6년째인데 설마 또 이걸 하나하나 설득을 해야 할까, 여러 단체들의 회원들과 회원들의 지인들 정도만 받아도 반은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러나 되돌아보면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민주노총이나 정당들, 전교조들, 학부모들, 지역단체들을 방문하며 학생인권에 대한 교육과 간담회를 먼저 진행했어야 했다. 학생인권 의제는 설령 그 조직의 간부들이나 활동가들이 동의하고 있더라도 그 조직의 회원들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의제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해 달라고 하면 해 주겠지, 라고 생각하며 별로 어렵지 않게 수천수만의 서명을 약속했던 큰 조직의 활동가들은 금세 벽에 부딪혔다. 그게 친환경급식조례나 광장조례와는 다른 부분이었다. 학생인권조례를 주민발의로 만들려고 한다면, 자기 조직을 그 조직에서만 알아서 챙기는 게 아니라, 학생인권운동 차원에서 회원들, 조합원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고 교육하고 간담회, 토론회를 하는 등의 자리를 계속 만들 필요가 있었다.

 

내가 주민발의에 ‘올인’하는 것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데는 만19세 이상만 서명을 할 수 있는 주민발의 방식의 문제도 있었다. 주민발의 서명을 모으는 활동에서 청소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리 서명 외에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법적으로는 수임인도 될 수 없기 때문에 거리 서명을 받더라도 형식적으로는 직접 받을 수 없다. 때문에 초기에 청소년 측의 계획은 홍보 활동을 함께하거나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청소년 서포터즈’ 같은 식으로 학생들, 청소년들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좀 모호한 부분이 있다. 나는 지금도 학생인권조례가 청소년들의 힘으로 만들어지고,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에도 지역에서, 학교 안에서 터를 잡고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그런 조직 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6개월 안에 만19세 이상 유권자들 1%의 서명을 받아 내야 하는 주민발의는 그런 데까지 힘을 쏟을 여유를 주지 못했다. 주민발의에서 청소년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은 초기 기획 단계부터 있어 왔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서명은 비청소년 단체들이 모으고 청소년단체들은 청소년들의 행동과 조직을 만드는 사업에 전념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안이한 마음가짐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11년 1월 말, 3개월이 지났는데도 서명 수가 1만도 채 되지 않았고, 2010년 9월만 해도 빨리 시작하자고 재촉하던 전교조 서울지부에서는 조합원들 사이에 동의가 되지 않아서, 준비가 되지 않아서 서명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있다고 난색을 표했다. 결국 주민발의를 계속할 건지 포기할 건지를 안건으로 놓고 논의하는 자리까지 열렸다. 그 자리에 참가한 청소년활동가들이 이런 식으로 갈 바에는 그냥 주민발의를 포기하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 다른 청소년활동가가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여러분들한테는 이게 실패해도 연대 사업 하나가 실패한 것뿐이겠지만 청소년인권운동에게는 5년, 10년을 해 온 운동이 실패하고 크게 후퇴하는 겁니다.”

 

다시 결의를 다져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를 끌고 가기로 결정하고, 2월부터 추운 날씨 속에서도 매일같이 거리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목표는 하루 200명씩. 11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6시간씩. 거리 서명의 주력은 어쨌건 청소년활동가들이었다. 그때 청소년활동가들이 그렇게 매일 거리 서명을 한 동력은, 마음속에 “역시 어른들을 믿으면 안 되는구나”라는 불신과, 겨우 꽃피우려고 하는 학생인권을 위기에 처하게 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결국 학생인권조례는 청소년들이, 학생들이 만들어 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 지경이 되어서도 그 ‘절박함’은 몇몇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것 같았다. 무상급식 책 출판기념회에 서명을 받으러 갔을 때 남의 행사에 와서 이런 거 하면 욕먹는다고 하지 말라고 했던 활동가의 말은 지금도 내게 상처로 남아 있다. 흥미롭게도, 그 활동가는 1월 말에 주민발의를 끝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매우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이었다(개인적으로 평가할 때 1월 말 회의 때 적극적으로 주민발의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단체들 중에서 자기 말에 그만큼의 책임을 진 건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흥사단교육운동본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날, 어이가 없어서 광화문 한복판에서 펑펑 울었다.

 

그밖에도 어차피 안 될 것 같아서 열심히 안 한다는 사람들, 주민발의 실패한다고 망하는 거 아닌데 이거에만 목매달 필요 없지 않냐는 사람들, 딱 1번 거리 서명 나온 건데 ‘다른 할 일도 있었는데 나올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도 문자를 보내셔서 나왔다’고 웃으면서 말하던 사람들, 뭐 어차피 안 돼도 교육감 발의나 의원 발의도 있지 않냐던 사람들……. 2월부터 서명 작업이 끝날 때까지 3개월은 그런 수모와 실망의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힘이 되어 준 단체들, 사람들도 많긴 많았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단체였는데 열과 성을 다해서 수백 장, 수천 장을 해 온 곳들도 있었고 마음을 함께하며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를 지탱해 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3개월을 계속 걸어 나간 힘에는, 잘 안 하면서 미안해할 줄도 모르고 초만 치는 사람들이 미워서 보란 듯이 성공시켜 버리겠다는 악과 깡, 그리고 그래도 의외의 곳에서 손을 내밀어 주는 많은 사람들이 고마워서라도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을 것이다.

 

 

운동의 무능함

교육운동은 왜 그렇게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에 적극적이지 못했을까? 물론 학생인권 문제는 자기 문제가 아니라고 느껴서 열심히 하지 않은 탓도 클 것이다. 그에 더해서, 처음에는 ‘이 인간들이 학생인권에 반대하거나 떨떠름해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나’ 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화가 나는 한편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라. 분회장들 연락처도 다 확인이 안 되고 있고 분회까지 연락이 다 닿지 않는다고 말하는 전교조 서울지부는 얼마나 현장 조직과의 괴리를 보여 주고 있는가. 어차피 안 될 것 같아서 안 한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굉장히 비겁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 말 뒤에는 얼마나 큰 무력감과 패배의 상처가 있는가. 지역 풀뿌리 교육단체라고 하는 곳에서 전교조 지회 없이는 자체적인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상황은 또 어떤가. 자식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수임인 등록하고 자기 인맥으로 단 하루 동안 60명이 넘는 서명을 받아 내는 ‘일반인’에 비해서, ‘40명, 50명도 모으기 어렵다’, ‘학생인권에 대해 말을 꺼내기 두렵다’고 하는 교육운동활동가들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홍세화 씨가 한겨레 칼럼에 쓴 말마따나, 무상급식 주민투표 서명은 80만 명을 모아 내는 상황에서 단 8만 명도 모으지 못하는 그 조직력의 차이는 얼마나 참담한가. 체벌 금지에 찬성한다는 전교조에서는 왜 체벌 금지를 지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현장 실천이나 지침을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가. (혁신학교에 바빠서?)

 

우리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운동을 하면서 부딪힌 것은 사람들의 반발이 아니라 운동의 무능이었고 활동가들의 무기력이었다. 내가 화가 났던 것은, 다수의 교육운동활동가들에게서 청소년활동가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 ― 어차피 우리 운동의 현실은 시궁창 밑바닥이고 더 물러설 곳도 없고 아등바등 발버둥 쳐서 어떻게든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그런 마음 ― 를 별로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교육운동의 현장 조직(학교와 지역)이 모두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고, 활동가들의 피로감 때문이었으며, 일종의 현실 안주 때문이었다.

 

 

밑바닥에서 바동거리지 않으면……

4월 중순 무렵에 범국민교육연대에서 보낸 메일을 보다가, 2012년 교육혁명연구회를 만들자는 제안서를 보고서 열 받아서 답장을 보냈다.

 

“야, 이 개새끼들아, 하고 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네요.

뭐? 2012년 교육혁명을 연구한다구요? -_-

서울시민 1%의 서명도 조직 못해 내는 교육운동이 어지간히 혁명 잘 하시겠습니다, 그려.

범국민교육연대에서 소식이라고 보낸 이메일 중에서

학생인권조례 서명 조직해 달라는 요청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주간교육동향브리핑에서도 아~주 드문드문 본 것 같네요.

이제 2주 남았습니다.

2주 동안도 학생인권조례에 올인할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학생인권,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겁니까?

더 이상 호소하고 부탁하기도 지칩니다.

이제는 협박 컨셉이거든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실패하면

교육운동을 아주 가루가 되게 밟아 드릴 테니 각오하고 계세요.”

 

메일을 받아 본 담당자분이나 범국민교육연대 활동가분들의 얼굴이 어땠을지 알 길이야 없다. 지금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은 마지막 보정 기간을 앞두고 있다. 1만 장 정도가 부족하긴 하지만, 무효 서명지로 돌아온 것 중에 단순 오타나 이름을 잘못 본 것 등이 많아서 꽤 많은 수를 살릴 수 있을 것 같고 거리 서명/우편 서명도 하루 1,000명 이상을 받아 내고 있어서, 아마도 성공할 것으로 점쳐진다. 일단 교육운동을 가루가 되게 밟지 않아도 되어서 참 다행이긴 하다. 그 밖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주민발의 실패할 경우에 대해 온갖 협박을 해 놔서 뒷감당이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다.

 

하지만 앞의 이메일에 적은 것과 같은 문제의식은 여전하다. 사실 이 문제는 옛날부터 내가 활동하는 청소년단체 안에서도 계속 말이 나왔던 문제였다. 교육운동은 일제고사를 놓고서 “평가를 평가한다”라고 하면서 시험식 평가, 점수 평가 자체를 비판하는 토론회를 열기는 하지만, 정작 그런 주장을 대중화하고 운동과 실천으로 만들어 내는 데는 무관심하다. 입시폐지 대학평준화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만들어서 대학평준화를 이룰 것이라고 하더니 정작 만들어 놓은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는 2년, 3년 지나니까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연대체 제안은 맨날 메일로 오는데 그 연대체에서 어떤 현장 투쟁과 실천을 조직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교육희망네트워크가 선거용 조직이라고 비판하는 좌파 교육활동가들은 그럼 선거만 바라보고 정책 만들고 토론회하고 세미나 하는 것 외에 무슨 아래에서부터의 운동을 만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성공을 보며 교육운동활동가들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부끄러움? 감동? 글쎄. 내 작은 소망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과정이 교육운동활동가들에게 자기 운동을 반성하고 되돌아볼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안 될 거라고 했던 운동을 성공시킨 그 감격이 교육운동활동가들에게도 계속 좀 더 적극적으로 밑바닥에서 바동거릴 힘이 되어 줬으면 좋겠다. 4월 중순까지만 해도 4만이 채 넘지 못했던 서명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 속에서 1주일에 1만씩 늘어나면서 결국 8만 5천을 넘겼을 때 그 감동을, 이 과정을 함께하고 지켜봤던 활동가들이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4월 초나 3월 말 정도에 그렇게 이슈화시키고 소문을 내면서 했다면 피가 마르는 기분을 좀 덜 느꼈을 텐데!) 입으로 헛약속만 남발하는 몇몇 단체들과 알음알음 정성을 모아서 마음을 담아서 서명지를 수십 장, 수백 장씩 보내 주시는 얼굴도 모르는 시민 여러분들을 자연스레 마음속에서 비교해 보면서 느꼈던 그 씁쓸함과 따뜻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면 좋겠다.

 

전교조를 비롯해서 10년, 20년 교육운동을 해 온 분들이 충분히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건 이제 갓 6년 정도 운동을 한 내가 감히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내 친척 중에도 전교조 해직 교사로서 도피 생활을 해 왔던 분도 계시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히 지금 다시 한 번 주문하고 싶다. 교육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청소년들, 학생들과 같이 밑바닥에서 바동거려 보자고. 바동거리지 않는 한, 더 이상의 변화도 뭣도 없기 때문이다.

 

 

 

윤종(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청소년 언론 《오답승리의희망》 편집진. 고등학교 때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을 당사자로서 시작해서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코가 꿰어서 계속하고 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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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10. 7. 09:19


서울교육공공성추진본부에서 하는 토론회에 굉-장히 급하게 섭외받아서 -_- 2시간여만에 뚝딱 써낸 원고이긴 한데

원래 처음엔 곽노현 교육감 까는 글을 쓰려고 하다가 아 젠장 우리가 누구를 깔 입장이기는 한가 도대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지금 시급한 건 곽노현 교육감을 까는 게 아니라 교육운동을 까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식으로.

저는 그 전에도 김상곤 교육감 까는 경기도 지역 일부 교육운동 쪽에 대해, 정치적 입장으로는 동의하는데, 심정적으로는 동의가 안 갔던 게, 그렇게 요구할 만큼 교육운동들이 힘이 있지가 않다능... ㅠㅠ
뭐 물론 김상곤 교육감이 일제고사 관련해서든 비정규직 관련해서든 날렸던 짓들은 비판받고 반대해야 하겠습니다만은. 운동 내적 평가로 돌아와보면 그렇게 했어야지! 라고 할 만큼 잘 했었냐는 생각이 든단 거지요.










이른바 진보교육감 시대와 교육운동 또는 청소년운동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공현

체벌금지 과정에서 보이는 징후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은 취임 직후부터 체벌금지를 적극 추진하는 등, 학생인권 부분에서 열의를 보이고 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곽노현 교육감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교육정책에서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학생들의 인권 문제를 정책의 중심에 놓고 있는 교육감들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뻐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체벌금지 조치가 발표된 지금, 상황을 좀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며 평가해볼 필요는 있다. 서울시교육청의 체벌금지 조치는, 체벌금지를 주장해온 시민사회와 교육운동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해야겠지만, 동시에 그간 체벌금지를 주장해온 시민사회 및 운동세력과의 공조 없이 발표되었다. 이는 체벌금지 과정이 좀 더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한 서울시교육청의 잘못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시민사회 및 교육운동의 무력함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체벌금지 조치들(학칙 개정 등)에 대해서 운동세력은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다 할 현장 조직이 없는 청소년운동이야 고질적인 문제일 테고,(지금 겨우 준비하고 있는 건 학칙 개정에 관한 가이드, 인권적 학칙 예시안 정도) 어느 정도 현장 조직을 가지고 있다고 할 만한 교육운동 세력들 또한 체벌금지를 찬성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 외에 구체적으로 학교 현장에서의 체벌금지 진행에 단일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운동이 보이고 있는 총체적인 무력함은 그동안 안팎에서 여러 차례의 지적이 있었다. 원인은 교육운동이 담론 투쟁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학교 현장에서부터 아래에서부터 힘을 끌어 모으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입시폐지를 하든 일제고사 반대를 하든 학생인권 운동을 하든 교권 운동을 하든, 받쳐주는 힘이 없이 이빨만 까고 있는 게 교육운동의 현주소가 아닌가?

이런 현상은 이른바 진보교육감 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어느 정도 수준에서의 개혁적 의제는 이른바 진보교육감(서울의 경우라면 곽노현 교육감)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될 것이고, 설령 이에 대해 교육운동에서 더욱 급진적 의제를 내건다고 하더라도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른바 진보교육감 시대는 교육운동의 현실을 시험하는 장이 될 것이다. 교육감이 내놓은 ‘좋은 아젠다’를 얼마나 현장에서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느냐, 하는 면에서든, 교육감이 하는 ‘뻘타’에 맞서서 - 아니면 교육감과 무관하게 총체적 교육제도와 구조의 문제에 맞서서 얼마나 의미있는 운동을 펼쳐나가냐, 하는 면에서든.


