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해당되는 글 65건

  1. 2014.10.12 [논평] 무엇을 위한 기숙사인가,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라!
  2. 2014.03.21 (아수나로) 청소년신문 〔요즘것들〕 창간준비호
  3. 2014.03.19 ‘학생은 학생답게’ 캠페인 - 학생답게 학생인권을 잘 보장받읍시다
  4. 2013.11.19 따끈할 권리! 청소년 겉옷 규제 폐지하라!
  5. 2013.10.15 [성명] 모든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나? - 체벌에 희생된, 희생되고 있는 청소년들을 애도하며
  6. 2012.03.16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 - 학생인권이 교육에 묻다』가 출간되었습니다. (3)
  7. 2012.01.30 왜 "학생인권조례"인가 (3)
  8. 2012.01.21 [인권오름] 서울 학생인권조례의 의미, 꼼꼼히 들여다보기
  9. 2012.01.18 미조직된 시민들의 호응으로 만들어진 서울학생인권조례 (1)
  10. 2012.01.09 [성명] 법적 요건조차 갖추지 않은 서울학생인권조례 재의 요구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 부정!
  11. 2012.01.06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에서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 환영 서한을~
  12. 2012.01.06 치안, 정치, 청소년인권운동, 학생간폭력
  13. 2011.12.01 [나의 대학거부] 못 가는 건지 안 가는 건지 묻지 마라 (1)
  14. 2011.11.17 [논평] 청소년단체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의 활동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의 입장에 대해
  15. 2011.11.16 [나의 대학거부] 내가 배우고 느끼고 싶은 것
  16. 2011.11.16 [나의 대학거부] 대학은 大學(대학)이 아니었기에
  17. 2011.11.14 대학입시거부선언문 (2011/11/10)
  18. 2011.11.10 2011/11/10 대학입시거부선언 (1)
  19. 2011.11.10 [나의 대학거부] 내가 배우고 느끼고 싶은 것
  20. 2011.11.10 [나의 대학거부] 대학은 大學(대학)이 아니었기에
걸어가는꿈2014.10.12 01:04

[논평] 무엇을 위한 기숙사인가,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라!

 

 

과도한 학습시간으로 휴식시간이 부족한 기숙사 학생들

 

휴식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당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한국의 학생들은 과도한 학습시간으로 제대로 된 휴식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PISA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청소년의 일주일 학습시간은 OECD 평균 33~34시간 정도인 데 반해한국은 49시간에 이른다또한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일주일에 약 70시간평일 하루 약 10시간 이상 공부를 한다. 이처럼 많은 학생들이 너무나 이른 등교시간과 그에 비해 늦게 끝나는 정규수업, 거기에 더해지는 방과 후 학교,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등으로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오로지 입시 경쟁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의 교육 현실 속에서, 기숙사 학생들은 비기숙사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학습에 투자하길 강요받고 있다. 그들은 적절한 휴식시간을 보장받지도 못하고, 그나마 있는 휴식시간마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쉬기도 어렵다. 이에 관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인천지부(이하 인천지부’)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휴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과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기숙사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휴식권은 잘 보장되고 있을까?

  


수면시간을 선택할 권리

 


먼저, 휴식에 있어서 잠을 언제, 얼마나 잘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본인에게 적절한 수면 시간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고, 그렇기에 그 시간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천지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의 수면 선택권은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모든 학생들은 기상 및 취침시간이 똑같고, 이 정해진 시간을 강제적으로 지켜야 한다.

 

심지어 인천지부가 조사한 학교 중에는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설치하여 학생들을 감시하는 곳도 있었다. 인터뷰에 응해준 A(미추홀외고 1학년 재학 중)기숙사 내에 감시 장치가 층별로 2~3개씩 설치되어 있다사감실에 폐쇄회로 텔레비전 영상을 볼 수 있는 모니터가 있다. 평소에는 많이 보지 않는 것 같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새벽 3시까지 모니터를 보며 소등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학생들은 잡는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해진 취침 시간 이후의 개인행동을 통제함으로써 수면을 취하고 싶지 않은 학생도 강제로 취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인이 선택해야 하는 수면 시간을 누군가에 의해 규제를 받게 될 경우 이것은 학생이 자율적으로 휴식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는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시 말해 휴식권 침해이다. 

