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에 해당되는 글 246건

  1. 2014.05.14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 (1)
  2. 2014.05.12 표는없어도할말은있다! 경기도청소년들과 교육감예비후보들의 토론마당 (2014.05.17.)
  3. 2014.04.26 ‘아동학대’ 문제,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바꾸는’ 것으로
  4. 2014.04.04 실수할 기회가 필요한 이유 - 겨울왕국 리뷰
  5. 2014.03.30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소식지 「활력소」 제1호 (2014.03.30.)
  6. 2014.03.28 교육도 연대도 '평등'에서 시작해야
  7. 2014.03.21 『안녕들하십니까? -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자보들』 _ 안녕들 하냐는 그 질문은,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8. 2014.03.21 (아수나로) 청소년신문 〔요즘것들〕 창간준비호
  9. 2014.03.19 ‘학생은 학생답게’ 캠페인 - 학생답게 학생인권을 잘 보장받읍시다
  10. 2013.12.19 청소년의 대자보는 안녕들 하십니까? 청소년 대자보 및 탄압 사례를 모읍니다
  11. 2013.12.09 [아수나로 논평] 수능 뒤에도 고3들을 학교에 가둬두라고? 학생들이 노는 게 그렇게 보기 싫나?
  12. 2013.11.19 따끈할 권리! 청소년 겉옷 규제 폐지하라!
  13. 2013.11.15 [아수나로 논평] 차별과 편견, 감시와 통제로 얼룩진 청소년 게임규제를 리셋해야 한다
  14. 2013.10.25 전교조 숨통 조인 한국 사회, '한고학연'의 추억
  15. 2013.09.14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인천 청소년 1515인 시국선언 (2013.09.07.)
  16. 2013.09.04 [아수나로 논평] 똥 같은 소리라도 말할 자유는 있다! 모두가 입 다무는 학교가 아니라 모두가 입을 여는 학교를 만들자.
  17. 2013.09.02 『파란만장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백서』 발간! 신청받습니다~
  18. 2013.08.30 타도! 보호 독재, 어른 독재
  19. 2013.08.25 주간경향 특집 : 2008년의 '촛불 청소년'
  20. 2013.08.25 ‘청소년운동론’ 예고편
걸어가는꿈2014. 5. 14. 10:28
(5월 13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인권단체 간담회에서 '평등한 애도'라는 주제로 발제했던 글을, 한두 줄 보완했습니다.)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투덜거림



공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감정


  다른 사람의 일에 대체로 무덤덤하고,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는 슬퍼하지 않는 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며칠간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끊임없이 소식을 전해오는 미디어 때문일까. 마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가 뒤집히고 가라앉고,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바로 옆에서 목도한 것 같은 착각. 그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행태들에 대한 분노. 그리 슬프지 않은 나도 충분히 안타까움과 암울한 감정을 느낄 만했다.

  그리고, 왠지 그럴 것 같았지만, 참사 이후부터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생겼다. “미안해 아이들아”, “채 못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꽃”,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등등, 속이 뒤틀릴 것 같은 말들이 온 사회를 덮기 시작했다. 내 트위터 타임라인만 해도, 도대체 내가 팔로잉한 사람 중에 이렇게 짜증나는 사람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였다. 내 눈에는 무례 또는 오만 또는 차별로 보이는 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유통되는 것을 보면서, 웃었다. 야, 이렇게 할 일이 많구나. 하하.

  그래도 간간이 한 마디씩 투덜거린 것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는 무언가 비판을 하거나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유족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도하고 참담해하고 있는데 굳이 선을 긋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욕 먹을까봐 무서웠던 것도 맞다. 그렇게 타이밍을 보면서 한 달이 되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언론에서, 온라인에서, 거리에서, 청소년활동가인 내 속을 뒤틀리게 하는 이야기들을 숱하게 접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6만원을 받고 동원됐다는 허위 주장부터, “미안하다 애들아”하는 현수막까지. 그렇게 참으면서 쌓은 짜증과 분노가 밖으로 폭발을 할지, 속병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설명


  저런 것이 왜 문제냐고 물으실지도 모르겠다. 이해하기 쉽게 유비추론이 가능한 예시를 들어보겠다. 장애인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해 “비장애인으로서 똑바로 하지 못해서 장애인들에게 미안하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상당히 기이할 것 같지 않은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게 “남자들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하고 성폭력을 가리켜 “꽃이 짓밟혔다” 같은 표현을 쓰면, 거슬리지 않는가?

  본래 “미안하다”라는 말 자체가 너무 이 상황 저 상황에서 쓰이는 것이기는 하다. 어쩔 때는 죄책감, 어쩔 때는 안쓰러움, 어쩔 때는 부끄러움 등, 미안하다는 말이 담고 있고 대표하는 감정은 많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이 어떤 경우에 어떤 틀을 거쳐서 "미안하다"라는 말과 형식으로 표현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현재와 같은 맥락에서라면, 나는 “미안하다”라는 말이 주체가 객체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잘못을 하고 구체적인 책임이 있는 책임자가 하는 말이라면 별로 위화감이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추상적인 집단이 집단에게 하는 말이라면 한 번 더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비청소년들은 더 많은 권력을 가진 만큼,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개개인들의 권능이 얼마나 된다고 책임이 있다고 하겠냐만…. 계량과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일단 비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권력과 책임이 있다는 평가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와 사람들이 “미안하다 아이들아”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어쩌면 그 간극은 '정치적인' 문제일 것이다. 비청소년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꿔야 할 문제 상황으로 인식하고 청소년들을 평등하게 간주(가정)하고 대우할 것인가.

  다시 예를 들어보겠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은 분명히 여성보다 권력이 크다. 특히 각종 의사결정 과정인 정부나 의회, 그리고 조직들의 상층부는 남성 비율이 압도적이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평가해도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이 목숨을 잃거나 폭력에 희생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남성들이 “남자로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성과 여성의 자리에 비장애인과 장애인, 자본가와 노동자(또는 돈이 많은 사람과 돈이 적은 사람), 미국이라면 백인과 흑인을 넣어도 마찬가지이다.>

 ― 이 주장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에도 위화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집단 전체를 볼 때 사회적으로 더 책임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주체화하는 논리와 맥락을 바탕으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권력이 조금 더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소수자에게 자신이 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평등을 선언한 관계에서라면 좀 어색한 모양새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이 사회의 이런 문제를 함께 바꿔가자고 말하는 것과 ‘어른들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나는 ‘어른들’이 뭘 해주고 못 해주고 할 권력이 있기나 한지, 어떤 오만인 것은 아닌지도 의심스럽지만.

  참사 희생자에 대한 구도를 “어른”과 “아이”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아이”를 “못 다 핀 꽃”이라고 하는 것도 설령 자연스러운 생각일지 몰라도, 잠자코 수용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이라도 문제나 잘못이 있을 수는 있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희생된 사람들을 가리켜서 '착한 아이들' 등으로 이름 붙이고 묘사하는 것도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나는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아이들’, ‘미안하다’ 구도가 청소년들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사회의 산물이고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 문제에 대해 제대로 문제의식이 공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은 이런 문제의식을 ‘청소년보호주의’ 문제라고 명명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와 연관해서 나이주의나 가족주의 구도도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러므로 이 애도 역시 평등하지 않다.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아마도, 청소년 대중 일반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넓은 의미의 청소년운동 안에서도 과연 이런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는지 묻는다면, 다소 회의적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널리 공유하고 조직화하는 것이 청소년운동의 지난한 숙제이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 “미성년자 석방하라” 등의 구호가 튀어나오던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눈앞에 떨어진 숙제.


첨언

  청소년보호주의는 비청소년들 입장에서도 억울한 면이 있다. 세월호참사의 사망자 중 50여명은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아니며, 분명히 비청소년들도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이 ‘아이들’로 주로 불리고 기억될 때, 그 많은 사람들은 한 켠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 사건은 더군다나 단순히 청소년들이 많이 죽은 것이 아니고 단원고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단체로 여행을 가다가 일어난 사건이라서 주로 단원고 학생들만 부각이 되고 단원고 학생이 아닌 사람들은 청소년이든 아니든 다소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정부나 언론이나 눈에 띄는 집단을 먼저 챙기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그냥 ‘희생자’, ‘생존자’, ‘사람’으로만 묶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각각의 다른 역사와 이야기들을 찾아내고 기억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대할 때 “아이”와 “어른”이라는 위치가, 꼭 필요한가? 또는 바람직한가?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대로 수용해도 좋은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걸 접할 때마다 부자연스럽고 무례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삐그덕거린다. 다른 청소년활동가들 중 상당수도 그런 마음을 호소한다. 특별히 민감한 것이 아니라, 그 구도에 깔려 있는 차별과 불평등을 읽어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운동의 종착지는 어쩌면 ‘미성년자’, ‘청소년’이라는 말과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일 것"이라고 활동가들끼리 이야기하곤 한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 사회의 애도 방식을 보며, 다시 한 번 그 말이 떠올랐다.


(노파심에서 이야기하지만, ‘아이’라는 어휘 자체에는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어쩌면 ‘청소년’이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느낌의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용례에서는 ‘아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더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때가 많지만, 쓰임새와 맥락이 문제이지 ‘아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아이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청소년들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니 근데 그러고 보니 왜 저런 현수막 등은 다 반말질이지?)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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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 깊게 파고들면 순진무구한 아이 희생자와 타락하고 세상에 물든 어른들의 잘못이라는 식의 구도 자체를 더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2014.05.14 20:31 [ ADDR : EDIT/ DEL : REPLY ]

걸어가는꿈2014. 5. 12. 14:16

표는없어도할말은있다!

경기도청소년들과 교육감예비후보들의 토론마당 (2014.05.17.)




표는 없어도 할 말은 있다
경기도 청소년들과 교육감 후보들과의 토론마당


때 : 2014년 5월 17일 토요일 오후2시~6시
곳 : 아주대학교 종합관 401호



선거권이 없으면 말도 할 수 없나? 청소년도 할 말이 있다!
교육은 바로 우리의 문제! 우리랑 먼저 이야기 좀 하시죠?
청소년들이 경기도교육감 예비후보들을 초청하여 교육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하는 자리!
학교와 교육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
교육감 후보들의 정책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 등을 준비했습니다.
비록 "표는 없지만" 하고픈 말도 듣고픈 말도 많은 청소년들의 참가를 환영합니다!


* 경기도교육감 예비후보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서 현재까지 4명의 예비후보들이 참가하겠다는 답을 보내왔습니다.


주최 : 청소년 '할 말' 기획단
주관 : 경기 학생인권 실현을 위한 네트워크


참가신청 & 문의 : n_podo@naver.com 메일로 지역 / 이름 / 학교(선택.. 학교를 안 다니시면 안 써도 돼요~)  를 보내주세요.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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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 4. 26. 01:26

‘아동학대’ 문제,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바꾸는’ 것으로

공현


슬 픈 소식이 끊이지 않는 해다. 세월호 침몰로 세 자릿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청소년이다. 또한 그 바로 전에는 한 고등학교에서 폭행에 의해 학생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두 차례, 며칠 간격으로 일어났다. 또 그 직전에는 가정에서의 학대로 인해 청소년이 사망한 사건이 신문 기사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또 그 얼마 전에는 고등학생이 체벌로 인해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세상을 뜬 일도 있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청소년들의 죽음을 좇아다니기 바쁜, 우울한 상황이다.

워 낙 침울하고도 충격적이었던 세월호 침몰 사고 때문에 마치 한참 전 일 같지만, 바로 1~2주 전까지만 해도 여러 언론은 “○○ 계모” 등의 제목을 달고 아동학대치사 사건과 그 재판을 보도한 기사들로 전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가해자들에게 내려진 판결이 너무 가볍다며 ‘사형’을 요구하는 시위도 등장했다. 사람들의 분노 자체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일이다. 하지만 이슈가 된 사건의 가해자를 벌하는 방법과는 별개로, ‘아동학대’ 문제를 예방하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 가해자가 특별히 못된 놈이라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의 결론에 멈춰버린다면 ‘아동학대’가 일어나는 구조와 맥락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3년 공식 보고된 아동학대는 6796건이고, 통계에 잡히지 않은 학대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 ‘학대’ 기준에 잡히지 않은 다른 숱한 가정 안에서의 폭력과 인권침해도 존재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부모/보호자인 사람들이 사건의 가해자들을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과연 자신들은 ‘학대’를 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달라고 하고 싶다.


청소년은 부모의 ‘것’이라는 전제


이미 방송을 통해 꽤 널리 알려졌지만, ‘아동학대’의 다수는 친부모에 의해 일어난다. 학대의 가해자가 ‘계부모’임을 강조하는 것은 편견을 강화할 뿐이다. 언론 보도 역시 재혼해서 또는 입양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죄라고 굳이 “계모”라는 걸 강조하는 것인지, 참 씁쓸한 행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계부모’의 학대에 더 분노하는 모습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꼬집었다.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죽였기에 이리도 반응이 뜨거운 것.”(트위터 아이디 @Ramirezi_ 전(前) 진보신당 청소년위원장)이라고.

물 론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의 소유물처럼 되어 있는 것과 ‘아동학대’가 가능한 가정 안의 권력관계 자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목숨이 위험하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잔인하고 특출난 사례가 아니면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의 인권침해에 관대하다. ‘아동학대’ 사건의 배경에는 가정 안에서 친권자와 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자기 것’이냐 ‘남의 것’이냐가 아니라, 부모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제 자체가 문제이다. 어느 부모가 ‘나쁜 주인’인 것만을 탓하지, 부모가 ‘주인’이 되는 상황 자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아동학대’는 계속될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낳는 조건들을 뿌리 뽑아야

사 정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동학대’라는 말보다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Children)’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을 듯싶다. ‘학대’라는 표현은 마치 정도가 아주 심한 것이나 악의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단순히 정도의 문제이거나 특별히 악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며, 신체적․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 애들은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 “사랑의 매는 폭력이 아니다.” 같은 말을 한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아동학대치사 사건의 가해자들을 강력하게 비난한다. 그런데 이 둘이 종종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는 사회 환경이야말로 ‘학대’를 허용해주는 든든한 ‘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아동폭력에 대한 유엔 연구(The United Nations Study on Violence against Children: A/61/299)」(2006)는 서두에서부터 “아동에 대한 폭력이 ‘전통’ 또는 ‘훈육’이라는 명목 하에 성인들로부터 정당화되어 일어나는 것을 중단”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위 사진[사진 설명] 유럽평의회 체벌금지 캠페인 포스터

“내 아이인데 무슨 상관이냐.”, “남의 집안 일이니 신경 꺼라.”라는 식의 태도. 자식 양육은 친권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가치관. 그리고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친권자에 의해 삶과 권리를 규제당해도 된다는 생각. 특히나, 그 바탕에 좋은 뜻이나 애정이 있으면 괜찮다는 생각. 청소년들은 ‘평등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함부로 대해도 좋은 존재가 되어버린 현실. 이런 것들을 뿌리 뽑는 것이야말로 가정에서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녀에 대한 양육 방식은 친권자의 재량이라고 쉬쉬할 것이 아니고, 모든 체벌을 비롯한 폭력적인 양육 방식에 대한 확실한 금지 선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람직하고 비폭력적인 관계 맺기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공부 잘 시키는 우등생을 만드는 부모 되기에 대한 책은 많지만 정작 비폭력적이고 인권적인 부모 되기, 부모 자식간 관계 맺기에 대한 논의는 빈약한 곳이다.