청소년운동에서는

청소년운동에서는 몇 가지 대응을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학생인권조례를 교육청에 맡겨두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학생인권 의제를 대중화하고 또 학생인권운동에 네트워킹 된 학생들의 조직을 만들어나가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아니면 교육청이 베푸는 학생인권조례(체벌금지 조치조차도 교육청에 의해 베풀어지는 시혜적 성격의 정책이 되고 말았다.) 이상으로 정치적 권리나 성적 권리 등 다양한 권리들을 새롭게 제기하는 시도도 유의미할 것이다. 지난 7월 일제고사 과정에서 드러났든 교육청 차원에서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교육정책의 문제들에 대해 학생들의 문제의식을 대중화하고 행동을 조직해나가는 것 또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어쨌건 확실하게 말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건 곽노현 교육감이 잘하고 있냐 못하고 있냐, 하는 문제는 아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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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건강정보а 좋은 글 감사합니다.<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평생건강지킴이 : 내 병은 내가 고친다.>

    2010.10.14 06:57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0. 7. 12. 16:25

2010 일제고사, 경쟁교육 반대 영상 from 피엡 on Vimeo.




- 일제고사가 바로 내일입니다.

No Test, No Loser 라는 표어는 "시험 안돼! 루져 안돼!"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왠지 많은 거 같지만,

원래 의미는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대표 없이 과세 없다"에서 착상했던 거고, 문장 구조로 치면 No pain, No gain (고생 없이 얻는 거 없다)이라는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즉, "시험이 없다면, 루져/패배자도 없다."라는 뜻.

원래 이 표어에 착상한 것은, 일제고사를 강행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평가', '측정'이라는 말을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사람들에게는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측정 가능한 '실력', '학력'이라는 게 있고 시험은 단지 그 존재하는 실력과 학력을 알아보기 위한 도구인 양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측정, 평가는 그 자체로 영향을 미칩니다. 서로 다른 삶, 서로 다른 능력, 서로 다른 조건을 가진 학생들을 점수-성적-등수라는 틀 속에 넣고 그 틀 속에서 경쟁시키는 것은 시험의 힘입니다. 시험이 점수를, 학력을 만듭니다. 그리고 시험이 루져를 만듭니다.

우리는 요구합니다. 점수 위주로, 성적으로 줄 세우고 경쟁시키는 시험이 아니라,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진짜로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공부에 도움이 되는 평가를.



- 나는 일제고사를 자유주의적으로, 그러니까 학생의 선택권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유는 그렇게 개인적으로 행사되지 않습니다.

이미 학교와 교육 자체가 강제성이 들어 있는 상황에서 일제고사만 개개인의 선택이라고? 비현실적인...;;


일제고사, 경쟁교육은 교육 시스템이 어떻게 갈 것이냐, 어떤 교육일 것이냐의 논쟁이 되어야 합니다.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이란 식으로 가면 안 됩니다.

만약 권리로 주장할 거라면 선택권을 넘어서 최소한 참여권이나 민주적 주권, 적극적 교육권까진 가야 의미가 있습니다.     



- 바로 내일, 13, 14일이 일제고사입니다. 꼭 대상학년(초6, 중3, 고2)이 아니더라도 일제고사 등 경쟁교육, 학교서열화 정책의 폐해는 고스란히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일제고사 반대 활동에 참여합시다.



아침부터는 체험학습이 있는데,

부모-보호자-후견인-친권자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자발적으로 체험학습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병결로라도 참여해주면 좋겠지만 ㅠㅠ)


그때는, 수도권에 사는 분들은

저녁 7시 일제고사 반대 문화제(광화문열린시민공원) 에 참여합세다. ㅋ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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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군요. 흥미롭네요.
    영어 해석에 있어서는, nico-free 운동이 생각나는군요 ㅋㅋ 교내에서 담배를 없애자는 말을 학생들이 '담배 자유!'로 해석하더군요 ㅋㅋ

    2010.07.14 00:0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0. 4. 23. 09:56

[막말의 시대] 전교조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는 조전혁 국회의원의 막돼먹은 신념

조전혁 의원의 교원단체 교사 명단 공개에 대해

명숙



헌법기관은 헌법기관의 결정을 무시해도 된다고?

한나라당 조전혁 국회의원(인천 남동구 을)이 4월 19일 자신의 인터넷홈페이지에 5개 교원단체 소속 교원 22만 2479명의 명단을 공개하였다. 법원이 ‘교원단체 소속교사 명단 공개는 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국회의원이라는 고위 신분을 내세워 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공개했다. 이에 대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이하 교총) 등 교원단체들이 반발하자 조 의원은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감시․통제 방법으로 자료를 요구하거나 직무상 얻은 자료를 공표하는 행위는 민사상 가처분의 대상이 아니다”는 발언을 했다. 정말 기가 차는 발언이다. 그동안 정부와 여당이 그토록 내세웠던 법치의 실체를 보여준다. 국회의원이 법원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에서 보이듯이 그들에게 법치란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지켜지는, 그렇지 않으면 무시해도 되는 장식일 뿐이다.

법원 판결도 무시하는 무소불위 정치인 등장

조 의원이 말한 대로 국회의원은 헌법기관이므로 직무상 얻은 자료를 공표해도 된다고 하였지만 서울 남부지법 민사합의 51부(재판장 양재영)는 “조의원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제출받은 교원단체 및 교원노조 소속 교사 명단을 인터넷 등에 공시하거나 언론 등에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그럼에도 그는 삼권분립은 ‘나발’인지 헌법기관인 법원의 결정을 무시했다. 국회의원이 헌법기관이니까 직무상 얻은 자료를 언제 어디서나 공개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권력을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한 횡포이다. 더구나 이번 공개는 정부나 사법부에 대한 감시나 통제를 위해 행사된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특정 정치적 성향, 교육 성향을 강하게 밀어붙이기 위한 목적으로 타인의 권리( 개인정보 자기결정권과 결사권)를 고의적으로 침해한 것이다.

입법기관으로서 국회의원의 역할수행은 다른 헌법기관의 결정을 무시할 정도로 막대하거나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그가 국회의원의 역할수행을 권력행사로 오인하는 오만방자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역할 수행을 위한 최소한의 정당성의 토대는 바로 헌법적 질서 존중과 다른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는 인권의식 이다. 그가 국회의원의 역할보다는 힘을 가진 자로서 권력행사에 관심이 있고, 시민의 권리는 무시해도 된다는 비상식적 사고를 갖고 있다고 단정할만하다.

교원단체 가입명단 공개가 알 권리라고?

인권을 침해하면서까지 명단을 공개한 조 의원이 근거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알 권리’이다. 법원이 “교원의 교원노조 가입은 업무 외적인 영역의 개인 정보”로 “전교조 명단 공개는 개별학생이나 학부모의 학습권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며 명단공개 금지 판결을 내렸음에도 부모들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주장한다. 또한 조 의원 측의 행위를 지지하는 보수 일각에서는 ‘전교조 가입 교사만 공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교원단체도 공개했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논리는 마치 조 의원의 행위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알 권리를 보장하는 행위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숨겨진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누가’, ‘무엇 때문에’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인가를 되물어야 한다.



조 의원의 그간 행적과 발언, 조의원의 공표행위를 지지하는 보수단체의 논거를 통해 그의 의도는 쉽게 드러난다. 그동안 조 의원은 『전교조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라는 책 출판, ‘자유주의교육연합’이라는 단체의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2008년에도 교육 분야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나는 우파이고, 우파인 것이 자랑스럽다"면서 당시 교육부장관이 개인의 인권문제가 있다고 답변했음에도 교원노조 명단 실명 공개를 주장하였고, 전교조가 그동안 정부 정책에 협조적이었나를 질의하였다.

교원단체 가입 교사 명단공개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단체의 성명에도 이번 공개를 ‘전교조 명단 공개’로 한정하여 해석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번 공개가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통제수단이 될 거라고 이해하고 있다. 4월 21일 방송개혁시민연대는 성명서에서 “지난 정권 전교조가 학생을 대상으로 노골적인 친북, 반미, 반정부 교육을 실시한 것은 온 국민이 다 아는 내용”이라며, “명단 공개의 사회적 논란의 발단은 이렇듯 법원과 국민의 전교조에 대한 상이한 판단이 전제돼있다”고 밝혔다.

이렇듯 알 권리를 주장한 맥락은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행위가 아닌 노골적인 ‘전교조 가입 교사들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상 노조가입이라는 ‘권리행사’를 문제 삼고 있다. 명단 공개가 알 권리 보장이 목적이라기보다 특정 노조 가입에 대한 반대를 위해 행해진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교사들의 결사의 자유를 침해한다.

또한 보수언론의 강한 영향력으로 전교조에 가입되었다는 이유로 교사들이 교직원이나 학부모에게 공격받을 수 있는 현실이 걱정스럽다. 이번 공개로 인해 교사 개인이 위협받는다면 큰일이다. (친절한 동아일보의 서비스로 개개 교사에 대한 공격 가능성은 넓어지고 있다.) 노조에 가입하거나 참여할 권리로서 결사의 자유는 헌법에도 보장된 권리이며, 특정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결사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알 권리와 정보공개

알 권리는 국민이 자신의 이해와 인권에 연관된 정보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보장한 권리이다. 정보접근을 포함한 알 권리는 다른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실제 정부기관이나 공적 기관, 공적 인물의 행위나 정책은 시민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부기관이 어떠한 일을 했고, 어떠한 정책방향을 세웠는지, 돈은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사안에 대한 알 권리가 차단된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권을 침해하는 정책이나 집행에 대해 입하나 뻥긋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알 권리가 보장되고 많은 공적인 정보가 공개되어야 정부의 주요 행위나 정책에 대해 지지하거나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것은 그동안 정부의 교육정책에서 배제되었던 시민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정부 정책이나 교육예산 집행 내역, 사교육 비리, 뇌물을 받은 비리 학교 교장, 교육감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그저 개별 교사들이 어느 단체에 가입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명단을 공개했을 뿐이다. 개인정보 보호와 알 권리는 긴장관계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보공개를 할 때는 ‘공익적 목적’이 분명해야 하며, ‘본인의 동의’와 ‘정보이용에 대한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공개는 최소한의 공익적 목적(가령, 비리교사 공개를 통한 징계 등)도 없이 조 의원의 평소 신념인 전교조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사익’을 달성하려고, ‘교사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진행되었다.

그동안 정작 필요한 알 권리에 해당하는 정보는 공개되고 있지 않다. 한 예로, 지난 3월부터 경북지역에서 시민사회가 교육 비리에 연루된 교장․행정실장․교육 관료들의 명단을 공개하라고 요구했으나 교육청은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보접근권은 제한된 영역에만, 그것도 정부여당의 정치성향이나 정책과 다를 때에만 보장된다면 이는 알권리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번 공개는 알 권리라기보다는 ‘반정부성향 파악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결사의 권리도 딱지를 붙여 빼앗고

이제 결사의 권리는 ‘전교조 아닌 노조’에 가입할 때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교사들이 헌법과 각종 국제인권규약에 명시된, 모든 시민의 권리라는 노조가입의 권리를 행사하려면, 행사하고 싶다면, ‘전교조’가 아니어야 한다. 2010년 한국에서는 노동권 중의 하나인 노동조합(단체)가입의 권리를 행사하는 일조차 검열당하고 감시당하고 있다. 유엔 대표적인 인권기구인 자유권위원회 및 사회권위원회는 전교조와 공무원의 노동3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수없이 했으나 한국정부는 이행하지 않고 있다.

조 의원의 노림수는 평소 막돼먹은 신념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하지만, 6월 지방선거와 교육감선거에서 보수층 지지를 모으려는 행위일 뿐이다.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입시경쟁 위주의 학교가 변하기를 꿈꾼다는 이유로 정부는 전교조에 빨간색을 덧칠하였다. 이제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교육의 지향’에 대해서 생각하고 논의하기보다는 ‘전교조냐, 아니냐’를 먼저 판단하게 논쟁 프레임을 바꾸려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명단 공개는 교사들의 권리 침해이기도 하지만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다른 교육을 상상할 권리도 제한한다.

최근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과 초중고 무상급식 필요성이 많은 시민에게 공감 받으면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내가 꿈꾸는 학교생활은 무엇인지?’, ‘내 자녀가 어떤 교육환경에서 자라면 좋은지?’를 생각했다. 한국은 고등학생 대학 진학률 85%이지만 대학을 졸업해도 88만원 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라는 점에서, 이 시대의 입시교육과 경쟁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심을 품고 있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성찰을 무(無)로 돌리는 논쟁 프레임 바꾸기 시도는 우리 사회의 변화가능성을 축소시킨다. 언론과 보수 일각에서 입시교육과 경쟁을 당연시하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전교조 공격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다른 교육’을 꿈꿀 권리를 박탈하는 일이기에 우려스럽다.

덧붙이는 글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99 호 [기사입력] 2010년 04월 22일 22:30:20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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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4. 22. 13:45


성명을 발표하고서야 생각났는데
원래 성명서 수정할 때
"학생들은 누가 좋은 교사인지 나쁜 교사인지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을 직접 겪으면서 판단할 수 있다. 거기에 소속 단체라는 걸로 선입견을 주입하려 하는 것은 학생들의 경험적 판단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며, 교육에 정치권력이 대놓고 개입하려는 것이다." 뭐 이런 이야기를 쓰려고 했었는데 막 쓰다보니까 잊어버렸었다 ㅡㅡ;;;





<청소년, 인권단체 공동성명>

 

 

전교조 명단을 공개한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과 동아일보를 규탄한다!



  전교조에 대한 정부의 공세가 도를 넘은 지 오래다. 여기에 한나라당 조전혁 국회의원이 한 번 더 오버를 했다. 지난 19일, 조전혁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교원단체 및 교원노조에 가입한 교사의 실명을 공개했다. 20일, 동아일보 역시 자사의 홈페이지에 명단을 공개했다. 그들은 공개의 이유에 대해 ‘교육의 수요자인 학생-학부모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결단이란 주장을 했다.

  우리 인권․청소년단체들은 정보인권을 무시하며 유린한 조전혁 의원과 동아일보를 규탄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있다. 헌법으로도, 국제인권조약에서도 개인정보에 대한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다. 명단이 공개된 후 학생들이 “우와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도 전교조였네. 전교조 좋은 데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되든, “우리 교장 선생님 맨날 운동장 조회 길게 하고 두발단속 빡세게 하는데 교총이었잖아. 앞으로 교총 싫어해야겠어.”라고 생각을 하게 되든, 학부모들이 “어머, 우리 애 담임도 전교조잖아. 학교에 항의해서 담임 바꿔달라고 해야지.”라고 생각을 하게 되든, 자신이 어느 결사/단체에 가입해있는지를 공개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문제인 것이 원칙이다. 알 권리란 명분으로 민감한 정보를 당사자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함부로 유출한 조전혁 의원과 동아일보의 행위는 명백한 인권침해이다.

