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10. 12. 9. 16:07

우리, 사랑 좀 하자!

청소년 연애 탄압을 반대한다

우걱우걱



성적 자기결정권, 공부 좀 하세요.

누 군가를 사랑하고, 그와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섹스 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는 갖가지 같잖은 것들이 10대의 연애를 외설로 취급하며 열심히 짓밟는다. 그 중 하나인 억압적인 교칙들을 까발리기 위해 11월 16일에 서울에서 청소년연애탄압실태 보고회를 가졌다. 나름 성공적으로 어이없는 교칙들을 고발했다고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어라?

위 사진[설명] 11월 16일 청소년연애탄압실태 보고회


한 국교원단체총연합회 김동석 대변인은 “고등학생 정도라면 건전한 이성교제는 가능하다고 본다. 또 이성교제와 관련된 학교 학칙들이 워낙 과거에 제정된 것이 많아 시대 흐름에 맞춰 학교 운영위 등에서 충분히 재 논의될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대변인은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과도한 걸 요구하는 학생들이 권리에 따른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도 같이 고민해줬으면 좋겠다.” 라고 덧붙였다. (출처 시사인 http://bit.ly/fAlolS ) "교칙이 과하긴 하지만 청소년의 사랑에는 당연히 제한이 있어야지."하는 투로 기사 쓰는 기자들과 이런 발언하는 관계자 님들- 성적 자기결정권이 무슨 뜻인지는 아시는지 모르겠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폭력을 당하지 않을 권리처럼 소극적인 권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누구나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자신의 성과 관련된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특정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손잡았다고 벌점 주고, 섹스하면 퇴학시키고, 이런 게 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성폭력에 이성교제를 포함시킨 무개념 학교들이나 '자발적 성관계'를 처벌대상으로 명시한 학교들(압구정고등학교, 당곡고등학교 등)도 있으니 말 다했다. 본인이 한 “고등학생 정도라면 건전한 이성교제는 가능하다고 본다.” 라는 말에서 고등학생, 건전한 등의 단서까지도 모두 성적 자기결정권에 어긋난다는 것을 김 대변인은 과연 알 리가 없지 에휴.


청소년이 아니라 이 사회에게 의무가 있다



이 딴 식으로 연애에 있어 청소년을 비청소년과 다른 무인권적 존재로 다룰 수 있게 하는 두 가지 핑계는 공부와 임신이다. 한국에는 아직도 모든 청소년의 본분은 입시공부이고, 그것을 방해할 소지가 있는 공부 외의 모든 일은 본인들의 미래를 위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믿는 소름 돋는 사람들이 있다. 결코 청소년들 다수가 승리할 수 없는 경쟁교육의 구조 자체는 물론, 주거비용이 솟구치고 안정적이지 못한 일자리만 늘어나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교복 입은 청소년이 손을 잡고 있거나 키스라도 할라치면 엄청난 분노를 표출한다. 학생-청소년들이 무슨 공부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들을 멍청하거나 찌질 한 사람들이라고 치부하더라도, 임신 운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조금 더 짜증난다. 물론 임신이고 뭐고 순수한 ’우리 아이들'이 손잡고, 껴안는 걸 그냥 뒀다가 같이 잠이라도 자면 어쩌냐!...그런 더럽고 입에도 올릴 수 없는 일을!(....우리들도 그래서 태어난 아이들인 게 분명한데......음.....) 식으로 섹스라는 말만 나와도 벌벌 떠는 이상한 인간들이 있다. 그 한편에 그러다 임신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냐, 관계에는 권리만 있을게 아니라 책임도 있다고 중얼대는 사람들이 있다. 앞서 말한 교총 대변인 같은 인간들이다. 역시 다 권리에 대한 몰이해가 부르는 발언이다. 애초에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어야 책임도 운운할 수 있는 법이다.

위 사진[설명] 11월 16일 청소년연애탄압실태 보고회


청 소년은 직접적으로 교칙에 의해 연애를 탄압받는 것은 물론,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사랑할 권리 또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피임교육과 피임기구 제공이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임신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공포를 갖는 것이 자기결정권에 중대한 침해임은 말할 것도 없다. 결정권을 제대로 보장하게 된다면 학습노동에서 자유로운 시간, 데이트 할 장소, 피임에 대한 지식과 도구, 임신 후 출산 결정시에 각종 지원 등을 포함한 일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대체 청소년에게 무슨 책임과 의무를 요구할 여지가 있는가? 당신들이 근대적인 마인드로 '허용'해 주겠다는 소꿉장난 같은 연애뿐 아니라, 섹스와 출산을 포함한 사랑에 관한 포괄적인 권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애초에 우리가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부끄럽게도 권리와 책임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청소년들의 연애와 성행위를 금지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청소년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임신·출산을 했을 때 필요한 지원을 할 의무가 있다. 한 번에 다 해달라고 하지 않겠으니, 우선은 방해하지나 말아 달라. 우리, 사랑 좀 하자.

덧붙이는 글
우걱우걱 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연애해온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 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230 호 [기사입력] 2010년 12월 08일 17:14:2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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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신후 출산 결정시'라는 말은 임신 중절도 가능하단 얘긴가요? 임신이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출산으로 연결되는 것이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중단시키는 행위는 당연히 살인 행위입니다. 아마 그런것을 긍정하는 뜻으로 쓰신 말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청소년은 물론 모든 인간은 말씀하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는 언제나 무한히 누릴 수 있는게 아니라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서 제한될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사랑,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개인적인 수준의 논리밖에는 말하지 못 하겠죠. 청소년들의 연애, 이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청소년들의 섹스. 여기선 이야기가 다르죠. 완벽한 피임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섹스는 언제나 임신 가능성과 함께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그럼, 그 임신으로 인해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은 어떻게 할거냐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할겁니까? 나라가 임신과 출산에 대해 지원해주면 되지 않냐구요? 현실을 보죠.

