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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1.05 그것이 바로 내셔널리즘 아닌가? - 〈아이 캔 스피크〉 (2)
  2. 2017.10.29 청소년은 시민이다 -《시민의 확장》
  3. 2017.10.27 "법은 법적 미성년들의 성애에 대한 관심과 행위를 부정하고 처벌한다." (1)
  4. 2017.04.19 ‘이것도 노동이다’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 -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
  5. 2017.01.10 『맛집폭격』 : 맛집 묘사 건너, 전쟁을 묻다
  6. 2016.08.15 오늘의 교육 33호 인공 지능 특집에 대한 리뷰를 겸하여, 인공 지능과 교육에 대해
  7. 2016.07.16 여기에 우리 편이 있었네? -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오자와 마키코)
  8. 2016.06.21 오늘의교육 31호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다시 묻는다?
  9. 2016.06.15 엄기호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와 '사랑과 난입' 비평 (1)
  10. 2016.02.18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내포하고 있으니까.
  11. 2016.02.17 도덕을 요구하는 나약한 것들의 천박한 투정 따위는 무시해.
  12. 2015.12.27 권력의 본질은 이해받고 싶은 것
  13. 2015.07.30 『대학거부, 그 후』 : 행복하냐고 묻기 전에
  14. 2014.11.15 청소년운동에 영감을 줬던 페미니즘 입문서
  15. 2014.11.11 새움출판사 『이방인』 번역 사태 돌아보기 (4)
  16. 2014.09.25 결함제품, 인간실격
  17. 2014.09.01 김기전 소년보호, 소년수양이 아닌 소년해방
  18. 2014.08.28 비블리아고서당사건수첩 5권 프롤로그 의문
  19. 2014.05.21 이방인 번역 논란, 출판사와 역자 등의 태도 변화를 바라며 (5)
  20. 2014.04.04 실수할 기회가 필요한 이유 - 겨울왕국 리뷰
흘러들어온꿈2017.11.05 20:11

그것이 바로 내셔널리즘 아닌가?

※ 〈아이 캔 스피크〉 미리니름(스포일러)이 가득합니다.


추석 연휴 직전에 〈아이 캔 스피크〉를 보았다.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최근 〈리얼〉이나 〈VIP〉나 〈군함도〉로 내려가 있던 한국 상업 영화에 대한 기대치와 상호 작용하여, 상대 평가를 한다면 꽤 높은 평가를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위안부’ 내용을 다룬 대중적인 영화의 계보 속에서 이 영화가 실현한 미덕이나 진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쨌건 〈아이 캔 스피크〉가 한국 상업 영화의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가치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재미있는 것 이후에라도 이 영화의 문제점이나 ‘해로움’을 좀 더 말해야겠다고 느꼈다. 어느 쪽으로든 말하고 싶어지는 욕망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주변이 온통 〈아이 캔 스피크〉 칭찬 일색이기에 긴 글로 문제점을 다 짚으려고 했지만, 그 사이에 나와 비슷한 관점에서 〈아이 캔 스피크〉의 문제점을 짚은 글들이 몇 편 나왔기에, 단상들을 모아놓은 정도로 적고자 한다.


박민재의 서사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옥분이 이야기상으로도 배우의 연기로도 압도적인 주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이 캔 스피크〉는 상당 부분 박민재(이제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관객이 박민재에게 감정 이입할 것을 기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므로 나옥분 만큼이나 박민재의 서사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

먼저, 나는 박민재 캐릭터에 대한 일각의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예고편이나 포스터에 적힌 것과 달리 박민재는 ‘원칙주의자’가 아니다. 박민재는 초반에 나옥분에 대해 대응할 때 원칙과 절차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했을 뿐이다. 이는 단지 곤란한 민원인에 대한 대처 방침을 선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박민재는 이후 구청장에게 재개발 추진에서 구청이 책임을 벗기 위한 꼼수를 제시하고, 구청장 앞에서는 지금 자기 직급에 만족한다고 겸손한 체하면서도 바로 진급 시험 준비를 하러 가는, 상당히 속물적이면서도 책략가의 일면을 가진 인물이다. 나옥분이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 궤변을 구사하며 일부러 어려운 단어로 시험을 치는 것도 그런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러므로 박민재에 초점을 맞춘 영화의 서사는, 속물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복지부동 자세의 공무원 박민재가 나옥분을 만나면서 변화하고 나옥분을 매개로 열의와 공적 책임감을 갖고 나서게 되는 이야기다. 박민재가 미국까지 가서 의회에 난입할 때가 그 변화의 절정을 찍는 순간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렇다. 〈아이 캔 스피크〉의 중심 이야기 중 한 축은 〈변호인〉 등 최근 한국 영화에서 여러 차례 변주되었던 ‘소시민의 각성’ 테마를 담고 있다.





공무원과 국가

그런데 기존의 비슷한 이야기들과 박민재의 이야기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바로 박민재가 ‘공무원’이라는 것이다. 박민재는 본래 공적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야 할 책무가 있는 국가의 대리인이다. 그럼에도 (현실의 많은 공무원이 그러하듯이) 그가 공적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이 〈아이 캔 스피크〉의 이야기 배후에 숨어 있는 갈등이다.

이런 문제는 나옥분과의 대비를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재개발 문제를 비롯해 시장과 거리의 온갖 공적 문제들에 ‘오지랖’ 넓게 개입하고 다니는 것은 그저 한 개인인 나옥분이다. 반면 〈아이 캔 스피크〉에서 개그 장면처럼 지나치는 공무원들의 일상을 보자. 명절 맞이 인사 이벤트를 하고, 계단에 소비 kcal 표시를 (그것도 거꾸로) 붙이는 그런 쓸모없어 보이는 전시성 사업들이나 하고 있다. 중간중간에 다소 뜬금없이 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씬들은, 사람들의 삶과 유리된, 공적이지 못한 공무원-국가를 보여 주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박민재가 시장에 가서 법원 판결이 나기도 전인데 행패를 부리는 깡패들을 제지하는 장면에서 비로소 공무원으로서의 박민재는 존재 의의를 찾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이 캔 스피크〉가 공무원–국가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은 바로 민족의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나서는 것을 통해서다. 나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밝혀지고 난 뒤 구청 공무원들은 그가 ‘위안부’ 피해자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나서서 서명을 받고, 박민재의 설득으로 구청장도 움직인다. 그래서 〈아이 캔 스피크〉는 국가와 민족, 내셔널리즘에 관한 영화이다.



나옥분의 서사

이승한이 비평했듯, 〈아이 캔 스피크〉의 미덕은 일본군 ‘위안부’ 소재를 다룬 영화들의 계보 속에서 피해자인 인물을 입체적이고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옥분은 ‘도깨비 할머니’이기도 하고, 또한 ‘위안부’ 피해자로서 어머니와 동생 등에게도 외면당하고 자신을 감추고 살아왔다. 나옥분의 사연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광복 후 한국 사회의 적대적인 반응을 간접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참고 : 피해자도 엄마도 아닌 ‘개인’의 초상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812211.html/)

그런데 나는 나옥분을 박민재와 대비되는 면을 통해 해석하고 싶다. 나옥분이 온갖 문제점을 찾아내서 시정하게 하고 민원을 내고 다니는 모습은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일을 늘리는 악성 민원인인 것으로 그려지고 시장 상인들 역시 나옥분이 트집이나 잡고 다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을 한다. 박민재의 동생 박영재는 나옥분의 그런 행동을 ‘외로워서 그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 ‘외로움’이 단지 가족 없이 혈혈단신으로 사는 처지의 외로움일까?

극중에서 나옥분이 민원을 제기하고 지적하는 것들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옥분은 재개발 추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건물을 일부러 훼손하는 행동을 고발하고, 입간판을 치우라고 할 때 역시 간판이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고 하며 어린이들이 그 입간판에 부딪혀서 사고가 날 뻔한 사례들을 거론한다. 반면에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했단 이유로 단속을 당한 식당 주인이 “할머니가 신고했죠?”라고 따질 때는 자신을 뭘로 보고 그러냐고 한다. 나옥분은 (적어도 자기 생각에는) 이것저것 다 트집을 잡고 신고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름대로 공공의 복리와 정의를 위해서, 이웃들의 공생을 위해서 필요한 규범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여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가 나설 것을 촉구하는 사람이다. ‘공무원’도 아님에도.

다소 과잉의 해석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상상해 본다. 나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경험이 있다. 또한 광복 이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감춰야 할 ‘사적인 수치’로 부정당하고, 국가로부터도 소극적으로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나서서 공적 규범을 지키고 국가의 적절한 개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재개발을 추진하려는 시장 건물주의 ‘합법적’ 횡포에 맞서서 구청이 나서서 상인들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는, 그러나 구청은 오히려 건물주의 편인 상황에 좌절하는 나옥분의 모습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겹쳐 보게 된다. 물론 나옥분이 기본적으로 같이 사는 이웃들을 챙기려 하고 정이 많은 인물이라는 것도 분명하지만 말이다.

나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수치’를 숨기고 살기를 바란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이를 감추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친구의 설득과 위독함 등 여러 과정을 거쳐 어머니와의 약속을 깨고 증언을 하러 나서기에 이른다. 따라서 나옥분의 서사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남의 일에 오지랖 넓게 나서는 – 공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던 캐릭터가, 자기 개인의 경험과 기억을 돌아보고 화해하고 극복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박민재가 사적 세계에서 공적 세계로 나아간다면, 나옥분은 공적 세계에만 주로 걸쳐 있다가 숨겨져 있던 사적 세계를 꺼낸다. 그런데 나옥분이 갖고 있던 비밀은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것이고 이는 이제 온 민족의, 국가의 이슈가 된 문제였다. 그래서 나옥분의 이야기에서 후반부는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가 통합된다.



‘죄송합니다’에는 무엇이 담겼나

나옥분이 제기해 온 그 많은 민원과 문제들은 그저 ‘악성 민원인의 심술’이라고 무시당하다가, 나옥분이 숨겨 온 개인사를 드러내자 그것은 대단히 공적 사안이 되고 박민재를 비롯하여 국가와 구청이 나서게 되는 것은 참 역설적이다. 시장 상인으로서의 나옥분, 노인으로서의 나옥분의 문제제기는 정당하지 못하게 취급되었지만, 민족이 공격당한 사건으로서 위안부 ‘피해자’인 나옥분의 존재는 갑자기 거대해진다. 나는 이것이 민족-국가의 소유물로서의 여성의 몸과 성이라는 관념이 (과거 민족의 ‘수치’로 생각하고 덮으려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는다.

〈아이 캔 스피크〉의 연출 중에 무엇보다도 박민재와 족발집 사람이 나옥분에게 사과를 하는 시점이 나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이 알려진 이후인 점이 아쉬웠다. 마치 나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서 사과를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특히 박민재가 울먹이면서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장면은 껄끄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재개발에 관한 민원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나 폭언을 한 것을 사과하는 것이라면 그런 점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해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나는 그 장면을 보며 박민재의 “죄송합니다”에,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죄책감을 투영하기를, 관객이 감정 이입하기를 의도하는 것처럼 느꼈다.

(좀 더 나아가면 이는 박민재라는 남성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고 화해를 청하는 장면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구청 공무원들이 대부분 남성이고 박민재 옆자리의 여성 공무원은 거의 역할이 없이 박민재에게 연애 감정을 우스운 방식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로만 소비되는 것이 그저 우연일까? ‘여성부’보다도 구청장이 나서서 일을 처리하라고 박민재가 말하는 것이 단지 설득을 위한 언변일 뿐인가?)

(참고 : "나(I)"는 꼭 '위안부'여야만 하는가.
 https://brunch.co.kr/@like-orwell/35 )


적대와 봉합

많은 사람들이 〈아이 캔 스피크〉가 전반과 후반의 서사가 잘 이어지지 않고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것이 만듦새의 엉성함이 아니라, 이 영화가 깔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높은 개연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면?

초반부와 중반부까지 영화가 제기한 갈등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나옥분이 노인으로서 겪는 차별이나 문제들, 재개발을 둘러싼 문제들, 민원인 나옥분과 구청 공무원 사이의 갈등, 박민재와 박영재 사이의 긴장 등. 그러나 후반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그 모든 갈등은 뒤로 물러난다. 아니, 밀려난다. 그리고 주된 갈등은 일본을 대표하는 외교관(인가? 너무 외교관 안 같아서….)과 나옥분을 비롯한 한국인들 사이의 문제로 바꿔치기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미국 의회 장면은 더 극적이어야 했고, 일본 외교관은 더 단순하고 악해 보여야 했을 것이다.

이 ‘외부’에 대한 적대는 내부의 여러 이해관계 문제와 갈등을 봉합해버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재개발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건물주와 깡패(일명 ‘용팔이’)들을 비롯한 재개발 추진 세력, 구청 공무원들, 나옥분 사이의 대립이다. 문제들 사이에는 위계가 생겼고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 된다. 재개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구청이 낸 소송도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데, 영화가 재개발 문제를 결말부에서 다루는 방식은 무책임할 정도이다. 이럴 거면 굳이 재개발 문제를 왜 플롯 안에 포함시킨 것인가? 첫 장면을 재개발에 관련된 건물 훼손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속았다는 배신감마저 든다.

그리고 이는 영화 외적으로 확대해 보아도 그렇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부(박정희든 박근혜든)가 일제 강점기 문제에 대해 잘못된 협상을 한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 또한 일본은 총리 명의로 일단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를 표명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은, 단지 공식 인정과 사과만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의 반성과 법적 책임 인정 문제 등 더 구체적인 논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아이 캔 스피크〉는 이런 맥락을 축소하고 “일본은 사과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더 단순화한다. 한국 정부의 책임도 사라지고, 한국인들은 그저 나옥분(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힘을 모아주고 여비를 보태주는 협력자로만 그려진다. 따라서 이 영화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루는 데서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 그 자체를 다루는 데는 퇴행적인 면마저 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소재를 통해서 공무원-국가의 존재 의의를 보이는 데서 더 가서, 일본에 대한 적대를 바탕으로 한국 내부의 단결을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내셔널리즘, 국가주의-민족주의가 작동하는 고전적인 방식이다. 공무원들은 여전하지만, 나옥분을 서포트함으로써 국가의 공적 일을 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얻는다(고 착각한다). 영화가 상영시간 전체에 걸쳐 나옥분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냈음에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나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증언자로 단순해지고 만다. 결국 이 영화가 내셔널리즘의 역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참고 : 후 캔 스피크 / 후지이 다케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4569.html )


세대 간 문제

사족으로, 나는 영화를 본 직후에 〈아이 캔 스피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대표되는 노인 세대와 박민재 등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 간의 문제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경제적으로도 발전하고 국제적으로도 위상을 가지게 된(영어 실력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현재 젊은 세대가, 이전의 식민지 시기 기억을 가진 세대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관점을 담고 있다. 박민재, 박영재, 나옥분이 이루는 유사 가족 관계도 그런 틀로 생각해볼 면이 있다. 어쩌면 가부장적 국가의 모습은 더 나이 많고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젊고 유능하면서 나옥분에게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나옥분을 돕는 박민재의 얼굴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이 부분은 공부가 부족하여 아직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더 풀어간다면 흥미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비슷한 관점으로 읽을 수 있는 다른 영화들과 비교 대조를 해 가며. 그러나 어쨌건,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옥분은 스스로 말할 수 있고 과거 자기를 침묵하게 했던 것과 싸울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우리가 더 나아진 구석일 것이다.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7.10.29 18:47

청소년은 시민이다

김효연, 시민의 확장, 스리체어스, 2017

 

 

시민의 확장은 고려대학교 법학연구원 정당법센터 연구원인 김효연이 법학적 관점에서 청소년 참정권과 선거권 제한 연령 기준의 문제를 논한 책이다. 먼저 이 책에는 몇 가지 의의가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겠다.