   

 

학습을 위한 도구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기숙사의 모든 생활은 오로지 학습만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휴대폰 사용은 학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금지되고 있고, 노트북은 학습을 위한 용도가 아닌 이상 사용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휴식시간에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사용하고 싶은 학생들은 기숙사 규정에 의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학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제한받는 것이 옳은 것일까? 누구나 자신의 휴식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보낼 것인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이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학교는 이들에게 전자기기를 학습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하길 강요하고 있다.

  


기숙사 학생들의 휴식을 제한하는 모든 규정을 없애라!

  


학생들은 본인의 휴식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의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을 강제적으로 정하지 말아야 하며, 폐쇄회로 텔레비전으로 학생들의 취침여부를 감시해서는 안 된다. , 전자기기와 휴대폰 사용을 포함하여 학생들이 휴식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에 우리는 요구한다. 인천지역 기숙사 학교들은 학생들의 휴식권을 침해하는 모든 규정을 없애라!

 

더불어, 인천시 교육청 역시 책임을 회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교육청은 학생들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책임져야 하며, 학교가 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했을 경우에 마땅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제기한 기숙사의 여러 문제점들을 간과했다는 것은 분명히 각성할 일이다.

 

인천시 교육청에 촉구한다. 기숙사 학생들의 휴식권이 보장되는지 감시하고, 휴식권을 보장하지 않는 학교들에 대해서 적절한 제재를 가하라!

 

  

 

 

 

2014. 10. 06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인천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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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4.03.21 21:17


http://yosm.asunaro.or.kr/1






※ 배포된 〔요즘것들〕 창간준비호에 일부 그림 그린 사람, 글쓴이 정보가 누락되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창간준비호 일정에 맞춰 디자인과 편집 등을 급하게 하다가 벌어진 실수였습니다.

이름이 빠진 글쓴이, 그린이 등께 사과드리며, 그밖에 오자 등에 대해서도 독자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다음 정식 1호 때는 더 나아진 모습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청소년신문 〔요즘것들〕

창간준비호


발행일 : 2014년 3월 12일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발행

제보 및 구독문의 asunaro@asunaro.or.kr












[그림=심규민 (slackerz0120@gmail.com)]




같은


"오랜만에 학교 온 학생들을 환영해주러 나온 선생님들? ㄴㄴ~

등굣길부터 학생들의 겉모습에 점수를 매기는 그들. 새학기가 밝았네 벌점이 쌓이네~"


"꿀잠 자던 시간에 학교에 나와야 한다는 충격. 이는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겪는 시차적응에 맞먹는다. 하루종일 츄리닝을 입고 다니던 몸을 교복에 끼워 넣으려니 갑갑. 규정이 만들어 놓은 틀에 나를 끼워넣으려니 더 깝깝!"


"학교가 학생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 학생들에게 오리처럼 걸으라고 하고, 네 '발'로 엎드려 있으라고 한다. 학기 초부터."


[글=이경은 기자]




[SPECIAL] 상콤한 새 학기를 여는 '군기잡기'?

               - 학생들 “우릴 겁주고 통제할 대상으로 보기 때문”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그러나 학생들을 기다리는 것은 랄랄라 상큼발랄하고 봄 냄새 나는 멋진 스쿨 라이프가 아니다... <b>(기사보기)</b>





[SPECIAL] 1학년을 위한 학교는 없다?
               - 선배와 교사, 양쪽에 치이는 이중고 겪어


3월은 개학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입학의 계절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학교들이 신입생을 맞이한다... <b>(기사보기)</b>





[소식] 개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방학도 제대로 안 해서!"



"개학에 반대한다!" 2014년 2월, 인천교육청 앞에서 개학에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b>(기사보기)</b>





[소식] "조퇴도 학생의 권리다!"



개학을 하자마자 "조퇴!"를 외치는 청소년들이 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광주지역모임에서는 3월... <b>(기사보기)</b>






[청소년 봉인해제] 종교강요에 맞서 싸운 위영서씨 인터뷰

                           - "분노가 학교를 바꾸는 힘"



누군가가 학교에 입학하고 새 학년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는 학교를 졸업하고 떠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b>(기사보기)</b>






[칼럼 : 청소년의 눈으로] 교복의 창살을 풀어헤치자




'교내에선 교복 이외의 복장을 착용할 수 없다' B고등학교에 새로 부임한 교장이 발표한 지침이다... <b>(기사보기)</b>






[리뷰  ver.청소년]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을 기회를
                         - 『겨울왕국』 (크리스 벅/제니퍼 리, 108분, 3D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엘사는 얼음과 눈에 대한 마법의 힘을 타고났다. 그런데 엘사가 어릴 적 실수로... <b>(기사보기)</b>







[청소년 24시]
[청소년24시]는 청소년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짧게 전하는 곳입니다. 여러 청소년들의 제보와 투고를 기다립니다.



