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09. 8. 6. 04:32

다 쓰고 나서도 세상에 뭔 캠프 자료집으로 A4 7페이지짜리 글을 쓰나... 싶었던a
그냥 혼자 쓰다가 불 붙어서 마구 써버린...





‘19세 미만’은 왜 ‘미성년자’가 되었나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청소년인권캠프 별세상(2회) “별을 낚다!”



  청소년들에게는, 법적으로 붙어 있는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미성년자”라는 이름이죠. 민법에서는 만 20세 미만, 청소년보호법에서는 만19세(사실상 연20세) 미만, 공직선거법에서는 만 19세 미만 등등으로 그 기준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미성년자”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 않으세요? 미성년자라는 말은 ‘아직 성년이 아닌 사람’, ‘아직 완성된 나이가 아닌 사람’, ‘미성숙한 나이의 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이건 마치 장애인을 “비정상인”이라거나 “부족한 사람”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 같은, 괴악한 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한 마디로 차별적인 말이란 거죠.


‘미성년자’라는 굴레

  어떤 사람들을 “미성년자”로 이름 붙이고 “미성년자”로 대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미성년자”라고 불릴 때 그 사람들은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삶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다른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의 강요를 당해야 합니다. 학교에 다니며 교육받아야 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정치 참여 같은 문제에서는 전사회적 왕따를 당합니다. 그들은 학교의 교육과 가족의 보호·통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하니까, 성숙한 사람들이 그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잘못을 고치려 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항은 있을 수 없죠. 왜냐하면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이 항상 더 옳을 텐데. 그러니까 학교를 운영하든 자기 삶의 진로를 결정하든 정책을 결정하든, 그들은 쏙 빼놓고 성숙하고 완전한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들은 혹시 무슨 사고를 저지르거나 무슨 사고를 당할지 모르니까 밤에는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보호자의 허락 없이 돌아다니거나 외박을 하거나 하면 안 되죠. 돈을 주거나 돈을 벌 수 있게 했다간 잘못 쓸 수도 있으니까 조금씩조금씩 용돈만 주거나 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미성숙한 그들을 위해 사회가 그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니까 혹시 책이나 그림이나 영화 같은 걸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잘못된 걸 따라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도 다 미리미리 금지해둬야 합니다. 성행위? 섹스하다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거나 하면 어떻게 책임을 지겠습니까? 당연히 다 금지해야죠! 그렇게 미성숙한 사람들에게 성욕이나 성적 자유?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청소년의 섹스할 자유? 그게 뭐임? 먹는 거임? 우걱우걱.
  특히 한국에서 더 두드러지는 건데, 이 그들에게는 한 가지 더 무거운 짐이 지워집니다. 입시경쟁, 취업경쟁이라는 짐이죠.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미성년자들이 사회에 잘 적응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인재’로 만들기 위해서, 경쟁은 옵션이 아닌 필수입니다. 한국처럼 먹고 살기 힘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미성년자’는 자연스러운 걸까?

  그런데 정말로 당연한 일일까요? 이렇게 어떤 사람들에게 ‘미성년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꽤나 깐깐한 제한을 가하고 학교에 반드시 다녀야 하게 만드는 등의 일이 꼭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지금 당장 다른 나라들을 봐도 서로서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정치 활동을 하는 데 나이에 따른 제한이 별로 없다던가, 선거권이 만 16세라던가, 15~16살만 되어도 원한다면 독립해서 살 수 있다던가, 12살에 애를 낳아도 너무 큰 부담 없이 양육할 수 있다든가…. 학교나 교육제도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겠죠.
  최근에 좀 뜬 『88만원세대』라는 책이 있는데 혹시 아실까 모르겠습니다. 주로 한국 20대들의 현실을 다룬 책인데요, 심심찮게 10대들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첫 챕터 제목이 「첫 섹스의 경제학 -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입니다.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 이 말 속에는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동거를 상상할 수 있는 10대”들이 있다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실제로 다른 몇몇 나라들에서는 16~18세만 되어도 섹스·동거·독립을 비교적 자유롭게 큰 부담 없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미성년자’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제도들은 사회가 만든 것입니다. 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지금과 같은 ‘아동’, ‘어린이’, ‘청소년’, ‘미성년자’ 같은 개념과 제도들이 생겨난 건 500년도 안 된 일입니다. ‘학교’처럼 거의 모든 아동·청소년들이 꼭 다녀야 하는 교육기관이 생긴 건 그보다도 더 가까운 과거의 일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100년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이전에도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다르게 대하는 게 전혀 없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고, 대체로 지금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청소년들의 뇌가 어쩌구저쩌구 호르몬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소리들을 많이 듣습니다. “주변인”이니 “질풍노도의 시기”이니 “자아정체성 확립”이니 하는 말들을 사용해가며 청소년들을 규정하려는 심리학자들의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나 책 속에서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청소년들은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사실 이런 얘기들은 100% 과학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화가 다른 여러 사회들을 살펴보면, 아이와 어른의 구별이 별로 없는 사회,  ‘질풍노도의 시기’ 같은 것 없이 아주 평화롭게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사회 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10대’들이 판단력이나 책임감이 부족한 듯이 보이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어른들과 격리시켜 행동을 통제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고 권리를 박탈하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더 문제행동을 일삼는 것처럼 보인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사회에 참여할 권리, 경험을 쌓을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에 더 의존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데, 능력이 부족하고 의존적이기 때문에 권리와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식의 뷁스런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오히려, 정말로 ‘과학적’으로 말한다면, 성욕이나 성적인 활동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라고 하는 15~16세부터 섹스, 결혼 등이 가능한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글이 하고 싶은 말은 분명합니다. 청소년들이 인권침해를 당하며 통제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은 청소년들의 뇌가 아직 덜 익었다거나 그들의 몸 속에서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감정과 행동을 조장하는 호르몬들이 마구 분비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 18세까지는 판단력도 없고 멍청하고 비합리적이다가, 만 19세가 넘으면 판단력이 갑자기 짠하고 생기고 삶과 사회에 진지해지고 합리적으로 변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딴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이 사회가 그따위로 생겨먹은 탓입니다.


왜?

  그럼 왜 이 사회는 이따위로 생겨먹은 것일까요? 설마 특별히 어른들이 못돼먹어서, 성격이 안 좋아서, 변태라서 그런 것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아동·청소년들의 노동이 금지되기 시작한 때, 청소년들에게 학교에 다닐 것을 요구하고 학교를 ‘의무교육’으로 만들어갔던 때를 살펴보면 대충 답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학교 제도는 아동·청소년들의 삶을 억누르고 ‘배워야 하는 존재’인 ‘미성년자’들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초등학교가 생겨나면서 아이, 어린이에 대한 개념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았고 중등학교가 생겨나면서 청소년기가 보이게 되었거든요.