    생판 모르는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도 청소년의 임신과 출산에 책임지고 지원을 해야한다고 하셨죠? 현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구요. 그런데 왜 당사자들의 부모들은 그 지원을 해주지 않습니까? 또, 당사자들은 그것을 왜 부모에게 요구하지 않습니까? 사랑의 결실로 생긴 새 생명에게 안정적인 생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당장 자력으로 힘들다면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근데 왜 그런 사례는 정말 보이질 않나요?

    제가 아는 가장 흔하지만 가장 나쁜 청소년 성 경험의 실체는 한 쪽의 강요와 관계 유지를 위한 한 쪽의 희생입니다. 주로 희생하는 쪽이 여자 아이라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겠죠. 전 당연히 그런 부분은 강간과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임신을 전후로 해서 깨지는 경우가 많더군요. 이게 사회 탓이라고 하시렵니까?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시렵니까? 제도가 미비하기 때문이라고 하시렵니까? 저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이 그 결실을 맺었다는 이유로 부담되고 떠나야 하는 사람으로 변한답니까?

    또, 청소년의 모든 연애가 사랑은 아니죠. 성인도 다르지 않지만 때로는 연애를 위해 사랑도 만드는 것이 현실이죠. 그러니 '우리도 사랑좀 하자'같은 말은 쓰임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010.12.11 03:4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샤펜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왜 청소년에게만 그러시는거죠? 어른들이라고 다 준비된것 아닙니다. 충분히 그런 사례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왜 비판하지 않으시는겁니까?

      2010.12.12 13:43 [ ADDR : EDIT/ DEL ]
    • 샤펜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순순히 해주시긴 하나요? 안그런 경우가 대다수일텐데요. 그리고 청소년이 출산해서 아이때문에 열심히 살려고하시는 분들 많습니다. 티비에서 여럿봤습니다. 혹시 님이 못보신건 아니시고요?

      2010.12.12 13:45 [ ADDR : EDIT/ DEL ]
    • 클린앤

      우리나라는 여성청소년이 임신후 출산을 했을때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수없는 구조죠. 태아의 생명권도 있겠지만 여성에게 임신의 모든책임을 돌리고서는 '살인자'라고 하는건 위선인거같습니다. 임신은 남성에게도 책임이 있는거고 이사회가 원하는노동력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나라에도 책임이 있는거겠죠.

      실제로 프랑스같이 유럽국가에서는 청소년들의 임신과 출산을 국가에서지원하고있습니다. 동거 결혼까지도 지원을 합니다. 걔네는 돈이 많아서 그런다고 할수도있지만 유럽에서 청소년의 복지정책은 1인당 GDP가 1만달러를 넘을시점부터 준비하고 시행했습니다. GDP 2만달러인 우리나라가 돈이없어서 못한다는건 말이 안되죠.

      나쁜청소년의 성경험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청소년만의 문제는 아닌거같네요;; 그리고 모든 연애가 사랑이 아니라고하시는데 그건 너무 주관적인 말씀같고 사랑이라는 것의 기준이머고 어디까지 사랑을 보냐는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인거같습니다..

      2010.12.12 14:52 [ ADDR : EDIT/ DEL ]
  2. 아직 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청소년들이 성지식을 잘 알지 못하는 것 자체가 청소년들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말에 십분 공감을 합니다. 청소년의 사랑, 그리고 섹스가 일방적으로 탄압당하는 것도 인권 침해의 유형이라는 점도 공감합니다. 그러나 지적해주신것처럼 아직 청소년들의 성을 지킬 수 있는 교육이나 기구가 전무한 상태에서 그냥 우리 자유롭게 사랑을 하게 해달라, 또는 조금 더 극단적으로 우리도 성관계를 자유롭게 갖게 해달라 라고 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어른들이 무조건적으로 연애를 못하게 규칙을 정해놓는 것도 문제지만 그냥 손 놓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가 나서서 청소년들의 연애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지도록 도움을 주자는 것이지요.

    2010.12.11 14:31 [ ADDR : EDIT/ DEL : REPLY ]
    • 어른들과 청소년의 경우가 어떻게 다른건지요?
      어른이라고 해서 성교육을 받고 성지식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인데

      2010.12.12 12:05 [ ADDR : EDIT/ DEL ]
    • 홍도봉

      청소년과 어른 둘중에 어느쪽이 더 성지식이 많을까요?^^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계속해서 시대에 맞춰서 변화되는 성교육을 받는 학생들과 성교육받지 않고 조금씩 까먹어가는 어른 그 사이에 누가 더 잘 알고있을까요

      2010.12.12 12:38 [ ADDR : EDIT/ DEL ]
    • 클린앤

      청소년들의 연애의 올바른 방향은 어디일까요 ㅇ.ㅇ;; 그리고 어른들이 손놓고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하지않을까요 ^_^? 청소년이 미성숙하고 보호해야할 대상으로 보는 보호주의적관점인거같네요

      딱히 성관계를 위험하게 볼것도없을거같네요. 기본적인 성교육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요