첫 번째로, 단지 선거권 제한 연령만의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 참정권이라는 틀에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18세 선거권 자체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슈가 된 문제지만, 국회나 언론 등에서는 그것을 청소년 참정권의 문제로 잘 다루지 않았다. 또한 18세 선거권 외의 청소년 참정권 문제 역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시민의 확장은 청소년의 권리 문제로서 참정권, 선거권 문제에 접근하고 있어 기존에 나온 책들과 차별화된다.

두 번째로, 시민의 확장은 법학적인 개념과 방법으로 논의를 끌고 간다는 점이다. 그동안 청소년 참정권 문제가 주로 (민주주의) 교육의 논리나 세대 간 평등 등 사회학/사회복지학의 논리로 다루어졌던 것에 비해, 시민의 확장은 헌법재판시 기본권 제한의 법리나 인권으로서의 참정권의 성격 논의 등 법학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등에서 계속해서 청소년 참정권에 대해 보수적인 판결을 내놓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접근이 가지는 의미가 분명히 있다.

세 번째는, 단지 국내법이나 국내 사례에만 머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 2장이 세계적으로 아동의 권리 변천사나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대한 연구를 담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시민의 확장의 시야는 국제적이다. 이에 따라 실제 사례들을 검토하면서도 외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청소년 참정권 관련 제도들, 선거권 제한 연령을 16세로 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경우 등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편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서 아동의 나이와 성숙도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을 권리를 논하면서, ‘연령성숙도를 분리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99)도 저자가 한 연구의 깊이를 보여 준다. 이상의 장점들이 청소년 참정권 이슈에 대해 알고 이야기하기 위해 시민의 확장을 읽어야 할 이유들이라 하겠다.

 

 

사회의 책임

 

청소년의 참정권 문제를 이야기하면(아니, 사실 청소년인권 이야기를 할 때면 거의 대부분) 청소년이 그만큼 성숙한가, 청소년이 그러한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를 묻는 경우가 많다. 18세 선거권을 주장하면서 18세면 충분히 성숙하다고 논거를 드는 것도 이미 그러한 틀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장에서 던진 질문, ‘몇 살이 되어야 시민이 될 수 있는가라는 말은 곧 이러한 틀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장에서 아동·청소년도 민주공화국의 원리에 따라 그리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원칙을 연역해 낸다. 다만 2008년과 2016년의 촛불 집회를 언급하면서 아동·청소년의 정치 참여가 이례적 현상이었다고 평가한 것은 아쉬운 부분인데, 이는 저자가 법학 전공자로서 아동·청소년의 정치 참여 사례에 밝지 못한 탓으로 이해하겠다.

4‘19세 미만 선거권 제한은 위헌이다에서는 헌법재판소가 19세 선거권 제한 연령이 합헌이라고 결정한 논리를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거권이 국가 내적인 기본권인지, 인간의 고유한 권리인 인권인지, 그리고 주권 행사의 문제인지를 나누어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내 학자 소수와 독일 학자는 선거권의 법적 성격을 인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97)라며 인권으로서의 선거권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제안과 정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청소년 참정권 제한에 반대하긴 하지만, 선거권 제한 연령 설정 자체는 입법자의 재량일 수 있다는 논리에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었기에 저자가 제시한 관점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고 생각을 고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이 문제를 풀 결정권과 책임은 여전히 국회에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선거권 등을 제한하고 보장하는 기준으로 청소년이 충분히 성숙했는지 자격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봐야 할까? 4장 소제목의 판단 능력이 미숙하면 권리를 빼앗겨도 되는가?”라는 질문도 적절하긴 하지만, 더 나아가서 시민의 확장은 사회와 제도의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영국에서 16세 선거권 주장이 나오면서 행한 연구에서 16-17세 아동이 정치에 관심이 적고 낮은 수준의 정치적 지식을 갖고 있고 정치적 태도도 일관적이거나 안정적이지 못했다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는 2007년 선거권 제한 연령을 16세로 한 뒤, 영국의 경우와는 달리 16-17세의 아동·청소년이 정치적 성숙성 수준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6-17세의 아동·청소년의 정치적 성숙성은 선거권 연령의 변화 이후에 성장했고, 즉 선거권 연령이 16-17세의 아동·청소년의 정치적 성숙성에 영향을 주고 있”(122)는 것이다. 정치적 성숙성은 생물학적으로 정해진다기보다는, 제도나 사회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청소년 참정권 요구는 청소년의 성숙성이나 뛰어남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해야 할, 청소년도 민주주의 사회의 예외 지대가 아니게 해야 할, 우리 사회의 책임을 묻는 운동이다. 무엇보다도 청소년 참정권 문제를 방치하고 있는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이다. 저자의 말대로 입법부는 입법 정책으로 단계적인 선거권 연령 하향이라는 개선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127) 또한 연령 제한과 상관없이 청소년의 참정권을 보장할 여러 방법들도 고민해야 한다. 이 책은 시민을 확장하자는 취지로 시민의 확장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이 책에 적힌 내용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청소년은 이미 시민이다. 시민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7.10.27 13:47

"법은 유년의 '천진무구함'과 '성인'의 섹슈얼리티 사이에 놓인 경계를 유지하는 데 특히 흉포하다. 우리 문화는 젊은이들의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기보다, 그리고 배려하고 책임지는 태도로 그것에 대비하기보다, 지역마다 다르게 지정된, 합법적 성관계 동의 연령에 미치지 못하는 법적 미성년들의 성애에 대한 관심과 행위를 부정하고 처벌한다. 섹슈얼리티에 미리 노출되지 않게 나이 어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련된 법이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랄 지경이다.

성 허용 세대sexual generation와의 분리를 보장하는 주된 기제는 '성적 동의 연령에 관한 법들age-of-consent laws'이다. 이 법은 지극히 잔혹한 강간과 지극히 온화한 연애를 구분하지 않는다. 17세와 성적 접촉을 했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20세는 두 사람 관계의 속성이 어떻든 상관없이 거의 모든 주에서 중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미성년자 쪽도 '성인' 섹슈얼리티에 접근할 수 없다. 섹슈얼리티가 '너무 지나치게 많이' 그림이나 영상으로 표현된 책이나 영화 혹은 텔레비전은 미성년자 관람 금지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극악무도한 폭력 장면을 보는 것은 합법이지만, 노골적인 생식기 그림을 보는 것은 불법이다. 왕성한 성 행동을 하는 나이 어린 사람들은 대개 소년원에 투옥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조숙증'을 처벌받는다."

- 게일 루빈, 〈성을 사유하기〉, 《일탈》, 현실문화, 320-321쪽.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7.04.19 15:12

이것도 노동이다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이영롱.명수민 지음, 교육공동체 벗, 2016) 리뷰



운동 사회 안의 해묵은 이야깃거리로, ‘시민사회단체의 상근활동가는 노동자인가?’라는 화제가 있다. 최근에는 열정노동/열정페이 비판 등이 여론에 대두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 당연히 노동자지!’ 하는 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원론적으로는 맞다. 운동의 과정에서 하는 일들도 노동이다. 단체와 계약하여 정해진 돈을 받고 일을 한다면 더욱 명백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나는 이게 그렇게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는, 자명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보자. 내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는 재정 상황 상 오랜 기간 상근활동가가 없었다. 그러다가 단체 규모가 커지고 후원금을 모아 상근활동가를 새로 두기로 했다. 기존에 활동하던 회원 중 몇 명이 상근활동가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상근활동가가 그냥 회원이었을 때 통상 참여해 왔던 정기 회의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상근활동가로서 하는 노동인가, 아니면 회원으로서 하는 활동인가? 이런 문제를 따지기 시작하면 좀 더 근본적으로는 상근활동가는 왜 돈을 받고 단체 일을 하는데, 그 외의 회원들은 돈을 받지 않고 무급 봉사로 단체의 일을 하는지부터가 고민스럽게 된다.


  조금 다른 길로 빠져 보자면, 노동자의 임금은 양면적인 성격이 있다. ‘(노동시간 또는 그 성과)에 대한 대가라는 측면과 생존과 노동력 재생산 보장이라는 측면이다. 시민사회단체 상근활동가의 노동과 그에 대한 임금은 후자의 측면이 좀 더 강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다른 많은 자발적인 무임금 노동/활동/운동들 때문에 일에 대한 대가라는 식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체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참여가 모두 대가를 지급받아야 하는 임노동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스럽다.


   상근활동가는 노동자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오자. 사실 이 질문에서 노동자, 문자 그대로 노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라는 역사적 환경 속의 임노동자를 뜻한다. 법과 판례를 참고하면, 노동자는 사용자/고용주의 감독·지휘 하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지급받는 사람이다. 구체적 상황은 단체마다 천차만별이긴 한데, 적지 않은 시민사회단체의 상근활동가들은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노동자라고 하기 어렵다.


   가령 사용자/고용주가 별도로 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따로 감독이나 지휘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 정해진 시간 또는 그 이상의 노동을 단체에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가는 것은 맞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자율성을 갖고 있거나 자기감독자기착취(꼭 나쁜 의미에서 쓴 말은 아니다.) 식으로 노동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한다.’ 등에 더해서, 이처럼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은 시민사회단체 상근활동가라는 직업을 택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면 자영업자에 가까운 건가 하면, 또 정해진 임금을 받지 단체가 활동이 잘 된다고 해서 돈을 더 가져간다거나 하진 않는다는 점이나, 총회 등 단체의 의결 기구에 그 고용이나 활동이 좌우된다는 점에서 노동자에 가깝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서, 시민사회단체들은 영리 기업과 달리 그 활동의 수혜자나 대면하는 대중이 시민사회단체의 수입처가 되는 곳(후원자들이나, 극단적으로는 정부 및 기업 등 기부처나 프로젝트 발주처)과 다르다는 특징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도 있다. , 피터 드러커 식 개념으로는 본질적 차이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만.


  내가 잘 알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의 예를 들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는 단체마다 상황이 매우 다르다.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 등으로 넓혀서 보면 실로 각양각색의 조직 구조와 노동 환경을 갖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영역에서 노동하고 있는 이들의 문제를 단지 노동법 준수의 문제나 노동자의 권리 보장과 같은 이야기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다.

 

 

다각도에서 바라보기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청년들의 사회적 노동 경험에 대해 2014년에 진행한 연구를 재가공하여 만들어진 책이다. 여기에서 사회적 노동이란 의미적으로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내려는 의지와 실천, 협상을 동반한노동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 공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을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이 가려는 길은 그러한 현장을 기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청년들이 좋은 노동’(공익적이고 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의미에서이든, 노동자가 행복한 노동이라는 의미에서이든.)을 기대하며 사회적 노동에 찾아오고, ‘좋은 노동에 대한 질문을 계속 붙들고 고민하며 일하고 있다는 데 주목하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의 의미나 성격이나 좋은 노동의 요건 자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려고 한다.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의 장점은,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의 현장을 노동의 문제의식을 갖고 다루면서도, 그 노동조건의 열악함만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인터뷰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중층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이 어떤 경험인지를 살피며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이 영역에 남아서 계속 일하고 있는가묻는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책 에필로그 청년들은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가에서 저자들이 던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곧 이 책을 낳은 문제의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그토록 열심히 오랜 시간 일하도록 만들었을까?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괴롭게 만들고 소진시키고 있을까? ‘그럼에도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는 걸까? 더 좋은 노동과 사회를 향한 어떤 형태의 바람과 기대, 혹은 어떤 열망이 그들을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현장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도 다층적이며 복잡하게 경험되고 있을까?” (240)

 

   그래서인지, 이 책은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이라는 주제를 시종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려고 한다. 가령 1장에서는 노동, 활동, 운동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사회적 노동의 양태를 파악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에서 하는 일은, 노동이기도 하고 (사회적) 활동이기도 하며 (정치적) 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책 속에는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이 노동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를 회피한다는 지적도 담겨 있지만, 동시에 활동과 노동을 엄격하게 구분했을 때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고, 사회 변동 속에 운동의 개념이 약화되거나 혹은 불명확해지고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도 읽힌다.


   4모순과 함께 일하기에서는 사회적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순된 가치의 충돌이나 중첩을 보여 준다. 자율성과 타율성, 공동체적 조직 문화와 일의 효율성, 우리 좁히기와 우리 넓히기, 자립과 의존 등 가치 사이에서 느끼는 고민들을 기록한 내용에는, 과연 무엇이 좋은 노동인지, 사회적 노동은 어떠해야 하는지, 당위적 가치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복합적 경험들이 녹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리뷰는 사실 이 책의 주제와 관점을 이해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작은 운동장 안에 들어와 막상 부딪혀본 세상은 꽃밭이 아니라 또 다른 고난이었다. 선의에 기댄 채 생활의 어려움은 애써 외면해 보려 했으나, 반복되는 삶에 지속적으로 덧대어지는 더께는 결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들은 결국, 그들의 선택을 후회한다.” “우리의 대한민국은 70년대 산업화의 격랑을 단기간에 거쳐오며, 더 나은 노동을 찾아내는 것에 지속적으로 실패해 왔다. 첫 번째 책인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가 그 증거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11213&CMPT_CD=C1500_mini)


  이 책은 단지 좋은 노동을 찾아서 온 사회적 노동 현장에도 좋은 노동은 없었다라는 서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가 원래 연구 보고서에서 출발해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인지 읽기 어려운 부분들이 왕왕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책의 내용에서 사회학자의 개념 등을 많이 인용해 오고 있는데 굳이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는, 서문에서부터 피로 사회등으로 대표되는 ‘OO사회논의가 이어져왔던 점을 거론하고 있는데, 지난 몇 년간 그러한 논의를 따라오며 읽어오지 않았던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그러한 논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하는 부분은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축적된 담론이나 개념들을 이미 독자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고 예상하는 것 자체가 학문적 영역에서 탄생한 글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은 노동을 위해

 

사회적 노동은 복합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노동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 자체가 복합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하지 않은 문제라고 말하고 그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말을 막고 현상을 유지하자는 소극적인 자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것인지, 좀 더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역시 막바지에서 우리에게는 완벽한 출구도 섣부른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243)라고 말하면서도,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들이 계속될 것임을, 삶을 지속하는 능력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나는 첫 번째로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의 현장에 필요한 변화는 투명성 강화라고 생각한다. 노동 문제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 문화를 없애고, 노동 조건과 현실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고 공개하고 소통해야 한다. 이는 1차적으로는 일을 하는 노동자/활동가들에게 진입 과정에서부터 이를 공개하고 솔직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뜻이며, 2차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이 영역의 현실이 이러함을 열어놓고 문제점을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서로의 기대가 어긋나서 생기는 문제를 줄일 수 있고 개선할 길도 더 빨리 찾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운동 사회’(혹은 사회적 경제 사회/네트워크’)의 문제 인식과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 개별 단체나 협동조합 등의 수준에서는 자원의 한계가 많고 당장의 선택지도 적은 경우가 많다. 비슷한 여건에 놓여 있거나 같은 영역에서 활동하는 단위들 사이의 네트워킹과 연대를 통해서 해결 가능한 문제들이 분명히 있다.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에서 제기하고 있는 개인의 성장에 관한 문제나 세대 간 소통, 조직 문화 및 조직 내 민주주의와 같은 문제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 번째로 더 문제를 확대하면, 전 사회적 공동 책임을 논의하고 요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회적 노동영역에서의 여러 문제들은 다중적 의미에서 사회적이다. 예컨대,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에서 청년 세대의 문제나 세대 간 문제로 지적하고 있는 여러 지점들은, 단순히 세대 간의 인식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청년 세대가 겪는 사회적·경제적 문제나 전 사회에서 정치적 변화의 전망이 약화된 문제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사회적 노동, 전 사회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공익적인 성격의 일을 하지만 이 때문에 투여되는 노동에 비해서 얻는 경제적 이익은 한정되는 성격이 있다.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이 하는 일들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가치 있는 공익적 일이라는 합의가 가능하다면, 이에 대해 좀 더 사회적인 공동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제도적인 지원이나 공간 등 인프라 구축의 형태가 되었든, 좀 더 풀뿌리적인 연대의 형태가 되었든.(‘예술인 지원 제도가 가능하다면 활동가 지원 제도는 왜 불가능한가?)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읽고 한 생각은, ‘사회적 노동이라고 해서 우리 사회 전반의 노동의 문제와 별개로 볼 수 없으며, 우리 사회의 경제·교육·주거·문화·복지 등의 문제와도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사회적 노동 영역만을 따로 놓고 이것이 좋은 노동인지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역시 그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하지 않는다. 사회적 노동 영역에서의 예시들은 문제점과 변화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모델이자 창구이다. 결국 우리가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으며 나 자신에게도 행복한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우리가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꼭 시민사회단체·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에서 일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7.01.10 13:24

『맛집폭격』 : 맛집 묘사 건너, 전쟁을 묻다



 



《맛집폭격》 (배명훈, 북하우스, 2014)

주의 : 책에 관한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맛집폭격》의 첫 장을 열면 인도 요리에 대한 묘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 뒤에는 스페인 음식 차례다. 그 다음은 또 터키 음식……. 이 소설은 곳곳에서, 특히 전반부에 이런 묘사가 등장한다. 읽다보니 배가 고파지고 군침이 고일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여기에 등장하는 맛집들은 모두 실제로 있는 식당들이기 때문에, 당장 찾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맛집’보다는 ‘폭격’ 쪽이다. 맛집과 요리에 대한 이야기에 반응하는 위장을 달래면서 책을 읽어나가면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파괴되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주제의식은 전쟁이다. 사실 배명훈은 전쟁에 대한 관심이 높고, 이는 여러 작품들에서 확인된다.