  처음 유럽에 도시가 생기고 공장이 생기던 때는, 참 비참하고도 끔찍한 노동 착취가 흔하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많은 공장들이 적은 돈을 주고 아이들을 고용했습니다. 아이들이 임금이 적었던 건, 아이들은 신체적으로 약한 입장이었고, 따로 기술을 가지고 있지도 숙련되지도 않은 노동자로 주로 단순한 업무에만 고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노동자들 대부분이 하루에 최저 10시간 최대 19~20시간씩(!) 일을 하는 끔찍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아동·청소년들이 과도하고 위험한 노동에 목숨을 잃었고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이 10대 후반일 때도 있었습니다.(즉, 노동자들이 20살이 되기 전에 죽었단 이야기!) 빈민이나 노동자 계급에 속했던 많은 아동·청소년들이 과도한 노동 속에 몸을 망치고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응하여, 일정 나이 이하의 아동 노동을 금지하고, 의무교육을 받도록 하는 법률들이 18세기 이후에야 만들어졌습니다. 학교에 다닌다는 취학 증명서를 가져오는 아동·청소년만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 같은 게 만들어지기도 했죠. 그런데 이런 아동 노동 금지, 의무교육 도입 등이 이루어진 데는 두 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런 끔찍한 현실을 바꾸고 (아동을 포함해서) 노동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답게 살게 해야 한다는 노동자들 자신과 양심적인 지지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교육을 받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이며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권리 사상의 발전이었습니다. 참 바람직한 일이죠? 물론 직접 노동 착취를 없애고 사람들이 굶어죽을 걱정 없이 살게 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한 궁여지책일 수도 있지만요.
  반면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더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노동력이 필요해졌다는 것, 학교 교육을 통해 더 순종적이고 규율을 잘 따르며 생산성 좋은 노동자를 만들 수 있으며 사회 불안을 줄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국가들 사이의 전쟁 등으로 인해 국가의 말을 잘 따르고 군사화된 국민들이 필요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학교의 모습은 많은 부분이 1800년대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지역)에서 시작된 국가주의·군사주의 교육에서 온 것입니다. 당시 프러시아는 중앙집권화된 학교 교육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 고분고분한 광산노동자 ▲ 정부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 ▲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 ▲ 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 프러시아의 교육은 순종적인 군인·노동자·공무원을 만드는 교육이었고 복종과 규율을 가르치는 교육이었습니다. 독일 민족주의 교육의 대표자인 얀이라는 사람은 민족부흥을 위해 의무교육이 필요하며, 민족주의적 의미가 없는 교과목의 폐지 등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프러시아의 이런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지적도 있지요. 그밖에도 그 시대에는 많은 저명한 사람들이 학교 교육이 아동·청소년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정부에 복종하는 인간을 길러내고 생산성 좋은 노동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에서 학교교육이 도입되고 ‘아동’이나 ‘청소년’이나 ‘소년’ 같은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한 건 근대 문물이 막 들어오던 1800년대 후반~1900년대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국가주의·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던 것은 한국에서도 별로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특히 조선-대한제국-한국에서는 청소년, 학생들을 민족의 전사이자 조국의 근대화를 이루고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세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국전쟁까지 거치고 난 이후 한국에서도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1954년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이 쓴 글을 보면 “여러분이 학교에서 학업을 닦는 목적이 여러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태어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미성년자’ ― 청소년, 아동들을 따로 구분하고 학교 교육을 받게 한 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단 겁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때에도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이는 것이 국민으로서 청소년들의 의무라고 밝히고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청소년들에게 달달 외우게 했던 때입니다. 청소년들, 학생들은 조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인적 자원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한편, 그 당시 청소년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주입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 때문에 정치적인 사건들에 대해 알고 판단을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반공주의와 애국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지만 말이지요. 그건 청소년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했다기보다는 청소년들에게 획일적 의식을 강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프러시아 교육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교육에서도 군사주의·군국주의적인 모습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과 십 년 전까지도 있었던 ‘교련 과목’도 그렇고, 우리가 체육 시간이나 운동장 조회 때 하게 되는 줄 맞춰 서는 훈련 등도 그렇습니다. 두발복장규제는 특히 군사주의적 냄새가 많이 나는데, 때로는 남자들이 군대에 가는 것을 미리 준비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교육에서 경쟁이 심한 것 또한 청소년들을 이 사회에 순응하게 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효과가 있지요.
  그리고 한때는 한국에서는 청소년 노동에 대한 착취가 심각했습니다. 섬유, 옷, 봉제 등이 주력 산업이던 1960~70년대에는 평균 15~18세 나이의 청소년들이 어두운 공장에서 하루 15시간씩 재봉틀을 돌리고 마름질을 하고 바느질을 했습니다. 이런 노동 현실에 분노하여 항의하다가 분신하여 돌아가신 노동자 분이 바로 전태일 씨(본인도 17살부터 일을 했던)였습니다. 이러한 아동 노동이 실질적으로 금지되고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산업 구조가 바뀌고 민주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198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이런 패턴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한국·동아시아만의 특색도 없진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유교 문화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인데요. 독특한 ‘가족주의’라거나 교사에 대한 독특한 존경, 나이에 따라 존댓말 반말이 갈리는 등 나이 구별/차별이 쩌는 나이주의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한국 ‘미성년자’들의 삶을 괴롭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지요.
  시간이 흐르고 1990년대가 되면서 청소년들의 노동이 줄어들고, 청소년들이 사회에 참여할 이유(반공, 애국, 근대화 등)도 줄어들면서 청소년들은 자연스레 사회에서 왕따가 되어갔습니다. 1920년대에는 그렇게 흔하던 중고생들의 동맹휴학이나 학교 점거, 시위 등이 지금은 별로 없는 것에는 이런 역사적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사회의 주체라기보다는 의미있는 소비계층, ‘알 수 없는’ 젊은 세대 정도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최근에 촛불이다 뭐다 하고난 뒤에야 사회적 주체로서 청소년들에 대한 좀 진지한 얘기들이 오가고 있는 편이지요.

  어쨌건 결론을 정리해봅시다. “왜 이 사회에서는 ‘미성년자’를 따로 나누고 통제하고 학교를 보내고 사회에서 왕따시키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그 이유를 대략 요약하자면, ①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동·청소년들이 착취를 당하기 쉬웠는데 이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 ②국가와 기업(자본)이 아동·청소년들을 사회에 순응적이고 명령에 잘 따르고 생산성 좋은 국민·군인·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 였습니다. ①번 이유는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지금 학교나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큰 영향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통제는 어른들이 못돼먹어서도 아니고 변태라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지금처럼 국가가 사람들보다 더 우선시되고, 기업이 돈을 잘 벌고, 지금 같은 가족제도가 유지되도록 하는 등, 이 사회를 계속 꾸려나가기 위해 생겨난 제도인 것입니다. 학교는 우리들이 똑똑해지고 훌륭한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한 게 아니라 국가와 기업(자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지금은 다른가요? 너무 음모론처럼 들린다구요? 하지만 역사를 봐도, 그리고 지금 있는 여러 정책들의 결과를 봐도, 충분히 그럴 듯해 보이지 않나요?