      2010.12.12 14:56 [ ADDR : EDIT/ DEL ]
  3. 다래우리

    이 문제는 어른과 청소년을 구분하지 않는것, 그것이 주요한 논제가 되어야 할것. 이 문제를 단지 청소년의 교제문제로만 국한시킬경우, 문제는 끝이 없을것. 김예슬이 고대를 나가며 말하던게 있었음.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 이 문제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건, 이문제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

    2010.12.13 03:17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0. 11. 17. 15:57



아수나로에서 어제 발표한 거구요
담당한 분이 쓰러지셔서 도중에 제가 땜빵으로 밤새가며 자료 정리를 했던 ㅠㅠ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48998.html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1171213131&code=94040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79115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9269

http://www.su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60054


관련기사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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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19금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의 사랑에, 성에 인색하다. 청소년들의 성 문제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높으면서도 청소년들의 올바른 성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논의는 부족하기만 하다. 이번 조사 결과에서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듯이, 학교들은 학생들의 사랑과 성을 금지하고 처벌하기에만 급급하다. 때로는 입시공부를, 때로는 학생다움을 내세우며.


그러나 사랑할 권리는 하나의 인권이다. 사랑하는 감정, 성적인 행위와 마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보장되고 존중되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헌법 제10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행복추구권이자, 성적 자기결정권이며, 사생활의 자유이다. 「2008청소년인권선언」에서는 제8조에서 “청소년에게는 나이와 성적 지향(동성애, 이성애 기타 등등), 성정체성에 상관없이 짝사랑하고 연애하고 성적인 생각과 행동들을 하거나 하지 않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도 제16조에서 아동은 사생활에 대해 자의적이거나 불법적인 간섭을 받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최근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학생인권조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민단체들이 추진한 바 있는 광주 학생인권조례안에는 사생활과 개인 정보의 보호 부분에 “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둘러싼 감정을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하여 청소년들의 사랑할 권리 보장을 꾀하고 있다.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 역시 사생활의 자유에 관한 조항에서 “학생의 교우관계에 간섭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사랑할 권리,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폭력과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인 동시에 실현을 위해 경제적 사회적 능력이 필요한 사회권이기도 하다. 학교의 연애 탄압에 문제제기하는 것은 청소년 성적 자기결정권 실현을 위한 첫 걸음일 뿐이다. 사랑이 ‘19금’이 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누릴 수 있는 정신적․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법적․경제적 이유로 숙박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안습 상황,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책임감을 기르지 못하는 상황을 바꾸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청소년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 교육청들, 학교들은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학칙들을 폐지하라.

◆ 학교와 가정에서 실효성 있고 인권적인 성교육을 실시하라. 청소년들이 성에 관한 정보와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하라.

◆ 정부는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사회적 캠페인 및 교육을 실시하라.

◆ 정부는 임신․출산을 한 청소년이 출산․양육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을 마련하라.

◆ 정부는 청소년들이 실질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누릴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마련하고 사회적 제도를 개선하라.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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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이 기사들이 매우 안타깝더군요. 갈길이 너무 멉니다.

    2010.11.18 15:5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나를 가만히 두란말이야~ 나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고 !
    그들이 하고싶은 말이 아닐까요.. 전 왜 그때 당당히 말하지 못했을 까요.

    2010.11.21 05:1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0. 9. 20. 04:04


사랑도 인권이라규!

- 청소년 연애 탄압 사례를 조사합니다 -


“남·여 학생이 학교 내외에서 짝지어 다니는 것을 금한다.”
“재학생의 교내외 이성교제는 금한다  이성교제를 한 학생 : 장기선도(가정학습, 병원이나 치료전문기관 의탁)”
“벌점 20점 : 동성간의 비정상적인 교제”


성적 떨어진다며 연애하는 학생들을 윽박지르는 교사,
‘이성교제’를 징계하고 손잡는 것에 벌점을 매기는 학교,
동성애를 ‘비정상적’이라며 검열하는 규정.....

사랑을 탄압하는 구닥다리 인권침해가 여기저기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도 우리의 당당한 인권입니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학생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금지당한 사례를 모읍니다.
어이없는 교칙, 친구의 경험, 나 자신의 경험 등등.......

지역, 학교 이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을 onlyasunaro@naver.com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2010년 10월 11일까지 보내주세요! ^^;)


 ※ 보내주신 사례들은 익명 처리 후 인권 현실을 알리고 바꿀 것을 요구하는 데 사용됩니다.
     제보자의 신분 등이 노출되지 않게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http://asunaro.or.kr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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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9. 6. 13:50


오답승리의희망11호, 커져버린스토리로 넣으려고 쓴 글. 원래 '불건전' 이야기랑 '이성'교제 이야기를 따로 나누려고 했는데
쓰다보니까 한 맥락에서 다루게 되었다. 투덜리즘은 다른 사람이 쓰기로 했다.





  ‘불건전’한 ‘이성’교제와 오지라퍼들


  길을 걷다가 포돌이가 방긋 웃으며 “청소년선도”를 외치고 있는 알림판을 본 적 있는가? 거기에서 ‘학교폭력’ 운운하며 폭력이나 강도질 같은 것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경찰이 이야기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그 알림판에 써있는 청소년들의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근절하자는 글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성폭력이나 성매매가 아닌 이상은 형법상 처벌 조항이 있을지조차 의문인(만13세 이상의 경우 성폭력이나 성매매가 아닌 한 처벌하기는 어렵다. 하긴 한국 경찰이 언제 법을 그리 잘 알고 지켰겠냐만) 청소년들의 이성간 연애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관심이 많으시다니, 대한민국 경찰들은 좀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으신 것 같다.