올 해 하반기에 시행을 앞두고 있는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은 아동학대의 정의를 형법상 폭행이나 상해죄 대상 전반까지 포함함으로써 사실상 가정체벌금지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정부나 사법부가 이를 그렇게 해석해 줄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친권자의 ‘징계권’을 들어 사회 상규상 허용될 만한 수준의 체벌은 정당행위라고 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울만 해도 서울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에 의해 가정체벌이 금지되었고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역시 일부 명문화되었으나, 이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진지한 논의와 과정을 통해서 가정 체벌금지를 선언하고 가정에서의 청소년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부터 출발해보면 어떨까. 가정을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제도이자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으로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집을 나와서 ‘어쩔 수 있는’ 길이 필요하다

같이 활동하는 청소년활동가들 중에는 의외로 가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장기간 준비까지 해서 가출을 감행한다. 직간접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구타이든, 폭언이든, 감금이나 협박이든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대개 그들의 편이 아니다. 경찰에 신고를 하면 경찰들은 대개 그들을 친권자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낸다. 폭력을 당한다고 호소를 해도 경찰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집 나온 청소년은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경찰의 의무인 것처럼. 하긴 경찰 입장에선 아주 틀린 일처리도 아니다. 민법에 따르면 친권자에게는 ‘거소지정권’이라는 것이 있고, 친권 상실이 되지 않는 한 친권자에게는 청소년이 있을 곳을 지정할 권리가 있다.

가출 등의 적극적인 탈출과 저항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경찰이 가출한 청소년을 잡아가지 않더라도, 어쨌건 집을 나가서 혼자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같이 살아야 하며 버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 청소년들이 놓인 처지인 것이다. 친권자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다보니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 친권자가 폭력을 가하든 어떻든 간에 같이 살아야만 하는 현실. 이판사판으로 혼자 살아보겠다고 집을 나왔다가는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기 십상이라는 것을 모두 느끼고 있다. 눈에 보이는 ‘가출’이 사회경제적 하층 가정에서 많은 것은 어차피 잃을 것이 별로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아 동학대’에 대처하는 제3자들의 입장에서도 비슷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당장 폭력을 당하고 있는 청소년을 가해자와 떼어놓고 싶어도 그 뒤에 청소년의 삶을 충분히 지원하고 책임질 만한 자원도 없다. 그리고 사회적 시선으로 보나, 법제도적 측면에서 보나, 친권자(특히 친부모)에게서 청소년을 떼어놓는 일을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무책임하게 가정을 깼다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마저 있다.

다행히도 반복되는 사건과 관련 단체들의 노력으로 새로 제정된 「아동학대범죄 처벌 특례법」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학대’를 인지하면 바로 임시보호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필요한 기관이나 예산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가정에서의 폭력을 더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서는 청소년이 자신의 뜻에 따라 집 밖으로 나와서도 ‘어쩔 수 있는’ 기반이 구축되어야 한다. 청소년이 친권자에게만 삶을 의존하는 선택지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가정을 넘어선 공동체이든, 임시 주거와 생활이 가능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이든, 복지제도와 적절한 노동 시스템이든.

나는, 자신을 억압하고 위협하고 폭행하는 사람과 같이 살지 않을 권리는 인권이자 주거권의 일종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제적 인권체계 역시 가족을 보호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훨씬 강하다. UN아동권리협약은 “부모나 현지관습에 의한 확대가족, 공동체 구성원, 후견인 등 법적 보호자들이 아동의 능력과 발달정도에 맞게 지도하고 감독할 책임과 권리가 있음을 존중해야 한다.”, “아동이 이러한 권리(사상․양심․종교의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 부모나 후견인이 아동의 능력 발달에 맞는 방식으로 아동을 지도할 권리와 의무를 존중해야 한다.”라는 등의 조항을 통해 부모․보호자․가족의 권한을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제도나 친권자의 권한 등에 근본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청소년인권운동은 현행의 국제적 인권 기준조차도 바꿔야 한다. 가정·가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하나의 제도이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관계와 인권침해 문제를 드러내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가족제도 자체를 바꾸는 것. 그것이 가정에서의 ‘청소년에 대한 폭력’ 문제에 대처해가는 길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390 호 [기사입력] 2014년 04월 24일 11:52:51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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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14. 4. 4. 13:52

오늘의교육 19호에 쓴 겨울왕국 리뷰


http://combut.maru.net/xe/journal_list/2168





실수할 기회가 필요한 이유

(또는 '나이를 먹으면 자동으로 성숙해진다는 신화에 대한 반박')

- 『겨울왕국』(크리스 벅/제니퍼 리, 108분, 3D 애니메이션)

 


 


1000만 관객이 극장에서 본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원제 Frozen).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느낀 것은 일단 순수한 감탄이었다. 3D 애니메이션 기술이 이정도로 발전했다니! 머리카락 한 올, 눈송이 하나하나를 보다보면, 『겨울왕국』의 캐릭터들과 장면들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진이 얼마나 많은 그래픽적인 노고를 들였을지 상상도 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캐릭터들의 표정은 풍부하고 눈짓 하나 미묘한 입가의 움직임으로 감정이 전달된다. 디즈니는 컴퓨터그래픽의 발전이 웅장함이나 화려한 특수효과가 아니라 섬세하고 꼼꼼한 표현으로도 하나의 경지를 이룩했음을 입증했다. 사람들이 『겨울왕국』 캐릭터들에 마치 실제의 존재처럼 몰입하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으리라. 물론 『겨울왕국』의 음악들도 빼놓을 수 없다. 「Let it go」,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등 많은 노래들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후에도 사람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시청각적인 쾌감을 흘려보내고 그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겨울왕국』이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텍스트임을 느끼게 된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텍스트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잘 완성된 이야기와 같은 뜻은 아니다. 『겨울왕국』의 이야기는 잘 되짚어보면 구멍이 많고, 전개에서 황당한 면도 있으며, 특히 마지막 부분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겨울왕국』은 그런 이야기의 구멍을 캐릭터의 매력으로 커버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에 대해 아주 간명하게 정리했던 바 있다.

 “여기서 스토리의 유려함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거의 조각이불과도 같은 상태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게 큰 문제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렇게 분절된 덩어리들이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해석을 통해 추가적인 의미를 부여 받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커지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아주 교묘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dcdc님 말마따나 다들 '덕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인 거죠.” (www.djuna.kr 2014년 1월 30일)


 
설득력과 짜임새가 아주 좋다고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겨울왕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이 애니메이션을 누구는 성장담으로, 누구는 자매애로, 누구는 익살극으로 받아들였다. 『겨울왕국』이 『라푼젤』에 이어 전통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여성상을 정면으로 깨고 있다는 점과 성소수자에 대한 은유로 읽히는 부분 등은 이미 많은 화제가 되었다. 『겨울왕국』의 엘사를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한 채널A의 무리수 같은 것은 소소하면서도 씁쓸한 우스갯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활동가인 나는 『겨울왕국』에서 청소년보호주의의 문제를 읽었던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숨기며 살아온 엘사

『겨울왕국』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엘사는 '아렌델' 왕국의 공주다. 엘사는 얼음과 눈에 대한 마법의 힘을 타고났다. 그런데 엘사가 어릴 적 동생인 안나를 실수로 다치게 한 사건 이후, '아렌델'의 왕과 왕비인 엘사의 부모는 엘사가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마법의 힘을 비밀로 숨기도록 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측이 된다. 하나는 엘사가 마법의 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엘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마녀라고 박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다가 부모는 그만 바다에서 사고로 죽고 만다. 엘사는 부모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고, 계속 자기 방 안에만 있으며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지낸다. 그리고 몇 년 후, 엘사는 21살에 여왕으로 즉위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엘사가 갑자기 마법의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엘사는 그날 처음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며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한 안나와 다투다가 무심코 마법의 힘이 튀어나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마법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들키고 만다. 사람들은 엘사의 힘에 놀라 엘사를 “마녀”, “괴물”이라고 비난하고, 엘사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서 튀어나오는 마법 때문에 사람들을 다치게 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패닉 상태에 빠진다. 엘사는 그대로 성 밖으로 도망친다. 호수를 얼려서 만든 얼음의 길을 따라, 북쪽 산으로. 그 뒤로 아렌델에는 폭주하는 엘사의 힘 때문에 여름인데도 눈이 내리고 추위가 찾아오게 된다.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렌델에 찾아온 추위를 해결하고 엘사와 화해하기 위해서 엘사를 찾아가는 안나의 모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엘사가 자신의 마법의 힘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엘사의 마법의 힘이 엘사의 정신 상태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엘사의 부모가 엘사의 마법을 억제시키고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오히려 엘사가 자신의 힘을 컨트롤하는 데 서툴러지게 만들었다. 안나의 사고 이후에 엘사가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고 감추려 할수록 엘사는 더욱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점점 마법의 힘은 커져가지만 그것을 대하는 엘사의 정신은 더 불안정해지기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엘사가 절망감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낄수록, 또 자기 감정을 억누르고 힘을 억누르려고 할수록, 엘사의 마법의 힘은 더 심하게 폭주하고 눈보라도 점점 더 심해진다. 마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더 큰 해악을 낳는다고 이야기하듯이.

사실 자신을 숨기는 것은 엘사 본인에게도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성을 뛰쳐나와 산 위에서 「Let it go」를 부르면서 엘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자기 힘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차라리 세상으로부터 떨어져서 혼자 살더라도 자유롭게 자신의 힘을 쓰면서 살겠다고 외친다. “And the fears that once controlled me can't get to me at all. It's time to see what I can do. To test the limits and break through. No right, no wrong, no rules for me. I'm free! (날 구속했던 두려움도 이제 날 전혀 잡을 수 없어. 이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아볼 때야. 한계를 시험해보고 돌파하기 위해.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고 규칙도 없어. 난 자유야!)”

찾아와서 같이 돌아가자고 하는 안나에게, 엘사는 자신은 산 위에서 혼자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 때문에 아렌델에 추위와 눈보라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엘사가 자신을 억눌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자, 그때까지는 그래도 다소 진정되어 있던 날씨도 다시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엘사가 완전히 자신의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안나의 사랑이라는, 또 다른 계기가 필요했다.

 

나이를 먹으면 성숙해진다는 신화에 대한 반박


『겨울왕국』 속 엘사의 모습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겨울왕국』의 텍스트 속에는 청소년보호주의에 대해 굉장히 유효적절한 비판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자. ‘너희를 위해서’라며 학교 안에서 오로지 공부만 하며 지내다가 ‘대학 가고나서’, ‘어른이 되고나서’ 뭔가를 하라고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청소년들은 아직 미성숙하므로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하고, 집과 학교에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하며, 나이를 먹어서 성숙해진 뒤에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너희는 아직 미성숙하니 정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더니 스무살이 넘으면 정치에 관심도 가지고 투표도 열심히 하라고 하는 식이다. 술담배를 금지하다가 스무살을 넘으면 짠 하고 술도 담배도 스스로 알아서 잘 적당히 하기를 기대하는 식이다. 공부만 하면서 지내라고 하더니 나이를 먹고 나서는 ‘나이값’을 하라면서 자기 삶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의식, 참여의식 등을 요구하는 식이다. 그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자동으로 성숙해진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반면 청소년들이 어떤 권리나 참여의 기회를 요구하면, 과연 니네가 잘 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마치 완벽하지 못하면 어떤 권리도 기회도 가져선 안 된다는 듯이.

그러나 엘사가 나이를 먹고 21살이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힘을 자동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엘사가 자신의 힘을 숨기며 보낸 시간은 엘사의 상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엘사를 숨기며 길렀던 엘사 부모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안나가 크게 다치는 것을 본 뒤에 엘사의 부모가 엘사의 힘을 감추고 컨트롤 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한 것은 자연러운 반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겁을 먹은 엘사 부모의 양육은, 결과적으로 온 나라가 얼어붙는 더 큰 사고를 초래했다. 엘사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엘사 때문에 성 안에서 몇 년을 갇혀 지냈던 안나 역시 그렇다. 만일 안나가 미리부터 다양한 연애경험을 해봤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애정에 굶주려서 연애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품고서는 그날 처음 만난 남자와 몇 시간만에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나가 썸도 좀 타보고 밀당도 해보고 짝사랑도 해보고 실연도 당해보고 그랬다면, 좀 더 신중하고도 능숙하게 연애 관계를 꾸려갈 수 있지 않았을까? 청소년의 연애를 금지하고, 청소년들을 공주처럼 키우려고 하는 어른들이여, 기억할지어다. 그러다가 나중에 첫 눈에 반했다며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선언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이를 먹는다고 자동으로 사람이 능력을 가지게 되고 ‘성숙’해지지는 않는다. 엘사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기 방에 숨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자기 자신을 두려움 없이 알아갈 기회였다. 그리고 동생인 안나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의 이해와 도움이었다.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보호’를 핑계로 한 금지와 통제가 아니다. 나이를 먹기를 기다린다고 해서 청소년들이 자동으로 성숙해지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지는 않는다. 청소년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을 경험하고 자신을 알아가며, 때로는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와 권리가 필요하다. 실수하더라도 그것을 함께 감당해주는 안전망과 지원이 필요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뭐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이다. 청소년들은 설령 실수를 한다고 해서 엘사처럼 온 나라를 얼려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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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 3. 30. 22:48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소식지 활력소입니다. 수신거부는 hwalgy@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http://cafe.daum.net/Life2010   |   http://hwalgy.tistory.com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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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 3. 28. 11:10

http://www.redian.org/archive/68571





교육도 연대도 '평등'에서 시작해야

[반론] 서윤님의 레디앙 칼럼 글에 대한 반론



By   /   2014년 3월 28일, 9:50 AM 



제가 활동하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2014년 3월 21일, “반핵과 탈핵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여러분께, 질문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아수나로 인천지부가 3월 20일에 열린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 김익중 교수 초청 탈핵 강연>에서 이 행사의 표어 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배포한 전단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같은 내용을 온라인에도 게시한 것입니다.


그 뒤에 아수나로의 회원이며 페이스북 녹색당 그룹에도 가입되어 있던 이가 그 글을 페이스북 녹색당 그룹에 올리면서 페이스북에서 논쟁이 촉발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글을 행사 주최 단체들 중 인천환경운동연합, 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YWCA 등의 홈페이지에도 올려뒀습니다.

