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2009. 9. 12. 04:13

국민일보 사설 : 제자의 성희롱에서 교권이 읽힌다



1. 이 사건을 두고 교권 실추를 논하는 것은 참으로 지랄맞은 일이다.

물론 이 사건은 교사의 권력/권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서 여-남 사이의 성별 권력이 이를 넘어선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교장이나 교감, 또는 동료 교사 등이 여교사를 성폭행하는 사건에 대해 아무도 '교권침해'를 말하지 않는 것 등을 생각해보면, 역시 이는 다분히 문제가 있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교권'은 교사가 상급자(정부, 관리자 등)에 대해 가지는 권리가 아니라, 하급자(학생)에게 가지는 권력/권위라는 인식이다.



2. 또한 우리는, 저런 식으로 '농담'(??)을 던지는 식의 성폭력(그걸 성추행이라 하든 성희롱이라 하든 성폭행이라 하든)은 교사가 학생에게 가하는 게 그 빈도로는 훨씬 많은데, 그런 것들에 대해 충분히 민감하게 "이건 인권침해다"라고 반응해왔는지도 물어봐야 할 것이다.



3. 이 국민일보 사설에서 기간제 교사, 비정규직 문제를 지적한 건 나쁘지 않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근데 마지막에 대학입시 어쩌구 하는 문장은 좀 쌩뚱맞게 보인다. 뭐든지 대학입시랑 전인교육 문제냐.



4. 어찌 되었건 저것은 성폭력이다. 여성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서 처한 복잡하고 복합적인 상황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대개의 생활 현장이 그렇듯이, 학교 현장은 단지 교사-학생 권력 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관계와 맥락들이 얽혀 있는 곳이다.

어쨌건 나는 이걸 연애-사랑을 상품화하고 '소유' 양식으로 만드는 사회, 성폭력에 둔감한 사회의 문제로 이야기하지 않고 '교권실추'의 문제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어이가 없을 뿐이다.




5. 인터넷에 떠다니는 동영상 중에서 얼굴 다 알아볼 수 있게 된 동영상들을, '충격' 이러면서 퍼나르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로 사람의 권리 같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성의가 있다고 봐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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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jung

    대부분의 여성들은 성추행 피해 경험이 있고 저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제가 아는 여교사 한 분은 "나는 그거보다 조금 덜 한 일을 학교(당시 남자중학교 근무)에서 종종 겪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나를 위안삼았으면 좋겠네..." 라고 저를 위로하더군요.

    2009.09.14 11:40 [ ADDR : EDIT/ DEL : REPLY ]
    • 거의 대부분의 여성이 성폭력의 피해자이고, 모든 여성이 잠재적인 성폭력의 피해자...라고 하더라구요

      2009.09.14 23:22 신고 [ ADDR : EDIT/ DEL ]

걸어가는꿈2009. 8. 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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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별공동행동  차차차 : 차별, 그리고 차마 말하지 못한 차이

[제 2호 // 2009년 8월 22일]

  반차공's 아나토미

 :: 반차별공동행동 연대의의미



반차별공동행동 어떻게 활동하고 있나?이번 호 주제는 바로바로바로 "반차별공동행동 연대의 의미"...이지만!
뭔가 전체적으로 닭살 돋는 고백삘?!
"그이를 만날 땐 왠지 정신줄을 놓게 돼요."  등등 다양한 충격발언, 고백 수록

 상상 더하기

 
:: 반차별운동 주춧돌 놓기     
    안개 속을 더듬으며 나아가듯


사실, 아직도 나는, 반차별운동이 ‘뭔지’를 잘 모르겠다. 그랬기 때문에 반차별운동의 원칙, 반차별공동행동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 세 번째 상상더하기에 참여하면서, 조금은 이런 막막한 게 덜해질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더보기]

  반차별 용어 사전 : 변태


우리가 새롭게 정립해보는 단어와 생활언어들. 이번에는 변.태.

변태 속에 숨어 있는 정상/비정상 이분법에 저항한다.

우리 모두 '변태'로부터 해방되어 변태가 되자!

[변태]


반차별공동행동은 여러 인권운동단체와 개인들이 모여 '반차별 운동'의 내용을 모색하고, 이것을 새로운 액션으로 펼쳐나가는 연대체입니다. 기존에 각자의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던 운동의 주제와 방식이 교차되고 변화하며, '새로운 연대'가 아니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반차별 운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반차별 공동행동]
http://chachacha.jinbo.net



이번 웹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코너인 '변태' 사전 ^^ 아래에 첨부합니당~~














[반차별 용어사전]

  변태 變態

 

사전적 의미)


1. 본래의 형태가 변하여 달라짐. 또는 그런 상태. ‘탈바꿈’으로 순화.

2. [심리]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그로 인한 행위. 또는 그 성욕을 가졌거나 그 행위를 하는 사람.

 

예문)


- 저 사람 머리스타일 좀 봐. 꼭 변태 같아.

- 동성애를 인정해야 한다구? 그들은 다 변태라구.

- 지난 번 성교육 시간에 보니까, 너 질문도 많이 하구 아는 것도 많은 것 같던데, 너 변태지?

- 최근 등산로 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등산로를 지키고 있다가 여성들이 내려
오 면 성기를 꺼내는 ‘등산로 족’, 고속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성기를 꺼내놓고 자위를 하
는 ‘고속버스 족’, 버스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몰려올 때를 기다렸다 아랫도리를 벗는 ‘정
거 장 족’ 등 변태 짓을 하는 장소도 다양하다고 합니다.

- 아니, 어떻게 그런 곳을 애무해 달래? 변태자식!

 


  "너 변태아냐?" "저런 변태 같으니라구"

 여러분들은 '변태'라는 말을 평소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요? 정상/비정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며 뭔가 정상적이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생각되는 행동이나 말, 모양에 대해 '변태'라고 부르지는 않나요? 특히 성에 대해 매우 폐쇄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성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 그 자체를 두고도 흔히 '변태적', '변태'라 부르기도 하지요.

그런데 정말 '변태'가 변태인가요? ^^;

위의 사전적 정의처럼 '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행위'가 변태라면, 무엇이 '정상적인 성욕이나 행위'인가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조금 특별한 성욕이나 행위가 '비정상'인가요?
사람들마다 성적인 욕구는 다 다릅니다. 각자 성적인 욕구를 채우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 거죠. 이 다양한 방식을 누가 정상/비정상으로 규정하고 나누는 것인가요. 오히려 다양한 방식이 있어 더 즐겁지 않나요? '변태'라는 부정적인 낙인으로 인해 성적 엄숙함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은 없나요? 왜 다양한 욕구가 인정되지 않고 '변태적인 것'으로 낙인찍어 죄악시하고 억압해야 하는 것인가요.

 하지만 욕구가 잘못된 방식으로 소통될 때에는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위의 예문 4처럼 다른 사람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욕구만을 강요하는 행위는 '변태'가 아니라 '폭력'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그게 성적인 것을 매개로 하는 것이라면 '성폭력'이 되겠고요. 이러한 성폭력은 처벌되고 없어져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 반차별 용어사전에서는 '변태'의 사회적 의미가 성적 정상성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을까? '변태'라는 말의 부정적인 낙인 효과를 통해 다양한 성적 욕구들이 금기시되고 억압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단어를 다루어 보았어요~ 

 우리가 변태라 부르는 경우들 안에 담긴 성적 터부와 차별적 의미를 걸러내고 우리 모두 '변태'로부터 해방되어 다양한 성적 욕구를 즐길 수 있는 자유를 누려보아요. 정상적인 성적 욕구? 이젠 안녕~ 즐!^^

 

 

반차별 용어사전의 사전적 의미)


'변태'

1. 성과 관련된 지식 및 자신의 신체적 특징과 기호에 대해 정확히 알고, 그와 관련된 이
야기를 파트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

2. 이 사회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성애 중심의 사고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
람.

3. '정상적인 성적 욕구' 따위 개나 주라지! 하며 자신만의 다양한 성적 욕구를 즐길줄 아는 사람.

4. 자신의 성적 욕구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성적 욕구를 존중하며 소통할 수 있는 사람.


예문)


- 저 친구 전체적인 스타일이 참 독특한데? 변태 같아. 멋지다!

- 너 동성인 그 친구를 사랑한다고? 그 친구도 널? 부럽다! 니넨 정말 멋진 변태커플이 될 수 있을 거야~

- 지난 번 성교육 시간에 보니까, 너 질문도 많이 하구 아는 것도 많은 것 같던데. 너 같은
변태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 내가 애무해 주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해. 어떤 애무를 받고 싶은 지도. 우리, 섹스에 대해서 좀 더 솔직한 변태가 되자구.

- 그 FTM(트랜스젠더 남성) 멋지지 않니? 전화번호 좀 따주라~

 

 

<당신의 변태성을 체크해 보세요~>

 

항 목

o

x

1)

성적으로 끌리는 상대의 특별한 신체 부위(발목, 손가락, 목선 등)가 있다고 편하게 밝힐 수 있다.

 

 

2)

데이트를 하면서 첫 만남 이후 몇 번 만나야 손을 잡고, 그 다음에 키스를 하고..와 같이 단계별로 진전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3)

자위나 섹스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신체의 어떤 부분에 어떤 자극을 주었을 때 가장 오르가즘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다.

 

 

4)

섹스는 누군가에게는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상대가 누군지 상관없는 스포츠이기도 하고, 아기를 낳기 위한 도구적 움직임일 수도 하다. 섹스의 목적과 방식은 세상 사람 숫자만큼 다양하다.

 

 

5)

옷이나 외형적 모습에서 남녀의 성역할이 너무 분명히 구별되는 이성애 커플을 보면 뭔가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6)

동거 시, 가사 일을 분담할 때 각자 맡는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7)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8)

결혼이라는 제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제도이며 죽을 때 까지 한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9)

나만이 느끼는 무언가에 광적으로 집착하거나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10)

이 세상이 규정해 놓은 것들에 맞춰서 사는 자신보다는 그것을 깨고 사는 것이 진정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중 O가 5개 이상이면 당신도 변태! 8개 이상이라면 당신은 진정 훌륭한 변태!! ㅋㅋ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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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대의 뱃살에......................................................................-_-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09.08.22 21:39 [ ADDR : EDIT/ DEL : REPLY ]
  2. 변태같이 멋지다고 말했다간 두드려 맞을지도

    2009.08.23 04:27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9. 8. 19. 16:03


뭔가 오랜만에? 조-금 맘에 들게 쓴 글이에요.
메시지의 전달과 나라는 개인의 표현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다 포착하는 데 약간 성공한 것 같은 글.





[페미니즘인(in)걸] 신데렐라이길 거부한다

밤길을 다니고 외박을 할 자유를


공현


기숙사 통금시간은 8시? 10시?


나는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기숙사는 당연히 여남 공용…일 리는 없고 여자 기숙사와 남자 기숙사가 마주 보고 따로따로 있었다. 어느 가을날, 내가 속해 있던 만화동아리는 중간고사가 끝난 걸 축하하며 동아리 회식을 했다. 그 다음에는 자연스레 노래방으로 고고씽. 주구장창 일본음악에 애니메이션 OST를 불러대서 ‘일반인’들과는 도무지 눈치 안 보고 노래방을 즐길 수 없는 인간들이 많았던 동아리 특성상 회식 후 노래방은 나름 필수 코스였다.

그렇게 노래방까지 갔다가 기숙사 근처까지 왔을 때 시간은 대략 저녁 7시 반쯤. 조경이 잘 되어 있는 학교를 다닌 터라, 기숙사 옆에는 나무들과 잔디가 살고 있는 공터가 있었다. 해가 붉은 색조를 띠기 시작하고 조금씩 어둑어둑해져갈 무렵, 그 공터에서 만화동아리 사람들 10여 명이서 얼음땡과 술래잡기가 벌어졌다.

그런데 채 30분도 하기 전에 여학생들이 가야 한다면서 빠지는 게 아닌가! 왜 가야 하냐고 물어보았을 때 돌아온 대답. “기숙사 통금이 8시.” 남자기숙사에만 살아봐서 통금 시간은 여남 기숙사 똑같이 10시인 줄만 알았던 나는 그야말로 깜놀했다. 8시에 방별로 점호를 하고, 8시 이후에는 기숙사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니. (물론 남자 기숙사의 10시 통금이라고 해서 좋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8시는 너무하지 않나? 토요일에 학교 끝나고 회식하고 수다 좀 떨다가 노래방 갔다 오면 8시는 눈 깜짝할 새 아닌가. 이처럼 성차별은, 결코 다른 어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위 사진:6회 밤길 찾기시위에 참가한 청소년들


밤길을 되찾자, 달빛시위


달빛시위라고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다. “달빛 아래 여성들, 밤길을 되찾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매년 하는 시위다. 여성들에게 위험하니까 밤중에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는 여성 단속(?), 성폭력 피해는 ‘야한 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닌 피해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는 식의 헛소리들, 그리고 여성들은 보호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사회에 맞서서 “밤길을 되찾자”라고 외치며 달빛 아래를 누비는 것이다.