(나는 배명훈이 밀덕이 아닐까 생각하고, 실제로 배명훈은 ‘밀덕’에 관련된 글을 쓴 적도 있다. 그러나 배명훈의 관심은 아무래도 군대나 전쟁 무기보다는, 국가와 전쟁의 정치학·사회학·철학적 의미를 향해 있는 것 같다.)


《맛집폭격》은 배명훈의 주 장르로 알려진 SF라고 보기는 애매하지만, 배명훈스러운 작품이기는 하다. 책을 읽다보면 배명훈의 다른 작품(리바이어던이나 예비군로봇 등)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전쟁이나 국가에 대한 고찰을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맛집폭격》 속에서 대한민국은 먼 나라와 미사일 폭격을 주고받는 사실상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것이 ‘전쟁’임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 전쟁은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수행되는 게 아니라, 국제적 군사무기업체에 미사일 발사를 ‘외주’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배명훈이 《맛집폭격》에서 그리는 전쟁은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적이다. 전시와 평시의 구분은 흐릿해지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전쟁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배명훈은 이를 근대 국가의 유래를 언급하며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전쟁이 나고 공습경보가 울리면 뭔가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공습경보가 울려도 대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눈치가 보여서였다. 미사일이 하필 거기에 떨어질 가능성은 아직 그렇게 높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것은 퇴근 시간이 되어도 퇴근하지 못하는 이유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전쟁은 그렇게 일상과 겹쳐졌다.
 전시와 평시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전시가 되면 평시라는 이름이 붙은 시공간에 뭔가 본질적인 변화가 생길 거라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평시를 위해 만들어진 정부조직이나 행정기구나 금융체계가 같은 것들이 전시가 되면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변신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애초에 국가가 전시 태생이기 때문이었다. 평시 조직을 전시에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전시 조직을 평시에도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86쪽)




‘정부’의 입장에서…

주인공 이민소는 ‘에스컬레이션 위원회’에 속해 있다. ‘에스컬레이션’은 점증(漸增)을 뜻한다. 이 경우에는 전쟁에서 서로가 군비경쟁을 하고, 주전론과 적대감이 강화되고, 서로 더 강한 타격을 가하며 전쟁이 격화되는 것을 뜻한다. 즉 확전(擴戰)이다. 에스컬레이션 위원회는 무분별한 확전을 막고 서로의 가해/피해를 관리하기 위해서 피해 정도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적절한 대응 수위를 결정하는 기구이다. 책 속에서 이민소는 클라우제비츠가 ‘정부’, ‘군부’, ‘국민’으로 국가의 전쟁 관련 요소를 나누어서 본 것을 소개하면서, 에스컬레이션 위원회는 ‘정부’의 입장에서 전쟁을 관리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여기서 ‘정부’의 입장이란 현실의 정부라기보다는 이상적인, 국가의 자원을 관리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정치적 기구의 위치를 뜻한다.

 “클라우제비츠 책에 나오는 절대전쟁은 그런 거야. 뉴턴 물리학에 나오는 마찰이 없는 상태 같은 거. 움직이는 물체를 가만 놔두면 어떻게 되겠느냐, 전쟁이라는 걸 자연 상태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되겠느냐, 뭐 그런 거지. 그렇게 내버려두면 무제한적인 폭력성 같은 게 튀어나오게 되는데, 그걸 이끌어낼 수 있는 건 국민들이라는 거야. …… 그래서 그렇게 되기 전에, 정부가 합목적성을 가지고 상황을 하나하나 따지는 편이 안전하다고. 돈 세듯이.”(139쪽)

 “우리 보고서 서론에 쓴 이야기 있잖아. 클라우제비츠 책에 나오는 정부랑 군대랑 국민 이야기. 에스컬레이션 위원회는 그 셋 중 정부 입장에 설 거라는 거. ……” (183쪽)

이야기는 이민소가 자신이 알고 있는 ‘맛집들’이 연속적으로 폭격을 당하고 있음을 눈치 채는 데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그 맛집들은 죽었다고 알고 있는 과거의 연애 상대 송민아리가 이민소에게 소개해줘서 함께 갔던 곳들이었다. 송민아리와 이민소는 과거 국제적 군사 무기업체에서 함께 일했는데, 송민아리는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민소는 송민아리가 사실은 살아있으며 대한민국과 모국가 사이의 전쟁에서 미사일 발사를 위탁받은 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며, 이민소와 송민아리의 맛집이 연달아 폭격당하는 것에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른다.


전쟁만 하면 맛집은 언제 가나


소설의 결말부를 미리 말하자면, ‘군부’가 미사일 업체와 협의하여 폭격을 조종해가며 확전을 의도했던 것으로 밝혀진다. 그 목표는 전쟁을 통해 군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미사일 개발 등 군비강화에 관한 규제들을 약화·해제시키는 것이었다. 이민소는 이런 내용을 보고서에 담고 전쟁 상대인 모국가의 에스컬레이션 위원회에도 전달하는 등의 노력을 한다.

 “그쪽은 그 정보를 가지고 뭘 좀 해볼 수 있을까요?”
 “글쎄, 그래도 거기는 우리보다 선진국이니까.”
 “선진국이라. 그게 뭘까요? 요즘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이게 공개되면 세상이 발칵 뒤집히겠다 싶은 게 공개되면 정말로 발칵 뒤집혀주는 세상. 그 위에 세운 나라. 그런 거?”
 “연약한 나라네요.”
 “나약한 나라지. 우리처럼 강인한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184쪽)



이민소는 이를 알게 되어서 폭격의 목표로 노려지게 된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이민소와 같이 에스컬레이션 위원회에서 일하던 윤희나의 도움으로 지하 벙커로 숨는다. 하지만 결국 에스컬레이션 위원회의 진상 규명 노력에도, 확전은 막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군부’의 관점에 ‘정부’의 관점은 패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지하벙커에 숨어 있던 이민소와 윤희나가 거대한 폭발 소리와 정적을 들으면서 끝난다. 핵폭탄이었을까 의문을 느끼면서도 이민소와 윤희나는 벙커 문을 열고 상황을 확인하는 것을 미뤄둔다. 그리고 요리를 하기 위해 양파를 썬다. 조리를 위한 전기도 가스도 모두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이민소가 눈물을 흘리며 양파를 써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사라져버린 맛집들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요리’가 불가능해진 상황으로 끝을 맺는, 그 대비가 전쟁으로 사라진 일상생활을 상징하는 듯하다.


《맛집폭격》의 메시지는 그래서 다분히 반전주의적으로 다가온다. 이민소나 윤희나는 딱히 반전평화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은 단지 정부의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활동은 결국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각자 추구하는 ‘군부’와 ‘기업’(국제 군사무기업체)의 무책임한 폭주는 전쟁을 폭주시켜 멸망에 이르게 한다. 결국 어느 선을 넘어선 때부터는 전쟁 ― 갈등의 대립과 주고받는 폭력 ― 은 통제 불가능해질 거라는 작가의 비관적 예상이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2016년의 영화를 꼽는다면 후보로 오르기에 손색이 없는 〈우리들〉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어째서 자신을 때리고 다치게 한 아이에게 너도 같이 때리지 않느냐고 묻는 누나 선에게 윤은 답한다. “계속 때리기만 해? 그럼 언제 놀아? 난 놀고 싶은데.” 그렇다. 전쟁만 하면 언제 맛집을 가겠는가.


나는 《맛집폭격》을,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쟁 전의 맛집과 추억을 묘사하고 전쟁과 국가와 사회에 대한 건조한 고찰과 전쟁을 관리하려는 정부 공무원의 노력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쓴 반전 소설이라고 요약하고 싶다.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6.08.15 20:19

오늘의 교육 33호 인공 지능 특집에 대한 리뷰를 겸하여, 인공 지능과 교육에 대해

 

 

인공 지능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설명하면 인간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지능이다. 어릴 적부터 SF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을 보아 온 이들에게, 인공 지능이라는 말은 인간을 닮은 로봇이나 인간의 질문에 대답을 내놓는 컴퓨터 등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혹은 좀 더 하드한 SF 팬이라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멀티백이나 로봇 시리즈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은 인공 지능에 대해 갖고 있던 막연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내려놓도록 하자. 사실 우리가 논하는 인공 지능은 이미 상당 부분이 현실화되어 있고 우리 일상 속에도 들어와 있다. 가령 내 아이폰에서 음성 인식 기능에 기반을 두고 적절한 검색이나 앱 실행, 전화 걸기 등을 해 주는 Siri는 낮은 수준의 인공 지능이다. 내가 검색하고 방문한 인터넷 기록을 수집, 분석해서 내게 적절한 상품 광고 등을 추천하는 것도 일종의 인공 지능이다.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구글번역기도 인공 지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입력하고 조작한 그대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인지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매커니즘에 따라 판단하는 모든 프로그램>들은 인공 지능이다. 어느 정도로 고도화되고 성능이 좋은가, 혹은 얼마만큼 인간과 흡사하거나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결과를 낼 수 있는가 하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이미 초보적인 수준의 인공 지능은 상용화되어 있었음에도, 인공 지능이 그 동안 큰 관심사가 되지 못한 것은 그 기능이 아직까지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Siri 등을 사용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인공 지능의 수준이라는 게 그리 신통치가 않았다. 구글 번역기의 수준은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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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가 입증한 것은 이와 같이 매우 낮은 수준이었던 인공 지능이 비약적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할 가능성이다.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단순-기계적방식으로 인간보다 좋은 결과를 내기 쉬운 장기나 체스와 달리, 바둑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방식으로는 인간과 대등하게 둘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둑에서 인간과 대등하게 겨루거나 인간을 앞지를 수 있는 인공 지능을 만들 수 있다면, 이는 단순-기계적 방식이 아닌 인공 지능으로서, 단순한 규칙들이 적용되는 실제 상황들(경우의 수가 매우 많은)에서도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발전이 가능해진 것은 딥 러닝이라는 기술 덕분이었다. 인간은 복잡하고 새로운 연산-사고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하는 알고리즘을 설계함으로써 더 유용한 인공 지능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치 인간의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수많은 정보를 인식하고 학습함으로써 지능을 발달시키듯이. 결국 지능이 학습에 의해서만 판단 능력을 발달시켜 나갈 수 있다는 딥 러닝의 사례는 재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 주기도 하며, 인공 지능을 연구하고 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지능의 본질을 이해하려 했던 과학자들에게는 또 다른 숙제를 던져 주는 듯하다.(: 알파고가 이 국면에서 이런 수를 둔 이유’, 그 사고 매커니즘을 프로그래머가 관찰하고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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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지능의 대두에 따라, 교육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사실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통용되고 있는 논리란 게 이러하다.
“인 공 지능의 상용화에 따라 노동시장이 개편되고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시대에 맞는 경쟁력/능력을 가진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으로 (예컨대 정보수집과 분류, 판단 등은 인공 지능이 더 저렴한 비용으로 효율적으로 할 테니) 창의성과 감성에 중점을 둔 교육을 해야 한다. 혹은 인공 지능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즉, 인공 지능과 로봇으로 대체할 수 없는 능력을 길러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그러한 교육의 성공 가능성을 논하기 이전에, 이미 세 가지 큰 문제점이 있다. 먼저, 여전히 교육을 노동시장에서의 요구에 맞춘 노동력을 양성하는 과정으로 위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아무리 인간의 대체불가능한 능력을 강화시키더라도, 전체 일자리가 줄어드는 이상 완전고용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며, 대체불가능한 능력을 가졌지만 실업 상태인 인구는 역시 늘어날 것이다.(그럼에도 계속 경쟁력을 강조하는 것은, 교육이 국가 단위에서 경쟁력을 견인한다는 인식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
세 번째, 설령 정보수집과 분류, 판단, 제작 등 인공 지능과 로봇이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정보수집과 분류, 판단, 제작 등의 활동은 인간이 인간답게 지능을 활용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간과할 수 없는 인간적 활동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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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인공 지능 시대를 앞두고 교육에 대해 생각할 때, 문제의식을 역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교육》 33호의 메시지 중 하나이다). 인공 지능 시대에 요구되는 노동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인공 지능 시대, 노동(노동시장)으로부터 해방된 교육을 고민해야 한다. 노동시장과 사람들의 생존, 분배의 문제는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구조적 변화, 경제적 변화를 통해 해결해야만 한다. 우리가 교육을 논할 때 교육 이상으로 “우리 사회를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정용주 글)를 논해야 하는 이유이다.
물론 인공 지능을 활용하는 방법이 교육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인간과 사물(인공 지능과 기계)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확대하고 삶 속에서 교육하고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심임섭 글) 인공 지능을 비롯한 기술이 더욱 중요해지고 우리의 삶을 구성해갈수록 우리가 기술과 맺는 관계, 기술에 대한 인식, 기술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론 등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삶을 위한 교육’, 동시대적 교육에서 ‘기술’, ‘인공 지능’은 외면할 수 없는 중요한 교육 주제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기술 사용,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 수행하는 제작 활동 등도 교육의 과제로 강조된다. 이는 더 효율적으로 기술을 사용하는 기술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 기술을 수용하고 인간적이고 행복한 삶과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위한 것이다.(최빛나 글)
인공 지능 시대, 교육의 전환 역시 그동안 우리가 탐구하고 추구해 온 교육의 전환의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이는 교육의 본질은 변함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인공 지능에 의해 변화하게 될 우리의 삶을 직면하며, 거기에서 태어난 인식과 전환을 교육에도 적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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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지능이 완전한 유사-인간, 인격이나 정서나 성격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지는 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공 지능이 인간의 지적 활동들 중 상당 부분을 대신하고, 기계적 장점으로 인간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정보 수집과 판단 등을 내릴 날은 그리 머지않았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앞에 가보니, ‘기독당’이 “인간 생존권과 직장을 말살하는 인공 지능 등 무인발권기는 폐쇄하자”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있었다. 모든 영역을 기계와 인공 지능이 대체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삶의 질과 서비스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한 변화 방향인가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거부한다고 해서 멈출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존재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과 실천에 달린 문제이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6.07.16 02:39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 10점
오자와 마키코 지음, 박동섭 옮김/서현사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오자와 마키코 지음, 박동섭 옮김, 서현사, 2010 (2015년 2판3쇄)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법인데, 그 변화의 방식에 소위 과학적인 잣대를 들이대 어린 시기에는 월 단위로 변화의 양상이 측정된다. ‘생명의 변화’에서 ‘발달’이라고 말이 바뀐 순간에 삶의 모습은 왜곡되고, 축소되고, 경직되어버렸다. 생명에 가격이 매겨지고 합/불합격, 적응/부적응, 정/부정이라고 하는 시점에서 ‘상품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우열과 경쟁이 우리 의식에 착 달라붙기 시작하였다."(34쪽)


"논리성·합리성을 몸에 익히는 것을 ‘성숙’이라 이름 붙여 상위에 두고, 감정·직관을 ‘미성숙’이라 부르며 하위에 놓는 현대사회에서는 언어를 통해서 명쾌한 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주장은 상대해주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아이다."(138쪽)


"법률은 아이를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없는 사람으로 보호하는 부분에서는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 헌법 제27조 ③의 '아동은 혹사당해서는 안 된다.'와 같이. 그러나 '법 아래의 평등'에서 아이는 배제된다. 제14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아래서 평등하고 인종, 신념, 성별, 사회적 신분에 따라서 정치적, 경제적 혹은 사회적 관계에서 차별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연령에 의한 차별은 묵인된다.

