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09.09.12 04:08


그렇게도 애를 먹이던 오승희 11호가 나왔다. 뭔가 만들기 아주 힘들었던 11호....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09.07.26 01:48

영두의 우연한 현실 - 10점
이현 지음/사계절출판사




1. 영두의 우연한 현실은 우연하지 않다



  이현 씨의 청소년 소설 단편집 『영두의 우연한 현실』. 아니 세상에, 현실이 우연하단다. 이렇게 칼 같고 서늘하고 단단한 현실이 ‘우연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디 한 번 이 흥미로운 제목의 표제작 「영두의 우연한 현실」에 대한 것부터 이야기해보자. 소설 「영두의 우연한 현실」은 책 『영두의 우연한 현실』에서 「어떤 실연」에 이어 두 번째로 실려 있다.

  (사실 다 읽고 나서 이 배치 순서에 좀 의구심이 들었다. 「어떤 실연」은 괜찮은 내용이긴 하지만 제일 앞에 실리기엔 ‘끌림’이 좀 부족한 것 같고, 『영두의 우연한 현실』에 실린 다른 이야기들의 분위기와도 다소 이질감이 느껴진다. 혹시 소재가 비교적 무난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에 제일 앞에 넣은 건 아닐까?)



  영두의 우연한 현실은 평행우주론이랄까 다중우주론이랄까, 그런 것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평행우주론”, “다중우주론” 이런 말만 들으면 굉장히 자연과학적인 이야기일 것 같겠지만, 이 이야기는 지극히 사회적이다. 영두와 영두의 차이는, 영두 아버지의 손가락이 공장에서 프레스기를 돌리다가 손가락이 잘렸느냐 안 잘렸느냐, 하는 0.3cm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손가락이 잘린 세계에서 영두의 아버지는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해고당하고 끝내 막노동 공사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영두의 집은 빈곤층이 되고, 영두는 ‘불량아’가 된다. “영두는 인생이, 한 마디로 ‘씨팔’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잘리지 않은 세계의 영두가 ‘좀 더 넉넉한 뒷바라지’를 받고 “기억력이 비상”해서 열심히 논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인생이, 한 마디로 노란 풍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나는 손가락이 잘리지 않은 세계의 영두가 반드시 행복하다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상대적으로 손가락이 잘린 세계의 영두보다 여유 있고 나은 삶을 살지는 몰라도.)

  그러나 「영두의 우연한 현실」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이 현실이 사실은 그리 우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소설은 마치 두 영두의 차이가 0.3cm 차이, 그 ‘우연하게도’ 손가락이 잘렸냐 안 잘렸냐의 차이에서 온 것처럼 쓰고 있다. 그러나 0.3cm의 우연이 두 영두 사이를 이토록 극명하게 갈라놓은 것은 결국 이 사회의 문제이고 일종의 필연이다. 산재보험은 대체 어디로 간 건가? 고용보험이라거나 복지 정책은? 안전망이 지극히 취약한 이 사회는 그러한 작은 우연, 작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손가락이 잘리느냐 안 잘리느냐 했던 건 정말 0.3cm의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0.3cm의 우연을 이토록 영향력 있는 사건으로 만든 것은 결국 필연이 아닌가? 요컨대, 우연은 필연 위에서만 의미 있는 우연이 될 수 있다는 결론.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막바지에서 영두는 “난 우주라는 게, 엄청 대단한 건 줄만 알았어. 우리가 절대 어찌해 볼 수 없는, 높고 튼튼한 철벽 같은 거 말이야. 그런데 이제 보니까 아니네. 우주라는 거, 매트릭스처럼 그냥 우리를 둘러싼 허상인 거야. 우리는 그 허상에 내몰려서 살아가고 있는 거지. 너와 나의 현실이라는 것도 그래. 우린 그게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 보려고, 혹은 거기서 벗어나 보려고 아득바득…… 웃기는 일이야.”라고 말한다. 그래, 우주-현실의 단단함을 의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새로운 상상력을 주니까. 주어진 조건 속에 갇혀서 생각하지 않고 조건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새로운 삶을 열어주니까. 하지만 우주-현실이 단단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다중의 우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편의점 뒷문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이 우주-현실 속을 ‘아득바득’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연은 필연 위에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영두의 우연한 현실」에서 아쉬운 것은 그것뿐이다. 우주-현실이 단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영두가, 다시 단단한 자신의 우주-현실의 안으로 자신을 던지는 과정까지는 미처 그리지 못한 것.