참고로, 이 글에서 녹색당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2012년 선거 당시 이 구호에 대해 아수나로가 문제제기한 적이 있으며 이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았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이 된 행사 홍보물 이미지)

(사건의 발단이 된 행사 홍보물 이미지)


이에 대해 서윤님이 이런 글(관련 글 링크)을 레디앙에 쓰셨더군요. 일단 여기에서 교사와 학생 관계를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예시”라면서 끌어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탈핵운동 단체들이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있는 관계도 아니구요. 혹시 탈핵운동 단체들이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신다면 정말 후덜덜, 무서운 일입니다만. 글 전체를 살펴보면 아무래도 교육 문제를 주로 이야기하고 싶었고 탈핵운동의 표어 이야기가 그냥 예시인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런데 그럼 해당 표어에 대한 논쟁 이야기를 굳이 가져올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논변이 산만하고 예시가 부적절하며 추상적인 개념에 휘둘린 글이라 하겠습니다.



평등은 교육의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여하간 해당 글의 가장 주된 논지가 “교사와 학생은 평등할 수 없으며 위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교육을 부정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니 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서윤님은 평등이라는 개념이 너무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런 개념을 들고 오면 여러 논의들을 무력화시킨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이 글이 상위 개념들을 끌어와서 논의를 거칠게 퉁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서윤님은 한편으로는 ‘평등’이나 ‘교육’ 같은 개념을 본인이 생각하는 좁은 의미로만 쓰고 있습니다. 예컨대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도 도대체 무엇이 평등인지, 같게 대하는 것이 평등인지 다르게 대하는 것이 평등인지, 사용할 때 세밀한 정의가 필요한 개념입니다. 그런 논의 없이 ‘평등’을 ‘동일’하거나 ‘등가의 교환(호혜)을 할 수 있는 관계’라는 협소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 글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이 글이 ‘역할’과 ‘위계’를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와 학생은 학교-교육에서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역할이 다른 것이 곧 상하관계, 위계를 만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역할과 자리의 다름이 교사를 학생의 ‘윗사람’으로 위치지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완전히 평등한 관계란 건, 내가 보기엔 호혜적 관계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베풂의 질과 양이 거의 동등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라는 주장도 ‘베풂의 질과 양’을 대체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왜 그게 ‘동등’해야만 ‘평등’한 건지, 마치 자명한 것처럼 적혀 있지만 저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게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 활동보조인은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지만 장애인에게 보조를 받는 것은 별로 없으니 장애인과 위계적인 관계를 맺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서로 평등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 안에서도 그다지 서로에게 ‘동등한 질과 양의 베풂’을 주고받지 않고 있는 경우를 더 많이 보지 않습니까?


원래 인간관계 안에서 얻는 이익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질과 양을 평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만약 교사가 학생과 함께 교육에 참여하는 일에서 보람과 기쁨과 삶의 의미를 느끼고 또 그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면, 그 관계에서 교사는 충분히 많은 것을 얻고 그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있습니다.

굳이 ‘배움’의 관점으로만 그 ‘호혜’를 평가하려 드는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현실 속에서 ‘지적 권위’ 등의 문제를 얘기한다면 같이 고민을 나눠볼 만도 하겠습니다만…. 추상적이면서도 자의적으로 정의된 호혜니 평등이니 하는 말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위계가 없으면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는 단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등한 관계 속에서 교육을 이루려는 수많은 학생들과 교사들(또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 서윤님에 따르면 후배, 후임자, 자녀 등과 그 상대 역할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다가올 이야기지요.

근본적으로는 ‘교사와 학생’ 관계가 없으면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그렇습니다. 일단 학습자의 경험에 중심을 둔 교육, 무형식 교육 등을 다루는 여러 교육학적 논의들이나 탈학교론의 주장을 깨끗이 무시하는 셈이지요. 혹시 지극히 ‘학교화’된 고정관념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아래 엄기호님의 논의도 역으로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평등한 관계여야 비로소 교육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대화는 어떤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가. 평등한 관계에서만 대화가 일어나요. 너와 내가 평등하다고 가정할 때만 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수 있어요. (……) 그런데 지금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평등한가요? 우정의 관계인가요? 여러분도 처음에 교사가 됐을 땐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에 대학원 논문을 쓰면서 교사들 인터뷰를 해 보면 선한 마음으로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100이면 100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해요. 여러분 중에도 아마 그런 분들 많을 거예요. 그런데 이게 그냥 애들한테 가서 장난치고 떡볶이 사준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친구 같은 교사가 되려고 할 때 제일 필요한 게 우정의 관계이고, 우정의 관계는 평등을 전제로 하죠.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친구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면서 학생과 교사를 평등한 우정의 관계로 안 바라봤어요. 친구라기보단 ‘큰형님’이 되려 했죠.” (엄기호, 〈당신은 학생에게 얼마나 ‘유용한’ 존재인가?〉, [오늘의 교육 제13호(2013년 3․4월호)])


엄기호님의 주장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엄기호님은 이 앞에서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평등’하다고 이야기합니다.(서윤님이 혹시 이것이 자신의 ‘상징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서 굳이 덧붙여둡니다.) 그리고 평등해야만 교육이 가능하다고 하지요.

저는 엄기호님의 논리 전개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논의가 교사와 학생 사이의 평등이라는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성실하게 성찰한 결과이며 ‘들을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사와 학생 관계가 평등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평등한 관계에서 교육이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평등은 1차적으로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징적 평등’에 불과하다구요?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 평등하다는 것은 바로 실질적으로 서로에 대한 존중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평등은 누군가가 더 열등하고 미성숙한 존재라는 편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역할’의 차이 등을 ‘위계’, ‘상하관계’로 간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등한 관계에서의 만남과 대화와 경험을 통해서 교육이 이루어지지는 것입니다.

서윤님이 학생인권조례 공청회에서 들었다는 학생 분의 발언은 아마 그런 생각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아마 청소년운동을 하는 활동가들 사이에 큰 이견이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자크 랑시에르 등의 논의도 좀 더 붙여보고 싶은 욕심이 들지만 분량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은 보호주의를 반영하고 활용한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표어 문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이 표어가 아이들에 대한 ‘보호주의’를 활용한 것이고, 탈핵운동 내의 아동․청소년관(觀)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후로는 그냥 ‘청소년’이라고 쓰겠습니다. 10대 또는 0대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해주십시오.)

그 결과 청소년들을 탈핵운동의 주체에서 배제하는 문구가 되었구요. 물론 이 문구 하나 때문에 청소년들이 배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구를 포함해서 탈핵운동,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사회 전반의 청소년관 자체가 청소년들을 배제하지요. 이 문구는 단지 그런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시이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청소년이 무력하고 약한 희생자, 어른들이 책임지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존재로 불려나오고 있다고 봅니다. 청소년, 실제로 보호대상 맞습니다.

그런데 비청소년도, 실제로 보호대상이 맞습니다. 이건 누구도 모르지 않을 텐데요. 특히 방사능 물질의 경우, 정도차가 있을지언정 모두에게 해롭고 모두가 보호받아야 합니다. 왜 굳이 “아이들”을 콕 집어서 쓰는지,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지배적 관념에 편승하는 것은 아닌지 따지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론 서윤님의 말처럼 좀 더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위계’ 속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주장 아닐까요? 그것은 보호나 보장을 시혜로 보는 것이니까요. ‘보호’가 위계와 차별의 이유가 되고, 누군가를 주체에서 배제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이유가 되며, 누군가를 보호대상의 자리에만 위치시키는 ‘보호주의’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A4 1쪽의 짧은 글이지만, 그것으로도 우리의 문제의식이 충분히 전달되리라 믿었습니다. 사회운동을 해온 사람들이라면, 청소년 보호주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도, 적어도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차용하는 것의 문제점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제기만으로도 전반적인 청소년관을 성찰할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했던 모양입니다. 설명이 참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이 문제제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징후는 실은 2012년부터 있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2012년 글입니다.


“SNS에서 ‘아이들에게 핵없는 세상을, 녹색당’이란 구호가 적힌 작은 손현수막을 들고 있는 사진이 있었는데, 어떤 청소년 단체에서 이에 대해 ‘청소년과 아동에 대한 보호주의가 문제가 된다’고 지적하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사무처에서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생겼다. (……) 다음날 아침에는 ‘청소년과 함께 핵없는 세상을’이라고 수정된 손현수막이 사무처에 도착했고, SNS에 바로 사진이 올라갔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 어리둥절하고 있으니깐, 옆자리에 앉아있는 청소년 운동을 했던 활동가가 말을 걸어주었다. 본인도 그 청소년 단체의 지적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들을 껴안고 가야한다고.” (송준규, 〈풀뿌리들의 놀이터〉, [공동선 104호]. (관련 글 링크) 에서 인용.)


“청소년과 함께 핵 없는 세상을!”이라니, 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표어입니까? “아이들에게”를 바꾸다보니까 나온 괴작인 셈입니다. 게다가 “청소년과 함께”라니, 그 ‘함께하는’ 주체에서 청소년이 떨어져나왔다는 문제점은 고스란히 안고 있습니다. 아이를 청소년으로 바꾼다고 될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저는 오히려 ‘어린이’보다는 ‘아이’라는 말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아이’라는 말 자체를 갖고 태클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실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청소년운동도 껴안고(?) 가야 하니까”라는 얕은 발상에서 나온 표어라고 할 만합니다. (옆자리에 앉아있었다는 청소년운동을 했다는 활동가가 누군지 궁금합니다. 저랑 면담 좀 하실래요? ^^)


저는 “아이들”이 “다음 세대”를 뜻한다는 변호가 기만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표어를 보거나 들었을 때, 수백년이나 수천년 후에 40대, 50대, 60대 모습을 한 미래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은 나이가 적은, 청소년의 모습으로 떠올릴 겁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순수함, 무고함, 약함, 보호해주어야 할 대상. 결국 이 표어가 보호주의적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며 청소년을 동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활용하고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읽힐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은 인정을 해야 합니다. 포스터와 홍보문구에서 보이듯 ‘내 아이’, ‘내 자녀’, ‘우리 아이’를 내세우는 것과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탈핵을 주장하는 분들이 거론하는 것이 주로 2030년 탈핵인 것으로 압니다. 다소 유보적 입장의 정당도 2040년을 이야기하더군요. 독일은 2022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먼 미래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룰 수 없는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나요? 저는 실제 내세우는 정책을 봐도 그렇고, 저 표어의 효과 면에서도 그렇고,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를 가리킨다는 변명은 문제제기를 피해가려는 불성실한 답변일 뿐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대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은 ‘아이들’이라는 표현으로 제대로 전달되는 것 같지도 않고, ‘아이들’이라는 표현으로만 전달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연대’도 평등에서부터


이 글을 통해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말하자면, ‘평등’이나 ‘위계’나 ‘교육’이나 ‘아이들’ 등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쓰다가 그것 자체에 경도된 나머지 인정할 부분마저 간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 담지는 못했지만, 저는 탈핵운동을 포함하여 환경-생태-녹색운동에 청소년보호주의나 청소년 차별의 문제가 상당히 뿌리 깊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생태-녹색운동뿐만 아니라 교육운동이나 여러 영역에도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교육단체, 환경단체 등이 다수 참여하는 ‘아이건강국민연대’가 청소년 게임셧다운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습이 대표적 예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청소년운동과 마찰을 빚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청소년운동은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비판을 하고, ‘평등’을 요구하겠지요. 교육뿐 아니라 연대 역시 ‘평등’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저 이번에 간단한 글을 하나 써서 우리의 문제의식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아마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탈핵운동을 하는 분들 등이 청소년운동과 연대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우리의 문제의식에 동의한다면, 다시 한 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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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 3. 21. 22:10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7889346&start=slayer



『안녕들하십니까? -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자보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글들 등을 모은 책이 나왔다. 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요청을 받아서 급히 써서 보낸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이 책 막바지에 실려 있다. 다만 내가 책에 원고 싣는 걸 동의하는 서류 몇 가지를 까먹고 못 보내서 내 이름이 안 실렸다 -_-;;;; 책 제일 뒤에 이 원고(두 개로 나뉘어 실렸음)를 보시면 제가 썼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길.








안녕들 하냐는 그 질문은,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안녕하지 못하다고들 답을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욱 안녕하지가 못한 기분이 듭니다.

  2013년에, 한 중학생이 코치에게 목검으로 ‘체벌’을 당한 뒤 죽음에 이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청소년이 가족에게 학대를 당하다가 죽은 사건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맞아서’ 죽은 사건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체벌금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청소년들에 대한 폭력은 너무나 쉽게 정당화됩니다. 그리고 다들 너무나 안녕히 살아갑니다. 그렇게도 ‘학교폭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외치는 우리 사회이지만 말입니다.

  꼭 직접 때리고 죽게 하는 것만이 폭력인 것은 아닙니다. 청소년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폭력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을 원격으로 감시하고 조종하는 각종 어플리케이션들, 청소년의 게임 및 인터넷 이용 등을 감시하고 규제하는 정책들, 청소년들의 정보를 마음대로 수집하고 이용하게 하는 ‘학교밖청소년정책’ 등. 청소년들의 생활을 국가가 학교가 친권자가 나서서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가며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에게는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시험 성적을 높이기 위한 공부. 교육이 아닌 입시와 경쟁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선두를 다투는 공부시간 속에 청소년들에게는 쉬고 놀 시간조차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공부를 해봤자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없는 청소년들에게는 학교 수업시간이란 무의미하고 괴로운 시간 때우기일 뿐입니다. 성적 때문에, 입시 때문에, 공부 때문에 청소년들이 죽고 불행해져도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말합니다. 대학은 서열화되어 있고 성적으로 학교로 차별을 당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문제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지만, 세상은 잘 변하지를 않습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중고등학생들의 두발자유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8년째 해왔습니다. 제가 하기 이전부터 있던 역사를 돌아보면, 약 15년은 두발자유화를 요구해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두발자유는 멀게만 보입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는 몇 지역에서만 두발규제가 완화되거나 사라졌을 뿐, 다수의 지역과 학교들에는 두발규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발자유 하나조차도 15년 동안 귀를 막고 들어주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 살고 있어서 저는 도무지 안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참 안녕하게 살아갑니다. 두발자유 그런 것은 사소한 일이라고 하면서요.

  이번에 여러 청소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를 묻는 대자보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중고등학교들이 ‘안녕들 하십니까’를 묻는 그 대자보를 철거하고, 학생들의 의견 표현을 짓밟았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교에 대자보를 붙여본 적이 있었고, 징계를 하겠다는 위협도 당해보았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고서 언론의 자유가 없는 고등학교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청소년자유언론을 만들어 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항들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은 지금도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규칙과 편견에 막히고 기본적인 말할 자유조차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안녕들 하냐고 물을 자유조차 없습니다.