청소년의 경우는 어떨까? 문득 작년에 있었던 촛불집회 때가 떠오른다. 경찰들은 밤이 깊어지면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밤 10시가 넘었으니 청소년 여러분은 귀가해주십시오.”라고 방송을 해댔다. 한 촛불단체는 집회를 열면서 밤 10시 이후에 청소년들을 자진 귀가시키겠다는 공지를 올리기도 했다. 꼭 촛불집회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평소에도 피씨방도 노래방도 찜질방도 모두 밤 10시 이후 청소년 출입금지다. 무슨 청소년들이 신데렐라고 밤 10시가 마법이 풀리는 시간인 것도 아니고. 청소년들이 위험한 밤길을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들은 집요하다.(유일한 예외는 학원, 자습 등 ‘공부’뿐이다.) 여성들의 경우에 맞먹을 정도다. 아니, 적어도 여성들의 경우는 밤 10시 이후에 출입금지 이런 게 제도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럼, 여성 청소년들은? 여성이면서 청소년인 그들은 더 많은 제약에 마주해야만 한다. 남자기숙사는 통금 시간이 밤 10시인데 여자기숙사는 밤 8시인 바로 그 차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차이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 살아보면 이게 그렇게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기숙사 통금시간 뿐 아니라 집집마다 있는 ‘통금시간’도 보통 여성 청소년의 경우에 더 이르다. 그냥 밤길을 돌아다니는 데에도 많은 제약이 따르는데, 혹시 외박이라도 하겠다고 하면? 청소년들의 외박이 대체로 잘 허락이 안 되지만 여성 청소년들이 외박하겠다고 하면 집에서는 더 난리가 날 공산이 크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도 체감하게 된다. 같이 밤늦게까지 집회를 하거나 회의/토론을 하거나 놀려고 하면 청소년들은 꼭 집과 실랑이를 해야 한다. 그냥 알아서 집에 잘 들어오라고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게 너그러운 집이다. 외박이 까다롭기 때문에 MT를 가기도 힘들다. 여성 청소년들은 그게 더하다. 밤 9시만 되어도 자리를 떠나는 청소년들은 여성 청소년들이 더 많다. 일반적으로, MT나 밤샘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청소년 활동가들 중에는 남성이 많다.


위 사진:6회 밤길 찾기 시위 홍보 웹자보



신데렐라이길 거부한다

고미숙은 “이팔청춘 꽃띠는 어떻게 청소년이 되었나?”라고 질문하고 청소년이라는 존재를 비판적으로 추적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청소년의 존재 기반은 학교와 가족이다.”(김현철,고미숙,박노자,권인숙,나임윤경『이팔청춘 꽃띠는 어떻게 청소년이 되었나』, 60쪽) 이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집(가족)과 학교(그리고 학교의 연장선상인 학원)에만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청소년들이 밤길을 돌아다녀선 안 되고 외박을 해서는 안 되는 것 속에는 청소년들은 가족(부모, 보호자) 또는 학교(교사, 학원)의 감독과 보호 하에 있어야 한다는 이 사회의 룰이 있다. 외박은 이런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그들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다른 곳에 몸을 맡기는 일이기에 아주 제한적으로만 허용된다. 허락받지 않는 외박을 이렇게 부르지 않던가? 가출(家出:가족으로부터 나감.)이라고.

사실 여성들에게 밤길을 금지하는 논리와 청소년들의 밤길을 금지하는 논리는 고만고만하다. 여성들/청소년들에게 밤길은 위험하니까. 여성들/청소년들은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니까. 그리고 여성들/청소년들은 집에 있어야 하니까.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여성들의 자립도가 높아지면서 여성들의 경우에는 다소 약해진 듯하다. 꾸준한 여성운동의 결과로 여성이 남성 가부장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이 약해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자식/청소년들은 부모/보호자들의 소유물이라는 식의 생각이 강고한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데렐라가 되어간다. 밤 8시, 10시, 혹은 12시에.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는 신데렐라가 되길 거부한다. 80년대에 사라진 통금이 여성&청소년들에게만 존재하는 현실에 저항한다. “밤길을 되찾자!”는 여성들만의 구호가 아닌 청소년들의 구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성 청소년들에게 이르러서 더욱 강고해지는 이 ‘밤길 금지’, ‘외박 금지’ 논리에 맞서서, “밤길을 되찾자!”는 누구보다도 여성 청소년들의 구호가 되어야 한다. 여성주의(페미니즘)와 청소년인권은 바로 이런 지점들에서 만나며 서로 힘을 더해가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활동가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66 호 [기사입력] 2009년 08월 19일 13:03:52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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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elnoveno.net/2009/08/19/relay-qna-education/

    릴레이 문답을 보낼게. 주제는 '욕망'. 공현의 '욕망론'을 듣고 싶다는... ㅎㅎ;

    2009.08.19 18:38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9. 7. 18. 13:12


밤이고 비도 오고 해서 사진이 그리 잘 찍히진 않았습니다. 역시 한 5년 전에 산 삼성 디카라서 그런 듯. 삼성 거는 역시 버려야 했음.(원래 밤에 삼성 게 잘 안 찍히기로 좀 유명.) 하지만 새 거 살 돈이 없음 ㅠ



솔직히 말해 약간 힘들었어요. 비가 와서 좀 그랬던 거 같긴 한데. 행사도 후딱후딱; 한 면도 있고
UCC는 좀 한두 편 빼고는 밍밍...

달빛시위의 백미인 시위-행진도, 비가 와서 그렇게 활기차게 못했어요 ㅠㅠ 원래 행진을 재밌게 해야 하는 건데.

전기화와 방가방가시스터즈의 "싸구려신문" 등의 공연은 좋았습니당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 분투하신 모든 분들에게 박수를.


이날 달빛시위에서는 경기서남부 연쇄 성폭력 살인사건, 고 장자연 씨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 촉구, 삼성전자에서 성희롱 사건으로 몇 년째 싸우고 계신 이야기 등이 주로 이야기 됐습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밤길을 허하라" "야자, 학원만 허락된 우리의 밤길?" "청소년의 외박할 자유 보장하라" "밤10시 신데렐라, 됐거든!" 등의 내용을 피켓으로 만들어서

청소년들의 밤길 통행의 자유를 외쳤습니다 ㅋ

다음 달빛시위에는 내용에 좀 더 반영되게 고민해봐야겠다능.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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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고

    공현, 반가웠는데 말야.
    나도 밋밋한 UCC 중 하나에 출연했어 ㅋㅋㅋ
    난 왠지 씁쓸했어, 이기는 싸움이 없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축축 처진다고나 할까-

    2009.07.18 14:06 [ ADDR : EDIT/ DEL : REPLY ]
    • 음 좀 처져. 날씨 탓도 없진 않은데. 그래서 안 처지게 좀 해야지.

      2009.07.19 12:13 신고 [ ADDR : EDIT/ DEL ]
  2. 비오는데 고생하셨습니다 ^^

    2009.07.19 19:4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9. 6. 25. 00:51

[페미니즘인(in)걸] ‘여성’의 이름으로 체벌을 거부한다는 것(2)

조금 덜 아프게 맞은 대가는?

난다


청소년인권활동이란 걸 하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불편한 것들’을 인식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미친 학교를 혁명하라’ 라는 집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날의 경험은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러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면서, 지금과 같은 활동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청소년인권은 어느새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학생인권은 내가 하는 청소년인권운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대부분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학생인권은 학교 안 청소년들의 인권을 말하는 것인데, 두발자유나 체벌금지나 또는 강제야자 반대 같은 게 대표적인 목소리이지 않을까 싶다.


성별에 따른 폭력의 강도 차이

이제 1년 조금 넘게 활동을 하면서 그 동안 캠페인이든, 집회든, 청소년의 목소리를 담은 문화제이든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학교가 정해놓은 선 밖으로 나온 청소년들을 꽤 많이 만났다. 처음엔 무조건 많이 만나는 게 중요했다. “청소년들의 직접행동이 중요해요!” 라고 외치면서 여기저기 얘기하곤 했다. 그러다가 요즘엔 점점 어떤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학생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성 청소년들보다 남성 청소년들의 움직임과 분노가 더 크고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서명을 받거나 캠페인을 하거나 할 때는 적극적인 액션이 다들 비슷비슷하긴 한데, 행동을 고민하고, 불만을 더 크게 터뜨리는 쪽은 남성청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는 ‘현상’이다. 왜 그럴까? 왜 남성청소년들이 더 적극적이고 더 많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확실히 남성청소년들(앞으로는 남청) ‘신체적인 폭력'에 노출되기가 더 쉬웠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친구끼리(남자애들끼리) 때리고 맞고 하고서 집에 들어오면 "뚝! 울지 마!" 하면서 남자애들은 싸워가면서 크는 거라고 말하곤 하는 상황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반대로 어느 누구도 여자애들이 서로 치고 박고 때리고 하면서 크는 거라는 얘길 들은 적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교사들이 체벌을 행할 때, 여성청소년들(앞으로는 여청)은 상대적으로 더 살살 때리기도 하고, 봐주기도 한다. 똑같은 잘못-이라고 규정되는 것들-이었는데, 나는 손바닥을 맞고, 나와 같은 반의 남자애는 허벅지를 '거칠게' 맞았다. 왜 그랬을까? 답이 나오긴 한다. 왜냐하면 남자애들은 강하게 커야 하니까. 어릴 때부터 거칠고, 강하게 커야 '진짜' 남자 소리 듣지.

그래서일까, 남청들의 적극적인 액션은? 더 많이 규제 당하고, 더 많이 잡히고, 더 많이 맞기 때문에? 더 불만이 많이 쌓이기 때문에?

 


체벌은 남성청소년들 사안일까

이렇게 보면 학생인권의 주요 이슈 중 하나인 ‘체벌’은 여청들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거리가 있는 것도 같다. 확실히 여청들은 상대적으로 체벌에서 비껴나 있다. 남청들이 100대를 맞는다고 하면 여청들은 40대를 맞는다고나 할까. 그래서 남청들은 여기에서도 불만을 표하곤 한다. "여학생들은 왜 살살 때리냐", "여학생은 왜 덜 잡냐", "남녀 차별이다." 등등. 체벌의 강도나 횟수로만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여청들은 남청들보다 더 나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걸까? 여청들에게는 체벌을 안 당하는 대신, 그 체벌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폭력이 존재한다. 광주의 한 학교에서는 교사가 벌로 한 여학생에게 치마를 벗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 것을 시켰다고 한다. 여청들에게는 이처럼 ‘수치심’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벌’을 주곤 한다. 거칠고 강하게 자라기를 요구받는 남자애들과는 달리 착하고 부드럽게 자라기를 요구받는 여자애들을 팰 순 없으니, 몸 처신 잘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끊임없이 존재한다. ‘체벌 대신 성추행을 당한다’, ‘더 많은 통제를 당한다’ 라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나.

성별 권력이 인정하기는 싫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한, 더없이 폭력성이 드러나는 공간인 학교에서, 비록 '학교'라는 특수성-교육의 장이라든지, 하는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것 때문에 여성/남성이 아닌 '학생'으로써 입시경쟁의 문제가 주로 부각되는-덕분에 묻혀있으면 묻혀있지 그것이 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성역할은 구분되어 왔다. '성'의 구분이 아니라, 성'역할'의 구분이다. 철저하게. 이런 성역할, 거기다 청소년을 연결해볼까? 성역할의 구분뿐만 아니라 그 역할을 잘 수행해내게 하기 위한 기대도 확 커진다. 청소년은 기대 받는 '자원'들 아닌가. 이 사회를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 틀에 맞춰진 좋은 여성이, 좋은 남성이 되길 우리는 기대 받는다. 그래서 여청과 남청은 다른 방식으로 통제당하고, 다른 폭력을 몸에 각인하고 살게 된다.