2. '오답 승리의 희망'은 진행형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오답 승리의 희망」은 사실 내가 이 책을 얻게 된 이유이자 읽게 된 이유이다. 실제의 오답 승리의 희망 편집진 중 한 명으로서, 오답 승리의 희망을 소재이자 제목으로 삼고 있는 소설을 어찌 안 읽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사계절 출판사에서 공짜로 주기까지 했는데… (사실 이름에 대해서 저작권료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있긴 했지만 이현 씨가 1만원 후원을 해주시기도 했고 책도 2권 공짜로 얻었고 책 덕에 홍보도 많이 됐고 해서 그냥 서로 윈윈이다.)


  읽으면서 사실 좀 짠했다. 전단지 하나 돌리고 붙이는 게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심호흡을 해가며 혹시 지문이라도 채취할까봐 장갑까지 끼고서 몰래몰래 하는 일이어야 했던 그 고등학교 때. 그랬는데도 이미 찍혀있던 나는 학생부실로 불려가서 태연자약한 얼굴을 연기하며 누가 한 건지 모른다고, 우와 이런 것도 뿌렸군요, 하는 쇼를 해야 했지. 비록 나는 같이 못했지만, 2006년 3월, 오승희 창간호를 학교 안에 돌리던 나르샤-전북청인모 사람들의 심정도 「오답 승리의 희망」에 나오는 이오구나 곽정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아, 이오구는 좀 심하게 사차원 캐릭터라서 약간…) 물론 지금도 학교들의 상황이 그리 다른 건 아니다.

  「오답 승리의 희망」은, ‘청소년자유언론 오답 승리의 희망’이라는 소재에 2008년을 수놓았던 촛불집회(그리고, ‘촛불소녀’.)라는 배경을 덧붙이면서 새로운 결을 가지고 태어난 이야기다. 이현 씨는 “어느 보수적인(반인권적인) 고등학교 안에서 오답 승리의 희망이 배포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충실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며, 좌절했던 ‘촛불소녀’ 곽정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간다. 그 과정에서 학교 안에서 언론·표현의 자유, 소지품 검사 문제, 강제야자, 입시경쟁, 체벌 등등 온갖 학생인권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스케치된다. 이야기의 마무리를 가벼운 위트로 끝맺는 그 여유와 솜씨에는, 정말 이현 씨도 숙련된 이야기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오답 승리의 희망」에는 다소 위험한 오류가 있다. 2008년의 촛불이 과연 ‘청소년인권’과 연결이 되었을까? “전에 다니던 학교는 소지품검사 거부운동도 하고, 두발자유화 서명운동도 하고 그랬어. 쉬는 시간이면 마우스를 복도에서 질질 끌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면, 알 만하지?”라는 이오구의 대사를 보면 청소년인권에 대한 의식과 2008년 촛불-반이명박의 의식이 연속선상에서 자연스레 배치되고 있다. 오답 승리의 희망과 촛불집회 참가를 자연스레 연결 짓는 것도 그렇다.

  그전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을 해온 사람들은 분명히 2008년 촛불집회에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촛불집회에 참가하면서 ‘운동’을 시작하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참여의식을 가지게 된 청소년들(말하자면, ‘촛불소녀’든 ‘촛불청소년’이든) 중 대부분은 오히려 학교에서는 조용히 지내는 경우가 많다. “쉬는 시간이면 마우스를 복도에서 질질 끌고 다니는” 분위기와 “두발자유화 서명운동”을 하고 “소지품검사 거부운동”을 하는 분위기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고 연속선상에 있지 않았다. ‘민주주의’, ‘반MB’, ‘광우병소고기’, ‘국민주권’, ‘굴욕-졸속협상’을 외치던 목소리들은 청소년인권에 대한 이야기로도, 학교 현장에서의 투쟁으로도 잘 이어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이건 청소년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 답을 찾고 있는 질문이다. (나는 청소년인권운동의 역량과 조직이 매우 부족한 탓도 있지만, 거시적인 투쟁, 지사적인 투쟁이 가지는 한계, 그리고 2008년 촛불이 내재하고 있던 한계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현 씨가 이 둘을 너무 쉽게 연관지은 것은, 뭐 이현 씨 자신의 소망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촛불에 나온 청소년들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십대들-‘촛불세대’들을 포장하기 바빴던 어른들의 시선이 답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촛불의 경험으로 ‘깨어있는’ 청소년들은 한층 늘었고 이 청소년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인권 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할 거라는… 촛불집회에서 보인 청소년들의 모습은 사회에 적극적·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었다는 데서 오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 “촛불소녀” “촛불세대” 등의 담론에서 과잉된 청소년에 대한 대책 없는 이미지가 좀 느껴졌다고 하면 나의 과민함인가?



  어찌 되었건 「오답 승리의 희망」에서 아직 오답은 승리하지 않았다. 앞으로 곽정과 이오구가 만들어갈 투쟁이 어떤 투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투쟁이 현재진행형임은 확실하다. 곽정이든 이오구든 오승희에 글 좀 투고해주거나 편집진으로 좀 참여해주면 좋겠다.