안녕들 하냐고 묻는 옆의 삐딱선에서

  제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생각한 것은 내가 안녕하냐 아니냐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삐딱한 생각이었습니다. ‘안녕하냐고 묻고 답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데도 자격 유무가 갈리는 것일까?’ 누구는 대자보를 금지당하고, 대학을 거부하거나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은 안녕하냐는 대자보를 붙일 마땅할 공간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자격’은 사람에게만 묻는 것이 아닙니다. ‘주제’에도 ‘자격’이 있습니다. 물론 철도민영화는, 노동자들이 해고당하는 일은, 농민들의 삶을 파괴하며 이루어지는 송전탑 건설은, 모두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되묻고 싶어집니다. 청소년들의 삶의 현실은, 모두에게 안녕하냐고 물을 중요한 일이 아니냐고.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각종 억압과 폭력과 차별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어찌 안녕하실 수 있냐고 물을 이유가 되지 못하는 거냐고. 학벌과 학력과 성적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여러분은 안녕들 하시냐고. “청소년들이 ‘체벌’이라며 여전히 폭력을 당하고 두발단속을 당하는 이 끔찍한 세상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이 어색하게 들리신다면, 안녕하냐고 물을 수 있는 ‘주제’ 역시도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그래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차라리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제대로 물을 수도 답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사람들, 그리고 ‘안녕들 하십니까?’라며 모두의 문제, 공공의 문제랍시고 불려나올 수도 없는 문제들입니다. 정치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는 청소년 같은 소수자들, 그리고 공공의 문제라고 생각조차 안 되고 있는 현실들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적어도 청소년인권의 문제, 대학서열화와 입시경쟁의 문제 등을 가지고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서기 전까지는, 저는 안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살고 있는 저 자신을 사랑하기에 저는 참으로 안녕하고, 행복하기도 하겠지만요.)

  그러므로 안녕들 하냐는 질문에 대해 제가 삐딱하게 되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안녕들 하냐고 묻는 그 질문은, 정말 모두에게 묻는 것입니까? 모두가 물을 수 있는 것입니까?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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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 3. 21. 21:17


http://yosm.asunaro.or.kr/1






※ 배포된 〔요즘것들〕 창간준비호에 일부 그림 그린 사람, 글쓴이 정보가 누락되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창간준비호 일정에 맞춰 디자인과 편집 등을 급하게 하다가 벌어진 실수였습니다.

이름이 빠진 글쓴이, 그린이 등께 사과드리며, 그밖에 오자 등에 대해서도 독자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다음 정식 1호 때는 더 나아진 모습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청소년신문 〔요즘것들〕

창간준비호


발행일 : 2014년 3월 12일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발행

제보 및 구독문의 asunaro@asunaro.or.kr












[그림=심규민 (slackerz0120@gmail.com)]




같은


"오랜만에 학교 온 학생들을 환영해주러 나온 선생님들? ㄴㄴ~

등굣길부터 학생들의 겉모습에 점수를 매기는 그들. 새학기가 밝았네 벌점이 쌓이네~"


"꿀잠 자던 시간에 학교에 나와야 한다는 충격. 이는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겪는 시차적응에 맞먹는다. 하루종일 츄리닝을 입고 다니던 몸을 교복에 끼워 넣으려니 갑갑. 규정이 만들어 놓은 틀에 나를 끼워넣으려니 더 깝깝!"


"학교가 학생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 학생들에게 오리처럼 걸으라고 하고, 네 '발'로 엎드려 있으라고 한다. 학기 초부터."


[글=이경은 기자]




[SPECIAL] 상콤한 새 학기를 여는 '군기잡기'?

               - 학생들 “우릴 겁주고 통제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 






[SPECIAL] 1학년을 위한 학교는 없다?
               - 선배와 교사, 양쪽에 치이는 이중고 겪어






[소식] 개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방학도 제대로 안 해서!"







[소식] "조퇴도 학생의 권리다!"








[청소년 봉인해제] 종교강요에 맞서 싸운 위영서씨 인터뷰

                           - "분노가 학교를 바꾸는 힘"








[칼럼 : 청소년의 눈으로] 교복의 창살을 풀어헤치자









[리뷰  ver.청소년]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를
                         - 『겨울왕국』 (크리스 벅/제니퍼 리, 108분, 3D 애니메이션) 












[청소년 24시]
[청소년24시]는 청소년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짧게 전하는 곳입니다. 여러 청소년들의 제보와 투고를 기다립니다.



◆ 체벌 폭행당한 학생 뇌사 상태에 빠져


2월에 순천에서 체벌을 당한 고등학생이 뇌사 상태에 빠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피해 학생은 지각을 했다고 교사에 의해 머리를 벽에 찧는 폭행을 당했고 복도를 '오리걸음'으로 걷는 기합도 받았다고 한다. 일부 언론들은 해당 학교에서 책임을 피하기 위해 학생이 폭행을 당한 후 조퇴를 한 것처럼 출석부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초중등교육법시행령에서는 교사가 신체 및 도구로 학생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는 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학생의 뇌사가 교사의 폭행에 의한 것인지 가려지기는 쉽지 않겠으나, 가해 교사는 처벌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 피해자인 학생 분은 3월 11일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 입학생들에게 '서약' 강요하는 학교들


입학생들에게 '서약서'를 받는 학교들이 있다. 대개 '학교규칙을 잘 지키겠다', '스승을 존경하겠다', '상급생에게 겸손하겠다', '학업에 전념하겠다' 등의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한 경우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와 같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서약서를 제보한 학생 이모씨는 "규칙이 정당한 지 아닌지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무조건 복종 서약이나 다름없다. 국민이 되는 조건으로 정부가 준법서약을 요구하지는 않지 않나. 사람이 법보다 우선하고, 국민이 국가의 주체이기 때문일 테다. 학교가 학생에게 서약을 요구하는 것은 학생을 학교자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아서라고 본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한컷태클] 건전공부 vs. 유해게임?



[그림=심규민 (slackerz0120@gmail.com)]


청소년의 게임 과몰입이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청소년의 공부는 과도하든 어쩌든 건전하다고 장려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공부를 너무 많이 하는 걸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한' 공부보단 '유해한' 게임을 좀 더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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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4. 3. 19. 15:59




[왜냐면] ‘학생은 학생답게’ 캠페인을 시작한 이유 / 서준영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28571.html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3월 개학을 맞이해 ‘학생은 학생답게’ 포스터를 각 지역 번화가 및 학교 등지에 붙이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내용은 이러하다. “학생은 학생답게 자유로운 머리를 합시다, 개성 있는 복장을 합시다, 잘 쉽시다, 체벌·폭력을 거부합시다, 학교 규칙을 잘 바꿉시다.” 단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도 포스터를 게시했다.

(......)

그렇기에 포스터로 기존의 학생다움을 비꼬고 새로운 학생다움을 만들었다. 새롭게 정의한 ‘학생다움’은 더 ‘인간다움’이라는 뜻에 가까운 느낌이다.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이자 덕목이기 때문이다. 결국 학교가 학교다워지고 학생이 학생다워지는 것은 학생을 비롯한 학교 구성원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서준영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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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12. 19. 02:24





청소년의 대자보는 안녕들 하십니까?
청소년 대자보 및 탄압 사례를 모읍니다

많 은 청소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쓰기에 동참하면서 의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자보가 학교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는 것은 물론, 징계 위협을 당하는 일까지도 일어나곤 합니다. 청소년들도 생각이 있고 말할 자유가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대자보를 붙였다가 권리를 침해당한 사례를 제보해주세요! 사례를 모으고 세상에 알려서 우리의 권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http://asunaro.or.kr/jabo

★ 대자보 갤러리에 청소년이 쓴 대자보를 올려주세요!
    청소년들의 '안녕 못한' 목소리들을 많이 모읍니다!
★ 권리침해사례를 제보해주세요!
   · 대자보를 학교 등이 강제로 철거, 훼손, 압수한 경우
   · 대자보를 썼단 이유로 위협, 폭력, 폭언을 당한 경우
   · 대자보를 썼단 이유로 학교가 반성문을 강요하거나 징계를 하려는 경우
   · 그밖에 경찰 등에 의해 청소년의 언론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경우

"안녕하지 못한" 우리들의,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할 자유를 위해 함께해요!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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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12. 9. 11:44
[논평] 수능 뒤에도 고3들을 학교에 가둬두라고? 학생들이 노는 게 그렇게 보기 싫나?
- ‘정상화’를 원한다면 입시교육과 과중한 학습부담을 없애고, 학생의 참여를 보장하라


11 월 7일, 2013년 수능시험이 있었다. 전국의 수험생들을 경쟁시키고 줄세우고 대학서열구조 속에 밀어 넣는 입시의 과정 중 가장 비중이 크고 상징적인 시험이 11월 7일 치러졌다. 모든 고3 학생들이 수능을 보는 수험생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몇 개월, 몇 년을 입시공부 속에 버텨온 고3 학생들 중 수십만 명이 시험을 치러냈다. 그러나 수능이 끝난 뒤에도 고3 학생들은 구설수에 휘말리고 있다. 언론들에서는 고3 교실이 난장판이고 학생들이 학교에 제대로 출석도 하지 않는다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교육부와 교육청들에서는 단축수업을 금지한다고, 정상수업을 하라는 지침을 계속해서 발표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능 일정을 늦추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수능이 끝난 뒤 학교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수능 이전에 많은 고등학교들이 입시를 교육의 목표로 삼아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수능 전부터도 본래 다수의 고등학교들은 교육기관으로서는 ‘난장판’이다. 교육의 목표가 입시에서의 성공과 승리라고 대놓고 말하고, 입시 일정에 맞춰서 무리를 해서라도 교과 진도를 마치며, 그 뒤에는 입시 준비를 위해 문제 풀이에 몰두하는 수업을 한다. 이렇게 입시학원처럼 운영되는 학교를 과연 올바른 교육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과연 수능 후의 학교가, 수능 전의 학교보다 더 난장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수능 이후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이처럼 입시기관이 되어버린 학교 교육의 한 측면일 뿐이다. 학생들에게 “수능 때까지만 참아라.”라고 하면서 과중한 공부시간, 입시 스트레스, 학업을 강요하는 것이 입시기관 학교의 운영 방식이다. 그러니 수능이 뒤에는 학교에 붙어서 공부하라고 학생에게 요구하는 것이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수능을 본 고3 학생의 입장에서는 수능 뒤에도 정상수업을 시키라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을 어기는 ‘무리수’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 와 같은 입시기관화된 학교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 ‘고3 정상수업’을 강변하는 것은, 아무래도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찍 끝나는 꼴, 쉬고 노는 꼴을 보기 싫다는 감정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짧으면 몇 개월, 길면 몇 년에 걸쳐 과중한 학업부담 속에 학생들을 몰아넣으면서, 고작 1-2개월 남짓 단축수업을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니까 화가 날 지경이다. 애초에 한국의 공부시간은 너무 길고 학업부담은 너무 크다. 정규수업을 오후 4시, 5시까지 하는 것이 기본이고, 보충수업이나 야간자율학습 등을 하면 밤 늦게서야 하교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고도 또 학원을 가는 등 사교육을 받아야 하는 청소년들도 많다. 고3 때는 공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학교에 나오거나 사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청소년들도 적지 않다. 이처럼 과중한 학업부담은 사라져야 하고, 오히려 오후 1~2시 정도면 하교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수능시험이 끝났든 어쨌든 학생은 학교에 8, 9시간씩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과중한 학교의 일정을 계속해서 강요하려는 것은 그저 학생들을 학교에 가둬둬야 안심이 되는 강박관념은 아닌가?


수능 끝난 뒤 고3 정상수업이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입시경쟁교육을 중단하라. 입시에 올인하는 교육을 개혁하고, 입시기관이 되어버린 학교를 교육기관으로 바꿔내라. 현재의 과중한 학습부담을, 학생들이 감당할 만하게, 학생들의 교육권과 쉴 권리가 제대로 보장될 정도로 줄여라. 고3 수업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하는 교육당국들은, 과연 입시기관이 되어버린 학교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해본 적은 있는가.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학교들을 ‘정상화’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더불어 우리는 고3 학생들을 무조건 학교에 가둬두라는 식의 지침이, 비민주적인 교육정책 결정 탓에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육부, 교육청들이 고3 학생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런 막무가내 억지 정책을 밀어붙이지는 못할 것이다. 경기도교육청은 논란이 되자 학생들과 토론을 해보잔 식으로 말을 던졌지만, 실제로 학생들과 제대로 토론을 하기보다는 형식적으로 게시판을 열어두는 데 그치고 있을 뿐이다. 학생들의 참여가 없는 비민주적인 교육정책은 그것만으로도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학생은 교육의 대상이 아닌 주체이다.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학생들이 학교 운영과 교육정책 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자치를 활성화시키고 참여의 길을 열어라. 그래야만 이런 억지 정책이 강행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2013년 12월 9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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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11. 19. 19:51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수원지부에서 거리 캠페인을 하면서 만난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게 추운 날 외투, 겉옷 규제여서

그 목소리를 담아 만들어봤습니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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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11. 15. 16:56





[논평] 차별과 편견, 감시와 통제로 얼룩진 청소년 게임규제를 리셋해야 한다




요즘 ‘게임’이 뜨거운 감자이다. 새누리당 신의진 국회의원의 대표발의로 나온 「중독 예방 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이른바 「4대중독법」)에서 “마약”, “도박”, “알코올”, “인터넷게임 및 미디어 콘텐츠”가 나란히 중독물로 열거된 것이 논란의 방아쇠였다. 이 논란 속에서 특히 청소년의 게임 이용 사례가 자주 거론되었고,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게임규제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해서 나왔다. 「4대중독법」 외에도 새누리당 손인춘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하여 추진 중인 「인터넷게임 중독 예방에 관한 법률안」에는 청소년의 게임 이용을 강력히 규제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현재도 청소년 게임 셧다운제, 친권자의 요청에 따라 게임 이용을 제한하는 ‘선택적 셧다운제’, 청소년의 게임 이용에 대한 정보를 친권자에게 제공하여 감시가 가능하게 하는 것 등 다양한 청소년 게임규제가 시행되고 있는데, 이를 더 ‘레벨업’시키려는 것이다.



청소년 게임 규제는 차별과 편견, 감시와 통제의 다른 이름

게임 과몰입 혹은 중독의 문제는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며, 여러 연령층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많은 국회의원이나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게임 중독 예방에 관한 법률안」을 비롯한 여러 정책들은 청소년의 게임 이용만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결국 청소년들은 그 권리를 함부로 제한해도 된다는 차별적 사고방식과 청소년의 문화에 대한 편견을 반영한 것 아닌가? 아니면, 청소년은 참정권이 제한당하고 있기 때문에 마구 규제를 해도 정부나 국회로서는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일각에서 얘기하듯이 자녀들이 말 잘 듣고 게임 안 하고 공부 잘 하길 바라는 부모들의 ‘표심’을 얻으려고 내놓은 정책 아니냐는 지적이 그럴 듯하게 들릴 정도이다. 그런 정책은 정당성도 공정성도 없는 것이다.