체벌에 다른 성역할 고정과 학생들 간 분리 효과

체벌은 태초부터(!) 폭력이다. 학교 안 남청들에게만 더 많이 가해져서, 차별이어서가 문제인 것이 아니다. 체벌로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고, 그런 폭력을 겪으면서 여성성과 남성성의 성역할을 더욱 명확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이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로 먹고 살아온 이 사회를 알게 모르게 유지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교는 그런 점을 미처 보지 못하게 만들고, 누가 더 맞고 누가 덜 맞았는지 치사한 차별-평등 논리만 오가게 된다. 그래서 더 무시무시하다. 그곳에서 남성청소년들은 여성청소년을 공격한다. “나도 맞았으니, 그리고 나도 걸렸으니, 너도 맞아야 하고 걸려야 해.” 라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이끄는 곳이 학교다.

폭력은 학교 내 권력질서에서 발생한다. 벌을 받는 일은 학교에서 벌어진다. 그렇기에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처럼 똑같이 맞는다고, 벌을 받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당장은 더 맞고 덜 맞는 차이가 보일지 몰라도, 결국 그런 차별 대우(?)의 피해자는 여학생 남학생 모두이다. 벌 받는 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건, 어떤 방식이건, 매한가지다. 남청들이여, 여청들과 손을 잡을지어다. 당신들의 고통은 여성들이 그만큼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이여, 꾸준히 폭력을 행하고, 벌을 줌으로써 청소년들을 통제해야한다는 생각이 깊이 박힌 낡은 학교에, 성역할을 깨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만들려는 무시무시한 의도를 가진 이 사회에, 함께 손을 잡고 어퍼컷을 날릴지어다.


덧붙이는 글
난다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 활동가 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58 호 [기사입력] 2009년 06월 24일 14:11:42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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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5. 22. 22:13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서울인권영화제를 하면서 "표현의 자유"에 관한 글들을 받는데,

남성이 내가 치마를 입는 것도 일종의 표현의 자유로서 다루고 싶다고 하셔서 쓴 글입니다.
줄바꿈 등은 약간 읽기 편하게 바꿨습니다.


13회 서울인권영화제는 "표현의 자유"를 외치면서 청계광장 등에서 6월에 열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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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들어가면 내게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

공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익숙한 편이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상당한 기행(奇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왔기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떠어떤 것들 때문에 주목을 끌었는지 하는 이야기는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다만 고등학교 때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한 이래로는, 거의 전교에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시라.)

  게다가나의 평상복은 생활한복이 90% 이상에다가 머리는 꽤 긴 편이라서, 어차피 어느 정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가장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을 때는, 무슨 눈에 띄는 거리 퍼포먼스 같은 거 할 때를 제외한다면, 바로 치마를입고서 돌아다닐 때다.

  나한테는 치마가 세 벌 있는데, 한 벌은 고등학교 때 친구가 선물한 건데 소화하기가 좀 난감해서입고 다니지 않고 있고, 주로 입는 것은 청치마와 인도풍 치마이다.
  청치마에는 위에 보라색 무늬의 남방을 주로 입고, 간혹 하얀생활한복과 맞춰 입기도 한다. 인도풍 치마는 방울이 달린 녹색 치마인데 하얀색 인도풍 상의와 세트여서 같이 입는다.
  인도풍 치마쪽은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나있는 모양새라서 추위를 잘 타는 내가 입고 다니긴 좀 춥다. 그래서 주로 청치마 쪽을 자주 입게되는데, 나 자신도 부담스러운 내 다리털들은 무릎양말로 가린다.(한때 다리털을 밀어보았으나 밀어도 밀어도 끝이 없는 다리털들에포기하고 그냥 무릎양말로…)

  내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하는 남성으로 분류되어 있는데다가 외모도 그렇게 여성 같진않기에(최근에 파마를 했는데 좀 더 여성 같을지도 모르겠다.) 치마를 입고 돌아다니면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확 띄나보다.


  음? 왜 치마를 입냐고? 글쎄… 사실 나도 그렇게 듣는 이가 만족할 만한 답변을 제시해 줄 수는 없다. 남성은 치마를 입을수 없는 사회적 규범과 고정적인 성별 규범에 대한 반감이 치마를 입는(그리고 머리를 기르는) 이유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사실그렇게 의식적으로 ‘여성의 옷인 치마’를 입는다고 생각하고 코디하는 건 아니다.

  그럼 내가 ‘크로스드레서’냐 하면, 별로그렇지도 않은 게 나는 속옷이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이 사회에서 여성이 입는 것으로 분류된 복장으로 맞추지는 않으며, 그냥 치마를입을 뿐이다.

  그건 뭐랄까, 마치 “왜 생활한복을 입습니까? 민족주의자입니까? 전통문화나 예술 관련 일을 하십니까? 동양철학전공자십니까?” … 같은 질문들을 받는 느낌과 비슷하다. 치마든 생활한복이든 그냥 내가 찾아낸 편하거나 예쁜 패션일 뿐이라고생각하면 안 되나. 사람들에게 “왜 청바지를 입습니까?”라고 묻는 일은 별로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좀 짜증도 나는 노릇이다.



  여하간 치마를 입고 다니다보면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많다.

  일단 시선 집중은 기본이고, 한 번은 지하철에서 어느 6~8살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 분이 “엄마 저 사람은 남자야, 여자야?”라고 큰 소리로 물어보자, 그 여성의 모친으로 보이는 여성 분이“쉿!”이라고 하며 혼을 내셨다.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랑 얽히면 안 돼.”라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면서 혼내진 않으셔도되는데 말이지. 물어볼 수도 있지 뭘 그리 과민반응하셨던지….

  또 한 번은 교육부 앞에서 교사단체인가 교대생들인가가 하는 집회를갔는데, 다른 단체 사람이 “아저씨 팬티 보여서 민망해요, 앉아 있지 말아요.”라고 해서(그때 난 그래도 나름 다리를 오므리고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상당히 모멸감을 느낀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며 동시에 스스로도 좀 곤란할 때는 화장실에 갈 때다. 남자 화장실에들어가면 시선 집중은 피할 수 없고,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도 종종 보게 된다.

  치마를 안 입었을 때도 머리가 길어서 그런지흠칫흠칫 놀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는 분들(어째서인지 대개가 나이가 좀 많은 분들이다. ‘머리 긴 남자’가 익숙하지 않은건가?)이 좀 있는데, 치마를 입고 들어가면 부담스럽고 미안할 정도로 놀라시는 분들도 종종 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일부러 참고공중화장실은 안 가기도 한다. 여자 화장실을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지만 그랬다가 경찰서에 끌려갈까봐 그건 무서워서 못하겠다. -_-;;
 
  그래서 나는 여/남으로 구별된 화장실 체제에 반대하는 트랜스젠더인권단체의 주장을 적극 지지한다.

  내가 내 개성이자 정치적문화적 실천으로 치마를 입기로 한 이상 어느 정도 쏟아지는 시선들은 각오하고 견뎌내야 할 문제겠지만, 화장실에서의 문제는 정말 견뎌내기 어렵다.

  표현의 자유는 단지 특정한 내용의 표현들(흔히 생각하기에는 '정치')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적인 경구를 다시 상기시키자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이다."

  어떤 정책이나 정치인, 정당 등에 대한 발언 뿐 아니라 두발복장자유나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표현들 또한 표현의 자유가 적용되는 영역이며, 그 모두가 인간의 자기 표현으로서 가치가 있다. 내 치마 코디는 기존 성별 규범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에서도 그리고 그냥 나의 개성적 패션이라는 점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치마 입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거나 탄압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너무나 견고한 '상식'들과 여러 가지 구조들이 나의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있는 것은 제법 분명하다.


  최근에 미국인가 어느 나라에서는 차별금지법에 "sexual expression", 즉 성적인 외모/복장/자기표현 등에 대한 차별도 금지하는 조항을 넣었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제대로 된 차별금지법조차 없고 성별 고정관념도 제법 견고한 이 땅에서는 아직 요원한 일인 듯하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머리 기르는 것만 가지고도 온갖 잔소리를 하며 군대 가라고 하는 친척들에게 치마 입은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나 난리가 날지…;


  마침 오늘, 이제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또 치마를 입고 돌아다닐 수 있겠지, 하면서 서랍에 넣어둔 치마를 세탁기에 던져 넣었다. 혹시 나중에 인권영화제 등에서 이 글을 읽은 분들이 나를 볼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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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리 감으려고 허리 숙이는데 변기에 머리카락이 들어가는게 짜증납니다 (-_-)

    2009.05.25 16:15 [ ADDR : EDIT/ DEL : REPLY ]

딱딱한꿈2009. 5. 18. 14:37




- 글을 쓰는 위치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문제에 관해서 내가 이 글을 쓰는 위치를 밝히자. 별 관심 없는 분은 읽지 않아도 된다.

나는 초등학교 때는 통상의 또래들이 즐기는 매니악하지 않은 만화와 공중파 애니메이션을 즐기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포켓몬스터 팬클럽의 길로 접어들면서 오타쿠에 들어서는 길로 접어들었고,
중학교 때는 투니버스에서 해주는 만화들을 봤고, 어느 여름방학 때 카논, 에어 등 비쥬얼노벨(스토리가 좋았다, 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남성향 게임*임을 부정할 순 없다.)을 접하였고
고등학교 때는 만화동아리에서 그림을 가장 못 그린다는 이유로(-_-) 기장을 맡아서 이런저런 잡무를 처리했고,
마침 발간을 시작한 'NT novel' 덕분에 라노베(라이트노벨)에 빠져들어 부기팝 시리즈와 키노의여행을 특히 사랑했던...
또한 초등학교 때부터 이영도의 소설이라면 가능한 한 다 섭렵했고, 특히 눈마새는 10번이 넘게 완독한-
명실상부히 오타쿠였다. -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할 생각도 없다.

지금 오타쿠가 아니란 건 아니다. -_-
지금도 나는 피로가 쌓이고 시간과 돈에 여유가 있을 땐 만화방에 틀어박혀서,
(비록 최신 조류에서는 다소 떨어져 있지만) 써전아이드(3X3Eyes)나 아다치미츠루나, 삘릴리불어봐재규어, 충사나 뭐 그런 걸 탐독한다. 집에 모셔놓은 총몽 9권과 눈마새와 라노베들은 삶의 활력소이고, 최근엔 대항해시대2를 비롯하여 고전게임으로 눈을 돌려보고 있다.
지금도 돈에 여유가 생길 때는 카도노 코우헤이(부기팝 작가)의 소설을 지른다. (이영도 소설도 지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좀 비싸서 눈마새와 폴랩만 좀 끼작거린...)
그러나 내가 고2-고3 즈음에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하고 의식적으로 '정치'를 시작하면서 나의 오덕질은 매우 그 범위를 한정시켜야 했다.
옛날처럼 거기에 투자할 돈과 시간이 없으니까 그런 것도 있고,(돈 생기면 영세한 청소년인권단체들에 갖다 바쳐야 한다. 특히 내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관리해야 할 재정은 세 개나 된다.-_-) 정치적 올바름과 불편함의 문제도 있다.

사상적 위치를 이야기하면 나는 '청소년인권주의자'(?)이고, 인본주의자이며, 여성주의자이고 싶고, 사회주의/아나키즘을 지지하는 편이다.

정당운동으로 이야기하면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는 차원에서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지만 현재는 당적이 없고,
투표 때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나 사회당(셋 중에 그때그때 후보-정책이 맘에 들거나, 다 비슷비슷하다면 당선 가능성이 높은 쪽)을 찍을 용의가 있고,
민주노동당/진보신당/사회당의 교육-청소년 영역과 언제든 필요하다면 협력할 의사가 있으며, 교육-청소년 영역이 아니더라도 차별금지법 사안 등에서는 같이 한 적이 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뭐, 사회당 덕후위원회(그리고 진보신당 오덕위원회) 자체에 대해 말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활동을 하면서 계속 부딪쳐 왔던 활동가-정치가로서의 공현과 오타쿠로서의 윤종의 갈등과 화해에 대한 고민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이다.

뭐 "오타쿠의 성지"라고 하는 관악구 주민으로서도


본문은 짧게 쓸 생각이라서, 왠지 이 서론이 더 길 것 같다 -_-




- 오타쿠의 정치는 가능한가?

이른바 '진보정당'에서의 부문위원회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내 기준임.)

1. 여성위원회, 장애위원회처럼 특정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며, 그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그런 활동과 당 전체의 활동을 결합시켜나가는 위원회.
2. 평화통일위원회처럼 특정 정책-이슈 분야에 대해 활동을 하는 위원회.
3. 학생위원회처럼 특정한 사람들을 조직화해서 당 활동에 참여시키기 위한 위원회.

