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에 해당되는 글 13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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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02.12 게임 셧다운이 아니라 학습시간 셧다운!
  3. 2014.11.04 경기도 학원 체벌 토론회 관련 참고 예비 조사 자료 - 관계 법률 및 이전 조사 등
  4. 2014.08.11 한겨레 - [2030 잠금해제] 멸종 위기의 방학 / 공현
  5. 2014.05.28 학생 휴식에 관한 서울지역 학생 설문조사 (2014년 5월 17일~6월 14일)
  6. 2014.05.14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 (1)
  7. 2014.03.30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소식지 「활력소」 제1호 (2014.03.30.)
  8. 2014.03.21 (아수나로) 청소년신문 〔요즘것들〕 창간준비호
  9. 2014.03.19 ‘학생은 학생답게’ 캠페인 - 학생답게 학생인권을 잘 보장받읍시다
  10. 2013.12.19 청소년의 대자보는 안녕들 하십니까? 청소년 대자보 및 탄압 사례를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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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013.10.25 전교조 숨통 조인 한국 사회, '한고학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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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012.03.10 학생인권조례 없애기 나선 동아일보 (1)
  19. 2012.03.09 [한겨레21 노땡큐] '학생조합'과 민주주의 (1)
  20. 2012.01.30 왜 "학생인권조례"인가 (3)
걸어가는꿈2016.03.24 13:34

[공현의 인권이야기] ‘소비자’의 권리를 넘어서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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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소비자여야 하는가 아닌가

“우리가 교육의 소비자인데 학교/교사가 우리를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야?” 학생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만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간혹 듣게 되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교육을 ‘서비스’로 보고, 학교도 ‘교육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수요자(소비자)의 요구에 맞추라고 하는 시장주의적인 교육정책 속에서 학생들이 겪는 현실은 모순적이다. 어느 서비스에서 소비자, 고객을 그렇게 막 대한단 말인가.

물론 답은 명확하다. 어느 대학 총장이 “학생은 피교육자일 뿐”이라고 밝혔듯이, 교육의 그림 속에서 학생들은 소비자가 아니다. 그 친권자‧부모들이 소비자일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차라리 ‘상품’에 가까운 위치다. 교육의 결과물로 Before(이전) After(이후)를 보여줘야만 하는 존재들. 노동자처럼 밤늦게까지 학교나 학원에 붙잡혀 공부를 해서 ‘스펙’을 높여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임금이나 노동3권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나중에는 자신들의 성적을 입증하고 전시해야만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제발 소비자 정도의 대우만 받아도 좋겠다.”라고 하소연한다.

그런데 다른 면에서는 과연 학생이 소비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시장주의적인 교육정책을 반대해온 사람들은 교육소비자니 교육수요자니 하는 말 자체에 경계심부터 가지고 보고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육을 시장적 모델로 보게 되고 경쟁과 차별이 만연하고…’ 하는 이야기 말고, 학생의 입장에서는 어째서 소비자이면 안 된다는 것인지 이해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매력에 따른 차별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공교육은 일단은 많은 부분이 무상이라서 와 닿는 소리는 아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 고객으로서 서비스를 제공받는 경험은 대개가 ‘제법 괜찮은’ 것이다. “손님은 왕이다” 같은 말로 대표되듯이 많은 감정노동자들의 친절과 봉사도 받을 수 있다. 물론 불량한 제품과 서비스 제공, 알 권리 무시 등 고통을 받은 경험도 있겠지만 수는 적은 편이며, 소비자는 그런 서비스를 선택하지 않을 권리도 가지고 있다. 결국 ‘학생인권 보장’이라는 게 학교가 학생을 고객처럼 모시는 것, 또는 학생이 소비자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오해도 생겨난다.

시장주의적 접근, ‘소비자’ 모델이 가지는 한계를 나는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하곤 한다. “소비자가 기업 경영에 참여하고 의결할 수 있나요?” 소비자는 구매력이 있다면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고 봉사를 제공받을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 중에서 고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소비자는 기업의 바깥, 결정과 생산 영역의 바깥에 있다. 만일 학생이 소비자라면, 학생은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교육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알고 참여할 권리도 없을 것이고, 학교의 편의에 따라 소비자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밖에는 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지금 정부가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듯이. 우리가 민주적인 학교를 요구하고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미 그것은 ‘소비자’의 위치를 뛰어넘은 것이다. 애초에 ‘교육’이라는 과정은 교사에 의해 제공되는 서비스를 학생이 받기만 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소비자’라는 개념에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위 사진:교육청의 시각을 보여주는 홍보포스터

소비자에 머물지 말아야 할 이유

운동을 하다보면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할 때도, 정부가 인권이나 복지를 이야기할 때도, 사람들을 ‘소비자’처럼 생각하는 많은 경우와 마주치게 된다. 여러 복지정책이 그렇고, 심지어 정치를 이야기할 때조차도 이제는 ‘정치 소비자’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이 소비자로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과 소비자로서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취지를 보면, 학생들이 소비자 대우라도 받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연상된다. ‘정치소비자협동조합’을 표방한 조직이 직접민주주의와 능동적 참여를 주창하는 것을 보면 약간 역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문제점도 명확하다. 먼저 구매력이 적은 사람들은 제대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일례로, 거대 정당들의 주류 정치인들은 이번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표가 적을 것 같아 보이는’ 성소수자보다는 혐오세력에 동조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그밖에도 많은 소수자들, 표가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의 문제에는 침묵하고 있다. 아예 정치구매력이 없는 청소년들은 논외가 되어 버린다. 경쟁은 ‘공급자’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 표로 정치를 사고, 정치인들이 표를 받고 정책이나 정치적 행위를 ‘판매’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보편적 인권 보장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4.13 총선 인권올리고 가이드>에서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표의 주인을 넘어 정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앞서 말했듯 ‘소비자’는 함께 참여하고 만들고 책임지는 주체가 아니다. 주어진 상품들 중에서 선택할 권리는 있지만, 함께 만들고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일견 소비자는 많은 권리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선택할 권리 말고는 많은 권리를 제약당하고 있다. “손님은 왕”이라고 하지만, 본래 왕은 단지 좋은 대접을 받고 호화로운 의전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국가의 주권자이며 결정권자이다. 왕은 ‘고객’이 아니라 ‘주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소비자’와 ‘왕’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많은 경우 인권 보장을 위해서는 소비자의 권리 이상으로 주인의 권리가 필요하고, 평등한 참여와 공동의 연대(책임)가 필요하다.

상품이나 노예, 없는 존재 취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소비자의 자리는 신분상승처럼 느껴지기 쉽다. 모든 것이 시장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의 위치는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권은 ‘소비자’의 권리와는 다르다. 인권운동이 ‘소비자 마인드’를 경계하는 것은 단지 시장이나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 아니다. 그 걸로는 인권이 제대로 보장될 수 없으며, 우리가 이야기하고 추구하는 인권은 그 이상을 꿈꾸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78 호 [기사입력] 2016년 03월 23일 18:37:3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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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5.02.12 20:53
게임 셧다운이 아니라 학습시간 셧다운!
학생에게도 휴식을…<아수나로>의 다섯 가지 제안
<여성주의 저널 일다> 묵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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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학습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학생들의 현실을 지적하며,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습니다. 청소년의 삶과 권리에 대한 고민과 제안을 담은 이 기사의 필자 묵은지님은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낯섦’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공간, 학교

 

모 든 것이 낯설어야 했다. 0교시 시작 시간에 늦지 않으려 새벽부터 일어나는 것도, 가파른 등교 길을 힘겹게 오르는 것도, 턱없이 짧은 점심 시간 안에 배를 채우려 먹을 것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것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에 졸지 않으려 제 손으로 뺨을 찰싹 찰싹 때려가며 앉아있는 것도, 밤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교문 밖을 나서는 것도.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공간에 처음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그 모든 것은 낯설어야 했다.

 

하 지만 나에겐 낯섦을 느낄 귄리조차 없었다. 부족한 수면 시간에 하루 종일 눈 밑이 퀭해도, 급하게 먹다 체한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학교는 ‘왜 아직 적응하지 못했느냐’고 도리어 나의 낯섦을 타박했으니까. 결국 신입생들 대다수는 생존하기 위해 모든 것에 순응하며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그리고 곧 그들이 처한 모든 부조리에 무심해졌다.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 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못했다. 그 ‘낯섦’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본인이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책을 느끼며 괴로워하거나, 교실 한 구석의 이방인이 되거나,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학교 밖으로 탈출해야 했다.

 

나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탈학교를 결심해 지금은 학교 밖 청소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새삼 학교 안에서 받는 고통을 해결하는데 가장 편리한 방법은 ‘학교에 있지 않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매우 씁쓸하기도 하다. 학교 밖으로 나온다는 건 그만큼 많은 것을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학교 안에서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니까.

 

과잉 학습으로 채워지는 학생들의 시간

 

학교가 이렇게 끔찍한 공간이 된 이유 중 하나는, 학교가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   2010년 발표된 통계청의 생활 시간 조사 ‘학생의 학습 시간’ 통계  © 아수나로 제공

 

2010 년에 발표된 통계청의 생활시간 조사 ‘학생의 학습 시간’ 통계에 따르면, 한국 고등학생의 평일 평균 학습 시간은 10시간 47분이다. 주말의 시간까지 합쳐 계산하면 학생들은 주당 약 64시간을 오로지 학습만을 위한 시간으로 쓰고 있다.

 

또 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실시한 ‘2013년 한국 아동.청소년 인권 실태 연구’에서는 일반/특목/자율고에 다니는 고등학생들의 평균 수면 시간은 5.5시간이었다. 이들 중 절반에 육박하는 48.4%가 평일 여가 시간이 1시간이 채 안 된다고 답한 것으로 발표됐다.

 

▲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와 전교조에서 실시한 ‘2014 전국 학생인권 실태 조사’   © 아수나로 제공

인 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실시한 ‘2014 전국 학생인권 실태 조사’ 결과도 살펴보자. ‘방과후학교,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등을 강제로 하게 하는 것’에 대한 응답으로 ‘자주 있다’가 37.8%, ‘가끔 있다’가 16.1%로, 총 53.9%의 학생들이 강제 학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실태 조사들의 결과를 묶어 요약하면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오로지 학습을 위해서 소비하고 제대로 잘 수도, 쉴 수도 없으며 이중 절반이 넘는 학생들은 이를 강제적으로 하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다.

 

휴식 시간이 부족한 게 게임과 스마트폰 탓?

 

사실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런데 기성 세대가 이 문제에 대해 파악한 원인과 해법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학생들의 휴식 시간이 부족한 것은 밤 늦은 시간에 게임을 하고 스마트폰을 너무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게임 셧다운제’를 시행하고 스마트폰 규제 앱을 만들어 학생들을 통제하자는 것이다.

 

학생들이 처한 환경을 손톱만큼이라도 생각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해결책이다. 학생들의 휴식 시간이 지켜지기 위해서 규제해야 할 것은 게임도, 스마트폰도 아니다. 바로 ‘과도한 학습 시간’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는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입시경쟁 교육 속에서 폭주하는 학습 시간을 사회적으로 규제하자는 운동이다. 노동 시간에 제한을 두듯이, 적절한 학습 시간에 대한 사회적 약속을 만들고 학생들의 시간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아수나로가 주장하고 있는 요구를 소개한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진행중인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 

①  오전9시 등교 오후 3시 하교, 하루 6시간 학습!

 

‘별 보고 학교 갔다 별 보고 집에 온다’는 말은 이미 익숙한 문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학교는 학생들을 하루 온종일 한 자리에 붙잡아 놓고 학습만을 강요한다.

 

2009년 OECD 국가들의 15-24세 평균 학습 시간은 1주일에 33.92시간이었다. ‘하루 6시간 학습’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루 13-14시간을 학교에 붙잡아두는 것이 이상한 일로 여겨져야 한다.

 

②  방학일수 늘리고, 수업일수 줄이고!

 

길어봤자 4주가 조금 안 되는 방학, 그조차도 보충이다 뭐다 하면 방학이 1주일이 채 넘지 않는 학교도 굉장히 많다.

 

방학은 쓸모 없는 시간이 아니다.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여유롭게 쉴 수 있는 꼭 필요한 기간이다. 법에 정해진 수업일수 역시 현재의 ‘190일 이상’이 아니라 180일~185일로 줄여야 할 것이다.

 

③  보충, 야자, 학원 등 강제 학습 금지!

 

대 부분의 학생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도, 하고 싶지 않은 보충 수업과 학원 수업을 듣도록 강요당한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인 학생보다 부모나 교사의 의견이 훨씬 더 중요시되는 일도 부지기수다. 학생의 시간은 학생의 것이다. 학생의 의견에 반하는 강제 학습은 사라져야 한다.

 

④  야간, 주말, 휴일엔 학생들도 휴식을!

 

밤 10시가 넘어가도 온통 환하게 빛나는 학교 건물들, 주말에도 어김없이 등교하는 학생들…. 이런 풍경들은 부지런함의 상징이 아니라 슬픈 교육 현실의 상징이다. 모두가 쉬어야 할 야간, 주말, 휴일에는 학생들 역시 쉴 수 있도록 학교와 학원의 문을 닫아야 한다.

 

⑤ 과잉 학습으로 밀어 넣는 경쟁교육 개혁!

 

위 의 요구들을 들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한다. ‘학습 시간을 줄인다고 학교를 일찍 마치게 하면 사교육이 더욱 횡행할 것이다’, ‘학습 시간이 줄어들면 그만큼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 입시경쟁 교육, 학력 차별과 학벌 차별, 무한 경쟁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수업을 줄이고 사교육을 규제한다 해도 학생들의 실질적인 학습 시간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경쟁 교육을 바꿔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이고 근본적인 목표이다.

 

청소년에게 밤과 휴일의 시간을 보장하라

 

▲  아수나로 광주 지부에서 진행한 캠페인  © 아수나로

<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는 사교육과 공교육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교육의 문제에 대해 말할 때는 ‘과도한 사교육’이 단골처럼 불려 나왔다. 그리고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강화하는 것이 주된 해법 중 하나로 제시되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청소년들의 삶과 학습 부담에 대해 간과한 접근이 아니었을까?

 

공 교육 역시 입시경쟁 체제 속에서 학생들에게 공부할 것을 강요하고, 과도한 학습 부담을 지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는 이미 너무 긴 학교 수업 시간과 수업일수를 줄이자는 주장을 중요하게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공교육과 사교육을 막론하고 야간 학습, 휴일/주말 학습을 없애서 학생들이 밤과 휴일만은 자유로운 여가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학 생들에게 더 많은 공부를 하도록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인 학교, 가정, 사교육 등에서 모든 강제 학습을 없애자는 주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하루 6시간을 기준으로 학습 시간을 실질적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또한 경쟁교육 체제에 대한 문제 의식도 담아서, 과도한 학습 시간을 유발하는 근본적 원인을 함께 개혁해나가자는 메시지 역시 전하고자 한다.

