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09. 4. 9. 15:06
오답 승리의 희망 10호에 편집진 부분에 쓴 글.






[커져버린스토리] 방학이 방학다워야 방학이지!



  ‘개학’을 이야기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방학’이다. 방학 없인 개학이 있을 수 없고 개학 없인 방학이 있을 수 없으니, 오호 돌고 도는 음양의 원리(??)로구나!
  그런데 한국이 아닌 외국에도 방학이 있을까? 아마 있겠지? 그런데 그 방학은 한국의 방학이랑 같은 방식일까? 이런 궁금증에 영국 아이들의 일반적이고 평온한 학교 생활을 묘사한 유명서적인 『해리 포터』를 들춰보니까 영국의 학교들은 이렇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아주 긴 여름방학과, 2주 정도 되는 크리스마스 방학. 아하 영국은 여름방학이 길고 겨울방학이 짧구나-_- 이게 문제가 아니라, 아무래도 방학의 형태는 다르지만 방학 제도는 학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있는 것 같다는 게 요지다.
  방학은 세계적으로 학교가 있다면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인 제도일 거다, 아마. 왜 그럴까? 어쩌면 ‘방학’이라는 게 그냥 여름이랑 겨울에 너무 덥고 추워서 수업하기 힘드니까 학교 나오지 말아라, 하는 게 아니고 교육적으로 상당히 의미 있는 제도일지도 모른다. 안 그러면 일 년 내내 적당히 쾌적한 날씨이거나 날씨가 비슷한 지역에선 방학 없이 365일 수업만 하게?

  이렇게 질러놓고 보니 “방학의 교육적 효과” 같은 논문이라도 대령해야 할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찾지 못했다. 교사들이 방학 중에 연수도 받고 연구도 하고 수업 준비도 하고 평가 업무도 하면서 많은 일을 하기에 방학 기간이 필요하다는 글은 찾을 수 있었지만, 교사들 이야기는 「우리교육」이나 「교육희망」이나 「교육신문」 같은 뭐 그런데서 다룰 테니까 굳이 오승희에서 그 이야길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냥 교사들도 방학이 필요하구나, 방학 때 하는 일 없이 월급만 받는 건 아니구나, 정도만 머릿속에 넣어두자.


쉴 권리, 놀 권리!

  쉬고 노는 것은 중요한 인간의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에는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나와 있고, 유엔아동권리협약에도 “휴식과 여가를 즐기고” “적함한 놀이와 오락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청소년인권단체가 발표한 2008청소년인권선언에도 “방학, 휴가, 공휴일이나 쉬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야”(하며 “청소년에게는 놀 권리”가 있다고 써있다.
  따라서 충분한 휴식 시간이자 여가 시간으로서 방학은 보장되어야 한다. 입시경쟁이라는 괴물이 탐욕스레 입을 벌리고 방학기간 중에도 보충수업과 사교육에 찌들어 살라고 외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봉사시간 뭐 그런 규정들은 방학 중에도 강제적인 자원봉사 노동(‘강제자율학습’과 비슷하게 들리는?)으로 청소년들을 내몬다. 방학이 방학다워야 방학이지, 이건 뭐….
  방학이 방학다워야 하긴 하는데, 또 한편으로, 그것도 과연 바람직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애들이 공부 빡세게 오랫동안 한다면서 미국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는데, 오바 하지 마시라. 미국 청소년들 다 잡을 셈인가. 한국이 OECD 국가 중에 평균노동시간과 공부시간이 가장 긴 편에 속한다. 만약 방학이 방학다워진다고 해도, 학기 중에는 이렇게 빡세게 입시지옥 속을 구르다가 방학 중에는 쉰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지 않나.
  그러니까, 좀 일상적으로 쉴 권리 놀 권리가 보장되면 좋겠다는 거다. 반강제적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하고 강제로든 자발적으로든(?) 입시공부와 취업준비에 매진할 것을 강요당하는 학교. 그 속에선 동아리든 취미 활동이든 정치 활동이든 입시경쟁과 좀 거리가 있는 걸 하려면 적잖은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누군가가 홀로 그런 체제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낙오자’나 ‘날라리’라는 낙인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방학을 방학답게 만드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쉬고 싶을 땐 봐가면서 쉬엄쉬엄 할 수 있는 교육. 아침7시부터 밤10시까지 잡혀있지 않아도 되는 학교. 강제로 봉사시간을 채우려고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 방학에도 쉬고 방학 아닐 때도 여가가 있는 그런 삶….