(3번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학생위원회는 그냥 여성위원회, 장애위원회랑 같은 분류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현실에서 '진보정당'들의 (대)학생위원회는 학생들의 정치, 학생들에 의한 정치는 하더라도 학생들을 위한 정치의 기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야 '88만원세대'를 비롯하여 20대와 대학생들의 이해관계와 상황에 대한 담론들이 발달하면서 이런 기능들이 강해지고 있다. 3번과 1번의 차이는 '~를 위한' 정치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럼 오덕위원회는 저 세 개 중 뭘까?
1번이면 좋겠지만, 3번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사회당 덕후위원회 건설과정(1)
사회당 덕후위원회 건설과정(2)
(슷캇님의 관련글)

슷캇님은 이에 대해 "오타쿠에 의한 정치"를 통해서 오타쿠에 대한 배제를 극복한다고 말하면서,
"오타쿠에 의한 정치"가 곧 "오타쿠를 위한 정치"의 수단 or 전제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정한 사람들의 정치 주체화는 물론 그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킨다.
그러나 그런 정치 주체화는, 그 사람들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만으로 성공하긴 어렵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오타쿠의 정치 주체화'는 '오타쿠인 시민/인민/당원의 정치 활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타쿠' 정체성을 가지고 정치 세력화가 될 때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사회당 덕후위원회 또한 이런 인식 속에서 오타쿠 계층(뭐 집단이라 해도 되고)으로서의 정치 주체화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그 오타쿠 계층으로서의 정치 주체화는 결국 '오타쿠를 위한 정치'가 결합되어야만 가능하다.
즉, '오타쿠의 정치'는 '오타쿠를 위한 정치'와 '오타쿠에 의한 정치'가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


그럼, 과연 "오타쿠를 위한 정치"는 대체 무엇인가?  어떤 내용을 가질 수 있는가?
  ---> 이게 내 고민거리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내 생활 중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요소인 '오타쿠로서의 나'(즉 매니악한 문화 소비-향유자로서의 나)는 어떤 정치를 할 수 있는가?

오타쿠는 과연 문화적 소수자인가? 또는 비주류인가?
오타쿠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과연 얼마나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나? "오타쿠"와 "매니아"의 경계선은?

물론, 인디음악/영화 오타쿠라거나, 마이너한 오타쿠라면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문제에 대해 할 말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스즈미야 하루히 오타쿠는 문화적 소수자라고 할 수 있는가?
세일러문 오타쿠는 문화적 소수자인가? 건담 오타쿠는?
토라도라 오타쿠와 키노의 여행 오타쿠는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가?

사회당 당게를 살펴보면, 슷캇님은 "유인촌 퇴진하라"를 몇번 예시로 사용하고 있는데, 오타쿠들이 왜 유인촌을 퇴진시키라고 주장하는가? 그건 사실 오타쿠로서가 아니라 단지 '문화예술인'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문화적 다양성을 근거로 오타쿠 정치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는 걸까?(즉, 문화적 다양성은 오타쿠 중에서도 극히 일부 오타쿠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까. 그리고 소비자인 오타쿠보다는 생산-유통 구조 부분에 더 초점이 맞추어지는 게 맞지 않을까.)

오타쿠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임금노동하지 않고 생산에 기여하지 않으며 소비만 하는 인간들을 '무능'하고 '찌질'하고 '음침'하며 어딘가 '비정상'이며 '병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에 기인하는 측면이 큰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이는 '건강하지 못한 오타쿠', 즉 히키코모리적인 인상과 결부된 오타쿠의 인상에 가깝다.
오히려 현실에서 오타쿠로 불리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적다.
그럼 이건 '히키코모리'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거나 '니트족'에 대한 낙인으로 생각하는 게 더 옳지 않을까? 고민고민.




나는 덕후위원회나 오덕위원회 등의 '오타쿠위원회'가 단지 정당 활동에 오타쿠들을 조직화해내고 참여시키는 3번 유형의 위원회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또한 오타쿠적 소양을 가진 당원들이 정당 활동에 자신의 소양을 적극 활용하기 위한 기구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근데 그럼 어떻게 갈 수 있을까?



- 오타쿠 문화의 정치적 문제점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사실 그리 길진 않았지만) 꽤 긴 번민의 밤을 보내고 난 후에야 나는 카깃코/츠킷코** 의 길을 버리고 라노베 지름신을 끊을 수 있었다.(그전까지는 대디페이스 같은 문제적 작품도 꽤 질렀으니;)
그 과정은 수많은 여성주의적 성찰들과 정치적 문제의식에 의한 자기검열 속에서 가능했다.
오타쿠가 소비하는 문화는 기실 많은 부분 '주류문화'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게 숫적으로 '소수의 문화'일지라도 그 문화의 성격은 대안적이라기보다는 지배적인 경향이 강하고, 기존의 사회적 권력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거나 더 강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 특히 여성주의와 평화주의적 맥락에서의 문제제기와 도전은 뻔히 예상되는, 피할 수 없는 지점이다.
(물론 일부 작가는 상당히 작가주의적이고 대안적인 정치 의식을 함의하고 있는 작품을 내놓지만 이는 소수다. 이건 어느 시장이나 대동소이한 듯.)
아무리 한국에서 그 문화를 소비하는 사람이 적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문화 시장 속에서는 다수인 경우도 있다. (그럼 그건 다수 문화인가 소수 문화인가 싶은 생각도...)


그렇다면 과연 오타쿠가 '진보정치'(난 '인본주의' 개념을 더 선호하지만 읽는 분들에게 익숙한 표현은 이것일 테지?)를 한다면, 자신이 향유하는 문화 속에 배어 있는 정치적 지점들의 문제를 어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게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다.

간단하게, 진보신당 오덕위원회 게시판을 보면 '밀덕은 전쟁에 반대하면 이상한가요?' '밀덕은 전쟁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가! 좌빨 밀덕의 답변' 같은 류의 글들이 올라와있는데, 그런 게 대표적인 예가 되시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향유하는 여러 작품들 중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아니면 최소한 '진보적 의미가 있는' 것들만을 소비하거나,  자신이 향유하는 것들 속에서 애써 '진보적' 함의를 발견해내려고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하지만 그런 부자연스러운 공존 상태, 또는 정치-윤리가 지배적인 사람을 오타쿠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나는 정치-윤리가 문화에 영향을 미쳐선 안 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영향을 미치는 게 당연하고, 이들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한 개인이 자신의 정치-윤리의 기준과 잣대로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지배한다면 그 사람은 정치오타쿠일지언정 다른 오타쿠라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슷캇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2-2)사회당 덕후위원회는 사회당 내의 부문위원회입니다. 오타쿠가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의해 나타났다는 주장에 저는 동의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오타쿠의 이익은 현재 좌파적 담론에서 충돌할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충돌지점은 여성주의와의 간극이겠지요. 아니메나 게임 오타쿠 문화가 여성의 성적 대상화라는 비료를 먹고 자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말이지요. 이런 부분들이 정말 극단적으로 나가면 문화 자체를 폐기해야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를 버릴 것인가라는 부조리한 선택을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현 상황에서의 이러한 간극은 오타쿠의 태생 자체보다는, 반강제적으로 계층이 형성되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동안 정치적으로 유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당 덕후위원회는 여기에 대한 나름의 대답입니다. :D


나는 결국 활동가는 이런 문제 앞에서 자기가 소비하던 문화를 비판하고 반성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 외에는 답이 안 나오거든 -_-;;

근데 그러면 이런 덕후위원회 하고 싶어할 덕후들이 얼마나 될까? ㄷㄷㄷ

오타쿠 내에서의 또 다른 소수 집단이 되진 않을까?



* 카논, 에어, 클라나드 등 Key사의 게임은 약간 초현실적인 요소가 있는 순애물로 유명한데, 장르로는 '비쥬얼노벨'이다. 지금도 이 게임의 기본 스토리 구조와 음악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캐릭터로 자신을 동일시한 플레이어가 다수의 여성캐릭터(성격 외모별로 다양하게 상품화된)를 소비하는 '남성향' 구조임은 부인할 수 없고, 정치적 불편함은 피할 수 없다.

** 일어로 かぎ는 열쇠를 뜻한다. 카깃코는 Key사에서 나온 카논, 에어, 클라나드 등의 게임을 추종하는 무리를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つき 는 달을 뜻하며, 츠킷코는 Type-Moon에서 나온 츠키히메, Fate/Stay Night 등을 추종하는 무리를 뜻한다.
  "열쇠빠", "달빠" 등의 표현도 있지만, "-빠"라는 말이 가지는 여성(-오빠부대)에 대한 비하적 의미 때문에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 솔직히 말해서 기사 보고서 사회당이나 진보신당 가볼까, 하는 혹하는 마음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
  그러나 그런 이유로 정당에 휙 가입하기엔, 청소년인권운동가로서 정체성이 훨씬 강하다는...
여하간에, '오타쿠위원회'가 당내 오타쿠 당원 모임, 당내 오타쿠 동아리가 되지 않고 '오타쿠위원회'가 되기 위한 조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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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옛날에 메모했던 건데 부록으로...


『카노콘』, 여성주의, 성적 자유주의, 오타쿠.

활동하는 단체 안에서 한 회원이 보는 라노베 소설이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문제의 소설은 『카노콘』.
알 사람은 다 아시겠으나, 상당히 성적 노출의 수위가 높은 라노베이고,
표지와 표지 바로 안에 속지의 일러스트들도 노출도 높은 여캐릭터들 + 야릇한 대사들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이런 소설을 읽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제기하자, 책을 읽던 회원은 보수주의적인 생각이라고 반박했었다.

요컨대 이 문제는 여성주의와 문화향유의 문제,
그리고 여성주의가 성적 보수주의와 연결된다는, 성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의 비난의 전통 등등과도 연결된 사건이었다.



ㄱ. 일단, 나는 어떤 작품이든 간에 그것을 어느 정도 읽든 파악하든 하고 난 후에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표지 그림이 아무리 여성주의적 문제가 있더라도, 자본주의-가부장제 시장 속에서 생존 전략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안에 것도 본 후에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적인 예로, 우디 앨런 영화에 "내 남편의 여자도 좋아"라는 제목을 단 초 낚시성 마케팅은...)

ㄴ. 그런 맥락에서 단지 표지의 노출도가 높다는 것만 가지고서 해당 작품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출도가 높다는 것이나 성적 장면이 소설 중에 묘사된 것만으로 비판하는 것도 부당하다. 여성주의는 성적 장면을 묘사한다는 이유로 포르노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성적 상황을 설정하고 어떻게 그것을 묘사하느냐가 문제다.

ㄷ. 카노콘은 물론 그런 맥락에서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카노콘은 마치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주요한 성적인 장면 등에서는 반드시 남성인 코타로의 입장에서 서술/묘사를 진행한다. 코타로에게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여성들의 느낌에 대해서는 주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며 '관찰'의 대상일 뿐이다. 카노콘 속에서 여성주의적 맥락에서의 긍정적 부분을 찾는다면 기껏해야 '적극적인 여성상' 정도일 텐데, 여기서 적극적 여성들이란 것도 사실은 다분히 남성의 판타지를 실현시키는 도구일 뿐이다.-_-

ㄹ. 나는 카노콘이 비판을 받아야 하는 소설이라고는 생각하는데, 또 그 당시에 카노콘에 대해 비판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반응 속에는 보수주의적 요소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적인 장면이 상당히 노골적으로 묘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작품을 비판할 수 있는 걸까? '야설'이라는 말을 사용해가며? 또는 표지의 그림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걸 볼 수 있냐고 비판할 수 있는 걸까?

ㅁ. 사람들은 카노콘 같은 노골적인 작품을 보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카노콘보다 성적 노출과 묘사가 적더라도 여-남 관계 설정이나 구도 등의 측면에서는 더 문제가 많은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작품들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며, 성적 노출 등의 측면에서 노골적인 작품에만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ㅂ. 나는 여성주의는 궁극적으로는 좀 더 성적 자유주의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개방적으로 논의되고 대화하고 실천한다는 측면에서는.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성적 자유주의의 주장은 여성에게 적대적일 수 있다. 그렇기에 '성적 자유주의자'들은 종종 특정 상황에서 여성(그리고 여성주의자)들의 적으로 돌변하는 거지만 ㅠㅠ

ㅅ. 오타쿠 - 그러니까 대개 '그런 문화'의 상당히 적극적 소비자로서, 매니아들의 자기 반성과 성찰은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반성과 성찰은 세심한 설명과 논의가 필요하다. '여성주의'의 그 문제의식이란 게,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니까.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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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 거시기...
    저,
    '유인촌을 공격한다'는 그 당시 그냥 제가 밀던 개그였습니다... 실패했지만

    2009.05.18 15:21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보다 아다치 미치루가 아니라 아다치 미쯔(つ)루임미다-_-)

    2009.05.18 15:59 [ ADDR : EDIT/ DEL : REPLY ]
  3. 링크시켜놓은 카페 괜히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나랑 민경이 어제 말했던 그 사람 이름 발견하고 바로 껐음ㅋㅋㅋ ㅠㅠ

    2009.05.18 20:55 [ ADDR : EDIT/ DEL : REPLY ]
  4. 리잔느

    이것은 유머인가 진지함인가 'ㅅ'... ㅋ

    2009.05.19 06:26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9. 4. 15. 16:58

[디카로물구나무] 학생답게, 여성답게

'알은 왜 안돼?