 

<학습 시간 셧다운 프로젝트>는 교육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학생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문제인 ‘학습 시간’이라는 이슈를 통해, 학생들의 삶을 중심에 둔 교육 운동을 만들어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누 구나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면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낯섦이라고 표현하지만, 어쩌면 설렘이라고 치환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처음 겪는 것들에 대한 설렘. 지금의 학교는 그러한 감정들이 허용될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저 공부만을 쉴 틈 없이 강요하는 학교가 아닌, 제대로 된 여유와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가슴 뛰는 설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꿈꾼다. 우리의 교육 운동이 학교에서의 낯섦을 허용케 하는 순간을. 그리고 상상한다. 그 공간에서의 벅찬 설렘을.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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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11.04 15:46



경기도 수원 학원 체벌 토론회 관련 참고 예비 자료 : 관계 법률 검토와 이전 조사에서의 통계 등

1. 학원 관련 법
학원에서의 체벌에 관한 판결 등은 최근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을 보아도 학원에서의 체벌 문제를 다루는 조항은 전혀 없습니다.
따 라서 과거 학교의 체벌처럼 이를 정당화하는 조항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원칙에 따라 학원에서의 체벌은 폭행 또는 상해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만 실제 법원에서는 가정체벌처럼 사회 통념상 용인되는 행위라고 가벼이 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기도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조례가 있습니다. 이 조례는
“제16조 ③ 학원 설립·운영자 등은 「교육기본법」제12조에 따라 학생을 포함한 학습자의 기본적 인권이 존중되고 보호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④ 제3항에 따라 학원 등에서 교습이나 기타 목적을 이유로 학습자에게 처벌을 가하거나, 신체·정신상의 자유로운 활동을 강제로 제약하는 행위를 할 수 없으며, 제때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교습시간을 알맞게 안배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⑤ 부모 등 보호자는 그 보호하는 자녀나 아동의 교육에 관하여 학원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으며, 학원은 이를 존중하여야 한다.”

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례에 의해서도 학원 체벌이나 각종 인권침해가 금지되어 있다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2. 아동학대 관련법
지 난 9월 말에 ‘아동학대처벌특례법’이 시행되면서 아동학대 등에 관한 제도와 대처가 정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동학대’에서 가해자는 부모나 친권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아동복지법에 따르면 ‘보호자’란 “친권자, 후견인, 아동을 보호·양육·교육하거나 그러한 의무가 있는 자 또는 업무·고용 등의 관계로 사실상 아동을 보호·감독하는 자”를 말합니다. 또한 ‘아동학대’는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의 행동 전반이 해당합니다.
실제로 근래에 학교 교사, 유아 대상 학원 강사, 어린이집 보육 교사가 모두 아동학대를 적용받아 기소된 사례가 있습니다.
특 히 아동학대처벌특례법에서는 아동학대 신고의무자로 “초중등교육법에 따른 교직원, 전문상담교사” 등과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에 따른 학원의 운영자, 강사, 직원 및 교습소 교습자, 직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신고의무자가 자기 관할의 아동을 학대한 경우에는 형량의 1/2까지 가중처벌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문제는 법 적용에서의 사회 통념입니다. 법적으로 아동은 ‘18세 미만’이 모두 해당되지만, 기소 사례들을 보아도 모두 영유아이거나, 가장 나이가 많은 경우도 초등학교 4학년 사례입니다. 즉 법 적용에 있어서 검경이든 법원이든 나이가 어느 정도 많은 청소년들은 아동학대범죄 문제로 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법원은 학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경우를 주로 인정하고 있어서, 일회적인 체벌은 학대로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동학대처벌특례법에 따르면 아동학대범죄에는 형법상 폭행, 상해, 감금 등의 행위를 한 경우가 모두 포함되므로 폭행죄를 구성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이 당연히 처벌되어야 하겠지만, 현실이 어떨지는...)

또한 아동학대처벌특례법에 따라서, 자신의 자녀가 학원에서 체벌을 당한 것을 알고 있는 경우나, 같은 학원에서 다른 강사가 학원생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을 알고 있는 강사의 경우에도 신고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습니다.




3. 관련 조사 자료
작년에 나온 전국 단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청소년 중에 13.4% 정도가 학원에서 체벌을 경험했고, 1달에 1~2회 이상 경험한 것은 8.1%입니다.


체벌 경험 빈도는 중학교가 가장 높은데, 1달에 1~2회 이상 경험한 경우는 13.2%이고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13 청소년인권실태조사 연구)

반면 올해에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에서 중고등학생 한정으로 조사한 것에서는,
학원에서의 체벌 및 언어폭력이 전혀 없다고 답한 건 55% 정도이고 45%는 경험을 했는데요.
이는 질문을 체벌 및 언어폭력으로 묶어서 한 것과 표본의 차이로 보입니다. (중고등학생만 하느냐, 청소년 전반을 다 조사하느냐. 그리고 이번 학교+너머 운동본부 조사는 지역별로 인구비에 따른 할당을 하지 않았음.)

이 조사에서 경기도 응답자의 것만 분석해보면

학원에서 강사에 의한 체벌이나 언어폭력의 빈도 (경기도 응답자, 중고등학생)

 

거의매일

일주일에3번이상

일주일에1~2번

한달에1~2번

아주 가끔

전혀 없다

총계

개수

9

13

27

51

40

144

284

%

3.2%

4.6%

9.5%

18.0%

14.1%

50.7%

100.0%


이렇게 나옵니다. 즉 49% 정도의 중고등학생들이 체벌이나 언어폭력을 경험하고 있다고 답한 거고, 35.2%가 한 달에 1~2번 이상 체벌이나 언어폭력을 당한다고 한 것입니다.


추가로 검토하자면, 전국 청소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서는 학원을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이 될 수밖에 없어서 조사 결과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비슷하게, 2013년에 경기도 시흥에서 설문조사한 논문에 따르면 체벌 경험 비율은 확실히 적지 않습니다.
경 기도 시흥에서 학원을 다니는 중고생 23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에 따르면 체벌 경험은 41.6%, 언어폭력은 45.9%에 이르는데요. 이처럼 다니는 학생들로 조사 집단을 한정하면 수치가 올라갑니다. 자주 있다는 응답은 적은 편이긴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정도입니다.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김용익 석사 논문 사설학원에서의 청소년인권 실태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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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체 청소년 대비 수치로 보면 여전히 학교에서의 체벌 등 경험 비율이 학원에서의 경험 비율보다 높습니다. 이는 학교와 학원의 규모 차이 등에서도 비롯되는 것일 테고요.
2. 학원을 다니는 사람들로만 한정해서 조사하더라도 여전히 학교가 더 경험 비율이 높긴 한데, 학원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빈도로 볼 때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더라도요. 그리고 학원의 경우는 중학생이 체벌 경험이 좀 더 많아 보입니다.
3. 학원 체벌은 아무 법적 근거가 없고 완전히 금지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4. 서울시교육청과 광주시교육청 등에서 2011~2013년에 학원에서의 체벌 등을 강력히 금지하고 단속하겠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작년 시흥에서 조사한 논문이나, 수원에서 조사 등을 볼 때 경기도교육청 역시 이 부분에 집중적인 대처가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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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08.11 00:07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0525.html


[2030 잠금해제] 멸종 위기의 방학 /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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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05.28 20:35





학생 휴식에 관한 서울지역 학생 설문조사

기간: 2014년 5월 17일~6월 14일
대상: 서울지역 중·고등학생 누구나
방법: http://rest.asunaro.or.kr/ 에서!


2014 서울, 학생 휴식은 안녕?
질높은 삶을 위해서는 충분한 수면과 휴식이 필요하죠!
누구나 적절한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휴식과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환경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학교, 학원, 숙제, 야자... 제대로 쉬기엔 방해물이 너무 많지 않나요?
선생님, 부모님의 눈치없이, 공부와 시험의 압박없이 잘 쉬고 있나요?
학생에게도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기 위해서, 설문조사에 참여해주세요!


[어떻게 발표 되나요?]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다면? http://rest.asunaro.or.kr/ 에서 참여하세요!

[결과는 언제 발표 되나요?]
2014년 7월 8일 화요일 오후1시, (시청역)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설문조사 발표회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발표회입니다. 학생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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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05.14 10:28
(5월 13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권단체 간담회에서 '평등한 애도'라는 주제로 발제했던 글을, 한두 줄 보완했습니다.)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감정


  다른 사람의 일에 대체로 무덤덤하고,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는 슬퍼하지 않는 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며칠간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끊임없이 소식을 전해오는 미디어 때문일까. 마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가 뒤집히고 가라앉고,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바로 옆에서 목도한 것 같은 착각. 그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행태들에 대한 분노. 그리 슬프지 않은 나도 충분히 안타까움과 암울한 감정을 느낄 만했다.

  그리고, 왠지 그럴 것 같았지만, 참사 이후부터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생겼다. “미안해 아이들아”, “채 못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등등, 속이 뒤틀릴 것 같은 말들이 온 사회를 덮기 시작했다. 내 트위터 타임라인만 해도, 도대체 내가 팔로잉한 사람 중에 이렇게 짜증나는 사람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였다. 내 눈에는 무례 또는 오만 또는 차별로 보이는 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유통되는 것을 보면서, 웃었다. 야, 이렇게 할 일이 많구나. 하하.

  그래도 간간이 한 마디씩 투덜거린 것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는 무언가 비판을 하거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유족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도하고 참담해하고 있는데 굳이 선을 긋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욕 먹을까봐 무서웠던 것도 맞다. 그렇게 타이밍을 보면서 한 달이 되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언론에서, 온라인에서, 거리에서, 청소년활동가인 내 속을 뒤틀리게 하는 이야기들을 숱하게 접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6만원을 받고 동원됐다는 허위 주장부터, “미안하다 애들아”하는 현수막까지. 그렇게 참으면서 쌓은 짜증과 분노가 밖으로 폭발을 할지, 속병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설명


  저런 것이 왜 문제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다. 이해하기 쉽게 유비추론이 가능한 예시를 들어보겠다. 장애인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해 “비장애인으로서 똑바로 하지 못해서 장애인들에게 미안하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상당히 기이할 것 같지 않은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게 “남자들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하고 성폭력을 가리켜 “꽃이 짓밟혔다” 같은 표현을 쓰면, 거슬리지 않는가?

  본래 “미안하다”라는 말 자체가 너무 이 상황 저 상황에서 쓰이는 것이기는 하다. 어쩔 때는 죄책감, 어쩔 때는 안쓰러움, 어쩔 때는 부끄러움 등, 미안하다는 말이 담고 있고 대표하는 감정은 많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이 어떤 경우에 어떤 틀을 거쳐서 "미안하다"라는 말과 형식으로 표현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은 맥락에서라면, 나는 “미안하다”라는 말이 주체가 객체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잘못을 하고 구체적인 책임이 있는 책임자가 하는 말이라면 별로 위화감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추상적인 집단이 집단에게 하는 말이라면 한 번 더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비청소년들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진 만큼,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개개인들의 권능이 얼마나 된다고 책임이 있다고 하겠냐만…. 계량과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비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권력과 책임이 있다는 평가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와 사람들이 “미안하다 아이들아”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어쩌면 그 간극은 '정치적인' 문제일 것이다. 비청소년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꿔야 할 문제 상황으로 인식하고 청소년들을 평등하게 간주(가정)하고 대우할 것인가.

  다시 예를 들어보겠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분명히 여성보다 권력이 크다. 특히 각종 의사결정 과정인 정부나 의회, 그리고 조직들의 상층부는 남성 비율이 압도적이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평가해도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이 목숨을 잃거나 폭력에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남성들이 “남자로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성과 여성의 자리에 비장애인과 장애인, 자본가와 노동자(또는 돈이 많은 사람과 돈이 적은 사람), 미국이라면 백인과 흑인을 넣어도 마찬가지이다.>

 ― 이 주장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에도 위화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집단 전체를 볼 때 사회적으로 더 책임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주체화하는 논리와 맥락을 바탕으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권력이 조금 더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소수자에게 자신이 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평등을 선언한 관계에서라면 좀 어색한 모양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이 사회의 이런 문제를 함께 바꿔가자고 말하는 것과 ‘어른들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나는 ‘어른들’이 뭘 해주고 못 해주고 할 권력이 있기나 한지, 어떤 오만인 것은 아닌지도 의심스럽지만.

  참사 희생자에 대한 구도를 “어른”과 “아이”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아이”를 “못 다 핀 꽃”이라고 하는 것도 설령 자연스러운 생각일지 몰라도, 잠자코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라도 문제나 잘못이 있을 수는 있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희생된 사람들을 가리켜서 '착한 아이들' 등으로 이름 붙이고 묘사하는 것도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나는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아이들’, ‘미안하다’ 구도가 청소년들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사회의 산물이고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 문제에 대해 제대로 문제의식이 공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은 이런 문제의식을 ‘청소년보호주의’ 문제라고 명명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와 연관해서 나이주의나 가족주의 구도도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러므로 이 애도 역시 평등하지 않다.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청소년 대중 일반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넓은 의미의 청소년운동 안에서도 과연 이런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는지 묻는다면, 다소 회의적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널리 공유하고 조직화하는 것이 청소년운동의 지난한 숙제이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 “미성년자 석방하라” 등의 구호가 튀어나오던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눈앞에 떨어진 숙제.


첨언

  청소년보호주의는 비청소년들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이 있다. 세월호참사의 사망자 중 50여명은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며, 분명히 비청소년들도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이 ‘아이들’로 주로 불리고 기억될 때, 그 많은 사람들은 한 켠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 사건은 더군다나 단순히 청소년들이 많이 죽은 것이 아니고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단체로 여행을 가다가 일어난 사건이라서 주로 단원고 학생들만 부각이 되고 단원고 학생이 아닌 사람들은 청소년이든 아니든 다소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정부나 언론이나 눈에 띄는 집단을 먼저 챙기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그냥 ‘희생자’, ‘생존자’, ‘사람’으로만 묶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각각의 다른 역사와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기억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대할 때 “아이”와 “어른”이라는 위치가, 꼭 필요한가? 또는 바람직한가?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대로 수용해도 좋은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걸 접할 때마다 부자연스럽고 무례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삐그덕거린다. 다른 청소년활동가들 중 상당수도 그런 마음을 호소한다. 특별히 민감한 것이 아니라, 그 구도에 깔려 있는 차별과 불평등을 읽어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의 종착지는 어쩌면 ‘미성년자’, ‘청소년’이라는 말과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일 것"이라고 활동가들끼리 이야기하곤 한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 사회의 애도 방식을 보며, 다시 한 번 그 말이 떠올랐다.


(노파심에서 이야기하지만, ‘아이’라는 어휘 자체에는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어쩌면 ‘청소년’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느낌의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용례에서는 ‘아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더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때가 많지만, 쓰임새와 맥락이 문제이지 ‘아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아이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청소년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니 근데 그러고 보니 왜 저런 현수막 등은 다 반말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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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 깊게 파고들면 순진무구한 아이 희생자와 타락하고 세상에 물든 어른들의 잘못이라는 식의 구도 자체를 더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2014.05.14 20:31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4.03.30 22:48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소식지 활력소입니다. 수신거부는 hwalgy@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http://cafe.daum.net/Life2010   |   http://hwalg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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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03.21 21:17


http://yosm.asunaro.or.kr/1






※ 배포된 〔요즘것들〕 창간준비호에 일부 그림 그린 사람, 글쓴이 정보가 누락되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창간준비호 일정에 맞춰 디자인과 편집 등을 급하게 하다가 벌어진 실수였습니다.