  오지라퍼라고 하면 단연 빼놓을 수 없는 게 학교다. 많은 학교들에서 학생들의 연애에 대한 관심이 넘쳐서 때로는 학교 규정에 학생들의 연애에 대한 규칙들을 마련해놓고 있다.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금한다거나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하면 징계한다는 식의 규정은 차라리 형식적인 애교로 보인다. 동아리 안에서 이성교제를 하다가 소문이 나거나 뭔가 가십거리가 생길 경우 해당 동아리를 폐쇄한다는 학교, 어깨에 손만 올려도 처벌하는 학교, ‘남녀칠세부동석’의 현대판이라도 되는 양 여학생 남학생 단 둘이 한 방에 있기만 해도 처벌한다는 학교… 아주 각양각색으로 오지랖을 과시한다.



  경찰과 학교 말고도 널린 게 오지라퍼들이다. 부모, 가족, 교과서, 미디어…. 모두가 청소년들의 성과 연애에 대해서 ‘선도’하지 못해 안달이다. 집에서는 좀만 늦게 들어오면 추궁하고, 청소년들의 첫 성경험 나이를 조사하고, ‘건전한 이성교제’를 위한 가이드를 교과서가 제시하는 세상인 것이다. 쯧쯧.



‘불건전’의 조건

  대체 저들이 말하는 ‘불건전’한 연애란 무엇일까? 알기 쉽게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불건전① 입시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

  대한민국의 청소년들 중 다수(학생. 특히 대다수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 상당수 전문계고 학생, 중상위권 중학생이나 초등학생들.)는 ‘입시공부하는 기계’가 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사랑과 연애가 성적에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네 어쩌네 아무리 떠들어도, 사랑놀음에 푹 빠져서 시간을 보내게 되면 아무래도 추락하는 성적에는 날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게 될 공산이 크다. 거기다가 어쩌다가 싸우거나 헤어지기라도 하면 즉각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거다.
  그래서 ‘불건전’한 연애의 조건 중 하나는 바로 입시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다만 연애에 있어 어느 정도가 입시공부에 방해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가정마다, 학교마다, 지역마다 그 기준이 다양하다. 연애 그 자체가 입시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쪽에서부터 연애를 하되 공부시간을 줄이지 않으면서 적당히 시간을 할애한다면 괜찮다는 사람들까지 각양각색인 것이다.
  사랑하는데 연애를 할 수 없어서 느끼게 되는 상실감이 성적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가 있다는 지적에도 그들은 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건 절대로 연애를 규제하거나 방해하는 사람들 탓이 아니라 감히 사랑(짝사랑 포함)이란 감정을 품은 년놈들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심할 경우,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게 잠깐 앓고 넘어가는 게 낫다는 식으로 말하기까지 한다.

  이 ‘불건전’을 규제하기 위한 학교/가정의 행태 중 한 변종은 학생들 사이에 일종의 신분제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부 잘하는 학생이 공부 못하는 학생과 사귀는 건 공부 잘하는 학생의 성적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안 된다. 모범생/우등생들끼리 사귀는 건 뭐 다소 제한은 있지만 일단 허용된다. 공부 못하는 애들끼리 사귀는 것도 금지한다.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고, 연애할 시간에 공부나 하게 한다. 등등… 실제로 학생부장 교사가 이런 식으로 학생들의 연애에 직접 간섭하고 어떤 연애는 되고 어떤 연애는 안 된다고 ‘허가/불허’를 해대는 학교도 있다. 일종의 성적에 따른 카스트 제도인 셈이다. 저러면서 어떻게 ‘민주공화국’의 교사로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가지만, 그런 교사들이 한둘이 아니다보니 이제는 저런 교사가 그리 이상하지 않게 보일 정도다.


  불건전② 임신의 위험이 있는 것

  두 번째로, ‘불건전’을 판별하는 기준은 바로 성적인 신체 접촉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임신 위험이 있는 이성간 섹스, 또는 섹스로 자연스레 연결될 위험성이 있는 애무와 패팅, 딥키스 등의 스킨쉽이다.
  청소년들은 가정과 학교에 종속된 존재이고, 이런 청소년들이 덜컥 임신이라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거나 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용납받기 힘든 일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따라서 이런 규범을 넘어 탈주하는 ‘난감한’ 상황을 막고 청소년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불건전’의 딱지를 붙여가며 청소년들의 연애를 통제하는 것이다.
  이 역시 사람마다, 가정마다, 학교마다, 지역마다 기준이 다양하다. 여하간 임신만 안 하면 문제삼지 않는다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경우(드물다)에서부터 가벼운 키스까진 괜찮다는 입장, 아예 단 둘이 있는 모든 야릇한 상황과 팔짱끼는 것까지 안된다는 ‘남녀칠세부동석’식 입장까지…. 광주의 모 고등학교는 여남 사이에 ▲손을 잡는다 ▲장난으로 때리고 잡고 꼬집는다 ▲머리를 쓰다 듬는다 ▲어깨동무 한다 ▲머리를 맞대고 있다 ▲몸에 손을 댄다 ▲어깨에 손을 댄다 ▲상대의 입에 과자나 음식물을 넣어 준다 ▲교실, 레슨방에서 단 둘이 있을 때 문을 잠그고 있다 ▲의자에 앉을 때 가까이 앉는다 등 10가지 행위를 금지하고, 걸리면 벌점을 준다고 해서 한때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런 기준이 강력하게 적용되면 이건 “우리 사랑은 정신적이고 깨끗한 거예요.”라는 식의 ‘플라토닉 러브’만이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성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적인 ‘순결’ 이데올로기와도 연관되어 있다.