3.  그밖에, 자세히 다루지 못한 다른 4편에 대해

- 「빨간 신호등」은 청소년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내용 중 하나. 좀 강간-섹스 후에 곧장 제주도로 가서 며칠 간 못 만나고 돌아와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설정이 약간 작위적인 면이 있다. 남성 청소년의 시선에서 이 사건을 그린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정치적인 의미랄까 계몽적인 의미랄까, 그런 면에서는 좋지만 이야기상으로는 그렇게 끌리지는 않는다.

- 「로스웰주의보」는 내 마음에 드는 단편이다. 이런 식의 서술 방식도 좋아하고, 이런 식의 상상력도 좋아한다. 식상한 맛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이런 식의 상상력-설정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게 전혀 자연스럽지 않고 매우 이상한 모습이라는 문제제기에는 좋지만 현실을 약간 은폐하거나 왜곡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이따위로 살아야 하는 건 사실 외계에서 날아온 ‘푸라푸라’ 때문은 아니다.

- 「어떤 실연」. 『우리들의 스캔들』 때도 느꼈지만 이현 씨는 여성 청소년들의 1인칭 시점에서 재미있는 문장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어떤 실연」도 좀 그렇다. 평범한 청소년들의 평범한 갈등과 평범한 사랑과 평범한 실연 이야기… 라고만 말할 순 없지만 뭐 대략 그렇다. 다른 이야기들과 비교하면 좀 밋밋한 맛이 없지 않아 있다.

- 「그가 남긴 것」은 장례식을 소재로 해서 그런가 이청준의 『축제』를 연상시키긴 했지만 맥락은 많이 다르다. 이현 씨 본인의 세대 때문인가, IMF 이후 가족의 모습과 관계라는 것이 이현 씨 소설에서 좀 빈번하게 나오는 모티브 같다. “다음에는 아빠하고 딸 말고 다른 사이로 태어나자, 응? 뭐든 좋으니까, 미워하지 않는, 그런 사이로 태어나자, 응? 친구라도 좋고 연인이라도 좋고……. 아니, 그래. 우리 남으로 태어나. 그냥 지하철에서 우연히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 그런 사이로 태어나. 그러면 나, 아빠 미워하지 않을 거 아니야, 그치?”하는 부분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9.04.09 15:06
오답 승리의 희망 10호에 편집진 부분에 쓴 글.






[커져버린스토리] 방학이 방학다워야 방학이지!



  ‘개학’을 이야기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방학’이다. 방학 없인 개학이 있을 수 없고 개학 없인 방학이 있을 수 없으니, 오호 돌고 도는 음양의 원리(??)로구나!
  그런데 한국이 아닌 외국에도 방학이 있을까? 아마 있겠지? 그런데 그 방학은 한국의 방학이랑 같은 방식일까? 이런 궁금증에 영국 아이들의 일반적이고 평온한 학교 생활을 묘사한 유명서적인 『해리 포터』를 들춰보니까 영국의 학교들은 이렇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아주 긴 여름방학과, 2주 정도 되는 크리스마스 방학. 아하 영국은 여름방학이 길고 겨울방학이 짧구나-_- 이게 문제가 아니라, 아무래도 방학의 형태는 다르지만 방학 제도는 학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있는 것 같다는 게 요지다.
  방학은 세계적으로 학교가 있다면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인 제도일 거다, 아마. 왜 그럴까? 어쩌면 ‘방학’이라는 게 그냥 여름이랑 겨울에 너무 덥고 추워서 수업하기 힘드니까 학교 나오지 말아라, 하는 게 아니고 교육적으로 상당히 의미 있는 제도일지도 모른다. 안 그러면 일 년 내내 적당히 쾌적한 날씨이거나 날씨가 비슷한 지역에선 방학 없이 365일 수업만 하게?

  이렇게 질러놓고 보니 “방학의 교육적 효과” 같은 논문이라도 대령해야 할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찾지 못했다. 교사들이 방학 중에 연수도 받고 연구도 하고 수업 준비도 하고 평가 업무도 하면서 많은 일을 하기에 방학 기간이 필요하다는 글은 찾을 수 있었지만, 교사들 이야기는 「우리교육」이나 「교육희망」이나 「교육신문」 같은 뭐 그런데서 다룰 테니까 굳이 오승희에서 그 이야길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냥 교사들도 방학이 필요하구나, 방학 때 하는 일 없이 월급만 받는 건 아니구나, 정도만 머릿속에 넣어두자.


쉴 권리, 놀 권리!

