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꿈

능력주의와 차별, 교육, 청소년인권 문제

공현 2018. 12. 12. 23:47

올해에만 능력주의 비판 주제로 글을 한 4-5번 쓴 것 같다.

몇 개 모아둔다.

보면 알겠지만 서로서로 겹치는 부분(자기표절)들이 제법 된다.

한 번 전체를 다 망라하는 글로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48982


시험 성적에 따른 차별, 당연하다고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6월 평등UP ①] 사회적 배경과 불평등한 현실을 간과하는 능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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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와 차별의 동학을 어떻게 깰 것인가

 

공현

 

공교육이 차별의 생산지라는 모순

 

특정한 차별이 다른 여러 차별들의 뿌리나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초기에 체험한 차별이 학교 등 교육기관에서의 차별일 가능성은 높다. 사람들의 생애 주기 속에서 차별 경험의 출발점에는 공교육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 일어나는 차별은 교사나 학생 개인의 편견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학교에서 보편적으로 차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학교 구성원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재 학교교육의 원리 자체가 정상과 비정상을 분류하고 기준에 따라 사람을 평가/서열화하여 차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학교는 정상적인 발달 단계에 따라오지 못하며 학교가 요구하는 학습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장애인으로 분류하는 역할을 해왔던 바 있다. (박정수(2018), 〈우리, 혹은 장애인에게 ‘학교란 무엇인가?’〉, 《오늘의 교육》 42호 48쪽.)

학교교육이 만들어내는 차별의 핵심에는 능력주의(meritocracy)가 있다. 모두에게 제공되는 학교교육은 그것만으로 최소한의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처럼 간주되며, 학교교육 안에서의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하고 지필고사 등 평가를 통해 나온 점수와 순위는 곧 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학교에서는 능력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도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가르친다. “개인이 받는 교육의 양과 종류는 능력의 척도로 여겨지며 동시에 직업적 적격성 및 직업과 관련된 물질적인 보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도 사용된다. 교육은 능력주의의 핵심 동력이다.”(스티븐 J. 맥나미·로버트 K. 밀러 주니어(2013), 김현정 옮김(2015), 《능력주의는 허구다》, 사이, 45쪽.)

교육권은 인권의 중요한 내용이며, 교육권을 실현하는 제도로서 공교육은 평등한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해 기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공교육이 차별이 정당하다는 이데올로기를 학습시키고, 심지어 차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직시해야 할 현실이다. 이는 학교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에서 만들어지는 서열화와 차별은 학교 졸업 이후까지도 학력·학벌 차별 등의 형태로 이어진다. 또한 학교교육의 이러한 현실은, 평등의 개념과 감각을 익히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속성을 반영하고 재생산한다. 학교에서 사람들은 평등보다는 공정, 능력과 자격에 따른 차별을 배운다. 시험 성적이 좋지 못한 자, 좋은 일자리를 갖지 못한 자, 성공하지 못한 자는 그만한 노력과 능력이 없어서 자기의 선택과 책임에 따라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능력주의 이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능력주의, 메리토크라시는 개인의 능력(=merit)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과 인정 시스템을 말한다.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이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때의 능력은 지능과 노력의 합이라고 정의했다.(성열관(2015), 〈메리토크라시에서 데모크라시로: 마이클 영의 논의를 중심으로〉, 《교육학연구》 제53권 제2호.)

이후 미국의 기능주의적 사회학에서는, 사회적 공헌과 성과·실적에 따라 사회적 보상과 지위 분배가 일어나는 것을 산업사회의 특징으로 보았다. 다니엘 벨은 후기 산업사회가 교육 수준과 성과에 따라 차등된 소득과 지위를 얻는 능력주의 사회라고 주장했다.(권성민·정명선(2012), 〈실력주의의 이해와 비판적 고찰: 교육, 선발 및 정치적 맥락을 중심으로〉, 《인문학논총》 제30집.) 능력주의는 때로는 측정된 지능이나 교육 수준에 따라 차별하는 체제를, 때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과나 실적에 따라 차별하는 체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한 마이클 영은 이를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했는데, 능력주의로 인해 인간이 평등하다는 신념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차별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또한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가 파국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능력주의가 능력을 상속, 세습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상류계급을 세습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며, 상류계급에서 능력이 낮은 자식에게 편법적으로 지위와 특권을 세습하려고 하는 모습이 나타나서 능력주의가 혁명으로 전복되리라는 것이었다.(성열관(2015), 앞의 논문.)