방학의 ‘교육적’ 의미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방학이 그냥 쉬는 기간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교육과 학교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학교를 쉬는 것 = 교육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학교는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방학’ 때 학교를 안 나간다고 해서 교육을 않는 것은 아니다.
  이반 일리히 같은 삐딱한 학자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학교 밖에서 배우는 게 더 많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게 대부분 교사나 학교로부터 배운 거라는 생각은 환상이며, 잘 보면 학교 정규교육과정 외에 다양한 경험들이나 다른 경로로 배우는 게 더 많다는 것이다. 교육이 학교(또는 학원 등)라는 ‘제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단 것은 일종의 우상 숭배다. 심지어 학교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바보가 된다는 주장도 있다.(『학교 없는 사회』(이반 일리히), 『바보만들기』(존 테일러 게토) 등을 참고하시라.)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방학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고 학교를 다니는 학기는 훼이크라고. 학기 수업이 완전 훼이크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학교를 다니지 않는 방학 기간 또한 굉장히 유의미한 교육 과정일 수 있다는 정도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학교는 사회로부터 청소년들을 격리시킨다. 학교에서도 물론 또래들/교사들과 부대끼면서 사회 생활을 익혀나가긴 하지만, 그래도 협소한 학교 교육과정은 실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하고 풍부한 지식과 경험들을 주지 못한다. 심지어 학교에서 주는 지식들은 ‘죽은 지식’들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방학이라는 기간 동안 학교가 제공하지 못하는 다양한 경험과 체험들을 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건 캠프 같은 형태일 수도 있고, 다른 활동일 수도 있다. 그냥 친구들이랑 뛰어노는 것일 수도 있다.학교에서 받는 것만 교육이라는 생각을 벗어나보자.

  그러나 이런 방학의 의미가 실현되는 일은 멀게만 보인다. 우리는 방학 중에도 입시교육에 찌들어 살기 십상이고, 청소년들에게 적절하고 저렴한 놀이 문화나 대안적인 교육 컨텐츠들은 부족하기만 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한 번 외쳐본다. “방학이 방학다워야 방학이지!!!”





방학이 싫고 개학이 좋을 수도 있다!
  이번 커져버린스토리에서는 대부분 청소년들이 방학을 좋아하고 개학을 싫어한다는 느낌으로 글을 쓰게 됐지만, 방학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방학 때 연락해서 만날 것이지 방학 때는 잘 안 만나다가 “개학하면 친구들 보니까 좋아요.”라고 하는 성격 파탄자들은 제껴두더라도 말이다.
  우선 대한민국의 허술한 복지제도 때문에 원치 않게 기아체험을 하고 있는 결식 청소년 분들이 있다. 이 분들은 학교 급식 외에는 안정적으로 끼니를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방학을 좋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좀 제대로 식사권, 생존권을 보장해라!
  그리고 좀 특이한 케이스인데, 학교에서 학생들이 원치 않는 방학을 강행하는 경우도 있다. 1989년에 중고등학생들이 한창 학교민주화, 전교조 교사 복직 등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학교 점거하고 했을 때는 학교들이 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일찌감치 강제로 방학을 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연히 학생들은 이런 방학에 반발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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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9. 3. 19. 23:36


오답 승리의 희망 창간호에 이 소설 소개 글을 쓴 기억이 난다.
그때 처음에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를 실을까 하다가 너무 빡세지 않냐, 첫 호는 좀 유하게 소설로 가자, 라고 해서 썼는데
정작 써놓고 보니 이 소설이 더 빡센 것도 같았다. 전교조 창립 당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전교조의 관점이라기보다는 학생의 관점에서, 그리고 입시경쟁 문제 등에 좀 더 비중을 둔 소설...