이름이 빠진 글쓴이, 그린이 등께 사과드리며, 그밖에 오자 등에 대해서도 독자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다음 정식 1호 때는 더 나아진 모습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청소년신문 〔요즘것들〕

창간준비호


발행일 : 2014년 3월 12일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발행

제보 및 구독문의 asunaro@asunaro.or.kr












[그림=심규민 (slackerz0120@gmail.com)]




같은


"오랜만에 학교 온 학생들을 환영해주러 나온 선생님들? ㄴㄴ~

등굣길부터 학생들의 겉모습에 점수를 매기는 그들. 새학기가 밝았네 벌점이 쌓이네~"


"꿀잠 자던 시간에 학교에 나와야 한다는 충격. 이는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겪는 시차적응에 맞먹는다. 하루종일 츄리닝을 입고 다니던 몸을 교복에 끼워 넣으려니 갑갑. 규정이 만들어 놓은 틀에 나를 끼워넣으려니 더 깝깝!"


"학교가 학생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 학생들에게 오리처럼 걸으라고 하고, 네 '발'로 엎드려 있으라고 한다. 학기 초부터."


[글=이경은 기자]




[SPECIAL] 상콤한 새 학기를 여는 '군기잡기'?

               - 학생들 “우릴 겁주고 통제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 






[SPECIAL] 1학년을 위한 학교는 없다?
               - 선배와 교사, 양쪽에 치이는 이중고 겪어






[소식] 개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방학도 제대로 안 해서!"







[소식] "조퇴도 학생의 권리다!"








[청소년 봉인해제] 종교강요에 맞서 싸운 위영서씨 인터뷰

                           - "분노가 학교를 바꾸는 힘"








[칼럼 : 청소년의 눈으로] 교복의 창살을 풀어헤치자









[리뷰  ver.청소년]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를
                         - 『겨울왕국』 (크리스 벅/제니퍼 리, 108분, 3D 애니메이션) 












[청소년 24시]
[청소년24시]는 청소년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짧게 전하는 곳입니다. 여러 청소년들의 제보와 투고를 기다립니다.



◆ 체벌 폭행당한 학생 뇌사 상태에 빠져


2월에 순천에서 체벌을 당한 고등학생이 뇌사 상태에 빠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피해 학생은 지각을 했다고 교사에 의해 머리를 벽에 찧는 폭행을 당했고 복도를 '오리걸음'으로 걷는 기합도 받았다고 한다. 일부 언론들은 해당 학교에서 책임을 피하기 위해 학생이 폭행을 당한 후 조퇴를 한 것처럼 출석부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초중등교육법시행령에서는 교사가 신체 및 도구로 학생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는 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학생의 뇌사가 교사의 폭행에 의한 것인지 가려지기는 쉽지 않겠으나, 가해 교사는 처벌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 피해자인 학생 분은 3월 11일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 입학생들에게 '서약' 강요하는 학교들


입학생들에게 '서약서'를 받는 학교들이 있다. 대개 '학교규칙을 잘 지키겠다', '스승을 존경하겠다', '상급생에게 겸손하겠다', '학업에 전념하겠다' 등의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한 경우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와 같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서약서를 제보한 학생 이모씨는 "규칙이 정당한 지 아닌지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무조건 복종 서약이나 다름없다. 국민이 되는 조건으로 정부가 준법서약을 요구하지는 않지 않나. 사람이 법보다 우선하고, 국민이 국가의 주체이기 때문일 테다. 학교가 학생에게 서약을 요구하는 것은 학생을 학교자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아서라고 본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한컷태클] 건전공부 vs. 유해게임?



[그림=심규민 (slackerz0120@gmail.com)]


청소년의 게임 과몰입이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청소년의 공부는 과도하든 어쩌든 건전하다고 장려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공부를 너무 많이 하는 걸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한' 공부보단 '유해한' 게임을 좀 더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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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03.19 15:59




[왜냐면] ‘학생은 학생답게’ 캠페인을 시작한 이유 / 서준영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28571.html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3월 개학을 맞이해 ‘학생은 학생답게’ 포스터를 각 지역 번화가 및 학교 등지에 붙이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내용은 이러하다. “학생은 학생답게 자유로운 머리를 합시다, 개성 있는 복장을 합시다, 잘 쉽시다, 체벌·폭력을 거부합시다, 학교 규칙을 잘 바꿉시다.” 단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도 포스터를 게시했다.

(......)

그렇기에 포스터로 기존의 학생다움을 비꼬고 새로운 학생다움을 만들었다. 새롭게 정의한 ‘학생다움’은 더 ‘인간다움’이라는 뜻에 가까운 느낌이다.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이자 덕목이기 때문이다. 결국 학교가 학교다워지고 학생이 학생다워지는 것은 학생을 비롯한 학교 구성원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서준영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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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12.19 02:24





청소년의 대자보는 안녕들 하십니까?
청소년 대자보 및 탄압 사례를 모읍니다

많 은 청소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쓰기에 동참하면서 의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자보가 학교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는 것은 물론, 징계 위협을 당하는 일까지도 일어나곤 합니다. 청소년들도 생각이 있고 말할 자유가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대자보를 붙였다가 권리를 침해당한 사례를 제보해주세요! 사례를 모으고 세상에 알려서 우리의 권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http://asunaro.or.kr/jabo

★ 대자보 갤러리에 청소년이 쓴 대자보를 올려주세요!
    청소년들의 '안녕 못한' 목소리들을 많이 모읍니다!
★ 권리침해사례를 제보해주세요!
   · 대자보를 학교 등이 강제로 철거, 훼손, 압수한 경우
   · 대자보를 썼단 이유로 위협, 폭력, 폭언을 당한 경우
   · 대자보를 썼단 이유로 학교가 반성문을 강요하거나 징계를 하려는 경우
   · 그밖에 경찰 등에 의해 청소년의 언론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경우

"안녕하지 못한" 우리들의,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할 자유를 위해 함께해요!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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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12.09 11:44
[논평] 수능 뒤에도 고3들을 학교에 가둬두라고? 학생들이 노는 게 그렇게 보기 싫나?
- ‘정상화’를 원한다면 입시교육과 과중한 학습부담을 없애고, 학생의 참여를 보장하라


11 월 7일, 2013년 수능시험이 있었다. 전국의 수험생들을 경쟁시키고 줄세우고 대학서열구조 속에 밀어 넣는 입시의 과정 중 가장 비중이 크고 상징적인 시험이 11월 7일 치러졌다. 모든 고3 학생들이 수능을 보는 수험생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몇 개월, 몇 년을 입시공부 속에 버텨온 고3 학생들 중 수십만 명이 시험을 치러냈다. 그러나 수능이 끝난 뒤에도 고3 학생들은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다. 언론들에서는 고3 교실이 난장판이고 학생들이 학교에 제대로 출석도 하지 않는다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교육부와 교육청들에서는 단축수업을 금지한다고, 정상수업을 하라는 지침을 계속해서 발표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능 일정을 늦추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수능이 끝난 뒤 학교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수능 이전에 많은 고등학교들이 입시를 교육의 목표로 삼아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수능 전부터도 본래 다수의 고등학교들은 교육기관으로서는 ‘난장판’이다. 교육의 목표가 입시에서의 성공과 승리라고 대놓고 말하고, 입시 일정에 맞춰서 무리를 해서라도 교과 진도를 마치며, 그 뒤에는 입시 준비를 위해 문제 풀이에 몰두하는 수업을 한다. 이렇게 입시학원처럼 운영되는 학교를 과연 올바른 교육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과연 수능 후의 학교가, 수능 전의 학교보다 더 난장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수능 이후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이처럼 입시기관이 되어버린 학교 교육의 한 측면일 뿐이다. 학생들에게 “수능 때까지만 참아라.”라고 하면서 과중한 공부시간, 입시 스트레스, 학업을 강요하는 것이 입시기관 학교의 운영 방식이다. 그러니 수능이 뒤에는 학교에 붙어서 공부하라고 학생에게 요구하는 것이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수능을 본 고3 학생의 입장에서는 수능 뒤에도 정상수업을 시키라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을 어기는 ‘무리수’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 와 같은 입시기관화된 학교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 ‘고3 정상수업’을 강변하는 것은, 아무래도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찍 끝나는 꼴, 쉬고 노는 꼴을 보기 싫다는 감정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짧으면 몇 개월, 길면 몇 년에 걸쳐 과중한 학업부담 속에 학생들을 몰아넣으면서, 고작 1-2개월 남짓 단축수업을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니까 화가 날 지경이다. 애초에 한국의 공부시간은 너무 길고 학업부담은 너무 크다. 정규수업을 오후 4시, 5시까지 하는 것이 기본이고, 보충수업이나 야간자율학습 등을 하면 밤 늦게서야 하교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고도 또 학원을 가는 등 사교육을 받아야 하는 청소년들도 많다. 고3 때는 공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학교에 나오거나 사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청소년들도 적지 않다. 이처럼 과중한 학업부담은 사라져야 하고, 오히려 오후 1~2시 정도면 하교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수능시험이 끝났든 어쨌든 학생은 학교에 8, 9시간씩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과중한 학교의 일정을 계속해서 강요하려는 것은 그저 학생들을 학교에 가둬둬야 안심이 되는 강박관념은 아닌가?


수능 끝난 뒤 고3 정상수업이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입시경쟁교육을 중단하라. 입시에 올인하는 교육을 개혁하고, 입시기관이 되어버린 학교를 교육기관으로 바꿔내라. 현재의 과중한 학습부담을, 학생들이 감당할 만하게, 학생들의 교육권과 쉴 권리가 제대로 보장될 정도로 줄여라. 고3 수업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하는 교육당국들은, 과연 입시기관이 되어버린 학교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해본 적은 있는가.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학교들을 ‘정상화’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더불어 우리는 고3 학생들을 무조건 학교에 가둬두라는 식의 지침이, 비민주적인 교육정책 결정 탓에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육부, 교육청들이 고3 학생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런 막무가내 억지 정책을 밀어붙이지는 못할 것이다. 경기도교육청은 논란이 되자 학생들과 토론을 해보잔 식으로 말을 던졌지만, 실제로 학생들과 제대로 토론을 하기보다는 형식적으로 게시판을 열어두는 데 그치고 있을 뿐이다. 학생들의 참여가 없는 비민주적인 교육정책은 그것만으로도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학생은 교육의 대상이 아닌 주체이다.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학생들이 학교 운영과 교육정책 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자치를 활성화시키고 참여의 길을 열어라. 그래야만 이런 억지 정책이 강행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2013년 12월 9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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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11.19 19:51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수원지부에서 거리 캠페인을 하면서 만난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게 추운 날 외투, 겉옷 규제여서

그 목소리를 담아 만들어봤습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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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10.25 13:42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31018194901&section=03



전교조 숨통 조인 한국 사회, '한고학연'의 추억

교육체제 내 결사자유 박해에 동병상련

공현 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활동가

"나는 전교조가, 더 정확히 말하면 교사들이 지금보다 더 학생인권에 대해서 교육도 많이 받고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교사들의 노동조합의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것이다. 요컨대, 나는 전교조를 보면서 자꾸 한고학연이 떠오르고 광고협, 부고협, 마창고협 등이 떠오르는 것이다. 학교에서 결사의 자유를 무시당하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의 공감이라고나 할까? 오지랖이 넓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교사의 권리조차 무시하는 정부가 학생들의 권리라고 존중해줄 것 같지는 않아서 그런다. 그래서 별거 아닌 힘이더라도 보태고 싶다. 정부에게 전교조에 대한 그런 탄압은 부당한 것이며 결사의 자유와 노동조합의 단결권에 대해 개념을 좀 탑재하여 교원노조법을 개정하라고 요구하고 싶다.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다. 그러면서, 내 마음 한편에서는 전교조 또는 교사들 역시 학생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조직을 만들고 결사의 자유를 행사할 때 기꺼이 지지하고 힘을 보태주지 않을까, 뭐 그런 희망을 가져본다."







그밖에도 청소년/청소년활동가들이 전교조 탄압에 관해 쓴 글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31018162530&section=03

"전교조 탄압? 학생들에게 '노동 3권' 뭐라 가르칠 텐가"

[청소년이 바라본 전교조 설립 취소 위기·②] 노동권, 말 뿐인가요?

이응이 청소년 노동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31017110423&section=03

"전교조 공격, 무한 경쟁 탈출하고픈 학생들 배신"

[청소년이 바라본 전교조 설립 취소 위기·①] '어불성설' 꼬투리 잡기

김가을길 서울 문창중학교 1학년


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477

전교조, 해산만이 답인가?[교육 살펴보기]전교조의 법외노조화 시도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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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10.15 11:22
[성명] 모든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나?
- 체벌에 희생된, 희생되고 있는 청소년들을 애도하며


  폭력은 나쁘다. 누구도 구타를 당하거나 고문을 당해선 안 된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치관이다. 폭력에 대한 여러 논쟁이 있지만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 가장 기초적인 인권의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에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도 신체를 훼손하고 폭력을 가하는 고문이나 형벌은 두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은 차별의 하나이기도 하기에 더욱 심각한 잘못이다. 그러나 여전히, 청소년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고 없애야 한다고 하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결국 청소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단 말과 뭐가 다른가? 체벌이 여전히 정당한 것이라고 계속되고 있는 것, 그것이 한국 사회의 청소년인권의 현주소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 사회에서 체벌금지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부터 있어왔다. UN아동권리위원회 역시 한국에 수차례 학교, 가정, 그리고 사회 전 영역에서 아동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고 근절할 것을 촉구했다. UN고문방지위원회는 체벌은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며 모욕적인 처우이고, 고문의 일종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체벌금지의 걸음은 굼벵이보다도 더디다. 2011년에야 겨우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학교의 장은 법 제18조제1항 본문에 따라 지도를 할 때에는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하되, 도구, 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됨으로써 학교 체벌이 금지됐다. 그런데 교육부는 이 조항에 대해서도 ‘직접 때리지 않는 형태의 체벌은 허용되는 것’이라는 반인권적 해석을 하며 학교 체벌금지에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학교 체벌이 실질적으로 금지되고 있는 것은 경기도, 광주, 서울, 전북 등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여 체벌금지를 명시한 지역뿐이다. 이런 지역에서도 체벌은 줄어들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가정에서의 체벌 그리고 학원 등 사회 여러 영역에서의 체벌에 대해선 금지하는 규정도 없다.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를 제정한 서울만이 가정 체벌 등이 금지되고 있는데, 이마저 제대로 알려져 있지도 않은 형편이다.

  현재도 수많은 청소년들이 체벌을 겪고 있다.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명이 일상적으로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한 청소년이 목검으로 체벌당한 뒤 사망에 이른 것은 그런 와중에 불거진 비극적 사건이다. 우리는 그동안에도 학교와 가정에서 체벌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죽음에 이른 청소년들이 계속 있어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죽음에 이르지 않더라도 폭력으로 인해 상처받은 청소년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체벌에 대한 언론보도는 잊을 만하면 나고 있고, 그나마 '과잉 체벌'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정도가 심한 게 아니면 대부분 묻히고 만다.