  또한 그동안 조전혁 의원, 한나라당, 동아일보 등의 행적을 봤을 때, 이번 명단 공개는 학교 현장을 색깔론으로 페인트칠하고, 소속단체 및 노동조합을 가지고서 교사들에게 낙인을 찍어 편가르기를 하려는 시도임이 분명해 보인다. 교사 개개인의 소속 단체를 공개해서 이를 가지고 학생, 학부모에게 교사 개개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게 하려는 것은 매우 반교육적인 일이다. 그들은 교사의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과 교권을 짓밟고 있는 것이며, 교육을 자기들 멋대로 주무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교육제도나 방식에도 문제는 많으나, 이를 학생들을 위해 바꾸려 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주무르려고 하는 것은 더욱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이미 명단 공개의 위험성과 위법성은 법원에서도 지적한 바가 있었다. 남부지법 민사재판부는 “교원이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는지 여부에 관한 정보는 일반적인 개인정보보다 높은 수준으로 보호될 필요가 있는 민감한 정보”이고, 이를 공개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법률’ 등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원단체 및 교원노조에 가입한 교사명단을 공개하는 것을 금지한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단공개를 강행한 조전혁 의원과 동아일보가 과연 인권 감수성이나 개념을 갖고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특히, 헌법으로 보장된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이란 하나의 헌법기관이, 또한 사회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언론기관이 앞장서서 법을 무시하고 정보인권을 침해했다는 점에 우리는 더더욱 개탄할 수밖에 없다.

  이번 명단공개를 포함하여 일련의 전교조에 대한 탄압들은 더욱 큰 우려를 느끼게 한다. 이미 예전부터 시국선언 기소, 규약개정 명령 등 정부와 한나라당, 그리고 보수언론은 ‘전교조 죽이기’를 노골화했었고, 특히 한나라당은 이번 지방자치선거를 ‘전교조 심판’이란 말로 의미 짓기도 하였다. “명단공개는 정치적 결단”이란 조전혁 의원의 발언처럼, 명단공개의 강행한 것은 전교조를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쇼라고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개인들의 인권을 스스럼없이 침해하는 것을 살펴보면 여전히 옛 독재시절의 향수에 빠져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글플 따름이다. 잘못된 교육제도 속에서 고통받는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논의하지는 않고 전교조니 교총이니 반전교조니 편가르기, 낙인찍기에 골몰하는 일은 학생들의 교육권 보장에 있어서도 대단히 비생산적인 일이다.

  우리는 교사들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전교조에 대한 부당한 색깔론을 그만두고, 정치적 자유 행사나 정당한 노조활동을 가지고 전교조에 대해 부당한 탄압을 가하는 것을 당장 중단하라.

  우리는 명단공개를 강행한 조전혁 의원과 동아일보를 규탄한다. 그들은 ‘정치적 결단’을 내린 만큼 정보인권을 유린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법적인 책임’과 ‘정치적인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 인권․청소년단체들은 이번 사안에 있어서 부당한 인권침해와 정치적 공격을 당하고 있는 전교조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밝힌다.

 

 

2010년 4월 22일
 

 교육공동체 나다, 민주노동당 장애인위원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문화연대, 배희철, 안산노동인권센터, 인권운동사랑방,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청소년다함께,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한국 HIV/AIDS 감염인연대KANOS,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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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0. 4. 20. 20:42


23일에 있을 토론회에서 발제할 원고입니다...................
교육운동 활동가들에게 학생인권조례 필요성을 좀 설득하는 느낌으로 썼어요.





(거창하고 밋밋하게) 학생인권조례 운동의 현황과 쟁점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공현

운동의 성과로서의 학생인권조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 앞서 내가 꼭 붙이곤 하는 이야기가 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김상곤 교육감이 훌륭하고 개념 있어서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며, 거기에는 학생인권 운동의 역사가 녹아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로 학생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높아져갔고 비로소 일상적으로 존재하던 많은 학생인권 침해들이 의미 있는 문제―이슈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학생인권 운동은 2005년 이후로 광주 학생인권조례 제정 추진, 그리고 ‘학생인권법’(초중등교육법 개정안.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발의.) 등의 형태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적 조치들을 밀어왔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또한 이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상에 있다. 뭐 따지고 보면 애초에 주경복 서울시 교육감 후보나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후보의 공약에 ‘학생인권조례’가 포함되었던 것도 그러한 학생인권운동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을 만드는 과정에 학생인권 운동은 음으로 양으로 참여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자문위원회에도 학생인권에 관련하여 활동을 해온 인권운동가들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연구용역팀에도 학생인권에 관한 활동을 해온 사람들이 참여했다. 과거에 연구되고 발표되었던 학생인권 지침, 결정 등이 함께 검토되었고, 광주 학생인권조례안이나 경남 학생인권조례안, 그리고 학생인권법안 등은 중요한 참고자료였다. 또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학생들이 학생참여기획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학생인권조례에 관해 생생하면서도 인권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학생인권 운동이 지난 세월 동안 문제제기하고 축적해온 사례와 담론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튼실한 내용으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초안이 발표될 수 있었으리라.


학생인권조례의 필요성 1 : 청소년인권운동의 입장에서는


  최근에 청소년인권운동에서 학생인권조례가 대두된 배경은 사실 아주 단순하다. 청소년인권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왔고 또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나 아직 중고등학생들, 청소년들의 조직력은 미미한 수준이고 앞으로 그 갈 길은 멀다. 그러나 청소년운동의 특성상 그 성장은 더딜 수밖에 없는 면이 있고, 오히려 학생들 사이에는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ㅠ_ㅠ” 같은 패배적 분위기가 해를 넘길수록 널리 확산되고 있다. 10년이 넘게 끌어온 학생인권에 관한 운동은,(또는 ‘대중’은)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성과에 목말라 있다. 그토록 많은 저항과 논쟁이 있었음에도 아직 학생인권에 대한 강제성 있는 보장 제도는커녕 공식적 기준, 가이드라인조차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2006년에 발의되었던 학생인권법안(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은 그러한 운동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2008년에 선언적인 학생인권 보장 의무 조항 한 줄을 신설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학생인권법 운동을 추진하기에는 현재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 상황이 너무 암울한 조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 경남 등지에서 학생인권조례 운동이 시민사회단체 중심으로 진행됐고, 경기도에서는 김상곤 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를 추진했다. 2008년 촛불집회와 일제고사 투쟁 등을 넘기고, 2009년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이 학생인권법 외에 학생인권 제도화를 실현시킬 모델을 보여준 셈이다.
  덧붙여서, 나는 학생인권조례는 다소 선언적이었던 학생인권법과는 달리 교육청을 확실한 책임부서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더 많은 실효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조례라는 점에서 권한상의 한계도 분명하지만 동시에 교육청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실질적으로 강력하게 시행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막연하게 전국적인 법률과는 달리 그 지역의 학생들, 지역의 단체들을 사안의 당사자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운동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의 필요성 2 : 교육운동의 입장에서는


  동시에, 학생인권조례는 무상급식에 이어 교육 분야의 중요한 이슈로 부상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뭐 사실 꼭 학생인권조례의 형식이 아니더라도 교육청의 권한을 이용하면 학생인권 보장에 여러 모로 기여할 수 있으니 학생인권 보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그런 일련의 정책들을 학생인권조례라고 부르도록 하자.) 학생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교육’이나 ‘경쟁교육’이라는 것이 실제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고,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교육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중요한 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학생인권조례는 단순히 폭력에 노출된 학생들을 구제해주자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 학교와 학생의 관계를 바꿔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인권 보장은 교육운동에 있어서도 전략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학생인권 보장은 학생들의 교사에 대한 불만을 상당 부분 누그러뜨리고 학생들과 교사들이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좀 더 높여줄 수 있는 조건이며, 학생들의 불만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교육제도의 문제점에 좀 더 눈을 돌릴 수 있게 할 조건이다. “언제까지 학생들이 두발자유 가지고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본 학부모에게 교장이 “두발자유로 독립운동을 안 하고 다른 걸로 독립운동 할까봐 무서워서라도 두발규제를 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학생인권 침해가 지금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지금 ‘교원평가제’에 학생들 상당수가 찬성하는 것은 교육제도와 학교의 폭력과 통제를 구현하는 존재로 보이는 교사들을 견제하고 바꾸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이명박 정부는 그러한 학생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실제론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는 ‘교원평가제’를 추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원평가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노동통제’, ‘교원평가제는 학생, 교사, 학부모를 서로 싸우게 만드는 제도’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막연하거나 낭만적이다. 교원평가제가 도입되기 전부터도 이미 학생, 교사, 학부모는 어느 정도 갈등관계가 아니었던가? 학생들의 요구가 왜곡되어 교원평가제에 대한 지지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런 요구를 건강하게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는 학생인권 보장을 이루어야 하고 학생들의 참여와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보장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또는 거시적으로 볼 때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교육에서 변화의 한 계기가 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실현시키고자 하는 두발자유를 비롯하여 용의복장의 자유, 체벌금지, 강제적 자율학습, 보충수업의 금지, 학생들의 쉴 권리 보장 등은 학생들에 대한 통제와 학교간․학생간 경쟁을 강화시켜나가고 있는 교육 현실에서 유의미한 견제장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을 중심에 둔 학교,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학교와 경쟁적 학교, 통제적인 학교, 독재적․권위적인 학교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재 발표된 학생인권조례 초안을 살펴보면 학생들의 학교 운영 참여, 교육 정책 수립에 참여 등을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통로를 통해 학생들이 일상적인 학교 운영을 비롯하여 교육 현안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교육 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v또한 학생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질 조직과 기구 등은 학생들의 조직화, 세력화를 촉진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 운동에서 고려해야 할 쟁점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들이 나왔었고, 또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광주나 경남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쟁점들이 제기되었었다. 개중에는 “학생들이 머리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고 다니면 면학 분위기를 해치게 된다.” 같은 류의 참 반박하기도 애매한 뻘타도 많았다. 특히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에서는 조항 중에 두발복장자유, 체벌금지, 강제자율․보충학습금지, 휴대전화허용, 집회․결사의 자유, 양심․사상의 자유 등이 쟁점이 되었었다. 사실 이는 학생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통제하고 다스리고 가르쳐야 할 미성숙한 대상으로 볼 것인가 하는 인식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쟁점들로, 양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안들 외에도 반복적으로 쟁점이 되는 교권 실추에 대한 우려 등은 분명히 사람들이 학생인권조례를 지지하는 것을 꺼려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예컨대 경기도 교육청에서 최근에 추진 중이라고 밝힌 교권보호헌장도 학생인권조례를 한다고 하니까 “교권 실추가 우려스럽다. 교권도 강화해라!”라고 외치는 목소리에 밀려서 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실제로 연구용역팀에서 나온 초안은 오히려 학생인권조례를 지지하며 학교관리자들과 교육청에 대해 교사들의 권리, 신분 보장을 확실히 하는 쪽으로 나왔지만. ㅋㅋ)
  학생인권 보장에 대해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막연한 불안감이나 거부감을 모두 해소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불안감과 거부감을 모두 해소하는 타협안이란, 실질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내용이 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최소한 교사나 학부모 등이 가지고 있는 학생인권 보장에 대한 두려움, 오해 등은 일정 부분 해소할 필요가 있을 것이며 이러한 쟁점들을 돌파해나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예컨대 학생인권이 보장된다고 해서 교권이 위축되는 것이 아니며, 교사의 노동 환경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나아지는 면도 많을 것이라는 점, 학생인권 보장은 교육을 포기하거나 학생들을 방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더 평화적․합리적으로 대화하고 교육하겠다는 것임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사들, 학부모들에 맞춘 설명과 함께, 학생인권이 보장되는 학교가 어떤 모습일지 교사와 학부모의 이익의 관점에서도 설명한 통합적인 비전 제시가 요구된다.


학생인권조례가 전국적으로 힘있게 추진되게 하기 위해

  현재 청소년인권운동은(뭐 정확히 이야기하면 내가 속해 있는 단체들은;) 학생인권조례와 관련하여 두 가지 방향으로 활동을 준비하고 만들어가고 있다. 하나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를 제대로 알리고 추진하기 위해서 경기도 지역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서명을 모으고 행동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동시에 경기도 지역 단체들을 설득하여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힘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도 계속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인권조례가 경기도뿐 아니라 전국 모든 지역에서 추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서울, 인천, 전주 등등의 지역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모아서 발표하고, 전국 교육감 후보들에게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약속하라고 요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실제로 경기도 교육청의 초안 발표에서 시작된 학생인권조례 논쟁은(이렇게 이야기하면 그전부터 준비해오던 광주, 경남이 서운하겠으나, 광범위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킨 것은 경기도니까,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인 쟁점이 되어가는 낌새다. 울산, 전남, 경남, 전북 등의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공약으로 하겠다고 하는 교육감 후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인 선거 쟁점이 된다면 그 자체로 결코 작지 않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초중고등학생들은 만19세 미만이라는 이유로 선거권이 없으며 심지어 초중고등학생들은 선거운동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반면에 무상급식이나 무상교육, 일제고사 폐지 등의 일정하게 인권적․복지적, 반(反)경쟁교육적인 정책에는 찬성하면서도 학생인권조례는 주저하는 어른들(유권자들. 학부모들. 교사들 등등.)은 분명 어느 정도 존재한다. 이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학생인권조례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공론화하는 교육감 후보들이 많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례로 2008년 교육감 선거 당시 주경복 후보가 학생인권 보장에 관련된 공약을 두루뭉실하게 얼버무린 것으로 대체한 것도 ‘표 깎아먹는다’라는 선거운동본부 내의 우려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스레 학생인권조례 또는 학생인권 보장 공약이 교육감 후보들에게서 나올 것을 기다리기보다는 더 적극적으로 교육감 후보들이 이를 내세우도록 활동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학생인권조례를 공약으로 걸었던 교육감 후보들이 교육감에 당선된다고 해서 학생인권조례 운동의 목표가 달성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경기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학생인권조례는 그 추진 과정에서 많은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이며, 학생인권에 대한 여론의 추이나 학생들의 행동, 지역시민사회의 활동, 지방의회의 구성 등 많은 변수들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학생인권 문제에 큰 관심을 표하지 않았었던 많은 지역단체들, 교육운동조직들, 학생들을 불러내고 일으켜 세우는 작업,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운동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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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11. 12. 18:43




(출처 : 다음웹툰  박대리는 사회 부적응자 27화)



수능이 바로 내일인데, 곧곧에 수능대박을 기원한다는 이야기들이 올라오고 떠다니고 있습니다. 둥둥...

뭐 그런 마음이랄까 인정이랄까, 안쓰러워하고 응원하고 싶은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한편에서는 그런 '수능대박'을 마케팅으로 이용하며 상업 이벤트로 하는 것도 좀 짜증나긴 하지만요.

 
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수험생 여러분의 수능대박을 기원한다" 라는 건 말짱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_-

아니 뭐, 공부를 한 만큼 보는 건데 대박을 기원하네 뭐네 하는 건 사행심이다, 라는 류의 말은 아니구요.

절대평가라면 또 모르겠는데, 수능은 상대평가입니다.
내가 얼마나 기초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 대학의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를 측정하는 시험이 아니라
다른 수험생들보다 얼마나 잘하고 못하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죠.
말하자면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 구조에 맞춰서 학생들을 줄세우기 위한, 몇%까지는 1등급 몇%까지는 2등급 이런 방식의 상대평가인 겁니다.
(수학능력평가라는 이름만 보면 꼭 무슨 자격고사-절대평가인 것 같지만, 기만적이게도 -_-;)

따라서 이런 시험에서 "수험생 여러분 수능대박 나세요"하는 건 거칠게 말하면 헛소리밖에 안 됩니다.
누군가가 수능대박이 난다는 건,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 등급 밖으로 밀려나서 대박이 아니게 된다는 뜻이니까요.
누군가에게 행운이 따르길 바라는 건, 다른 누군가는 그만큼 등급이 밀려나서 불행해진다는 거니까요.