‘미성년자’도 인간이라는 외침

  그래서 우리가 “미성년자도 인간이다.”라거나 “청소년도 인간이다.”, “청소년에게도 인권이 있다.”라고 외치는 것은 단지 나쁜 어른들의 편견을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의 이 사회에 도전하는 일이고, 사회의 문화와 제도와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학교를 바꾸고 가족·가정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일입니다. 그건 어쩌면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에 대한 혁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뭐 쉽게 말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란 거죠.
  어려운 일이더라도 ‘만 19세 미만’의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게, ‘미성년자’가 아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상상하기가 좀 어려울 겁니다. 지금 같은 학교, 지금 같은 가족·가정이 없는 사회는 어떤 세상일지. 그럼 14살짜리 청소년이 임신이라도 하면 어떻게 애를 낳아서 기르라는 건지. 8살짜리 아이에게도 투표권을 주자는 건지. 청소년들이 사회경제적 약자가 아니게 만드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 어쩌면 청소년들 스스로도 사회경제적 약자의 지위에서 자유와 권리를 제한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안주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교복이 없어지면 아침에 뭐 입고 나갈지 고민해야 해서 싫다는 청소년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통제와 타율과 귀차니즘이 자유나 개성이나 인권에 대해 거둔 씁쓸한 승리.)

  구체적으로 그런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더 곰곰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누가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미성년자’도 인간이라고 말하는 외침은,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토록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포함해서 말이죠. ^^






* 참고문헌
『바보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이팔청춘 꽃띠는 어떻게 청소년이 되었나 - 청소년 만들기와 길들이기』 고미숙, 권인숙, 김현철, 나임윤경, 박노자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아동」 배경내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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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별캠때 이 글 받고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정작 챙겨 읽지 않고 이렇게 허겁지겁 공현씨 블로그를 찾아 읽었네요. (아수나로에서 찾아봤지요.) 쉽고 재미있는 게 딱 제 타입입니다. 한국이 '특이한 케이스'였다는 것에는 조선말-대한제국초 서툴은 근대화와 그 이후 일제의 폭압이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이러니하게 일제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한 민족교육도 한 몫을 했고요. 뭐 이런 과정을 통해 뿌리깊게 새겨진, 군인 출신 대통령들을 통해 확고화된 파시즘적 사고가 말씀하신 부분일테고요. 무튼 재미있는 글입니다. '진청모'와 제 블로그에 퍼가도 될런지요?

    2009.08.09 23:52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런데 공교육이 민족주의, 국가주의 성향이 강했던 건 한국이나 프러시아나 프랑스나 미국이나 큰 차이가 있지는 않습니다. 저항적 민족주의적 맥락에서의 특색이 없는 건 아니지만요. 한국적 특색이라면 유교적인 문화나 가족주의 특색을 봐야 하지 않을지 싶기도.
      사실 이 글에서는 핵가족의 형성, 가족주의의 문제는 분량상-시간상 거의 쓰지 못해서 좀 아쉽습니다.

      네 얼마든지 퍼가세요 ^^

      2009.08.10 00:05 신고 [ ADDR : EDIT/ DEL ]
  2. 유교와 가족주의의 문화 역시 한국의 특색이라기 보다는 역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공통점이죠. 무튼 잘 퍼가겠습니다. 아, 캠프 때 받았던 배경내 씨의 글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그 역시 저의 주체할 수 없는 띨띨함에 의해 잃어버렸지요 ㅠㅠ

    2009.08.10 08:47 [ ADDR : EDIT/ DEL : REPLY ]
  3. Cts

    음... 통제하기 편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시스템... 그런 '목적'으로 여러 세대 쌓여온게 지금의 상황인것 같아요

    2011.06.24 18:47 [ ADDR : EDIT/ DEL : REPLY ]
  4. KTX 부다

    엄밀히 말해서 청소년을 미성년으로 분류한 역사는 100년정도에 불과하고 초등학생 아동기의 노동금지도 이보다 조금 전인 19세기 후반에서야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의무교육탄생은 길어야 19세기 중반이전을 상회하지 않습니다. 중학교이후의 의무교육이나 청소년기에 대한 미성년규제는 대략 1차대전이후로 정립하게 됩니다.

    2018.11.04 13:57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9. 7. 29. 20:37
청소년인권 서평대회, "세상의 중심에서 청소년인권을, 너도 한 번 외쳐볼래?" 기억하시는지요 ^^:


마감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7월 말"이라는 애매한 표현 때문에 헷갈리실 분들도 있겠지만
어쨌건 8월 1일 지나고 나면 더이상 접수 안 받을 거예요.



아직까지 3명 정도 참가해주셨는데요. ㅋㅋ 뭐 참가자 분들이 적으면 그만큼 1명에게 돌아가는 상금도 많아지고 총 상금 액수도 좀 줄여도 되고 그러니까

주최 입장에선 그리 나쁘진 않은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참가해야지"했는데 참가 못하신 분들이 있을까봐 한 번 더 알려드립니다.

(참고로 지금 참가하셔서 참가자 수가 10명을 넘지 않게 되면 참가상으로 5만원을 받으실지도 모릅니다 @_@ 낚시낚시)


더 자세한 참가 방식 등은 카페에서 확인하세요 ^^







http://cafe.naver.com/mphrstory


감히 인권을 넘보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느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된 것, 알고 계셨나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 ㅋㅋ』라는 발칙한 제목이었죠

하지만 청소년인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사실 끝날 수 없죠 @_@
청소년인권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 ㅋㅋ』 출간에 만족하지 않고,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는 이런 좋은 책에 더 좋은 이야기들을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서평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ㅎㅎ

바로 여러분이, 직접 청소년들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써주세요!  라는 이야기입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ㅋㅋ』를 읽고 서평을 써서 서평대회 카페에 올려주세요.  ^^
책을 읽고 나서 책 내용과 관련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청소년인권에 대한 이야기라면 다!!!!!! 좋습니다.

(꼭 책을 칭찬하는 내용이 아니어도 좋고, 욕하는 내용이어도 상관 없습니다. 책 자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 않아도, 청소년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책을 읽고 나서 글로 써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


여러분이 쓰신 개성있는 청소년인권 이야기들을 기다리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청소년 분들의 참가를 권장하지만, 청소년이 아닌 분들의 참가도 막지는 않습니다.)


7월말까지 접수 받습니다!!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대충 10장 이상. A4로는 대략 1페이지 정도.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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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09.07.31 01:34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9. 7. 29. 11:18


최근에 유엔사회권위원회에 제출할 한국의 사회권 NGO반박보고서를 쓰고 있다.
그중에서 맡은 파트는 아동권.

다른 '주거권'이나 '물에 대한 권리', '건강권', '교육권' 등과는 달리
아동-청소년 권리(제10조, 여성(+임산부)과 아동과 가정 등에 대한 조항에 해당)은 좀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는 느낌...