  학생간의 폭력에 대해서는 그토록 강력한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비청소년이 가하는 체벌 폭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이중적 태도는 기괴할 지경이다. 정부는 스스로 금지한 학교 체벌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단속도 하지 않고 있다. 언론들도 법적으로 명백하게 금지된 학교 체벌에 대해서조차 ‘과잉체벌 논란’ 따위의 표제를 붙이며 보도하는 둔감함을 과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과잉’ 체벌이 문제이지 체벌 자체는 할 수 있다는 식의 궤변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학살이 아니면 한두 명 정도는 살인해도 괜찮다거나, 죽을 만큼 구타하지만 않으면 주먹질을 몇 번 하는 건 괜찮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 ‘체벌’이란 이름으로 허용되어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문이자 폭력인 행위가 명확하게 금지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체벌을 금지하라.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학원에서도, 사회 그 어떤 경우에라도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라. 교육이나 훈육을 내세우더라도, 설령 진심으로 선의를 가지고 하는 것이더라도, 체벌이 폭력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교육을 위해서 폭력이 필요하다는 사고방식, 그것이 불행이 반복되는 원인이다. 폭력 말고 다른 방식으로 교육하지 못하는 것, 그러한 상상력의 부족이 폭력의 폐해 중 하나이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는가?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르치기 위해 체벌이 필요하다면, 한국 정부를 체벌해서라도 체벌금지를 시키라고 가르치고 싶은 심정이다. 청소년은 맞아도 된다고 하고 있는 정부라면 자신도 맞을 각오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청소년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체벌이 폭력일 뿐이며, 교육적이지도 않음을 잘 안다. 그러므로 정부를 체벌하는 데 도전하기보다는 다시 한 번 간곡히 말하겠다. 절실하게 외치겠다. 정당한 체벌은 없다. 체벌은 폭력이고 범죄이다. 체벌을 금지하라.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학원에서도, 그 어떤 경우에라도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라. 체벌을 금지한 후 체벌이 없어지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라. 그것이 청소년도 사람임을 인정하는 필수 코스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2013년 10월 13일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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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09.04 14:47

똥 같은 소리라도 말할 자유는 있다!


모두가 입 다무는 학교가 아니라 모두가 입을 여는 학교를 만들자.


- 평택 박모 교사의 '종북척결' 활동 사건 등에 대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입장. -

 


평택의 박모 교사가  “종북척결” 등의 주장과 활동을 인터넷 게시판, SNS 등에서 공개적으로 펼치고, 학생들이 “종북척결, 종북검사구속, 촛불총장구속” 같은 문구의 피켓을 든 인증샷을 올리는 등의 행동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일각에서는 이 교사와 학생들이 정치 활동을 한 것이므로 징계 또는 처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고, 교육청이 조사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다. 우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청소년, 학생들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입장이고, 그와 관련해서 교사 등의 정치 활동의 자유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사의 정치 활동의 자유 역시 ‘미성숙한 학생들이 정치적 의견에 노출되면 안 된다’는 식의 핑계로 금지당하고 있는 까닭에서다. 따라서, 우리는 박모 교사의 견해가 아주 문제가 많고 비판받을 만하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박모 교사에 대해 정치 활동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자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다.

 

평택의 박모 교사의 언행에는 우리가 보기에도 문제점이 한두서너 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 여럿을 함부로 “종북빨갱이”라 이름 붙이며 국가정보원이 “잡아 반 죽여서 보안법으로 처형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하는 등, 도저히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바람직한 시민이라고 할 수 없는 반인권적․반민주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SNS계정에 게시된 만화에선 “얘들아, 정의를 위해서 쓰는 주먹은 폭력이 아니다! 국가의 적과 싸우지 않는 자는 이 나라에서 살 자격이 없는 국민이다! 잊지 마라!! 특히! 남자는 비겁하게 살면 안됀다! 그건 남자가 아니다!”와 같은 문구가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발상, 폭력에 대한 부당한 옹호, 가부장적 성역할 의식 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어디서부터 비판을 해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시국선언에 참여한 청소년들도 뭘 알겠느냐. 알고서 했다면 인정을 해줘야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몰려나간 것이다. 아이들의 생각이 아닌 어른들이 생각을 뒤집어씌운 것이다.”라고 밝히는 등,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꼰대성을 드러냈다. 자신과 같이 “종북척결” 등의 문구를 들고 사진을 찍은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의 청소년들에 대해서는 “뭘 알겠느냐.”라고 하는 편리한 이중잣대는 비웃어주고 싶을 만큼 비겁하다. 또한 그가 자신의 활동을 “대한민국 한 사람으로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라고 하고 안보교육, 정체성 교육, 국가관 확립, 애국활동 등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의 활동이 정치 활동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은연중에 자신의 의견을 절대적인 가치로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참으로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반인권적․반민주적인 데다가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에도 부정적이고 자신의 활동을 정치 활동으로 생각지도 않는 사람에 대해서, 이 사람의 정치 활동의 자유도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떨떠름한 노릇이다. 논평을 내면서도 입맛이 씁쓸하고 뒷목이 땡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 박모 교사에 대한 징계나 처벌에는 반대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단지 정치적 의견을 밝히고 정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어떤 불이익을 받는 것에 반대한다. 그를 조사하고자 한다면 그가 “종북” 낙인을 찍고 막말을 한 사람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모욕 또는 차별의 문제로 조사를 하거나, 아니면 그가 학생들과 정치적 활동을 함에 있어서 학생들에게 어떤 강요나 강압은 없었는지를 살피는 차원에서 해야 할 것이다. 박모 교사와 같이 인증샷을 찍고 활동을 한 학생들 역시 정치 활동을 이유로 어떤 징계나 처벌을 받아선 안 된다. 학생과 청소년은 물론이요, 교사 역시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각종 정치 활동의 자유를 인권으로서 보장받아야 한다.

 

물론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좌파적인 의견을 밝히고 관련된 활동을 한 교사들은 징계를 받고 처벌을 당하는 현실에서, 형평성을 들며 박모 교사 등 정권에 우호적이고 우파적인 활동을 하는 교사들도 징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모두가 징계를 당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공평한 침해’는 학교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만들어진 교육 체제와 교과서만 따르는 교사들과 학생들만을 용인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부당한 인권 침해에 대한 저항은 “쟤도 못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모두가 할 수 있게 보장하라!”라는 자세로 이루어져야 옳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동안 정부가 시국선언 등을 했다거나 정치적 활동, 발언을 했다고 징계하고 처벌한 모든 교사들에게 사과하고 징계와 처벌을 취소해야 하며, 교사와 학생 등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도록 생각과 자세를 고쳐먹고 관련 법제도를 개선하라고 다시 한 번 요구한다.

 

정치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으며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정치적 의견을 갖고, 이야기를 하고, 활동을 할 자유는 이 사회에 사는 누구나 당연한 인권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다. 학교라고 해서, 교사와 학생이라고 해서 여기에서 제외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학교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간으로서 자유롭게 정치적 의견이 오갈 수 있도록 보장하고 교육해야 한다. 모두가 입을 닫는 학교보다는, 교실에서도 복도에서도 운동장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견해들이 오가는 것이 바람직한 학교라 할 것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이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관계와 문화를 만듦으로써 이룰 일이다. 이렇게 제대로 민주주의와 인권이 뿌리 내린 교육 속에서는 박모 교사처럼 반민주적․반인권적 의견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경우도 줄어들 것이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많은 반론에 부딪혀 억제될 것이다. 학생들 역시 자율적인 경험과 토론을 통해 스스로 세계관과 정치적 생각을 확립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학교를 침묵의 공간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공간으로, 시끌벅적한 교육의 광장으로 만들어라. 그것이 청소년들의 인권을 위해 그리고 서로 좀 말이 통하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2013년 8월 30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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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2.03.31 17:10

호랑이 간담회 때 쓴 내용에 비해 좀 더 개량하고 약간 더 덧붙인 내용입니다. 공현은 2달 동안 활동을 쉬고 있으니까 이런 걸 막 쓰고 앉았습니다....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를 위한 탁상공론

공 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 / 오답승리의희망 편집진)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 이미 1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청소년 활동가들이 이야기해왔고, 꿈꿔왔던 과제이다. 청소년들이 사회적․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세력으로 등장하기 위해서, 운동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대중조직화 또는 대중조직의 필요성은 숱하게 이야기되어왔다. 친목모임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 동아리―서클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소수의 급진적 활동가들만의 운동을 벗어나야 한다, 그 많은 지적과 요구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결국 대중조직화․대중조직의 필요성이었다.


2000년 무렵부터 이미 그 꿈은 어렴풋하게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2000년 만들어진 전국중고등학생연합도, 2008년 촛불집회 속에서 만들어진 전국청소년학생연합도, 그리고 어쩌면 전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역시 2000년 무렵 만들어진) 역시도 성격은 서로 다르더라도 전국 청소년운동 대중조직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1980년대에 "자주적 학생회"를 건설하려 하고 여러 조직을 만들었던 고등학생운동 때부터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는 절실한 꿈이었으리라.


그렇다. 분명, 대중조직화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은 있다.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단체가 대중조직화에 나서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 청소년 활동가라고 하더라도, 대중조직화․대중조직이 있으면 좋겠다, 있어야 한다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구체적으로 청소년 대중조직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지며 운영돼야 하는지, 대중조직화와 대중조직, 대중운동의 개념상의 차이는 무엇인지, 그런 것들이 약간 불분명한 것이 현실이다. 1980년대 노동․통일․대학생․좌파운동 등등을 자기화한 운동론․조직론도 있었고, 이에 따른 성과도 실패도 있었지만, 지금 시점에서 청소년운동에 이를 적용하기에는 사회적 상황이나 청소년운동의 현실 등도 다소 부적합해 보인다. 그리고 개중에는 그 당시 유행하던 이론에 경도되어 지금과는 언어가 맞지 않거나 지나치게 추상적인 것도 있고 말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에 대해 정리하고, 또 현재의 청소년운동이 염두에 두어야 할 방법들과 구체적인 목표들을 설정하고자 한다. 물론 이 글은 뭐 면밀한 연구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병역거부로 인한 수감을 며칠 앞두고 잉여로운 시간 동안에 그동안 어렴풋이 생각해왔던 것들을 정리해보려는 것에 불과하다. 대중조직화는 이런 글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직접 발로 뛰고 사람들을 만나고 실천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질 것이다. 다만 이 글이 "대중조직화․대중조직"이 막연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이 들리는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구체적인 생각과 실천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이 글은 탁상공론이므로 이 글에서 이야기한 것 그대로 운동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비판하고 반대하고 부분적으로 지지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논의와 활동이 촉발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랄 뿐이다.



◎ 대중조직․대중조직화에 대한 개념 정리


먼저 가장 기본적인 부분, "대중조직화"란 무엇인지, "대중조직"은 또 무엇인지부터 정리하겠다. 의외로 잘 개념 정리가 안 되어있는 것이다. 먼저 대중조직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니 대중조직은 "각계각층에서 공통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반 대중들로 조직된 사회단체. 노동조합, 소비자 보호 단체, 압력 단체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 정의는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맥락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예컨대 우리가 운동에서 "대중조직"이라는 말을 쓸 때, 그 말은 보통 "활동가조직" 등의 말들과 대비를 이루면서 그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소수의 활동가들이 이슈파이팅을 하거나 위험성이 높은 희생적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의 사람들이 활동하는 조직이 대중조직인 것이다. 이러한 대중조직은 참여하는 사람의 수나 재정, 사회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원 등 여러 측면에서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사회 변화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대중조직은, 쉽게 말해서, 사람들의 생활의 '현장'에서부터 상당수의 대중들이 조직되어 있는 형태의 조직이다. 여기서 대중은 불특정 다수일 수도 있고, 노동자, 여성, 농민, 청소년, 대학생, 특정 지역의 주민 등 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노동조합총연맹 같은 것이다. 지역 당협(과거 지구당)이나 기타의 여러 조직들을 통해서 다수의 대중들을 참여시킬 수 있는 정당들도 일종의 대중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조직이 대중조직이라고 불리기 위한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을 생각해볼 수 있다.


㉠ 숫자. 조직화된 사람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하는 것은 대중조직에서 필수이다. 전체 집단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5천만 한국 인구를 생각해볼 때 아무리 못해도 수천명 이상 조직화되어 있어야 어엿한 대중조직이라고 불릴 수 있다. 아니면 수천명의 조직화를 구체적인 목표로 두고 이루어나가고 있는 중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작은 지역이나 집단 안에서의 대중조직인 경우엔 수백명 정도 수준이어도 되겠지만, 여하간 전체 집단에 비했을 때 어느 정도의 비율과 숫자는 갖추고 있어야 대중조직이라고 부를 만하다.


㉡ 현장성. 대중조직은 그 대중조직을 이루는 대중들의 삶의 현장에 밀착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조직의 구성원들이 개인화되어서 그냥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해 있기만 하는 형태의 모임은 대중조직이라고 할 수 없다. 대중들의 삶의 현장에까지 직접 조직화의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어야만 비로소 대중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일터, 지역, 학교 등 여러 삶의 현장에 그 구성원들을 조직화하는 단위가 꾸려져야 있고, 그 단위가 현장의 목소리와 현실을 대중조직의 운동에 전달, 반영시켜야 한다.