그게 수많은 수험생들이 시험에 응시하기 전에 애써 잊으려고 하거나 잘 의식하지 않는 현실이죠.

나의 승리는 곧 누군가를 패배시킨 결과라는 것.


동시에 수능 대박 나라고 '덕담'(?)을 날리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밀려나고 떨어진다는 것 말이지요.



수능 대박을 기원한다, 라는 거짓말보다는

뷁스러운 대학서열-입시경쟁 체제와
내신-수능-논술의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깨고

더 나은 교육을 만들자
고 말하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이고 진실된 말이 아닐까 합니다.

내가 승리하기 위해 누군가를 패배시키고 탈락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교육이요.
인권도 보장되고, 입시경쟁도 좀 안 하고, 시험을 위해 가르치는 게 아닌, 그런 교육이요.

그걸 위해서는 대학평준화라거나 지금과 같은 형태의 입시 폐지라거나, 뭐 이런저런 정치적 결단과 개혁들이 필요하겠죠.
그런 변화를 위한 저항과 행동이 필요할 것이구요.





이번에 저도 청소년인권보장을 위해,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 에서 하는 행동에 같이 하고 있습니다 @_@

내일 수능날에는 수능을 거부한 학생의 1인시위와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요구 선언 발표 등 기자회견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주욱 행동들이 있구요.

수능이 끝난 분들도, 수능을 아직 보지 않은 분들도, 모두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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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보신각에서 제 2회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문화제 " 꽃들에게 희망을" 이 진행됩니다.

스 스로 나비가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하고 경쟁의 탑을 방황하던 애벌레의 이야기가 담긴 동명 소설" 꽃들에게 희망을" 에서 이름을 따온 이번 문화제는 우리 스스로가 나비 임을 선포하며,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메세지를 전달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21일 금요일 밤 6시 보신각에서 만나요.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문화제에 앞서,

수능을 기점으로 한주간 불복종 행동 주간을 선포합니다!

15일과 19일에는 입시폐지 대학평준화의 문화행동기획단 "몹쓸(몹쓸교육을 쓸어버리는 사람들)" 에서 준비한 선전전과 퍼포먼스가 있습니다.

그외에도 가능한 문화행동들을 알려주시면 적극적으로 연대하겠습니다.

 

○ 13일 10시 30분 교육부 앞 “수능, 그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날씨마저도 얼어붙어 버리는 날, 출근시간이 미뤄지고, 비행기도 뜨지 못하는 하루, 12년 배움을 정리하는 단 하루를 거부합니다.
수능을 거부하는 몹쓸의 직접행동 1탄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의 경쟁을 강요하지 마!”  

+ 10시 30분 기자회견과 퍼포먼스가 진행됩니다.
+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피 튀기는 경쟁속 죽어가는 현실을 표현하는 퍼포먼스
+ 퍼포먼스 진행계획
  - 하루 17시간 공부하는 청소년, 경쟁을 위해 친구에게 노트조차 빌려주지 않는 청소년, 수억의 사교육시장에 내몰리는 학부모, 성적만을 평가해야하는 교사, 학벌로 인해 고통받는 대학생, 등 경쟁교육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고 그 중심에는 피투성이가된 청소년이 모두를 대표하여 수능을 거부하며 홀로 피켓을 들고 있다.

○ 15일 1시 명동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


내가 진짜로 원하는 교육을 말하다. 경쟁에서 벗어난 애벌레가 날개를 달고 나비가 되듯이 내가 가진 나비의 날개를 만들어 봅시다.
입시중심의 경쟁교육을 반대한다. 몹쓸의 직접행동 2탄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 1시부터 명동 거리 선전전과 서명 및 내가 원하는 교육 인터뷰
+ 나의 꿈 날개 만들기


○ 19일 10시 30분 소라광장 “우리에겐 꿈이 있습니다.”


의미 없는 경쟁의 탑을 쌓는 애벌레는 사실 나비의 날개를 품고 있습니다. 경쟁교육, 성적지상주의에 파묻힌 우리에게도 사실 꿈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꿈의 날개를 펼치며 외칩니다.
+ 10시 30분 소라광장 앞 기자회견, 11시 애벌레 퍼포먼스
+ 퍼포먼스 진행 내용 : 애벌레 복장을 하고 파이낸셜빌딩앞 계단에서 힘겨운 오르기를 지속, 청소년들과 함께 애벌레에서 탈피하여 날개를 펼치는 내용.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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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10. 4. 00:51


뭐 참세상 기사로 나온 사회진보연대 분이 쓴 기사이긴 한데요 @_@

일단 지금 하고 있는 활동 &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사람 이야기라서 퍼다놓아요~_~


일제고사가 이제 다다음주고, 날짜로 따지면 열흘 정도 남았네요.

그전까지 거의 매일 등하교길 홍보를 할 텐데- 쿨럭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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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경쟁 ‘일제고사’ Say NO!

[기고] 청소년 인권활동가 따이루 인터뷰

진재연(사회진보연대)  / 2008년10월02일 15시28분


모두가 일제히, 시험을 보는 ‘일제고사’가 다가오고 있다. 10월 8일에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국가수준기초학력진단평가’를 치르게 되며, 10월 14일-15일 이틀간 초6, 중3, 고1학생들이 ‘국가수준학성성취도평가’라는 이름의 시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에도 이러한 시험들이 있긴 했지만 전체학교, 전체학생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4-5%에 해당하는 '표집학교‘를 선정해 평가하고 그 결과를 교육정책에 반영해왔다. ‘초중등교육법상’으로도 전국일제고사는 표집으로 선정된 학교만 실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교육과학기술부는 올해부터 해당학년 모든 학생들에게 시험을 실시하도록 하고, 서울시교육청은 각 학교에 시험당일 소풍이나 학사일정을 모두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시험의 결과를 4단계로 구분해 공개하고, 지역별 학교별로 성적을 비교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제고사 강제실시에 대해 많은 학부모, 교사, 학생들의 우려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학교의 서열화, 사교육비 증가, 입시에 따른 학교 교육 파행 등, 한국 사회 교육의 문제점들이 더욱 파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는 학생들, 가장 많은 교육비를 지출하는 부모님들, 그러나 입시와 경쟁 속에서 학생들의 꿈과 재능이 사라져가고 있는 사회. 이러한 신자유주의 교육시장화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일제고사 반대’를 외치는 청소년들이 있다. “촛불집회를 보면서, 청소년들의 제대로 된 저항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의지가 막 불타고 있다”는 청소년 인권활동가 따이루도 그 중 한 명이다.

▲  캐발랄 솔직담백 따이루의 뒷모습. 따이루는 오늘도 학교에서, 거리에서 '우리가 원하는 교육'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요즘 따이루(16)는 ‘무한경쟁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 모임’ (cafe.daum.net/say-no) 일을 하느라 하루하루가 무척 바쁘다. 학교를 마치고,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을 만나 회의를 하고 성명서를 쓰고 선전물을 만든다. 또한 기자회견, 온라인 행동, 청소년선언 등 구체적인 실천행동으로 몸을 움직이느라 눈코 뜰 새 없다. 2006년 중학교 1학년 때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ASUNARO)를 만나 활동을 시작한 따이루는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키가 청소년'이라며 ‘우리가 원하는 교육을 만들어 가기 위해 일제고사 반대행동을 함께 하자’고 말했다.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첫째는 시험보기 싫어요. 가장 큰 이유는 그거에요. 시험 보는 게 너무 싫고 이제 지겨워요. (웃음) 그 다음에는 공정택 교육감이 당선 된 이후에 사실상 경쟁교육을 대 놓고 하겠다는 건데, 청소년에게 다가오는 직접적인 정책이잖아요. 이걸 막느냐 못 막느냐가 정말 중요해요. 일제고사 반대투쟁은 앞으로 교육정책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느냐, 이명박-공정택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느냐 하는 갈림길이에요. 그리고 또, 일제고사가 가지고 있는 자체의 문제점이 있어요. 줄 세우기를 한다는 거에요. 그게 지금보다 더 심해진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회에서 공부로 성공할 능력이 절대 없는 따이루에게는 상당히 압박스러운 일이죠.(웃음) 학교 다니는 상황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입시교육이 더 강해진다는 건 인권이라는 가치나 소통하는 교육이 사실상 불가능한 거니까요. 그런 거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갖고 있어서 이 운동을 하고 있는 거죠.


학교가 줄 세우기를 한다는 걸 몸으로 느끼나요?
다른 학교들은 우리 학교보다 더 심하지만. 내 사례만 말하면, 애들을 등수대로 앉히는 거요. 수학선생님이 시험 끝나고 등수대로 앉혔어요. 잠깐 동안 앉혔다가 복귀 시켰지만. 또, 선생님들이 상위권 공부 잘하는 아이들한테 보이는 친절, 엄청난 친절(웃음) 같은 게 있죠. 우리에겐 오지 않는 정보가 그 아이들한테는 가기도 하는 그런 차별이요. 그런 거 통해서 애들을 차별하고 줄 세우기를 하는 거에요. 또, 수학반을 성적으로 나눠서 상중하로 분반을 했어요. 합법적인 우열반 형태인거죠. ‘상’반 애들이 ‘하’ 반 애들한테 “난 ‘상’반 갈게. 얘들아 안녕” 그러고 가요. 그러면 다른 애들이 “미친놈” 그러죠(웃음) 애들은 농담일 수도 있는데, 가벼운 농담 같지는 않은 거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해지고 있어요.


시험이 싫은 이유에 대해 조금 더 말해줄래요?

공부하고 싶지 않은 과목인데 공부를 해야 하잖아요. 나는 옛날부터 수학이란 과목은 정말 싫었어요. 영어는, 영어 성명서를 읽겠다는 목표가 있긴 한데.(웃음) 수확은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기본적인 것만 알면 될 거 같은데. 그런 압박이 너무 싫었고, 압박을 ‘만들어주시는’ 시험이 싫어요. 오늘도 시험 보고 왔어요. 소위 말해서 공부를 거의 포기 한 애들이 있고, 중간 정도인 애들이 있고, 공부에 거의 미친 애들이 있어요. 포기한 애들이랑은 웃고 놀고 얘기하고 그러는데. 오늘도 그러다가 시험시간이 다가오니까 어떤 애들은 장례식 표정으로 공부만하고 있고. 그런 분위기도 너무 싫고. 시험 끝난 다음에 애들이 자꾸 한탄하고 걱정하는 것도 싫어요. 엄마가 패겠지, 어떻게 하냐 그러는 얘기도 싫고요.


친구들이랑 그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 많이 하나요?

할 때도 많죠. 애들은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봐요. 저는 ‘성공’이라는 거 자체도 반대하거든요. 내가 어떤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 성공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건 누군가에 대한 폭력일 수도 있고. 경쟁이라는 게 공정하지도 않은 거고요. 도덕교과서에 나온 말들도 이상하잖아요. ‘도덕’은, 얼마나 이상한 얘기가 많나 보려고 읽어봐요. 이번에 시험 보면서 읽었는데. ‘도덕을 찢어버려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도덕이라는 게 양심이잖아요. 개인의 양심이라는 걸 교과과목에 주입시키고 획일화하는 거죠. 국가에 대한 비판보다 충성을 원하니까. 내가 국가에 대한 뭘 할 수 있는 지 고민해봐 그러잖아요. 문제 풀 때 나와 반대되는 거 찍어야 하는 거니까. 그나마 ‘사회’는 좋아요. 프랑스혁명이나 근현대사는 재미있어요. 사회 같은 과목은 사이사이에 구멍이 많아요.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말랑말랑한 게 있어요.


학교에서는 일제고사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학교 친구들은 몰라요. 학교에서 아직 안 알려줬어요.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어요. 일제고사가 뭐냐? 14-15일 시험 보는 거야. 또 시험 봐? 그런 반응이요. 아마 지금 중간고사 기간이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게 하려고 나름 인심 쓰신 거 같은데. 시험 끝나고 말해 줄 거 같아요. 아마 학원 다니는 애들이나 알만한 애들은 알고 있겠죠. 학원에는 일제 고사 대비반 같은 것도 있으니까. 아는 애들은 알거에요. 아마 중간고사 끝나면 학교에서도 일제고사 대비반 수업이 진행되지 않을까요.
일제고사 반대 온라인 서명 바로가기


일제고사 당일 날 시험거부-등교거부 행동을 준비하고 있죠?

지금까지 등교거부 행동이 몇 번 있었는데, 물론 허당, 굴욕인적도 있었지만(웃음) 저는 제가 고3때나 등교거부 같은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촛불집회, 등교거부, 시험거부 엄청난 발전이죠. 등교거부는 이 사회에서 미성숙하다고 생각했던 청소년들의 가장 수위 높은 행동이에요. 그리고 노동자들이 노동조건이나 생존권을 위해 싸울 때 노동 3권이 있잖아요. 청소년들에게 사실상 교섭권도 없단 말이에요. 청소년들도 학교 안에서 학업에 착취당하는 건데. 저는 이게 진정한 의미의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생도 충분히 노동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노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청소년들이 착취당하지 않기 위한 파업인거에요. 직접적으로 거부함으로서 타격을 주고 구멍을 내는 거죠. 바뀔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에요. 그렇게 구멍을 만들어 우리가 원하는 교육을 요구하는 거죠. 사람들은 등교거부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저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원하는 교육’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데, 저나 아수나로에서 고민하고 있는 건, 그냥 주입식 교육은 아니라는 거죠.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연구해 보거나, 호기심을 갖도록 하는 게 중요해요. 수학 뿐 아니라 국어 영어 사회 과학 다. 주입의 목표가 대학을 가거나 취직하는 거잖아요. 좋은 대기업에 취직하고, 정규직 되는 거. 그 과정에서 경쟁하라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순응 하는 게 진리라는 거잖아요. 비판적인 생각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학생회 탄압하잖아요. 교육이라는 건 민주주의라는 건 도전하면서 토론하면서 만들어지는 거 아닌가요. 권위 있는 교장, 학생부, 교사의 권위에 굴복하게 만드는 건 교육이 아니죠. 교사와 학생이 평등한 관계속에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거죠. 교사가 항상 새로운 정보를 주는 역할이 아니고 서로 주고 받는 관계 될 수 있는 거니까. 목표가 단순히 대학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고민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교육 만들고 싶은 건데. 지금까지 경쟁에서는 반대방향으로, 그게 불가능한 방향으로 가는 거죠. 소통하는 교육은 경쟁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거든요. 애들한테 정보 주입하기도 바쁜데, 애들 삐딱한 말 듣고 있으면 학교에서는 성이 안 차겠지. 경쟁교육 하지 않는 한 불가능 할 거라고 생각해요. 일제고사는 그런 것들을 없애는 게 아니라 더 강화시키는 거니까 문제인거에요.


학교 친구들이 따이루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나요?