그러나 돌아보면 이러한 전망조차 다소 낙관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능력주의는 이미 능력이 있으면[지능이 높으면] 성공한다가 아니라 역으로 저 사람이 성공한 것은 무언가 특출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능력/노력이 부족했던 거겠지하는 식으로, 현실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더 많이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능력이 세습되고 불평등이 확대되는 사회 현실 속에서도, ‘능력에 따른 신분 상승의 공정한 기회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뿐이다. 자식에게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능력 인증과 지위를 제공하려는 행태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철저한 능력주의를 바라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던 소위 국정농단게이트의 중요한 고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인이 그 자식을 명문대에 부정 입학시켰다는 의혹이었다. 이에 분개한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더 공정하고 투명한 능력주의사회였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박근혜 게이트의 비유를 들고 나오는 것은 이러한 동학을 드러낸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별이 생기는 것이고 이러한 불평등은 정당하다는 능력주의는,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노동자를 관리·통제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이다. 동시에 능력주의는 제도적 장치와 인력 배치 및 선발의 원리로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체제라고도 할 수 있다. 능력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작동하면서 자본주의를 정당화한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가 평등을 대체하면서, 불평등에 대해 분노하는 움직임도 다시 능력주의로 돌아오게 되는 상황에 빠졌다. 능력주의는 분명히 차별이지만 차별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평등’, 더 정확히 말하면 공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학력·학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개인의 진정한 능력/실력을 평가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고졸 성공 신화로 치환되는 것이 대표적 예이며, 대학입시제도에 대해서 공정성을 요구하며 정시 확대를 주장하고 지역균형선발 등에 반감을 보이는 것도 또다른 예일 것이다. 한국 사회는 능력주의 이외의 평등을 상상하고 이야기하고 만들기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다.

희망적인 것은 능력주의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주장이 2000년대 이후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맥락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능력주의는 허구이고 완전하고 진정한 능력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능력주의는 허구다(원제는 The Meritocracy Myth로 미국에선 2004년 출간되었고 한국에는 2015년 번역 출간되었다),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원제는 Success and Luck으로 2016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한국에는 2018년 번역 출간되었다)와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는 능력주의가 민주주의/공화주의에 해악이며 능력주의 원리를 극복해야 한다고 그 폐해를 강조하는 것이다. 강준만의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가 대표적이고, 장은주의 시민교육이 희망이다역시 능력주의가 민주주의와 충돌하고 교육에서 능력주의 원리를 극복해야 민주주의 교육이 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학계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발견되며, 대중적으로도 과거에 비해 능력주의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늘어나고 있다.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담론을 비꼬는 노오오오오력등의 신조어가 이를 방증한다.

 

공정을 넘어, 그리고 효율을 넘어

 