실제로 청소년들 중에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할 만큼 게임에 과몰입/중독되는 경우는 소수이다. 하지만 지금 시행되고 있고 추진되고 있는 청소년 게임규제들은, 이를 이유로 하여 청소년 전체의 권리를 제한하려 드는 ‘전체 공격’을 시전하고 있다. 현재 청소년보호법은 16세 미만 청소년에게는 ▲ 게임 가입 및 구입 때 친권자 동의 필수화, ▲ 게임 이용시간 등 정보를 친권자가 감시할 수 있게 함, ▲ 밤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 셧다운제 등의 규제를 가하고 있다. 이는 청소년의 사생활의 권리, 자기결정권, 문화적 권리, 놀 권리 등은 완전히 안중에도 없는 반인권적인 정책이다. 현재 발의된 「인터넷게임 중독 예방에 관한 법률안」은 ‘19세 미만’으로 그 피해 대상을 넓히고, 청소년 게임 셧다운제는 밤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로 금지 시간 확대, 친권자뿐 아니라 담임교사에게도 게임 이용정보 제공 등, 청소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제도들을 ‘레벨업’시키려 하고 있다. 이런 제도들은 청소년들의 삶에 대한 국가와 학교, 친권자의 감시와 통제를 용이하게 해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정당성도 없고 공정성도 없고 청소년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청소년 게임규제는 당장 갖다버림이 마땅하다.



소위 “중독” 문제와 청소년 게임규제는 별개

게임에 지나치게 빠져서 불행해지는 경우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예방하고 개선시키기 위해서 청소년을 때려잡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청소년에게만 규제를 가하는 것은 차별적이며, 청소년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제도는 폭력적이다. 하나의 놀이 문화이기도 한 게임에 대해 그 자체를 ‘중독물’이라고 분류하며 전방위적인 규제를 가하려 하는 것 역시 편견 돋는 태도이다. 게임 등의 과몰입/중독 문제에 대처하려면 전연령 대상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지원하고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과몰입/중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게임산업 등 관련자들에게도 이에 관해 합당한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적절한 길이다.

현재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4대중독법」 문제이다. 우리는 이 법에 대해서는 그 취지와 전반적 방향에는 그리 반대하지 않는다. 청소년 게임규제 내용을 담고 있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중독 현상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기본법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법안이 추진되는 배경에 청소년의 게임 이용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는 점은 크게 우려를 표하며, 법안에서 부족하거나 지나친 점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지적하고자 한다.

사실 게임이 중독을 유발하는 것인지는 아직 과학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원인이나 의존성 문제 등에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단계이다. 즉 게임에 지나치게 빠지는 현상에 대해 알코올중독, 도박중독 등과 같은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아닌지는 아직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근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성급하게 게임 및 미디어 콘텐츠 전반을 ‘중독’ 문제에 포함시켜 법을 만들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애초에 미디어 콘텐츠 전반을 중독물로 규정한 것이나 “그 밖에 중독성이 있는 각종 물질과 행위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을 모두 중독물로 다룰 수 있게 한 것 등은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중독물의 생산, 유통 및 판매를 정부가 관리할 수 있게 한 법조항과 결합하여 보면 이는 정부의 전방위적인 문화 통제와 탄압을 뒷받침해줄 수도 있다. 부적절한 과잉입법이라는 비판을 받아들여 법안을 수정하고, 중독 현상 예방 및 치료를 위한 정책이 올바르게 시행될 수 있도록 하기 바란다. 게임이나 문화적 콘텐츠에 대한 과몰입/중독 현상를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 역시 더 적절한 방식으로 추진될 수 있기를 바란다.



청소년 게임규제가 아니라 청소년 문화 · 인권 정책이 필요하다

청소년 게임규제는, ‘보호’의 가면을 내세우며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 규제를 강화해온 청소년 정책 역사의 반복이다. 이는 청소년들의 삶을 국가와 비청소년들이 규율하고 청소년들을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길러내고 훈육하고자 하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말을 잘 듣고, 학교나 부모 등 체제에 순종하는 청소년을 만들려는 이러한 정책 속에서는 청소년들의 인권도, 오늘의 행복도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청소년 당사자들의 의견은 반영하려고 하지도 않은 이러한 정책들은 비민주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청소년 게임규제는, 모두 갖다버리고 리셋(reset)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원점에서부터, 청소년들의 의견에 귀기울이면서, 청소년과 게임에 관한 정책들을 다시 만드는 것이 낫다.

일단, 우리는 길게 보았을 때 게임이 이윤과 자본의 논리로부터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익을 내야 한다는 시장 논리 때문에 상당수 게임에서는 자꾸 사행성 조장, 과도한 몰입이나 과소비식의 ‘현질’을 유도하는 등의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게임 콘텐츠가 폭력적이거나 성을 상품화하는 내용 등이 주를 이루는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게임은 내용적으로나 방법적으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바람직한 놀이 문화이자 콘텐츠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하고 창조적인 게임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향유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며, 게임의 내용에 대한 게이머들과 시민들의 아래에서부터의 비평, 논의, 심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더 바람직한 게임 콘텐츠와 문화가 만들어지고 유통될 수 있을 때, 청소년들의 ‘게임할 권리’도 더 즐겁고 풍부하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게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청소년 문화 · 인권 정책이 필요하다. 청소년들의 놀 권리, 쉴 권리와 문화적 권리 등을 실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관점에서의 정책들이 마련되고 시행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입시경쟁교육과 과중한 학습부담을 없애고 청소년들에게 여가시간을 보장하는 것, 청소년들이 게임 및 미디어를 적절히 즐기고 행복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 동아리활동․여행․문화예술활동 등 다양한 놀이와 취미를 누릴 수 있는 환경 조성 등은 가장 기초적인 일일 터이다. 2011년 통계청의 청소년의 여가 활용 등에 관련된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청소년들 중 다수는 ‘여행’ 과 ‘문화예술 관람’을 여가로 즐기고 싶어 하지만, ‘시간 부족’ 때문에 ‘TV 및 DVD 시청’과 ‘컴퓨터 게임 및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일부 청소년의 게임 과몰입/중독 현상도 청소년들의 문화적 권리와 여가권의 열악한 상황을 반영한 현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비청소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게임도 하고 다른 여가도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과몰입/중독이냐 통제/감시냐 하는 식의 선택지는 잘못된 허상이다. 게임산업의 이윤논리도, 국가의 규제 · 훈육 논리도 아닌 청소년들과 사람들의 행복과 인권을 먼저 생각하는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청소년들도 차별 없이 사회의 한 주인으로 살아가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청소년 정책이 향해야 할 길이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2013년 11월 15일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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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10. 25. 13:42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31018194901&section=03



전교조 숨통 조인 한국 사회, '한고학연'의 추억

교육체제 내 결사자유 박해에 동병상련

공현 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활동가

"나는 전교조가, 더 정확히 말하면 교사들이 지금보다 더 학생인권에 대해서 교육도 많이 받고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교사들의 노동조합의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것이다. 요컨대, 나는 전교조를 보면서 자꾸 한고학연이 떠오르고 광고협, 부고협, 마창고협 등이 떠오르는 것이다. 학교에서 결사의 자유를 무시당하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의 공감이라고나 할까? 오지랖이 넓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교사의 권리조차 무시하는 정부가 학생들의 권리라고 존중해줄 것 같지는 않아서 그런다. 그래서 별거 아닌 힘이더라도 보태고 싶다. 정부에게 전교조에 대한 그런 탄압은 부당한 것이며 결사의 자유와 노동조합의 단결권에 대해 개념을 좀 탑재하여 교원노조법을 개정하라고 요구하고 싶다.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다. 그러면서, 내 마음 한편에서는 전교조 또는 교사들 역시 학생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조직을 만들고 결사의 자유를 행사할 때 기꺼이 지지하고 힘을 보태주지 않을까, 뭐 그런 희망을 가져본다."







그밖에도 청소년/청소년활동가들이 전교조 탄압에 관해 쓴 글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31018162530&section=03

"전교조 탄압? 학생들에게 '노동 3권' 뭐라 가르칠 텐가"

[청소년이 바라본 전교조 설립 취소 위기·②] 노동권, 말 뿐인가요?

이응이 청소년 노동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31017110423&section=03

"전교조 공격, 무한 경쟁 탈출하고픈 학생들 배신"

[청소년이 바라본 전교조 설립 취소 위기·①] '어불성설' 꼬투리 잡기

김가을길 서울 문창중학교 1학년


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477

전교조, 해산만이 답인가?[교육 살펴보기]전교조의 법외노조화 시도에 부쳐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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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9. 14. 21:44

[시국선언문]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인천 청소년 1515인 시국선언


18대 대선에서 국가정보원 소속 직원들이 온라인에서 조직적으로 특정후보를 지지하거나 비방하는 댓글을 올리는 등 여론을 조작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국정원의 실체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로 불렸던 국정원은 당시에도 선거개입을 했었다. 국정원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아온 역사를 갖고 지금까지도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도 국정원은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등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대선 삼일 전 경찰은 여론조작의 증거를 확보하고도 수사 결과를 거짓으로 꾸며 발표했다. 당시에 국정원 직원이 다수의 아이디를 사용한 증거는 나왔으나, 댓글을 단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는 말도 안 되는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차라리 피씨방에서 천원을 낸 증거는 있으나 컴퓨터를 사용한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지 그랬나. 또한 검찰은 윗선의 지시를 받아 선거개입을 했다는 이유로 국정원 직원들을 기소유예 함으로서 사실상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찰 수사발표가 있기 전에 이미 TV토론회에서 국정원이 무죄라는 이야기를 했다. 심지어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실이 드러난 다음에도 국정원 감싸기에 바빴다. 새누리당 또한 귀태 발언,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등 상관없는 다른 쟁점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려고 애썼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국선언에 참가하고,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지만 이미 정부에 장악 당한 언론과 방송은 이를 보도하지 않고 있다. 국정원뿐만 아니라 경찰, 검찰,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 한통속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빼앗긴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이 줄을 잇고 있다.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계속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촛불집회가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많은 청소년 또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청소년은 앞으로 나서서 정치적 사안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를 외친 현장에는 우리 청소년이 있었다. 4.19민주화 운동에서, 80년 광주항쟁에서, 87년 민주화 운동에서도 청소년이 앞장서 민주주의를 함께 외쳐왔다. 2013년 현재, 민주주의의 광장에서도 우리 청소년은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미래를 저당 잡힌 불안한 꿈나무가 아닌, 현재의 정치적 주체이자 시민으로서 선언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려 일궈낸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투쟁의 역사를 청소년의 이름으로 새로 써 내려갈 것이다. 청소년의 정치적 발언권을 막으려는 어떠한 탄압으로도 청소년의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며, 우리는 이러한 탄압에 당당하게 맞설 것이다.


이에 우리는 요구한다!


하나. 박근혜 정부는 현 사태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선거에 개입한 관련자를 처벌하라!


하나. 박근혜 정부는 민주주의 훼손에 대해 책임져라!


하나. 박근혜 정부는 언론통제를 즉각 중단하라!


하나. 청소년도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다. 청소년의 정치참여의 권리를 보장하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인천 청소년 시국선언 참가자 1515



참여자 명단 (가나다순)