네. 알죠. 학교에서 인권동아리 활동을 같이 하기도 해요. 어느 때는, 애들이 너 어디 갔다 왔어? 너 또 시위 갔냐? 그러면 저는 비정규직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막 얘기 하죠. 그러면 같이 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제가 무슨 강연하는 것 처럼 애들이 모여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시험 때는 그런 게 안 되죠. 가끔 나쁘게 말하는 애들도 있어요. 근데 그냥 욕하는 건 괜찮은데, ‘야, 호모’ ‘병신’ 이렇게 소수자를 비하하는 말을 할 때는 정말 싫어요. 사람들이 다 ‘이 놈의 교육 갖다 버려야지’ 그러잖아요. 애들도 다들 이런 교육, 학교 다 싫어하는데.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우리가 바꾸기 위한 행동이 필요한거죠. 평범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액션이라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 같은 바보나 공부 못 하는 애, 돈 없어서 사교육 못하는 애들이나 부모들이 나서야 하는 문제인거에요.


앞으로 뭐하고 싶어요?

지금 내가 사는 지역에서 청소년 축제를 준비하고 있거든요. 이번 일제고사 반대행동이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운동권들은 항상 시작인데 ing가 안 돼요. (웃음) 그리고, 학생의 날 (11월 3일) 행동도 잘 하고 싶어요. 우리가 원하는 교육에 대해 교과부나 이명박도 그냥 무시 할 수 없을 거고. 저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키가 청소년이라고 생각해요. 청소년들이 가장 억압당하고 있잖아요. 저항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청소년들은 발칙하잖아요. 청소년들이 발칙한 게 철 없다고 표현되는 건데, 현실과 타협되지 않는 다는 거죠. 운동도 관성화 되었잖아요. 전교조가 교육주체 결의대회 하는 건,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거잖아요. 그런 거 말고 열정을 갖고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거죠. 청소년이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고 세상을 바꾸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을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걸 말하고 싶어요.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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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9. 4. 17:25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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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으로 접는 타입의 A4구요~
전체디자인은 밤의마왕 님이, 그리고 일부 사진 첨가랑 텍스트는 공현이 했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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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고사, 학교자율화(=학교학원화 또는 교육포기), 고교등급제, 국제중, 대입규제폐지... 바로 지금 경쟁력을 높인답시고 가고 있는 교육의 모습이야. 안 그래도 미쳐있던 교육이 더 미치려나 봐. 안 그래도 받기 힘들던 교육이 더 힘들어지려나봐.

  정말 사람들이 행복한 교육, 청소년의 인권이 보장되는 교육이 뭔지, 우리들이 직접 나서서 가르쳐줘야 되지 않겠어?


입시경쟁의 중심에서

인권을 외치다



“피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으면
                      싸워서 바꿔야 합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cafe.naver.com/asun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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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경쟁의중심에서인권을외치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1986년 자살한 중학생의 유서 中

  난 1등같은것은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난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헤어짐에 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 너무나 모순이다, 모순. 세상은 경쟁! 경쟁! 공부! 공부! 아니 대학! 대학! 순수한 공부를 위해서 하는 공부가 아닌, 멋들어진 사각모를 위해, 잘나지도 않은 졸업장이라는 쪽지 하나 타서 고개 들고 다니려고 하는 공부.
......매일 경쟁! 공부! 밖에 모르는 엄마. 그 밑에서 썩어들어가는 내 심정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까? 난 로보트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돌멩이처럼 감정이 없는 물건도 아니다. 밟히다밟히다 내 소중한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떤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그 성적순위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위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




“하지만 사회는 내게 그걸 바라지 않아”
2007년 자살한 중학생의 유서 中

인간은 항상 자유를 추구하는구나.. 나도 자유로운 사람이되야지. 라고 생각했었어.
근데 현실은 너무달라. 상상 이상으로 너무달라.
공부힘들어서 자살하는 사람들.. 다 남이야기 같았어. 하지만 아니야.
공부공부공부공부. 좁디좁은교실에 선풍기4대히터2대. 40명이 넘는 아이들.. 같은곳에서 각기 다른재능을지닌 아이들이 오직 한가지만 배우고 있었어. “대학가는법”.
슬펐어.
……난 사실 평범한 여중생일뿐이야.
노래부르길좋아하고, 그림그리길좋아하고, 수다떨길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놀기를 좋아하는,
하지만 사회는 내게 그걸 바라지않아.
같은머리 같은옷 그리고 같은공부.
쫍디쫍은 교실에 아이들을 구겨넣고, 선풍기4대와, 히터2대. 그리고 선생님..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교육비판&선동 전단지 ㅋㅋ)







3페이지


경쟁적 교육은 인권침해다!

  다들 “교육에 문제 있다.”라고 씹기 바쁘지만, 정작 교육을 바꿔보려는 사람들은 별로 없지. 어떤 사람들은 학벌과 입시, 경쟁과 차별은 당연한 거라고, 바꿀 수 없다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말하지.
  그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육 때문에 목숨을, 행복을, 꿈을 잃고 있지.
  교육 같지도 않은 교육 속에서, 인권도 행복도 삶도 무시되고 있어. UN아동권리위원회도 한국의 경쟁적 교육이 청소년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지. 입시경쟁은 쉬고 놀 권리를 짓밟고, 성적이나 학교에 따른 차별을 만들고, 체벌 같은 폭력의 이유가 되고, 획일적인 교육을 만들지. 이런 상황에선 ‘선택’ ‘자유’ 같은 건 다 거짓말이야. 기본환경 자체가 강압이잖아?
  정답만 강요하는 시험과 점수라는 숫자들로 우리를 값매길 수 있다는 발상은 정말 토 나와. 입시경쟁은 모두에게 안 좋아. 획일적이고 점수 따는 법이나 가르치는 게 제대로 된 교육이나 자기개발일 수는 없어. 입시경쟁은 교육권/발달권을 짓밟는 명백한 인권침해야.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으면 싸워서 바꾸자!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학벌학력차별금지 같은 것들은 좀 더 살만하고 행복한 교육을 만들기 위한 시작이고 한 걸음이야. 다양하고 평등한 사회, 인권을 존중하는 교육, 민주적인 교육, 모두 가능한 일이야.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순응하지만은 말자. 입시경쟁교육을 거부하자. 이제 우리가 원하는 교육, 새롭고 다른 교육, 우리가 행복한 교육을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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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B 교육 정책, 갑갑해서 목이 메는 우리들

  정부는 “다양성”과 “교육권”을 보장하겠다며 경쟁을 더 빡세게 하고, 학교와 학원에 대한 규제들을 없애겠다고 해. 시험을 더 많이 보고, 성적을 공개해서 학교와 학생들을 더 줄 세우겠다고도 하지. 정말 갑갑해서 목이 메이지 않니? ㅠ  “다양성”과 “교육권”은 경쟁을 빡세게 시켜서는 이룰 수 없어. 반대로, “다양성”과 “교육권”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서열화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우하고 존중할 때 보장할 수 있는 거야.
  입시경쟁을 없애야 해. 점수로 인간을 평가하는 시험과 서열화를, 반강제적인 학교/학원의 입시교육을 중단시켜야 해. 정작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데, 국가경쟁력 몇 위고 어쩌구 하는 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청소년인권을 위한 기분 좋은 상상&실천

- 일제고사 같은 듣보잡 경쟁교육 정책들에 시험거부 등으로 저항하자.
- 경쟁을 일으키는 대학서열화를 깨고 대학평준화, 무시험 입학 등을 도입하자.
- 학력, 학벌, 학과, 직업 차별을 최소화하거나 없애기 위한 변화를 만들어 가자.
- 모두를 위한 공짜(무상)교육과 환경, 시설 개선을 위해 교육예산을 늘리게 하자.
- 교육과정과 수업내용 정하는 것에 청소년들의 민주적참여를 보장하게 만들자.
-                                                           (상상력을 발휘해서 직접 채우기 ^^)



Let's ASUNARO

  핀란드 같은 나라의 교육들은, 적어도 한국보다는 좀 더 청소년들의 인권과 행복을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더 나은 교육은 분명히 가능합니다. 프랑스와 칠레 등에서는 청소년들이, 때로는 교사들이나 학부모들 등과 함께, 직접 행동하여 교육 정책들을 바꿔냈습니다. 당연한 권리가 짓밟힐 때, 필요한 것은 비겁한 침묵과 순응이 아닌 저항입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바로 당신, 바로 여러분이 같이 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소년인권행동 ASUNARO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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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현님, 이화여대 교육학과 오욱환 교수의 <한국 사회의 교육열 : 기원과 심화> (교육과학사) 혹시 읽어보셨나요?
    제가 본 책들 중에서 이 '학벌출세사회' 의 기원을 가장 잘 밝힌 책이라서요. 제 블로그에도 소개를 하려고 했는데 여차저차해서 미뤄졌습니다. 출세교육론이 지배하는 사회와, 그게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차근차근 밝히고 있으니 한 번 읽어보세요. 각 대학교 도서관에도 있을겁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좀 더 전략적(전쟁용어 쓰기 싫지만...)으로 성공하는데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학벌경쟁에 뛰어드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와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게 그 첫걸음일 것 같아서요.

    (....아하, 그런데 제가 이미 이 책을 추천해드린 적이 있었던 것 같군요. 언젠지는 확실히 기억이 안 나지만^^;;)

    그리고 저도 조만간(언제가 될지는 확실치 않음) 네이버에서 다른 블로그로 이사할 것 같아요. 참다 참다 도저히 안 되겠는 순간이 왔네요.

    2008.09.05 11:57 [ ADDR : EDIT/ DEL : REPLY ]
    • 음 @_@ 네 예전에도 한 번 추천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며서 못 읽고 있네욥

      글쿤요~ 이사하면 알려주세요 ㅎㅎ

      2008.09.05 12:03 신고 [ ADDR : EDIT/ DEL ]
  2. 버람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해봐....

    2008.09.07 18:35 [ ADDR : EDIT/ DEL : REPLY ]
    • 나도 그러고 싶지만... 흠 쉽지 않아 ㅡㅡ;;

      다음 거부터는 그래야지 ㅎㅎ

      근데 저건 내가 디자인 한 거 아니오

      2008.09.08 12:31 신고 [ ADDR : EDIT/ DEL ]

걸어가는꿈2008. 1. 23. 11:11

수능등급제 사실상 폐지...교육계 반발






1. 참세상 기사를 보고 문득 든 생각인데, 저 기사만큼은 표제 뽑는 게 무슨 조선일보 같네요.

기사 내용으로 보면 수능등급제 폐지에 반발한 건 전교조 뿐이고,
다른 교육운동 진영은 대통령인수위원회의 다른 교육정책들 전반에 대해 반대 입장을 내놓은 건데...

마치 "교육계"가 수능등급제 폐지에 반발한다는 식으로 표제를 달고 있어요 -_-







2. 수능등급제는 없어지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해요.

일단 수능등급제는 굉장히 불합리하다는 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죠.

60점 52점과 51점이 있는데 60점과 52점은 4등급이고 51점은 5등급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단박에 불합리하다고 느끼잖아요.


물론 저는 수능에서의 점수배점(2점, 3점, 4점 등등)이라거나,
그런 시험으로 인간을 평가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합리하고 지금과 같은 경쟁적 교육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_-


여하간에 불합리하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입시경쟁 자체가 불합리하니까)

포커스를 "수능등급제"로 맞추는 순간,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불합리한 제도를 불합리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공격을 당할 약점이 생기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쟁점이 입시전형의 방법으로 가버리잖아요?

이래서야 그동안 논술이냐 본고사냐 내신이냐 수능이냐 갖고 치고박던 바보들과 다를 게 없지 않나. -ㅂ-ㅂ-ㅂ-ㅂ-ㅂ-
아 그 바보들이 그 바보들이던가.


수능등급제는 걍 없애도 되니까
입시경쟁폐지, 대학평준화나 좀 하게 만들자고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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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1. 8. 12:02

청소년인권운동의 입으로 입시경쟁교육 앞담화 까기


공현 = 윤종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 청소년인권모임 나르샤

emptyyoon@naver.com / taekyoon73@hanmail.net



◎ 복잡난감한 괴물퇴치 미션


  여기, 괴물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괴물과 싸운다고 뛰어들었다가 그 앞에서 계속 낑낑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우리 모두는 저 괴물에게 괴롭힘 당하고 있다, 저 괴물을 없애야 한다, 우리도 같이 싸우자, 그렇게 말하기는 참 쉬운 일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큰 괴물을 과연 없앨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왠지 괴물한테 먼저 덤벼서 달라붙어 있는 사람의 눈치도 보인다. 그 사람이 먼저 찜해놓았으니까, 오랜 세월 괴물이랑 싸워왔으니까…. 저건 아닌 거 같아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싸우는 방식도 맘대로 해보기 어렵고, 눈치도 보이고, 스트레스도 받고… 여하간 좀 난감하다. 괴물 하나 상대하기도 버거워 돌아가시겠는데, 괴물이랑 먼저 와서 싸우고 있는 저 사람도 상대하기 골치가 아프니, 에휴 걍 때려치면 안 될까 하지만, 때려칠 수는 더더욱 없고….


  음, 대충, 입시경쟁교육 문제에 마주해 있는 내 심정이 저렇다.

  입시경쟁교육의 문제가 청소년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중요하고도 커다란 문제라는 것은, 뭐 웬만한 사람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당근 청소년인권운동의 입장에서도 입시경쟁교육 구조라는 ‘괴물’은, 교육이나 학교에 관련된 청소년인권 문제들 전반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입시경쟁교육은 분명 청소년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다. 또한 시험기간에는 활동 참여율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수험생 시기가 되면(고3, 재수생, n수생 등등)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등, 실제적으로 청소년들이 인권운동 같은 걸 하는 데 상당히 커다란 걸림돌이 되는 문제이다.


  중요한 문제라서 그런지, 공략 난이도도 높다. 입시경쟁교육의 문제는 부모, 교사, 학교장, 학원, 대학, 기업, 정부 등 모두의 이해관계가 긴밀하게 얽혀 있기에 건드리기가 어렵다. 또한 입시경쟁교육과 맞서는 것은, ‘하향평준화’에 대한 보수 언론들의 공포감 조성과, ‘국가경쟁력’을 운운하는 뿌리깊은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 행동양식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입시경쟁교육의 문제가 아주 커다랗고 강고한 구조 - 시스템과 싸우는 일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입시경쟁교육의 현실을 자신들이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지 못하고 쉽사리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그런데 동시에, 나를 포함해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입시경쟁교육의 문제를 청소년인권운동이 다루는 것에 대한 ‘긴장’을 갖고 있다. 그런 긴장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자세한 것은 본문에서 언급하겠다.