즉 아이는 부모의 부속물로 취급되며 '모든 국민은'이라는 항목에 포함되는 평등한 존재가 아니다. 아이는 단지 보호되는 것이다."(158-159쪽)


"제멋대로인 아이, 건방진 아이, 아이답지 않은 아이라는 표현은 아이를 비난하는 대표적인 형용사이다. 그 정반대 쪽에는 ‘잘 참고, 순진하고, 아이다운’이라는 형용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곧 힘을 가진 어른에게 종속되는 아이의 이미지이다. 제멋대로라는 말은 자기중심적인 여자에 대해서도 언제나 던져진 비난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제멋대로인 여성, 건방진 여성이라고 불리는 데 저항하면서 여성들은 자신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으로 되지 않았던가?"(160-161쪽)


"부모-아이 관계의 문제는 권력관계 문제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양육되어 자라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약자의 위치에 두게 한다. 아이는 양육될 뿐만 아니라 어른에게 보호받고 싶다, 의지하고 싶다, 그리고사랑받고 싶다고 강하게 바란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는 몸으로 알고 있다."(173쪽)


"아이가 어른에게 의존하는 것은, 어른이 아이를 지배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거래이다."(230쪽)




어느 청소년인권 책에라도 나올 법한 문구들이다. 그러나 이 책을 쓴 사람은 일본의 임상심리학자, 오자와 마키코이다. 그의 책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에 나오는 문구들이다.


언젠가 읽어 봐야겠다고 벼르고 있던 책인데 실제로 읽어 보니 생각과는 많이 다른 책이었다. 나는 심리학, 특히 아동-청소년 대상 심리학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내용을 기대했다. 그러나 웬걸. 학문적인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청소년인권, 청소년해방의 관점에서 심리학으로 표상되는 우리 사회의 청소년관-학교-가족 등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심리상담이나 심리테스트 등의 문제점도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그 비판 안에서 느껴지는 관점은 훨씬 더 근본적이다. 우리가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상상하고 만들어가고 있는 '청소년해방론'의 한 조각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책 서문에서 오자와 마키코는 심리학이 인간해방에 기여한다고 믿고 임상심리학자로서 일해왔지만, 실은 심리학이 얼마나 지배자 측의 기대에 맞춰서 역할을 해왔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아동기의 '발달'부터 '학습', '지능', '심리테스트', '상담', '등교거부', '부모-아이 관계'까지 살펴 나간다.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청소년억압의 핵심 장치인 학교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자와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오자와 마키코의 책들이 연달아 나오고 있다. 그밖에도 번역된 책들이 있고. 대부분 책들의 문제의식은 비슷한 뿌리를 갖고 있다. 칼럼 모음도 있고, 심리상담 전문가 등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책도 있다. 제목만 나열하면 이러하다.  《아이들의 권리, 부모의 권리》, 《학교란 무엇일까? - 학교밖 아이들》, 《지금 아이들이 있는 곳》,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아이차별의 사회》(미번역) 등.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심리학자가 아니라 청소년인권운동가나 청소년인권 전문가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우리편 전문가'에 목말라 있던 청소년활동가들, 또는 청소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학자이고 책이다.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6.06.21 16:27

31호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다시 묻는다 리뷰



31호 특집이랑 32호에 실린 후속에 대한 간단한 리뷰 ... 같은 것입니다.



- 31호 특집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주제로 하여 구성됐습니다. 조합원들의 글이 많이 실린 것이 특징인데요.

'정치적 중립성'이 쟁점이 된다고 하면 보통 생각하는 한국사나 정책/정당에 대한 의견 표명 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글을 읽어보면 정치성이라는 문제가 굉장히 폭넓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진은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밝혔던 일 등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학교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야자를 학생들이 희망대로 참여하게 한 것이나 학생인권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병우의 글은, '수행평가 비율'이라는 문제도 정치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최병우는 수행평가 비율 70%를 적용하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분배방식과 평등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두발자유 운동을 하다가 '학생을 선동하여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라는 죄로 징계를 받은 류제민이나, 학교에서 강제전보를 당한 동대부고 교사들의 이야기도 또한 흔히 생각하는 '정치적 중립성'의 영역을 다소 벗어나 있습니다. 또한 미나리는 '성교육 표준안' 문제를 언급하며, 국가에 의해서 성교육에 대해 지침을 정하고 제한을 가하는 것이 주는 느낌을 토로합니다. 성교육 역시 하나의 정치적 문제인 것입니다.



-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글들에서 제가 읽은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 같습니다. 하나는 일상적인 삶이 곧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국가의 통제, 권력자가 유도/강제하고자 하는 방향성 자체가 정치 문제를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32호 후속에서는 이어서, 세월호참사 416교과서 쟁점을 다룹니다. 조영선의 문제의식은 곧 국가가 이를 '금서'로 규정한 행위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행위임을 폭로하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장은주가 '메리토크라시'와 민주시민교육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한 이야기 역시 이와 같이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경쟁과 차별, 모욕, 능력주의 등으로 구성된 학교 교육 제도 자체가 시민들을 무력화시킨다는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중립성 문제를 논하면서 교육제도와 교육방식의 문제를 비켜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반면 밀루는 민주시민교육/정치교육을 하겠다고 나서는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민주주의를 가르쳐라?'나 조영선 등이 이야기한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논의하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어떤 정당을 지지/반대하는 이야기나 누구 대통령을 찬양하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정치적 문제들이 우리 일상 속에 교육 속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행평가 비율, 억압적 학교 규칙, 성교육 등 모든 문제들이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성을 강제하는 국가의 태도가 말도 안 되는 것임이 더욱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런 것들도 모두 정치적 문제가 되므로, 올바른 정치의식이나 민주시민의 자질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는 접근 방법 역시 동일한 한계를 지닐 것입니다. -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따로 읽고 함께 이야기하기'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6.06.15 21:24


엄기호 씨가 경향신문 칼럼 <사랑과 난입>을 두고 일어난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밝히며 경향 칼럼 지면에서 하차할 것을 밝혔다. 논란이 된 글들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비평해보고자 한다.




- 최근에 엄기호 씨의 경향신문 칼럼 글이 SNS에서 논란이 된 시발점은 <사랑과 난입>이 아니라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082054005&code=990100 였다. 그러니 이 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글 을 읽다보면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학생들의 대화에서 ‘에로스의 죽음’을 떠올릴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글의 방향이 바뀌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일단 그 바로 앞에서 거론된 사례들은, 사랑을 하지 않는 이유로 ▲ 소라넷이라는 범죄사이트, ▲ 남자들이 자기 애인(아마 여성이겠지?)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모습을 보고. ▲ 헤어질 때 '보복'이 두려워서 - 이 세 가지를 말한다.문맥상, 그리고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겪는 두려움이나 걱정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자연스레 우리 사회의 성폭력이나 성별 권력관계가 연애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원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엄기호 씨는 여기에서 독자의 이런 기대를 벗어난다. 그 자체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예상한 대로만 글이 전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문제는 그렇게 기대를 벗어난 글이 설득력이 있느냐다.


"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이 부분을 읽고, 공부를 안 한(롤랑바르트나 바디우나 한병철을 안 읽은) 나는 일단 당황했다. 그런 생각까지 든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공부하긴 했는데, 이야기하려는 게 그런 공부가 아닌가보지?" 페미니즘을 연상한 것은 앞부분 사례들이 여성들이 성차별-성폭력적 사회에서 겪는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 후반부의 논지는,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일단 문장 그대로 읽어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이 두려움은 '모르는 낯선 타자'여서가 아니라 '잘 아는데 믿을 수 없는 속이는 존재'여서 생기는 것이다. 그 결과는 사랑이 불가능한 것이요 피로이다.

마지막 문단이 좀 이상하다. 사랑이 도래해야 다시 '위험과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 된다고 하며, 에로스의 가능성을 발굴하는 것이 시대의 희망이라고 한다.

- 이 대목에서 나는 일단 '위험과 모험'에 "(바디우)"라는 괄호가 들어가 있기에, 음 뭐 나는 잘 모르는 바디우의 특수한 개념인가보군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에 불쾌해했다. '사랑이 없어서, 위험과 모험을 감행하지 않아서 문제란 말인가.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말하지 않으면서 위험과 모험을 감행하고 에로스의 가능성을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결론이란 말인가.'


글의 흐름상 기대했던 성별권력 등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되었다. 엄기호 씨를 신뢰하는 독자라면 엄기호 씨가 그런 문제점들을 이미 전제한 상태에서 생략했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이 그럴 법한 것은 아니다. 그럼 생략하고나서 한 이야기가 그 빈틈을 채울 만큼의 충실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엄기호 씨의 글은 롤랑바르트, 한병철, 알랭바디우를 거론한다. 그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주제의식 자체가 수수께끼로 남는다. 이 상황에서 비롯된 실망감은 필자가 사례들에서 뻔히 들여다보이는 젠더 문제를 외면하려고 한다는 해석까지 낳는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이 글이 매우 짧은 지면에 한정된 일간지 칼럼으로서 적절한 주제 선택이 아니었다 평가한다.





- <사랑과 난입>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292059005&code=990100 은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의 바로 다음 칼럼 연재 차례에 게재한 글이다. 따라서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가 비판받았던 점을 염두에 두면서 만회하기위해 썼을 것이라는 추정도 해볼 수 있다. 엄기호 씨가 SNS 상의 반응들을 얼마나 신경쓰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일단 이 글이 이전 글 결론부에서 이야기한 '에로스의 가능성 발굴'이라는 이야기에 이어지는 이야기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두 개의 글을 이어놓고 읽어야 비로소 엄기호의 이야기가 이해가 가는 면도 있다.


일단 <사랑과 난입>의 주제의식은 명료해 보인다. 글의 구조를 요약해보면 이렇다. ( ) 안은 나의 부연이다.


 1) 가부장적인 관계의 어느 부부(성화 부모님)가 있었다. 참고 살던 아내가 남편에게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난입'이다. 남편은 이 선언 앞에서 결단을 내리고, 치료를 받으며, 자신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현재 둘의 관계는 원만하다. '난입'을 통해 '사랑'이 가능해졌다.

 2) 어느 한쪽만 무대 위에 서있는 상황에서 사랑이 가능해지려면 다른 쪽이 '난입'해야 한다. 난입을 통해 비로소 둘이 설 수 있고 둘이 서야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

 3) 강남역 10번 출구도 (이와 같은) 난입의 장소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강남역 10번출구에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집회를 가지는 것을 '남성혐오'이니 '성별 대결 조장'이니, '폭력적'이니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반응이다.) 이러한 난입을 통해서 사랑이 가능해진다. 당신이 이 난입을 대하는 태도가 곧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는 마음일 것이며, 이렇게 난입한 목소리들을 끌어내린다면 사랑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엄기호 씨의 의도는 난입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페미디아의 비판 글 <여성들은 외로움보다 살해가 두렵다>(http://femidea.com/?p=706) 중 "갈등 상황들 위에서도 서로 대화하고 사랑을 통해 화합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겠지요."라는 부분은 오독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사랑으로 극복하자"라는 것도 아니다. 맞서 싸운 결과 사랑이 가능해진 것이다. + <여성들은 외로움보다 살해가 두렵다>에서 무대 자체가 기울어져 있다는 지적은 정당하긴 한데, 애초에 엄기호 씨도 무대에 양측이 모두 올라 있지 않고 일방적인 무대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엄기호 씨 글의 주제는 난입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그것이 에로스의 가능성을 재발굴하는 행동이라고 의미 부여하는 것이다. 이 글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독자들은 이런 주제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엄기호 씨의 글은 일각에서는 화해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읽히는가?

< 사랑과 난입>은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와는 또다른 의미에서 신문 칼럼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앞에서 한 가족 안에서의 사례를 설명하지만, 그 사례는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았고, 가령 '폭력'이라는 단어로 인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가정폭력을 연상시켰다. 또, 아내와 남편의 갈등과 난입과 변화의 과정은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고, 드라마틱할 정도로 단순화되어 있다.  "아내의 선언 -> 남편의 수용 -> 치료 -> (이혼하지 않고) 닭살 이모티콘을 나누며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됨" 이런 도식으로 읽히는 것이다. <여성들은 외로움보다 살해가 두렵다>가, "가정이 지켜진 것이 행복이라고 묘사하는 듯한" 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관점 문제도 있는데 이건 뒤에 이야기하겠다.)

이 러한 묘사 자체의 부족함에 더해서, 이 사례를 설명하느라 분량의 70%를 할애한 뒤에, 이 사례에 유비시킨 '강남역 10번 출구'에 대한 글은 더욱 설명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는 "섣부른 유비"로 읽힐 수 있다. 1:1 관계인 가족 안의 일을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사건으로 끌고 오려면 더 여러 가지 설명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많은 설명이 생략되고 말았다. 엄기호 씨가 정확히 어떤 유비를 하고 대응을 하려 한 것인지, 추측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게 너무 많다.


이런 한정된 지면의 칼럼으로서의 결점 이상으로, <사랑과 난입>은 근본적으로 관점의 문제를 안고 있다.

"성화 부모님" 사례를 보자. 사실 이 글은 공정하지 않다. 남편(성화 아버지)의 입장에서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고, 인정하게 된 것과, 구원받고 다시 태어난 것을 주로 말한다.

(예 를 들어, 아내의 난입의 결과 남편은 잘못을 인정했지만 결국 오래 몸에 밴 행동을 고치지는 못하고 이혼했다고 하더라도, 아내의 입장에서 이것이 꼭 좋지 않은 해결은 아닐 수도 있다. 애초에 무대 위에 서 있지 못했던 아내의 입장에서는 기울어진 무대를 파탄내는 것도 하나의 길일지도 모른다.)