  쉬고 노는 것은 중요한 인간의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에는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나와 있고, 유엔아동권리협약에도 “휴식과 여가를 즐기고” “적함한 놀이와 오락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청소년인권단체가 발표한 2008청소년인권선언에도 “방학, 휴가, 공휴일이나 쉬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야”(하며 “청소년에게는 놀 권리”가 있다고 써있다.
  따라서 충분한 휴식 시간이자 여가 시간으로서 방학은 보장되어야 한다. 입시경쟁이라는 괴물이 탐욕스레 입을 벌리고 방학기간 중에도 보충수업과 사교육에 찌들어 살라고 외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봉사시간 뭐 그런 규정들은 방학 중에도 강제적인 자원봉사 노동(‘강제자율학습’과 비슷하게 들리는?)으로 청소년들을 내몬다. 방학이 방학다워야 방학이지, 이건 뭐….
  방학이 방학다워야 하긴 하는데, 또 한편으로, 그것도 과연 바람직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애들이 공부 빡세게 오랫동안 한다면서 미국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는데, 오바 하지 마시라. 미국 청소년들 다 잡을 셈인가. 한국이 OECD 국가 중에 평균노동시간과 공부시간이 가장 긴 편에 속한다. 만약 방학이 방학다워진다고 해도, 학기 중에는 이렇게 빡세게 입시지옥 속을 구르다가 방학 중에는 쉰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지 않나.
  그러니까, 좀 일상적으로 쉴 권리 놀 권리가 보장되면 좋겠다는 거다. 반강제적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하고 강제로든 자발적으로든(?) 입시공부와 취업준비에 매진할 것을 강요당하는 학교. 그 속에선 동아리든 취미 활동이든 정치 활동이든 입시경쟁과 좀 거리가 있는 걸 하려면 적잖은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누군가가 홀로 그런 체제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낙오자’나 ‘날라리’라는 낙인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방학을 방학답게 만드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쉬고 싶을 땐 봐가면서 쉬엄쉬엄 할 수 있는 교육. 아침7시부터 밤10시까지 잡혀있지 않아도 되는 학교. 강제로 봉사시간을 채우려고 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 방학에도 쉬고 방학 아닐 때도 여가가 있는 그런 삶….


방학의 ‘교육적’ 의미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방학이 그냥 쉬는 기간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교육과 학교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학교를 쉬는 것 = 교육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학교는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방학’ 때 학교를 안 나간다고 해서 교육을 않는 것은 아니다.
  이반 일리히 같은 삐딱한 학자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학교 밖에서 배우는 게 더 많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게 대부분 교사나 학교로부터 배운 거라는 생각은 환상이며, 잘 보면 학교 정규교육과정 외에 다양한 경험들이나 다른 경로로 배우는 게 더 많다는 것이다. 교육이 학교(또는 학원 등)라는 ‘제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단 것은 일종의 우상 숭배다. 심지어 학교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바보가 된다는 주장도 있다.(『학교 없는 사회』(이반 일리히), 『바보만들기』(존 테일러 게토) 등을 참고하시라.)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방학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고 학교를 다니는 학기는 훼이크라고. 학기 수업이 완전 훼이크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학교를 다니지 않는 방학 기간 또한 굉장히 유의미한 교육 과정일 수 있다는 정도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학교는 사회로부터 청소년들을 격리시킨다. 학교에서도 물론 또래들/교사들과 부대끼면서 사회 생활을 익혀나가긴 하지만, 그래도 협소한 학교 교육과정은 실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하고 풍부한 지식과 경험들을 주지 못한다. 심지어 학교에서 주는 지식들은 ‘죽은 지식’들인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방학이라는 기간 동안 학교가 제공하지 못하는 다양한 경험과 체험들을 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건 캠프 같은 형태일 수도 있고, 다른 활동일 수도 있다. 그냥 친구들이랑 뛰어노는 것일 수도 있다.학교에서 받는 것만 교육이라는 생각을 벗어나보자.

  그러나 이런 방학의 의미가 실현되는 일은 멀게만 보인다. 우리는 방학 중에도 입시교육에 찌들어 살기 십상이고, 청소년들에게 적절하고 저렴한 놀이 문화나 대안적인 교육 컨텐츠들은 부족하기만 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한 번 외쳐본다. “방학이 방학다워야 방학이지!!!”





방학이 싫고 개학이 좋을 수도 있다!
  이번 커져버린스토리에서는 대부분 청소년들이 방학을 좋아하고 개학을 싫어한다는 느낌으로 글을 쓰게 됐지만, 방학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방학 때 연락해서 만날 것이지 방학 때는 잘 안 만나다가 “개학하면 친구들 보니까 좋아요.”라고 하는 성격 파탄자들은 제껴두더라도 말이다.
  우선 대한민국의 허술한 복지제도 때문에 원치 않게 기아체험을 하고 있는 결식 청소년 분들이 있다. 이 분들은 학교 급식 외에는 안정적으로 끼니를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방학을 좋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좀 제대로 식사권, 생존권을 보장해라!
  그리고 좀 특이한 케이스인데, 학교에서 학생들이 원치 않는 방학을 강행하는 경우도 있다. 1989년에 중고등학생들이 한창 학교민주화, 전교조 교사 복직 등을 요구하며 시위하고 학교 점거하고 했을 때는 학교들이 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일찌감치 강제로 방학을 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연히 학생들은 이런 방학에 반발했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7.11 23:00