처음에 접한 건 논술 연습을 할 때 제시문으로였는데, 우리들에게 이런 얼토당토 않은 경쟁을 요구하면서, 그 교육제도에 대해 논술을 해보라고 하는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려서 붉은 펜으로 한 문단 써놓고 집으로 훌쩍 와버렸었다. 그래서 사회 선생님이랑 좀 많이 싸웠지.
이 부분이 바로 그때 제시문에 있던 부분 중 일부이다.




일제고사 반대 오답 선언을 모으는 일이, 말하자면 결국 그런, 모두 자기 촛불을 끕시다, 이런 이야기인 것 같아서 문득, 옮겨둔다.

모두 자기 촛불을 끄자... 모두 오답을 찍자... 모두 경쟁을 거부하자...
참 간단해보이는 옳은 해법이지만, 신뢰가 없이는 어려운 일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촛불을 끄는 사람을 늘리러 다니는 게 내가, 우리가 할 일이다.

 

 




11월 30일
  오늘 생물 시간에 선생님이 적자생존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깨알 같은 글시로 칠판을 한참 메워나가고 있을 때였다. 워낙 공책 검사를 철저히 하는 터라 설명도 듣는 둥 마는 둥 옮겨 적고 있는데 윤수의 목소리가 났다. 나는 정신이 번쩍들었다. 윤수가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무어라 질문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도 잘 알아듣지 못했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으셨다.
  "적자생존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구? 질문을 하겠으면 사내답게 똑바로 해."
  교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윤수가 질문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서 나부터도 윤수가 질문 같은 걸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탓이다. 게다가 윤수의 질문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생물 선생님의 수업을 느닷없이 중간에서 끊어버린 셈이었다. 윤수의 두 손이 쉴새없이 교복 앞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화, 환경에 맞지 아, 않는 건 모두 죽어, 죽어야 합니까?"
  "죽는다기보다 도태되는거지. 환경에 맞는 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도태되기 마련이라 그 말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환경에 잘 맞았거나 맞게 변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들이지. 됐어?"
  "벼, 변하면 --- 어떠, 어떻게 변합니까?"
  선생님은 또 얼굴을 찌푸렸다. 윤수의 입에서 무슨 엉뚱한 소리라도 나오면 어쩌나싶어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설명을 다 했잖아. 자 자, 그럼 이번에는 숲을 예로 들어보자구. 참나무나 소나무 같은 것하고는 달리 음지에서만 사는 식물이 있지? 위로 자라지 못해 햇빛을 받을 수 없으니까 음지에 맞게 변화되고, 그렇게 적응한 놈만 살아남은 거야. 자연의 조화지."
  "음지, 음지에 사는 게 져, 졌는데 그게 어째 자, 자연의 조화입니까?"
  "지다니? 이런 참, 지고 이기고가 아니야. 좋고 나쁜 것도 아니고! 생물의 법칙이 그렇다는 거지. 적자생존, 자연선택설, 그것만 기억하면 돼. 돌연변이도 설명할 참이니까 이젠 자리에 앉아."
  그러나 윤수는 앉지 않았다. 계속 교복 앞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더듬대다가 가까스로 말을 만들어냈다.
  "그, 그럼, 사람, 사람은 평등한데, 환경에 따, 따라 --- 그게 저, 적자생존인지, 조, 조화인지 --- "
  "왜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을 하고 그래? 진도 방해 그만하고 그냥 외워!"
  윤수가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나는 소리 죽여 한숨을 토했다.
 

(....)