  불건전③ 사회적 ‘상식’을 위협하는 것

  이상의 두 가지 이유가 가장 주된 이유이긴 한데, 동시에 우리는 이 둘만 놓고 보면 하나의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초등학생이나 유치원 나이의 청소년들 중 상당수는 이 두 가지 ‘불건전’ 기준에 걸리지 않고 연애와 성행위를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렇지 않은가? 초등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입시공부의 압박을 덜 받는다.(요즘은 점점 그렇지도 않게 되어가는 추세지만) 그리고 아직 초경을 시작하지 않은 0~11세 정도의 여성 청소년들은 임신 위험도 거의 없다. 신체적 성장의 정도 등을 고려하더라도 9~13세의 청소년들은 연애와 성행위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논리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이 사회는 초등학생들이 성행위를 한다고 하면 발칵 뒤집히고 만다. 지난번에 대구의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집단 성폭력/성행위 사건에 대해서 이 사회가 과연 “이런 집단적, 상습적 성폭력이 저질러지다니!”하고 반응했던가? 물론 이런 반응도 있었지만 나는 “어떻게 초등학생들이 성행위를! 말세야 말세…”하는 반응도 꽤 많이 봤던 것 같다.
  이 사회는 아동/청소년들을 통제하는 한 방식으로 아동/청소년들은 순수하고 성에 대해 무지하다는 편견을 ‘상식’으로 만들어왔다. 요즘에 나온 『이팔청춘 꽃띠는 어떻게 청소년이 되었나』라는 책을 보면, 청소년들의 성욕과 성적 에너지를 통제하여 조국 근대화와 국력 신장에 쏟아넣게 하려는 역사적 시도들을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아동/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지키기 위해서 이 편견을 위협할 소지가 있는 모든 아동/청소년들의 성에 대한 행위는 금지되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의 연애를 보면서 “귀엽네 초딩 짜식들”하는 반응을 보일진 몰라도, 초등학생들이 서로 애무를 한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그것이, 이 사회 오지라퍼들의 수준인 것이다.



‘이성’ 교제?





  “불건전한 이성교제”라는 말 속에는 ‘불건전’의 문제 말고도 ‘이성’교제의 문제가 있다. 왜 연애, 사랑, 성애(性愛)적인 관계를 굳이 “이성교제”라고 부르는 걸까? 그건 아마도 그 관계가 성적인 것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여성과 남성이 친구로 사귀는 것이라는 식의 뉘앙스를 주고 싶어서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 표현 자체에서부터 이미 왕따당하는 사랑이 있다. 바로, ‘동성애’다.

  동성애에 대한 왕따는 앞서 언급한 ‘불건전’성과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사람들이 동성애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다. 혐오하고 배척하거나, 무시하고 입에 올리지 않거나. 평소에는 무시하는 태도가 압도적이다. 동성애는 ‘연애’나 ‘사랑’을 얘기할 때 아웃오브안중으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취급을 받기 쉽다. “이성교제”, “남녀관계”, (여자에게) “남자친구”, (남자에게) “여자친구” 등 온갖 말들 속에서 우리는 동성애를 아예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건 가정이건 사회건, 동성애를 항상 무시할 수는 없다. 동성애는 현실에 존재하니까 말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동성애적 경향이 존재한다는 식의 연구결과들도 있다는데, 꼭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 인구의 최소한 5%쯤은 동성애자일 것이다. 5%가 가볍게 들릴지 몰라도 그 말은 학생수 1000명인 한 학교에서 50명은 동성애자라는 뜻이다. 정희진 씨는 “거의 모든 사회에서 장애인과 동성애자는 각각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한다.”라고 하기도 했다.
  존재하는 동성애를 때려잡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종교, 폭력, 학교의 통제, 법적 제재, 그리고 때로는 정신의학이다. 일부 학교들은 ‘이반검열’이라고 하여 머리를 짧게 깎은 여학생, 또는 여학생과 연애를 하는 기미가 보이는 여학생 등에게 벌점을 주고 처벌을 하는 차별과 폭력을 저질렀고, 학교 안에서 교사나 다른 학생들에 의한 차별, 폭력도 존재하고 있다. 자식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체벌을 하다가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부모 이야기도 있다. 청소년보호법은 2004년까지는 동성애 관련 컨텐츠를 청소년유해매체물로 분류하고 통제했다. 동성애는 저 오지라퍼들에게는 너무나도 ‘불건전’해서 아예 입밖에 내지조차 말아야 하며, 어쩌다가 그 존재가 확인될 때는 가차없이 때려잡아야 하는 존재라도 되는 걸까.


  따져보면 동성애라고 해서 이성애에 비해 특별히 문제가 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임신할 걱정이 없으니까 더 좋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동성애를 무시하고, 때려잡으려고 난리를 치는 것일까? 여성 1명 남성 1명이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가족제도를 절대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유교적인 관념으로, ‘대를 잇는’ 가문을 위해? 기독교의 영향 때문에? 저출산에 대한 공포?
  글쎄 동성애에 대한 오지라퍼들의 차별이 워낙 비합리적인 구석이 많아 보여서, 나로서는 그 속내를 다 알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이런 그들의 폭력적인 오지랖 덕분에, 동성애자 청소년들은 동성애에 대한 차별과 ‘청소년’의 연애와 성적 행위에 대한 차별을 한꺼번에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 그런 당신들 덕분에,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정작 불건전한 건

  청소년들의 연애가 불건전하다고? 글쎄… 내가 보기엔 그건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기계 ― 우등모범생을 벗어나는 걸 용납 못하기 때문이거나, 청소년들에게 사회경제적인 능력을 빼앗고 학교와 가정에만 갇혀 살아야 하고, 청소년들에게 성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는 현재 사회의 문제인 것 같다. 즉, ‘불건전’한 건 현재의 사회랄까. 심플하게 말해서 연애하다가 성적 떨어지면 아 살면서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거고,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아 낳아서 잘 기를 수 있게 해주거나 입양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걸 허용하고 뒷받침하지 못하는 사회가 '불건전'한 거다.