강 경민 강다예 강다인 강도훈 강동찬 강동혁 강동휘 강명석 강민규 강민석 강민주 강민현 강병국 강병진 강상욱 강석현 강선미 강설후 강세리 강수빈 강수현 강예림 강유림 강인솔 강인솔 강인실 강지욱 강지현 강지훈 강진욱 강태림 강태수 강태호 강태호 강한나 강혜민 강희구 강희준 고관현 고도혁 고범수 고병익 고병찬 고서영 고선영 고수연 고승연 고아영 고영주 고윤상 고은설 고준아 고지영 고지훈 고찬영 고현준 고현진 고효섭 고희나 고희진 공대훈 공지혜 곽다인 곽은비 곽은지 곽희돈 관재상 구동해 구동현 구민선 구민성 구본필 구승현 구태원 구혜선 구혜선 구희연 구희진 권구승 권규리 권기현 권선경 권수연 권수정 권숙현 권순호 권영한 권예진 권오연 권오우 권은솔 권지현 권태규 권하은 권혜연 기찬 길동우 김가영 김가희 김가희 김강 김강혁 김건우 김건우 김건희 김경민 김경은 김경훈 김관우 김규리 김규리 김규림 김금수 김기나 김기범 김기범 김기옥 김나연 김나영 김나영 김나영 김나현 김나희 김남균 김남훈 김남휘 김누리 김다미 김다비 김다빈 김다솜 김다신 김다연 김다영 김다은 김다인 김다인 김다인 김다인 김다희 김다희 김대기 김대니 김대영 김대현 김도연 김도현 김도현 김도현 김도희 김동규 김동진 김동진 김동하 김동현 김동현 김동호 김동희 김동희 김두진 김랑희 김래영 김명진 김미경 김미조 김미지 김미진 김미진 김민경 김민경 김민경 김민기 김민서 김민선 김민섭 김민성 김민아 김민아 김민영 김민정 김민정 김민정 김민정 김민주 김민준 김민지 김민지 김민지 김민지 김민지 김민진 김민태 김민혁 김별아 김병민 김보미 김보배 김보성 김보종 김상열 김상우 김상탁 김상혁 김상현 김서영 김서영 김석원 김석주 김선규 김선규 김선미 김선민 김선아 김선정 김선진 김선희 김성전 김성준 김성진 김성현 김성훈 김세령 김세연 김세인 김세일 김소연 김소연 김소영 김소정 김소현 김소희 김솔 김솔수 김수민 김수빈 김수빈 김수빈 김수빈 김수연 김수연 김수용 김수원 김수지 김수진 김수진 김수현 김수환 김슬기 김승민 김승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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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라 박상미 박상준 박서진 박선모 박선영 박선호 박성규 박성명 박성수 박성완 박성우 박성우 박성원 박성진 박성현 박성화 박세나 박세윤 박세진 박소연 박소연 박소연 박소영 박소은 박소현 박솔이 박수연 박수진 박수현 박수현 박승진 박시현 박신영 박신우 박신호 박아림 박연찬 박영광 박영민 박영훈 박예림 박예빈 박예슬 박예지 박우영 박우정 박원정 박원혁 박유진 박유진 박윤상 박윤종 박은수 박은지 박이레 박이레 박이예원 박정근 박정민 박정선 박정연 박정은 박정훈 박종면 박종인 박종찬 박주현 박주홍 박주환 박준규 박준하 박지민 박지선 박지선 박지수 박지예 박지원 박지원 박지윤 박지은 박지철 박지헌 박지현 박지현 박지현 박지현 박지호 박지훈 박지희 박진석 박진희 박찬미 박찬희 박창우 박채은 박천웅 박청빈 박태규 박하영 박한솔 박해주 박현수 박현수 박현애 박현영 박형민 박형민 박혜나 박혜림 박혜민 박혜원 박혜원 박혜정 박혜진 박호민 박호연 박희건 방보현 방승기 방승의 방영윤 방요오 방인규 방인호 방혜원 방희원 배미솜 배미향 배수연 배윤희 배은지 배정원 배정현 백도현 백동훈 백선욱 백선혁 백승준 백지선 백지우 백지원 변상욱 변서현 변우진 변은아 변주영 변혜민 복준영 부민혁 상영옥 서가희 서광 서다연 서동화 서린 서민지 서상욱 서스엘 서승아 서승연 서승환 서시온 서요한 서유석 서정현 서중현 서지현 서진범 서한솔 서한솔 서현희 서혜린 서혜민 석경호 석지민 선경규 성기수 성문영 성유림 성혜진 손기웅 손나리 손문희 손미리 손병희 손빈 손수진 손수진 손유리 손주빈 손지호 손참빛 송명지 송명훈 송민경 송민지 송민혁 송성운 송영미 송예진 송우재 송유경 송정우 송준섭 송준혁 송지현 송진호 송찬 송채원 송한나 송한나 송현빈 송현태 송혜선 송홍정 송희나 승소희 신기우 신기철 신대환 신동성 신동익 신동주 신문규 신민성 신민정 신민혁 신세정 신수미 신수용 신승인 신승철 신연찬 신예건 신예진 신용혁 신원지 신원철 신유리 신은선 신은지 신인철 신지섭 신지은 신철희 신해민 신혜성 신호은 신효정 신희주 심규림 심성준 심수빈 심수연 심예린 심우형 심운택 심지윤 심채림 심태일 심현수 심형진 심화은 안경민 안나영 안다솔 안동민 안민지 안상윤 안성재 안소현 안원용 안유민 안유석 안은지 안인경 안재현 안지현 안혁진 양기혁 양남주 양성준 양소정 양수진 양승민 양승현 양승희 양아람 양우정 양유준 양윤희 양종석 양주희 양찬의 양현아 양희로 양희조 엄다운 엄병희 엄성훈 엄세윤 엄주빈 엄태선 엄태원 여다은 여수빈 여지원 염서연 염은성 염정훈 오규환 오민수 오민수 오세영 오소진 오승연 오영준 오예빈 오은지 오인서 오재현 오정우 오정택 오주희 오준석 오지예 오혜주 오희수 용수진 우지은 우지호 우태규 우혜민 운혜미 원보현 원수정 원정혜 원형진 원혜정 원혜진 위하은 유대성 유도규 유보라 유선아 유수연 유아름 유아현 유우찬 유의경 유재원 유재호 유정민 유정은 유정은 유정준 유종민 유지원 유지원 유진주 유창선 유해석 유호주 유효정 유희열 윤남원 윤다솜 윤다정 윤다정 윤다훈 윤다흰 윤미 윤민서 윤민선 윤민호 윤민희 윤민희 윤병관 윤석현 윤석화 윤송희 윤수미 윤수민 윤예원 윤운용 윤은지 윤재현 윤정민 윤정민 윤정우 윤종익 윤주연 윤지영 윤지혜 윤지환 윤찬종 윤창빈 윤채영 윤채원 윤청수 윤태원 윤태환 윤해슬 윤혜빈 윤혜인 윤효정 윤희선 은나래 은사영 이가현 이강훈 이건민 이건우 이건희 이경섭 이경열 이경원 이경준 이고원 이관태 이광원 이규림 이규빈 이규원 이규은 이규은 이기범 이나경 이나현 이다빈 이다슬 이다승 이다영 이다운 이다혁 이다현 이다훈 이다희 이대섭 이대희 이동명 이동민 이동원 이동현 이동호 이동호 이미리 이민열 이민영 이민영 이민율 이민재 이민지 이민채 이방헌 이보미 이산나 이산하 이상기 이상민 이상우 이상은 이상철 이상호 이상훈 이상희 이서연 이서연 이서영 이석채 이석철 이선열 이선우 이선우 이선유 이성근 이세직 이소연 이소연 이소윤 이소인 이소정 이소진 이소현 이수민 이수연 이수완 이수정 이수정 이수진 이수현 이수현 이수호 이슬 이승민 이승연 이승윤 이승현 이승현 이아현 이애리 이양희 이엄지 이연주 이연화 이영건 이영진 이영현 이예닮 이예림 이예솔 이예솔 이예슬 이예은 이예은 이예주 이예진 이예진 이예진 이예희 이용민 이용우 이용철 이우성 이우정 이우정 이유리 이유림 이유연 이유정 이유진 이유진 이유한 이윤소 이윤재 이윤지 이은성 이은정 이은희 이인서 이자선 이재건 이재균 이재성 이재열 이재인 이재현 이재형 이재환 이정담 이정민 이정연 이정원 이정은 이정인 이정주 이정훈 이종근 이종은 이주연 이주영 이주예 이주용 이주은 이주은 이준 이준오 이지나 이지선 이지수 이지연 이지연 이지우 이지윤 이지윤 이지은 이지은 이지은 이지혜 이진규 이진민 이진복 이진아 이진우 이진우 이진욱 이진호 이진희 이찬영 이찬종 이찬혁 이창우 이창우 이창진 이창형 이채린 이충구 이태규 이태영 이태영 이태인 이태현 이태형 이하준 이하준 이하진 이학무 이학선 이한나 이한아 이한울 이해동 이해원 이해원 이행운 이현 이현규 이현석 이현석 이현석 이현성 이현승 이현아 이현아 이현우 이현우 이현주 이현지 이현진 이현진 이현진 이현훈 이혜나 이혜민 이혜수 이혜원 이화영 이환희 이희규 이희영 이희원 인소미 임경호 임고운누리 임도현 임병현 임병훈 임상민 임상현 임세원 임소정 임소희 임수범 임수정 임영웅 임유리 임유진 임은아 임은진 임정은 임종곤 임종우 임지수 임채린 임채원 임채원 임하성 임한석 임혜린 장경빈 장광진 장규태 장규홍 장기열 장단비 장민우 장서윤 장선영 장성환 장영민 장영석 장유리 장유진 장유진 장은선 장정은 장지수 장진경 장하나 장하은 장해성 장현철 장혜원 장환희 장효은 장희주 전가은 전나래 전다빈 전다은 전대호 전동휘 전민경 전민선 전민주 전민태 전민혁 전상후 전세린 전수진 전수진 전영빈 전영준 전윤희 전은구 전은배 전은비 전정은 전지수 전탁경 전한별 전혜진 정규성 정기혁 정다니엘 정다빈 정담이 정동철 정동훈 정민영 정민우 정민철 정보영 정상민 정상화 정선주 정성진 정성현 정성효 정세진 정소연 정소현 정수빈 정수연 정수인 정수현 정수현 정승희 정신성 정아영 정여진 정연선 정연오 정영호 정예경 정예지 정예진 정예훈 정우영 정우진 정유민 정유정 정윤지 정윤호 정은비 정은빈 정은선 정은선 정은솔 정임혁 정재훈 정정무 정준영 정준오 정지원 정지윤 정지윤 정지혜 정천욱 정태웅 정하늘 정하은 정한울 정현아 정현우 정현욱 정현지 정현진 정현희 정혜리 정혜성 정호민 정회찬 정희원 정희진 조고운 조규현 조다슬 조대현 조민섭 조민지 조수민 조수빈 조수연 조아라 조아현 조예람 조예환 조유나 조윤아 조윤영 조은희 조은희 조재관 조재영 조정민 조정아 조주민 조준영 조준현 조하늘 조현정 조혜윤 조홍진 조희은 조희진 주건준 주영민 주예민 주인환 주찬영 주혜림 주혜정 주희정 지수정 지용 지용환 지유진 지효민 진경 진혜영 차병관 차수빈 차아름 차아영 차예령 차조현 차현아 차혜성 채병민 채서인 채승희 채의호 천준영 최가현 최가희 최건 최건희 최경희 최규현 최금안 최단비 최동민 최동석 최동연 최동은 최동은 최문선 최민서 최민석 최민우 최민지 최서형 최서희 최성근 최성우 최성욱 최성욱 최성준 최세미 최소라 최소리 최수경 최수민 최수민 최수빈 최수빈 최수연 최수연 최슬기 최시언 최아영 최애리 최여진 최연비 최연우 최영삼 최예림 최예솔 최예은 최우영 최유리 최유빈 최유빈 최유선 최유진 최윤서 최은주 최은지 최은혜 최재범 최정원 최준영 최지영 최지원 최지원 최지원 최지은 최지인 최진아 최찬이 최창민 최현규 최현지 최현지 최현호 최혜림 최효정 최희람 추민지 추선희 태경빈 하경은 하기준 하나연 하승화 하윤종 하재원 한규태 한도현 한라정 한성훈 한세진 한소희 한수정 한아름 한아영 한여경 한영택 한은비 한인균 한인호 한재민 한재현 한절용 한정수 한정은 한정호 한정환 한주철 한지민 한지인 한지현 한지희 한푸름 한하이 한혜지 함이로 함지은 함현식 함혜미 허나경 허소연 허예림 허예슬 허은빈 허정아 허채영 현수빈 현수진 현영범 호종현 홍미경 홍별 홍보배 홍석원 홍석의 홍성옥 홍수영 홍영운 홍유리 홍유진 홍인표 홍재평 홍준표 홍준희 홍지우 홍지택 홍태이 홍현아 황교동 황남희 황성령 황숙정 황승희 황윤재 황이슬 황인영 황인태 황준섭 황진순 황한슬 황현우 황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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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7일 발표된 인천 청소년들의 시국선언문.

연명을 모은 규모로 볼 때는 상당히 수가 되는 편인데 묘하게 이슈화가 안 된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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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9. 4. 14:47

똥 같은 소리라도 말할 자유는 있다!


모두가 입 다무는 학교가 아니라 모두가 입을 여는 학교를 만들자.


- 평택 박모 교사의 '종북척결' 활동 사건 등에 대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입장. -

 


평택의 박모 교사가  “종북척결” 등의 주장과 활동을 인터넷 게시판, SNS 등에서 공개적으로 펼치고, 학생들이 “종북척결, 종북검사구속, 촛불총장구속” 같은 문구의 피켓을 든 인증샷을 올리는 등의 행동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일각에서는 이 교사와 학생들이 정치 활동을 한 것이므로 징계 또는 처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고, 교육청이 조사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다. 우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청소년, 학생들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입장이고, 그와 관련해서 교사 등의 정치 활동의 자유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사의 정치 활동의 자유 역시 ‘미성숙한 학생들이 정치적 의견에 노출되면 안 된다’는 식의 핑계로 금지당하고 있는 까닭에서다. 따라서, 우리는 박모 교사의 견해가 아주 문제가 많고 비판받을 만하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박모 교사에 대해 정치 활동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자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다.

 

평택의 박모 교사의 언행에는 우리가 보기에도 문제점이 한두서너 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 여럿을 함부로 “종북빨갱이”라 이름 붙이며 국가정보원이 “잡아 반 죽여서 보안법으로 처형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하는 등, 도저히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바람직한 시민이라고 할 수 없는 반인권적․반민주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SNS계정에 게시된 만화에선 “얘들아, 정의를 위해서 쓰는 주먹은 폭력이 아니다! 국가의 적과 싸우지 않는 자는 이 나라에서 살 자격이 없는 국민이다! 잊지 마라!! 특히! 남자는 비겁하게 살면 안됀다! 그건 남자가 아니다!”와 같은 문구가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발상, 폭력에 대한 부당한 옹호, 가부장적 성역할 의식 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어디서부터 비판을 해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시국선언에 참여한 청소년들도 뭘 알겠느냐. 알고서 했다면 인정을 해줘야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몰려나간 것이다. 아이들의 생각이 아닌 어른들이 생각을 뒤집어씌운 것이다.”라고 밝히는 등,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꼰대성을 드러냈다. 자신과 같이 “종북척결” 등의 문구를 들고 사진을 찍은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의 청소년들에 대해서는 “뭘 알겠느냐.”라고 하는 편리한 이중잣대는 비웃어주고 싶을 만큼 비겁하다. 또한 그가 자신의 활동을 “대한민국 한 사람으로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라고 하고 안보교육, 정체성 교육, 국가관 확립, 애국활동 등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의 활동이 정치 활동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은연중에 자신의 의견을 절대적인 가치로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참으로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반인권적․반민주적인 데다가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에도 부정적이고 자신의 활동을 정치 활동으로 생각지도 않는 사람에 대해서, 이 사람의 정치 활동의 자유도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떨떠름한 노릇이다. 논평을 내면서도 입맛이 씁쓸하고 뒷목이 땡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 박모 교사에 대한 징계나 처벌에는 반대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단지 정치적 의견을 밝히고 정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어떤 불이익을 받는 것에 반대한다. 그를 조사하고자 한다면 그가 “종북” 낙인을 찍고 막말을 한 사람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모욕 또는 차별의 문제로 조사를 하거나, 아니면 그가 학생들과 정치적 활동을 함에 있어서 학생들에게 어떤 강요나 강압은 없었는지를 살피는 차원에서 해야 할 것이다. 박모 교사와 같이 인증샷을 찍고 활동을 한 학생들 역시 정치 활동을 이유로 어떤 징계나 처벌을 받아선 안 된다. 학생과 청소년은 물론이요, 교사 역시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각종 정치 활동의 자유를 인권으로서 보장받아야 한다.

 

물론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좌파적인 의견을 밝히고 관련된 활동을 한 교사들은 징계를 받고 처벌을 당하는 현실에서, 형평성을 들며 박모 교사 등 정권에 우호적이고 우파적인 활동을 하는 교사들도 징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모두가 징계를 당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공평한 침해’는 학교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만들어진 교육 체제와 교과서만 따르는 교사들과 학생들만을 용인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부당한 인권 침해에 대한 저항은 “쟤도 못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모두가 할 수 있게 보장하라!”라는 자세로 이루어져야 옳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동안 정부가 시국선언 등을 했다거나 정치적 활동, 발언을 했다고 징계하고 처벌한 모든 교사들에게 사과하고 징계와 처벌을 취소해야 하며, 교사와 학생 등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도록 생각과 자세를 고쳐먹고 관련 법제도를 개선하라고 다시 한 번 요구한다.