'아동 노동' '청소년 성매매' '비혼모와 성교육' '탈가정 청소년' '청소년의 참여' '결식.빈곤 아동' '학교와 가정에서 체벌' '아동-청소년 문화적 권리'...
아무래도 아동-청소년이라는 특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에 관하여 관련된 사회권을 다 쓰다 보니까 그렇게 산만할 수밖에 -_-;;



그래서 걱정한 게, "아동권 파트에서 핵심적으로 끌어내고 싶은 권고는?"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충 1차 초안을 쓰고 나니까 뭔가 공통된 권고 요구가 보인다 ㅋㅋ

'아동-청소년에 대한 소득 보장/지원 정책'을 요구하는 게 교육권 쪽이랑 문화적 권리를 빼고는 거의 다 들어가 있다.
그래서 쓰고 나서 생각한 게 "역시 기본소득제로...?;"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여건을 개선하고 지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에는 역시 기본소득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였나


다만 사회권반박보고서는 아무래도 UN사회권위원회의 다른 권고 수준들을 보면서 요구하는 걸 조정할 수밖에 없어서 전체에 대한 기본소득 보장 등을 대놓고 요구할 수 없는 게 아쉽긴 하다.

빈곤, 결식 아동 파트에서 무상급식 문제를 조금 다루긴 했는데,
최근의 경기도에서 촉발된 무상급식에 대한 논의를 좀 더 반영해서 논리를 구성해야겠다 싶다.
무상급식도 분명히 필요하다.
사실 무상급식이냐 '저소득층에 대한 무료급식'이냐 하는 논의 또한
무조건적 소득 보장이냐 빈곤층에 대한 지원이냐 하는 논의와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 있는 듯?



'무조건적인 소득 보장'은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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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문제는 현재 기본 소득제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 중에 있는 사회당과 연계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 참에 진보신당 청소년모임에 관련 안건을 제출해 볼까요. (…근데 되려나)

    2009.07.30 03:06 [ ADDR : EDIT/ DEL : REPLY ]
  2. 기초소득 아니죠 기본소득 맞습니다 'ㅅ'

    2009.08.03 10:35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9. 7. 12. 16:58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차원에서,
유엔사회권위원회에 제출해야 할 NGO반박보고서를 작성 중.

아동권 쪽(여기서 아동은 만18세미만임. 유엔사회권규약 제10조)이긴 한데

아동 노동, 성적권리(성매매,성폭력,성교육,비혼모 등), 지역사회아동지원(결식,빈곤 문제 등), 가출청소년과 대안주거, 학교와 가정에서 아동학대(체벌 등), 문화적 권리, 아동의 참여... 이렇게 되어 있는데

아 빡세;;;


노동이랑 체벌 쪽을 바람이 쓰고...
난다가 문화권 쪽 썼고.

난 방금 막 아동의 참여 부분을 다 썼다;  어디까지나 초안이라서 다 수정하고 조정하고 다듬어야 하지만.
(사회권인데 참여 이야기가 들어가는 이유는, 정부보고서에서 청소년의 권리증진이라면서 자랑스럽게 청소년 참여를 증진시킨 제도들을 썼기 때문. 사회권위원회에서는 아동 등 당사자의 자력화나 참여도 꽤 중요한 요소로 본다.)




그나마 참여 부분이 쉬운데
빈곤이랑 이런 거 자료는 또 보충할 게 많이 남아 있다.
차라리 노동 쪽은 자료 등등을 이미 갖고 있는 게 많아서 큰 어려움 없이 쓸 것 같긴 한데.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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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9. 7. 8. 20:28
「아이의 나라」 -Burn Up-

(전략)

많은 어른들이 모여 차례차례 그곳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던져넣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TV와 연결하여 게임을 할 수 있는 기계와 만화만 실린 책, 여러 장을 모아서 즐기는 카드 게임이었습니다.
“…….”
그런 어른들을 아이들은 XXXXX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장갑을 벗고 잠시 손을 녹인 키노는 모닥불에 물건을 던지다 잠시 쉬고 있는 한 어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뭘 하는 겁니까 하고.
어른은 대답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비뚤어졌지 뭔가. 그건 우리가 어릴 적에는 없었던 저 물건들 때문이지. 그래서 전부 빼앗아서 처분하고 있는 거라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아이였을 때처럼 순수하고 말 잘 듣는 아이다운 아이로 돌아올 거야.”

(중략)

“자, 여행자님께 뭐든 질문을 해보렴.”
어른들이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XXXXX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어른들이 누구 없니? 하고 물었습니다.
“뭘 물어봐야 되나요?”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뭐든 좋단다. 네가 정말 궁금한 걸 물어보렴. 이 나라의 어른들에게는 물어볼 수 없는 걸 물어보는 건 어떨까?”
한 어른이 대답했습니다.
아이는 그럼 하고 입을 열며 키노를 올려다보았습니다. 키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습니다.

“여행자님, 제발 가르쳐주세요―.”
아이는 진지한 태도로 키노에게 물었습니다.
“이 나라의 어른들을 전부 불태워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이들이 모두 키노의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른들이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키노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아이들 중에서 조금 전 질문을 했던 아이는 없었습니다.


키노의 여행 -the Beautiful World- 10권 컬러페이지 中
(시구사와 케이이치 지음. 쿠로보시 코하쿠 일러스트. 김진수 역. 대원씨아이. 2008년.)




키노의 여행을 보다보면, 시구사와 케이이치 씨가 아이-청소년의 문제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든다.

뭐 키노의 여행 자체가 굉장히 다양한 사회적 이슈-문제들에 대해 폭 넓게 짤막짤막한 생각들을 던지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특히 키노가 처음 여행을 떠나게 되는 걸 그린 에피소드인 "어른의 나라" 같은 경우는 굉장히 직설적으로 아이의 사회에서의 지위랄까,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이랄까 그런 사회화 과정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을 드러내고 있다.
"어른의 나라"에서 어른이 되는 것은 "하기 싫은 일도 웃으면서 묵묵히 할 수 있는 사람",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아서 그 일이 좋든 싫든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아이에서 어른이 될 때 뇌의 일부를 개조하는 수술을 받는다. 그리고 그걸 거부하겠다고 말한 키노를 키노의 부모는 아무렇지 않게 죽이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가 흔히 '사회화'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묻게 된다. 카도노 코우헤이는 부기팝에서 어차피 모든 인간은 세뇌당한 것이고, 사회화란 세뇌라는 멘트를 날린다. 사회화는 분명 폭력이다. 하지만 그 폭력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 않은가? 그럼 '어떤' 폭력이냐 하는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인가.)


또한 그 이후에도 2권에서 '과보호' 에피소드라거나 기타 등등은 아이-청소년들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나 규제, 사회적 태도에 대해 다소 신랄하거나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보호'는 정작 전쟁에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 아동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아동에게 얼마나 좋은 장비를 입히느냐 하는 거롤 옥신각신하는 부모의 이야기.)