  아니면 청소년들이 성에 대해 알고 성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좀 더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면 안 되는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예를 들자면 자본과 국가의 음모라거나…?




추신 : 근데 말이지, 솔직히 나는 대체 저 오지랖 넓은 족속들이 무슨 자격으로 ‘불건전’ 운운하는지를 모르겠다. 내 눈에는, 경제적 조건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거가 주된 이유가 되어서 결혼하고 성관계를 가지는 것, 성매매하는 것, 외모지상주의, 그런 게 훨~씬 더 ‘불건전’해 보이거든?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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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래 불건전을 소리 높여 운운하는 사람들이 정말 '불건전'한 법이라죠.

    2009.09.07 13:18 [ ADDR : EDIT/ DEL : REPLY ]

울것같은꿈2009. 1. 10. 12:23

DAUM 만화속세상, <If thou must love me>(팀 풍경) 3화 中







*
저 장면을 보다가 문득 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1년 반~2년이라나 뭐라나...
흔히 연애감정을 느끼고 연애를 할 때 호르몬 분비를 측정해보면,
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건 평균적으로 18개월~2년 정도이고, 길어야 3년 정도다, 뭐 그런 이야기다.

비슷하게, 생물학적/통계적 데이터에 따라, 사람이 한 성적 대상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기도 대략 2~3년 정도라고들 한다.


 
*
그런데 '한 성적 대상에게 집중'해야 할 이유는 또 없지 않나, 싶다.
독점적 성애적인 관계가 강제되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다자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도 많겠지만, 현재의 독점적 연애 관계의 틀 속에서 형성되는 연애나 사랑에 대한 관념을 버린다면 그렇게 무리한 일도 아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독점욕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예컨대, 친구랑 같이 놀러가려고 했는데 그 친구가 다른 친구와 선약이 있어서 안 된다고 하면 서운하다거나 = 그런 것도 포괄적으로는 약한 독점욕 발현이다.)
역시 정도와 협상의 문제.


*
그러나 연애에서 관계의 밀도(그걸 시공간으로 측정하든, 어떻게 측정하든.)가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물리적인 한계(그러니까, 스케쥴상의... 스케쥴은 시공간적인 문제다.)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특정한 기준 이상으로 관계의 밀도가 짙어져야만 연애라고 규정한다면 말이지.

하지만, 연애와 연애 아닌 것 사이의 분별이란 건 사실 자의적이고 모호하다.

'성적인 관계나 행위'의 유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떤 것을 애인, 어떤 것을 친구, 그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은 다분히 이 사회에서 개발된 편의적인 방식인 것 같다.

그런 것을 굳이 세밀하게 구별하지 않아도 되고 두루뭉실하게 지낼 수는 없을까?



*
연애관계가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에는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닿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던 마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가
점차 좀 더 일상적인 관계가 되어가는 건 사실일 것이다. 

그런 변화 없이 강렬함(??)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비일상성이 지속되어야 하는데, 그건 변화무쌍한 짝사랑이라거나 강력한 방해요소가 존재해서 관계의 원활한 성립과 소통이 어려워야 한다. (대표적인 예 ; 로미오와 줄리엣)

하지만 그런 일상성 자체에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해나간다.
그걸 뭐 '정'이라는 식으로 이름붙이고 싶진 않다. 부정확하다. -_-
"내 삶의 깊은 곳이 너와 같이"라는 감정이랄까. 분리 불가능하다는 느낌. 그 사람이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게 되는 과정.

그리고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기분이 좋고 두근거리는 일은 얼마든지 있고



*
모든 연애의 종말 (일편단심화 - 침묵님)
난 아주 꼭 맞는 관계를 원하진 않는다.
"사랑은 처음 느낌 그대로만을 간직하려는 것보단 변해가는 모든 것까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해" (동물원 '사랑은')

꼭 맞는 관계라는 건 계속해서 생겨나는 어긋남만을 미래에 남겨둘 것이고, 잘해야 현상유지가 될 것이다.
나는 더 여지가 많은 관계가 좋다고 생각한다.



*
가끔, 가벼워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어쩌면, 누군가의 눈에는 경박하게, 욕망과 마음들을 놓아두고 싶다.
쾌락주의적 맥락에서(사실 나는 쾌락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다) 세상을 단순화시킨다면 모두가 어느 정도 가벼워져가는 것이 이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존재케 하는 건 관계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 내가 있는 이상, 단숨에 그렇게 가벼워질 수는 없다.
내가 의미없다고 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면 고려해야 하고,
내가 의미있다고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의미 없다고 하면 협상해야 한다.

그런 게 관계이고
그런 것들이 내게 무게를 부여해서 지금 이 사회에 머물 수 있는 무게를 가지게 한다.



*
나는 지금 여기서 행복하다.
총체적으로 내 삶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기에 행복하다, 라는 것도 물론이지만.(이것이 내가 몇 년전부터 찾은 행복의 답이다.)

사랑을 하고 있기에 즐겁고, 행복에 보탬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가면 속의 수수께끼 (우에시바 리이치) 中


그래서 이 글의 카테고리 분류는 '울것같은꿈'이다(...)