  그러나 그 어떤 긴장과 곤란한 점이 있더라도, 현실에서 입시경쟁 문제와 부딪치고 있는 나는 입시경쟁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괴물 앞에서 먼저 와서 싸우고 있던 사람이 불편하다고 해서 괴물과의 싸움을 포기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아니, 오히려 이런 긴장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입시경쟁교육에 대해 말해야 한다. 청소년인권운동이 긴장감과 불만과 상처를 덮어가면서 ‘교육운동’과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청소년인권운동의 입장에서 입시경쟁교육 문제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인권의 입장에서의 교육 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안의 방향을 만들어내야 한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 교육운동의 담론들이 견지하고 있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정치(精緻 : 정확&치밀)하게 반박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운동이 반복해온 담론을 답습하는 형태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다른 입장에서의 이야기가 우리에겐 분명히 있다. 단지 그것이 명료하게 표현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다원적 평등’ 식칼로 괴물 회 뜨기


본론에 들어가며, 문제의식에 대한 맛보기


  한국의 경쟁적인 교육 환경이 아동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니 개선하라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를 굳이 인용할 것도 없이, 입시경쟁교육의 문제는 다방면의 청소년인권 침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 입시경쟁 때문에 강제자습, 강제보충수업, 심야학원 등이 횡행하게 되고 이 때문에 청소년들의 자유권, 여가권, 휴식권, 건강권 등이 침해되며,

 ▲ 청소년들에게 입시경쟁체제를 강요하기 위해서 학교, 학원, 가정에서 성적이 안 좋은 학생을 체벌하고 통제하고 강압하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며,

 ▲ 성적비관이나 입시경쟁이 주는 스트레스와 절망감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들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한 해 수십 명에 이른다.

 

  여기서 내가 이와 같은 입시경쟁교육의 ‘영향’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입시경쟁체제 그 자체 - 경쟁교육체제 그 자체를 인권의 입장에서 어떻게 볼 수 있는지랄까나, 여하간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물론, 입시경쟁교육의 ‘영향’들은 입시경쟁교육과 분리할 수 없으며,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안도 이를 분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인 내가 편하기 위해서 이렇게 대략 화제를 한정한다. 이 글의 결론부터 미리니름하자면, 나는 입시경쟁 및 현재의 초중등교과과정 등이 그 자체로 사람들의 평등권, 교육권, 발달권을 근본적으로 침해하고 짓밟고 있다는 주장을 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평등권은 단지 계층간 지역간 불평등이나 이른바 양극화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교육에서의 평등”에 대한 인식 또한 청소년의 입장에서 재정리하고자 한다. 재정리된 “교육에서의 평등” 개념은, 계층 및 지역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을 중심 문제로 두지는 않을 것이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평등이란 단지 모든 것을 똑같이 대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평등의 이념을 나타내는 정확하고도 포괄적인 표현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 분야에서 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나기에 경쟁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에게 더 좋은 보상을 주는 것은 평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연한 듯 보이는 이 상황도 사실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당연하지가 않다.

  과연 이 사회가 가치있게 평가하는 ‘능력’이란 무엇이며 그 평가는 공정하고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능력에 따른 보상은 적절하고 합리적인 것인가? 너무 과도하거나 부족하지는 않나? 그리고 과연 교육체계가 어느 정도 독점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평가’와 ‘경쟁’이, 다양한 인간들의 다양한 존재 방식, 다양한 성질들을 모두 공정하고 평등하게 평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현재의 입시제도는 시험 문제 잘 푸는 사람, 암기 잘 하는 사람이 좋은 점수를 받으므로 진짜 인재를 길러낼 수 없어서 문제다.”, “사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 유리한 입시제도들이다.”와 같은 비판들이나 “수능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크게 결정나는 불합리한 제도다.”, “학벌(출신 학교)이 불합리하게 너무 많은 걸 결정짓는다.”라는 식의 비판들이 있다.

  분명히, 현재 교육의 목표가 허울 좋은 교육기본법이나 국제조약 같은 데 써놓은 것과는 달리, 사실은 사람들을 사회에 더 잘 순응하게 만들고 더 잘 통제당하게 만들고 “국가경쟁력”을 위한 인적 자원을 생산해내는 데 있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라고 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목적은 확실하게 바뀌어야 하며, 듣기 좋게 써놓은 목적과 실제 목적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거나 교육 시스템이 그 목적을 좀 더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질문과 비판들도 중요하다. 합목적성과 동시에 경쟁 자체의 공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교육’이라는 이름을 단 현재의 경쟁 시스템이 사실은 단지 현재 사회체제의 재생산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또는 교육이 그 자체의 올바른 목적(말하자면, 민주시민 양성, 인권의식 탑재, 총체적이고 적절한 발달,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위해서 작동하지 않고 사회적 재분배 등을 위한 수단이지는 않은지,(‘능력’을 평가해서 사회적 자원을 분배한다는 ‘명목’하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합리와 불평등과 불의가 생기지는 않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질문들, 이런 비판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어느 정도 검토가 이루어져 왔기에 여기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는 좀 종이나 모니터 화면 등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솔직히 조금 상투적이고 재미없기도 하다. 내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과연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 경쟁시키고 이에 대해 보상을 제공하는 입시경쟁교육 시스템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다양한 인간들에게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또한 그런 시스템이 얼마나 인간들을 고려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다원적 평등 : 우리는 평등하게 다르며, 다름으로써 평등하다.


  이제부터 나는 ‘다원적 평등’이라는 개념적 식칼로 입시경쟁교육 괴물을 회 뜨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원적 평등’이라는 식칼이 대체 뭔지,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부터 해야 한다. ‘다원적 평등’ 식칼을 만들기 위해, 먼저 간단한 우화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토끼와 거북이가 육상경주를 했는데, 당연하게도 압도적인 차이로 토끼가 이겼다. 이에 불만을 가진 거북이는 이번에는 육상이 아니라 바다에서 수영경주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당연하게도 압도적인 차이로 토끼가 졌다. 오기가 생긴 토끼는 1년 동안 죽어라 수영만 연습해서 세상에서 가장 헤엄을 빠르게 치는 토끼가 되었고, 거북이에게 다시 도전했다. 훈련의 성과가 있었는지 토끼와 거북이의 차이가 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거북이와의 차이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둘의 경주 소식을 들은 상어가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먼저 도착한 거북이를 잡아먹었고, 거북이보다 좀 뒤처져서 헤엄치던 토끼는 상어가 거북이를 먹는 것을 보고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내가 급조한 거긴 하지만(-_-), 이 우화는 경쟁의 기준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육상에서 빠른 것과 수영에서 빠른 것, 그 중에 뭐가 더 우월한가? 아니 애초에 빠른 것이 느린 것보다 더 우월한가? 평등을 정의하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말은 참 쉬워보이지만, 실제로 이를 구체화시키려고 할 때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는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리고 다른 것을 어떻게 다르게 대우해야 하는가?


  교육 불평등을 다루는 기존의 조리도구들 중에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건, 바로 ‘경제적 수준에 따른 교육의 차이’라는 식칼이다. 이는 경제적 수준이 교육의 격차와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한 가지는 교육은 ‘개인’의 능력과 적성을 개발하고 발달시키고 평가하여 적절한 보상을 주는 체계인데 ‘개인’의 능력과 경제적 수준은 별 연관이 없으므로 이것이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다. 다른 한 가지는 경제적 수준에 따른 교육 격차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재생산하고 착취 관계를 공고히 한다는 인식이다. 두 번째의 재생산에 대한 이론 또한 매우 의미있는 주장이며 근대 교육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일단은 ‘개인’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려고 한다.

  좀 까칠하게 얘기하자면, ‘개인’의 능력에 대한 주류적인 소박한(?) 신앙은 다분히 근대 개인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즉, 개인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 능력이나 적성의 차이는 선천적인 개인적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빈부격차 등으로 인한 교육 기회의 불평등과 보상의 불평등은 그런 개인적 차이를 온전히 드러내고 반영하는 데 방해가 되는 왜곡이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실제로 개인의 능력이나 적성, 소질 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그 개인의 능력이나 적성, 소질이 지니는 가치는 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 격차라는 사회적 조건의 차이 때문에 개인의 능력, 적성, 소질이 달라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므로 이를 불평등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단지 경제적이거나 지역적인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면 개인의 자유로운 능력이 마음껏 활개치게 되는 그런 단순한 게 아닌, 좀 더 복잡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잠시 국제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의 발달권과 교육권에 대해서 여러 조항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부분들이 있다.


제 27 조

1. 당사국은 모든 아동이 신체적·지적·정신적·도덕적 및 사회적 발달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가짐을 인정한다.

2. 부모 또는 기타 아동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자는 능력과 재산의 범위안에서 아동 발달에 필요한 생활여건을 확보할 일차적 책임을 진다.

3. 당사국은 국내 여건과 재정의 범위안에서 부모 또는 기타 아동에 대하여 책임있는 자가 이 권리를 실현하는 것을 지원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특히 영양, 의복 및 주거에 대하여 물질적 보조 및 지원계획을 제공하여야 한다.


제 29 조

당사국은 아동교육이 다음의 목표를 지향하여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가. 아동의 인격, 재능 및 정신적·신체적 능력의 최대한의 계발

나. 인권과 기본적 자유 및 국제연합헌장에 규정된 원칙에 대한 존중의 진전

다. 자신의 부모, 문화적 주체성, 언어 및 가치 그리고 현거주국과 출신국의 국가적 가치 및 이질문명에 대한 존중의 진전

라. 아동이 인종적·민족적·종교적 집단 및 원주민 등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 평화, 관용, 성(性)의 평등 및 우정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유사회에서 책임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준비

마. 자연환경에 대한 존중의 진전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 굵게 한 강조는 내가 했다.)


  맨날 질문만 하는 거 같아서 미안하지만, 여기에서 ‘발달’이란, ‘계발’이란 무엇일까? 모호한 개념이며 당사자들 외엔 누구도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영역이긴 하지만, 사회가 그것을 보장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충이나마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발달의 다양한 가능성들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고 이를 지원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발달권’과 ‘교육권’에 대한 이야기는 ‘다원적 평등’을 이루는 중요한 부품이 되므로 꼭 기억해둘 것을 권장한다.

 

  다시 처음에 제시했던 우화로 돌아가보자. 내가 만든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고전적인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와 비교해서 읽어보자. 두 이야기를 비교해서 읽으면, 주류적인 가치 - 능력만이 유일한 ‘능력’인 것처럼 평가받고 나머지 능력은 비가시화(안 보이는 것처럼 은폐되는 것)되거나 평가절하 당하는 현상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동화책에서, 교과서에서 배워온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서는 결코 거북이가 토끼보다 수영을 더 빨리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영은 기본적으로 땅에서 생활하는 동물인 인간에게는 달리기보다 덜 주류적인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거북이가 토끼들과 함께 교육받으며 성장했다면, 수영 따위는 해볼 기회조차 없었다면 그 거북이의 발달권은 보장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거북이들 중에도 달리기가 토끼보다 훨씬 빠른 슈퍼 거북이가 있었다면? 이런 거북이에게는 달리기의 기회 또한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달리기를 잘한다고 해서 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건 잘하냐 못하냐의 문제라기보다는, 각 사람들의 행복, 선호, 발달, 자기계발, 자존감 등의 문제이며 기회의 문제이다.) 물론 수영과 달리기 외에 다른 고려해야 할 가치들, 능력들, 소질들이 많다. 때로는 상어에 잡아먹히지 않은 토끼처럼, 수영이 느린 것 또는 어중간하게 느린 것이 장점일 때도 있다.

  중요한 건 온갖 다른 능력들과 소질들, 적성들을 어떻게 평등하게 평가하고 대우하고 보장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결국 이는 사회적으로 중시하는 가치의 문제와 연관된다. 어떤 사회가 A와 B라는 가치-능력만을 중시한다면, 그 외의 다른 모든 능력과 소질, 적성들은 평가절하되거나 비가시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능력과 소질, 적성들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권리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꼭 능력이나 소질, 적성이 아닐 수도 있으며 거기에 경제적 조건, 지역적 조건, 장애/비장애, 성적 지향, 병력 등 다른 사회적 조건들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요컨대, 발달권과 교육권을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다원성이다.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말은 엄밀하게는 “다른 것은 평등하게 다르게”라고 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가치들을 위계화․서열화하는 것은 그 자체로 평등을 저해한다. 따라서, 평등은 근본적으로 다원주의적이며 다원적 평등만이 평등일 수 있다. 한 가지, 또는 소수의 기준만을 고려한 평등은 총체적인 평등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러한 발달권과 다원적 평등의 개념은, 전통적으로 평등을 제창해온 사람들이 받아야 했던 공격 - 즉 전체주의라거나 획일화라는 공격을 부정한다. 그것은 다원주의를 근간에 깔고 있으며,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인간의 관계가 진정으로 인간적이며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의는 신의로만… 교환되는” 사회, 개인적 자유의 실현이 사회 모두의 자유를 증진시킬 수 있는 사회,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이념이다.


  다원적 평등의 개념은, 간단한 ‘질’과 ‘양’의 개념으로 바꿔서 표현할 수 있다. EBS에서 했던 그림 그리기 프로의 밥 아저씨가 “참 쉽죠?”라고 하는 립서비스랑은 다른 의미로, 진짜 간단하다. 사과 6개와 포도 20개는, 결코 그 개수를 비교해서 포도가 더 ‘좋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단순히 크기가 다르다는 이야기라면 물론 저울에 달아보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의 문제라면 이는 측정 불가능하다. 또한 사과가 약으로 쓰일 수 있는 희귀한 병에 걸린 환자에게는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를 떠나서 사과의 가치가 훨씬 높을 것이며, 포도로 포도주를 담그거나 하려는 사람에게는 사과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파스칼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집단들이 존재한다. 강한 자들, 선남선녀들, 똑똑한 사람들, 독실한 신자들. 이들 각자는 다른 곳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에서 군림한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서로 만나며, 또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어리석지 않은가? 왜? 그들 각자가 지닌 우월함은 서로 그 종류가 다른 것들이지 않은가! ...... 우리는 서로 다른 자질들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무를 지고 있다.

- 파스칼


  본래, 질적으로 다른 것들은 교환 불가능하다. 물론 특정하고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질적으로 다른 것들이 양적으로 교환된다. 나한테 보리가 필요한데 너는 계란이 필요하니까, 보리 1포대와 계란 20개를 교환하자, 라는 식으로. 이 교환은 화폐나 다른 뭔가가 매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각 사람이 부여하는 가치의 질과 정도가 모두 다를 수 있고 조건과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게 되기 때문에, 양적으로 통일될 수 없으며 보편적으로 계량화할 수도 없다. (이걸 양적으로 계량하려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작동 원리 중 하나이다.)

  ‘질적으로 다른’ 여러 가치, 여러 능력들과 소질들을, 서열을 매기는 ‘양적인 방식’을 통해서 평가하고 대우하는 것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다른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특질들, 소질들, 능력들에 대해서 그것을 모두 다르게 대우하고 평가하고 존중해야 하며, 가치를 위계화하거나 서열화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 가치의 다원성을 중심으로 한 평등, 그것이 다원적 평등이다.


  물론 우리는 다원적 평등이라는 식칼을 휘두를 때, 몇 가지 조심할 사항이 있다는 걸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평등보다 우선하는 가치로서 존중되어야 할, 인간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존중이나 기본적 자유와 인권의 신장 등은 다원적 평등의 적용에서 예외적인 지위일 수 있다. 또한 실제로 구체적인 사회는 무한히 다원주의적일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무한히 다양성을 보장하고 무한히 다원주의적인 사회는 개념적으로 가정할 수는 있지만 실재할 수는 없다.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는 무한한 가치와 성격들을 모두 똑같이 추구한다는 것은 아무런 속성이나 특징이 없는, 비역사적이고 비실재적인 사회 외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가치들이 다른 가치들보다 더 우월하고 유의미한 것으로 대우받는 현상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현실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다만 다양성의 지평을 계속해서 넓힘으로써 개념적으로 완전한 평등에 근접해갈 수 있을 뿐이다.