 

정치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으며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정치적 의견을 갖고, 이야기를 하고, 활동을 할 자유는 이 사회에 사는 누구나 당연한 인권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다. 학교라고 해서, 교사와 학생이라고 해서 여기에서 제외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학교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공간으로서 자유롭게 정치적 의견이 오갈 수 있도록 보장하고 교육해야 한다. 모두가 입을 닫는 학교보다는, 교실에서도 복도에서도 운동장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견해들이 오가는 것이 바람직한 학교라 할 것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이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관계와 문화를 만듦으로써 이룰 일이다. 이렇게 제대로 민주주의와 인권이 뿌리 내린 교육 속에서는 박모 교사처럼 반민주적․반인권적 의견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경우도 줄어들 것이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많은 반론에 부딪혀 억제될 것이다. 학생들 역시 자율적인 경험과 토론을 통해 스스로 세계관과 정치적 생각을 확립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학교를 침묵의 공간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공간으로, 시끌벅적한 교육의 광장으로 만들어라. 그것이 청소년들의 인권을 위해 그리고 서로 좀 말이 통하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2013년 8월 30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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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9. 2. 01:06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백서  (6년의 활동을 담은)

파란만장

   “‘청소년인권운동’이란 걸 한번 제대로 일궈내보자”
그렇게 시작했던 우리들의 활동.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6년의 활동 역사를 백서 몇 권에 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반짝거림, 벅차오름, 두근거림, 이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전하지는 못해도 우리들의 파란만장함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자료, 선례, 반면교사, 그리고 든든한 길동무가 되어줄 이 모든 기록들을,
청소년인권운동에 관심이 있고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를 알려는 모든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무려 5권!  1권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역사

               2권 : 학생인권

               3권 :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 (경기도.서울)

               4권 : 여성주의, 노동/빈곤, 보호주의

               5권 : 연대사업,연구보고사업,교육/워크숍/캠프사업



신청 및 문의  |  http://bit.ly/18gwlVA
           010-2540-7245 (목소리 좋은 활기 책임활동가 별다)
신청 기간  |  2013년 9월 1일 ~ 9월 16일
                  (사전 신청을 통해 수량 확인 후 9월 말 발간할 예정입니다)
가격  |  10만원  (5권 1세트, 배송료 포함)
입금할 곳  |  우리은행 1005-802-084005
                    예금주:청소년활동기상청활기  (입금은 9월 17일까지는 해주세요~)


"총 3000여쪽이니까 10만원이더라도 용서할 수 있을 거 같아!!"



파란만장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백서 출판기념회

때 : 9월 26일(목) 오후 7시
곳 : 레드북스 (서대문역 3번출구 걸어서 5분)


청소년활동가들의 만남과 나눔의 자리
알고 있는 분들, 알고 싶은 분들, 모두 초대함!



"네트워크를 기억하는 누구나 놀러오세요~ 홈커밍데이★"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http://cafe.daum.net/Life2010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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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8. 30. 02:12

2012년에 옥중에서 썼던 글인데 이제야 올리네요

보호주의 비판 글이긴 한데

동시에 약간 정치적 권리 운동으로 연결되는 부분도 있구요. "어른 독재 타도"라는 문구의 발상 자체가








타도! 보호 독재, 어른 독재





  얼마 전 아이건강국민연대라는 단체가 ‘학생 스마트폰 규제 법안’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 단체는 몇 년 전엔 청소년 게임 중독 대책이라며 청소년 온라인게임 셧다운제를 주창했었는데, 이번에는 스마트폰이 문제란다. 언론들이 청소년에게 스마트폰은 마약이나 마찬가지라는 식의 보도들을 쏟아내는 것도 게임 때와 판박이다.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청소년 보호’는 오랫동안 상식이었으니까. 때론 만화로부터, 때론 술․담배로부터, 때론 성(性)으로부터, 때론 정치로부터, 아동․청소년은 ‘보호’를 받아야만 했다.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는 독재 사회

  그리고 그 상식이 나를 화가 나서 미치고 팔짝 뛰고프게 만든 적이 많다. 당하는 입장에서 그 ‘보호’란 높은 확률로 금지와 규제와 차별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청소년들은 보호의 대상일 뿐이므로, 어른들은 마음대로 무언가를 규제해도 된다. 설령 그것들이 어른들은 아무 규제도 당하지 않는 것들이더라도.


  솔직히 나는 담배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청소년 어른 할 것 없이 일반적으로 유해한데 청소년의 흡연만 금지시키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어른들에게도 게임․인터넷 과몰입 문제가 큰데도 청소년들에 대해서만 규제 논의가 쏟아지는 건 치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청소년들에겐 너무나 쉽게 금지와 규제를 들이민다. 청소년운동은 몇 년 전부터 이러 문제들을 ‘청소년 보호주의’라 이름 붙이고 반대하는 활동을 해왔다.


  청소년 보호주의가 지금껏 일방적으로 득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권익과 의견을 발언할 사회적 힘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가정이나 학교에서부터 입법이나 정책 결정 과정까지, 청소년들은 우리 사회의 결정 과정 전반에 참여할 수 없다. 심지어 자신들이 직접적 당사자인 사안에서조차 발언할 수 없다. 설령 발언할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제대로 목소리를 모으고 권리를 행사할 조직화된 세력도 전혀 없다시피 하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 다른 많은 약자들에게 그러하듯,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독재 주체로 말하면 ‘군부 독재’ 대신 ‘어른 독재’, 형태로 말하면 ‘개발 독재’ 대신 ‘보호 독재’ 치하에 청소년들은 살고 있는 셈이다. 이게 다 너희를 위한 거라는 그 흔한 말, 경제발전을 위해 유신독재를 한 거란 얘기와 참 닮은 꼴 아닌가?


  청소년을 규제하는 형태의 정책이 아니더라도 또는 소위 진보적이라 분류되는 정책이더라도 ‘보호 독재’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다. 예컨대 무상급식이 그렇다. 무상급식 논쟁에선 정작 당사자인 학생들의 목소리가 주인공으로 표출되고 고려된 적이 없다. 학생들은 항상 수혜자나 피해자로, 차별적 급식 때문에 불쌍하게 피해를 입는 존재 같은 것으로만 나타났을 뿐이다. 또한 학생들이 급식운영 등에 참여할 권리, 음식의 질을 함께 관리할 권리, 스스로 선택하여 먹을 권리 등은 빼놓고 급식을 공짜로 주는 것만 얘기될 때, 그 밥은 어른들이 먹여주는 게 될 뿐이다. 먹는 게 아니라 먹이는, 먹여지는 밥. 인권이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민주주의여 만세

  개발 독재 비판이 개발이나 발전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듯, 나 역시 보호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실 모든 사람은 폭력, 차별, 착취, 궁핍 등으로부터 사회적 보호를 필요로 한다. 신체적 약자이며, 사회적 약자로 만들어지는 아동․청소년은 어떤 경우엔 더 많은 보호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는 보호, 그리고 규제와 금지로 당사자를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보호는 차별과 억압의 세련된 얼굴 아닐까. 그래서 미국의 작가이자 현대 사회의 틀을 벗어나려 시도한 사상가인 리 호이나키는 ‘아동기’를 가리켜 “근대적 형태의 면역결핍증”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나는 아이건강국민연대 같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아이들을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다. 그리고 아이건강국민연대의 “국민”에 아이들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하긴 그 단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사회가 독재 사회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러니 다시 한 번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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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8. 25. 12:55


[특집| 2008년의 ‘촛불 청소년’]그들은 2013년에 다시 촛불을 들었을까




[특집| 2008년의 ‘촛불 청소년’]촛불 경험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2008년의 촛불 청소년의 현재 2013년의 촛불 집회 참가 여부,

그 청소년들의 현재 상황 등을 추적한 기사.


흥미로운 시도라고 생각한다.

촛불집회가 조직적, 운동적 현상이 아니라 개인적 참여 경험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아, 두 번째 링크한 기사는 연구의 어려움을 토로한 기사이니 참고 삼아 보시길.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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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3. 8. 25. 12:39

‘청소년운동론’ 예고편.pdf


‘청소년운동론’ 예고편.hwp





『오늘의 교육 2013년 3․4월호』


‘청소년운동론’ 예고편
지난 호 특집 <연습인 삶은 없다>에 대한 어떤 답변


공현


지난 호 《오늘의 교육》 특집이었던 <연습인 삶은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용주의 ‘이제는 전교조 교사가 된 한 고등학생운동활동가의 고백’을 읽고 청소년운동에 대해 글을 써야겠단 생각에 펜을 들었다. 오해는 마시길. 이 글은 그 특집의 내용에 직접적으로 대답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 글은 내가 오래전부터 막연하게 품어 오다가 최근에야 구체화된 어느 욕심의 부산물이다. 바로 청소년운동이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는 글, 말하자면 ‘청소년운동론’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다. 여기에서는 그 ‘청소년운동론’에 관한 구상 몇 가지를 보여 드리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의 어떤 부분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미완성의 밑그림처럼 읽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내놓는 것은, 지난 5~6년간 청소년운동에 빠져 살아온 한 사람의 청소년운동에 대한 생각들을 늘어놓는 것이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청소년운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싶기 때문이다. 또, 청소년운동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소개하는 내용도 덧붙임으로써 청소년운동의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약간의 답도 드리고 싶다.


청소년운동? : 독자성, 주체성

기본부터 시작해 보자. ‘청소년운동은 무엇인가?’ 청소년운동론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980~1990년대 고등학생운동을 빼고 계산하더라도 청소년운동의 역사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고 있음에도 청소년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리가 정식으로 이뤄진 사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학술 영역에서도 청소년운동을 설명해 줄 만족스런 이론 등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사실 청소년운동에 관해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는 청소년운동에 적대적인 보수 언론 같은 데서 만들어 내는 ‘좌파 세력에 의한 청소년 세뇌의 결과물’, ‘좌경화된 청소년들의 위험한 활동’ 같은 것들이다. 이런 좌우 이분법에 기댄 해석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보여 주고 있다. 아마도 청소년운동에 우호적이라는 이들, 또는 보수 언론들의 논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들 속에서도 청소년운동을 교육운동에 딸린 부록 같은 걸로 생각하거나 민주·진보·개혁·혁명·변혁·좌파...... 적 사회운동의 청소년판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운동에 대한 감정은 좀 다르더라도 청소년운동을 더 큰 운동에 딸린 운동, 다른 운동에 의해 정해지는 운동으로 보는 점은 같다.

청소년운동 내부에선 어떨까? 과거 고등학생운동에선 추측건대 ‘변혁운동의 한 주체로서 (중)고등학생, 그리고 그들의 주체적 운동’이라는 답이 주류였던 것 같다. 2000년대에 청소년활동가들은 청소년운동의 주체적, 저항적, 정치적 성격을 명확히 하며 ‘진보적 청소년운동’ 같은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확립된 아동인권 규범을 차용하면서, 또 급진적 인권운동의 성격을 부각시키면서 ‘청소년인권운동’이란 개념이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내가 추구하는 ‘청소년운동론’은 청소년운동을 독립적이면서도 담백하게 정의한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들의 권리와 해방과 행복을 위한 운동이다. 좀 더 말을 붙여 본다면 ‘청소년(아동, 미성년)에 대한 억압, 차별, 배제, 착취, 무권리의 문제에 맞서 청소년들이 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운동’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청소년운동을 오직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과 청소년들이 사회에서 놓이는 자리에 관련된 것으로, 즉 청소년들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그것에 의해 정의하는 것이다. 굳이 그걸 강조하는 것은, 그래야만 청소년운동이 청소년들의 현실과 이해관계를 더 잘 반영할 수 있고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입장과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하는 사회운동이 곧 여성운동인 건 아니듯이, 장애인운동이 주로 보건·복지 분야의 의제를 다룬다고 해서 복지운동에 딸린 운동이 아니듯이,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들이 하는 좌파적·변혁적 운동도 아니고, 교육운동에 딸린 운동도 아니다. 청소년운동을 이야기하기 위해 ‘진보성’ 같은 잣대를 갖다 대거나 인권 규범의 보조를 받을 필요도 없다. 청소년운동의 출발점은 청소년들의 현실과 그에 대한 비판적 인식만으로 족하다. 나는 운동의 보편적 가치는 어떤 거대담론 속에 운동을 자리매김함으로써가 아니라, 운동의 고유한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생겨난다고 믿는다. 가장 독자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랄까?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운동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가장 의미 있는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쟁점은 청소년운동을 청소년이 하는 운동으로, 즉 주체에 의해 정의하는 방식이 적절한가 하는 점이다. 다르게 말하면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되는 문제인데, 여기에는 역사적인 맥락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비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을 훈육·선도·선교하는 활동들이 있어 왔고 이들은 ‘청소년운동’이란 표현을 선점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청소년들의 건강한 성장 및 육성’, ‘청소년들을 바람직한 국민/시민으로 길러 내기’ 등을 목표로 하는 청소년지도단체들, 청소년 유해 환경 감시 활동이나 그와 비슷한 일들, 종교적 단체들의 청소년 활동 등이 그 예이다. 지금도 ‘청소년단체협의회’나 ‘청소년계’ 같은 명칭이 가리키는 것은 그런 운동, 그런 단체들인 게 현실이다. 그래서 청소년운동은 발전 과정에서 그런 것들과 선을 긋기 위해 운동에서 청소년들의 주체성 문제를 강조했다. 비청소년과 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를 경계하며 청소년만이 청소년운동을 해야 하고, 활동을 하던 사람들도 나이를 먹으면 청소년운동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온 적도 있었다. 비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직접 주체로서 하는 운동이야말로 진짜 청소년운동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청소년 해방을 위해선 청소년들의 자력화와 조직화가 필요하다. 청소년운동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청소년 대중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 내는 힘이 없어선 안 된다. 비청소년과 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가 반복되는 것을 경계하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청소년운동은 청소년만 할 수 있고 비청소년은 해선 안 된단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청소년운동에서 청소년들은 주체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청소년 당사자들이 운동의 핵이 되어야 하나, 그것이 비청소년들을 따돌림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청소년이든 청소년이든 청소년운동에 널리 참여하고 긍정적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은 청소년운동 발전에 필수적이다. 청소년운동은 운동의 내용에 의해 주로 정의되는 것이고, ‘누가’ 하느냐 하는 문제는 의미 있지만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동시에, 청소년운동에서 청소년과 비청소년 사이의 관계 문제, 비청소년들의 적절한 역할 등은 앞으로 ‘청소년운동론’이 풀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청소년? : 나이 대, 계급성, 소수자

내가 만들려는 ‘청소년운동론’이 청소년들의 현실에 그 근거를 둔다면, 다음으로는 ‘청소년’이 어떤 존재인지가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익히 아시다시피 청소년을 정의하는 기준은 ‘나이’다. 만 18세 또는 만 20세 등 그 사회에서 성년으로 인정받는 나이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을 청소년이라 한다. 청소년은 생애 중의 한 시기로, 한 나이 대로 이해된다. 이에 더해 여러 과학들은 청소년을 성장 중이고 발달 중인 존재로 보고, 2차 성징이나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특성들로 설명한다. 사회적으론 청소년에 ‘어른 혹은 본격적인 삶을 준비하는 나이 대’, ‘미래의 꿈나무’ 등의 의미를 씌운다. 이처럼 통시적인 관점에서 생애 중의 한 시기로 청소년을 파악하고 미래에 종속된 존재로 보는 것이 이 사회에선 지배적인 인식이다. 사회운동 안에서도 청소년운동의 활동가들을 예비 청년/대학생활동가로 보거나, 청소년들의 권리 문제를 장래에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훈련 또는 학습의 문제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나는 이러한 통시적인 관점을 벗어나 바로 지금 당장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에 초점을 맞추자고 제안하고 싶다. 미래를 위한 일시적인 나이 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청소년을 파악하고, 우리 사회의 한 집단으로 청소년 집단을 분석하자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무시되고 평가절하되고 낭만화되어 온 청소년의 삶을 말하기 위해 먼저 이뤄져야 하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렇게 접근해야 청소년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소수자로 이해할 수 있고 청소년의 계급성이라는 문제도 포착할 수 있다.