그냥 문자 그대로 오승희 5호 7호 pdf 파일;
꽤 옛날 거네.. 싶지만
실제로는 몇 개월 안 되었다 -_-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7.05 02:22
오답 승리의 희망(오승희) 8호에 실을 글







투덜리즘 : 명박이 치하의 꿈높현시


  청소년들은 아프다. 명박이 정부는 청소년의 삶을 학대하고 있다. 아니다. 명박 이전부터 청소년 학대는 벌어져왔다. 다들 모른 체하고 있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4.15학교자율화’ 조치가 어쩌구 떠들지만 이미 ‘수준별 이동수업’이라는 과목별 ‘우열반’, 0교시, 보충수업, 강제종교수업 등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언어영역 쉽게 내서 1교시 끝나고 자살하는 일 없게 한 거 말고는 한 게 없었다.
  입시경쟁으로 많은 청소년들이 자살할 동안에, 많은 학교에서 버젓이 강제야자와 강제보충수업이 시행되는 동안에, 정답과 경쟁을 강요하는 교육이 계속되는 동안에, ‘노간지’(놈현)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그래, 어쩌면 교육/청소년인권문제에서는 노무현도 X놈이었을 뿐이었다. 쥐박이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쥐보다는 좋았다고 칭찬 듣는 게 기뻐할 일은 아닐 듯싶다.
  한 교사는 4.15학교자율화 조치를 비판하며 없애버린 규제들 대부분이 ‘전봇대’(명박이가 쓸데없는 규제에 붙인 은유)가 아닌 ‘신호등’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4.15학교자율화 등등 때문에 학교들이 더 학생들을 막 다룰 수 있게 된 것도, 전반적으로 경쟁이 더 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학교자율화’는 ‘학생타율화’요 ‘학생노예화’였다. 그러나 어쨌건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신호등’이 고장 난 신호등이었다는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적어도 그 규제들은, 청소년들의 인권을 보장해주는 데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더구나 이 도로 시스템의 치명적인 문제들은 신호등 몇 개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는 지난 정권을 욕하고 있을 시간조차 별로 없다. 우리는 돌팔이 명박이 시대에 대처해야 한다. 지금까진 삽으로 조금씩 사람들을 입시경쟁 속에 파묻어가더니, 이젠 불도저로 그대로 밀어버리려고 하는 꼴이다. 4.15학교자율화를 하고, 본고사를 허용하고, 중고등학교도 서열화시키고, 기타 등.등.등.

  그리하여, 기어코, 가설라무네, 불도저에 밟히는 게 조낸 아팠던 청소년들이 꿈틀하기에 이르렀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가 급식에 올라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안 그래도 불만이 높았던 청소년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그런데 글쎄, 이 무식한 것들이 더 때리고 밟으려고만 든다. 집회신고했다고 경찰이 학교로 찾아왔고 교육청들이 장학사 대군을 동원했다. 경기상고 교사는 학생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의견을 말했더니 절대폭력권을 발동하여 그 학생을 쥐어 패버렸다.
  게다가 정부는 학생노예화 정책에 대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학교자율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사람들의 촛불을, 행동을 그저 ‘광우병&미국산쇠고기’에 관한 이야기로만 한정지으면서 말이다.(재협상도 안 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은 무시당해서, 경쟁당해서, 학대당해서 아프고, 맞아서 아프다. 그러나 아프면 아플수록, 죽기 전까지는 더 꿈틀대고 더 비명을 지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비명소리는 이렇게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다.
“학교자율화는 학생노예화! 집어쳐!”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하라!”
“광우병급식&식품 명박이나 처먹어!”


  지금의 상황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꿈높현시다. 꿈높현시는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영화 『8마일』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저번 호의 ‘지못미’에 이어 2탄은 ‘꿈높현시’다.
  왜 지금 상황이 꿈높현시냐 하면, 예를 들어, 작년까지만 해도 입시폐지와 대학평준화를 적극적으로 말해보려 했던 사람들도 명박이 때문에 ‘4.15학교자율화’ 막기에도 급급해졌다는 것이다.(지금도 말하고 있지만 묻히고 있다.)
  또한 급식운영에 민주적 참여, 생태적인 식량 생산과 직거래 시스템 등등을 꿈꾸고 있지만, 현실은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되는 거 막기도 막막하다는 것이다.
  또또한 정당가입, 선거운동, 표현의 자유, 학생회, 대의제와 선거연령 등등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는 온갖 것들을 없앨 것을 꿈꾸고 있지만, 집회장에서 장학사들 쫓아내기도 바쁘다는 것이다.
  게다가 예를 들면, 나는 ‘4.15학교자율화’는 욕하고 명박이를 싫어하지만 “입시폐지”를 쓴 피켓이나 낙서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상당수의 사람들을 촛불집회 현장에서 만나보았다. 따라서 지금의 촛불은, 그다지 꿈높현시를 극복시켜줄 것 같진 않다.