◆ 체벌 폭행당한 학생 뇌사 상태에 빠져


2월에 순천에서 체벌을 당한 고등학생이 뇌사 상태에 빠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피해 학생은 지각을 했다고 교사에 의해 머리를 벽에 찧는 폭행을 당했고 복도를 '오리걸음'으로 걷는 기합도 받았다고 한다. 일부 언론들은 해당 학교에서 책임을 피하기 위해 학생이 폭행을 당한 후 조퇴를 한 것처럼 출석부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초중등교육법시행령에서는 교사가 신체 및 도구로 학생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는 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학생의 뇌사가 교사의 폭행에 의한 것인지 가려지기는 쉽지 않겠으나, 가해 교사는 처벌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 피해자인 학생 분은 3월 11일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 입학생들에게 '서약' 강요하는 학교들


입학생들에게 '서약서'를 받는 학교들이 있다. 대개 '학교규칙을 잘 지키겠다', '스승을 존경하겠다', '상급생에게 겸손하겠다', '학업에 전념하겠다' 등의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한 경우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와 같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서약서를 제보한 학생 이모씨는 "규칙이 정당한 지 아닌지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러면 무조건 복종 서약이나 다름없다. 국민이 되는 조건으로 정부가 준법서약을 요구하지는 않지 않나. 사람이 법보다 우선하고, 국민이 국가의 주체이기 때문일 테다. 학교가 학생에게 서약을 요구하는 것은 학생을 학교자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아서라고 본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한컷태클] 건전공부 vs. 유해게임?



[그림=심규민 (slackerz0120@gmail.com)]


청소년의 게임 과몰입이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청소년의 공부는 과도하든 어쩌든 건전하다고 장려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공부를 너무 많이 하는 걸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한' 공부보단 '유해한' 게임을 좀 더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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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4.03.19 15:59




[왜냐면] ‘학생은 학생답게’ 캠페인을 시작한 이유 / 서준영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28571.html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3월 개학을 맞이해 ‘학생은 학생답게’ 포스터를 각 지역 번화가 및 학교 등지에 붙이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내용은 이러하다. “학생은 학생답게 자유로운 머리를 합시다, 개성 있는 복장을 합시다, 잘 쉽시다, 체벌·폭력을 거부합시다, 학교 규칙을 잘 바꿉시다.” 단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도 포스터를 게시했다.

(......)

그렇기에 포스터로 기존의 학생다움을 비꼬고 새로운 학생다움을 만들었다. 새롭게 정의한 ‘학생다움’은 더 ‘인간다움’이라는 뜻에 가까운 느낌이다.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이자 덕목이기 때문이다. 결국 학교가 학교다워지고 학생이 학생다워지는 것은 학생을 비롯한 학교 구성원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서준영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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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3.11.19 19:51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수원지부에서 거리 캠페인을 하면서 만난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게 추운 날 외투, 겉옷 규제여서

그 목소리를 담아 만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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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3.10.15 11:22
[성명] 모든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나?
- 체벌에 희생된, 희생되고 있는 청소년들을 애도하며