글의 마무리는 이 글이 남성을 독자/주체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 강남역 10번 출구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가 곧 당신의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는 마음일 것이다. / 이제 비로소 터져 나오는 그 목소리를 끌어내리는 순간 당신은 이 무대를 독점할 수는 있을지언정 영원히 사랑을 모르는 자로 외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화 부모님 사례에 유비시킨다면, 여기에서 "당신"이 남성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남 성 필자가 남성 독자를 주로 상대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몇 가지 장치가 필요하다. 가령 자신이 염두에 둔 독자를 밝히고, '무대가 기울어져 있음'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사랑과 난입>은 그런 장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은 정작 난입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글임에도, 난입의 주체와 의미에는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그 난입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니 난입하는 주체들 입장에서는 글이 당혹스럽다. <여성들은 외로움보다 살해가 두렵다>가 이 글을 가리켜 "시혜적"이라고 비판하는 이유일 터이다.






- 끝으로, 나는 엄기호 씨가 신문 연재를 스스로 중단해야 할 만한 잘못을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기준에서는 아니지만, 거기에 보편적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나라면 A/S를 할 것이다.)

그러나 엄기호 씨가 두 편의 글을 짧게 한 편으로 말해야 하는 신문 칼럼의 성격에 맞지 않게 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일간지 칼럼 지면은 시의적인 문제를 다룰 때 좀 더 최근 논의되는 것들 속에 있는 글들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다른 논의들의 흐 속에서, 그 흐름을 거스르든 다른 길을 찾든 그대로 따라가며 힘을 보태든, 공론장 속의 하나로 말해야 한다. 시의성 있는 사건을 다루면서도 현재 공론장에서 일어나는 논의와는 맥락이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나는 이번 논란을 보면서, 엄기호 씨가 이번에 논의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공부나 사례 연구를 풀어내는 데 다소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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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16.02.18 02:29



  "그런 말은 아무 의미 없어. 쥐가 아무리 자신이 쥐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고양이에겐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야. 두 번째 요구 자체가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내포하고 있으니까. 아아, 왜 세 번째뿐만이 아니라 첫 번째도 내포하냐고? 하나밖에 없을 땐 처음이라고 하지 않아. 그냥 하나지. 심지어 하나라는 말조차 생략할 때가 많아. 베로시 토프탈이 하나라고 말할 필요는 없잖아. 두 번째가 있을 때만 첫 번째가 만들어지는 거야. 두 번째는 그렇게 위험한 거지.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넌 그걸 했어. 그러니 네 보증은 무의미해."


 (『피를 마시는 새 6』, 이영도, p.240.)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6.02.17 10:49




 "염병할 붓질은 한 번에 끝내야 한다. 일필휘지야, 갈로텍. 나는 괜찮은 삶을 살았다. 주퀘도 사르마크의 삶은 찬란했다. 그래. 나는 죽음의 거장이었다. 내 최고의 순간이 언제인지 아나? 그것은 내 존재의 모든 시간이었다. 나는 항상 최고였다. 내 마지막 실패는, 그것이 내 실패이기에 이미 소중한 것, 최고의 것이었다. 그것은 완전무결함에 난 흠집 같은 것이 아니었어. 그것까지도 포함해서 완전무결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소중한 실패를 망쳐버렸다. 스스로 구축한 작품을 망쳐버렸지."

 "주퀘도."

 "갈로텍, 갈로텍."

 주퀘도는 회한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갈로텍은 자신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동요했다.

 "고집이라면 너도 나만큼 부릴 줄 아는 녀석이지. 마음껏 고집을 부려라. 집념을 발휘해라. 도덕을 요구하는 나약한 것들의 천박한 투정 따위는 무시해. 그것들은 도구인 도덕을 삶의 목적으로 만들어버려. 그리고 목적인 삶을 도덕의 도구로 바꾸지. 그런 것들은 무시해. 생사를 무시하고 누이를 괴물로 만들었다고 힐난하는 것들은 아가리 닥치라고 말해 줘. 신을 감히 감금했다고 파랗게 질린 것들의 얼굴에 오줌을 갈겨줘. 죽음의 거장은 그런 너를 축복하겠다. 하지만 제발 죽을 때까지만 그렇게 해라."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 3』, p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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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온꿈2015.12.27 12:47



"인간이 인간을 거느리고 싶어하는 건,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걸 상대방도 이해해주길 바라서입니다. 말하는 걸 들어주길 원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란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명령이란 형태로 위에서 아래로 의지를 강요하는 거지요.

... 그런데 여기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본래 자신을 이해해주길 원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명령했는데, 정작 그 상대방은 자신에 대해 전혀 이해해주려 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권력의 기본 구조예요. 위에 누군가 있으면 그가 자신을 이해해주기 때문에 안심이다, 라고 사람들은 권력에 따르려 하지만, 권력자 본인을 이해하려는 백성 따윈 없으니까요. 단지 명령만 해주면 되고, 그 명령이 자신을 이해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길 바라죠. 만약 이해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반란이나 모반 같은 게 발생하는 겁니다. 정말 한심한 일이에요. 처음엔 단지 자신을 알아주길 원했을 뿐인데, 왜 그것이 이토록 복잡한 일이 되고 만 것인지,

전 인간이란 존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해적섬 사건』, 카도노 코우헤이, 문정훈 옮김, 학산)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5.07.30 02:22
대학거부 그 후대학거부 그 후 - 10점
한지혜 외 지음/교육공동체벗
『대학거부, 그 후』 : 행복하냐고 묻기 전에

나 역시 대학거부선언에 참여했던 대학거부자이다. "대학거부선언"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대학을 거부한 이유였고, 두 번째로 많이 들었던 질문은 부모/가족은 어떻게 반응했는지였으며, 세 번째로 많이 들었던 질문이 바로 이거였다.

"대학거부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 혹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으냐"

사람들은 사회에서 정해놓은, 주류의 길을 벗어나겠다고, 아니 단지 벗어나는 게 아니라 비판하고 거부하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에게 다들 묻는다. 당신들은 과연 그렇게 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냐고...

그 질문의 의도는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너네가 잘 살 수 있겠냐는 비웃음과 비아냥의 의미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정말 그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기대감을 갖고 묻는 것이리라. 하지만 어떤 의도이든 간에 번지수가 틀렸다. 대학거부선언은 "난 대학 졸업장 없이도 행복하게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라는 자신감의 표출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학력을, 출신 학교로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이 대학 입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잘못되었으며 우리가 거부하고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대학거부'를 외치는 일이다. 그러므로 대학거부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사회가 대학졸업장 없이는 차별을 받고, 불이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사회라는 것을 말이다.


대학거부자들에게 행복하냐고 묻는 것은 여전히 문제를 그들 개인의 몫으로만 돌릴 뿐이다. 그들에게 대학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라고 은연중에 요구하는 것이다. 대학거부선언이 담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잘라내는 태도이며, 거부선언을 한 입장에서는 벽 앞에 가로막히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대학거부선언은 '말걸기'다. 함께 바꾸자는.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느냐"는 질문은 그 말걸기에 대한 차가운 거절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포장도 낭만도 하나 없이

그들은 대학거부자들에게 행복하냐고 묻지 말라고 한다. 사실, 그럼 대학을 다니고 졸업하는 이들은 행복한지부터 물어야 공정할 것이다. 『대학거부, 그 후』는 대학거부 이후의 삶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한다. 거부자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또 겪어보니 그 이상으로 단단한 사회의 벽에 부딪히며 살아나간다. 고민은 더 많아지고 불안은 더 커진다.

많은 고졸 성공담이나 고졸 청년들의 씩씩한 삶을 주제로 한 책들은 대개 대학을 안 가도 잘 사는, 혹은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사회적 차별과 불안한 조건보다는, 그 속에서도 살아나가는 건강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사람들은 어쨌건 이겨내고 살아나갈 테니.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력, 학벌 차별 속에서, 대학 중심의 사회 속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한 기록과 고백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는, 예뻐 보이려는 포장이 없다. 차라리 '진솔해 보이려고 하는' 포장이 있을지언정 말이다. 대학거부에 대한 낭만적 태도도 없다. 읽다보면, 뭐랄까, '건조한 슬픔' 같은 게 느껴진다.


『대학거부, 그 후』를 읽고, '역시 대학거부를 하면 힘들게 사는구나' 하고 동정하는 것은 부적절한 반응일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더라도, 필자들이 대학거부자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함께하자고 제안하는 것 같다. 여럿이 함께할 때,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행복하냐고 묻기 전에, 행복해져 보라고 요구하기 전에, 당신은 대학거부선언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지부터 답해야 한다. 먼저 질문을 던진 쪽은, 자기 삶을 걸고 거부선언을 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http://gonghyun.tistory.com2015-07-29T17:22:240.31010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4.11.15 23:43
페미니스트라는 낙인페미니스트라는 낙인 - 10점
조주은 지음/민연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저는 이 책을 2007년에, 나온 직후에 집어들어서 읽게 됐었습니다. 그때도 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걸로 아는데... 제가 갖고 있는 페미니즘에 관련된 관점이나 센스는 이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받았더군요. ㅎㅎ;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관점도 가지게 됐지만, 이 책에서는 아동이나 청소년에 관련된 내용, 사회운동-노동운동 등에 관한 내용들도 많이 다루기 때문에 그런 것들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또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으로 가족 문제를 보고 교육 문제를 보고 청소년인권 문제를 유비추론해보자는 생각도 이 책 덕분에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조주은씨가 청소년운동이랑 굉장히 잘 맞을 거 같단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들은 자녀에게 버릇이라는 것을 가르칠 때가 있다. 아이가 말문이 트여 제법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할 무렵 부모들이 먼저 가르치는 것은 존댓말이다. ˝~하셨어요?˝라는 높임말부터 ˝어른이 무슨 말을 하면 `네`하고 잘 듣는 거야˝처럼 순종적인 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더군다나 한쪽은 반말을 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존댓말을 한다면, 그 관계는 권위로 움직이는 권력관계가 된다. … 우리가 흔히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예의 바른 어린이란 곧 어른들의 권위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아이를 의미한다. 가족은 연령에 의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은 아동, 청소년(녀)들은 가족 안에서 보호와 숨막히는 통제를 동시에 경험하기도 한다. 혹시 우리는 저항과 비판 속에서 건강하고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진다고 하면서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자기 아이를 어른 말 잘 듣는 아이로 키우려는 욕구는 없는가? 또는 말 잘 듣는 자녀이고자 하지는 않는가?˝(89~90쪽)

˝전시 현장에 있는 어린이는 전쟁 반대의 다양한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그 논리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착취를 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아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동기의 발명으로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분리되었지만, 아동이 어른의 세계에 통합된다면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지 않을까?˝(124쪽)

조주은씨는 아동기 문제를 모성착취, 모성신화와 연관지어서 많이 풀어냅니다. 그리고 가족에 관련해서는 `정상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또, 가족 안에서의 권위나 권력관계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죠. 경험이나 사례에 근거하면서도 이론적인 고민, 일반화된 관점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잘 와닿습니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에 대해서 어른-아동 문제도 이야기하지만, 역시 페미니즘이니까 남성-여성 문제도 많이 이야길 해요. `사랑`이라는 환상, 성폭력, 불평등한 가사노동이나 양육... 그리고 가족 안에서도 그렇게 폭력이 존재하고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생각을 보여주는데, 저도 그걸 보고 가족 안에서 자식과 부모 사이에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단 아이디어를 얻었던 거 같아요.

˝모순되게도, 단일한 계급이라고 치부되는 한 가족 안에서도 취향은 위계화되어 있다. 남성들이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동호회 활동 등을 통하여 우아하게 지속하는 반면, 여성들은 결혼 전에 알았던 음악이 마지막인 경우가 많다. … 계급분류적 문화 행위의 상징성이 궁극적으로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는 부르디외의 지적은 의미심장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계급이 어떻게 차별적으로 재생산되는지는 분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229쪽)


조주은씨 본인의 논문 주제가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 가정`에 관련된 거였는데, 그래서 그런가 조주은씨는 가족의 문제도 잘 분석해내지만, 노동운동 내부의 문제도 적절하게 지적을 하더라고요. 칼럼을 모은 것 같은 책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여러 이슈들과도 관련지어서 쓴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도 읽어볼 만합니다.


다른 활동가 분들이랑 꼭 같이 읽고 싶은 책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다뤄온 주제인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해서도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딱 펼쳐보니까 ˝프리섹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성 활동가들은 남성들에게 창녀로 이해되고 프리섹스주의자인 남성 활동가들은 섹스 파트너를 선택할 권리를 향유한다.˝(195쪽) 같은 통렬한 서술이 눈에 들어오네요.


다만 다양한 주제들을 간결하면서도 핵심적 문제를 짚으며 다루긴 하는데, 하나하나의 글들이 좀 짧은 편이라서 아쉽기도 합니다. 더 길게 이야기를 해보면 재밌겠다 싶은 게 몇 개 있었습니다.



아, 사소한 단점 하나. 책 편집상 쪽수 표기가 책의 제본 안쪽에 돼있는데요. 그거 때문에 쪽수 찾기가 힘드네요;;; 왜 이렇게 했지...

http://gonghyun.tistory.com2014-11-15T14:43:230.31010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4.11.11 05:22



원래 좀 다르게 편집해서 언론사에라도 기고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여유가 나지 않아서

그냥 초고 쓴 그대로 올린다.





이방인 - 2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새움





새움출판사 『이방인』 번역 사태 돌아보기



올해 봄, 반짝 주목을 받았다가 지금은 거의 잊힌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른바 『이방인』 번역 논쟁. 2014년 3월, 새움출판사에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새로 번역해서 내면서 지금까지의 『이방인』 번역이 ‘오역’이라고 대대적으로 마케팅을 한 것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까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책 띠지에 크게 써넣었고, 출판사는 “25년간 속아온 번역의 비밀”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소설 본문만큼의 분량을 들여 ‘역자노트’를 덧붙였는데, 이 ‘역자노트’란 김화영씨의 번역본을 자신의 번역과 비교하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새움출판사 번역본의 역자인 ‘이정서’씨는 이와 함께 몇 가지 주장을 내놓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살해동기는 ‘태양 때문’이 아니라 ‘정당방위’이며, 또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 남자는 레몽의 애인과 남매 관계인 것이 아니라 “기둥서방”(이정서의 표현이다.), 곧 비밀 애인 관계이고 레몽은 악한 사람이나 ‘양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정서씨는 이런 주장을 하면서 한국 사람들만 “김화영의 오역으로 인해 그렇듯 철저하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화영씨만이 아니라 다른 역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여러 차례 발언했다. 이정서씨가 무어라고 주장했는지, 이정서씨의 말 일부를 직접 인용하여 소개해보겠다.

“지금 뫼르소가 총을 쏜 가장 큰 이유는 '눈을 찌르는' 칼날 때문인 것이다. 그 번쩍이는 칼을 든 사람은 앞에서 친구(레몽)를 잔인하게 찔렀던 바로 그 위험한 사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 바로 정당방위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뫼르소가 아랍인을 왜 쏘았을까?'라는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다. 그러나 앞의 번역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건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25년 동안 우리는 저 엉터리 번역에 우리의 사고를 지배당해 온 것이다.”  (『이방인』, 이정서 역, 새움출판사. 4쇄. p.208.)