나는 우선 능력주의가 평등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상황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본래 능력주의는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일률적 평가로 능력을 측정하여 선발한다는 방식의 효시격인 과거시험제도도 내세웠던 것은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었지, 모든 선비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준다는 것 따위는 아니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능력주의에서 수단일 뿐이다. ‘진정한 능력주의는 불가능하고 능력주의는 평등이 될 수 없으며, 능력주의는 선발하는 측(국가, 기업, 학교 등)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문제의식을 가진 여러 사회세력과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능력주의가 평등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왜 존재해야 하는가? 결국은 능력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효율성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더 큰 권한을 가지고 결정과 지휘를 하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으며, 적당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에 맞는 역할과 기능을 하면 사회에 더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효율성의 논리가 모든 것을 결정해서도 안 된다. 일단은 자본주의 안에서도 능력주의가 적용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누고, 능력주의 원리에 제한을 걸며, 평등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개인의 능력에 맞추어진 논의의 초점을 사회와 제도로 옮겨가면서 이루어질 것이다. 교육과 같은 공공영역이 대표적으로, 학생 개인의 학습 결과를 평가하는 데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와 학교의 교육의 의무를 먼저 물어야 한다. 노동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개별적인 차별의 원리와 제도를 바꾸어나가는 싸움은 다양한 현장에서 벌어질 것이다. 제일 처음 언급한 학교교육에서 시험성적에 따라 학생을 차별하고 입학 기회를 다르게 부여하는 현실을 바꾸는 것 등이 주요한 과제이다. 그 외에도 능력주의를 내세운 여러 사회적 차별과 싸우고 이를 시정하고 다른 원리를 심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차별금지법이 하는 기능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차별금지법과 같은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것이나 제도를 바꾸는 일 등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중요하다. 경쟁과 차별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하지만, 어떠한 경쟁이고 그 결과 어떤 가치의 분배가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은 사회 체제의 문제이며, 국가는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대한민국의 경우 대학입시제도를 결정하는 것은 정부이고, 1995년에는 기업들의 입사 필기 시험 폐지를 정부가 요구하기도 했다. 국가는 능력주의 체제에서 무슨 능력을 평가하고 어떻게 보상을 할지를 정한다. 어떤 교육과정으로 어떤 지식으로 어떤 내용으로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부여하느냐 하는 것은, 국가가 어떤 능력을 사람들이 학습하고 수련하게 할지 어떻게 인력을 관리할지 하는 의도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다.(이경숙(2017), 시험국민의 탄생, 푸른역사, 95-99.) 국가에 대해 교육과 평가, 선발과 차등 과정 등에서 능력주의를 약화시키거나 극복하기 위한 조치를 계속 요구하고 얻어나가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대선 후보 당시 내세웠던 기회는 평등할 것, 과정은 공정할 것,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표어는, 비록 평등을 직접 언급하고는 있지만 결코 대안은 될 수 없었다. 이 표어는 능력주의 세계관을 아주 잘 담고 있다. 평등한 것은 기회이고 결과가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회-과정-결과의 도식 자체가 개개인간의 경쟁으로 사회를 이해하고 구조화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비유는 달리기 등의 경주이다. 이때 우리는 출발선(기회)이 같았는지, 규칙(과정)은 공정한지,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된 승패(결과)가 정당한지를 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나 삶은 개개인이 참가하는 경주나 시합이 아니다. 경주나 시합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일 뿐이다. 사회 전체를 경주로 보면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속도와 타임을 재기 위한 시험과 평가로 삶을 채워나가야 하고, 일방적인 평가의 권력은 가려지게 된다. 평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경주 바깥과 주변을 보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경주의 세계관을 벗어나 다른 세계관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미래의 이상을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파악하고 세계를 설명할 말을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권운동이 능력주의를 넘어 다른 평등을 이야기하려면 우리가 어떠한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제안할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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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기관으로서의 학교교육

 

공현

 

 

국가가 공적으로 교육을 책임지는 학교교육 제도가 중요한 진보였고 보편적인 교육권의 보장에 기여한 측면이 크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학교교육은 사람들의 교육권을 보장한다는 목적과 동시에 이 사회가, 때로는 국가나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이중성이 있다. 교육이 인간의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을 길들이고 도구화하는 과정이 되는 것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가진 인적 자원을 학교에서 훈련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할 때도 노골적으로 드러나곤 한다. 하지만 폭넓게 보면 기성 사회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체제를 의심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으로 사회화시키는 것 자체가 교육이 체제 유지를 위해 인간을 수단화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무엇을 위한 시험과 평가인가

 

이 때문에 우리는 학교에서 종종 교육적이지 못한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각종 비민주적인 문화나 통제는 말할 것도 없다. 때로는 학교교육의 본질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들조차 대단히 비교육적이다. 예컨대 우리는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당연한 모습이라고 믿으며, 시험 성적에 따라 칭찬 또는 꾸중을 듣고, 차별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시험 성적에 따른 차별은,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는 역행하는 조치이다. 또한 시험을 잘 치는 것이 공부의 목표가 되는 것은 전혀 교육적이지 않다. “시험은 본질적으로 통제 수단이자 어떻게 통제받을지를 배우는 수단이다.”(이경숙(2017), 《시험국민의 탄생》, 187쪽.) 또한 시험은 본디 교육할 의무는 묻지 않고 응시자 개인이 학습한 결과만 따지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교육권이라는 보편적 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와 사회의 책무를 숨기고 교육을 개인의 노력과 자격의 문제로 탈바꿈시킨다.(이경숙(2017), 《시험국민의 탄생》, 27쪽.)