  폭력은 나쁘다. 누구도 구타를 당하거나 고문을 당해선 안 된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치관이다. 폭력에 대한 여러 논쟁이 있지만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 가장 기초적인 인권의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에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도 신체를 훼손하고 폭력을 가하는 고문이나 형벌은 두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은 차별의 하나이기도 하기에 더욱 심각한 잘못이다. 그러나 여전히, 청소년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고 없애야 한다고 하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결국 청소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단 말과 뭐가 다른가? 체벌이 여전히 정당한 것이라고 계속되고 있는 것, 그것이 한국 사회의 청소년인권의 현주소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 사회에서 체벌금지에 대한 논의는 1990년대부터 있어왔다. UN아동권리위원회 역시 한국에 수차례 학교, 가정, 그리고 사회 전 영역에서 아동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고 근절할 것을 촉구했다. UN고문방지위원회는 체벌은 잔혹하고 비인간적이며 모욕적인 처우이고, 고문의 일종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체벌금지의 걸음은 굼벵이보다도 더디다. 2011년에야 겨우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학교의 장은 법 제18조제1항 본문에 따라 지도를 할 때에는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하되, 도구, 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됨으로써 학교 체벌이 금지됐다. 그런데 교육부는 이 조항에 대해서도 ‘직접 때리지 않는 형태의 체벌은 허용되는 것’이라는 반인권적 해석을 하며 학교 체벌금지에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학교 체벌이 실질적으로 금지되고 있는 것은 경기도, 광주, 서울, 전북 등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여 체벌금지를 명시한 지역뿐이다. 이런 지역에서도 체벌은 줄어들고 있으나 역부족이다. 가정에서의 체벌 그리고 학원 등 사회 여러 영역에서의 체벌에 대해선 금지하는 규정도 없다. 어린이․청소년인권조례를 제정한 서울만이 가정 체벌 등이 금지되고 있는데, 이마저 제대로 알려져 있지도 않은 형편이다.

  현재도 수많은 청소년들이 체벌을 겪고 있다.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명이 일상적으로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한 청소년이 목검으로 체벌당한 뒤 사망에 이른 것은 그런 와중에 불거진 비극적 사건이다. 우리는 그동안에도 학교와 가정에서 체벌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죽음에 이른 청소년들이 계속 있어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죽음에 이르지 않더라도 폭력으로 인해 상처받은 청소년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체벌에 대한 언론보도는 잊을 만하면 나고 있고, 그나마 '과잉 체벌'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정도가 심한 게 아니면 대부분 묻히고 만다.

  학생간의 폭력에 대해서는 그토록 강력한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비청소년이 가하는 체벌 폭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이중적 태도는 기괴할 지경이다. 정부는 스스로 금지한 학교 체벌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단속도 하지 않고 있다. 언론들도 법적으로 명백하게 금지된 학교 체벌에 대해서조차 ‘과잉체벌 논란’ 따위의 표제를 붙이며 보도하는 둔감함을 과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과잉’ 체벌이 문제이지 체벌 자체는 할 수 있다는 식의 궤변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학살이 아니면 한두 명 정도는 살인해도 괜찮다거나, 죽을 만큼 구타하지만 않으면 주먹질을 몇 번 하는 건 괜찮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 ‘체벌’이란 이름으로 허용되어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문이자 폭력인 행위가 명확하게 금지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체벌을 금지하라.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학원에서도, 사회 그 어떤 경우에라도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라. 교육이나 훈육을 내세우더라도, 설령 진심으로 선의를 가지고 하는 것이더라도, 체벌이 폭력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교육을 위해서 폭력이 필요하다는 사고방식, 그것이 불행이 반복되는 원인이다. 폭력 말고 다른 방식으로 교육하지 못하는 것, 그러한 상상력의 부족이 폭력의 폐해 중 하나이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는가?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 자를 가르치기 위해 체벌이 필요하다면, 한국 정부를 체벌해서라도 체벌금지를 시키라고 가르치고 싶은 심정이다. 청소년은 맞아도 된다고 하고 있는 정부라면 자신도 맞을 각오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청소년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체벌이 폭력일 뿐이며, 교육적이지도 않음을 잘 안다. 그러므로 정부를 체벌하는 데 도전하기보다는 다시 한 번 간곡히 말하겠다. 절실하게 외치겠다. 정당한 체벌은 없다. 체벌은 폭력이고 범죄이다. 체벌을 금지하라.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학원에서도, 그 어떤 경우에라도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라. 체벌을 금지한 후 체벌이 없어지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라. 그것이 청소년도 사람임을 인정하는 필수 코스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2013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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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2.03.16 15:35


제가 공저/필자로 참여한 책이 현재까지 5권.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 ㅋㅋ - 청소년인권 이야기』 (공저)
『2008 인권선언 -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자!』 (필자)
『집은 인권이다 - 이상한 나라의 집 이야기』 (필자)
『청소년 인권 수첩 - 개인의 자유와 지구 공동체를 함께 생각하는 인권 교과서 (세상이 보이는 지식 시리즈)(3) 』 (공저)
『인권 교문을 넘다 - 학생인권쟁점탐구』 (공저)