“특히 살인 동기가 태양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이방인>에 대한 모독과 다름없기 때문에 길게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김화영의 오역으로 인해(여기서의 오역은 총을 쏘는 장면이 아니라 뒤의 재판 과정중 뫼르소가 답하는 장면을 말한다) 현실 속의 ‘정당방위’라는 의미가 거세된 것이고, 프랑스인들은 그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움출판사 블로그에 게재된 「<이방인> 번역자 이정서 긴급 인터뷰 : 뫼르소의 살해 이유는 태양 때문이 아니었다.」)

“번역 오류 때문에 우리에겐 부조리 개념 자체가 황당하게 돼버렸다. 주인공이 왜 살인을 했는지 이유가 분명한데 태양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한다. 뫼르소가 죽인 아랍인 사내는 레몽을 농락한 여자(무어인)의 오빠가 아니라 기둥서방이었다.
까뮈는 무어인과 아랍인을 분명히 구분했고 실제로도 그렇다. 무어인은 스페인계 아랍인이다. 때문에 여자와 사내는 결코 남매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뫼르소의 살인에는 이래저래 정상참작의 여지가 많았는데도, 기존의 도덕과 종교, 법체계에 의해 그는 사형당하고 만다는 게 부조리의 실체다. 프랑스인들은 알았지만 우리는 몰랐다. 기존 역자가 쳐놓은 관념의 그물에 독자들은 무방비로 끌려갔던 것이다.” (김환기 기자, 오마이뉴스, 2014.04.07.,「카뮈의 <이방인>이 어려운 이유, 이것 때문이었다 - 새움출판사, 기존 번역 비판하며 출간... "그동안 '부조리' 잘못 이해해"」)




이러한 주장과 함께 출간된 새움출판사의 『이방인』. 그 출간 직후의 전개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아실 것 같다. 로쟈씨가 ‘sirènes’에 관련된 내용을 예로 들며 이정서씨의 주장을 비판했으며 “<이방인>의 역자 이정서는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라고 밝히면서 여러 언론들도 이를 보도했다. 그리고 이정서씨가 자신이 새움출판사의 이대식 대표가 맞다고 인정함에 따라, 언론들은 출판사 대표가 익명으로 자신의 출판사에서 번역서를 내면서 다른 번역자를 강력하게 공격한 사실을 놓고 ‘노이즈마케팅’, ‘도덕성 논란’ 등의 표현을 쓰며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잠시 뒤에 말하겠지만, 나는 이러한 규정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본다.)






● 프랑스에서 온 답변

그렇게 4월 이후로 언론의 관심은 시들해졌다. 하지만 그 이후, 언론에는 채 보도되지 못한 이야기가 또 있다. 새움출판사 블로그 댓글란에서는 그 뒤에도 이정서씨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었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들은 이정서씨가 제시한 세세한 오역 지적에 관련된 것에서부터, 카뮈의 철학을 포함한 『이방인』에 대한 이해, 그리고 특히 한국만 프랑스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검증까지 포함해서 이루어졌다. 이정서씨의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나 출처 등을 제시하며 논쟁을 벌인 것은 주로 ‘고마해라’, ‘indifference’, ‘한말씀’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각종 쟁점들이나 이정서씨가 ‘고마해라’씨를 지목해 이기언 교수라고 짐작한다고 한 것 등 기이한 언행이나 해프닝들은 다 소개하지는 않겠다.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논쟁이 격해지자 이정서씨가 자신의 『이방인』 해석을 제시하며 프랑스의 갈리마르 출판사(『이방인』을 출판한 프랑스의 유명한 출판사다.)에 전화해서 물어보라고 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정서씨는 그러면서 “제가 하는 말(혹은 번역)이 틀렸다면, 그 즉시 저는 제 책 전부를 수거해서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새움 출판사 대표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며 독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혹세무민'했다고 석고대죄할 것입니다. 물론 교수님들의 명예를 훼손한 데 따른 법적 책임도 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고마해라씨와 indifference씨가 정말로 프랑스에 문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고마해라씨와 indifference씨는 프랑스카뮈연구회(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에 이 사안에 대해 문의를 했고, 프랑스카뮈연구회 회장이자 카뮈 연구자인 스피켈(Agnès Spiquel)씨가 5월 중순에 답변을 했다. 스피켈씨는 “아랍인들 중 한 명이 레몽 옛 정부의 남자 형제”라고 답하여 이정서씨의 ‘기둥서방설’을 부정했고, 살인동기에 관련해서는 “만약 뫼르소 바깥에서 생각해본다면, 아랍인이 칼을 빼들었으므로 정당방위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을 볼 때, 카뮈는 우리가 뫼르소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길 바랐”다고 하며 그런 관점에서는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답변을 보내왔다. 참고로, 스피켈씨는 갈리마르 출판사가 펴낸 카뮈 플레이아드 전집 편집에도 참여한 경력이 있는 학자이다.


그러나 이정서씨는 자신의 공언을 지키지 않았다. 적어도 ‘기둥서방설’에 대해서는 틀린 것이 너무나 명백했는데도 말이다. 프랑스카뮈연구회를 가리켜 “듣도 보도 못한 단체의 명의를 끌어와 현지에 문의 메일을 보냈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다고 하고, ‘번역’이 아닌 ‘해석’의 문제를 묻는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반응했다. 바로 자신이 그 해석의 문제에 대해 프랑스에 물어보라고 먼저 이야기한 상황이었기에 놀라운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정서씨는 그 뒤로도 자신의 주장을 전혀 철회하지 않고, 이제는 ‘카뮈로부터 온 편지’라는 소설 형식으로 자기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이 소설은 그 분량의 대부분이 ‘역자노트’에 실린 내용이나 기존에 이정서씨가 해오던 주장들을 반복해서 싣는 데 쓰이고 있다. 요컨대 귀 막고 자기 말만 반복하기에 들어간 것이다. 그 이후에는 법적으로 정당방위가 성립할 수 없음을 검토한 미국 로스쿨 논문을 제시하자 ‘정당방위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걸 보니 정당방위로 이해하고 논의해왔다는 증거이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거나, 오역을 지적하자 “저는 불어전문가가 아닙니다.”, “제가 전문적으로 설명드릴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는 등, 더 이상 토론이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나는 지난 4월부터 이 논쟁에 관심을 가져왔고, 온라인에서 벌어진 주요한 논쟁들은 대부분 쫓아가며 읽어왔다. 누구는 내가 이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을 놓고 사적인 원한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사적인 원한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첫번째로는 내가 『이방인』을 좋아하는 독자이기 때문이었고, 두번째로는 이정서씨의 주장 방식이나 태도가 내 ‘버튼’을 눌리게 만드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역을 개선할 수 있다면 독자로서 환영한다는 우호적인 마음으로 이 논쟁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 가면 갈수록, 이정서씨의 주장은 동의할 수도 옹호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히 ‘권위에 도전하는 약자’ 위치에 자신을 놓으면서 정작 자신의 주장이 불성실하고 오류투성이인 것에다가 자신의 해석이 ‘정답’이라고 우기는 모습은, 나를 정말 화나게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새움출판사의 『이방인』 번역에 관한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정서씨의 『이방인』에 대한 주장이 어떤 오류들을 가지고 있는지 정리해둠으로써 그 해악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지금도 이정서씨의 『이방인』에 대한 주장이 원래 옳은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고, 그 분들에게 적어도 그 주장이 어떤 오류를 갖고 있는지 정도는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새움출판사 『이방인』 번역 사태가 토론의 자세로나 논리적으로나 너무 많은 문제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하나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함이다.




● 토론에서의 문제점 1) 논리적 불성실



이정서씨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한국에서는 『이방인』에 대해 A라고 이해한다.
(2) 프랑스에서는 『이방인』에 대해 B라고 이해한다.
(3) 한국과 프랑스의 이해가 다른 것은 한국어 번역 과정에서의 (김화영과 다른 역자들의) 오역 때문이다.

이는 소설에 대한 ‘해석’이나 번역의 차이가 아니다. 더 정확히는 해석의 차이가 오역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며, 각각의 사실들을 검증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만일 해석의 차이가 번역에 좌우된 것이었다면, 한국어 번역본으로만 『이방인』을 읽은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가 A라고 이해해야 하고, 프랑스 원어로 『이방인』을 읽은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가 B라고 이해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일단 (1)번은 자세하게 따지지는 않겠다. 이정서씨의 상당히 피상적인 주장(‘설명이 안 되는 부분을 부조리라고 포장해왔다’는 등)이나 줄거리 요약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한국의 『이방인』 이해에 관한 자료를 조사해보거나 카뮈 철학에 대한 연구 자료를 공들여 공부해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를 확실하게 알 방도는 없다. 더군다나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방인』에서 피살된 아랍인이 레몽의 옛 애인의 ‘기둥서방’이라는 식의 해석을 한 경우는 없는 듯하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본격적인 문제는 (2)부터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프랑스카뮈연구회로부터 온 답변이 이정서씨의 주장과 모순된다. 또한 논쟁 과정에서 한말씀씨가 프랑스 공영라디오 방송 France Culture의 <Le Gai Savoir> 2012년 10월 21일 방송을 인용하며 프랑스에서도 『이방인』의 줄거리에 대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해하고 있음을 제시했다. 반면 이정서씨는 프랑스에서 일반적으로 『이방인』이 자기가 주장한 대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전혀 제시한 바가 없다.


(2)가 증명되지 않은 시점에서 (3)을 증명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지도 않았고 그 반대의 증거만 있으니, ‘이해가 다른 이유’란 애초에 논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정서씨가 역자노트 등을 할애하며 가장 힘을 쓰고 있는 것이 남의 번역을 지적하는 일이므로 이정서씨의 카드는 (3)뿐인 셈인데, 이조차도 부실하다. 예컨대 이정서씨는 김화영씨나 다른 역자들이 ‘무어인’과 ‘아랍인’이 인종적으로 다른 것을 포착하지 못하고 오역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정서씨의 번역도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뒤에 적겠으나 이 둘은 인종적으로 다르지도 않다.) 그리고 다른 번역자의 것과 이정서씨의 번역을 비교해 봐도, 전자에서는 뫼르소의 발포동기가 ‘태양 때문’으로 읽히고 이정서씨의 것에서는 ‘정당방위’로 읽힐 만한 결정적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역자노트’ 등을 읽어봐도 뚜렷하게 어떤 문장이나 어떤 번역이 해석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인지는 상당히 불분명하다. 이정서씨는 이에 대해 ‘전반적인 장면’, ‘인물에 대한 오해’ 같은 말들을 하지만 정작 줄거리 이해에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디가 문제인지 잘 짚지 못하고 있다. 이는 번역이 매끄럽게 잘 되었는지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문장이 매끄럽게 옮겨지지 못했더라도 줄거리 이해에는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고, 문장을 잘 다듬어놨더라도 단어 하나를 정반대의 뜻으로 옮겨서 줄거리 이해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정서역에서도 역자의 해석에 맞춰서 오역을 한 경우 등이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렇더라도 큰 줄거리 이해에 별 문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이정서씨의 『이방인』 오역-해석에 관련된 주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가 빈약하거나, 없다시피 하다. 무엇보다 큰 불성실은 이정서씨가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응당 해야 했을 사전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구체적인 쟁점에서도 드러난다. 이정서씨는 레몽의 옛 정부는 무어인(Mauresque)이고 뫼르소에게 피살된 사람은 아랍인(Arabe)이므로 혈연관계일 수 없으므로 아랍인은 비밀애인, ‘기둥서방’이었다는 주장을 편다.(이른바 ‘기둥서방설’이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Arabe’와 ‘Mauresque’는 인종적으로 명백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정서씨에게 반박하면서 제시한 자료들로 밝혀진 것에 따르면 ‘Mauresque’는 무슬림 여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비유하자면, ‘조선인’과 ‘한국인’이라든지, ‘북방유목민족’과 ‘거란민족’ 또는 ‘양키’와 ‘미국인’이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여러 자료들로 프랑스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것이 ‘번역’에서 비롯된 해석의 차이가 아님은 한층 더 명백해졌다. 그러나 이정서씨는 이를 제대로 조사하거나 알아보지 않고 둘은 인종적으로 다르며 혈연관계일 수 없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이 주장을 고집하고 있다. 이정서씨는 자신의 생각이 사실과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밟지 않았으면서도 그것을 확신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주장들을 하면서 그가 내세우는 논거는 사실 단 하나다. 바로 자신의 『이방인』 해석이다. 자기가 읽어봤더니 이렇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원문을 보십시오.”라는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정서씨의 해석은 사실은 여러 부분들이 ‘원문’보다는 그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출간된 ‘역자노트’에도 포함되어 있는 ‘마리편지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정서씨는 “마리가 내게 편지를 보내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결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그 일들이 시작되었다. 어쨌든, 어떤 것도 과장해선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쉬운 일이었다.”(이 뒤에는 수감 생활 중 경험들이 나온다.)라는 문장을 들며 마리가 뫼르소에게 보낸 편지에 어떤 것도 과장해선 안 된다는 말을 쓴 것이라고 ‘추리’한다. 그러면서 마리는 예심을 맡았던 ‘차장검사’에게 속아 넘어가서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뫼르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라고 해설한다. 이정서씨는 새움출판사 블로그에서 이에 관해 뫼르소가 마리의 편지 때문에 법정에서 제대로 증언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추가로 밝혔다.(“만약 마리의 이런 편지가 없었다면 아마 뫼르소는 사건과 관계된 중요한 진술들(…)을 했을 게 분명합니다.” (새움출판사 블로그, 「카뮈<이방인> 레몽의 여자와 아랍인 사내의 관계는?」) 물론 “어떤 것도 과장해선 안 된다고 한다면”이란 구절을, 단지 뫼르소가 자기 경험을 서술하기 전에 덧붙이는 말이 아니라 마리의 편지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나, 이 때문에 마리와 뫼르소가 제대로 증언을 못했다는 주장에는, 이정서씨의 상상력 말고는 딱히 근거가 없다. 역자가 정답인 것처럼 제시하기에는 과도한 해석이다. 이정서씨는 이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갖추지는 않고, ‘소설이라면 이래야 한다’며 마치 자기와 동일하게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소설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인 양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정서씨 자신의 소설 해석을 근거로 한 ‘번역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와 한국의 이해가 오역 때문에 달라졌다는 것을 논증할 수가 없다. 오직 다른 사람들과 이정서씨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간혹 보면 이정서씨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논쟁에 나선 많은 사람들이 이정서씨에게 구체적으로 이러이러한 근거를 제시해달라고 수차례 주문을 했으나 무시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정서씨는 처음부터 자신이 근거를 대기 힘든, 너무 높은 허들을 넘어야 하는 주장을 내질렀다. 이처럼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을 하지 않고 이미 확인된 사실과 자료들을 인정하지 않는 그의 불성실함은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 토론에서의 문제점 2) 불명확

이정서씨는 논쟁 과정에서 타인의 논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논지를 정확히 말하지 않는 모습을 곧잘 보였다. 이는 정작 필요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거나 감정적인 표현만 반복하는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새움출판사-이정서씨는 상황을 정리하는 글을 올리며 로쟈씨가 “이정서의 번역을 구글번역기 수준이라고 비판”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로쟈씨가 쓴 문제의 글을 보자.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이렌 소리와 뱃고동 소리」, 로쟈의 저공비행 블로그, 2014.04.06.)