필기시험을 통해 객관적인 점수를 산출할 수 있으며 이 점수가 개인의 능력을 반영하고 있고 이에 따른 차별은 정당하다는 믿음은 학교교육 기간 동안 끊임없이 우리가 학습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공부하고 시험 치는 것이다 보니, 그러한 방식은 어느새 일반적인 방식이 되어 간다. 한 소설가는 이를 놓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상급 학교에 가는 방법뿐이야. (……) 아는 방법은 상급 학교로 가는 방법뿐이고. 더 이상 갈 학교도 없으니 방법은 두 가지지. 탯줄을 부여잡고 빈둥거리거나 세상을 온통 학교로 만들거나. (……) 시험 치고 등수 매기고 높은 점수가 목적이라고 믿고.”(이영도(2005), 〈봄이 왔다〉.) 결국 학교 밖에서도 공정한 시험에 의한 평가와 선발이 가장 정당한 방법인 것처럼 여겨지기에 이르렀고, 우리는 채용에서도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믿고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한 각종 시험에 도전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시험이나 검사, 평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평가라는 행위 자체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가치를 따지고 반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현황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한 불완전하지만 유용한 수단으로서 시험이나 검사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방적인 평가, 권력에 의한 평가 앞에서 인간은 왜소해지고 통제받는 존재가 될 위험이 있기에, 평가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조심스러움 대신 평가와 평가를 통한 경쟁이 당연하고도 바람직하다는 이데올로기가 들어서 있다.

 

모든 인간들에게 평가할 권리가 있다. 합리적이고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한 건강한 평가를 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 (……) 그러나 평가가 권력화되면 평가는 사회와 인간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모든 인간에게 편재하는 평가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독점물이 된 평가 앞에서 피평가자는 구속받는 존재가 되고, 마침내 독립적이고 창조적인 인간 정신을 파괴당한다. (이경숙(2017), 《시험국민의 탄생》, 358쪽.)

 

 

능력주의 기관으로서의 학교

 

시험을 중심으로 하여 학교교육이 학습시키는 가장 체제 유지적인 이데올로기가 바로 능력주의(meritocracy)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빈자와 부자 사이의 불평등, 부의 격차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돌아보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 “빈곤은 개인의 탓이다.” 이러한 믿음이 성공한 기업가들이나 이른바 자수성가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전파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언가 결함이 있을 거라고 의심을 받게 된다. 그리고 사실 이는 학교에서부터 친숙해지는 논리이다. “똑똑하고 노력을 한 학생이 좋은 성적을 받는다.” “네가 공부를 못 하는 것은 너 자신의 탓이다.” 오직 혼자서 임해야 하는 지필 시험과 같은 과정은 그런 믿음을 확인시키는 과정이다. 학교는 지금의 사회가 불평등한 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 능력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파하고 있다. 이러한 “(메리토크라시) 체제의 교육에서는 학력과 성적이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능력의 지표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가능한 한 높은 학력을 얻는 것이며 또 그 높은 학력에 걸맞은 적격자를 찾아내기 위해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줄 세우는 것이 되고 만다.”(장은주(2017),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67쪽.)