이제껏 청소년과 계급 문제를 연관 지을 때는 청소년이 속한 가족의 계급을 곧 청소년의 계급으로 간주하거나, 청소년이 이후에 비청소년이 되었을 때 어떤 계급에 있느냐 하는 문제만 관심을 받아 왔다. 그렇지만 정용주의 글에서도 “청소년은 계급”이란 이야기가 등장하듯이, 청소년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면 청소년들 자체가 계급성을 가지며 청소년들만의 이해관계도 따로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 청소년들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무권리 상태에 있고 가족에 딸린 존재로서만 사회에서 생존할 자리를 인정받을 수 있는 형편이다. 예컨대 청소년이 친권자로부터 독립적인 삶을 꾀하려 할 때, 혹은 가족의 테두리 밖으로 나오게 될 때 청소년의 계급성은 선명하게 드러나곤 한다. 물론 청소년의 계급성이란 문제는 더 꼼꼼하게 연구되어야 할 주제이다. 가령 성별, 젠더에 따라서 계급성은 다르게 경험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안정한 삶의 조건 등 변화하는 사회적 상황 역시 청소년 계급의 현실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청소년이 속한 가족의 계급과 계층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청소년의 계급성, 이해관계가 가족의 계급적인 관계와 어떨 때 일치하고 어떨 때 충돌하는지 등 밝혀야 할 문제들이 많다.

청소년을 ‘소수자’로 보는 것 역시 통시적인 관점을 벗어나야 가능하다. 청소년을 일시적인 나이 대로만 본다면 청소년은 소수자일 수 없다. 누구나 한땐 청소년이었고, 누구든 계속해서 청소년인 사람은 없는 탓이다. 그러나 딱 지금 이 순간 청소년들의 현실을 놓고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수적으로 청소년은 전체 인구의 1/4 정도, 10대로만 좁혀서 보면 1/8 정도에 지나지 않는 소수 집단이다. 청소년들이 정치적으로 과소 대표되는 것이나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것은 청소년들도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소수자’임을 말해 준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청소년들이 위치해 있는 권력관계의 동학動學, 청소년들의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이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청소년을 나이 대가 아닌 사회적 집단으로 보게 될 때 우리는 청소년 집단이 영속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사회가 미성년에 대한 구분, 억압, 차별을 계속하는 한 청소년 집단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은 청소년운동이 계속될 수 있는 근거이고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이 지닌 나이 대로서의 성격도 완전히 간과할 수는 없다. 오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청소년을 강조한다 해도, 그 오늘을 사는 일 중에는 내일의 삶을 생각하고 이어 가는 일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청소년들의 욕구와 관심 중에는 ‘내일’의 일, 장래의 생계, 노동, 진로 등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게 당연하다. 청소년운동은 이 역시도 운동의 의제로, 조직화 과정의 일부로 적절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덧붙여 청소년 집단은 영속적이더라도 그 구성원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도 청소년운동이 고려해야 할 조건이다.


자본주의? : 청소년 억압의 문제

청소년에 대한 억압, 차별, 배제, 착취, 무권리의 원인과 성격을 해석하는 것도 청소년운동론에서 중요한 논점이다. 과거 고등학생운동은 반민주적 군부독재, 민족 분단, 제국주의, 자본주의와 계급 모순 등의 사회문제에서 청소년에 대한 억압도 비롯된다고 보았던 듯하다. 이는 변혁운동으로서 고등학생운동의 특징이었고, 나는 이런 특징이 시사하는 바가 여러모로 많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성격상 고등학생운동에선 청소년 억압 자체에 집중하여 그 문제를 폭넓게 다룬 이야기를 찾기가 어렵다. 청소년운동의 경우 초기엔 청소년 억압의 원인으로 유교적 문화나 식민지 잔재, 비청소년들의 권위 의식 등 문화적 요인들을 지목하곤 했다. 그러다 청소년운동이 좀 더 이론적 자원들을 흡수하면서 경쟁 중심의 교육 및 사회, 국가주의, 신자유주의 등에 청소년 억압의 구조적 원인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가 발전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청소년 억압에 관해 좀 더 다듬어진 이론은 청소년(아동)을 따로 구분하는 인식이나 핵가족 중심의 제도, 학교 제도 등이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시대에 발명된 것이므로 청소년 억압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본다. 이러한 논의는 자본주의의 지속과 재생산을 위해 경쟁적인 교육 체제 등을 통해 청소년을 억압하고 있다고 보며, 경제 재생산, 문화 재생산 이론 등을 인용하기도 한다.

나도 현재의 청소년 억압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청소년 억압을 자본주의의 문제로 한정 짓는 것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지금과 양상이나 연령의 차이 등은 있겠지만 과거에도 많은 사회에서 성년/미성년의 구별을 두었다. 미성년에 대한 훈육 체제, 차별, 억압 등도 존재했다. 계급, 신분, 성별, 직업에 따른 차이가 두드러지긴 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청소년 억압은 가부장제―여성 억압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진 것 아닐까?

모든 사회는 지속과 재생산을 위해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을 기성 사회체제에 맞게 훈육할 필요가 있다. 새로 태어나 성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기성 사회에 대해 약자인 동시에 타자의 성격을 가진다. 그들을 기성 사회에 성공적으로 동화시켜야만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특히 기성 사회체제가 차별, 억압, 착취 등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면 동화의 과정은 더욱 억압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청소년 억압의 뿌리라 볼 수 있지만, 청소년들을 일방적인 피해자인 양 묘사하는 건 아마 오류일 것이다. 그러한 동화의 과정은 청소년들의 입장에선 생존을 위한 과정이기도 하며, 청소년들은 다양하게 기성 사회와 협상하면서 동화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소년 억압을 보편적 문제로 파악한다면, 청소년운동은 반자본주의적 운동이긴 하되 반자본주의운동으로 속하지만은 않는 독자적인 위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 억압 문제를 개선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전망 또한 별도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아직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선 자본주의사회 이외의 여러 사회의 미성년/성년 제도, 훈육 제도 등을 청소년 억압이란 문제의식을 가지고 검토해 봐야 한다. 그런 사례들에 대한 청소년들의 개인적·집단적 저항 사례 역시 분석해 봐야 한다. 이 가설이 설득력이 있는지는 그런 역사학적·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검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 못지않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청소년 억압이 어떤 것인지 정리하는 것도 ‘청소년운동론’의 중요한 과제이다. 간략히 말해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청소년을 억압하는 가장 대표적인 제도는 가족과 학교로 나타난다.

청소년들은 가족과 학교에 속해 보호받고 교육받는 존재로서만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가족과 학교는 대다수 청소년들의 생활 전반을 통제하고 결정짓는다. 가족 제도는 개인들에게 사적으로 양육을 부담시키면서 청소년에 대한 친권자의 지배를 가능케 하고, 학교 제도는 청소년들을 ‘학교화’하며 경쟁과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로 차별 및 억압을 정당화한다. 이 둘 ― 가족과 학교 ― 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는 가족으로부터 양육의 책임을 위임받았다는 것으로 여러 권력을 정당화한다. 가족은 학교의 입시 경쟁 등에 참여하고 동조하며 청소년들을 학교에 집어넣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자식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신자유주의적 부모상 등 가족은 학교 제도에 여러 모양으로 참여하는 단위가 되며, 경제적 지위나 여건에 따라서는 학교에서 청소년이 탈락하고 배제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가족과 학교는 서로 밀접하게 얽혀서 청소년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이런 가족과 학교 제도를 변화시키거나 폐지하는 게 청소년운동의 장기적 과업이다. ‘청소년’ 하면 ‘양육’과 ‘교육’이 항상 같이 따라다니는 것도 극복해야 할 문제일 테다. 그 밖에도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 덜 된 인간으로 간주하는 여러 제도나 관행들이 청소년 억압을 이루고 있다. 노인 차별 등을 포함한 ‘나이주의’ 역시 청소년운동이 싸워 가야 할 문제이고, 불안과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적·경제적 현실도 청소년 억압의 중요한 부분이다. 더 욕심을 내 본다면 청소년 노동착취, 전쟁 동원 등 주된 문제의 양상이 다른 외국의 청소년운동과 연대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다시, 청소년운동?

돌이켜 보면 청소년운동에 대해 이만큼 논의가 가능해진 것 역시 청소년운동이 지금까지 발전해 온 덕분이다. 요즘엔 주류적인 ‘청소년학’이 청소년에 대한 비청소년 중심의 관점 일색인 현실에서 어쩌면 청소년 해방을 지향하는 새로운 ‘청소년주의’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이대로 조금 더 밀고 나간다면 말이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일단은 글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한국의 청소년운동이 어디까지 왔는지 짚어 보려고 한다.

청소년운동은 1990년대 중후반에 학생인권 문제를 비롯해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를 나누는 온라인 모임들로 출발했다. 이런 자생적인 움직임들이 운동의 꼴을 갖추기까진 많은 시행착오와 부침을 겪어야만 했다. 두발 자유 등 학생인권 의제들이나 여러 청소년 억압 의제들은 제기되는데 운동의 중심은 형성되질 못하고 몇 년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청소년운동 조직들이 2~3년을 못 가고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걸 두고 ‘하루살이운동’, ‘도돌이표운동’ 같은 표현도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쪽에선 청소년운동 주체들의 의식이 계속 발전하고 변화해 왔다. 여기엔 청소년들의 자생적 투쟁 사례들이나 2002년 이후 몇 차례 있었던 대중적 촛불집회, 진보정당운동의 등장 등 여러 사건들도 영향을 미쳤다. 청소년운동의 정치적 성격에 관한 토론, 운동 방법론 및 ‘대중운동’에 대한 논의, 역사 정리 작업 등도 이루어졌다.

2004년에 ‘청소년인권연구포럼 아수나로’로 시작해 2006년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이하 아수나로)’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 아수나로는 그런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단체이다. 아수나로는 그 이전의 운동에 대한 평가와 반성 속에서 만들어지고 성장했다. 아수나로의 특별함은 올해로 적어도 만 7년, 포럼 시절부터 따지면 약 9년을 존속하고 있다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내가 청소년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2006년, 배경내 활동가가 내게 아수나로가 10년만 안 망하고 가게 하라고 약속(?)을 시켰을 정도로 오래 살아남는 것 자체가 청소년운동에선 숙원이었던 것이다. 아수나로만큼 긴 시간 활동을 해 온 단체가 그 전에는 없었기에, 아수나로를 통해 축적된 자료와 경험은 청소년운동에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간 연속성이 담보된 덕에 청소년운동은 이제 겨우 운동의 주체 집단이 형성되고 운동론도 내다볼 수 있을 만한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아수나로는 청소년운동의 종착지가 아닌 씨앗에 불과하다. 대중 조직도 활동가 조직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 넓은 활동 영역 등은 청소년운동의 발달 속에서 아수나로가 맡아야 했던 역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수나로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해 가느냐도 중요하고, 이후에 다른 청소년운동 조직이나 흐름들이 아수나로가 축적한 자원들을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도 중요하다. 아수나로 말고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로 이어지는 조직과 사람들 또한 청소년운동의 소중한 자원이다.

의제나 외적 성과의 측면에서도 살펴보자. 청소년운동이 그간 사회적으로 공론화시킨 의제는 주로 학생인권, 그리고 좀 더 쳐 주자면 교육 문제, 청소년 노동,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정도이다. 이 중 학생인권은 1998년 학생인권선언, 2000년 두발자유화운동 이후 적어도 13~15년은 계속되어 온 청소년운동의 핵심의제이다. 현재까지 학생인권운동은 학교에서 학생인권 상황이 개선되는 데 기여하고, 법적으론 ‘때리는 체벌’을 금지시키고, 경기도·광주광역시·서울시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 서울시·경남·충북에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를 성공시키는 등 눈에 보이는 성과들을 내고 있다. 학생들이 학교 현장에서 학생인권 문제에 관한 운동을 좀 더 만들어 가고, 다양한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조직해 낼 수 있다면 학생인권 문제는 부족하나마 더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룰 수 있을 듯싶다. 오랜 기간 끌어온 학생인권 의제에서 성과를 내는 것은 청소년운동의 발전에도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청소년 중 다수인 초·중·고생들이 좀 더 시간적 자유를 얻고 정치적·문화적 활동을 할 여지를 얻고 탄압의 위험을 줄이는 것도 청소년운동 확대에 필수적이다.

학생인권 외의 의제는 성과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여러 의제들로 운동을 다채롭게 채워 가는 것도 당면 과제다. 교육 문제,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등은 그동안 몇 번 운동이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공론화를 시키지도, 운동으로 만들지도 못한 의제들이다. 이는 청소년 다수가 쉽게 공감하고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므로 운동으로 잘 다듬어서 폭발력 있는 활동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성소수자, 장애인 등 청소년 안의 소수자 집단에 관한 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운동은 당사자를 조직화하고 다른 소수자운동과 연대하고 교류하는 것을 통해 그 발판을 마련해 갈 수 있겠다. 탈학교, 탈가정, 주거권과 같이 다소 생소할 수 있고 아직 충분히 구체화되지 않은 의제들도 운동으로 만들어 가기 위한 기획이 요구된다.

청소년운동은 앞으로 양적 확대만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양성이 늘어나야만 할 것이다. 여러 방향, 여러 방식의 조직화를 통해 다양한 대중 조직과 활동가 조직들이 생겨나야 청소년운동이 더 활력 있는 운동이 될 수 있다. 이런 조직들은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도 있고, 기획적으로 육성될 수도 있다. 한편으론 청소년운동 연구소, 청소년운동 언론, 청소년 주거 지원이나 협동조합 같은 모임, 청소년운동의 역량을 강화할 교육 기구 등도 만들어져야 한다. 할 일이 참 많아서 몸이 열 개여야 겨우 안심이 될 것 같다.

청소년운동은 지금 많이 잡아 봐야 수백 명 정도의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작은 운동이다. 청소년운동이 운동 외부의 미조직 청소년들과 잘 접촉하고 소통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용주가 말한 “열광적 진동”도 “운동의 민주성”도 자신하진 못하겠다. 솔직히 말하면 슬슬 청소년운동의 구조 개편이 있어야 운동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그래도 너무 조급해하진 않으련다. 예전엔 불가능하고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많은 일들이 지금은 구체적인 그림도 그려 볼 수 있게 됐으니까. 이제 씨앗은 만든 것 같으니까. 아마 곧, 본격적으로 ‘청소년운동론’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몇 가지 싹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이 씨앗에 양분을 많이들 주시길 부탁드려 본다. 스스로 씨앗이 되시는 것도 물론 환영이다.

Posted by 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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