  정녕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하긴 현실이 시궁창인 건, 쥐가 대통령으로 뽑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이 시궁창인 현실에서 좀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쥐박이부터 퇴치할 수밖에. 끈질기게, 우리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6.06 04:30
문자 그대로 호외.
딱 2면으로 작성된- 일종의 긴급 찌라시랄까 --;;
내용은 대충 이명박은 그만 GG쳐라, 라는 거랑 약간의 선동 같은 것.


이런 것도 들어가 있다 ㅎㅎ



촛불용사 시민들
(원곡 : 지구용사 선가드 한국 주제가)

쥐박이 귀 뚫으러 가고 싶어도
닭장차 가로막은 광화문 광장
미친협상 대운하 학교자율화
국민 의견 쌩까는 독재의 세계

우지쾅쾅 살수차
백골단에 경찰특공대
암흑대왕 쥐박이어스

평화를 파괴하는 독재 사기꾼
나가자 행진하자 정의는 이긴다

비폭력 비폭력 촛불용사 시민들




사용된 글씨체는  한겨레결체, MD이솝,  고딩L, 은방울체였나...



자세한 내용은 다운 받아서 보시라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4.02 18:40
오답승리의 희망 7호 거의 편집 끝난 파일.

한겨레결체
굴림
맑은고딕
HY나무M
피아노M
고딩L
산돌광수B

(저 글씨체 파일들이 없으면 제대로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1.11 13:55
2005년 12월달에 만들었던 전단지.





여러분의 불온한 꿈들을 받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인 김수영은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하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의 불온은 정치적 불온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온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있습니까?



에서 여러분의 삶과 꿈들을 받습니다.

 「 ① 검열 없는 신문 ② 기사 없는 신문 ③ 주체 없는 신문을 지향합니다. 검열이 없음은 우리의 꿈이 언론자유이기 때문이고, 기사가 없음은 지면 대부분을 의견이나 독자 투고/기고 등으로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주체가 없다는 것은 언론자유를 위해 발간자를 숨긴다는 의미인 동시에 신문 대부분을 여러분의 글로 채운다는 의미이며 편집부 의견과 다르더라도 글을 싣는다는 의미입니다.


 살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들,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 또는 생각한 것들을 자유롭게 적은 수필이나 그냥 사는 이야기도 좋습니다.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노래나 책, 영화 등을 소개하는 글도 좋습니다.

 세태나 시사적인 문제에 관한 칼럼이나 논설도 좋습니다.

 삶에 대한 성찰이나 기발한 상상력이 담긴 도 좋습니다.

 긴 게 귀찮으시다면,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을 한두 줄로 쓴 투덜거림, 외침, 고백 같은 것들도 좋습니다.


 글의 분량은 일반 글의 경우 원고지 400자~3000자이고, 한두 줄 코너의 경우 원고지 100자~200자 내외의 한두 문장입니다. 맞춤법 등 정서법을 편집부나 독자가 읽기 너무 껄끄럽지 않을 정도로는 지켜주시면 감사하겠으며(의도적 일탈 허용 가능) 맞춤법이 틀린 경우 그에 한해 교정을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타인의 명예를 훼손(이에 대한 판단은 관련법 및 판례를 참고하여 이루어짐.)하거나 부당한 인신공격을 가하는 글은 실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개성적인 글, 삶이 담겨있는 글, 재밌는 글, 읽을 가치가 있는 글 등을 기대합니다.


 원고를 내는 방법은 http://cantabile.mireene.com/에 글을 올려주시거나, 1학년의 ***(1반, 010-****-****), 2학년의 ***(6반, 011-****-****), ***(11반, 010-***-****), ***(12반, 011-***-****)에게 원고를 주시면 됩니다. 낼 때 그것을 익명으로 실을지 기명으로 실을지 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1.11 13:48
역시 오답 승리의 희망 초기 기획(2005년말~2006년초) 때 나온 글.
나르샤(그때는 전북청소년인권모임(청인모)였지만) 안에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결국 1호부터 8면으로 발행하게 되었고, A4가 아닌 타블로이드판으로 찍게 되었지만...
이름은 이때 직후에 "오답 승리의 희망"으로 정해졌었던 거 같다.