㉢ 목적․의식. 대중조직은 그 조직을 구성하는 대중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대중들 공통의 이해관계나 권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조직은 공통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의식이라는 것은 뭐 거창한 이론이나 이념이 아니어도 좋은데, 여하간 그 목적을 달성할 방법론이라거나 조직을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서 구성원들 사이에 어느 정도 동의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중조직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내부에서 많은 논쟁을 하기도 하고 의견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선까지는 동의가 이루어져 있고 아주 이질적으로 갈리지는 않기 때문에 조직이 꾸려지고 운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대중조직은 다음과 같은 성격들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① 대중조직 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일단 사람들의 숫자가 많으니까 이건 거의 필연적이다. 설령 그 대중조직의 목적과 의식 등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라고 하더라도, 성격이라거나 사고방식이라거나 인간성이라거나 여러 성격들에서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② 대중조직은 대의제․관료적 운영 방식을 일부 취한다. 이 역시 대중조직이 사람 수가 많고 덩치가 큰 조직이기 때문에, 조직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관료화 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한 대중조직의 현장성은 대중조직의 결정 구조가 다분히 단계적인 형태를 가지도록 하기 때문에, 대의제의 도입도 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대중조직은 관료화되고 상층 간부들의 사조직화 되지 않도록, 민주주의의 원칙과 힘을 잃지 않도록 경계하고, 때로는 견제하는 장치가 필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조직화"란 어떤 것인가?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대중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조직되어 있지 않은 대중을 조직화하여 대중조직을 만드는 과정, 그것이 바로 대중조직화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중조직화는 여러 개의 현장에서 대중들을 조직화하고 그 조직들을 연합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도 있고, 중심이 되는 대중조직을 지향하는 조직을 먼저 만들고 그 조직을 구심점으로 삼아 여러 현장 조직들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선진적 활동가들의 노력에 의해서나 자생적인 형태로 공장별 민주노조를 만든 후 그 노조들이 연합하여 노동조합총연맹(노총)을 결성하는 경우라거나, 또는 처음부터 산별노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거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같은 경우)를 건설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조직을 만들어서 대중들을 가입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대중조직화"가 반드시 "대중조직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중조직이라는 형태를 가지지 않더라도 대중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조직되어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 즉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 그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대중조직화일 수도 있다. 대중조직이라는 형태의 필요성이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조직의 중간 단계나 전후 단계로 이러한 포괄적인 대중조직화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당한 예일지 모르겠는데, 프랑스의 경우 노조 조직률은 한국보다 더 낮은 8~9%를 기록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이 단체행동 등에 참여하는 경향은 한국보다 더 높다. 프랑스의 노조 조직률이 낮아진 것 자체도 긍정적인 현상은 아니겠으나, 여하간 이는 노동조합 같은 통일된 대중조직의 형태로 조직화되지 않더라도 기타 문화적 부분이나 사회의 여러 조건들을 통해 노동자 대중들이 '조직화'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아닐까. 즉, 하나의 통일된 대중조직의 형태를 가지지 않더라도, 대중은 조직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의 어려움


나는 가능한 한 청소년운동에서도 대중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과제가 대중조직을 바로 만드는 것인지, 또는 청소년 일반의 대중조직이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좀 유보적인 입장이다. 대중조직의 형태라면 청소년 일반의 대중조직이 아니라, 초중고등'학생'들의 대중조직이나, 청소년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같은 식으로, 여러 청소년들의 상황에 따라 다른 대중조직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솔직히 말해서 어떤 형태가 잘 작동하고 좋은 효과를 낼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쿵저러쿵 해도 나는 청소년운동에서 대중조직을 직접 건설하려는 형식이든, 대중조직을 바로 건설하는 게 아닌 다른 방식이든, 여하간 "대중조직화"가 시급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가 여러 어려운 점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려움이란 게 복합적이다. 우선은 대개의 운동들이 한국 사회에서 조직화를 할 때 겪는 문제인데, 탄압이라거나 한국 사회의 보수성이 있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여하간 뭔가 이런 집단을 이루고 활동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고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학교로부터 가정․친권자로부터 직접적으로 탄압을 받기도하고, 아니면 경쟁교육의 압박 때문에도, 적지 않은 장벽과 위험부담을 가진다. 이런 조직화를 금기시하고, 청소년들의 정치활동 등을 죄악시 하는 사회문화적 풍토 역시 상당한 걸림돌이 된다. 때로는 청소년 조직화에 나선 활동가들이 직접적으로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거나 하는 일도 일어났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다른 운동들 역시 한국에서라면 어떤 형태로든 겪게 되는 것이니 뭐 그렇다고 치자. 이제 청소년운동의 특수성을 따져보기 시작하면 아주 그냥, 돌아버릴 것 같다. 가장 먼저,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은 매우 그 기간이 짧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청소년 정체성은 보통 길어야 10년이면 끝이고, 대개의 경우 청소년운동 같은 것을 알고 활동하기 시작하는 게 10대 후반임을 감안하면 3~4년이 고작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청소년들이 조직화될 절실성이나 필요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몇 년만 참으면 되는데"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먹히는 것이다.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노동자, 주민 등 잘 변하지 않는 정체성의 대중들을 조직화하는 경우가 청소년운동에게는 그다지 참고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이런 점에서 참고할 만한 건 대학생운동 등 몇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직접적인 문제도 있다. 대중조직화 작업은 보통 상당히 긴 기간을 필요로 하는데, 청소년기가 짧다는 것은, 기껏 열심히 조직화해놓은 사람들이 몇년만에 금방 청소년이 아니게 사라져버린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청소년 대중조직화 사업은 양적으로 잘 성장하지 못하고, 한 부분을 조직화해놓으면 그 전에 조직화했던 다른 쪽이 없어지고 하는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곤 한다. 만일 조직화 정도를 "지금 현재 청소년인 사람들 중 몇 명이나 가입되었나" 같은 척도로 판단한다면, 청소년운동은 그 조직화 정도가 자연 감소하는 속도가 매우 빠른 것이다. 물론 어느 운동이든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청소년운동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하다.


두 번째는 돈이다. 한국에서 청소년들의 경제적 생활은 다수가 가정․친권자에게 종속되어 있다. 즉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청소년 대중을 조직화해서 '회비'를 걷는다거나 해서 조직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다. 설령 회비를 걷더라도 아주 소액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그래도 비교적 조직화를 하면 조합원들의 '조합비'라는 형태로 활동에 필요한 돈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가볍지 않은 단점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보편적인 복지제도나 공공 사회 시설도 열악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 단점이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밖에도 한국 사회에서 변화하는 노동시장 등 경제 구조라거나 청소년들의 시간을 대부분 규율하는 독특한 입시경쟁교육 문화라거나 다른 집단들에 비해서 공식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선거권이든 뭐든)조차도 완전히 부정당하고 있다는 점, 비청소년 사회운동들조차도 청소년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는 점 등,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의 어려움은 결코 만만치 않다. (한 번은 우스갯소리로 공장은 위장 취업이 되는데 학교는 위장 입학․전학이 안 돼서 문제라고 한 적도 있다.) 뭐 하지만 생각해보면, 노동자들에게는 당장의 해고 위험이나 자본과 국가의 직접적인 폭력 같은 노동자들 나름대로 고충이 있고, 장애인운동 역시 한국 사회에서 이동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고충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그래서 어떤 형태의 대중조직화가 청소년운동에 적합한지 생각해볼 때 유의해야 할 문제일 뿐, 대중조직화 자체를 포기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대중조직화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더라도, 나는 청소년운동의 이러한 특성을 염두에 둔다면, 당장 대중조직 건설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대중조직화에 나서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에서 "대중조직"을 성공적으로 건설하는 것은 대중조직을 만들고 참여하는 등 청소년들의 활동의 자유가 좀 더 보장받고 위험부담이 적어진 후에야 가능하지 않을까? 대중조직의 현장성이라는 성질을 생각하면 학교나 일터, 지역(지역으로 들어가면 가정과 무관해지기도 어렵다.)의 상황과 전혀 상관없이 대중조직이 만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말이다.


일단 긴 시간을 들여 아래에서부터 조직화해내서 연합을 꾸린다는 형태부터가, 청소년운동의 특성상 시간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누군가가 청소년운동의 학교 현장성을 강조하며 몇몇 학교들을 성공적으로 조직화해내고 좋은 운동의 사례들을 만든다고 치자. 이제 그 학교들의 성공사례를 알리고 다른 학교들을 조직화하러 나설 즈음이면, 그 몇몇 학교들의 조직들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상당수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더군다나 한 학교에서 성공한 방법이라고 해서 다른 학교에서도 성공적이리라는 보증은 거의 없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와중에 학내조직이 일정 수준이상으로 여러 학교에 늘어나고 이 조직들이 연합하여 대중조직을 꾸릴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 오해는 마시라. 그렇다고 해서 학내조직화나 사례를 만들어내고 시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니까. 단지 그 방법을 통해서 곧바로 대중조직 건설을 노리는 코스가 어렵고 다른 우회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숱하게 고등학생운동이나 청소년운동 안에서 만들어보려고 시도되어 왔던 학생회연합 같은 형태의 조직이, 아마 지금보다 나아진 조건 없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대중조직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들로 나는 일단은 대중조직을 직접 만드는 것보다는 포괄적 의미에서 대중조직화를 먼저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대중조직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청소년 대중조직화 장기 목표 : "10대 청소년 1% 조직화"


청소년운동의 경우에 대중조직화를 이루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냐는 의문을 많이들 가지게 된다. 예컨대 현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활동회원 수가 약 140명가량 되는데, 이건 대중조직인가? 아님 500명이 넘어야 대중조직일까? 아님 수십만명? 앞서 말했듯이 어느 정도 숫자 이상이어야 대중조직이라고 말할 만한 정확한 기준은 아무데도 없다. 그런 걸 만들어내기도 어렵다. 다만 나는 여기에서 청소년운동이 앞으로 목표로 삼을 만한, 의미있고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해보려고 한다.


현재 한국의 10~19세, 10대 인구는 약 660만명이다. 나는 일단 이 10대 인구의 1%, 6~7만명을 조직화하는 것을 청소년운동의 장기적 대중조직화 목표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1%라는 수치는 계산과 기억을 편하게 하기 위해 편의상 잡은 것으로, "1% 운동" 같은 식으로 활동가들이 기억하고 목표로 삼기 쉽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


6만명이라고 하니 매우 많아 보이지만,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정도인데도 그 조직률이 낮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1%는 결코 높은 수치라고 볼 수는 없다. 숫자로만 봐도, 예컨대 우리가 그렇게 자주 욕하곤 하는 전교조의 경우에도, 교사의 수는 전체 10대 청소년의 수에 비하면 아주 적지만 조합원 수는 현재 8만여명이다. '조직화'라는 게 그 인원 모두를 '활동가' 수준으로 만드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한국은 새마을운동 같은 관변적 조직을 제외하면 대중조직화가 잘 돼있는 분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비교해보면 노동조합 쪽의 조직률이 오히려 높은 편일 정도이니까, 앞서 논의한 청소년운동의 여러 걸림돌들을 생각하면 1%라는 수치는 상당히 높게 잡은 목표치라고 볼 수도 있다.


1% 조직화. 이는 곧 10대 청소년 100명 중 1명은 조직화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한 학교를 약 1000명 정도로 생각하면 그 중 10명은 조직화되어 있다는 것이고, 수도권이라면 약 3만명 정도가 조직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직화'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감을 잡아볼 필요가 있다. 수만명 전부가 일상적으로 청소년운동에 높은 수위의 참여를 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할 터이다.


조직화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데, 가장 떠올리기 쉬운 것은 조합원․회원․당원 같은 것으로 가입하는 등의 방식이다. 그렇지만 또 곰곰히 따져보면 형식적으로 가입만 하고 있다고 해서 조직화가 되었다고 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페이퍼 당원이니, 돈만 내고 노조의 활동에 공감하지도 참여하지도 않는 조합원 같은 존재들은 어디에나 있다. 조직화의 형태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 본질을 찾으라고 한다면 역시 '접촉'과 '교류'일 것이다. 즉 지속적으로 접촉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조직으로부터 구성원에게로, 구성원으로부터 조직에게로 정보와 행위가 오가는 것이 조직화의 본질이다. 즉 조직화가 잘 되어 있다면, 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조직과 그 조직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조직에서 제공하는 일정한 통로와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이나 정보를 전달하고 반영할 수 있고, 조직 역시 구성원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공동의 행동을 하도록 참여를 이끌어내서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조직 입장에서 볼 때는 '동원 가능한' 사람들, 또는 조직의 운동 과정에서 정보를 전달하고 교육하고 설득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곧 조직화되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반면, 구성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때로는 자신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과 정보, 이해관계 등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공감을 얻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행동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경로가 조직화일 것이다. 물론 이건 단순화시킨 도식이고, 실제로는 조직 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관계 맺기가 일어나고 이런 요소 역시 조직화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요컨대, 청소년운동에 6만명이 조직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단일한 대중조직에 그 6만명이 가입되어 있으며 그 6만명의 참여로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며, 또는 좀 더 느슨하더라도 청소년운동 전반에서 만든 여러 창구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접촉․교류하여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고 행동에 참여하도록 해볼 수 있는 청소년의 수가 6만명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조직화의 방식이나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일 1% 조직화가 현실화된다면, 청소년운동은 온힘을 쏟아 부었을 때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청소년들의 힘을 수도권에만 1~2만명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전국적으로 움직였을 때도 3~4만 이상의 청소년들이 함께 뜻을 모아 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숫자는, 청소년운동이 극소수의 청소년 활동가들에게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청소년 대중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수치이다. 그리고 과거 여러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촛불집회나 대중운동의 경험을 돌아보면, 3~4만명이라는 것은 청소년들이 마음을 모아서 행동에 나설 만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른 조직화되지 않았으면서도 동조하는 청소년들이 큰 부담감 없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심리적 선을 그럭저럭 넘기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1%, 6만이라는 조직화된 인원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기획적으로 어느 정도 영향력 있는 사건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려 할 때에도 필요한 최소치를 만족시키는 숫자와 비율이다. 적어도 100명 중에 1명 정도 꼴로는 조직화되어 있어야, 두 다리나 세 다리 정도를 건너서 청소년 대중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다.


좀 더 실감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지역별 10대 인구(2012년 2월 기준) 통계를 바탕으로 1% 조직화를 했을 때의 숫자를 표로 만들어보았다. 물론 실제로 활동에 나섰을 때는 운동내외의 우연적 요소나 지역 분위기, 여건 등으로 인해 지역별 편차가 클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표에서 제시한 정도가 각 지역별 조직화의 장기적인 목표로 삼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 표를 보면 정말 서울이랑 경기도가 대한민국 지역균형 발전 면에서는 ×새끼라는 걸 절감할 수 있다.


행정구역

 10~19세 인구

10대 인구의 1% (반올림한 천단위명수)

전국

6,630,196

66,302 (6만6천명)

서울특별시

1,192,541

11,925 (1만2천명)

부산광역시

425,476

4,255 (4천명)

대구광역시

348,631

3,486 (3천명)

인천광역시

378,811

3,788 (4천명)

광주광역시

228,820

2,288 (2천명)

대전광역시

216,500

2,165 (2천명)

울산광역시

168,134

1,681 (2천명)

경기도

1,650,374

16,504 (1만7천명)

강원도

195,462

1,955 (2천명)

충청북도

208,288

2,083 (2천명)

충청남도

266,047

2,660 (3천명)

전라북도

251,965

2,520 (3천명)

전라남도

244,833

2,448 (2천명)

경상북도

325,624

3,256 (3천명)

경상남도

444,796

4,448 (4천명)

제주특별자치도

83,894

839 (1천명)



◎ 조직화 방법론 : 외곽조직, 지역․학교 거점, 매체 개발 등


그러나, 다들 실감하고 있겠지만, 6만이라는 수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 6만명이 모두 활동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소 느슨한 조직화를 내다보더라도 그렇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만 해도 지금 당장 200명 조직화도 어려워서 허덕이는데 무슨 만 단위의 조직화를 바라본단 말인가? 물론 나도 당장 짠하고 6만명이 조직화될 마법의 기술을 소개할 능력은 없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저 1% 수준의 조직화가 약간 현실화될 수 있을까 하는 가능성이라도 보일 수 있는 것은,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걸 다 하면서 온힘을 다해 뛰더라도 약 10년 정도 뒤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지금 단계에서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직화를 위한 방법론들을 몇 가지 제안해보려고 한다.