키노의 여행 10권 컬러페이지에 등장한 '아이의 나라'(위에 짧게 인용한)는 어른들에 의한 아이들에 대한 폭력을 한 번 더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짧은 에피소드다. '아이의 나라'는 1권의 '어른의 나라'와 거의 동일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어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이를 거부한 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직접적인 폭력.

이처럼 '순수하고 말 잘 듣는' 아이에 대한 환상-욕망은 그런 틀을 대놓고 위반하는 아이의 존재를 지우고 배제하는 폭력에 이른다.

아, 물론 그 전부터도 불 속에 아이들의 물건을 던져넣는 어른들의 행위는 폭력이었지만.





(키노가 사실은 여성 청소년, 이라는 것도 키노의 여행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생각해 볼 만하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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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1. 14. 14:30


2007년에 지역아동센터협의회에서 연 토론회에서 썼던 토론문-
이래저래 난감했던 토론자리였던 듯.

후일담으로, 토론비로 7만5천원을 입금해야 하는데 담당자가 실수로 75만원을 입금해서 내가 (한참 고민하다가) 나중에 돈을 돌려줬었다;;;

옛날 글인데 문득 이사할 때 안 챙겨온 게 생각나서 올려둔다-



‘연대’를 통한 건강권 실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윤종

◎ 건강권, 그 조심스러워야 하는 영역

  이른바 “아이들의 건강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할 때면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의식주를 비롯하여 의료, 문화 등과 연관되어 있는 생존권이나 건강권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인권 영역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동’의 영역으로 올 때는, 특별히 조심스러운 태도가 요구된다. ‘아동인권’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인권의 개념은 자유권에서 사회권으로 확대되어 왔다고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동인권’의 경우에는 사회권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그 이후에야 자유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정반대의 역사를 갖고 있다. “미성숙”하다고 폄하되는 아동의 자유와 참여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보다, 아동에게 물질적 원조를 제공하고 아동을 이른바 유해환경으로부터 통제하는 방식이 비아동들에게는 덜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들의 건강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먼저 그 방식이 아이들을 타자화하고 시혜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또한, 그것이 일부 비아동들의 입장에서 “널 위한 거다”라며 선(善)을 독점하고 강요하며 아이들을 통제하는 방식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덧붙여서, 흡연․음주 규제를 비롯해서 종종 눈에 띄는  ‘아동’에 대한 통제를 주로 하는 기존의 ‘보호․선도’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도 필요하다. 생산자인 기업(자본)과 국가, 사회 구조에 대해 태클을 걸기보다는 소비하는 아이들을 통제함으로써 아이들을 이른바 ‘유해환경’들로부터 ‘보호’하려는 방식에는, 사회적 권력이 약한 쪽을 억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올바르지 못한 면도 있다.

  인권의 불가분성이라는 말은 단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다. (제3세대 인권이라는 연대권은 차치하고라도) 사회권 없는 자유권, 자유권 없는 사회권은 허상이거나 일종의 폭력이 될 우려가 있다. 아이들의 의견과 참여, 자유가 존중되지 않는 건강권의 추구는 일방적인 시혜나 통제가 되기 쉬운 측면이 있으며, 때로는 오히려 반인권적인 성격을 띠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용중 씨의 발제 중에서 게임 산업체의 의견이 과도하게 반영되는 문제, 음식물의 생산 구조, 양극화, 경쟁적 사회 구조, 근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에서 광범위하게 비롯되는 생태계 파괴와 파괴적인 생활 환경 등을 지적하는 부분은 중요하다. 농촌과의 연계나 광범위한 음식물 생산․유통․소비 구조의 변화, 경쟁중심의 양육문화의 변화 등의 정책적 대안들도 비중있게 다뤄야 하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 차별적이지 않으며 인권적인 건강권을 요청한다

  기본 주제에서는 벗어나는 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용중 씨와 이향란 씨의 발제 초안(내가 이 토론문을 쓰고 있는 지금 받아서 보고 있는 것은 최종본이 아니라 초안이니까) 중에 보이는 차별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글 전체를 훑으며 문구 하나하나에까지 매달리자면 2~3페이지 안에 이 글을 다 쓰겠다는 내 결심을 지킬 수 없게 될 테니,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

  예컨대 이용중 씨는 발제 중에 “트랜스젠다 증가”와 “동성애자 증가”를 사회적 문제로 보고 있으며 이향란 씨도 성교육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정상적인 것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며 비정상적인(동성애․노출 등) 것에 대하여는 질문이 없는 한 소개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있다.

  모두가 이성애와 남성/여성의 분리법만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그 외의 동성애, 트랜스젠더, IS(Inter Sexual) 등을 ‘사회 문제’나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수자를 심각하게 차별하는 내용이 ‘정상’을 기준으로 한 건강권을 명목으로 교육되거나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 등에 대해서는 충분한 인권교육/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다른 교육 속에서도 이에 대한 차별적 언급이나 비가시화가 없도록 해야 한다. (이성교제, 이성친구를 비롯해서 이성애만이 당연한 것처럼 묘사하는 여러 가지 표현과 뉘앙스들.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남성/여성으로의 성별분리만이 유일한 것인 양 말하는 것 등.)

  이런 차별적인 인식에 대한 경계심은 장애인에 대한 언급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며, 건강교육을 할 때도 장애인이 배제되지 않도록 ― 가능하다면 장애인․비장애인 아이들이 함께 이야기하여 장애인이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활동이나 놀이를 고민하도록 하는 통합교육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건강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비장애는 건강한 것이고 장애는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하거나 해서도 안 되며, ‘표준’이나 ‘평균’이라는 명목으로 거기에서 벗어나는 집단에 대한 차별을 낳게 되는 교육도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


  또한 건강권을 ‘국가경쟁력’이나 ‘국가발전’, ‘노동력 상실’ 등의 관점으로 접근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을 수단화하고 차별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예를 들어 불임 문제는 저출산을 야기하는 문제로서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싶으나 불임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의 행복과 권리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저출산은 생태적으로는 오히려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다.) 성소수자나 장애인에 대한 차별에는 분명 ‘국가경쟁력’ 등의 논리가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단체생활에서는 질서를 지키자”(성교육 부분에 들어가 있어서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알쏭달쏭한데) 같은 경우도, 단체생활에서의 질서나 규칙 자체를 강조하기보다는 그 질서나 규칙이 민주적으로 만들어졌고 또 그 내용이 합리적이고 인권적인지, ‘나 자신’이 거기에 동의하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했으면 한다. 질서나 규칙 자체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자신과 친구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임을 체득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중요한 건, 권리의 문제를 권리 주체와 그 권리 주체의 사회적인 관계들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당사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리 주체를 수단화시키고 수동적인 존재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이미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통제해야 할 자원이나 (‘누구’가 아닌) ‘무엇’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릴 것이다.