1. 추정 예산 : 15만원 이하(9만원은 저번 학교 폭력 토론회 참가하고 받은 돈. 나머지는 기부로 충당.)


2. 부수 : 100부 이상 200부 이하


3. 종이 : A4 재생지 사용


4. 내는 시기 : 창간호는 내년 학기 초에 낸다. 그 다음호부터는 1년에 두 번, 매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하기 전에 낸다.


5. 제호(題號) : 오답 승리의 희망, 창틀에 걸린 꿈들(…), 바람에 손을 내밀다(…), 바람 부는 창틀(이건 뭐냐.) 등이 후보다.


6. 삼무(三無) 원칙 : ① 검열 없는 신문  ③ 기사 없는 신문 ② 발간주체 없는 신문(검열을 피하고 기자가 없다는 점에서)


7. 받는 글의 조건

① 분량 - 원고지로 400자 이상 3000자 이하 또는 원고지 100자 이내의 한두 문장.(코너에 따라 다르다.)

② 맞춤법을 편집부나 독자가 껄끄럽지 않을 정도로는 지킬 것. 의도된 일탈의 경우 허용 가능.

③ 글의 종류는 논설, 수필, 시 등이 가능. 소설은 지면 문제로 아직 받을 계획 없음.

④ 개성적이거나 재미있거나 의미 있거나, 여하간 최소한의 읽는 맛이 있을 것.


8. 글 수집 방식

 ㄱ군이 운영하는 〈오답 승리의 희망 cantabile.mireene.com〉 홈페이지에 게시판을 개설해서 받고, 각 학년마다 두 명이나 세 명의 인원을 노출시켜 글 수집을 맡긴다. 글은 익명으로 할지 기명으로 할지 원고를 낼 때 표시하게 한다. 출간하기 2주일 전까지는 수집을 완료한다.


9. 편집부가 하는 일 : 원고를 받아서 어떤 것을 실을 것인지,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를 정하며 맞춤법 교정을 본다.


10. 지면 구성

  지면은 4면 구성을 기본으로 한다. 1면에는 편집부의 말과 목차, 그리고 편집부 측에서 쓴 논설(사설이라고 할까.)을 싣는다. 2면부터 4면까지는 학생들의 글을 싣는다. 4면 나머지 부분에 편집부의 추천 도서나 읽을 만한 시 등을 싣는다. 글자는 읽기 쉬운 크기로.


11. 내용 구성

 코너는 <살다보면>(수필이나 재미있는 이야기 등으로 구성) <촌철살인?>(학교, 또는 시사적 이슈에 대한 논설) <한두 줄로 말하기>(문자 그대로 짧게, 학우들이나 교사 등에게 하고 싶은 말) 등으로 구성한다. (이름은 바꿀 수 있으며, 추가할 코너가 있으면 마음대로 할 것.)


12. 꿈

8면으로의 증면. 궁극적으로 다른 학교 학생들의 글까지 받아서 전북권으로 배달하는 신문을 지향한다…?


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08.01.11 13:44
(2006년 1월에 쓴, 오답 승리의 희망 창간호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의 글입니다.)




오답 승리의 희망이란 이름은 뭐 바라나기 군이 지은 거고...
어찌어찌하다보니 엠덴의 오답 승리의 희망 홈페이지에 오답 승리의 희망 신문이 얹히게 되었군요.




//


지하신문을 구상한 사람으로서 대략 끄적여봅니다. 이건 창간사 아닙니다.







왜 지하신문인가?


  처음에 하고 싶은 것은 게시판 만들기였습니다. 대학교에 대자보 게시판이 있듯이...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기 글이나 구호 같은 걸 갖다 붙일 수 있는 게시판을 원했습니다. 아마 그 안을 입안했던 게 작년(2005년)초였던 것 같은데, 학생회에 건의를 넣어도 미적미적 의지가 없고 등등의 이유로 제대로 되질 않던 차였죠.
 그러던 게 우여곡절 끝에 신문의 형태까지 왔군요. 뭐 그 과정에는 교내 학생 자치 신문이 교감의 압력을 받은 사건 등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옛날부터 "신문이 나오면 어떨까?" 같은 생각을 했지만 금전상 이유 같은 걸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뭐, 이러쿵저러쿵해서 결국 내게 된 거죠.
그렇다고 게시판 건을 포기한 건 아닙니다만.