학교교육의 현장은 이와 같은 능력주의의 원리와 보편적 교육권의 원리가 공존하면서 충돌하는 장이다. 그래서 성적에 따른 차별을 비판하거나 경제력과 성적과 장애 여부 등에 관계없이 학생들이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계속 제기된다.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폐지하거나 축소한 최근 한국의 사례라든지 성적으로 서열을 매기는 것을 금지하는 다른 국가들의 예 등은 보편적 교육권의 원리가 관철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한국의 교육에서 능력주의 원리가 차지하고 있는 지분은 작다고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또한 보편적이고 평등한 교육권의 원리가 강한 사회라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 제도라면 능력주의 원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능력주의 체제 속에서 학교교육이 단지 능력주의의 원리를 학습시키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는 복합적인 의미로 능력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관이다. “개인이 받는 교육의 양과 종류는 능력의 척도로 여겨지며 동시에 직업의 적격성 및 직업과 관련된 물질적인 보상을 평가하는 기준으로도 사용된다. 교육은 능력주의의 핵심 동력이다.”(스티븐 J. 맥나미·로버트 K. 밀러 주니어, 김현정 옮김(2015), 《능력주의는 허구다》, 45쪽.)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보장되는 초·중등 교육의 기회는 곧 그 자체로 기회의 평등을 실현한 것처럼 착시 효과를 만들며 능력주의를 정당화한다. 그러면서 학교교육에서 뛰어난 성적을 얻음으로써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통해 공정한 경쟁 과정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야기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한가. “학교교육은 적은 특권을 갖고 있는 아이들에 비해 많은 특권을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성공 기회와 좀 더 적은 실패 기회를 준다.”(스티븐 J. 맥나미·로버트 K. 밀러 주니어, 김현정 옮김(2015), 《능력주의는 허구다》, 56쪽.) 경제적 차이는 사교육을 포함한 다양한 교육 기회와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여유의 차이를 낳는다. 가정환경의 문화적 자본의 차이나 지역 간의 격차는 학생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익히는 지식과 생활 태도의 차이를 낳고, 학교에 다니는 중에도 숙제와 각종 스스로 수행해야 하는 과업들을 해결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경제적·사회적 자본의 차이는, 상류층의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기회를 얻거나 다른 도전을 해 볼 여지를 준다.

이처럼 가정환경과 지역 격차 등 다양한 사회적 조건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학교는 성적과 입시의 결과가 학생 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게 꾸며준다. 이를 통해 평등을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 불평등에 반발하는 당연한 마음은, ‘공정한 경쟁이나 동등한 출발선을 바라는 것으로 갇히고 만다. 학력·학벌에 의한 차별이 노력과 능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 생각된다. 학교는 능력주의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이면서 능력주의를 실현시키는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능력과 자격을 묻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결국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적대로도 이어진다.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에서 강준만은 한국 사회의 갑질문화가 능력주의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장은주 역시, “메리토크라시는 우리 사회를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모욕 사회로 만든다고 지적한다.(장은주(2017),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74쪽.) 능력이 없는 자는 차별받아도 된다고 하는 사회는 소수자에게도 불리한 사회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소수자란 사회적 권력과 자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능력을 갖추기 더 어려운 이들이기도 쉽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차별 시정 조치나 우대 조치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개인의 능력과 자격을 먼저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혜택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차별에 맞서는 운동 자체가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로 여겨지고, 소수자들은 무임승차자로 비난을 받게 된다. 페미니즘 운동이나 노동운동에 대한 반감 등 상당수는 여기서 기인한다. 대학입시에서 지역균형선발전형으로 들어온 이들을 지균충이라고 구분하고 모욕하는 모습은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와 같은 책에서 이미 숱하게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능력/노력이 부족했던 거겠지하는 식으로, 결과를 정당화하며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여, 성공하지 못한 자들은 발언하고 문제제기할 자격도 없다는 식으로 작동할 때도 많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평등에 익숙하지 못한지를 방증한다. 사실 학교교육에서도 우리가 주로 보아온 평등이란, 계급과 사회적 여건 등을 삭제한 채로, 똑같은 교복(제복)과 커리큘럼 속에서, 시험 성적만은 온전히 개인의 능력이라는 허구의 믿음 속에 공정한 경쟁과 차등 대우를 해주는 것이지 않았던가. 현실의 격차와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이를 가리고 오직 개인의 재능과 노력만을 평가한다는 능력주의는 실제로는 개인을 사회적 현실로부터 떼어낼 수 있다는 불가능한 자유주의적 믿음을 전제로 한다. 현실의 사회적 격차와 불평등을 인식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나 집단적 노력은 능력주의 자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최근 대학입시제도 개편을 이야기하면서 학생부종합전형은 불공정하며 수능 시험이 더 공정한 방식이라는 주장이 다수 언론을 통해 제기되었고 결국 교육부가 수능 비중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내놓은 것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공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교육제도와 입시의 고통에 대한 불만이, 다시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왜곡되는 과정 역시 잘 보여주었다. ‘평등이 아닌 공정을 요구하게 되는 이러한 모습은, 박근혜 대통령을 대학입시 비리 문제로 성토하던 촛불집회에서부터,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슬로건과 스탠스로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능력주의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물론 종합적 대응과 정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선은 능력주의의 핵심을 흔들기 위해서라도 학교교육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 학교교육의 결과와 학력·학벌이 정말 능력을 반영한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 중 대부분은, 학교교육과 입시가 현재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능력을 배양하고 평가하고 있느냐 하는 의문에서 비롯되고 있지, 능력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학교교육이 아니더라도 능력주의가 능력을 측정하고 서열화하는 평가와 시험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변함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상상을 해 보자면, 이러한 회의론은 무능한 국가가 주관하는 학교교육 대신 더 사적인 교육 시스템이나 개인이 알아서 대비해야 할 시험과 도전의 과정의 비중이 커지는 것으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을 이야기하는 것으론 부족하며 능력주의 원리에 대한 극복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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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바란다면 자격/능력을 증명하라고?