◎ ‘연대’를 통한 건강권 실현을 위해

  이 자리가 국가정책을 이야기하는 자리인지 지역아동센터의 건강권에 관한 교육이나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인지는 헷갈리지만, 여하간 다소 모호한 위치에서 건강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나는 지역아동센터나 공부방에서 활동해본 적도 없고 정부에서 정책을 만들어본 적도 없으니 이에 대해 디테일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 여기며, 뭐 이 글 전체가 그렇듯이 좀 대략적인 관점과 원칙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어쨌건 이 토론회에 참석하는 사람 중에 지역아동센터의 아동은 없을 거라는 가정을 별다른 근거없이 내리고 쓰는 것이니, 혹시 토론회에 오신 분 중에 지역아동센터의 아동 당사자 분이 있다면 이후의 제안 내용이 아동 입장에 대한 것이 아닌 점을 사과드린다.

  아동, 비아동 할 것 없이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건강권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광범위한 생태계 오염과 파괴,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합성물질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저소득층 빈곤 아동은 건강에 좋지도 생태적이지도 않은 음식이나 주거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해결을 위해서 정부의 복지 예산 증가와 그 수급 과정이나 방식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 또 그 무엇보다도 이용중 씨가 제안한 것과 같은 전반적인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소비자에게 쓰지 말자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불매를 비롯해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생산자 및 생산․유통구조에 직접 태클을 걸어야 한다.

  문제는, 아이들을 어떤 위치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다. 빈곤층 아이들은 단지 지역아동센터의 교사가 배려해줘야 하는 특별한 소수자인가? 빈곤층 아이들의 건강권은 지역아동센터를 비롯해서 비아동들 쪽에서 일방적으로 노력하고 베풀어줘야 할 문제인가?

  내가 거듭 아동들의 참여나 아동들에 대한 존중 등을 강조하게 되는데, 빈곤층 아동들의 영양이나 건강권 문제는 심각하지만 동시에 빈곤층 아동들의 자존감, 자립심의 문제도 중요할뿐더러 이러한 면이 결여된 채로는 결코 이를 온전한 권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내 제안은 아동들을 연대의 주체로 인정하고 활동이나 교육도 그런 맥락에서 접근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아동들에게 단지 유해한 것을 최대한 피하는 법이나 식습관 같은 것만을 가르치지 않았으면 한다.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하려고 노력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아동들을 존중해야 한다. 아동들도 변화의 주체이다.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비아동들만 알고 있고 아동들은 단지 그 문제에서 나타나는 현상들로부터 벗어나게 잘 해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동들과 함께해나가는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예컨대 담배가 몸에 해롭다고 가르친다면, 그럼 그런 담배를 왜 국가에서 만들어서 파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줘야 할 것이며 또 ‘성년’은 담배를 펴도 되고 ‘미성년’은 담배를 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는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법률에 대해서도 함께 토론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는 성폭력, 식생활, 주거의 문제 등에 모두 해당한다. 사회적 문제나 구조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이를 어떻게 하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새롭게 만드는 것 또한 교육일 것이다.


  아동들이 함께 자신의 건강권을 실현해가고 때로는 얻어나가도록 하지 못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는 비아동들의 시혜적인 대책에 머물 수도 있다. 물론 비아동들도 건강권의 위협을 받고 있는 건 마찬가지이니, 비아동들이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 동들보다 높은 곳에 서서 아동들을 배려하고 뭘 자꾸 베풀어주려고 하기보다는, 아동들과 함께 ‘연대’하는 교육과 활동을 실현했으면 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런 연대를 통해서만이 아동들의 건강권에 필요한 실천들, 제도들, 사회적 관계들, 생산 방식들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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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벨로

    숫자가 만능의 보도고 만물의 척도라 믿는 사람이 이 국가집단의 수장인 것부터 답이 없...

    2009.01.14 16:03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8. 8. 9. 15:36








Duel (번역하면 대결, 결투 쯤 되시겠다) 은 전체 내러티브 상으로는 인권교육이라거나 청소년인권을 이야기할 때 써먹기 좋은 영상이죠.

이번에 '별세상 청소년인권캠프'에서 제 추천으로 이 애니메이션을 틀었었는데
그때 다 못했던 이야기를 좀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Duel이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영상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이 사회의 컨베이어벨트(인간생산공장 - 학교 등등)에 대한 청소년(아동)들의 직접적인 저항이 강조된 애니메이션이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이 애니메이션은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고 조금은 소박하십니다. --;
아무래도 '표현의 자유'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서 그런지...



제 생각에 Duel을 볼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직접 검열을 통해서 획일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은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대중문화와 소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자연스럽게' 획일화되고 소외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경각심이 없다는 부분인 것 같아요 ~_~

(저기 나온 것처럼 책, 잡지, 기타 등등 상품을 마음대로 소비하게 냅두면 결국 저 아이들 중 다수는 본질적으로는 똑같아질 가능성이 높죠-_-; 소비자로서...;;;)


+ 덧붙여서 '검열'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내용'에 대한 비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게,

도중에 아이가 지극히 상품화된 여성의 몸이 가득찬 잡지를 볼 때 체벌이 가해지잖아요?
물론 그런 방식으로 검열하고 19금 딱지를 붙여가며 접하지 못하게 금기시하는 것은 잘못인데

거기에 더해서 동시에
후반부에 가위와 망치 등을 모두 부수고 자유롭게 아이들이 표현의 자유를 누릴 때,
그 표현의 자유 속에서 그런 내용들에 대한 비판을 하는 모습도 나왔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단순히 상품으로, 책으로 주어지는 내용들을 접하고 수용할 자유 뿐 아니라
그 내용을 비판하는 모습도 그런 자유의 한 모숩으로 제시되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_@
(애니메이션 상에서는 너무 '수용'하는 모습만 나오지요...)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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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8. 4. 14. 02:01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조주은) 책 3장 중에서 발췌

 

(청소년인권운동 같이 하는 청소년들과 보려고 타이핑했습니다 헥헥;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되어서 출판사나 저자가 문제제기를 하면 삭제하겠습니다.)

 




아동기의 신화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2003년, 대학 캠퍼스 구석구석에는 이라크 전쟁의 부당함을 알리는 대자보가 나붙고, 인터넷 공간 곳곳에는 전쟁에 관한 토론방과 사진, 동영상들이 넘쳐났다.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대자보에는 병원에서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거나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라크 어린아이의 사진들이 있었다. 전쟁의 폭력과 참상을 알리는 대자보 가운데 사람들을 가장 많이 모이게 했던 것은 피해 받은 어린아이들을 전시한 사진전이었다. 전쟁의 공포와 육체적인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라크 어린아이의 울음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궁금증이 일었다. 이라크전의 피해자 중에는 여러 민간인이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장애인이나 노인보다 어린이가 받는 고통에 더 민감한 걸까? 그리고 왜 그것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는 것일까?