 제가 "기사 없는 지하신문"을 생각한 건, 두 가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는 좀 떠들어보고 싶은데 공적으로 떠들 창구, 광장이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는 현재 학교에서 언론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실에 앉아서 떠든 투덜거림은 쉬는시간 끝나는 종이 띠리리리링(곡명 : 소녀의 기도) 침과 동시에 그냥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ㅅㅂㅅㅂ 거려도 찌질이 짓 이상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적인 영역의 비판, 비난, 뭐 그런 것들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릴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게시판이었고, 지금은 기사 없는 신문입니다. 곧, 학생들의 생각, 삶, 그런 것들을 모두 받아서 실어보고 싶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학교나 현실 욕한 것만 싣고 싶지만 그건 너무 "노려보는 눈동자"가 될 테고 또 재미도 없을 것이며 공정함의 부분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비판적인 글, 살면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들, 하고 싶은 말, 뭐 그런 것들을 다 받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의식이 바로 왜 이 신문이 당당하게 지하신문을 표방하는지에 관한 답입니다. 소로우를 모방하자면 "언론을 부당하게 탄압하는 사회에서 정의로운 언론이 있을 곳은 역시 비합법적 지하다." 글을 익명으로 실을 수 있도록 하자고 한 것도 그때문입니다.



오답 승리를 꿈꾸며

  정명(正名) 사상이라는 게 있습니다. 공자라는 노회하신 짱구님이 말씀하신 건데요. 사람은 자기 이름에 맞춰 살아야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소리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작명소 가서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중략)... 청소년은 청소년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학생다운 건 뭘까요? 중고등학생의 경우는, 공식적으로는 술담배 안 하고 게임 내지 컴퓨터는 적당히(즉, 대략 일주일에 한 시간 쯤?)하고 22시까지는 기본으로 학원, 학교, 독서실, 집 등에 처박혀서 공부하는 겁니다. 여기서 공부는 수능 공부일 수도 있고 자격증 따는 걸 수도 있고 실기 공부일 수도 있죠. 가끔 어떤 분들은 학습 명목으로 파견근로도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글쎄요 여하간 반항 안 하고 노예 도덕(참고도서 : 도덕교육의 파시즘(김상봉 지음)) 배워가면서 인생을 유예하는 행동양식이죠, 학생다움은. 그리고 그래놓고 나중에 밤 새며 시험 공부한 거, 선생님들한테 맞은 거, 선배들한테 기합 당한 거, 시험 죽 쑨 거, 그런 것들을 추억이라고 간직하죠. 물론 이건 공식적인 이야기고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술이라거나 오락실, 영화, 적당한 음란물 시청 등은 허용되고 있고, 또 그게 또 다른 의미에서 학생다움이 되고는 있습니다만. 여하간 그것도 공부하기 위한 재충전 시간으로서의 놀이로밖에 인정 못 받는 거 아닙니까? 청소년다운 것도 비슷하죠. 어른이 틀린 소리 해도 어른 앞에서는 자존심이고 양심이고 다 굽히고 말대꾸하지 말고 '예의' 지키고 말입니다. 청소년은 미성숙하니까 알바 임금도 제대로 못 받는 게 당연하구요. 18세 선거권도 없죠. 나머지는 학생다움과 대동소이.
  이게 이 사회가 '정답'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생활은 어떤가요? 우리들의 행복은, 욕망은 어떤가요?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꿈틀거림.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이미 벗어나 있는 우리들. 그들의 등 뒤에서 그들을 욕하고 술담배 가끔 빠는 분도 있고. 불온한 책이나 만화책을 읽어대죠. 불온한 노래를 듣죠. 우리들의 생활 자체가 '오답'인 경우가 얼마나 많나요? 또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거품처럼 보글보글 끓고 있는 그 수많은 반감들. 정답에 대한 부정들. 자유!
그래서 오답 승리입니다. 정명에 대항하는 오답입니다. 그리고 희망입니다.

 이 오답승리의 희망을 통해 "우리도 말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오승희라는 매체의 메시지는 언론 자유 그 자체입니다.
 우리에게도 생활이 있다. 우리도 답답하면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 우리도 불만이 있다. 우리도 비판할 수 있다. 우리도 생각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입이 있고 글을 쓸 손이 있다!
 사설이나 편집부 코너 등을 통해서 은근히 이런 메시지를 포함해서 편집부의 사상을 전파할 생각이기도 합니다. -_-


  이미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학생회를 법제화해도, 두발자유를 외쳐도, 언론 자유를 외쳐도, 이 사회의 학생들에게는, 학교에는, 뿌리깊게 냉소적 좌절감이 박혀있는지도 모릅니다. 무력한 순응주의가 뿌리내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해봐야 하는 겁니다. "우리도 말할 수 있다!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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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승희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물론 이 신문과는 전혀 관계 없죠. 우연히 이름이 같을 뿐. 바라나기 군의 말대로 사죄를 드려야 할는지...
 여하간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되어 오승희 님의 시 중 한 편을 올려봅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

야송/오승희

그대여,
희망을 갖게나
하늘에 소망을 두고
과거에 집착하면
앞을 보지 못한다네

눈물은 흘리되
좌절은 말게나
고목나무에도
꽃이 피지 않던가
다시 시작하여 보세
Posted by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