하나는 '외곽조직'이다. 외곽조직이 무엇인지는 중심에 있는 본 조직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직을 상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를 예로 들어서 생각해보자. 아수나로의 활동회원이 된다는 것은 사실 은근히 까다로운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며, 해야 하는 활동의 양도 많은 편이다. 아수나로의 주장이나 조직 내에서의 감수성을 봐도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그러므로 아수나로에 가입시키는 방식으로 수천명 수만명의 청소년 대중을 조직화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 '외곽조직'의 형태로 조직화를 꾀해볼 수 있다. 아수나로로 청소년들을 가입시켜서 조직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수나로 멤버쉽을 가지지는 않더라도 아수나로에서 하는 모임이나 사업 등에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청소년들과 지속적인 접촉을 가짐으로써 간접적인 조직화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수나로 지부가 지역에서 청소년 아카데미 사업을 한다면, 거기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아수나로 회원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카데미 참가자로서의 멤버쉽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아카데미를 통해서 정세에 따라서 청소년들에게 청소년인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청소년들은 아카데미에서 얻은 정보로 낮은 수준의 참여를 할 수 있고, 아수나로에도 자신들의 인권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아카데미를 예로 들었지만, 학교에 인권․토론 동아리 등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아수나로 회원이 학교 안에 활동의 일환으로 동아리를 꾸린다면, 그 학교 동아리는 아수나로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수나로와 접점을 가지고 교류하는 외곽조직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아수나로에서 특정한 이슈에 대해 활동을 하면서, 그 활동을 하기 위한 별도의 청소년모임 같은 것을 꾸리는 것도 일종의 외곽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밖에 다른 청소년운동 사안에 대한 동의와 상관없이,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청소년들이 그 활동을 하기 위해서 프로젝트팀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청소년들이 그 활동을 계기로 지속적으로 아수나로와 접점을 가지고 교류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도 외곽조직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외곽조직이라고 하면 뒤에 뭔가가 숨어 있을 것 같고, 뭔가 조종하고 이용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의도를 감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이러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사업이다. 여러분이 아수나로 회원이 되거나 아수나로에 가입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이 활동(아카데미, 캠프, 프로젝트팀, 동아리 등등)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걸 얻고, 아수나로는 청소년인권 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라고 대놓고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가 그 중에 청소년운동에 필이 꽂힌 사람은 아수나로에도 가입하고 청소년활동가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중조직화를 넓히기 위해서는 어떤 단체․조직에 직접 가입시키는 것 외에도 이런 외곽조직 형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외곽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면 결국 하나의 단일한 대중조직으로 청소년들을 조직화하는 방향성은 좀 약화되는 셈이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대중조직화 노선을 선택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단일한 대중조직을 꾀한다고 하더라도 중간단계로 외곽조직 방법론을 버릴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외곽조직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보다 나아가서 더 많은 조직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학교들과 지역에 거점을 설정하고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은 이러쿵저러쿵 해도 어쨌건 아직은 초중고등학교이다. 그러므로 동아리를 만들든 아니면 비공식적 소모임을 만들든 학교 안에서 가능한 경우에는 모임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학교 안에 이런 모임 조직을 하기 위해 동아리․소모임을 만들고 운영하는 노하우를 쌓고, 공유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물론 학내 조직화는 만만치 않다. 대학교처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이 좀 있는 것도 아니고, 교사들의 간섭이나 학교 측의 탄압, 학교 안에서 쓸 수 있는 자유시간의 부족 등 여러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무조건 학내 조직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조급해하기보다는, 가능한 여건의 학교에서 안정적인 모임을 만들고, 전반적인 학교 안 여건을 개선시키는 데도 힘써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지역 거점을 만드는 것도 꽤 효과적일 수 있다. 구나 동 정도의 작은 단위에서 그 지역 청소년들 수십명 정도를 모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게 되면 조직화는 확실히 현재보다 더 진전을 볼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아카데미나 캠프 등 여러 가지 방식을 실험해볼 필요가 있다. 지역에서 청소년들이 관심 있어 하는 주제나 프로그램을 가지고 청소년들을 모으고, 그 청소년들 중에 적극적인 일부와 계속 관계를 맺으며, 낮은 수위의 활동을 지역 차원에서 넓혀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지역에서 청소년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 지역에서 지역운동을 하고 있는 여러 시민단체, 풀뿌리단체 등과 협력해야 한다.


특히 최근에는 지방자치를 활성화시키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주민 대상 강좌를 열거나 사업을 하고 이른바 '마을만들기'를 하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방자치에서도 아동․청소년들은 대부분 소외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루트를 통해서 지역에서 주민들의 청소년인권에 대한 의식․감수성을 높이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은, 그 지역에서 청소년들을 조직화해내고 청소년운동을 전개할 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매체 개발이다. 청소년 대중조직화를 위해서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수만명의 청소년들을 조직화하고, 그 청소년들에게 효과적으로 접촉․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즉 정보를 전달하고 주고받기 위해서는 매체가 필요하다. 이 매체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청소년들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며, 또 지금 청소년운동을 하는 주체들이 청소년 대중에게 좀 더 폭넓게 이야기와 정보를 전달하고 선전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조직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게 되면 홍보․컨텐츠제공․참여활성화 등 조직화의 주요한 도구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매체는 인터넷을 이용한 매체일 수도 있고, 종이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형태일 수도 있다.


이 매체에서 중요한 것은 발간되고 소통되는 주기가 너무 길어서는 안 되고, 생활에 밀착해서 생활 속에서 유통되고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체는 청소년운동을 하는 주체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야 하겠지만, 많은 부분을 청소년 대중에게 열어둠으로써 단순한 선전이 아니라 쌍방향 교류가 가능해야만 더 효과적으로 청소년들의 조직화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매체를 만들고 운영할 때 가장 문제가 될 것은 역시 재정 문제일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받는 구독료 등은 최소화해야 하며, 적절한 광고나 지원 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난점이다. 언론이라거나 매체 개발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논의가 되었기 때문에 굳이 더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 맺으며 : 몸으로 부딪쳐보자!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아마,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그렇다. 이건 탁상공론이다! 여기 있는 이야기만을 가지고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를 추진할 수는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지역에 따라서, 어떤 지역에서 어떻게 사업을 시작할지, 프로그램도 필요하고, 계획과 시행착오와 경험들도 필요하다. 예컨대 서울에서 1%, 1만2천명을 조직화하려면, 구별로 약 4~500명을 조직화한단 소리다. 아무리 외곽조직과 대중적인 매체 개발 등을 활용한다고 해도 가까운 시일 내에는 택도 없는 얘기다. 또, 저렇게 지역별 학교별 거점을 만들고 조직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화를 처음 시작할 활동가 주체들 역시 필요하다. 현재 전체 청소년활동가들의 수를 다 헤아려도 300명이 채 못될 테니 곤란한 조건이다. 6만명을 조직화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못 해도 600명, 아니 1천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


뭐 기왕 탁상공론을 하는 거, 좀 더 해보도록 하자. 당장 있는 어느 정도 적극적인 청소년 활동가들의 수를 100명으로 잡아보겠다. 이 100명이 2년 동안 앞서 말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1000명을 조직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해보자. 2년 동안 100명 중에 50명은 비청소년이 되거나 여러 이유로 활동을 그만둔다. 그리고 새로 조직화된 청소년들 중 5%, 50명은 또 적극적인 활동가가 될 거라 가정해보자.(5%도 너무 크게 잡은 건 아닐까 싶다.ㅠㅠ) 그러면 이제 950명의 조직화된 덜 적극적인 청소년들과 100명의 적극적인 청소년활동가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또 …… 보다시피, 수를 늘리는 게 만만치 않다. 어쨌건 2년간 1인 평균 10명의 효율은 넘어서야 좀 더 조직화가 진척을 보일 듯하다. 좀 더 조직화 방법을 연구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노하우를 쌓고, 그리고 적극적인 청소년활동가들을 양성하고 조직하는 것부터도 시작해야 할 판이다. 일단 단기적인 1~2년 계획은 좀 느슨하더라도 조직화된 청소년 1000명, 그리고 적극적인 청소년활동가 200명 정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식의 숫자놀음은 지겹다고? 나도 지겹다. 그러니까 이제 숫자 이야기는 그만하겠다. 이런 계산을 통해서는 그저 1% 조직화라는 목표라 짧아도 10년, 길면 20~30년은 걸릴 장기적 목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을 뿐이다. 대중조직화라는 게, 이런 산술적인 방식으로 되는 건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사회 상황에 따라서 어떤 계기가 생기면 폭발적으로 조직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안 될 땐 아주 안 되기도 하는 게 대중조직화다. 조직화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여러 투쟁은 계속 진행될 것이니, 만약 투쟁의 성과로 학교 안에서 조직화하기 용이한 조건을 쟁취하게 되면 더 빠른 속도로 조직화를 늘릴 수도 있을 것이고….


뭐 일단은 5년 이내의 단기적 목표로는 조직화된 청소년 1만명이라도 넘기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조직화를 추진해가는 와중에 '대중조직'을 직접적으로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효과적일 것 같다는 때도 올 것이다. 그럴 때는 "전국청소년권리연대"라거나 "전국중고등학교학생회연합"이라거나 뭐 그런 것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것저것 방법들을 얘기해보았지만, 어느 정도 활동가들이 확보된다면 그 시점부터는 청소년의 권익을 목표로 한 청소년조합이나 연합 같은 것을 만들기로 결의하고, 그 조합의 모토와 지향과 표어를 간결하게 정하고, 그 다음에는 그 조합에 가입하라고 1년여 동안 가입서를 들고 다니며 직접 학교에서 지역에서 조합원 가입을 시키는 방식으로 대중조직화에 도전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합에 가입한 청소년들과 학교․지역 차원의 프로그램과 모임을 꾸려서 돌리고, 그러다가 5천명이라거나 1만명 등 목표한 수를 돌파하면 그 대중조직의 출범을 정식 선언하는 것이다. 대중조직화에는 그런 식으로 직접 부딪쳐 보는 게 중요하다.


약간 더 구체적으로, 대중조직화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은 대충 이정도일 것이다. ㉠ 지역 차원에서 지역․학교에 거점을 만들고 조직화하려는 노력 ㉡ 전국․중앙 차원에서 매체를 개발하고 운영하고 배포하려는 노력 ㉢ 지역별 조직화 시도들을 연계시키고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한 노력. ㉣ 전문성이 있는 집단에서 교육 등 운영할 만한 프로그램 개발 및 보급.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지부들이나 여타의 지역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존재하는 청소년운동의 주체들은, 활동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조직화 사업을 하나씩은 추가해서 시도해보자. 지역 단위여도 좋고 학내 단위여도 좋다. 아카데미 형태이든 강좌 형태이든 공간 형태이든 프로젝트팀 형태이든 동아리 형태이든 좋다. 지금까지 청소년운동에서 의식적으로 조직화 사업을 벌인 건 그리 많지 않았잖은가? 그리고 그런 조직화 노력의 기록들을 모으고 축적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보자. 좀 더 효과적인 조직화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청소년운동에서 적극적인 활동가들은 매체 개발 준비를 시작해보자. 청소년운동의 대중적 매체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보급되기만 해도 조직화나 청소년운동은 한 발 더 크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어느 정도 진전이 되면, 바로 앞에서 말한 대로 대중조직을 만들기 위해 직접 회원을 모으고 다니면서 출범을 준비하는 것도 괜찮고.


글을 쓰면 쓸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라는 목표가 얼마나 달성하기 어렵고 무거운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 숫자 하나 단어 하나를 치면서 그 무게가 점점 더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하지만 청소년운동은 이제 적극적인 소수의 청소년활동가들의 이슈파이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성과도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지역이나 이슈에 따라서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들도 적지 않게 남아 있지만,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는다면 5년 10년 후에는 청소년운동은 정말로 속수무책으로 손 쓸 수 없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제 곧 수감되어서 1년 반 동안 운동에 보탬도 못 되는 주제에, 이토록 긴 탁상공론 한 번 펼쳐본 이유는 바로 그런 위기의식 때문이다. "청소년운동 대중조직화". 이제 말로만 하지 말고, 구호로만 남겨두지도 말고, 명확한 개념으로 만들어 기획으로 구체적 수치와 행위와 목표로, 그리고 실천으로 만들어야 한다.



청소년운동대중조직화를위한탁상공론.hwp


청소년운동대중조직화를위한탁상공론.pdf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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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2.03.16 15:35


제가 공저/필자로 참여한 책이 현재까지 5권.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 ㅋㅋ - 청소년인권 이야기』 (공저)
『2008 인권선언 -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자!』 (필자)
『집은 인권이다 - 이상한 나라의 집 이야기』 (필자)
『청소년 인권 수첩 - 개인의 자유와 지구 공동체를 함께 생각하는 인권 교과서 (세상이 보이는 지식 시리즈)(3) 』 (공저)
『인권 교문을 넘다 - 학생인권쟁점탐구』 (공저)

한국성폭력상담소와 문학동네가 같이 기획했던 성교육 책은 아직도 안 나오고 있습니다 ㅠㅠ

여하간 여섯번째 책으로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 - 학생인권이 교육에 묻다』가 출간되었습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603457


이 책은 교육공동체 벗에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시행 1년여의 경험과
그밖에 학생인권조례에 관련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노력과 실험과 경험과 이론들을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학생인권조례"에 초점을 맞추고, 학생인권조례와 연관된 여러 학생인권에 대한 논의들을 펼쳐놓았습니다.
필자 중에는 교사들이 많고, 교사 아닌 활동가들 등등도 좀 있고 그런 구성이에요




아래는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인권

어느 날 인권이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뜻밖의 선물’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지, 어떻게 쓰면 좋은 것인지 잘 모른다. ‘인권이 교육을 망친다’는 보수 세력의 공격은 매서운데, 교육운동을 이끌고 있는 전교조조차 학생인권에 대해서는 미적지근하기만 하다.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된 지 1년이 지나고, 광주와 서울에서도 각각 학생인권조례가 제정, 선포된 지금 학생인권은 학교현장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학교 안에서 교육과 인권의 가치는 어떻게 충돌하고 있는가. 이 두려움과 혼란을 넘어 학생인권이 학교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책은 학생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 온 현장교사, 인권운동활동가, 연구자들이 함께 쓴 ‘학교인권 생태 보고서’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평범한 진리이다. “가장 인권적인 것이 자장 교육적이다.”