 

공현

 

 

 

메리토크라시, 테스토크라시

 

한국은 아마도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시험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나라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제도를 능력주의,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고 하는데, 아니다.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능력에 따라 불평등이 심화되는 암울한 미래를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썼을 때, 그 메리트는 그래도 꽤 넓은 의미의 능력이었다.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단 하나의 능력만이 필요하다. 요령을 터득하여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푸는 능력이다. 이것은 메리토크라시가 아니라 시험주의, 곧 테스토크라시(testocracy).

시험이란 제도는 공정하지도 않지만, 설령 그것이 공정하다고 한들 최악의 제도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극도의 긴장과 경쟁 속에서 인간성을 파괴할 뿐 아니라, 그 결과를 통해 한 사람의 능력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으며, 잘해야 가장 운이 좋은 인간들에게 더 큰 운을 가져다줄 뿐이다. 심지어 이 과정을 통해 운을 자신의 능력이나 권력으로 착각하게 되면 재판거래 같은 것이 생겨난다.

이관후, 시험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한겨레 20181120

 

2018년 봄,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면서 국회 앞에서 거리 농성을 하고 여러 활동을 하고 있던 중, 활동 소식을 전하는 단체 페이스북 페이지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고등학생들은 선거권 주려면 투표소에서 시험 쳐서 후보 이름이랑 공약 3개 이상씩 써서 맞추면 투표할 수 있게 하자.” 선거권을 나이 기준으로 제한하지 않으면 뭐 시험이라도 치러서 부여해야 하느냐는 소리는 자주 들어봤지만 아예 구체적으로 저렇게 시험을 치게 하자는 소리는 처음 들어봐서 제법 신선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험으로 자격을 입증해야만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사고방식의 표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8년 겨울, 대학수학능력평가, 수능 시험 시즌이 왔다. 수능 시험은 우리 사회 최대의 정기적 시험 이벤트이자,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교육의 상징과도 같다. 수능 얼마 전부터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은 대학입시거부선언자를 모집하는 홍보 활동을 진행하고 13명의 거부선언자와 함께 수능 시험일에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발표했다. 홍보 활동을 활발히 한 덕분인지 SNS나 언론 등에서 여러 반응들이 돌아왔는데, 매번 들어왔던 말이긴 하지만 유독 수능 전과목 1등급 받고 서울대라도 합격하고 나서 거부한다고 해야 인정해 주지’, ‘공부 못 하는 주제에 거부한다고 하는 건 자기 변명과 같은 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언론 인터뷰를 할 때도 기자들은 거부선언자들에게 성적을 물어보곤 한다. 체제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너희가 그렇게 목소리를 낼 만한 자격이 있는가묻고, 시험 성적으로 자격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관후의 지적대로, 시험은 학교교육만이 아니라 온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제도가 되었다. 2018년 서울교통공사에서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자, 공채로 입사한 정규직 직원과 공채 시험에서 탈락한 취업 준비생 등이 행정법원에 이를 무효화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는 사건이 있었다. 시험에서 탈락한 적이 있는 사람들까지 소송에 참여했다는 것은, 결국 정규직 전환 대상이 된 노동자들의 , 똑같이 시험을 쳐셔 합격하지 않았다는 것임을 보여준다.