보다시피 로쟈씨가 ‘구글 번역’을 언급한 것은 이정서씨가 타인의 번역을 ‘탄핵’하며 단언한 논리를 비판하면서이다. 즉 이는 이정서씨의 번역관 또는 지나치게 단정적인 번역 비판에 대한 이야기이지, ‘이정서의 번역을 구글번역기 수준’이라고 한 게 아니다. 이런 오독은 여기저기서 반복된다. 예컨대 이정서씨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인데 자기 ‘번역’에는 문제가 없지 않냐고 한다. A 번역과 B 번역 둘 다 가능하다고 지적하자, B 번역이 틀렸고 A 번역이 맞다는 소리냐고 반문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명확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정서씨 자신의 주장도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정서씨의 ‘정당방위설’만 해도 그렇다. 이정서씨는 처음에는 뫼르소의 발포 동기가 정당방위이며 ‘태양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모독’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법정에서 정상참작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가, 또 피살당한 아랍인이 ‘기둥서방’이라는 해석과 정당방위 문제가 따로 떨어지지 않은 문제라는 주장도 했다. 이러한 불분명한 주장은, 뫼르소의 심리 상태를 논하는 것인지 법리적 문제를 논하는 것인지 아니면 뫼르소가 ‘악한을 처단’했다는 도덕적 정당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 확실히 알기가 어렵다.


처음부터 ‘번역’의 문제와 ‘해석’의 문제를 별다른 연결고리 없이 뒤섞은 것도 이정서씨였다. 또한, 사람들이 이정서씨의 오역-해석에 관한 주장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 이정서역 『이방인』이 읽기에 제일 낫다는 사람들의 평이 많다고 반박을 하거나 ‘그래서 김화영 게 오역이 아니란 말이냐’라고 반문하는 것도 그러한 행태의 하나이다.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정서씨 번역의 질이나 김화영씨 번역의 질이 아니라, 이정서씨의 ‘오역 비판’ 그리고 ‘오역 때문에 프랑스와 한국이 『이방인』을 다르게 이해해왔다’는 주장의 오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의 논지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자신의 논지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토론이 발전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대의 주장을 알아듣지 못할 뿐더러, 반박당한 본인의 주장에 대해서도 명확한 해명이나 철회 없이 입장이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쟁점인지 정리가 잘 안 된다는 점에서, 이는 논리적인 불성실만큼이나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 토론에서의 문제점 3) 권력 논리, 진영 논리

마지막으로 이정서씨는 자신의 이런 불명확하고 불성실한 주장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권력 논리’와 ‘진영 논리’를 들고 온다. 이정서씨의 오역-해석 주장을 반박하는 이들은 모두 “기존 번역을 지키려고 하는 수구세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김화영씨의 권위 때문에 사람들이 ‘속아왔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 번역에 갇혀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정서씨 자신은 불문학계의 권력에 도전했기 때문에 부당한 탄압과 비난을 받는 약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비밀을 들춰내고 진실을 밝히려고 분투하는 투사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정서씨가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을 때나 가능한 소리이다. 이정서씨의 주장 자체가 반박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부적절한 태도이다. 이정서씨의 태도는 때로는 음모론 신봉자의 태도와 닮아있는 듯 보인다. 이정서씨는 자신의 주장을 옹호할 때 곧잘 ‘원문을 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 정작 자신을 비판하는 의견을 대할 때는 그 의견 자체나 그 의견이 근거로 든 ‘원문’ 또는 자료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권력이나 진영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혹시 이정서씨가 같은 텍스트를 보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이정서씨와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세상살이의 지혜를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권력 논리’에 조금 더 살을 붙여서 ‘진영 논리’도 등장한다. 김화영 대 이정서라는 구도를 스스로 설정해놓고, 이정서씨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김화영씨를 옹호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진영 논리가 일단 깔려 있다. 그 위에, 출판사 간의 이해관계 문제가 더해진다. 이정서씨는 인터넷서점에 안 좋은 평이 남겨지거나, 새움출판사 블로그에서 이정서씨와 논쟁을 벌인 사람들을 보통 두 가지로 지칭한다. ‘불문학도’ 아니면 ‘알바’. 거대 출판사에서 돈을 주고 고용한 알바들이 조직적인 음해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다. 정작 이정서씨의 지인들이나 새움출판사 마케터 아이디 등으로 댓글을 달거나 서평을 쓰거나 별점을 준 경우들은 여럿 밝혀졌다는 것이 희극적이다.


그래, 어쩌면 출판사와 연관된 사람들이나 ‘알바’들이 무작정 별점을 깎거나 안 좋은 글을 쓴 경우도 있을 수 있을 터이다. 악플이나 인신공격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이 이정서씨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김화영씨의 번역에 오역이나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이 이정서씨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앞서 살펴봤듯이, ‘김화영씨 번역에 오역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정서씨의 주장은 옳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프랑스문학 전문가가 아니며 김화영씨라는 불문학계의 권위를 비판했다는 것이 곧 그의 주장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나를 특히 화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이정서씨의 이런 논리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권위에 비판하고 도전하는 것이 보장받아야 한다고 믿으며, 약자가 옳은 주장을 하는데도 부당하게 묵살당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런 정의 감각을 이용해서, 옳지 않은 주장을 옳은 주장으로 둔갑시키고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더욱 잘못이다. 결국 그런 행동은 사람들에게 냉소적 태도를 가지게 함으로써 역으로 옳은 주장을 하고 의미 있는 비판을 제기하는 약자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정서씨는 주장에 대한 비판과 반박 외에 특별히 부당한 압박을 받거나 구체적인 불이익을 입은 것이 없다. 이정서씨 자신이 인신공격성 표현들을 먼저 쏟아내며 허술하면서도 무리한 주장을 했으니, 그에 대해 다소 격한 반박이 제기되는 것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정서씨가 부디 권력 논리나 진영 논리 뒤에 숨지 말고, 자기 주장을 반성적으로 검토해보기를 바란다.



● 이정서씨가 잘못한 것

나는 프랑스어라고는 ‘봉쥬르’와 ‘쁘띠’와 ‘꼼시꼼사’밖에 모른다.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정서씨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프랑스어나 프랑스문학에 문외한이다. 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의 수준에서 논리에 대해 알고 있으며,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뭔지 조금은 알고 있다. 그리고 외국어능력 이전에 그런 부분에서 이정서씨의 주장이 불충분하거나 부적절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더 널리 알기를 바란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프랑스어를 모르고 프랑스어 원문 『이방인』을 읽어본 것도 아니기에 이 논쟁을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프랑스어를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그동안 프랑스어를 알고 많은 자료를 제공해준 (이정서씨를 포함한) 많은 분들 덕분에, 이제 누구나 관심이 있다면 이 논의를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 됐다. 그러니 이 글이나 다른 텍스트들을 통해 한번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다른 사람의 주장의 논지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정서씨의 전적을 볼 때 십중팔구 이 글도 오해를 받을 것 같다. 그러니 분명하게 해두자면, 나는 이정서씨의 『이방인』 번역이 잘 되었는지 잘 못 되었는지 관심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정서역 『이방인』을 사서 다시 읽어봤을 때도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새로운 번역 때문이 아니라, 과거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매력과 울림을 다시 한 번 느꼈던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는 김화영씨나 다른 역자들의 번역이 잘 되었는지 잘 못 되었는지도 관심이 없다. 그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 내가 처음 읽었던 『이방인』을 번역해준 역자 분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더 나은 번역을 찾기 위해 프랑스어나 카뮈에 대해 잘 아는 분들이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번역을 해준다면 일개 독자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정서씨는 ‘오역 때문에 한국에서만 프랑스와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는 주장을 했고, 이 주장은 그 근거가 빈약하고 이미 틀린 것으로 밝혀진 부분도 많다. 이정서씨가 자기 생각에 더 나은 번역을 선보이고 자기 나름의 상상을 가미한 해석을 하는 건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런 해석을 글로 써서 발표한다면 폭넓은 공감과 동의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별 해악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고 근거도 빈약한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것은 잘못이고 해악이 된다. 더군다나 그런 내용을 내세워서 광고를 함으로써 책을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것은 더더욱 큰 잘못이다.(이정서역 『이방인』은 내가 샀을 때 벌써 4쇄가 팔리고 있었는데, 이는 출판계의 불황이라는 조건이나 『이방인』은 이미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고 그 중에서도 새움출판사의 것은 가격이 매우 비싸다는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적게 팔린 것이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책임을 지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방인』 논쟁 초기에 언론사들이 이정서씨가 새움출판사 대표임이 밝혀지자 도덕성 논란이 일고 있다고 보도한 것은 핀트가 어긋났다. 출판사 대표가 자기 출판사에서 자기 책을 내는 것은 물론 일종의 전문가 윤리에는 어긋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 저자, 편집자, 출판사의 전문가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검증을 하는 시스템을 교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규칙/방법론’을 훼손한 것이지, 도덕적인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도덕성 문제는 이정서씨의 주장 그 자체에 있었다. 사실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필요한 검증도 없이 하면서 다른 역자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정서씨가 새움출판사 대표였든, 대표가 아니었든, 변함없이 잘못된 일일 것이다.


나는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씨가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새움출판사의 이정서역 『이방인』은 소설 원문에 맞먹는 분량이 ‘역자노트’에 할애되고 있다. 그 덕분에 다른 『이방인』 단행본들이 모두 1만원 미만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데 비해, 분량이 2배인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13,800원이라는 높은 가격이 매겨져 있다. 나도 그 책을 산 한 명의 독자로서 말하는 건데, 가격 절감 차원에서라도 최소한 ‘역자노트’를 떼어내거나 억지스러운 주장들을 대폭 삭제하는 것이 어떤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중심 홍보 문구는 당연히 빼야 하고 말이다.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씨가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나는 이정서씨가 먼저 스스로 말한 대로 책을 전량 수거하고 폐기 처분하고 석고대죄하는 것까지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최근에는 그가 계속 아집을 부리는 것을 보니 그렇게라도 하라고 요구해야 하나 싶을 지경이지만….





토론에 필요한 일정한 태도나 룰이 지켜지지 않으면,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대화가 반복된다. 서로 그냥 자기 할 말만 하는 인터넷에서의 흔한 ‘키보드배틀’이나 댓글 달기와는 달리, 분명 말을 주고받고 있기는 한데, 전혀 진척이 없는 답답한 상태. 새움출판사 블로그를 비롯한 여러 장소들에서 그런 걸 너무 많이 보다보니 참 가슴이 갑갑했다. 우리가 모두 프랑스어를 알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모두 이런 토론의 조건과 자세에 대해 알 필요는 있지 않을까? 이정서씨부터 좀 이런 것에 대해 알아보시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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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글이 있는 곳

'모레스크' '아랍' 논쟁에 관한 글  http://joube.egloos.com/9181800

이방인 번역 논쟁 관련한 indiffrence님 블로그  http://indindi.egloos.com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4.09.25 00:57

"저기, 잇군. 자신이 인간으로서 결함품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 없어? 나는 있어."



"말하자면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거랄까. 그러니까 동정할 수 있고 연민을 느끼고, 그리고 동조할 수 있어. … 중요한 건 나에게 그 브레이크가 없다는 사실이야. 타인의 마음이 티끌만큼도 이해되지 않아. … 말하는 김에 나에 대해서도 알아 줬으면 싶었어. 내가 어느 정도로 망가진 결함제품인지를. … 결함제품이 아니라면 인간실격이고."


(『목조르는 로맨티스트』, 니시오 이신.)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4.09.01 16:01


"소년 문제를 운위하는 이에게 우리는 지금 민족으로 정치적 해방을 부르짖고 인간적으로 계급적 해방을 부르짖는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되 우리가 먼저 우리의 발밑에 있는 남녀 어린이를 해방치 아니하면 기타의 모든 해방운동을 사실로써 철저하지 못하리라 한다. (......) 해방의 도는 그 끝에 어린이를 해방함에서 지어지리라고 한다. 혹 소년 문제를 말하는 사람 중에 해방 문제를 뒤에 두고 금일 이 현상 그대로의 위에서 소년 보호 문제를 말하고 소년 수양 문제를 말할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틀린 생각이다. 가령 여기에 어떤 반석 밑에 눌린 풀싹이 있다하면 그 반을 그대로 두고 그 풀을 구한다는 말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말이다. 오늘 조선의 소년은 과연 눌린 풀이다. 누르는 그것을 제거치 아니하고 다른 문제를 운위한다 하면 그것은 모두 일시 일시의 고식책이 아니면 눌리어 있는 그 현상을 교묘하게 옹호하고자 하는 술책에 지나지 아니할 바이다."


(김기전, 「개벽운동과 합치되는 조선의 소년운동」. 1923.05.)

최명표 『한국근대소년운동사』 p.42에서 재인용.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4.08.28 21:28

비블리아고서당사건수첩 5권 프롤로그 의문


비블리아고서당사건수첩 5권에서는 다이스케와 시오리코가 드디어 사귀게 되는데...


그런데 5권에는 다이스케의 고백에 대해 시오리코(또는 시오리코로 추정되는 사람)가 대답하는 장면이 2개가 있다.


하나는 프롤로그이고 5월 31일 날짜로 되어 있으며 다이스케가 먼저 대답을 들려달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에필로그에 나오고 5월 26일이 날짜이며("5월이 끝나려면 앞으로 5일이나 남았다.) 시오리코가 먼저 말을 꺼낸다.


이 두 장면은 분명히 다르고-


그러므로 프롤로그 장면은 독자에게 처음에는 착각을 유도하고 있지만, 현재의 시오리코와 다이스케가 아니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사실 살펴보면 프롤로그에는 시오리코란 이름이 안 나오는 것이다...


292쪽을 보면 지에코가 시오리코의 아버지가 자기에게 고백했고 자기가 거기에 답을 한 과정을 설명하는데, 거기에서
묘사한 정황이 프롤로그와 일치하는 걸로 봐서 프롤로그 상황은 20~30년 전 지에코가 주인공인 것 같다.



여기서 문제는 프롤로그를 보면 남자 이름이 '다이스케'라고 나온다는 거...


다이스케가 흔한 이름이기는 하나, 그러면 시오리코의 아버지 이름도 시노카와 다이스케인 건가?


아버지랑 애인이 이름이 같은 설정은 좀 작위적인데-


뭐, 안 될 건 없다지만...







추신 :

일본어 원버젼에서는  프롤로그 부분에서 "다이스케"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말한다는 정보가 있다. 즉 오역 문제인 셈.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4.05.21 02:45





일전에 새움출판사의 『이방인』 이정서역본의 논란에 대해서

http://gonghyun.tistory.com/1057 이런 관전평을 남겼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 더 진척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종합해서 역시 한 독자로 의견을 적고자 합니다.






이정서씨의 『이방인』 번역(또는 해석)에 관한 주장은 몇 단계, 몇 갈래로 나눠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크게 논쟁이 되었던 것 중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① 『이방인』에서 레몽의 애인은 무어인("Mauresque")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아랍인과는 인종적으로 다른 것이며 따라서 둘은 혈연관계의 남매일 수 없다. 둘은 실은 비밀 애인 관계인 것이다. (이른바 '기둥서방'설)

   ② 왜 다들 ①과 같은 해석을 도출하지 못했냐 하면, 그것은 김화영씨 등의 "오역" 때문이다. 오역 때문에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이런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이방인』을 잘못 이해해왔던 것이다.


(예컨대 이런 글에서 이정서씨는 반복해서 이를 "김화영의 오역으로 인해" "김화영 번역의 이미지" 등의 표현을 쓰고 있다.http://saeumbook.tistory.com/424 )


(새움 출판사 측이 종종 글을 수정하거나 지우곤 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캡쳐를 첨부해둡니다.)