1부 - 혼란을 통한 성숙


1부에서는 서울시교육청 체벌 금지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촉발된 학생인권 논쟁과 학교 현장의 혼란을 학생들과 교사들의 목소리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학교 안으로 들어온 학생인권>은 서울시교육청 체벌 금지 조치 이후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학교의 모습을 현장교사의 눈으로 섬세하게 그려 냈다. ‘체벌 금지 이후, 학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조영선)는 ‘체벌 금지 이후 학생들의 문제 행동이 증가했다’, ‘교육을 포기하는 교사가 늘고 있다’는 세간의 의문에 대해 사례를 통해 폭력으로 학생들의 문제 행동을 은폐해 왔던 진실을 드러내 보인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시행 1년, 학교는 지금’(오혜원)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학교에서 어떤 모습으로 시행되고 있는지 추적한다. 체벌 대신 성찰 교실, 상벌점제를 통해 학생들을 징계하고 걸러내는 현실은 비교육적이라는 측면에서 학생인권조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비판하며 학생인권을 실천하는 일은 결국 학교를 배움의 공간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임을 강조한다. ‘인권의 언어, 교사의 언어’(이정희)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시행 이후 1년 동안 교사의 인권의식을 인터뷰한 글이다. 학생인권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교사조차 왜 학교현장에서 학생인권을 실천하는 일을 힘들어하는지에 대해 ‘인권의 언어’와 ‘교사의 언어’라는 개념을 빗대 설명한다. 교사들의 인권의식이 상황에 따라 이중적 양상을 보이는 것은 교사가 학생인권과 관련된 상황을 학생인권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교사로서 체험 속에서 형성된 관점에서 해석/실천하기 때문임을 이야기하며 제도의 변화만큼이나 주체들의 의식 전환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학교를 모르는’ 이들이 쓴 학교인권 생태 보고서>는 학생인권과 관련해 늘 제3자로 취급받으며 ‘현장을 모른다’는 비판을 받아 온 인권운동활동가들의 눈으로 바라본 학교인권의 현실을 담았다. ‘테두리에서 바라본 학교인권의 속살’(배경내, 한낱)은 같은 사건을 교사와 학생이 얼마나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지를 통해 학생인권의 가장 큰 적이 입시 경쟁이 아니라 교사들의 의식과 실천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절반만 뿌리내린 학생인권 이야기’(공현)는 학생인권조례 시행 이후, 교사와 학생들이 어떤 갈등을 겪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며 최소한의 신뢰와 상호작용도 없었던 비교육적인 학교의 모습을 비판한다. 더불어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여러 학교의 의미 있는 변화를 통해 지금의 혼란이 ‘체벌 금지/인권 보장 시대의 첫 모습’이 아니라 ‘체벌/인권 침해 시대의 끝물’이라며 희망을 씨앗을 이야기한다.

2부 - 교육과 인권, 그 사이


2부에서는 학교 안에서 교육과 인권의 가치가 어떻게 긴장하고, 충돌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교육과 인권, 그리고 교사의 딜레마’(최형규)는 학생인권과 만난 한 ‘평범한’ 교사가 어떤 딜레마와 변화를 겪었는지 고백한다. 교실 안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 상황 속에서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일과 교사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던 장면들을 통해 교육과 인권의 가치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학생의 탄생과 인권의 유보’(이혁규)는 근대교육과 함께 탄생한 ‘학생’이라는 존재와 한국적 문화 속에서 학생의 위치가 어떻게 규정돼 왔는지를 이야기한다. 인권이 문제시될 정도로 학생들의 현재를 유예시키며 영위해 온 학교는 이제 훈육의 공간으로서 지위를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배움의 공간으로서 학교로 재탄생하는 길밖에 없다. ‘왜 ‘학생’의 인권인가’(오동석)는 헌법에서 보장한 기본권마저 유린당하고 있는 학생인권의 실태를 고발한다. 군인, 교도소 수용자와 함께 ‘특수신분’인 학생의 인권을 왜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지, 교권이 과연 학생인권과 대립하는지, 학교 민주주의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헌법학자로서 명쾌하게 풀이해 냈다. ‘인권의 한계가 교육의 한계다’(정용주)는 학생인권이 결국 ‘범생이’들만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지 지적하며 인권의 문제는 늘 주변과 경계에 선 주체들의 문제였음을 강조한다. 학교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사고와 행위를 강제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 이상 교사는 권위가 아니라 폭력과 강제적 처벌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며 필자는 ‘인권의 한계는 곧 교육의 한계’임을 강조한다.

3부 - 인권적인 학교는 어떻게 가능한가


3부에서는 인권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한 제언을 담았다. 두려움과 혼란을 위해 학생인권이 학교에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는지 앞서 실천한 사례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가르치는’ 인권을 넘어’(한낱)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의무화된 학교 내 인권교육의 한계와 그럼에도 인권교육이 필요한 이유를 이야기한다. ‘비인권’적인 학교 문화 속에서 ‘인권’교육은 불가능하기에 인권교육이 ‘이벤트’가 아닌 일상이 될 수 있는 진짜 힘은 ‘내부’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인권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기’(임동헌)는 공교육 안에서도 가장 열악한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인권이 꽃피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기록을 담았다. ‘교육’이 아니라 ‘징벌’에 불과했던 생활지도를 생활교육으로 바꾸어 내는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를 통해 학교는 ‘사법기관’이 아니라 ‘교육기관’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다. ‘학생인권 원론 넘어서기, 질문 새롭게 하기’(이수광)는 이우학교 사례를 통해 자치와 자율이 학생들을 어떻게 학교의 주체로 성장시키는지를 이야기한다. 학생 자치와 자율을 보장하는 것은 지知정情의意체體 각 요소가 중층적으로 결합하는 전인적 성장 과정이기도 하다.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인권’(박복선)은 학생인권이 ‘교육 불가능 시대’에 ‘학교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임을 이야기한다. 모든 학생이 국가경쟁력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존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학교가 바로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우리가 꿈꾸어야 할 학교라는 것이다.

에필로그 - 세상은 1㎝씩 움직인다
: 학생인권조례가 탄생하기까지


에필로그에서는 치열했던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 뒷이야기들을 담았다. ‘학생인권조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배경내)에서는 파란만장했던 경기도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대한 생생한 르포이다. 특히 곽노현 교육감 부재와 보수 세력의 총공격이라는 악재 속에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학생인권은 왜 우리를 뜨겁게 하지 못했나’(조영선)는 이른바 ‘전교조 키드’ 교사가 바라본 참교육과 학생인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학생인권 문제에 대해 학교 현장, 특히 전교조 교사들조차 왜 그렇게 싸늘했는지에 대한 통렬한 성찰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학생인권조례는 착한 어른들의 선물이 아니다’(공현)는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 배경과 역사를 학생들의 저항과 행동과 연관 지어서 설명한다. 학생인권조례가 단지 김상곤 교육감이나 곽노현 교육감의 업적이나 착한 어른들의 선물이 아니라 학생들의 작지만 꾸준한 저항과 직접행동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사용 설명서’(이형빈)는 학생인권조례가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지에 대해 경험을 통해 이야기한다. 필자는 당장은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요란함은 무질서가 아니라 잔치라고 말한다. 그 속에서 학생들은 침묵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주체로 성장할 것이며, 교사 역시 통제 구조 속의 톱니바퀴가 아니라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어 가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학생인권조례 사용법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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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12.03.21 17:02 [ ADDR : EDIT/ DEL : REPLY ]
    • 댓글을 지금 봤네요 날 밝으면 문자 하나 드리죠... 그런데 제가 병역거부로 4월 중순-말 사이에 수감될 듯해서, 만나시거나 하시려면 더 일찍 만나야 할 겁니다

      2012.03.25 01:16 신고 [ ADDR : EDIT/ D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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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21 01:39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2.03.10 00:58

학생인권조례 없애기 나선 동아일보

[기고] ‘곽노현 흔들기’ 도구화를 멈춰라

공현(아수나로) 2012.03.09 17:50


동아일보가 연신 “학생인권조례는 무효화됐다”는 식으로 단정 짓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지난번에 초중등교육법이 개정되어 교육감의 학칙인가권이 사라진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동아일보는 <학생인권조례 사실상 효력 잃었다>라는 기사를 2월 28일 1면에 배치한 데 이어, 3월 8일자 기사에서도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학교장 권한으로 학칙을 제정 또는 개정해 두발과 복장을 규제할 수 있도록 만든 상위법을 고려하지 않고 인권조례만 설명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줄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라고 교총 측의 말을 인용 보도하며, 계속해서 학생인권조례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으로 효력을 잃었다는 주장을 유포하고 있다. 더욱 악의적인 것은, 동아일보가 기사의 전체적인 맥락이나 논조가 단지 ‘조례’가 효력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학교장이 학생인권을 학교 규칙에 따라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제한 침해할 수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는 무효화됐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해당 법률 개정에 직접 참여한 국회 교과위 소속 국회의원인 권영길 의원은, 정책 논평에서 “초중등교육법 8조가 ‘법령의 범위에서 학칙을 제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한 ‘법령’에는 지방자치 조례가 포함 되는 게 당연한 법 상식”이라고 밝혔다. 교육감의 학칙인가 절차만 없어졌을 뿐이지, 학교장이 학칙 제개정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지켜야 할 의무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와 다른 견해, 즉 “법령”에 조례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초중등교육법 8조에 따라 학교장의 학칙 제개정을 할 때 조례를 얼마만큼 준수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순전히 법리적 측면에서는, 아직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순전히 법리적’으로 접근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하게도, 초중등교육법에서 교육감의 학칙인가권이 폐지된 것이 곧 학생인권조례의 무효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육감이 학교의 학칙을 인가하는 절차가 없어짐으로 인해서 교육감이 학생인권 보장에 긍정적인 경우에 학교들의 학칙 내용을 강제할 수단이 약화되었을 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만일 교육감이 학생인권에 부정적인 경우에도 학교들의 학칙은 거기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마치 이번 초중등교육법 개정으로 인해 학생인권조례가 바로 무효화되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 동아일보야말로 ‘허위사실 유포’ 중이며 법체계를 우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무효화되려면, 해당 조례가 상위법을 위반하므로 효력을 상실한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거나, 정해진 절차를 거쳐서 조례가 폐지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전까지 여전히 학생인권조례는 교육청의, 학교의, 학교장의, 교사의, 학생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유효한 법이고 기준이다. 조례는 여전히 학교장이 지켜야 할 법들 중 하나인 것이다. 교육감의 학칙인가권 폐지를 놓고서 일부 학교장들이 “나는 조례든 법이든 다 쌩까고, 교육청에서 직접 날 징계하려 들지 않는 한은 학생인권을 침해하겠다”고 고집을 피울 생각일 수야 있겠지만, 그 행위가 학생인권조례를 위반하는 ‘불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학교장들이 학생들에게는 “규칙을 지켜라”라고 떠드는 게 얼마나 교육적인 일일지도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없어도 학생인권 보장은 학교의 의무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이러한 호도도 문제지만, 마치 “학생인권조례만 무효가 되면 학교들은 학칙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식의 동아일보의 논조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일부 학교장들의 모습은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없더라도 학생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학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과 기관들에게는 인권을 존중할 윤리적이고 당위적인 의무가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기본적 권리, 인권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자 약속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경우는 한 발 더 나아가서 그 국가의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존중.보호.실현의 의무를 지고 있다. 존중은 국가가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보호는 사람들의 인권이 타인에 의해 침해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며, 실현은 인권이 실질적인 권리로 기능할 수 있도록 자원과 조건을 제공하고 촉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일부인 공교육 시스템인 학교 역시, 유사한 의무를 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학교 교육 과정에서 체벌이나 자의적 소지품검사 등으로 학생들의 인권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존중의 의무이고, 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다른 학생에 의한 폭력.차별.괴롭힘 등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호의 의무이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교육에 참여하는 데 경제적으로나 무엇으로나 어려움을 겪는 경우에 이를 지원하고 교육활동을 장려하는 것이 실현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조례가 없어도, 헌법과 법률의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학교는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해야만 했다. 한국 정부가 비준하여 국내의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도 아동의 권리, 예컨대 동아일보 등에서 집요하게 문제제기하고 있는 “집회 결사 사상의 자유”라거나 “사생활의 자유” 등을 똑똑히 밝히고 있으며, 제28조에서는 직접적으로 “당사국은 학교 규율이 아동의 인격을 존중하고 이 협약을 준수하는 방향으로 운영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애초에,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엄격하게 상위법으로서 적용했다면 과거 체벌을 허용했던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같은 것이야말로 상위법 위반이 됐을 것이다.
국내에서도 오랜 학생인권운동의 성과로 만들어진 초중등교육법 제18조 4항에서는 학교가 헌법과 국제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학교 규칙이나 학교 운영 등에서 학생들의 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교육청, 교육부, 개별 학교들 등을 대상으로 다양한 시정권고, 정책권고를 개진해왔으며,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제25조에서 “권고를 받은 관계기관 등의 장은 그 권고사항을 존중하고 이행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에서 “국민의 권리”를 선언한 여러 조항들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러한 법적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의 인권이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학교 현장에서 징계의 위험 등을 무릅쓰고 저항하는 행동에 나서야만, 또는 지역 교육청에서 학생인권에 긍정적인 교육감들이 취임해야만 학생인권 상황이 개선되곤 했다. 그리고 지역에서는 학생인권조례를 만드는 운동을 벌이고 학생인권조례를 입법시켜야만 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 보장을 원활히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인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없어진다거나, 교육감의 학칙인가권이 사라진다고 해서, 학교가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마치 철도가 영업을 정지한다는 게 이동의 자유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곽노현 흔들기’ 도구화를 그만둬라

나는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외면하고 학생인권조례가 무효화되었다는 식으로, 그리고 학교장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기에 급급한 동아일보의 보도가 명백한 왜곡 보도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판단한다. 일부 학교들에서는 학교장이나 교사들이 동아일보의 이런 왜곡 보도를 가지고서 학생인권조례를 지킬 필요가 없다거나 학칙을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동아일보에 주장에 속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왜곡 보도를 일삼는 동아일보만 보지 말고 스스로 정보를 찾아보고 판단을 해보라고, 특히 인권에 대해 교육도 좀 받고 공부 좀 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만일 알면서도 그러는 이들이 있다면 이는 매우 기만적인 행태이고 교육자의 자질이 의심스럽다 해야 할 것이다.
요즘 동아일보의 관련 기사들을 보면, 솔직히 동아일보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을 공격하기 위해서 무작정 선정적인 기사들을 투척하거나,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vs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구도를 만들기에만 여념이 없어 보인다. 정작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나 학생인권에 관련된 법적 교육적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보도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동아일보가 학생인권 보장에 대해 조심스럽거나 부정적인 ‘소신’을 가지고 있다면, 차라리 학생인권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깊이 있는 탐사 보도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도 보탬이 되고 담론의 수준이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그러기보다는 이를 ‘곽노현 흔들기’ 도구화하는 데만 급급하다. 나도 여러 사정상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란 인물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학생인권이 곽노현이라는 인물 하나의 것인 양 엮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의 행태가 불쾌하다. 10만 서울시민들의 주민발의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서울학생인권조례, 6년동안 지역에서 소통하고 힘쓰며 만들어온 광주학생인권조례, 전국 최초로 만들어져 지난 1년여 동안 학교를 바꾸는 계기가 되어온 경기학생인권조례 등과 더불어, 수많은 학생들이 십 수년, 아니 수 십년을 요구하고 운동하며 만들어온 ‘학생인권’을, ‘인권이 꽃피는 학교’에 대한 꿈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며 왜곡하지 말기를 바란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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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라리 학생인권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깊이 있는 탐사 보도를 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도 보탬이 되고 담론의 수준이 나아질 것이다.

    2013.03.12 14:53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2.03.09 02:01

http://h21.hani.co.kr/arti/COLUMN/15/31508.html

원래 내가 붙여서 보낸 제목은 "학생회와 노동조합과 민주주의" 였는데 흠.


무엇보다도
분량 문제 때문에 많은 부분이 짤렸다.