12월 7일
  기원의 밤은 교장 선생님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밖은 이미 캄캄했다. 강당 안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3학년 남녀 학생들이 가운데 앉고 학부형들이 그 주위에 앉거나 서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해마다 전국의 우수 대학에 많은 합격생을 배출해온 명문 학교의 빛나는 실적을 강조했다. 다음에는 어떤 3학년생의 어머니가 학부형 대표로 나와서 그 동안 정말 고생했다는 말을 거듭했다. 잠을 못 자서 코피 쏟던 얘기, 압박감 때문에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하던 얘기 등등을 놓고 구슬픈 목소리로 이어나가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무대 아래쪽에 불이 꺼졌다. 부분 조명 속에서 교장 선생님이 초에 불을 붙였다. 3학년 담임선생님들이 초를 한 자루씩 들고 나와 그 촛불에 불을 붙였다.
  담임선생님들은 가만가만 무대에서 내려와 자기 반 앞에 섰다. 두 손으로 초를 받쳐 든 학생들이 한 명씩 나와서 다시 그 촛불에 불을 붙였다. 강당 안은 점점이 불어나는 촛불로 채워져갔다.
 [중략]
  피아노 소리가 정적을 깼다. '선구자'였다. 한복을 차려입은 임춘미가 사뿐히 걸어 나와 노래를 불렀다. 학생들이 처음에는 낮게 나중에는 춘미의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게 따라 불렀다. 독립군들처럼 비장하게, 그만하면 모든 게 된 셈이었다.
 [중략]
  노래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고 내가 막 일어서려는 그때, 춘미가 물러나는 자리에 누가 불쑥 나타났다. 그의 목소리가 확성기로 울려나왔다.
  "우, 우, 우리는 마, 마라톤 선수, 선수가 아닙니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윤수였다.
  "모, 모두 승리, 승리하면 누가, 패, 패배합니까?"
  순간 실내에는 터질 듯한 정적이 흘렀다. 경규가 튀어나와 윤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 몸이 부들부들 떨었다.
  선생님들, 또 앞자리의 3학년 남학생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윤수가 마이크를 움켜쥐고 외쳤다.
  "자기, 자기, 초, 촛불을 꺼! 꺼! 그러면 아, 아무도 패배하지 않 --- "
  아아 나는 또다시 어쩔 수 없었다.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3학년들이 무더기로 달겨들어 윤수를 무대 아래로 끌어내렸다. 문밖으로 질질 끌고 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뜯어말리는 선생님들까지 거칠게 밀쳐냈다.
 [후략]

 

- 최시한,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中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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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3. 16. 12:48

http://notest.kr  일제고사 반대 청소년 모임!!





...;
마사토끼님의 2학년 화장실 살인사건, 에서 "학생을 위한 학교따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라는 대사를 본 순간
망상이 폭주하기 시작해서 만들어낸, 말풍선만 바꿔친 패러디물..이랄까요;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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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8. 22. 01:5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달마다 하는 청소년인권놀이터 빨강물고기!

8월 빨강물고기는 ~ 교과서 속 인권의 모습들, 뒷담화 까기

때 : 8월 23일 토요일 2시~4시

장소는 문화놀이터 마랑입니다 ^^;

마포구청역 4번출구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요~~


많이들 오시길 ㅠㅠ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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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깨결림

    오늘 꺼 재밌었어용, 교과서 찣는 재미가 쏠쏠~ 비록 장소는 어수선 했지만. 크흐흐

    2008.08.23 21:17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8. 7. 14. 17:13
아수나로북에 들어가는
급식, 청소년인권, 먹거리, 식품, 생태적 먹거리, 건강권 뭐 그런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먹는 것에도 민주주의가 있다