홍이, 민선


지난 4월8일 경기도 교육감 선거가 있던 날,
모처럼 집에 갔다가 투표권이 있는 아버지를 따라 투표 장소인 동네 학교에 가봤어.
기다리다가 학생지도실에 붙은 포스터를 보게 되었는데, 포스터의 내용은...


구속? NO! 학생다움만 보여줘
(학생다움만 보이라는 것이 구속 아니냐구요?)

넥타이 착용은 필수! 교내에서 귀걸이 착용 미워요.
(그래,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봐줄만 했어.)

교복변형 No No No!
교복을 줄인 것을 보여주는 듯한 그림 옆에 '알'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데, 확 꽂히더라.
(뭐야! 거기에 알이 왜 들어가?)

학생답게

그렇다. ‘학생답게’ 라는 말. 학창시절을 살아왔던 어른들, 또는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닐까? 그런데 이 ‘학생답게’라는 말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학교에서 또는 가정에서, 그도 아니면 각종매체에서 학생다움을 이야기 한다. 그러한 이야기들 안에서는 여러 가지 학생다운 청소년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들에 들지 못하면 불량/비행 청소년으로까지 그려지곤 한다. 많은 경우 실제로 청소년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다. 결국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외모를 꾸미고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알이라구..??

왜 굳이 그림 옆에 "알"이라는 단어를 써야 했을까? 왜 여학생의 종아리 근육이 이 포스터에 등장해야 했을까?

절대 다수 학교에서 치마를 입어야 하는 여학생들의 경우 긴바지를 입는 남학생들과 달리 다리 부분이 밖으로 드러나 보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원치 않는 학생들이라도 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드러내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된다. 치마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청소녀의 다리는 곧바로 신체적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이어진다.

포스터에 등장한 그림과 알은 청소녀들에게 남성/여성으로 규정된 이상적인 신체상, 성별화된 외모상을 강요한다. 근육은 남성성의 상징이 되곤 하지만 여성에겐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S라인과 매끈한 각선미를 가진 여성들이 호감을 얻으니 여기에 맞추라는 뜻이기도 하다.



단속과 통제가 아닌 자유로운 청소년 인권을 꿈꾸며..

2008년은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이었다. 그에 맞춰 청소년들 역시 자신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청소년인권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에는 청소년들 스스로의 외모를 꾸미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선언문 9조에 청소년에게는 자기 머리카락이나 복장 등을 마음대로 하고 꾸밀 권리가 있으며, 학교에 소속된 것을 이유로 교복과 이름표 착용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 '학생다움' 혹은 '청소년다움'을 정의하는 것은 결국 청소년 자신이라는 것도 분명히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은 이러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따른 단속과 통제가 아니다. 이미 청소년들은 그런 단속과 통제의 대상이 되길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편견과 고정관념 속에 살고 있는 어른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 스스로의 결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이 땅에 함께 살기 위한 노력의 시작이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홍이님과 민선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
수정 삭제
인권오름 제 148 호 [기사입력] 2009년 04월 15일 8:47:03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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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4. 7. 17:25

--- 사실은 이거, '페미니즘의 이해' 수업에서 과제가 여성학 주간 행사 참여하고 감상문 써내는 거라길래 쓰던 거였다.
근데 열심히 쓰다가 다시 안내를 보니까 그냥 여성학 주간 행사가 아니라 "여성학 주간 학술행사"로 되어 있다. 쿠궁!!
난 학술 행사는 하나도 참가 안했다 -_-;;;;;;
그래서 허탈해져서 그냥 과제로 내는 건 포기하고 원래 계획보다 줄여서 2페이지 정도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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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거의 학교 안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해야 할 정도로 대학생으로서는 불성실한 내가 오래간만에 학교에서 뭔가를 해볼 일이 생겼다. 3월 30일부터 시작하는 여성학 주간. 서울대학교 여성학 협동과정 10주년 행사라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여성학 협동과정 그 자체의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서울대 안의 여성학이랄까 여성주의랄까 그런 것의 흐름이나 현재에는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2월 무렵 관악여성주의자모임(관악여모)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아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페미니즘 문화제>, <페미니스트 박람회> 준비까지 같이 하게 되었다. 내가 관악여모를 같이 하자고 제안을 받아서 하겠다고 한 건지, 페미니즘 문화제 사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받아서 하겠다고 한 건지, 뭔가 헷갈렸지만 그냥 둘 다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무방할 듯했다.
  하지만 정작 3월 10일로 되어 있던 일제고사가 3월 31일로 미뤄지면서 본업인 청소년인권운동이 3월 31일까지 바빠져 버렸고, 페미니즘 문화제 준비 등은 계속 시간을 쪼개가며 같이 할 수 있었지만, 여성학 주간에는 충분히 참여하지 못했다. 3월 31일에 일제고사가 끝나고 그 여파로 거의 이틀간 부족한 잠을 보충해버렸기 때문에, <페미니스트 박람회> 컨셉으로 진행된 전시와 페미니즘 문화제 자체만 참여하고 그 외의 시간은 잠을 자거나 준비 중인 출판 작업에만 매달리게 됐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결국 여성학 주간 행사 중에서 참여한 건 <페미니스트 박람회>와 <페미니즘 문화제>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여기에 쓸 만한 이야기도 일단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다.

  한 2년 정도 단절되었던 페미니즘 문화제를 다시 살려보자, 페미니스트 언니들이 아직 이 캠퍼스 안에 있다는 걸 알려보자, 정작 눈에 띄는 페미니스트는 없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들만 무성한데, 그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페미니스트 우리들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페미니스트 박람회>라는 컨셉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은, 준비하는 내내 우리는 우리가 대체 뭘 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서 허우적거렸던 것 같다. 사회대여성주의연대(사연)에서는 과거에 사연에서 활동했던 페미니스트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해서 영상을 만든다고 한다. 난리부르스에서는 ‘해피엔딩의 조건’으로 상처를 이야기한다고 한다. 우리는? 서울대 안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우리에게는 성폭력 같은 선명해 보이는 주제가 있나? 아니, 그런 주제를 찾으려고 하는 게 맞긴 한 걸까?
  <페미니스트 박람회>와 <페미니즘 문화제>를 준비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었다. 퀴어, 연애, 군가산점, 성폭력, 흡연, 옷차림, 가족, 여성가족부…. 이야기할 게 없는 게 아닌데, 마치 주위를 둘러보니 360도 모두 갈 수 있기 때문에 길이 없다고 표현해야 할 상황 같은 그런 느낌. 조금씩 끌리는 것들은 있지만 확 끌리는 건 없는 상태. 굳이 주제를 “페미니스트” 그 자체로 잡았던 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들과 사람들에 대해 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명확한 목표가 있어서 미래를 지향한다기보다는, 현재를 점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공들여 만든 전시물들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전시되었고,(목요일은 문화제 준비하느라 미처 못했다.) 금요일에는 페미니즘 문화제가 치러졌다. 월요일에는 페미니스트들이 모여서 학교 안을 행진하고, ‘말풍선 터뜨리기’ 뭐 그런 캠페인 겸 퍼포먼스 같은 것도 했고… 좀 아쉬운 건 전시에 대한 사람들의 피드백을 많이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무슨 이야기라도 있나 싶어서 스누라이프 같은 곳에 가서 검색을 해봤지만 관련해서 올라온 글은 한 개도 없다. 좀 ‘파문’을 일으켜보고 싶었는데 별 반응이 없다. 킁. 퍼포먼스와 문화제는 재미있었다. 비록 사람은 20명 좀 넘게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만큼의 사람들이 그래도 서울대 안에 있다는 걸 확인했다는 걸 긍정적으로 평가하련다. 문화제 준비하면서 체감하게 된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자치적 활동에 걸려 있는 온갖 규제들은 날 짜증나게 했지만. 다음번에 또 준비한다면 좀 더 풍성하게, 그렇게 하고 싶다. 이번에도 충분히 재밌긴 했지만 아무래도 좀 풍성함이 덜했달까.

  요즘 꽂혀서 듣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서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온 것처럼. ……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 거야.”  (지민경, 「길 그 끝에 서서」 中)
  이번 <페미니즘 문화제>와 <페미니스트 박람회>를 하면서 든 생각이 딱 이런 거였다. 더 이상 대학교 안의 여성주의 단위로서 무슨 활동을 해야 할지 뚜렷하게 보이는 게 없는 건 우리가 길 끝에 서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다. 그리고 이번에 해본 <페미니즘 문화제>와 <페미니스트 박람회>는 그 길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서있는 지금 여기를 살펴본 자리였다.

추신 : 처음에는 여성학 주간 행사로 신청해서 준다고 한 100만원 그거 많아보였는데 포스터 좀 뽑고 이젤 좀 사고 해보니까, 절대로 돈이 여유 있는 게 아니었다. -_-;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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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9. 3. 30. 11:02


원래는 아즈망가 대왕이나 와라 편의점 뭐 이런 것들의 형식을 빌린, 일종의 연작 4컷 만화 같은 걸 구상했지만
열심히 그리던 걸 일제고사 반대 홍보 뛰다가 분실해서 ㅠ
급하게 그린 2컷짜리... 끙 너무 메시지 성이 강하고 스토리성이 약하잖아!!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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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옷, 캐릭터 귀엽네요. 스토리가 약하긴 하지만(이미 말했어)

    2009.03.30 22:39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냥 양성평등과, 최근에는 더 나아가서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반대하는 평등주의자가 바로 페미니스트죠. (사회적 남성과 여성을 칭하는 '젠더' 보다 '섹슈얼리티' 가 더 성적 소수자들을 포괄하는 확장된 개념이라고 하더군요.) 그냥 "여자와 남자가 평등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면, 너도 페미니스트야." 하셔도 될 듯^^

    2009.03.31 15:0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런 복합적인 것을 이제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게 맞나 싶기도 하는 생각도 전 사실 들긴 해요 ㅎㅎ 여하간 페미니스트긴 하지만요-

      2009.04.01 22:08 신고 [ ADDR : EDIT/ DEL ]
    • 사실 역사적으로 가부장제라는 게 젠더적으로 여성 뿐 아니라 나이 어린 남자와 여자, 동성애자 등 성적 소수자들을 억압, 차별하기도 했으니까요. '페미니스트' 말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단어를 아직 못들어봤어요. 그냥 평등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2009.04.03 00:10 신고 [ ADDR : EDIT/ DEL ]

걸어가는꿈2008. 12. 20. 12:15






크리스마스는 정말 즐겁고 행복한 날일까?
크리스마스 때마다 쓰나미처럼 거리에 넘실거리는 가족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온정주의...
그러나 가족은 그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공간이 아니다.
울지 않고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겠다는 산타는 대체 뭥미?!
사랑하고 연애하라고 외치며 소비를 조장하는 이 거리. 그런데 그속에도 동성애 커플들이 설 곳은 많지 않다.
크리스마스 때 반짝하는 자선 분위기는 이 사회의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진 않으면서 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카메라에 담는다.
 
크리스마스 악령들을 퇴치하는 안티 크리스마스 게릴라 액션!



게릴라 이동 경로 :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악령이 출몰하는 곳곳!
인사동 북인사마당 1시 - 종각역 2시- 명동 거리 3시 (예정. 악령들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바뀔 수도...)
 
게릴라 아이템 : 악령퇴치 전시물, 저항 캐롤, 블랙 산타 퍼포먼스, 안티 크리스마스 카드 증정 등등
 
게릴라 드레스 코드 : 검은 계통의 옷과 모자
 
게릴라 긴급 연락책 : 한낱 011-9014-8304 (같이 하시고픈 분들은 문자나 전화를 살포시 ^^)




(홍보물이 아직 최종 완성본은 아니고, 청소년 성소수자 커뮤니티 Rateen이나 사회공공성연대 등이 같이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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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가족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해서 어느새 좀 외연이 넓어진 "안티 크리스마스" 행동 계획.