오로지 기회의 평등만을 강조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체제인 능력주의(meritocracy)’는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단을 요구한다. 사실 능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적 상황과 기준에 따라 달라지고 모호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주의는 쉽사리 능력이 있으면 성공한다가 아니라 성공한 사람은 능력이 있을 것이다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능력주의가 정당성을 갖고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평가 시스템’, 시험이 있기 때문이며 시험에 따라 가시화되고 증명된 능력인 시험 성적 및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개인이 고립된 채로 시험지 앞에 앉아서 답을 적어내고 채점을 받는 과정은 그 자체가 개인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믿음을 주는 일종의 의식처럼 보인다. 이는 시험 결과에 따른 차별을 능력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결과라고 정당화하는 데로 이어진다.

최근 노동 현장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이나 학교교육에서의 문제들을 보면, 한국 사회가 평등과 인권을 논할 때조차도 시험에 따른 자격/능력의 증명을 요구하는 사회라는 평가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평등이 오직 시험에 응시할 기회의 평등이며 인권은 오직 공정한 경쟁을 할 권리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존엄과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너의 자격과 능력을 증명하라. 되도록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험으로.’ 이러한 논리가 우리가 마주한 우리 사회의 솔직한 태도 아닐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시험과 능력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인권운동이 그 극복 방안을 고민해 보자고 제안하고자 한다.

 

 

보상 심리, 그리고 불신 사회

 

시험과 경쟁을 지지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치르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통의 기억이다. 자신들은 이렇게 노력하고 고생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런 노력과 고생 없이 결실을 보(려 하)느냐는 불만이다. 자신들의 노력과 고생에 대해 인정받고 보상받아야 한다는 심리도 있을 것이다. 인지 부조화 효과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하고 이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잘 수용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들과 같은 노력과 고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 것은 일종의 무임승차라고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이는 극단적으로는 공공성 자체를 부인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 담론은 능력보다도 노력’, 과정에서의 고생과 인내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연구가 있다. ‘노오오오오력이라는 냉소적인 신조어는 이런 경향을 방증한다.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학교교육에서든 노동에서든 개인에게 고통을 견디라고 요구하는 사회임을 반영한다. 물론 이 역시도 능력주의의 자장 아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가령,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감수하고 일한 고통과 인내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시험이라는, 능력을 입증하는 시스템을 경유하는 노력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 천시와 지능·학력 숭배의 전통과도 연관되어 있다.

대한민국 사회가, 비록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투명성이 강화되었음에도, 불신이 강한 저신뢰 사회라는 것도, 평등 대신 시험이 강조되는 중요한 이유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관해서, 국회의원들이나 언론들이 나서서 기존 정규직 직원들의 친인척이 특혜를 보았으리라는 의혹을 제기한 사건을 보자. 대부분이 근거가 빈약한 의혹이었음이 드러났지만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입학사정관제나 학생부종합전형이 비판받는 근본적 이유가 교사의 평가나 학생생활기록부 작성이 공정하고 정확하리라는 신뢰가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부 학교에서의 학생생활기록부 부풀리기나 시험 부정 의혹 사건은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성토로 연결되고 있다.

이렇듯 한국 사회는 여전히 지연과 혈연과 돈·권력의 이 강하게 작용하거나, 그렇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다. 또한 교사든 공무원이든 교수든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기보다는 의심과 불신의 대상이 될 때가 더 많다. 그러다 보니 비리와 특권, 주관이 개입할 여지를 최소화할 방법을 선호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시험, 특히 개인이 각자 치르는 지필고사인 것이다. 실제로 능력주의는 과거 계급사회나 인맥에 의한 비리 등을 대체하면서 대두된 체제였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사실 대단히 능력주의적인 사회임에도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능력주의적이지 못하고 전근대적이라는 평가가 공존하는 상황이기에, 능력주의와 시험을 더 강화하자는 주장이 득세하고 있다.