  급식 괴담을 아는가? 국에서 바퀴벌레 시체가 나왔다거나, 구더기가 나왔다거나, 몇몇 사립학교들 같은 경우는 급식비는 비싼데 급식의 질이 형편없는 걸 봐서는 뭔가 비리가 있다는, 뭐 그런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 말이다. 학생들이 벌레 등이 들어간 급식을 먹고 괴물이 되어버리는, <급식해저드>라는 만화까지 있을 정도다.
  이런 사실적 괴담(?)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급식으로 인한 집단 식중독이라거나, 어느 사립학교에서 급식비리가 있었다거나 하는 생생한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거나 전해 듣곤 한다. 특히 최근에는 vCJD(변종크로이츠펠트야곱병. 소위 ‘광우병’. 나는 소에게 “미쳤다”라는 딱지를 붙이는 광우병이라는 이름에 반대한다.) 위험 쇠고기까지 대두되면서 먹거리의 안전성이라는 문제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먹거리 문제는 중요한 청소년인권 문제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건강권/안전할 권리와 알 권리(식품과 소비자 이야기할 때 꼭 등장하는 두 권리),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말로 풀어보려고 한다. 먹는 것에도 민주주의가 있다. 아주 중요한.




급식운영을 민주화하라!


  먼저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지적하자면, 급식운영을 민주화하는 것일 터이다. 특히 급식을 직접 먹는 당사자들인 청소년/학생들(그리고 교사들)의 급식운영 참가는 중요하다. 급식운영에서의 예산과 시설, 그리고 전반적인 운영의 의사결정 과정에 학생들이 참여해야 한다. 학생들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수렴하고, 학생들의 권익을 보장할 수 있는 학생 급식 담당자들을 둘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급식의 문제 중 상당수는 급식을 직접 먹는 당사자들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고 학생들은 그저 주는 대로 먹어야 했다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사육’당한다고 느끼는 데는 그런 급식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급식운영에 학생이 참여하는 것도, 소수의 사람들만 급식운영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급식운영에 대해 알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하고, 수시로 학생들이 운영에 참여하거나 급식시설을 체험/감시할 수 있도록 하여 급식 과정과 가까워지고 이를 통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위탁급식(급식업체에 돈을 주고 급식을 맡겨서 운영하는 것)보다는 직영급식(학교에서 직접 급식을 운영하는 것)이 더 민주적이다. 기업을 거치는 위탁급식보다는 아무래도 직영급식에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고 감시할 여지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직영급식은 기업의 이해관계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학교에서 직접 운영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또, 직영급식은 위탁업체보다 식중독 발생률이 낮다. 급식 위탁업체는 급식 시설비용도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이윤을 남기기 위해 값싼 식재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학교의 급식을 직영화하기는 어렵겠으나 점차적으로 예산을 확보하고 시설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급식운영 참여를 보장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vCJD 위험 쇠고기의 경우에도, 이런 직영급식과 학생들의 민주적인 참여와 통제를 통해 vCJD 위험 쇠고기가 급식에 사용될까봐 불안해하는 것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자체도 비민주적인 정부의 독단에서 비롯된 문제다.)




먹거리는 그냥 상품이 아니다!