가족주의의 환상 속에서 가려지는 가족 속에서 아동(청소년), 여성 등이 놓여 있는 권력관계의 문제를 드러내는 건 기본이고...

"착한 아이"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크리스마스의 연애 분위기가 이성애중심적이라는 것 (그런데 나는 "연애"를 하라고 요구하며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도 넣고 싶었다, 사실)

크리스마스의 '자선'이라는 게, '베푸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 사람만 드러낸다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정말 빈곤하거나 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복지, 사회공공성, 구조적 개선 등이지 크리스마스에만 반짝하는 '베품'이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사실 나처럼 당장 통장에 880원 있는 사람은 이런 '베품'의 대열에도 낄 수 없다 -_-; 지금 당장은 베품 좀 받고 싶네 그랴, 뷁!)



(크리스마스 자선의 적나라한 현실 -_- 어쩌면 "착한 아이" 이데올로기와도 연관될지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에서는 이것저것 재밌는 일들을 많이 기획하고 많이 한다. 그래서 좋다.
하지만 23일은 일제고사고
24일은 안티크리스마스다.

으아아아아아아아ㅏㄱㄱㄱㄱ
ㅠㅠㅠㅠ



그럼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닌 안티 크리스마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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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티 케빈 !!!

    2008.12.25 20:23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8. 8. 21. 15:58

비정규노동센터 문지선님이 콜센터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관련 연구 과정에서 일부 쓴 글인데
비정규노동센터에서 알바하다가 ㅡ_ㅡ;

공개해도 되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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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노동의 개념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란 임금을 위해 외적으로 관찰 가능한 표정 및 몸짓의 표현을 창출하는 느낌의 감정 관리에 근간한 노동이다. 즉 고객이 우호적이고 안정된 장소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창출하도록 외모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억압하거나 표현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관리하는 노동이다. 구체적으로 업무상 요구되는 특정한 감정상태의 연출·유지를 위해 행하는 일체의 감정관리 활동이 직무의 40%이상을 차지하는 노동유형으로서, 간호사, 교사, 창구업무 종사자, 승무원, 보모, 판매원 같은 주로 서비스직이 해당된다.
 그런데 대인서비스를 업무로 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은 공통적으로 감정의 규칙을 상품화된 노동으로 만드는 표현의 규칙(display rules)을 통해 감정노동을 수행한다.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고객과 서비스교류가 일어나는 동안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해 보이는 특정한 감정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노동이 부정적인 느낌에도 불구하고 웃음 짓는 것과 같이 자신의 표현을 통제하고 수정하는 '가식행위', 적절한 감정표현을 위해 표면적인 외관보다도 오히려 자신의 느낌을 의식적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인 '내면화행위'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감정노동의 문제
 고객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감정노동자는 고객에게 감사, 긴장완화, 즐거움 같은 감정적 반응을 주도록 기대되는 동시에 고용주로부터 감정 활동의 통제를 받고 있다. 그런데 외식산업의 대중화와 레저산업의 확충으로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감정노동자에 대한 기대주순은 점차 높아지는 반면, 사회적 인식이나 보수체계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 감정노동자의 직무 태도가 바로 생산성 및 판매실적에 직결되는 것으로 사용자가 인식함으로써, 노동자는 실적 향상 및 고객 친절에 대한 지속적인 압력을 받고 있다. 이처럼 성과를 강조하는 사용자의 압력은 우울증, 화병,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같은 대인서비스로 인한 직무스트레스 직업병과 함께 감정노동자의 심리적 건강수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노동시장에서 감정노동직이 여성에게 전가되는 경우가 많으면서 감정노동이 성차별적 통념을 재강화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즉 여성이 고정된 성 기대에 맞추어 업무를 수행하도록 요구하면서, 여성이 감정노동에 가장 적합한 노동력이며 서비스는 여성의 일이라는 통념을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감정노동을 중시하는 사용자의 인식과 달리, 육체노동의 강도와 지식의 유무로 숙련 정도를 평가해온 기존 노동평가체계에서 수량화가 어려워 쉽게 생산성증가를 계산할 수 없는 감정노동의 저임금도 문제이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감정노동직은 저임금의 하위 서비스직이다. 여기에 전체의 60%를 차지하는 서비스산업이 다른 산업에 비해 비정규직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여성 서비스직 감정노동자가 저임금의 비정규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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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익한 포스팅, 주소 좀 가져갈께요. 원치 않으시면 말씀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2008.11.04 07:16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08. 8. 19. 22:44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성-청소년, 보호주의에 묻힌 성적 자기결정권

난다

시간이 좀 흘렀지만, 촛불집회에서 연행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혹시 아실까 모르겠어요. 그 때 기사가 났었는데, 대부분 기사 내용이 '집에 가고 싶다고 울부짖는 여중생...' 뭐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났어요. 근데 사실 전 집에 가고 싶다고 울부짖고 그런 적 없는데, 그 때 언론들에서는 모두들 '집에 가고 싶어요, 무서워요, 저 보내주세요 흑흑... 한 여중생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런 내용을 담았었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어린 10대 소녀로, 그 기사들은 절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청소년은, 보호해줘야 할 약자, 보호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에요. 언제부터 나는 누군가가 지켜줘야 했을까요? 왜 나는 보호받아야 할 어린 소녀일까요? 연행당할 때 '미성년자는 풀어줘라!'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10시 이후에는 집회에 남아있지 말고 집에 들어가라고 할 때, 항상 따라오는 건, 내가 '청소년'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청소년이라 못하고, 안되는 게 굉장히 많아요. 일단 술 담배 마음대로 못 삽니다. 찜질방도 10시 이후로는 보호자 없이는 출입 못 하구요. 숙박시설도 보호자가 없으면 마찬가지로 잠 못 자구요. 그래서 청소년들은 밖에 나와도 잘 곳이 없어요. 이 모든 것들은 다 유해환경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는 건데, 그 유해환경에 '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 선거에서 당선돼 우리가 다시 한숨 쉴 수밖에 없게 만든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관계를 한 학생은 퇴학시킬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청소년은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사회의 시선에서 비롯됩니다. 청소년은 아직 판단력이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하고, 그렇기 때문에 유해환경에 쉽게 물들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는 약자인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호해주겠다는 말 속에 권력 관계가 있는 거고, 보호라는 말로 포장된 통제나 억압, 지배가 있게 됩니다. 보호라는 말로 차단시켜 놓음으로써 격리시키는 효과도 있는 것이구요.
보호는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보호만 싹 없앤다면 여러 문제들이 생길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보호만 하는 것이 맞나? 그것은 현상 유지를 위한 방책이지, 해결을 위한 노력이 아니지요. 어느 선에서 차단만 시켜놓는 미봉책입니다. 예를 들면, 청소년 유해 환경이라고 했을 때 뭔가가 유해 하다면 유해 환경 자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 건데 그것을 출입 금지로만 그냥 금기시 해놓는 것. 성을 이야기 하자면, 그러니까 성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너희들, 잘못하면 임신할 수도 있으니까'인데, 지금 사회에서 청소년이 임신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낙태'를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단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낳아서 어쩔건데?'가 되어버리는거죠. 또 사회적인 시선들, '아니, 저 어린 것들이.' 하는 비난의 눈길. 하지만 청소년들이 임신 했을 때, 낳아서 양육할 수 있게 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어야 하는거 아닐까요? 임신을 하면 인생이 불행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을 통제해서 막겠다는 것은 문제를 덮어 놓거나 어느 선에서 눌러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을 금지했을 때, 보호하려 했을 때 보다 청소년의 임신율, 낙태율, 이런 것들이 수치상 줄어들 순 있지만 사라지는 것은 아닌거고, 청소년의 행복과도 거리가 멀어지지요. 또 사실 낙태 비율만 놓고 보자면, 기혼 여성의 낙태율이 제일 높다고 해요. 임신을 하고도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해 아이를 지워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양육 문제는 청소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양육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리고 있는 사회의 문제인거죠.
다시 보호주의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여자니까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밤이 위험해지는 환경, 밤에 범죄 위험(성폭행, 납치, 살인 등..)이  높은데, 범죄의 위험성에 대해 CCTV설치 정도로 해결하려는 것이나, 위험하니까 일찍 집에 들어오라고 하는 것들. 그 위험한 상황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찌 보면, 밤길 이야기는 '여성에 대한 보호'로도 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소년이든, 비청소년이든, 여성이 남성보다 더 쉽게 '보호의 대상'이 됩니다. 비청소년이 되어도, 여성인 경우 집 안에서 외박을 금지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 연행 사건에 대한 기사의 내용도, 실은 그 청소년이 남성 청소년이었다면, 그런 식의 기사는 나오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호'에 있어서, 청소년 사이에서도 성별의 차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특히 성, 섹스에 관해서는 나이보다 성별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보호주의'라는 것에 '성적자기결정권'은 묻히게 됩니다.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아직 당연한 얘기가 아닌 것 같아요. 인정받지 못하고, 주위에 숨겨야 될 것만 같은 분위기, 청소년이 섹스하기엔 사실 너무나 열악한 환경,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없는 것들, 등등. 하지만 성에 대한 통제가, 청소년의 성을 금기하는 것도 있지만 비혼이란 범주에 청소년이 속한다고 본다면, 20대일지라도 비혼일 경우는 섹스했다고 하면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청소년이더라도 비혼부는 없고, 비혼모는 있지요. 임신후 결과에서, 여성 청소년에게만 더 많은 성적 통제가 가해지고, 남성 청소년의 경우는 다른 얘기가 되는 것이구요. 남성 청소년의 성경험이 여성 청소년보다 일찍 시작한다는 통계도 있고 경험에 대한 해석에서도 여성 청소년보다 남성 청소년에게 훨씬 관대하게 적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청소년과 남성 청소년의 차이. 결혼을 중심으로 봤을 때, 결혼하지 않았다는 게 여성 청소년에게 훨씬 크게 적용하지요. 혼전순결에 대한 사회적 강박 같은 걸까요? 
사랑니라는 영화를 보면 여성 학원 교사가 남자 아이와 여관을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모텔 종업원이 비난을 할 때는 그 여성에게 비난을 가합니다. 20대, 30대 남성과 10대 여성이 할 때에도 도덕적 비난의 대상은 일반적으로는 여성에게 가게 됩니다. 그 때는 '저 발랑 까진 어린 것이...'라는 얘기가 되는 거지요.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아직도 쉬쉬하는 사회. 보호를 위한 건가요? 그렇다면, 그 보호를 거부하겠습니다. 이제는 당당히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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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속에서도 권리를 외치다


공현


청소년 성폭력 사건의 그 ‘특별함’

  청소년(아동) 성폭력 사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분명 웬만한 청소년 성폭력 사건들은 남성과 여성의 성별 권력(물론 구체적 사건에 따라 +a가 있다.) 속에 일어난 여타의 성폭력 사건과 그리 다르지 않은 성폭력 사건일 텐데, 청소년 성폭력 사건이 알려지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갖 ‘특별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사람들은 아동-청소년이 피해자이고 비청소년-‘성인’이 가해자인 사건(예컨대, 최근에는 혜진 씨 예슬 씨가 피해자였던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는 천인공노(天人共怒), 인면수심(人面獸心) 등 한자어를 써가며 혀를 끌끌 찬다. 그러면서도 집에서 무슨 변태 성욕의 증거가 발견되었다면서 가해자를 열심히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타자화 한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보호주의를 발동시켜서 성폭력 범죄자들을 더욱 빡세게 처벌하겠다는 법률 개정 검토를 하고, 부모들은 아동 성폭력 피해 예방을 위해 밤길 조심하고 처음 보는 낯선 사람 조심하고 등등의 조심 사항들을 내놓는다.
  아동-청소년이 가해자인 사건(예컨대, 대표적인 것이 2004년에 있었던 밀양에서의 집단 성폭행 사건)이 공론화되면,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는 것에 대해 사회적인 비난이 커지며, ‘미성년자’들의 ‘충동적인’ 범행에 대해 공격이 가해지고 청소년들의 ‘미성숙’함이 강조된다. 청소년에 대한 음란물 규제와 같은 조치도 항상 따라 다닌다. 최근에 있었던 ‘대구 초등학교 성폭력 사건’에서도, 정부에서 검토한다고 한 조치는 결국 ‘음란물 규제’가 아니었던가?
  분명히 아동-청소년들의 성폭력 사건은 대개 성별 권력이 더욱 강하게 작용한 ‘전형적인’ 성폭력 사건이다. 아동-청소년들의 사회적 약자로서의 지위가 반영된 경우도 많지만, 더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성별 권력이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에 대한 책임 전가라거나 사건을 공론화시키는 것을 금기시하는 모습도, 여타의 성폭력 사건들과 비슷한 모습들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이 사회의 태도는 아동-청소년들의 특수한 위치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청소년의 특성을 고려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청소녀/년의 성적 결정권”이란 이름으로 특별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청소년에게 위험한 성