     이것은 근대화와 산업자본주의의 싹이 트면서 부각되기 시작한 아동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관련이 있다. 16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동, 어린이 같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이를 위해 고안된 장난감이나 특별한 이론들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작은 어른이었고 그렇게 다루어졌다.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어 계급이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아동에 대한 이론과 상품이 쏟아졌다. 아동 관련 서적들의 모든 전제, ‘어릴 때 결정된다’류의 이론들과 그것을 자극하는 상품들이 그것이다. 몇 세 때 지능이 완성되고 몇 세 때 인격 형성이 마무리된다는 이론들은 결국 아이와 관련된 모든 문제와 책임을 이 시기에 아이와 함께 보내지 못한 어머니들에게 전가시킨다. 만약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못하거나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한다면, 혹은 지나친 말썽쟁이가 된다면, 그에 대한 일차적인 원인은 어린 시기에 아이와 함께 집에 머물면서 적절한 자극과 애정어린 보살핌을 주지 못했다고 간주되는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게다가 완벽한 아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모든 어머니들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성 중이다.

     어린이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특별하고 섬세한 보호와 훈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아동기의 신화는 일하는 기혼 여성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여성들은 ‘제일 중요한 시기에 애하고 같이 있어줘야 할 것 같아서’ 입덧 때문에 정류장마다 내려 구토하면서도 견디며 직장을 계속 다녔건만 출산 후 기어이 사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아동기 신화는 일터와 삶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가정에 남게 된 중간계급 여성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다.



근대의 제왕으로 등장한 어린이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각별한 보호와 애정의 대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안의 심각성과 폭력성을 ‘피해 받는 어린이’를 통해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아내 구타의 심각성을 알릴 때 순진무구한 자녀가 받게 될 악영향을 이야기하고,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을 때 ‘단결 투쟁’이라는 네 글자를 빨간 머리띠로 두른 해맑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다. 따라서 이라크 전의 경우에도 이에 반대하는 논리로 힘의 정치니 신자유주의 세계화니 군수 자본가 따위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전시 상황에서 고통받는 소녀, 병원에서 붕대를 감고 고통스럽게 젖을 빠는 어린아이의 사진 한 장이면 반전 시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어린아이의 위치는 특별하다.

     착취를 근간으로 하는 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고, 보호받을 필요가 있으며, 연약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라는 언표의 이면에는 ‘그토록 귀한 이를 지켜냐애 할 누군가’가 있다. 이때 특히 소중한 존재가 아이일 때는 사회와 국가의 책임보다 가족의 개별 책임, 그(부모) 중에서도 콕 집어 어머니(여성)의 책임이 강조된다. 백지와 같은 어린아이를 일차적으로 보호하고 지켜야 할 존재는 여성, 어머니라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사회 곳곳을 관통하고 있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과도한 밀착은 기혼 여성들이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갖는 데 혼란을 초래한다. 기혼 여성이 자아 성취 욕구 때문에 어린 자녀를 떼어놓고 일하면 이기적인 엄마로 비난받지만, 갓난아이의 병원비 마련 등 어머니 노릇을 위해 노동을 하면 감동적인 일로 칭송받는다.

   

아동기에 대한 새 개념이 아이와 어머니 모두 해방시킨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아이들이 먹을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는 온갖 이유들로 아이들 일상에 넘치는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이 넘치는 관심도 아이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도구적인 관심 아닐까? 장애인, 어르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장애인 성인 남녀도 좋은 먹거리를 먹으며 우리 사회의 애정 어린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아동에 대한 각별한 보호와 투자를 해야 한다’는 논리 뒤에는 ‘아이들은 다음 세대를 책임져 나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아이들은 미래의 일꾼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좋은 음식을 먹고 훌륭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비장애인 중심주의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장애 아동을 다시 배제시킬 위험성을 품고 있다. 더불어 어린이에 대해 과도한 보호와 애정을 강조하는 일은 어머니들로 하여금 불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할 수 있고, 그런 보살핌을 받는 아동의 삶 또한 행복하다고만 할 순 없다. 아동기의 신화를 활용해 “내 아이는 달라요”라는 기치를 내거는 유아용품들은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에게 선택을 둘러싼 갈등을 안겨주는가?


     나는 이라크전과 한국군 파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만 “단지 그곳에 어린이가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전시 현장에 있는 어런이는 전쟁 반대의 다양한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그 논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착취를 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아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동기의 발명으로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분리되었지만, 아동이 어른의 세계에 통합된다면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훌륭한 아이란 누가 어떤 기준에 의해 정한 것인가? 공부 잘하고 예의 바르다는 것이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로 채택될 수 있는 것인가? 좋은 어머니란 어떤 어머니인가? 좋은 아버지는 어떠해야 하는가? 아동(기)에 대한 정의는 변화하고 있는 시대 현실을 반영하여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새롭게 내려져야 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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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3. 21. 01:43



[인권문헌읽기]

아이들에게 꼭 맞는 세상(A World Fit for Children)


“당신들은 미래라 부르지만 우리들은 현재랍니다”

류은숙
아이들의 실종과 끔찍한 살해, 가난한 아동의 증가, 영어천국의 선포, 학원 24시간 개방설로 들쑤셔놓고 슬쩍 들어가는 정책, 1등부터 꼴찌까지를 파악하여 네 위치를 확인시켜주겠다는 일제고사의 부활 등 아이들의 현재를 어둡게 만드는 일들을 보면 미안하다는 말로는 풀 수 없는 감정이 든다.

게다가 요즘 듣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광고들은 왜 그리 많은가. 학교, 학원, 독서실, 집, 하루 15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37권의 문제집을 풀고 20권의 연습장을 다 쓰고도 대학에 떨어지는 교육 구조 속에서, 재수를 통해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실패로부터 성공신화를 쓰는 것이라고 귀띔하는 광고, 아이에게 좋은 모든 것을 갖춘 아파트 단지에 살게 하는 것이 아빠의 도리라고 충고하는 광고, 그런 데 살지 않으면 친구보고 놀러오라고 말하기 어려울 거라고 암시하는 광고, 아이의 안전을 위해 왕따 피해까지 보상해주는 보험을 들어두라는 광고의 홍수 속에 정작 아이들이 원하는 세상과 세상살이가 있을까?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아이들이 원하는 세상에 관한 것이다. 이 선언에서 아이들은 “당신들은 우리 아동을 미래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또한 현재”라고 외친다. 너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어른들이 계획하고 행한 것들에 반기를 들며 “우리는 단지 어린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인민이고 시민”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선언은 2002년 열린 아주 특별한 회의의 결과물이다. 아동의 권리를 주제로 한 유엔특별총회에 앞서 3일 동안 18세 미만의 아동만이 참여하는 아이들끼리의 총회가 열린 것이다. 세계 150여 개가 넘는 나라에서 400여 명의 아동이 유엔아동특별총회에 모였다. 10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열 살 정도의 아동들도 있었다.

이들은 조를 나누어 자신들에게 중요한 문제들을 토론했다. 아동의 권리와 아동의 참여, 착취, 전쟁, 건강보호, 환경, 가난, 교육 등이 여기에 해당했다. 아동 대표들이 표현한 생각들을 잠깐 들어보자.