 

 

평등의 경험과 정치적인 경험

 

짚어보면 다분히 사회심리학적 성격의 문제들이고, 또 대중이 공정한 시험과 그에 따른 차별을 요구하며 나서는 상황이 곤혹스러운 순간도 있다. 사실 나 역시 대학입시나 각종 고시등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대대적으로 심리상담을 제공하는 등의 조치도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장기적으로 보는 것이 여전히 정석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심리를 결정하는 것은 분명 제도와 구조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우리 사회가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회적 장에서 평등보다도 능력과 자격에 따른 각종 차별을 경험하고 배우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학교에서는 노골적으로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이 더 옳은 이념이라고 가르치며, 시험 성적이 안 좋은 학생, 주류의 눈밖에 난 학생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경쟁의 논리와 부정행위가 나쁘다는 점을 가르치지만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어떻게 하면 학교나 일터나 사회 일반에서 자격을 따져묻지 않고 환대받고 평등한 존중을 받는 경험이 일반적인 것이 되도록 할 것인지, 국가에게 어떤 책임을 지게 하고 어떤 제도와 환경을 만들게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평등이란 무엇인지, 공정한 경쟁과 무엇이 다른지 효과적으로 이야기하고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개인이 경험하고 참아내야 하는 고통을 줄이는 것과도 결부되어야 한다. 잠을 줄여가며 노오오오오력해야만 하는 현실, 서열화와 차별로 인한 고통 등을 감소시키는 것은 분명 제도의 개선으로 가능하다. 마치 스포츠 경기 관중들이 상당수가 일어서서 보면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게 되는 것과 같은 과열된 경쟁 상황이 지금의 교육이나 일자리 구직 환경의 모습이다. 복지와 안전망을 강화하는 등 조건을 변화시켜야 억울한 사람들의 보상 심리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권에 초점을 맞춘 인권운동의 활동 방향은 물론, 인권을 기준으로 한 교육 개혁의 방향, 교육과 노동 영역에서 평가의 방식과 보상 체계 등에 대한 인권적인 관점 등을 함께 고민해 보고 싶다.

두 번째로, 결국 능력주의와 시험 체제의 배경에는 각자도생과 자기 계발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를 깨기 위해서는 물론이요, 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정치적인 실천이 일반화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능력주의에서 능력은 개인에게 속한 것으로 간주되고, 자기 계발(노력)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만이 합리적이고 공정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개인화된 능력을 입증하는 시험에 천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이나 페미니즘운동 등 사회운동적 방식, 집합적 방식, 정치적 방식을 통한 해결은 그 자체가 일종의 반칙인 것처럼 여겨진다. 또한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이나 페미니즘운동 등 사회운동 역시도 편견 없이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을 목표나 정의인 것처럼 요구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끊임없이 원자화되고 각자도생하게 되어 온 삶의 조건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대단히 정치적인 실천과 운동을 하면서도 운동권/정치권을 배격한다고 말하고, 비정치성을 선언하며, 조직화나 권력의 생성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광경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의 정치의 부재, 정치적 경험의 부재가 결국 시험이 평등을 대신하고 보상이 권리를 대신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어떻게 하면 정치적인 경험을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정치를 창조할지가 우리가 고민해야 할 과제일 듯싶다. 시민은 합리적인 개인이 아니라 지극히 사회적인 존재이고 연대에 의지하여 구성되는 존재이다. 대중이 인적 자원이나 소비자’, 또는 경주 선수가 아닌 시민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경험은 무엇일까?

인권운동(또는 더 넓은 의미의 운동)이 어떻게 이러한 경험들을 만들어낼지, 제도를 바꾸고 사람들을 조직할지가 인권을 시험 쳐서 받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담긴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해답을 찾는 열쇠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