  그렇다. 청소년에게 성(性)은 위험한 것이다. 이 말은 어쩌면 여성에게 성은 위험한 것이다, 라는 말과도 비슷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여하간 청소년들에게 성은 위험한데, 하나는 아동-청소년 성폭력 때문(가해/피해 모든 면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청소년에게 성행위는 금기시되며 그러다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난감하기 때문이다.
  성폭력의 위험은 연령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아동-청소년 성폭력에 특히 민감한 이 사회(이게 과연 ‘약자에 대한 폭력에 분노’하는 ‘순수’한 마음일까?)에서는 아동-청소년 성폭력만 특히 강조되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성폭력은 특히 위험하다. 하나는 ‘자라나는 새싹들’인 청소년들이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충동적’이고 ‘미성숙’한 청소년들이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 때문이다. 이 인식 안에는 청소년에 대한 이중적인 고정관념들이 이중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성이 위험한 두 번째 이유는, 청소년들의 성행위는 이 사회에서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성행위를 금기시하는 데는,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신세망친다, 라는 사회경제적 지위의 문제와 더불어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가 부여하는 생애주기-나이주의(나이주의라는 말은 여기선 매우 복합적으로 나이에 따른 권력과 위계를 뜻함과 동시에 나이에 따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생애주기의 의미를 지닌다.)의 문제가 동시에 얽혀 있다. 고등학교 때인가 국어 선생이 “어른”의 어원이 성행위를 경험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청소년들이 성행위를 하는 것은 사회가 정한 청소년들의 틀과 지위를 벗어나는 일이기에 위험하다.
  최근 인기 도서인 『88만원 세대』를 보면 첫 챕터에 “첫 섹스의 경제학, 동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의 10대”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 10대들이 섹스를 하지 못하는 경제적인 문제를 구구절절 분석해놨는데, 옳은 소리이긴 하지만 청소년들의 성행위를 금기시하는 것이 꼭 경제적 지위의 문제만은 아니다. 30대 기혼 여성이 임신을 했는데 경제적 여건이 매우 곤란한 경우 주변에서는 걱정을 하고 염려스러워 하긴 하겠지만, 10대 미혼(비혼) 여성이 임신을 한 경우에는 비난과 좀 다른 스트레스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청소년 안의 성별 권력

  그런 이야기로 원고의 반절을 쓰고서도, 또 청소년들 사이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청소년’의 특수성을 생각해야 하지만 동시에 청소년들 안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존재한다. 청소년이 가해자인 성폭력 사건들도 충분히 그런 점을 보여주고 있고, 일상적으로는 수업 시간에 남성중심적인 성적 농담을 통해 친밀한 공모 관계를 형성하는 남성 교사와 남성 학생들의 관계를 봐도 그렇다. 최근에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성구매를 한 남성 청소년들에 대해 교사가 통제를 잘못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언론이나 사람들을 봐도 남성의 성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식의 판타지는 계속된다.(물론 거기에는 ‘미성숙한’ 청소년들을 ‘성숙한’ 성인들이 관리해야 한다는 의식도 같이 있다.)
  또한, 바로 요 앞에서 청소년들에게 성이 금기시되고 있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이 또한 남성 청소년의 경우와 여성 청소년의 경우가 다르게 취급되며, 미혼/기혼 기준 또한 여성 청소년들에게 매우 강하게 적용된다. 남성 청소년들의 성행위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난다의 발제에 충분히 자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나와 있으니까 이만 줄이겠다.)


청소년의 성적 권리

  그래서, 도대체 논리적으로 이어지는 것 같지 않은 이 토막난 원고의 끝은 청소년의 성적 권리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발제라는 게 원래 시원한 답을 던져주는 게 아니라 함께 토론할 이야기거리를 꺼내보자는 것이니 속 시원하지 않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청소년의 성적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고 인정되어야 한다. 비록 아동권리협약에서도 언급하지 않는 홀대받는 권리이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권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성적 권리라는 것은 성적 자기결정권, 성에 대해 알 권리, 성평등(동성애나 성전환 등을 포함한)에 대한 권리 기타 등등을 의미한다. 비록 청소년의 성적인 자유가 힘 있는 남성 청소년들에게 단순한 자유주의나 프리섹스로 오인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청소년 안에서 성적 권력 관계가 엄존하기에 수많은 고민들이 필요하더라도, 청소년의 성적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청소년에게도 자기결정권이 있다, 라고 하면 “그래 당연하지. 하지만…” 정도로 말하는 사람들도 청소년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 이야기하면 매우 과민하게 반응한다. 왜 이 사회는 청소년들의 성적 권리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할까? 그것이 그토록 위험한가? 그것이 정녕 그리도 위험하다면, 그것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적어도 그 사람들이 18세 이전에 섹스를 하면 자궁에 질병이 생길 확률이 몇 배 높아지고 어쩌구 저쩌구 하는 이유 때문에 ‘위험’하다는 건 아닐 테니까.) 청소년들에게는 성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성을 권리가 아닌 보호와 통제, 위협의 관점에서만 접근할 때 청소년들은 그리 행복하지도 못할 것이고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A4를 3페이지나 낭비했다는 것은 죄악인가?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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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꿈2008. 6. 28. 15:55
며칠 전에 신도림에서 88번 버스를 타고 역곡으로 가는데-
원래 밤에는 88번 버스에 사람이 좀 많다 - 1호선이 좀 일찍 끊어지는 편이라 그런지 어떤지;

그런데 내 뒤에 탄 어떤 사람이 자꾸 내 오른팔을 더듬었다.
처음엔 하도 사람이 많아서 잡을 데가 없어서 그러나, 싶어서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그냥 계속 팔을 뿌리치기만 하고 특별한 행동 없이 가만히 있었다.
숨 막히게 사람이 많았던 탓에 고개를 돌려서 이게 누구 손인지 확인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뿌리쳐도 뿌리쳐도 자꾸 팔을 더듬는 거에 기분이 좀 나빠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손이 등에 맨 가방 사이로 들어와서 옆구리를 더듬었다.
몸에 소름이 돋고 기분이 더 나빠졌다.
옆구리를 더듬고,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누르고...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하고 온갖 생각들을 머리에서 굴리면서 계속 몸을 빼서 다른 데로 가려고 했으나 도저히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애써 곁눈질로 보니까 술에 취한 거 같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아저씨였다.

소리를 지르거나 성폭행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그런 적 없다고 하거나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하거나 하면 더 시끄러워질 거 같았고... 혹시 술에 취했는데 폭력을 행사하거나 하진 않을까 무서웠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그 아저씨의 손은 급기야 엉덩이를 만지기 시작했는데

열도 받긴 받았지만 앞서 한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어중간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죄송하지만 손 좀 치워주실래요? 자꾸 닿아서..."
이렇게 말하니까 다행히 그 아저씨가 죄송하다고, 모르고 그랬다고 하면서 손을 치웠는데

그 다음에 내가 내릴 때까지도 계속 입속으로 뭘 웅얼웅얼거려서 무서웠다. 나한테 욕하는 건 아닌가...

어지간히 술에 취했는지 막 그 비좁은 버스 안에서 신발 벗고 양말 벗고 맨발을 의자에 올려놓고 -; 다른 사람들도 다 막 피하던데 그 아저씨

아휴 ㅠㅠ 끔찍한 느낌.


한 번 당하고 나니까,
일생에 걸쳐서 이런 성폭력 경험 한 번 없는  '대한민국' 여성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달까---- (심지어 나는 생물학적으로나 법적으로 여성도 아닌데)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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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잌후, ,

    2008.06.28 19:17 [ ADDR : EDIT/ DEL : REPLY ]
  2. 어머, 없어요, 그런 '대한민국' 여성은.

    2008.07.31 01:2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딱딱한꿈2008. 6. 18. 14:24


이걸 리포트라고 해야 하는 건지...

흠 자기고백적으로 쓰긴 했는데 --;;

원래 15일까지였는데 3일이나 딜레이해서 흑흑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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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혁은

    나도 완전 자기고백적으로 썼다 -_- 딜레이 3일도 괜찮음

    2008.06.18 23:57 [ ADDR : EDIT/ DEL : REPLY ]

흘러들어온꿈2008. 5. 27. 02:23
모두에게 고민거리들을 던져줄 수 있는 언론이길 바라며
여성주의 저널 앤 창간호에 바치는 비평


윤종

군사주의 비판과 여성주의라는 조합에 대해

 “여성주의+병역거부는 참 최악의 조합인 듯”
  모 대학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병역거부, 군사주의, 그리고 여성’에 대한 세미나 홍보 글에 달린 댓글 중 하나다. 병역거부만으로도 온갖 욕을 먹는데, 거기에 여성주의라니! ‘사회부적응자’들과 ‘꼴페미’들이 합쳐지는 것에 불편해하는 마음을 참으로 간명하게 드러낸, 쓴 웃음 주시는 댓글이 아닐 수 없다. 오, 이런.

  그리고 그런 ‘최악의 조합’을 성공회대 여성주의 저널 n[앤]이 창간호(통권2호)에서부터 들고 나왔다. 누군가에게 ‘최악’인 조합은,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조합이 되기도 한다. 일상이 자명하고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 군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인용한 댓글에서는 “병역거부”로 표상되는)와 여성주의의 만남이 ‘최악의 조합’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것이 가장 당연시되어온 일상의 부분들에 도전하는 것이며 그것을 해체­재구성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병역거부를 고민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교육제도에 배어 있는 군사주의들과 늘상 접하는 한 청소년인권운동가로서, 또한 여성주의나 군사주의 등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학내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한 대학생으로서 앤이 창간호 기획으로 군사주의를 잡은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형식적 수사나 아부로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앤이 그 주제 선정에서 여성주의 언론으로서 당연시되어온 일상을 불편하게 만들고 한편으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내려는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앤의 군사주의 기획에서 다소 아쉬웠던 것은, 몇몇 부분들이 다소 군대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에 기대어서 쓴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예컨대 실제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거나 하면 군대는 학벌이나 ‘빽’ 등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앤의 글에서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쉽게 통용되던 연령주의와 학벌주의조차도 그 틈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고 있는데, 나는 이런 느낌의 서술들이 군대와 사회를 분리시키며 군대를 특수한 공간으로 규정하는 군대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에 의거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군사주의에 대한 논의를 군대에만 한정짓거나 군대 경험에 대한 것으로만 해서는 안 되지만, 오히려 그러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상 속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 이런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을 높인다면 글의 필자들의 경험들이 중복되는 부분을 줄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쓰고 창간호를 다시 보다 보니 “여성주의가 경험주의에 포위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보였다. 아하하-ㅅ;;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여성주의가 경험주의에 포위되어서는 안 되지만, 모든 정치의 한 근간이 사람들의 실제 ‘경험’인 건 부정할 수 없다.)

  군사주의, 평화 같은 개념들을 군대, 전쟁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두루 존재하는 것으로 사고하려는 시도, 그리고 여성주의의 문제의식과 연결하려는 시도는, 앤 창간호에서 권인숙 씨가 말한 것처럼 그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외국까지 합치면, 그게 기껏해야 20여년 정도인데 ― 응? 20여년?! 20년이라는 시간은 분명히 ‘여성주의의 역사’라거나 ‘근대’라거나 ‘군대의 역사’ 같은 큰 시간의 틀에서 보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실제 우리들의 삶에서 보면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다. 나만 해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산 시간이 20년인데, 군사주의에 대한 연구는 나보다도 오래되었다. -_-!
  2, 3년 전부터 군사주의 문제와 군사주의+여성주의의 문제를 얄팍하게라도 접해오거나 고민해온 나 같은 사람한테 앤 창간호의 이야기는 조금은 식상했고, 그래서인지 군사주의 기획보다는 밤거리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성공회대의 다수 독자 분들에게 앤 창간호의 내용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다. 막연하게 느껴오던 군대―병역―군사주의에 대한 불편함을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지, 전혀 모르던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기회였을지, 불편해하면서 “여성주의+병역거부는 참 최악의 조합인 듯”이라고 뒷담을 까고 있었을지, 혹은 나처럼 다소 식상한 이야기라고 느끼고 있었을지…. 군사주의와 평화의 문제에 대해, 좀 새롭거나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을 기대하며 앤 창간호를 펼쳤던 나의 과욕일까?
  앞으로도 이러한 불일치는 계속될 것이다. 숱한 여성주의의 문제들을 다루다 보면, 정말 몇몇 새로운 주제들을 제외하면 많은 것들이 그 전에 여러 번 이야기되어 온 주제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아주 새롭게 받아들이거나 불편해하는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들을 이제는 식상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독자층의 이러한 불일치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인데, “운동가는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앤은 같은 말을 기꺼이 반복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반복하거나, 아니면 다른 말을 생산해내는 길을 택할 것인가?