“아이들은 대통령의 생각보다 더 깊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어요. 우리는 모든 문제를 전 세계적 차원에서 봐요. 우리는 해야 될 일이 뭔지 더 잘 볼 수 있어요.”

“아이들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우리는 그 기회를 위해 싸워야 해요.”

“폭력이 만연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살아간다는 걸 알아요. 난 폭력 말고 다른 대안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우리가 보는 건 죄다 전쟁, 모든 곳이 전쟁터예요. 더 평화로운 미래를 찾아야 하기에 우리는 희망을 잃어선 안돼요. 희망을 잃는다면 살 가치가 하나도 없잖아요.”

“빈곤퇴치 프로그램에서 내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나의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는 사실이에요.”

이러한 토론의 결과들을 모아서 성명서를 채택했는데 그 제목이 ‘우리(아동)에게 꼭 맞는 세상’이다. 이 성명은 유엔총회에서 아동대표에 의해 낭독됐다. 이 선언을 듣는 유엔총회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달랐다고 한다. 코피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여러분이 여기 있다는 것은 유엔 역사의 새장을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른들은 총을 외쳤지만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세상을 건설할 때입니다. 여러분의 목소리를 잘 듣겠다고 약속합니다.”라는 말로 총회를 열었다. 아이들의 등장이 국제회의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신선함과 솔직함을 불어넣었다고 하나 그 진정성은 이 선언의 실천에서 확인될 것이다. 유엔특별총회에 참석해 실천을 다짐한 한국 정부도 당연히 그 진정성을 확인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아이들에게 이런 선언을 쓰라고 하면 뭐라 할까? “이거 시험에 나와요?”라고 자동적으로 묻진 않을까, 모범답안을 준비하는 사교육강의가 먼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부터 든다. 아이들이 이런 걱정을 실컷 비웃어주길 기대해본다. 아이들에게 꼭 맞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일 텐데 왜 바보짓들을 하고 있느냐고 많이많이 꾸짖어주길 희망한다.

아이들에게 꼭 맞는 세상
우리는 세상의 아이들이어요.
우리는 착취와 학대의 피해자이고,
우리는 거리의 아동이고,
우리는 전쟁을 겪는 아동이고,
우리는 HIV와 에이즈로 인한 피해자와 고아이며,
우리는 양질의 교육과 건강보호를 받을 수 없고,
우리는 정치·경제·문화·종교·환경 차별의 피해자여요.
그런데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아요. 이제 우리들 아동을 고려해야만 할 때예요.

우리는 아동에게 꼭 맞는 세상을 원해요. 우리 아이들에게 맞는 세상은 모든 사람에게도 맞는 세상일 테니까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아동의 권리 존중을 생각해요.
• 정부와 어른들은 아동의 권리 원칙에 대해서 진심어린 실천의 약속을 하고, 유엔아동권리협약을 18세 미만의 모든 아동과 청소년에게 적용해요.
• 가족과 지역사회와 국가에서 아동에게 안전하고 안심되며 건강한 환경을 마련해요.

우리는 착취와 학대와 폭력을 없앨 걸 생각해요.
• 착취와 학대로부터 아동을 보호하는 법률이 실행되고 모든 사람이 그런 법을 지켜요.
• 착취와 학대로 상처받은 아동이 삶을 추스르도록 돕는 센터와 프로그램을 만들어요.

우리는 전쟁의 끝을 생각해요.
• 세계 지도자들은 무력을 쓰는 대신에 평화로운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해요.
• 아동 난민과 전쟁의 피해자들을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호하고, 다른 아이들과 동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해요.
• 군축을 하고, 무기거래를 없애고, 아동 군인은 쓰지 말아야 해요.

우리는 건강보호의 제공을 생각해요.
• 모든 아동은 생명을 구하는 의약품과 치료를 감당할만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해요.
• 아동에게 더 좋은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은 강력하고 책임성 있는 협력관계를 만들어요.

우리는 HIV와 에이즈를 없앨 걸 생각해요.
• 예방 프로그램을 담은 교육 시스템이 있어야 하고,
• 무료로 검사하고 상담할 수 있는 센터가 있어야 하고,
• HIV와 에이즈에 대해서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정보가 있어야 하고,
• 에이즈로 인한 고아와 HIV와 에이즈에 감염된 아동은 돌봄을 받아야 하고 다른 모든 아이들과 동등한 기회를 누려야 해요.

우리는 환경 보호를 생각해요.
• 자연자원을 보존하고 구하며,
•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건강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 필요가 있다는 걸 알며,
•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아동이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있어야 해요.

우리는 빈곤의 악순환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투명하게 지출하고 모든 아동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는 빈곤퇴치위원회가 있고,
• 아동의 발전을 방해하는 부채를 없애줘야 해요.

우리는 교육의 제공을 생각해요.
• 무료이면서 의무적인 좋은 질의 교육에 동등한 기회를 갖고 접근할 수 있어야 해요.
• 학교 환경은 아동이 배우는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해요.
• 평생에 걸친 교육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상호이해, 인권, 평화, 타인에 대한 수용과 적극적인 시민이 되는 것을 포함해야 해요.

우리는 아동의 능동적인 참여를 생각해요.
•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담긴 정신처럼 아동의 완전하고 의미 있는 참여에 대한 생각을 향상시키고 존중해야 해요.
• 아동은 자신의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모든 단계의 의사결정에 그리고 그런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고 점검하고 평가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는 아동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동등한 협력관계를 약속해요. 당신들이 아동의 편에서 취하는 행동들을 지지할 것을 약속해요. 또한 우리 아동들이 취하는 행동에 대한 당신들의 헌신과 지원을 원해요. 세계의 아동들은 오해받고 있잖아요.

우리는 골치 덩어리(문제의 근원)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열쇠(해결의 자원)예요. 우리는 단지 어린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인민이고 시민이어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까지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울 거예요. 우리에겐 의지와 지식과 감수성과 헌신이 있어요.
우리는 약속해요. 어른들처럼 우리는 같은 열정을 갖고 우리가 아동으로서 지금 갖고 있는 우리의 권리를 지킬 거예요.
우리는 약속해요. 각 사람을 존엄성과 존중으로 대할 것을요.
우리는 약속해요. 우리들의 다름에 대해 열리고 신중한 태도를 가질 것을요.

우리는 이 세계의 아동들이예요. 우리의 배경은 다양하지만 우리는 공통된 현실을 같이 갖고 있어요. 우리는 이 세상이 모든 사람에게 더 좋은 곳이 되게 만들려는 투쟁으로 뭉쳤어요. 당신들은 우리 아동을 ‘미래’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또한 ‘현재’랍니다.

유엔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한 18세 미만 대표자 회의
2002년 5월 5-7일 뉴욕

덧붙이는글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95 호 [입력] 2008년 03월 19일 11:39:0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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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8세 미만 대표자들의 선언문(?)을 읽으니 왠지 눈물이 나는게...

    2008.03.22 13:5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