※ 다원적 평등의 ‘다양성’에 대해, 생태계 다양성과 비슷한 의미에서 해석하고 정당화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여러 다른 사회 상황 등을 고려 가능하고, 다른 사회 상황에서는 지금과는 다른 가치, 다른 능력과 소질이 더 유리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의 전반적인 다양성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것이랄까? 하지만 나는 일단은 다원적 평등을 인간의 권리(평등권, 발달권)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데 만족하겠다. 다양성을 사회의 생존과 발달에 유리하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다양성의 근거 자체를 뒤흔드는 반격의 소지를 남기는 것일 수도 있다. 즉, 획일화가 사회의 생존과 발달에 유리한 특정 상황에서는 전체주의도 정당하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차라리 홍정훈이 『비상하는 매』에서 주장한 대로 삶의 목적은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일 수도 있겠지만….



  다원적 평등에 대한 기초적인 이야기는 대충 한 것 같으니, 이제 직접 현재 교육의 배를 칼로 가르고 뼈를 발라내면서 이 식칼을 써먹어보자.


  현재의 입시경쟁체제는,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등 몇 개의 과목들에 관해 출제된 오지선다/단답형 문제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이 정확하게 정답을 맞추느냐를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서열화한다. 물론 요 몇 년 사이에는 과거에 비해서 출석점수, 봉사시간, 논술, 예체능 실기, 자격증 등 다양한 것들이 입시에 반영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가치’의 다원화가 아닌 입시 ‘전형’(방식)의 다양화에 불과하다.

  가치의 다원화와 방식의 다양화는 전혀 그 의미가 다르다. 방식의 다양화는, 물론 한 가지 방식만으로 평가할 때보다는 약간 더 가치의 다원화 현상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효과는 극히 제한적이며, 입시 방식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 가치를 다원화시켜주지는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입시 방식이 여러 개가 생겼다고 해서 그것들이 현재 학교에 다니면서 입시에 직면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삶, 진로, 꿈들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란 거다.

  아무리 입시 방식들을 내신이 어쩌구 논술이 어쩌구 수능이 어쩌구 본고사가 어쩌구, 특기자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만들더라도, 그런 방식들을 통해 평가하고 서열화시키는 가치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정말 극소수의 예술적 학문적 경우를 제외하면, 현재의 공교육이 평가하려는 가치는 대동소이하다. 얼마나 주어진 환경에 잘 순응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는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주어진 문제를 얼마나 빠르게 ‘해결’하는가? 얼마나 문제 낸 사람의 의도를 잘 추측하여 ‘정답’을 잘 찾는가? 얼마나 주류적인 기술을 잘 구사하는가? 얼마나 계량화되고 정식화된 주류적인 교과서의 지식들을 잘 외우고 잘 사용하는가? 얼마나 말을 듣기 좋고 유창하게 하고 글을 논리정연하고 무난하게 쓰는가? 그런 기준들에 더해서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글쓰기 등의 국민공통교과목들과 입시 교과목들도 ‘가치’의 관점에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최근 논술이나 몇몇 방식의 시험들은, 대학의 서열에 따라 평가하는 가치들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울대나 연세대의 논술 문제는, 전남대나 경북대의 논술 문제에 비해 더 날카로운 사고와 더 많은 교과서 외의 지식들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또한 결국 인간의 풍부하고 다양한 가치, 능력, 소질, 적성들을 온전히 평가하기 위한 것들이 아니라, 지식기반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능력들을 좀 더 차별화해가며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의 입시경쟁교육은, 말하자면 가치의 독과점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육상경주 중에서 800m 달리기를 잘하는지 허들 경주를 잘하는지 100m 달리기를 잘하는지 마라톤을 잘하는지… 그런 식으로 다양한 육상경주의 방식들을 통해 경쟁하더라도 결국 거기에서 평가하는 가치들은 육상경주에 필요한 순발력, 지구력, 다리 근력, 달리기 자세, 등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모두 질적으로 다르고 다양한 능력, 적성, 가치들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소수의 기준들 ― 말하자면 수학문제를 잘 푸는가, 언어영역 문제를 잘 푸는가, 수능영어를 잘 해석하는가, 수행평가 숙제를 열심히 해오는가, 기술 자격증을 많이 따는가 등등 그런 것들 ― 만으로 경쟁시키고, 그것으로 그들의 존재의 가치들을 평가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불평등하고 폭력적이다. 현재의 입시경쟁교육은, 사람들의 발달권과 교육권을 심각하게 제한하거나 저해시키며, 일원적인 가치체계에 기반한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써, 인간의 존재에 대한 다양한 차별을 낳는다. 현재의 주류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몇몇 요소들 ― 능력들, 재산 정도, 상품성, 정체성 등 ― 만이 우대를 받고 그밖의 것들이 주변화되고 무시되는 현상은, 인간 전체에 대한 왜곡과 차별을 낳는다.


  따라서 다원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육 방식, 교육 내용, 교육 과정 자체를 완전히 갈아엎고 재구성해야 한다. 학교에서 체득하게 되는 순응적 생활방식과 교과서의 지식들이 진리(?)의 위치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은 인정할 수 없다. “실업계는 직업교육 인문계는 대학진학” 식의 분리는(물론 실업계 학생의 다수가 전문대를 진학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 분리일지 의문이지만) 대학진학을 통해 고학력과 학벌을 획득하는 것을 더 우월한 가치로 평가하는 현실에서 가치의 서열화와 불평등을 가속화시키는 것일 뿐이다. 대학서열화와 학력 및 학벌로 대표되는 차별 현상은 물론이요 학과간, 분야간 불평등 또한 다원적 평등을 추구하는 교육에서는 있어서는 안 된다.

  경쟁을 중심으로 한 교육은 필연적으로 가치의 독과점 체계와 함께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쟁은 교육의 중심 가치가 되어선 안 된다. 보수 언론 같은 데가 종종 경쟁, 서열화를 다양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다. 경쟁과 서열화는 독과점된 가치체계에 기반하여 인간을 평가하고 구분할 뿐이지, 인간의 여러 가지 입체적인 차이들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이런 경쟁을 중시하는 이야기는 보통 “국가경쟁력”과 같은 국가주의적 주장, 그리고 “효율성” “경제성장”과 같은 자본주의적 주장들과 함께 몰려다니는데, 인간의 권리와 다양성, 평등의 추구를 근간에 두는 교육과 국가주의나 자본주의처럼 인간을 수단화하고 ‘인적 자원’으로 취급하려는 주장들은 사이가 매우 안 좋을 수밖에 없고 만나기만 하면 싸우게 되는 건 당연하다.

  이처럼 다원적 평등의 교육은, 현재의 입시경쟁교육과 학교 교육 체계, 그리고 국가주의 및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 체계 전반과 충돌한다.


  교육을 통해서 계급과 계층이 재생산되는 현상은, 공교육 시스템이 평가하고자 하는 기준들이 대체로 부유층의 사람들에게 유리한 데서 기인한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학습시키는 내용들이 사회의 주류적이고 지배적인 가치를 반영하고 있으며, 학교에 취학하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언어 환경, 지식 환경, 문화자본 등은 학교에서의 ‘성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교육이나 유학 등을 통해서 학교에서 평가하는 주류적인 가치와 능력들을 향상시킬 기회 또한 부유층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갖고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내가 경제적으로 상위에 있는 가정에 속하는 청소년이 불평등 구조에서 상위를 차지한다고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원적 평등의 입장에서는 가치의 획일화와 서열화 자체를 비판하기 때문에, 주류적인 독과점 가치체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누구는 더 갖고 누구는 덜 갖기 때문에 문제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이야기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경제적인 문제가 획일적 불평등을 만드는 하나의 요인임은 분명하고, 빈곤층의 청소년들은 다양한 삶을 모색해볼 기회조차도 더 적은 불평등 속에 놓여 있다. 경제적인 요건이 차별과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가치의 독과점체계에서 주요하게 작용하는 요소 중 하나이며, 빈곤층이 부유층에 비해 전반적으로 열악한 성장환경, 교육환경을 경험한다는 것은 반드시 인식해야 하는 교육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빈곤층도 입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교육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해서는 안 된다. 내 말은 주류적인 가치체계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의 서열화와 획일화 체계 자체를 비판하고 인간 모두의 발달권과 삶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입시경쟁교육 체계가 부유층에게 더 ‘유리’하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현재의 입시경쟁교육 체계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이 부유층들의 이해관계 때문이라는 식으로 추측하여 이를 정치경제적 문제의식으로 연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유층 가정에 속해있으면서 학원과외 뺑뺑이를 돌고 자신의 적성이나 능력이나 꿈과는 무관하게 정해진 코스를 따라 판검사, 변호사, 공무원, CEO, 의사, 약사 등이 되어 살아가는, 그런 청소년이 온전하게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며 자신의 ‘발달권’을 온전하게 실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부유층 청소년들이 사회적 가치들을 내면화하면서 사회화하기 때문에 자신의 그런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많지 않더라도. 그래서 프레이리는 『페다고지 - 피억압자의 교육학』에 현재의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이루어진 사회를 혁명하는 것은, 피억압자와 억압자 모두의 해방을 이루는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생각할 때, 개인의 ‘자유’나 인간의 본성이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청소년들은 스스로 입시경쟁과 사회의 현실을 파악하고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체제에 순응하면서 사교육이나 영어공부, 입시준비와 취업준비 속에 뛰어들어 살아가고 있다는 게 더 타당할지도 모르며, “너희는 온전히 행복하지 않아!”라거나 “너희는 너희의 권리를 침해받고 있어!”라고 외치는 것은 오만이거나 독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사회,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또한 나 자신과 내 몇몇 친구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입시경쟁교육과 학교 교육, 사회 속에서 불만, 불안, 불행 같은 느낌들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독립적 개인의 ‘자유’ 같은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 그건 분명히 개인의 ‘자유’라는 신앙에 근거하여 사회를 비판하는 ‘순진한’ 주장들을 해체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우리의 윤리 또한 해체한다. 사회 문제를 다룰 때 사람들이 자발적인지 외부로부터 강제당하는지를 논하는 것에는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사람들 또한 사회문제를 구성하는 구조의 일부이며, 중요한 건 그들이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가 아니라 (자발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상황이 바람직한지 바람직하지 않은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내가 주장하는 대로 욕망하고 살아야 한다고 할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육과 사회에 대해 주장할 수밖에 없으며 또 그 실현을 위해 내 욕망에 따라 노력할 것이다. (뭐, 막간에 잠시 끼어든 변명이었다. -_-)



  나는 “가치의 독과점체계”, “일원화”, “경쟁”, “획일화”, “서열화” 등의 말이 단지 교육이나 입시경쟁에만 적용되는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전반적인 특징이며, 교육은 단지 그런 특징이 나타나는 한 영역일 뿐이다. 따라서 ‘다원적 평등’과 ‘발달권’, ‘평등권’ 등의 개념에 근거를 둔 입시경쟁교육에 대한 비판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도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더 중시되고 더 인정받는 특질이나 가치들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며, 자본주의는 그런 경향을 좀 더 강화하고 체계화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 여하간에 그런 데까지 가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일단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근대 사회에만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질적으로 다른 것들은 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데 그것이 시장에서 정해진 “가격”을 가지고 거의 완전하게 교환가능하고 비교 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방식이다. 사람들의 고유의 다원화된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소비” “소유” “효율적 생산” “상품성”과 같은 몇몇 방식으로 가치를 제한시키고 사람들을 평가함으로써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며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대략 일원화와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원화는 가치들을 비교 가능한 하나의, 또는 소수의 가치로 환원하여 양적으로 비교하려는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근대 사회는 그런 일원화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경쟁시킴으로써 통제하고 사회화시켜서 이윤을 극대화한다. 여기서 소수의 가치란, 우선 자본의 증식 = 이윤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하며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이 되는지 여부를 말한다.

  입시경쟁교육은, 어쩌면 이러한 근대 자본주의적인 방식을 사람들에게 학습시키고 그것을 당연시하게 여기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나는 다원적 평등의 실현이 사회적 가치의 다원성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입시경쟁교육의 문제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전체와 함께 다루어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Imagine, 인간적이고 평등한 교육


  부족하고도 미흡한 실력이지만 대충 회 뜨는 작업을 했으니, 이제 이걸로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지 상상해보자. 다원적 평등이 실현되고, 사람들의 발달권이 가능한 한 많이 보장되는 교육과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이 이야기는 그다지 구체적인 얘기는 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원칙과 틀을 제시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선 다원적 평등은 사회적 가치의 다원주의를 기본으로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다원적 평등은 직업간의 소득 불평등이나 직업에 대한 사회적인 불평등을 해소하거나 최대한으로 완화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에서의 직업에 따른 불평등과 그에 따른 대학 학과 및 종류의 불평등이 대부분 사회의 주류적인 가치체계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다. 과연 의사나 판검사, 변호사, CEO의 업무가 만화가, 청소부, 버스기사 등의 업무보다 세 배, 다섯 배 이상 중요하고 그만큼의 사회적인 가치있는 것들을 더 만들어내는 활동인 걸까, 하는 문제제기는 고전적이기까지 하다. 학력이나 학벌과 마찬가지로 직업영역, 학과 등도 모두 가치 기준이며, 이를 서열화하고 위계화하지 않는 사회는 다원적 평등의 기본 조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가치의 평등이, 교육에서의 가치의 평등 또한 보장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직업이건 어떤 일을 하건 얼마나 일을 하건 무관하게 똑같이 취급하자는 이야기냐면서, 오히려 이는 획일화라고 반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주장은 그런 것은 아니다. 그건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다원적 평등은,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며 다원적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도 임금의 차이나 노동 조건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사회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사회의 다원화는 필연적으로 분야별 직업별 수입이나 조건의 차이를 대폭 감소시킨다. 노동이나 노력에 대한 평가는, 인간의 매우 다양한 사회적 욕망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가 될 것이다. 사람들의 노력의 정도에 따른 격차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은 인권으로서 보장될 것이다.


  다원적 평등을 추구하는 교육은, 현재와 같은 국가독점 교육, 학교 교육을 부정하고 다양한 방식과 내용의 교육을 지향한다.

  교육의 근본은 경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공교육의 ‘정상적 기능’은 사회적 평등을 이루어 내고 사회 내의 차별, 갈등, 교육 격차를 줄이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공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육을 사회적 격차를 줄이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교육의 내용과 사회적 교육적 가치의 불평등, 일원화, 서열화에 대한 고민들은 필요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발달권과 교육권의 최대한의 실현은, 공교육에서는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사회통합과 사회적 격차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교육’은, 인간을 사회에 편입시키고 사회에서 강조되고 통용되는 가치와 방식들을 개인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하지만 교육이란 게 원래 인간을 ‘사회화’시키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포괄적으로는 인간을 사회화시키는 모든 활동에 “교육”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겠지만, 사실 제대로 된 의미의 ‘사회화’는 결코 인간을 현존하는 사회체제에 일방적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성을 발달시키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능력, 적성, 소질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다양한 행복을 모두와 함께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학교 건물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학생’으로서 관리하고 거기에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학생’들을 평가하는 방식의 교육은 근본적으로 가치의 일원화와 서열화를 내포하고 있다. 설령 학교 자체가 국가독점을 벗어나더라도, ‘학교’의 개념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큰 차이는 없다.