여성주의 언론운동의 임무 (<-군사주의적 용어?)

  그래서, 여성주의 저널이란 무엇인가? 혹은 대학 안에서의 여성주의 언론운동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역사적으로는 여성주의가 대학 안에서 이야기되기 시작하고 ‘영페미니스트’라는 용어가 흘러다니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과 연관지어 설명해야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겠다.(지식과 지면이 모두 짧아서.)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정기적으로 자신들의 발언을 담아서 배포하는 여성주의 언론운동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그나마 효과적인 활동 방식 중 하나이다. 하지만 여성주의 저널은 단순히 여성주의를 알리고 선전하는 선명하고 투명한 정치적 프로파간다일 수는 없다.
  단적인 예로, ‘다함께’에서 발행하는 <맞불>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정도 단일한 이론적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에 선명한 주장을 담을 수 있는 <맞불>과 여성주의 언론들은 그 조건이 다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이미 이론적/운동적으로 단일한 무언가가 아니라, 다양한 페미니즘‘들’로 분열된 상태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주의와 여성 내부의 차이, 그리고 자기 성찰과 반복되는 해체, 재구성의 움직임 속에 내파(內破)되었다. 이제 페미니즘은, 단일하고 선명한 정치적 행동주의로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고민하고 질문하고 많은 여성주의“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여성주의 언론 또한 선명한 프로파간다로서 만들어지기보다는 여러 고민들, 자기 모순과 성찰, 복잡성 속을 헤매는 텍스트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성주의 언론운동은,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계몽’(?)하고 정답을 제시하는 방식보다는, 화두를 던지고 그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고민들을 풀어나가는 방식,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취하곤 하며 그러한 위치 설정에 더 큰 의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앤에 붙는 수식어가 “내가 묻는 방식”인 이유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라고 나는 멋대로 추측해본다.

  보통 ‘정답’은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단일한 ‘진실’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제시되고 주어진 진실은 여하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강제적이다. 하지만 ‘질문’은 불편하다. 특히 ‘정답’이 없는 ‘질문’, 함께 여러 가지 답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하는 것 같은 ‘질문’은 불편하다. 주어지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비판’ 또한 불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불편하거나 힘들거나이다. 앤 하나를 발간하기 위해서 앤 편집진들은 얼마나 많은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거치는가? 앤이 풀어내는 여러 이야기들 속에서 실제로 새로운 삶을 재구성해내고 생산해내기 위한 고통은 또 얼마나 힘든가? 동시에 그런 고통, 그런 불편함은 일종의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마조히즘적인 기쁨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_-) 그동안 억압되어오고 언어화되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표현되고 생산되는 행복이며, 앤이라는 물질화된 결과물에서 느끼는 성취감이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앤의 독자들은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끝맺고 싶다. 따라서 앤은 앤을 읽는 그 많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성격의 이야기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담아내야 한다. 예컨대 군사주의 기획 같은 경우에는, ‘모두’에게 ‘불편한’ 화두와 고민거리들을 던져주기 위해서는 군대 문화의 이야기, 일상적 군사주의에 대한 이야기, 병역거부 운동에 대한 이야기, 평화운동에 대한 이야기, 다양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 등등이 모두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산문, 운문, 삽화, 만화, 사진 등등 다양한 전달 방식을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모두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화제가 되는 앤이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역량을 고려할 때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있다 보면 조금은 더 좋은 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앤이 같은 말을 반복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묻는 다른 질문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물건이 되었으면 한다. 비록 “여성주의”라면 일단 삐딱하게 ‘낙인’을 찍고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더라도, 그 수가 많건 적건 앤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당히 불편한 책이 되었으면 한다. 너무 글만 넣지 말고 다른 표현 방식들도 실험하면서… ^^; 앤에 대한 나의 이 너무나 유한한 사랑을 담아, 참으로 유한하게 구성된 날림 글을 마친다.


* 미처 본문에는 끼워 넣을 곳을 찾지 못했는데, 나는 앤에서 뒤쪽에 예산 사용 내역과 후원 등을 밝히는 게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안의 여러 ‘저널’들을 봐왔지만 이런 귀찮은 작업을 하는 곳은 얼마 없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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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08. 4. 14. 02:01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조주은) 책 3장 중에서 발췌

 

(청소년인권운동 같이 하는 청소년들과 보려고 타이핑했습니다 헥헥;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되어서 출판사나 저자가 문제제기를 하면 삭제하겠습니다.)

 




아동기의 신화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2003년, 대학 캠퍼스 구석구석에는 이라크 전쟁의 부당함을 알리는 대자보가 나붙고, 인터넷 공간 곳곳에는 전쟁에 관한 토론방과 사진, 동영상들이 넘쳐났다.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대자보에는 병원에서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거나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라크 어린아이의 사진들이 있었다. 전쟁의 폭력과 참상을 알리는 대자보 가운데 사람들을 가장 많이 모이게 했던 것은 피해 받은 어린아이들을 전시한 사진전이었다. 전쟁의 공포와 육체적인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라크 어린아이의 울음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궁금증이 일었다. 이라크전의 피해자 중에는 여러 민간인이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장애인이나 노인보다 어린이가 받는 고통에 더 민감한 걸까? 그리고 왜 그것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는 것일까?

     이것은 근대화와 산업자본주의의 싹이 트면서 부각되기 시작한 아동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관련이 있다. 16세기 전까지만 해도 아동, 어린이 같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이를 위해 고안된 장난감이나 특별한 이론들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작은 어른이었고 그렇게 다루어졌다.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어 계급이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아동에 대한 이론과 상품이 쏟아졌다. 아동 관련 서적들의 모든 전제, ‘어릴 때 결정된다’류의 이론들과 그것을 자극하는 상품들이 그것이다. 몇 세 때 지능이 완성되고 몇 세 때 인격 형성이 마무리된다는 이론들은 결국 아이와 관련된 모든 문제와 책임을 이 시기에 아이와 함께 보내지 못한 어머니들에게 전가시킨다. 만약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못하거나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한다면, 혹은 지나친 말썽쟁이가 된다면, 그에 대한 일차적인 원인은 어린 시기에 아이와 함께 집에 머물면서 적절한 자극과 애정어린 보살핌을 주지 못했다고 간주되는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게다가 완벽한 아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모든 어머니들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반성 중이다.

     어린이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특별하고 섬세한 보호와 훈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아동기의 신화는 일하는 기혼 여성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여성들은 ‘제일 중요한 시기에 애하고 같이 있어줘야 할 것 같아서’ 입덧 때문에 정류장마다 내려 구토하면서도 견디며 직장을 계속 다녔건만 출산 후 기어이 사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아동기 신화는 일터와 삶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가정에 남게 된 중간계급 여성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다.



근대의 제왕으로 등장한 어린이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각별한 보호와 애정의 대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안의 심각성과 폭력성을 ‘피해 받는 어린이’를 통해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아내 구타의 심각성을 알릴 때 순진무구한 자녀가 받게 될 악영향을 이야기하고,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을 때 ‘단결 투쟁’이라는 네 글자를 빨간 머리띠로 두른 해맑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다. 따라서 이라크 전의 경우에도 이에 반대하는 논리로 힘의 정치니 신자유주의 세계화니 군수 자본가 따위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전시 상황에서 고통받는 소녀, 병원에서 붕대를 감고 고통스럽게 젖을 빠는 어린아이의 사진 한 장이면 반전 시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어린아이의 위치는 특별하다.

     착취를 근간으로 하는 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고, 보호받을 필요가 있으며, 연약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라는 언표의 이면에는 ‘그토록 귀한 이를 지켜냐애 할 누군가’가 있다. 이때 특히 소중한 존재가 아이일 때는 사회와 국가의 책임보다 가족의 개별 책임, 그(부모) 중에서도 콕 집어 어머니(여성)의 책임이 강조된다. 백지와 같은 어린아이를 일차적으로 보호하고 지켜야 할 존재는 여성, 어머니라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사회 곳곳을 관통하고 있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과도한 밀착은 기혼 여성들이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갖는 데 혼란을 초래한다. 기혼 여성이 자아 성취 욕구 때문에 어린 자녀를 떼어놓고 일하면 이기적인 엄마로 비난받지만, 갓난아이의 병원비 마련 등 어머니 노릇을 위해 노동을 하면 감동적인 일로 칭송받는다.

   

아동기에 대한 새 개념이 아이와 어머니 모두 해방시킨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아이들이 먹을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는 온갖 이유들로 아이들 일상에 넘치는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이 넘치는 관심도 아이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도구적인 관심 아닐까? 장애인, 어르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장애인 성인 남녀도 좋은 먹거리를 먹으며 우리 사회의 애정 어린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아동에 대한 각별한 보호와 투자를 해야 한다’는 논리 뒤에는 ‘아이들은 다음 세대를 책임져 나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아이들은 미래의 일꾼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좋은 음식을 먹고 훌륭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비장애인 중심주의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장애 아동을 다시 배제시킬 위험성을 품고 있다. 더불어 어린이에 대해 과도한 보호와 애정을 강조하는 일은 어머니들로 하여금 불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할 수 있고, 그런 보살핌을 받는 아동의 삶 또한 행복하다고만 할 순 없다. 아동기의 신화를 활용해 “내 아이는 달라요”라는 기치를 내거는 유아용품들은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에게 선택을 둘러싼 갈등을 안겨주는가?


     나는 이라크전과 한국군 파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만 “단지 그곳에 어린이가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전시 현장에 있는 어런이는 전쟁 반대의 다양한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그 논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착취를 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아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동기의 발명으로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분리되었지만, 아동이 어른의 세계에 통합된다면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훌륭한 아이란 누가 어떤 기준에 의해 정한 것인가? 공부 잘하고 예의 바르다는 것이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로 채택될 수 있는 것인가? 좋은 어머니란 어떤 어머니인가? 좋은 아버지는 어떠해야 하는가? 아동(기)에 대한 정의는 변화하고 있는 시대 현실을 반영하여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새롭게 내려져야 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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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08. 2. 14. 11:37

지구를 살리는 착한 발렌타인 데이

누구나 한 번 쯤은 발렌타인 데이에 마음 설레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수줍은 고백과 더불어 초콜릿과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해마다 2월 14일이면 화려하게 포장된 갖가지 초콜릿과 장미꽃다발이 거리와 상점, 백화점 진열대를 장식하면서 연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번에는 어떤 선물을 할까?

  일 년에 단 한 번,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는 대가로 지구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 점점 커지고 있다면, 달콤한 초콜릿을 맛보기 위해 지구 저편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착취하고 있다면, 순간의 화려함을 위해 준비된 장미꽃의 생명력이 인간의 이기심으로 꺾인다면, 나는 너무 폭력적인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번 발렌타인데이에는 판에 박힌 듯이 찍어낸 초콜릿 상자 속 내 마음을 선물하기보다 소박하고 자연을 생각하는 착한 지구인, 착한 소비자가 되는 기회를 나와 그이에게 선물해보자!

여기 여성환경연대가 제안하는 ‘착한 발렌타인데이를 보내는 7가지 방법’이 있다.

착한 발렌타인 데이를 보내는 7가지 방법

1. (비싼 외식)대신 (나눔의 기부카드)를 선물한다.

2. (꽃다발)대신 (작은 화분)을 선물한다.

3. (고열랑 초콜릿)대신 (달콤한 키스)를 선물한다.

4. (과대포장) 대신 (재사용 포장 -작은 리본) 으로 선물한다.

5. (고가의 선물)대신 (직접 만든 물건-천연비누, 밀랍초 등)을 선물한다.

6. (새로 산 카드)대신 (직접 만든 카드나 편지)에 마음을 전한다.

7. (나쁜 초콜릿)대신 (착한 초콜릿)을 선물한다. 보통 시중에 판매되는 초콜릿은 아동노동착취와 화학비료를 쓴 코코아에서 나온다. 여기서 ‘착한 초콜릿’이라 함은 아동노동을 착취하지 않고, 유기농으로 재배한 코코아로 만든 공정무역으로 생산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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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의미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_@
음;; 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ㅂ-;;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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