  하지만, 급식운영 과정에서의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기초이다. (그 기초조차 안 되어 있어서 입 닥치고 먹어야 하는 게 현실이기도 하지만 -_-.) 이제 우리는 식재료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과정 자체의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로부터 먼 어딘가에서 어떻게 만들어진지도 모르는 식재료들과 식품들이 어떤 과정으로 유통되었는지도 모르게 근처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을 돈 주고 샀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알 권리나 건강권, 민주주의 같은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거나 ‘복불복’ 식으로 운에 맡겨지게 된다.
  그 대안으로 유통과정을 축소시키고 생산지의 소식을 전해들으며 생산 과정이나 방식 등을 최대한 공개하는 생활협동조합(생협) 시스템이나 산지 직거래 방식 등이 나오고 있다. 이런 방식 속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좀 더 소통하게 되고 좀 더 민주적으로 생산과 유통과정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생산 과정에서 더 생태적이고 안전한 먹거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함께. 먹거리는 우리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한 상품 논리만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 무상급식 : 먹거리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급식은 중요한 가치이다. 일단 무상교육의 이념 속에서는 학교에서 먹는 급식도 무상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무상급식은 먹거리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고 기본적인 권리라는 관점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건강한 먹거리는 돈과 관계없이 먹을 수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라도 무상급식은 필요하다. 예산 해결을 위해 성금이나 기부금을 모을 수도 있을 것이나, 그 기본은 공짜 급식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내가 생태적 먹거리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넘어가겠다. 생태적인 먹거리의 요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우선 살충제나 화학비료, 성장촉진제 같은 수단(생태계를 파괴하고 먹는 사람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을 사용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는, 한 가지 종류의 작물을 집중적으로 재배(농약, 살충제에 의존하거나 유전자를 조작해가며)함으로써 생태계를 붕괴시키거나 동물들을 매우 파괴적인 환경에서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를 쩔도록 투여해가며 대량사육하는 등의 공장식 대량생산시스템이 아닌, 좀 더 생태계를 존중하는 생산 시스템에서 나온 먹거리를 ‘생태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인 먹거리는 지속가능한 식량생산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기만일지언정 조금 더 동식물 윤리적인 생산을 위해서도, 마지막으로 그 먹거리를 먹는 사람을 위해서도 꼭 실현되어야 한다. 특히 vCJD나 조류독감 등의 질병이 동물들을 공장식으로 대량생산하는 축산업 시스템에 의해 더 쉽게 전염되고 있으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질병’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생태적 먹거리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소의 vCJD와 관련하여 소를 죽인 나이가 20개월이나 30개월이니 말이 많은데, 실제로 소의 평균수명은 약 20년이다. 그런 소를 2~3년 동안 성장촉진제와 동물성 사료, 항생제를 먹여가며 강제로 빨리 키워서 죽이는 이 시스템이 과연 윤리적이거나 생태적인 걸까?)
  이런 생태적 먹거리들이 현재로서는 비싼 축에 든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싼 가격에 사먹었던 공장식 대량생산시스템에서 나온 먹거리들이 그 싼 가격 대신 얼마나 많은 생태적 가치 등을 희생해왔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생태적 먹거리를 먹을 수 있도록 사회가 보장해야 하며, 육식과 대량소비에 익숙해진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필요도 있다.
  이와 같은 시스템을 급식에 적용한다면, 학교 차원에서 직접 학생, 교사와 함께 농사나 양식 등을 통해 생태적인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을 구상해볼 수 있다. 실제로 학교에서 먹는 식량을 다 조달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책임지고 안전한 먹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위치를 넘어서 어떻게 먹거리가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중요하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면 지역의 학교들과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생산자와 직접 소통하고 안전하고 생태적인 먹거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서 나는 학생들이 급식을 만들고 배식하는 과정, 설거지 과정 등에도 함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수학 문제 몇 개 더 푸는 것보다 중요한 교육은 이런 가사노동 분야이다. 30대가 되도록 제대로 할 줄 아는 요리가 몇 개 없어서 요리책에 의존하거나 일부 여성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는 결국 성별분업 논리(사실 급식을 맡아서 만드는 직원들의 다수는 여성이다.)물론 수백 명, 수천 명의 학생들이 먹는 급식을 학생들이 하루종일 만들고 있을 수는 없지만 정기적으로 학생 당번을 정해서 돌아가며 급식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방안 등과 학교당 학생 수를 줄이는 일 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먹이는’ 존재가 아니다