  다원적 평등의 교육은, 학교라는 방식을 벗어나서 공동체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내용, 여러 가지 방식의 교육 과정과 교육 제도들을 추구한다. 사회적 공동 육아, 도서관과 박물관, 예술센터 등을 비롯한 지역사회의 여러 시설들과 노동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교육과 토론, 교류, 여러 종류의 교육시설들 등이 다원적 평등의 교육의 모습이 될 것이다. “탈학교” 같은 말은, 고정된 ‘학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진다. 가장 기초적인 초등교육내용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수되겠지만, 그 이후에는 대학 졸업여부나 고등학교 졸업여부 같은 말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다원적 평등은 사회적인 인간의 권리와 발달과 행복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인간적인 교육을 추구한다. 따라서 한 쪽이 지식을 독점하고 그것을 다른 한 쪽에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민주적인 토론과 대화의 방식을 취하며, 또한 사람들의 그때 그때의 컨디션, 욕망, 상태 등을 고려하여 유연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를 위해서 소규모 체제를 유지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을 평가하는 방식은 결코 서열화하고 점수를 매기고 계량하는 방식이 아니다. 모든 다양한 교육 과정 중에서는 따로 평가가 필요하지 않은 것도 있으며, 평가가 필요한 경우에도 여러 사람들이 주관적인 대화와 피드백을 통해서 상호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사회 자체가 총체적으로 인간을 대우하는 방식은, 기본적인 인간성을 평등하게 존중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다르기에 그 다름을 평등하게 다르게 대하는 방식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정말, Imagine - 그러니까 상상 속의 이야기로만 들릴 수도 있다. 또는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말들의 나열로 보일 수도 있다.

  일단 이게 추상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건, 나도 아직 경험해보지도 못한 일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게 무책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앞으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현실을 나 혼자 이러쿵저러쿵 자세하게 규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교육, 이런 사회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 글쎄. 나는 이게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를 말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무한히 다원화된 사회의 존재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할 수는 있다. 다원화는 다원화에 대한 부정 또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서, 저런 교육방식이나 사회 구조 자체에 대해서는,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 아직은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실현하는 것 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증명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뭐 설령 이게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여기에 가깝게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이상이라는 것으로도 충분한 건 아닐까, 지금으로서는?





◎ 괴물 앞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이대기


  이 글을 시작할 때 나는 괴물과의 싸움이 어렵지만, 괴물 앞에서 먼저 와서 싸우고 있던 사람 ― 교육운동과의 관계맺기도 어렵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불쾌하게 받아들이거나, 또는 운동 안에서의 분열을 조장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주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뭐, 그런 생각에 대해서 딱히 반박을 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이건 분명히 섭섭하거나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고, 또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하간 내 생각은, 그 안에서의 긴장과 불평등한 권력관계 등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단합’이나 ‘단결’이란 건 허구이고 올바르지 못하며 차라리 분열하는 게 낫다는 거니까.


  먼저 교육운동에 대해 내가 느끼는 몇 가지 고민들을 털어놓는 걸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먼저, 감히 이런 말을 하기 좀 눈치 보이긴 하지만, 교육운동을 하는 몇몇 단체들은 현재 어느 정도 ‘관성화’되어 있어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고 창조하기보다는 정책적 대안만을 만들어내고 이미 조직되어 있는 사람들을 동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단체들이 만들어내는 교육 문제에서 정책적 대안은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에만 치중하는 단체들의 경우는 현장에서의 실천을 어떻게 끌어낼지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무엇보다도 교육운동 진영은 지금까지 주로 교사나 교수,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왔기 때문에 청소년들을 타자화-객체화하고, 수혜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예 : “입시경쟁에 내몰리는 우리 아이들을 살리자!”와 같은 구호나, “우리 아이들을 해방시켜줘야 한다.” 같은 표현들) 동등한 연대 상대로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다.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극히 일부만이 운동의 현장, 교육현장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을 동등한 연대의 대상, 운동의 주체로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문제의식도 없이 청소년들을 하대하고, “~군”, “~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 입시지옥에서 구해줘야 할 불쌍한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른들이 잘못해서 우리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으며 이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해방시켜줘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쉽기에, 이런 점은 청소년들과의 연대의 과정에서 계속 크고 작은 내부적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되어왔다.


  입시제도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교육운동 진영이 청소년인권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의 문제도 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입시의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고 대부분의 청소년인권 문제는 결국 모두 거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입시문제 해결 이전에 다른 인권 문제에 대해 전개되는 운동은 지엽적이고 표면적인 데 머무르는 것이다.”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하는 것이다.

  입시제도와 같은 커다란 구조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지적에는 분명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은 자신들이 일상적인 행동들(사교육을 시키고, 수업시간에 입시교육을 하고, 체벌이나 두발복장단속 등으로 통제하는 등)을 정당화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런 커다란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하려드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봐야 한다.

  그리고 종종 이런 식의 주장들은 실제로 구체적인 청소년들의 저항이 일어나는 순간들을 무마하고 흐릿하게 만들기도 하며, 또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여러 가지 복합적 문제들을 한 가지(“입시경쟁”, “입시제도”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로만 끼워 맞추려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왜 인권을 무시당하는가? 청소년들을 괴롭게 하고 때론 죽게 만들기까지 하는 지금과 같은 교육은 왜 생겼고 계속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복합적이고 입체적이다. 이를 “이게 다 입시경쟁 때문이다.”와 같은 방식으로 단순화시키려 하는 것은, 어쩌면 입시경쟁과 맞장 뜨는 교육운동으로 청소년들을 포섭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우린 너희와 같은 편이야.”라는 제스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설령 의식적으로 그런 의도를 갖고 있진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내 탓이 아니다.”라고 말하고픈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론적인 면에서, 나는 교육을 통한 부의 대물림 등을 이야기하는 경제재생산에 대한 이론이 한계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 문제를 계급적 입장에서 말하려는 방식은, ‘가정’(가족)을 하나의 경제적 사회적 기본단위로 하여 그 안에서의 이해관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물론 다수의 사회과학적 연구에서 가정을 하나의 기본적인 단위로 간주하는 방식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그다지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여성주의(페미니즘)는 가정 안에서 가부장과 여성 사이에 사회경제적 위치의 차이, 그리고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가정 안에서 보호자와 자녀(아동) 사이에도 사회경제적 위치의 차이가 있으며 이해관계와 목적과 동기와 욕망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는 없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정교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경제재생산 이론이 입시경쟁교육 속에 놓여 있는 청소년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청소년들 중에서 입시 문제나 성적 문제 등으로 인한 자살이 더 많은 쪽은 성적이 매우 낮고 가정도 아주 빈곤한 경우보다는 오히려 성적이 중위권, 또는 상위권이면서 가정에서의 지위 상승 욕구와 압박감이 강한 경우이다.

  하지만 기존의 교육운동 진영은 입시경쟁으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 ― 사회적 타살을 강조하고 이를 부각시키지만, 그러면서도 “현재의 입시경쟁은 출발선이 다른 불공정한 경쟁”이라거나 “돈 많은 집에 유리한 입시”라는 식의 이야기를 입시경쟁교육 비판의 중심에 둔다. 이러한 이론적인 불협화음은, 청소년들의 상황은 ‘가정’을 이해관계의 기본단위를 가정하고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에 교육 문제를 단지 경제재생산이나 지역간 격차, 계층간 격차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교육내용 자체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게 된다. 문화재생산 이론이 이야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교육운동 안에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으며, 청소년의 입장에서 교육내용과 방식이 어떤지에 대한 고민도 많지 않은 듯하다. 교육운동의 여러 현장에서 간간이 접할 수 있는, “학원을 못 가서 학원 다니는 애들을 부러워하는 가난한 집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럼 과연 그 사람들이 학원에 다니면서 입시공부를 하는 것이 행복한 일인지에 대한 질문을 피해가게 하곤 한다.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런 문제를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승전국의 병사들과 패전국의 병사들은 이 더러운 싸움에서 무엇을 얻었나 /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영예를 얻었고 / 다쳐야만 얻을 수 있는 명예도 얻었지 / 폐품이 될 때까지 일할 수 있는 그 고마운 자유도 얻었지”라는 구절이 있다. 입시경쟁교육의 문제는, 어쩌면 청소년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진짜 승리자는 과연 얼마나 있는 걸까.


  교육운동의 이런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청소년인권운동은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고 비판해야 한다. 청소년인권운동으로서의 새로운 교육운동을 만들어가면서 다른 교육운동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좋게 좋게 말하기는 쉽지만,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교육운동에 비해 청소년인권운동은 돈도 적고 사람도 적고 규모도 적고 역사도 짧은, 힘 없는 작은 운동에 지나지 않는 게 현실이고 또 문제제기가 잘 먹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별 수 있나. 사실 이 글도 그런 짜증과 귀차니즘을 이겨내고 겨우겨우 써내려가고 있는, 교육운동에 문제제기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을.






◎ 맺으며 : 현실의 몇몇 운동들에 대한 언급


  나는 이 글에서 다원적 평등을 교육의 근본 원리로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교육의 모습을, 추상적인 차원에서라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지금부터는 현실의 운동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보려고 한다.


  먼저, 입시경쟁이 계속 유지되는 한편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입시경쟁을 없애는 것은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운동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입시경쟁을 없애기 위해서 현재의 학벌체제, 대학서열체제를 부수고 대학평준화를 이루는 것은 제도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2007년부터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대학평준화는 정책적 수단이며 하나의 중간단계일 뿐, 그 자체로 교육의 완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학서열화가 있는 상태에서 고교평준화는, 다원적 평등을 실현하는 교육이 아닌 획일화된 교육을 낳았다. 이는 사실 고교평준화의 문제라기보다는 대학서열화와 현재의 교육과정 자체의 문제에 가깝긴 하지만, 여하간에 일원화와 경쟁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겉으로 보기에만 ‘평준화’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결코 다원적 평등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렇게 볼 때 개념적으로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입시폐지’ 또는 ‘입시경쟁폐지’일 수도 있다.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 홈페이지에 걸려 있는 또 하나의 기치가 “학벌철폐”인 걸 보면 알 수 있겠지만, 현재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운동은 학벌 문제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학벌 이상으로 학력에 대한 차별은 교육의 다원적 평등을 저해하고 공교육과 대학교육의 독점적인 위상을 강화시켜준다. 학력의 문제도 그렇고, 실업계/인문계 분리의 문제도 그렇고, 사실 여러 가지 고민들이 필요하다. 입시폐지 대학평준화를, ‘공교육 정상화’나 ‘공교육 강화’의 관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다른 교육, 인간적이고 평등한 교육을 향해 가기 위한 중간 과제로 이해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그리고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운동 또한 앞 부분에서 언급한 경제재생산 이론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나 청소년들을 대상화, 객체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청소년인권운동이 이런 부분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새로운 입장을 내놓음으로써 변화를 만들어내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뭐 그냥 적극적인 연대를 포기할 수도 있다. 여하간에 나는 이게 새롭게 만들어지는 운동이니만큼, 기존 교육운동의 방식들을 답습하지 않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조금이나마 있지만,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대안교육운동 또는 대안교육에 대한 시도들은, 현실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뭐 그건 사실 다른 교육운동의 구상들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가치의 독과점 체계, 일원화와 경쟁 등의 문제들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들이고, 교육영역만을 거기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방식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은, 교육영역의 변화가 사회 전체의 변화들과 함께 가거나 사회 전체의 변화를 만들어낼 계기가 되지 않는 한은, 애초에 오래 갈 수 없는 기획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학교나 대안교육시설, 방식 등을 시도하는 것은 지금의 교육 현실과는 다른 방식의 교육에 대한 경험이나 사례, 가능성을 개척하는 것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것이 궁극적, 장기적으로는 실패하더라도 그런 실험의 경험들은 변화에 여러 가지 형태로 기여할 수 있으며,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런 실험들이 없이는 새로운 변화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대안교육인지도 따져봐야 할 것이고,(몇몇 종교계 대안학교들에서 가끔씩 보이는 억압적인 모습들은, 과연 대안적 실험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을 느끼게 한다.) 대안교육운동이 갖고 있는 비청소년 중심적인, 교사나 학부모 중심적인 모습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대안교육이 하나의 완성된 정답을 향해 가는 게 아니며 언제나 불완전한 것이고 계속 반성하고 바꿔나가야 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대안교육은, 현실 위에서 시도되는 ‘대안’이지, 결코 완성된 ‘이상’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7년에 만들어진 교육복지실현 국민운동본부에서 하는 교육복지 운동은, 내가 직접 참여하거나 많이 접해보질 못해서 잘 모르는 면이 많겠지만, 대체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교육운동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 중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농어촌 교육에 대한 지원, 빈곤층에 대한 교육 지원, 아동의 건강권, 급식 문제 등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그 외에도 학생인권, 대학평준화와 공동학위제, 기타 등등을 모두 요구안으로 발표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운동이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다소 피상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걸 사과드린다.

  일단 교육복지 운동은 기존의 교육운동들이 가져왔던 청소년에 대한 시혜적이거나 통제적인 관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며 이후 청소년인권운동이 개입할 기회가 있다면 개입을 통해서 고치도록 요구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교육복지 운동이 ‘복지’의 차원에서 농어촌과 빈곤층의 교육격차, ‘교육 양극화’를 해소하려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교육 문제가 경제 격차 지역 격차 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 말하자면 경제재생산 이론이 안고 있는 한계까지 고려하지는 않고 있다고 생각된다. 교육복지 운동은 그 운동의 성격이나 양태로 볼 때 청소년인권운동이 개입하기가 특히 어려워 보이지만, 그래도 교육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로서의 측면, 교육의 격차나 양극화의 문제 또한 놓고 갈 수 없고 놓고 가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또 하나 사족인데, 여러 교육운동들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외국 이야기는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분명히 한국의 현실보다 더 나은 사회도 외국들 중에는 있을 것이고, 여하간 현재와는 다른 어떤 체제가 가능하다고 제시하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외국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은 다르다는 진부한 문제제기도 가능할 것이고, 과연 한국보다 좀 더 낫다고 해서 외국의 어떤 제도나 사회 상황을 이상적인, 지향해야 할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사람들의 모든 인권의 보장이라거나 다원적 평등의 실현 같은 이상이 실현된 사회는 없다. 단기적 과제로서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거나 제시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인 것처럼 미화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뭐 이런저런 운동들을 언급했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교육운동’은 하나다. 거듭 말했던, 바로 ‘청소년인권운동’으로서의 ‘교육운동’이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연대할 대상으로서의 교육운동이 아니라, 청소년인권운동의 한 분야이자 일부로서의 교육운동이다. 청소년인권의 입장에서, 청소년들을 운동의 주체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발달을 보장하는 교육이다.

  그게 되겠냐, 라고 물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입시경쟁교육이라거나 현재의 학교 교육이라는 괴물도 인간이 만든 괴물이니까, 인간의 힘으로 없앨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게 너무 안이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여하간에 없앨 수 없다는 증명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또한 다원젹 평등을 추구하는 교육을 만들어갈 수 없다는 증명도 아무도 하지 못했다.

  입시경쟁교육이라는 괴물을 함께 쓰러뜨리는 그날까지, 카운트 다운을 시작해보자. 20, 19, 18, 17…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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