추신 : 가면속의 수수께끼 구해서 보고 싶은데...  ㅠㅠ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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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지막에 붙여놓은 만화 보니까, 누가 생각나네. ㅋㅋㅋㅋㅋ

    2009.01.13 01:42 [ ADDR : EDIT/ DEL : REPLY ]
  2. j

    공현님도 사랑에 종류가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가페, 에로스 등)

    2009.05.14 21:31 [ ADDR : EDIT/ DEL : REPLY ]
    • 종류라는 건; 그냥 사람이 특정 기준을 가지고 하는 분류일 뿐이지요 -_-;
      그런 의미에서, 아무 기준이나 만들어놓으면 그 기준에 따라 종류가 갈라지겠죠.
      뭐, 애초에 '사랑'이란 말을 재정의해버릴 수도...
      개념이란 건 쓰기 나름인 거니까요.
      "언어는 그 사용이다"- 비트겐슈타인;;

      2009.05.15 02:21 신고 [ ADDR : EDIT/ DEL ]
  3. 비밀댓글입니다

    2010.03.17 23:52 [ ADDR : EDIT/ DEL : REPLY ]

어설픈꿈2008. 1. 27. 00:01

나는 조건 있는 사랑을 한다.


(2006년 7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람의 인식에 너무나도 분명한 한계가 있는 이상 여기서 ‘당신’이 대체 무엇인지를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의 얼굴인가. 당신의 성격인가. 돈인가. 성적인가. 능력인가. 목소리인가. 혹은….
  당신이라는 총체.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연결고리들. 그런 것들을 모두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Only God Knows”의 영역. 사랑이 지향하는 이상이 추상적인 총체에 대한 것일지라도 실제의 구체적 사랑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람에 대한 모든 감정에서 마찬가지다. 문제는 누군가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점. 즉, 누군가를 누군가로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특질은 어떤 것이냐는 문제. 퍼스널리티의 정의. 요체.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이 나에게 누군가가 대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식상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재산이 누군가의 본질이 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재산은 인간이 아니므로. 재산은 인간이 사용하는 것은 될 수 있어도 인간 그 자체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물질적으로 우선 분리되어 있기도 하고, 또 재산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돈은 돌고 도는 것이기에 고유한 성격이 너무 약하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정략결혼. 그 무엇도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인간적이지 못하니까. 정도 차이라고는 해도.
  하지만 돈 같은 것처럼 명확한 경우도 드물다. 예를 들어, 성적이라거나 사회적 인망이라거나 권력이라거나 소위 '능력'. 한 인간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정도와 일치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게 반드시 무근거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누군가를 대하는 것일까. 혹은 대해야 하는 것일까.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보다 하나 낮은 학년의 한 여자아이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여자아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고, 내가 물어본 사람은 대충 키도 크고 괜찮은 아이라고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사상이 어때?”라고 이어서 물은 나 자신 때문에. 그 질문을 무심코 던지고 나서 나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사상은 분명히 한 사람의 내부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고, 또 그 사람의 ‘개성’에 상당한 역할을 차지하는 것으로 통상 간주된다. 은근히 중요하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사상과 밀착된 일을 한다. 그것(청소년인권운동)을 나는 내 ‘본업’이라고까지 종종 부른다. 행동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사고하는 사람으로서도, 사상은 내 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아무래도 사상은 사(私)적 영역보다는 공(公)적 영역에 속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건 일종의 혼동일지도 모른다. 뭐, 애초에 공사를 딱 구별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까지 사상을 먼저 묻는 나의 그 태도에 나 자신이 놀라버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예전이라면 성격은 어떤 애냐고 물었겠지.) 그것은 약간의 공허와 함께 찾아온 전율이었다. 마치 무대포 바보가 하이킹을 하겠다고 자전거를 끌고 산비탈을 올라가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쉬다가 갑자기 자기가 가고자 했던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과 같은 느낌.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늘상 입으로만 말하던 공과 사, 일상과 운동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 바로 그때 그 질문에서 받은 충격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질문이다. 인류라는 종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고 한 인간을 결정짓는 요소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존재를 해체하고 연기론적인 공(空)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일 터이다.
  흔히들 사랑할 때 조건 없는, 조건 따지지 않는 사랑을 하라고 한다. 그것은 대개 상대의 존재를 사랑하고 존재에 옵션으로 딸려 있는 것에 휘둘리지 말라는 소리겠지만, 존재 자체가 모호한 판국에 “조건 없는”이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할 때 조건 따지지 말라는 말은, 아마도 머리로 사랑하지 말고 가슴으로 사랑하라는 말과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겠지.
  그렇게 따지면 나는 머리로 하는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제대로 된’ 사랑 같은 건 하지 않는 셈이다. (더 정확하게는 머리와 가슴의 경계선을 많이 무너뜨린 거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많이 서툴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내 나름의 감정의 형식이 있고, 그게 틀렸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뭐, 그런 이유로, 나는 조건 있는 사랑을 한다. 이건 긴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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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사랑,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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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꿈2008. 1. 12. 17:24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 포함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처럼 그 어원에 대한 학설은 매우 다양하다. 생각할 思(사)와 부피 量(량)을 합친 ‘사량’에서 사랑의 어원을 찾는 학설로 비추어 보면, 사랑은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양으로 정의해 볼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은 사랑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건 대상에 대한 생각으로 사랑은 이루어지고, 완성되어간다. (그러나 단순히 생각하는 양 자체로 사랑을 정의하기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또 다른 학설은 불사른다는 뜻의 ‘살’과 명사파생접미사 ‘앙’의 합성어로 사랑을 보는 관점이다. 사랑을 일종의 불타오르는 감정으로, 우리에게 있어 가장 보편적인 이성간의 사랑을 개념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영문인 'love'는 기쁘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인 ‘LUBRE'에서 시작한다. 사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감정에 대해 중점을 둔 말로서, 사랑으로 기쁨이라는 감정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대해 단순히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내가 무언가와 관련하여 기쁨을 느낀다는 것만으로 사랑을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기쁨을 얻었다고 해서 그 음식을 내가 사랑한다고 하기도 어렵다.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어떤 존재를 그 자체로서 온전히 긍정하는 감정이나 태도라 할 수 있다. 긍정이란 사전적으로 이야기하면 무언가가 그러하다고,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대상에게 어떤 당위(“그래야 한다.”“그래선 안 된다.”)를 요구하지 않고 그 대상이 실존하는 그대로를 옳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서의 긍정은 단순히 수동적인 “그렇다.”는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지지이자 지원이며 주는 것이고 돕는 것이다. 또, 긍정을 하되 온전히 긍정한다는 것은 그 존재를 수단인 동시에 목적으로 존중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온전한 긍정인 사랑과 부분적이고 수단적 긍정인 ‘욕망’, 또는 소유욕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은 종종 듣게 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잘못된 사랑은 사랑과 욕망을 혼동하는 데서 온다. 욕망은 사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물건을 좋아하듯이 사람을 좋아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다. …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타인에 대한 존중을 잃어버리면 한갓 욕망에 떨어지게 된다. 성숙한 사랑은 언제나 타인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김상봉, 『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도서출판 길, 2005, 264-265쪽.)