  급식을 비롯해서 먹거리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것은 청소년들을 매우 수동적인 존재, 또는 보호해야 할 대상 정도로만 취급하는 태도이다. 급식문제에 대해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걸 먹이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심정” 운운하는 것은, 성별분업적 표현(왜 항상 어머니가 먹거리를 걱정하는 제1순위 주체인가?) 때문에도 옳지 못하지만, 아동-청소년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본다는 점에서도 옳지 못하다. 학교에서만 탄산음료 판매를 금지시키겠다는 정책도 그렇다. (특히 2007년 무렵부터 있었던 “아이건강국민연대”는, 비록 그 운동 내용이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는 해도 이런 관점을 고집하고 있는 면이 많다.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물론 먹거리나 건강에 관한 문제를 개인의 선택이나 자유로만 이야기하는 건 사기다. 거짓말이다. 먹거리를 만들고 유통시키고 소비하는 구조가, 사회적 시스템이, 생활양식과 패턴, 환경은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 것과 무관하게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건강권을 맡기겠다는 건 무책임이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까지의 급식이나 먹거리 관련 운동이나 정책들은 아동-청소년들을 주체적인 존재로 파악하지도 않았고, 그 운동의 운동주체로 보지도 않았다. 그 결과 앞서 내가 말한 것과 같은 민주적인 급식이나 학생들의 참여 같은 중요한 부분들은 간과되었다. 교사나 부모들은 때때로 편식을 못하도록 ‘급식지도’를 한다면서 체벌과 같은 강제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에게 탄산음료나 과자 같은 것이 뭐가 문제이고 왜 소비함녀 안 되는지를 알리고 스스로 소비를 줄이도록 하거나 그런 문제 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를 규제하기보다는, 학교에서만 탄산음료를 없애는 이상한 정책을 쓰기도 했다.
  급식이나 먹는 것을 지도하는 과정에서도 강제적·강압적인 방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심각한 영양의 불균형이 질병을 일으킬 정도라면 의학적인 처방과 지도가 필요하겠지만, 그런 수준이 아니라면 급식지도는 설명과 설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설명과 설득에 근거하여 교육하지 않으면, 강압과 강제를 통한 급식지도는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효과를 볼 뿐이다. 급식지도는 뭐도 가리지 말고 잘 먹어야 하고 몇 분 안에 먹어야 하고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먹거리 생산의 생태적 문제점들이나 알 권리, 먹거리 민주주의에 대한 포괄적인 교육이 되어야 한다. 최대한 다양한 식성(그것이 취향이건 종교적/사상적 이유건)을 고려하여 식단을 짜야 할 것이고, 다양한 음식들을 자율배식하는 형태가 가장 좋을 텐데 일부 식단에서는 조정 과정을 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탄산음료 금지 같은 정책도 좀 우스운데, 학교에서만 금지하는 것, 그리고 청소년에게는 탄산음료가 해롭다고 금지시키려고 하면서 비청소년(어른)들에게는 아무 말도 없는 사고방식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 학교 밖에서는 맘껏 먹어도 된단 말인가? 탄산음료는 특히 청소년들에게만 유해하고 비청소년들은 아무 문제 없단 말인가? 탄산음료나 과자 등이 그렇게 건강에 해롭다면 그냥 소비하도록 냅두는 것은 분명 좋은 정책이 아니며, 그 유해성을 충분히 알리고 강조할 필요는 있다. 아니면 차라리 생산자(기업)를 규제해야 할 텐데, 기업을 상대로 탄산음료나 과자 생산을 규제하는 일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좀 더 만만한 소비자-청소년들을,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라는 논리에 기대어 규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단순히 먹거리를 ‘먹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먹거리를 ‘먹는’ 존재이며, 그 먹거리에 대해 의견을 내고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자꾸 ‘아이들의 건강권’을 들먹이며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먹이네 마네 어른들끼리 떠들지 말고, 청소년들과 함께 뭘 먹을지 말지, 그리고 어떤 먹거리를 어떻게 만들고 유통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실천하자. 당신들이 대신 이야기해주려고 하는 ‘아이들의 건강권’이라는 말은 지긋지긋하다. 이제, ‘건강권’을 우리의 제대로 된 인권으로 돌려받아보자.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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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맞아요. 누구 말대로 정말 우리는 밥상에서 매일매일 투표를 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투표해야 하는데 말이죠.

    2008.07.21 17:33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