이 둘은 상당히 다른 층위입니다. 이정서씨든 어느 누구든, ①이라고 『이방인』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야 있습니다. 그런 주장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 해석이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국인 독자들이 ①을 눈치채지 못하고 '오해'해온 것이 '번역'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며, 또 이는 다른 언어권 또는 프랑스어를 쓰는 독자가 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교차 검증해볼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 프랑스인들, 심지어 카뮈를 연구하는 프랑스인들마저도 ①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indifference님과 고마해라님 등이 프랑스의 카뮈연구회에 문의하여 답변을 받아냈고, 여기에서 카뮈연구회 측 역시 『이방인』에 등장하는 '아랍인'이 레몽 전 애인과 혈연관계인 남매라는 의견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쟁점은 명백하다고 봅니다. 아랍인들 중 한 명이 레몽 옛 정부의 남자 형제입니다. 텍스트 어디에도 그 "무어 여성" 외에 다른 무어인이 특정되어 등장하지 않습니다. 카뮈는 그 아랍인에게 "정부"나 "연인"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아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 자세한 과정은 여기서 보시기 바랍니다. http://indindi.egloos.com/7134167   http://indindi.egloos.com/9001556


저는 굳이 카뮈연구회의 '권위'에 기대어 이정서씨의 '해석'이 틀렸음을 인정하라고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카뮈의 이방인을 꼼꼼하게 읽은 프랑스인들 역시 '기둥서방'설을 부인한다는 것은, 이정서씨의 ②번 주장이 틀렸다는 것만은 아주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확실하게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해석의 차이는 번역/오역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정당방위'설에 대한 논란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입니다.






사실 이정서씨와 새움출판사측은 이미 이런 문제들이 '번역의 문제가 아닌 해석의 문제'임을 인정한 적이 있습니다.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난 해석자가 아니고 번역자이므로"

"그런 것들은 해석의 문제이지 번역의 문제는 아니라고도 하십니다."



( http://saeumbook.tistory.com/424 에서)


(http://saeumbook.tistory.com/440 의 댓글에서)


물론 번역과 해석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역자가 그 상황, 그 장면, 그 메시지를 어떻게 머릿속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번역에 영향을 미치고, 번역 능력과 방향에 따라 해석도 차이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별개의 면이 있지요.

하지만 이정서씨는 이것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이것이 오역으로 인해 비롯된 오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창 레몽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던 중, 해석의 문제를 좀 더 제대로 다투지 않고 엉뚱하게 김화영씨의 번역을 비판하는 연재를 개시한 것에서도 엿보이는 태도입니다.






이정서씨 번역본의 여러 가지 오역들, 그리고 역자노트에서 '오역'이라며 지적한 것들의 오류나 과잉에 대해서 지적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알라딘서재에서는 jaibal 님이 조목조목 지적을 하고 있으시고, (http://blog.aladin.co.kr/717050193) indifference님이나 고마해라님 등도 댓글과 블로그 등에서 몇 가지 지적을 하셨습니다. (http://indindi.egloos.com/9008511)


이는 대체로 이정서씨 번역에 오역이 존재한다는 지적과, 이정서씨가 김화영 등의 오역이라고 지적한 역자노트 내용이 오류이거나 과잉이라는 지적으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후자의 지적이 압도적으로 많아 보입니다.






저는 새움출판사의 태도에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씨 측은 이 논쟁에서 합리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이미 설득력 있게 검증된 문제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수용하지 않고 있고, 명백하게 자신들의 오류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지고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법적인 조치' 등의 언급을 하며 논의를 위축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정서씨 개인 블로그에서 행해지길 바랐다고 하지만, 그 뒤에도 정작 이정서씨 개인 블로그에 올라오던 글들을 출판사 공식 블로그로 그대로 복사해오던 것은 새움출판사 측입니다... -_-)



새움출판사와 이정서씨가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앞서 언급한 ②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해석의 차이가 과거 역자들의 번역-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은 거짓임이 이미 거의 확실하게 검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 자신과 다른 독자들의 작품 해석 차이가 과거 다른 역자들의 오역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공격대상이 되었던 역자들 등에게 사과해야죠.

그리고 적어도 이런 인식("해석의 차이는 오역 때문이었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것으로 보이는,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었다"라는 홍보 문구나 역자 인터뷰의 내용, 역자노트의 일부 내용 등을 수정하고 이미 이를 구매한 독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작품해석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자신과 다른 사람 간의 작품해석의 차이가 생긴 것이 오역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또한 새움출판사 『이방인』의 역자노트가 많은 오류와 과잉, 인격적 모욕 등이 있다는 설득력 있는 지적이 많습니다. (뱃고동 논란, 몽삐스 논란, 기타 등등)

그러므로 이후의 판에서는 최소한 이 '역자노트'를 빼거나, 아니면 이정서씨가 번역과정에서 찾은 유의미하고 오류가 아닌 내용 일부만 역자의 말 형태로 남기는 것이 온당한 처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출판사로서도 이렇게 하고 책 값을 내리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잘못된 지적 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당연하구요.

이정서씨가 애써 번역한 책 자체를 전량회수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이 말도 이정서씨가 먼저 꺼냈지만) 그러나, 본인이 애써 번역했다고 하는 소설 본문에 들어간 노고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역자노트' 부분은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으며 이를 이정서씨 등이 고집할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본인이 자신의 번역이 더 낫다고 자신하신다면 그냥 그렇게 본문만 내면 될 문제입니다.

다만 이는 제가 프랑스어 등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상세하게 이야기할 것은 아닌 듯하고 프랑스어나 프랑스어-한국어 번역을 잘 아는 분들이 더 잘 말씀해주시리라 기대합니다.






새움출판사는 이미 자극적인 홍보로 많은 수익을 올렸을 것이며, 이 중 상당수는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평가해야 옳습니다.


이제 와서 팔려나간 책들을 회수하거나 환불시키기도 어렵다면, 적어도 새움출판사측이 이 사건으로 인해 어느 정도 사회적 평판이 떨어지거나, 공개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정도의 대가는 치러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이 새움출판사나 이정서씨의 잘못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정서씨나 새움출판사가 번역자이자 출판사로서 책임감과 윤리적 관념이 있다면, 제발 부디 언행과 태도를 바꾸고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독자 분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이해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10대 때 카뮈의 『이방인』과 사르트르의 『구토』 등을 인상깊게 읽었고 좋아했던 독자로서 한달 정도 이 논쟁을 쫓아다니며 보았습니다. 며칠 정도 일이 바빠서 제대로 못 보고 있었는데 많은 일이 일어났더군요. 더 많은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적절한 목소리를 내주길 기대해봅니다.




첨언하여, 아동에 대한 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 등 가정폭력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해온 사람으로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이정서씨의 레몽에 관련된 여러 발언들은 아주 불쾌하고 또 번역/해석 논쟁과 별개로 이야기해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공현
흘러들어온꿈2014.04.04 13:52

오늘의교육 19호에 쓴 겨울왕국 리뷰


http://combut.maru.net/xe/journal_list/2168





실수할 기회가 필요한 이유

(또는 '나이를 먹으면 자동으로 성숙해진다는 신화에 대한 반박')

- 『겨울왕국』(크리스 벅/제니퍼 리, 108분, 3D 애니메이션)

 


 


1000만 관객이 극장에서 본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원제 Frozen).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느낀 것은 일단 순수한 감탄이었다. 3D 애니메이션 기술이 이정도로 발전했다니! 머리카락 한 올, 눈송이 하나하나를 보다보면, 『겨울왕국』의 캐릭터들과 장면들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진이 얼마나 많은 그래픽적인 노고를 들였을지 상상도 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캐릭터들의 표정은 풍부하고 눈짓 하나 미묘한 입가의 움직임으로 감정이 전달된다. 디즈니는 컴퓨터그래픽의 발전이 웅장함이나 화려한 특수효과가 아니라 섬세하고 꼼꼼한 표현으로도 하나의 경지를 이룩했음을 입증했다. 사람들이 『겨울왕국』 캐릭터들에 마치 실제의 존재처럼 몰입하고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으리라. 물론 『겨울왕국』의 음악들도 빼놓을 수 없다. 「Let it go」,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등 많은 노래들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후에도 사람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시청각적인 쾌감을 흘려보내고 그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겨울왕국』이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 텍스트임을 느끼게 된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텍스트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잘 완성된 이야기와 같은 뜻은 아니다. 『겨울왕국』의 이야기는 잘 되짚어보면 구멍이 많고, 전개에서 황당한 면도 있으며, 특히 마지막 부분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겨울왕국』은 그런 이야기의 구멍을 캐릭터의 매력으로 커버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에 대해 아주 간명하게 정리했던 바 있다.

 “여기서 스토리의 유려함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거의 조각이불과도 같은 상태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게 큰 문제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렇게 분절된 덩어리들이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해석을 통해 추가적인 의미를 부여 받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커지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한 것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아주 교묘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dcdc님 말마따나 다들 '덕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인 거죠.” (www.djuna.kr 2014년 1월 30일)


 
설득력과 짜임새가 아주 좋다고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겨울왕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이 애니메이션을 누구는 성장담으로, 누구는 자매애로, 누구는 익살극으로 받아들였다. 『겨울왕국』이 『라푼젤』에 이어 전통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여성상을 정면으로 깨고 있다는 점과 성소수자에 대한 은유로 읽히는 부분 등은 이미 많은 화제가 되었다. 『겨울왕국』의 엘사를 박근혜 대통령과 비교한 채널A의 무리수 같은 것은 소소하면서도 씁쓸한 우스갯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활동가인 나는 『겨울왕국』에서 청소년보호주의의 문제를 읽었던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고 숨기며 살아온 엘사

『겨울왕국』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엘사는 '아렌델' 왕국의 공주다. 엘사는 얼음과 눈에 대한 마법의 힘을 타고났다. 그런데 엘사가 어릴 적 동생인 안나를 실수로 다치게 한 사건 이후, '아렌델'의 왕과 왕비인 엘사의 부모는 엘사가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마법의 힘을 비밀로 숨기도록 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측이 된다. 하나는 엘사가 마법의 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엘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마녀라고 박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다가 부모는 그만 바다에서 사고로 죽고 만다. 엘사는 부모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고, 계속 자기 방 안에만 있으며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지낸다. 그리고 몇 년 후, 엘사는 21살에 여왕으로 즉위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엘사가 갑자기 마법의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엘사는 그날 처음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며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한 안나와 다투다가 무심코 마법의 힘이 튀어나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마법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들키고 만다. 사람들은 엘사의 힘에 놀라 엘사를 “마녀”, “괴물”이라고 비난하고, 엘사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서 튀어나오는 마법 때문에 사람들을 다치게 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패닉 상태에 빠진다. 엘사는 그대로 성 밖으로 도망친다. 호수를 얼려서 만든 얼음의 길을 따라, 북쪽 산으로. 그 뒤로 아렌델에는 폭주하는 엘사의 힘 때문에 여름인데도 눈이 내리고 추위가 찾아오게 된다.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렌델에 찾아온 추위를 해결하고 엘사와 화해하기 위해서 엘사를 찾아가는 안나의 모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엘사가 자신의 마법의 힘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엘사의 마법의 힘이 엘사의 정신 상태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엘사의 부모가 엘사의 마법을 억제시키고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오히려 엘사가 자신의 힘을 컨트롤하는 데 서툴러지게 만들었다. 안나의 사고 이후에 엘사가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고 감추려 할수록 엘사는 더욱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점점 마법의 힘은 커져가지만 그것을 대하는 엘사의 정신은 더 불안정해지기만 했던 것이다. 실제로 엘사가 절망감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낄수록, 또 자기 감정을 억누르고 힘을 억누르려고 할수록, 엘사의 마법의 힘은 더 심하게 폭주하고 눈보라도 점점 더 심해진다. 마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더 큰 해악을 낳는다고 이야기하듯이.

사실 자신을 숨기는 것은 엘사 본인에게도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성을 뛰쳐나와 산 위에서 「Let it go」를 부르면서 엘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자기 힘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차라리 세상으로부터 떨어져서 혼자 살더라도 자유롭게 자신의 힘을 쓰면서 살겠다고 외친다. “And the fears that once controlled me can't get to me at all. It's time to see what I can do. To test the limits and break through. No right, no wrong, no rules for me. I'm free! (날 구속했던 두려움도 이제 날 전혀 잡을 수 없어. 이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아볼 때야. 한계를 시험해보고 돌파하기 위해.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고 규칙도 없어. 난 자유야!)”

찾아와서 같이 돌아가자고 하는 안나에게, 엘사는 자신은 산 위에서 혼자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 때문에 아렌델에 추위와 눈보라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엘사가 자신을 억눌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자, 그때까지는 그래도 다소 진정되어 있던 날씨도 다시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엘사가 완전히 자신의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안나의 사랑이라는, 또 다른 계기가 필요했다.

 

나이를 먹으면 성숙해진다는 신화에 대한 반박


『겨울왕국』 속 엘사의 모습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겨울왕국』의 텍스트 속에는 청소년보호주의에 대해 굉장히 유효적절한 비판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자. ‘너희를 위해서’라며 학교 안에서 오로지 공부만 하며 지내다가 ‘대학 가고나서’, ‘어른이 되고나서’ 뭔가를 하라고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청소년들은 아직 미성숙하므로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하고, 집과 학교에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하며, 나이를 먹어서 성숙해진 뒤에야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너희는 아직 미성숙하니 정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더니 스무살이 넘으면 정치에 관심도 가지고 투표도 열심히 하라고 하는 식이다. 술담배를 금지하다가 스무살을 넘으면 짠 하고 술도 담배도 스스로 알아서 잘 적당히 하기를 기대하는 식이다. 공부만 하면서 지내라고 하더니 나이를 먹고 나서는 ‘나이값’을 하라면서 자기 삶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의식, 참여의식 등을 요구하는 식이다. 그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자동으로 성숙해진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반면 청소년들이 어떤 권리나 참여의 기회를 요구하면, 과연 니네가 잘 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마치 완벽하지 못하면 어떤 권리도 기회도 가져선 안 된다는 듯이.

그러나 엘사가 나이를 먹고 21살이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힘을 자동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엘사가 자신의 힘을 숨기며 보낸 시간은 엘사의 상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엘사를 숨기며 길렀던 엘사 부모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안나가 크게 다치는 것을 본 뒤에 엘사의 부모가 엘사의 힘을 감추고 컨트롤 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고 한 것은 자연러운 반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겁을 먹은 엘사 부모의 양육은, 결과적으로 온 나라가 얼어붙는 더 큰 사고를 초래했다. 엘사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엘사 때문에 성 안에서 몇 년을 갇혀 지냈던 안나 역시 그렇다. 만일 안나가 미리부터 다양한 연애경험을 해봤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애정에 굶주려서 연애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품고서는 그날 처음 만난 남자와 몇 시간만에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나가 썸도 좀 타보고 밀당도 해보고 짝사랑도 해보고 실연도 당해보고 그랬다면, 좀 더 신중하고도 능숙하게 연애 관계를 꾸려갈 수 있지 않았을까? 청소년의 연애를 금지하고, 청소년들을 공주처럼 키우려고 하는 어른들이여, 기억할지어다. 그러다가 나중에 첫 눈에 반했다며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선언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이를 먹는다고 자동으로 사람이 능력을 가지게 되고 ‘성숙’해지지는 않는다. 엘사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기 방에 숨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자기 자신을 두려움 없이 알아갈 기회였다. 그리고 동생인 안나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의 이해와 도움이었다.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 역시 ‘보호’를 핑계로 한 금지와 통제가 아니다. 나이를 먹기를 기다린다고 해서 청소년들이 자동으로 성숙해지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지는 않는다. 청소년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것을 경험하고 자신을 알아가며, 때로는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와 권리가 필요하다. 실수하더라도 그것을 함께 감당해주는 안전망과 지원이 필요하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뭐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이다. 청소년들은 설령 실수를 한다고 해서 엘사처럼 온 나라를 얼려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Posted by 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