  이와 같은 긍정의 행위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발현된다. 첫째, 사랑의 대상이 인간인 경우, 사랑은 보통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다. 긍정한다는 것은 그 존재의 목적을 지지하는 것이며, 인간의 목적 ―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좋은 것”은 “행복”이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굳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행복을 추구한다고 간주될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에 적용된다. 둘째로, 어떤 추상적인 대상을 사랑하는 경우는 곧 그 추상적인 것의 실현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진리나 자유를 사랑(긍정)하는 것은 진리나 자유라는 추상적·이상적 존재의 구현을 바라는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존재는 결국 특수한 맥락 안에서의 개별적 구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을 사랑하는 것은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는 등의 형태로 표현된다. 음악이라는 보편자는 근본적으로 구체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작곡자나 연주자)과 그것을 듣는 청자가 있어야 성립하고 실현되기 때문에 그 둘 중 어느 쪽을 맡더라도 음악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사랑의 정의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자면 사랑은 ‘무언가/누군가를 긍정함으로써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감정이나 태도’이다. 즉,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 또한 행복해하는 것이며 이상이 구현되는 것을 통해 자신이 행복해하는 것이다. 사랑을 정의할 때 자기 자신의 행복 또한 포함시켜야 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체성과 개성, 자신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1996, 28쪽.)이기 때문이다. 즉 맹목적으로 자신을 부정하고 희생하는 태도 또한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랑’을 정의하면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는 매우 넓어진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애정이 지나쳐 강요와 속박이 되어 자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는 그 애정이 상대의 주체성을 존중하지 않는 일그러진 욕망으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사랑도 이와 같은 정의로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의 경우 자살을 죄악시한다. 이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성경 창세기 1장 31절)에서 독해할 수 있듯이 기독교의 신은 자신의 피조물 그 존재 자체에 좋아하고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할 일만 해야 한다는 논리다. 기독교와 달리(실은 기독교에서도 때때로), 예를 들어 간디와 같은 경우, 신을 인격체가 아닌 추상적인 존재로 이해한다면 신에 대한 사랑은 그 신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이 추상적 존재로서의 신을 자신 안에, 그리고 세상에 구현하는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혹 연인 간의 질투 등을 들어 이와 같은 단순한 정의를 비판하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다시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고자 하는 것을 구별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사랑받고자 하는 감정이 종종 결합된다는 것만으로 사랑의 정의에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을 포함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고자 하는 것은 분명 별개의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상황에 따라 결합되기도 하고 결합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은 자기애의 외화라고 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너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너는 이런 나를 인정하지 않는 건가?” 연인 사이의 관계에서 이런 것이 종종 관찰되나 연애감정이라고 해서 반드시 이 둘이 함께 있으리란 법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그 사람을 떠난다는 식의 이야기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곧 이 둘의 결합에는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으나 필연성은 없다. 사랑받기 원하는 감정은 근본적으로 자기애의 작용에 뿌리를 두는 부수적인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이 있다. 연인 사이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 가족 사이의 사랑,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 물건에 대한 사랑, 추상적 개념에 대한 사랑 등 그 수많은 것들을 모두 ‘사랑’이란 개념으로 묶기 위해서는 사랑도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의 정의에 대해 많은 이견(異見)이 있겠으나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한 것은, 사랑은 긍정/부정의 틀에서는 긍정의 감정이라는 것, 그리고 긍정 중에서도 단순히 수단적인 긍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건, 자신을 온전히 내주고 싶은 마음이건, 어떤 것의 실현을 추구하는 마음이건 그것이 무언가를 수단인 동시에 목적으로 긍정하는 마음이라는 점은 공통된 것일 터이다. 사랑은 어떤 존재를 온전히 긍정하는 감정이나 태도라는 정의라면, 비록 모호하게 보일 수 있을지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이라 일컬어지는 감정과 태도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믿는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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