이처럼 '자치'가 이뤄지질 않으니, '참여'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초중고 학생들이 학교 운영에 동등한 주체로서 실질적으로 참여할 길은 거의 전무하다. '노동자들의 기업 경영 참여'와 비교해보면 어떨까. 노동조합은 '단체협약' 등으로 경영에 참여할 수 있으며, 단체 행동을 통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노동계나 과거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고, 최근엔 민주통합당에서도 "노동자경영참가법"을 논한다. 비교적 사적 성격이 강한 기업에서도 이럴진대, 공교육의 장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학교 운영 참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대해 알고 참여할 권리, 민주주의의 권리는 인권이다. 예컨대 내가 사는 동네에서 지자체가 공사 하나를 하더라도 나는 그 일에 대해 알고 의견을 내고 참여할 권리가 있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렇게 생활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 학교에서부터 이러한 권리를 너무나 당연하게 박탈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권리가 있다는 것도 잊고 사는 것 아닐까? 학교의 민주주의 수준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과 직결되는 듯하다. 이럴 때는 루소의 말이 떠오른다. "국민들은 투표할 때만 주인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노예가 된다." 그런데, 아뿔싸. 청소년․학생들에게는 사실, 투표할 권리조차 제대로 없다.



대표적인 게 이 두 문단... 실린 것과 비교해보시라;

담당 기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애초에 분량 조절에 실패한 내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자분이 전화해서 "예시로 든 것 같은 걸 좀 줄이겠다"라고 했을 때는 난 학생회 탄압 사례 같은 걸 좀 줄일 줄 알았지... 저 잘린 부분은 '예시'가 아니지 않나염...

다음 호에는 짧고 간결하게 확실하게 써야겠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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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nopp1

    오 저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니였네요.. 해외에서 학생회를 하다가 한국 고등학교에와서 학생회를 하였는데 (심지어 해외에 있었을 땐 초등학교였지만) 해외에서의 학생회가 오히려 엄청나게 활동 가능 범위가 넓고 권리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학급친구들과 학생조합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우리나라에는 학생조합같은 것이 없나? 하다 검색했는데 이런 좋은 글을 찾았네요 감사합니다 ^^

    2014.12.10 20:38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2.01.30 14:23

왜 "학생인권조례"인가


2012.01.30.


많은 분들이 이 지역 저 지역에서 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 시행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학생인권조례가 시행 중인 곳은 경기도와 광주광역시, 단 두 곳뿐이다. 그나마도 경기도가 2010년 10월에 공포되어 1년여 시행됐으며, 광주의 경우는 바로 며칠 전인 2012년 1월 1일부터 시행이 시작되었다. 그럼 다른 지역은? 서울이 얼마 전 공포가 되었는데, 교과부가 법원에 이를 정지 가처분신청을 하고 시행령을 개악하는 등 태클을 걸려고 기를 쓰고 있다. 그밖에는 학생인권조례가 추진 중이거나 학생인권조례가 아닌 다른 어떤 것(교육공동체인권조례, 학교인권조례, 대구교육권리헌장 등등)을 추진하고 있거나, 아예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지역들이 대다수이다. 전국적으로 학생인권조례라는 형태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고 있거나 논란 중인 지금,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 왜 "학생", "인권", "조례"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왜 "학생"인권조례인가?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가장 많은 이야기 중에 하나가 왜 학생의 인권만 보장하는 제도를 만드냐는 것이다. 주로 교사의 인권은 그럼 없다는 거냐는 식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학부모/보호자의 인권도 보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 말에 혹해서 "교육공동체인권조례"나 "학교인권조례" 같은 형태로 조례를 만들려고 하는 지역이나 교육청․단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조례이기 때문에 가지는 의미가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그간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던 현실을 직시하고,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또는 아동/청소년)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보지 않고 미성숙하고 인간이 덜 된 존재로 보고 각종 인권을 전방위적으로 억압, 규율, 침해하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학생인권운동(또는 아동/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와 관점 속에서 탄생한 제도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에게 인권이 있다는 선언이기 때문에 학교를 교육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고, 학생인권조례는 학교 안에서 가장 권력과 권리가 없는 존재였던 학생들에게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학교 안의 지형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를 두고 교사의 인권은 그럼 없냐는 식의 이야기는 마치 장애인 인권을 보장하라고 했더니 비장애인 인권은 없냐고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추측건대 이는 학생들의 인권 보장 자체가 기존의 질서에 대해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위협적으로 느끼고, 그 느낌을 학생 인권 보장이 그 질서 안의 다른 이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학교인권조례"나 "교육공동체인권조례"로 만들겠다는 것은, 마치 겉보기에는 더 나아간 것처럼 꾸미고 있지만,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인권운동의 관점에서 제안되었고 만들어진 것을 외면하며, 학생인권 보장의 역사적 사회적 요구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도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먼저,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는 대체로 "교사, 학부모, 학생"의 소위 교육3주체의 인권을 보장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교사의 인권은 (주로 정치적 권리나 노동권 등이) 한국의 여러 법률적 문제나 교육정책 등에 의해 제한되거나 침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조례의 형태로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또한 교사에게 필요한 인권이 무엇인가, 또는 교권(이는 교사의 인권과 다른 개념임에도,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에서는 함께 다루는 경우가 있다. 교권으로서의 권리와 교사의 인권을 혼동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이 무엇이며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충분한 고민 없이 피상적으로 구색 맞추기로만 들어가기도 한다. 학부모의 인권으로 가면 더욱 모호하다. 학교에서 보장해야 하는 학부모의 인권은 정확히 무엇이며, 이를 조례로 규정하는 것은 무슨 효과가 있는가? 결국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라는 형식은 학생인권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무마시키기 위해 교사, 학부모를 동원해서 생색을 내고 있을 뿐 아닌가? 이는 오히려 교사, 학부모들이 분개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그밖에도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는 ▲ 학교구성원들 중 학교 직원(교사가 아닌 학교의 여러 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배제하기도 하고 ▲ 학생인권조례에 비해서 학생인권의 문제를 학교 안의 문제, 소위 교육3주체만의 문제로 한정시키기도 하며 ▲ 학생의 인권을 학교나 교육공동체라는 관념의 틀 때문에 제한하기도 한다. 더 조화로운 공동체/학교를 지향한다는 착각 속에서 학생인권에 대한 불충분한 보장이나 제한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학생을 대등한 인간으로 보지도 않으면서 무슨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조례이기 때문에 가지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실제 제정된 학생인권조례 내용에 일부 한계나 문제가 있더라도 학생인권조례가 그나마 환영받고 정당화되는 이유이다. 교사나 학부모의 권리 문제 그리고 학교공동체의 문제는 학생인권을 요구해온 것과는 역사도 맥락도 차원도 다른 문제이며, 별도의 연구와 운동과 제도를 통해서 만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를 추진하는 이들은 그것이 학생인권조례의 이런 의미와 이유를 축소시키고 훼손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것이 필요한 이유를 따로 정당화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서,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의 인권만을 보장하므로 문제가 있다. 아동·청소년인권조례로 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일부 있다. 청소년인권이 학생인권으로 한정되지 않고, 더 폭넓게 생각되고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의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학생인권조례가 아닌 아동·청소년인권조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교라는 공교육기관 안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에 처해있는 다수 청소년들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학교와 교육청이 그 시행을 책임지는 기관이 되는 것이고, 학생들의 인권이 침해되어온 상황, 그리고 거기에 맞서서 계속 문제제기하고 운동이 벌어져온 맥락 위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학생인권이 먼저 제기되는 이유가 있고,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으로 한정해서 다루고 보장함으로써 생기는 구체성과 장점이 분명 있는 것이다.

아동·청소년인권조례라는 것을 만든다고 했을 때, 어떤 영역 어떤 분야의 어떤 내용이 포함될 것이며 어떤 기관이 책임지고 보장하도록 할 것인지 등에 대한 연구 없이, 학생인권만 얘기하면 안 되니까 아동·청소년인권조례를 만들자고 막연하게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다. 또한 만약 아동·청소년인권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제도를 만든다고 할 경우에는 가정, 학교, 일터, 문화, 정치, 기타 각 분야를 넘나드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지방자치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조례라는 형식 역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근로기준법을 만들 때 실업자, 임금노동하지 않는 사람의 권리는 왜 얘기하지 않느냐고 하지는 않지 않는가? 학생인권뿐만 아니라 아동·청소년인권 전반을 어떻게 신장시킬지 논의하고 운동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학생인권조례가 아닌 아동·청소년인권조례를 만들자"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다.



왜 학생"인권"조례인가?


다음 문제제기는 왜 "인권"만 보장하냐는 것이다. 이에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미일 수 있는데, 하나는 "학습권"과 "인권"을 대립하는 걸로 보고 왜 "인권"만 보장하고 "학습권"은 보장하지 않느냐는 식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왜 "인권"만 명시하고 "의무"는 명시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첫 번째, "학습권"과 "인권"을 대립시키는 논리는 일단 학생인권조례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학생인권조례는 인권 중에 교육권의 구체적 실현으로서 학습권을 포함하고 있으며, 학습권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서 구체적 기준들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학습권이 부당하게 침해당했다면 이 역시 학생인권조례의 구제 절차 등을 통해 구제를 요청할 수 있으며, 학교․교육청 등은 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교육환경을 개선시킬 의무를 진다. 만일 학생이 다른 학생의 학습권을 저해하는 행동을 할 경우에는, 학생들이나 학교에서는 이를 충분히 제지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과정에서 그 학생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하며 비폭력적이고 합리적 방식으로 제지․징계․지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이다. 학습권은 다른 인권과 같이 인권의 한 내용으로 보장되는 것이고, 다른 인권에 비해서 더 우위를 가지거나 할 이유도 없다.

학습권을 입시 공부 또는 그 동안의 수업방식 유지라는 매우 한정적인 의미로 이해하거나, 또는 권리가 아닌 학생의 '의무' 비스무레한 걸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런 태클을 걸곤 한다. 마치 학생들이 원하지 않는 보충수업 등을 강제로 하지 않고 여가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거나, 또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떠들거나 수업에 흥미를 잃고 반항하는 학생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입 다물게 하고 닥치게 하는 것 정도를 학습권 보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의 학습권(제대로 된 학습권이라 하기 어렵지만!)이라면 이미 우리 사회나 학교에서는 이를 지겹도록 강조하고 집착해왔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학생들의 학습권을 비롯하여 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인권"조례가 필요한 것이며, 학습권의 의미 역시 다시 한 번 인권의 관점에서 새롭게 짜야 할 것이다.

두 번째의, 왜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의 "의무"는 권리만큼 명시하지 않느냐는 식의 비판은 인권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인권은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이며, 근대 이후 만들어진 현대 국가에서 국가의 존재 목적은 1차적으로 구성원의 인권을 보장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러 그 때문에 처벌을 받고 인권을 제한당하더라도, 이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리를 박탈한다는 식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저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인권에 있어서는 의무를 다해야 권리를 보장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에게, 공동체에게, 때로는 개인에게) 필요한 의무를 부과하는 논리가 적용된다. 즉, 인권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학생들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 일, 마음대로 제한하거나 침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때문에 학생인권조례라는 형태로 기본적인 인권의 기준을 제시하고 명시하고자 한 것이다. 반면에 지금까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자의적으로 의무를 부과하는 경우는 매우 많았다. 이러한 의무 부과 역시 학생의 인권이 먼저이고, 그 인권의 기준을 지키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민주적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학생인권조례는 그러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며, 학교 안에서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이나 지켜야 할 의무 등은, 학교마다 다른 상황과 여건과 경험들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자치적 자율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에게 의무만 강조하고 권리에 인색했던 우리 사회에 익숙해진 이들이 학생인권조례에 의무가 없다고 길길이 뛴다. (정확히는 학생의 의무(타인의 인권 존중이라거나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거나)에 관한 내용도 일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장애차별금지법은 왜 장애인들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만 보장하고 장애인들의 의무는 명시하지 않았냐고 물을 셈일까? 세계인권선언이,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이,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왜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냐고 물을 셈일까? 의무보다 인권이 먼저라는 것, 그것이 왜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지가, 그리고 학생인권조례에 왜 의무의 명시를 인권 항목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라는 식으로 요구하는지가,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왜 학생인권"조례"인가?


마지막으로 왜 학생인권"조례"여야 하냐는 비판이 있다. 이 역시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므로 "법률"로 하여 전국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례는 법적 효력이 있으므로 학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헌장 같은 선언적 내용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학생인권을 법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권의 보편성이 조례의 형태로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막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인권은 말 그대로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에 한 국가의 법률로 이를 보장하는 것도 부당한 것이고 전세계에 통용되는 뭔가로만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반대로, 각 국가와 지역에서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장려해야 할 일일 것이며, 이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와 지역을 변화시켜야 할 일일 것이다.

실제로 청소년운동은 학생인권법(학생인권의 내용을 포함시킨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만들려고 운동했던 적이 있고, 또 법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조례의 장점도 있다. 조례는 지역 사회 또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학생인권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지역 교육청과 학교 등에 더 구체적으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 오히려 법률로 선언적 내용만 들어간다면 제대로 학교 현장에 적용되지 않을 법한 내용들이 조례의 형태로 만들어지고 교육청과 지역사회를 통해 효과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인권에 관한 법률과 조례, 두 가지 다 필요하고 있으면 좋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애초에 학생인권법의 제정 필요성을 옹호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어째서 일부 언론 등에서는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하는 근거로 사용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생인권을 조례가 아닌 헌장 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솔직히 인권을 옵션 정도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소리다. 학생인권조례는, 비록 과태료 부과처럼 직접적인 처벌조항은 없지만, 조례의 형식이기 때문에 학교와 교육청 같은 행정기관에 의무를 부과할 수 있고, 학생인권옹호관과 같은 구제 기구의 설치도 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비록 형법 같은 것에 비해 강제성은 약하지만 나름대로 조례의 수준에서 학생인권을 점진적으로 개선, 실현시켜갈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헌장으로 만들게 되면 그러한 개선을 위한 제도와 장치들을 둘 수 없으며, 단순한 말의 성찬이 되어버릴 위험성이 적지 않다. 일부 기구가 추진한 헌장 등의 형태로 만들게 되면, 조례가 가지는 지역사회의 자치법규로서의 의미도 상당 부분 퇴색해버린다.



학생인권조례라는 우리 시대의 과제


그러므로 학생인권조례는 "학생" "인권" "조례"여야만 한다. 그것이 학생인권을 요구하며 운동해온 역사와 맥락에도, 학생들의 현실에도, 학교와 교육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실효성에서도 필수적이다. 학생인권조례를 학생인권조례가 아닌 다른 것으로 하려는 사람들(특히 대구의 "교육권리헌장" 같은 -_-)은 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학생인권을 반대하거나 부담스러워 하는 것인지. 학생이 인간이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지. 학생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개선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인지. 학생인권조례 이상으로 학생인권 그리고 청소년인권 보장이 이루어지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학생인권조례는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넘어서고 시행하고 정착시켜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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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을 오마이 E뉴스에 소개 했습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삭제 하겠습니다.

    2012.01.30 15:35 [ ADDR : EDIT/ DEL : REPLY ]
  2. 짜오잉

    좋은글 잘봤습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하네요.

    2012.11.01 02:3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