한국성폭력상담소와 문학동네가 같이 기획했던 성교육 책은 아직도 안 나오고 있습니다 ㅠㅠ

여하간 여섯번째 책으로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 - 학생인권이 교육에 묻다』가 출간되었습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603457


이 책은 교육공동체 벗에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시행 1년여의 경험과
그밖에 학생인권조례에 관련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노력과 실험과 경험과 이론들을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학생인권조례"에 초점을 맞추고, 학생인권조례와 연관된 여러 학생인권에 대한 논의들을 펼쳐놓았습니다.
필자 중에는 교사들이 많고, 교사 아닌 활동가들 등등도 좀 있고 그런 구성이에요




아래는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인권

어느 날 인권이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뜻밖의 선물’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지, 어떻게 쓰면 좋은 것인지 잘 모른다. ‘인권이 교육을 망친다’는 보수 세력의 공격은 매서운데, 교육운동을 이끌고 있는 전교조조차 학생인권에 대해서는 미적지근하기만 하다.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된 지 1년이 지나고, 광주와 서울에서도 각각 학생인권조례가 제정, 선포된 지금 학생인권은 학교현장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학교 안에서 교육과 인권의 가치는 어떻게 충돌하고 있는가. 이 두려움과 혼란을 넘어 학생인권이 학교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책은 학생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해 온 현장교사, 인권운동활동가, 연구자들이 함께 쓴 ‘학교인권 생태 보고서’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평범한 진리이다. “가장 인권적인 것이 자장 교육적이다.”

1부 - 혼란을 통한 성숙


1부에서는 서울시교육청 체벌 금지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촉발된 학생인권 논쟁과 학교 현장의 혼란을 학생들과 교사들의 목소리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학교 안으로 들어온 학생인권>은 서울시교육청 체벌 금지 조치 이후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학교의 모습을 현장교사의 눈으로 섬세하게 그려 냈다. ‘체벌 금지 이후, 학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조영선)는 ‘체벌 금지 이후 학생들의 문제 행동이 증가했다’, ‘교육을 포기하는 교사가 늘고 있다’는 세간의 의문에 대해 사례를 통해 폭력으로 학생들의 문제 행동을 은폐해 왔던 진실을 드러내 보인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시행 1년, 학교는 지금’(오혜원)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학교에서 어떤 모습으로 시행되고 있는지 추적한다. 체벌 대신 성찰 교실, 상벌점제를 통해 학생들을 징계하고 걸러내는 현실은 비교육적이라는 측면에서 학생인권조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비판하며 학생인권을 실천하는 일은 결국 학교를 배움의 공간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임을 강조한다. ‘인권의 언어, 교사의 언어’(이정희)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시행 이후 1년 동안 교사의 인권의식을 인터뷰한 글이다. 학생인권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교사조차 왜 학교현장에서 학생인권을 실천하는 일을 힘들어하는지에 대해 ‘인권의 언어’와 ‘교사의 언어’라는 개념을 빗대 설명한다. 교사들의 인권의식이 상황에 따라 이중적 양상을 보이는 것은 교사가 학생인권과 관련된 상황을 학생인권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교사로서 체험 속에서 형성된 관점에서 해석/실천하기 때문임을 이야기하며 제도의 변화만큼이나 주체들의 의식 전환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학교를 모르는’ 이들이 쓴 학교인권 생태 보고서>는 학생인권과 관련해 늘 제3자로 취급받으며 ‘현장을 모른다’는 비판을 받아 온 인권운동활동가들의 눈으로 바라본 학교인권의 현실을 담았다. ‘테두리에서 바라본 학교인권의 속살’(배경내, 한낱)은 같은 사건을 교사와 학생이 얼마나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지를 통해 학생인권의 가장 큰 적이 입시 경쟁이 아니라 교사들의 의식과 실천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절반만 뿌리내린 학생인권 이야기’(공현)는 학생인권조례 시행 이후, 교사와 학생들이 어떤 갈등을 겪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며 최소한의 신뢰와 상호작용도 없었던 비교육적인 학교의 모습을 비판한다. 더불어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여러 학교의 의미 있는 변화를 통해 지금의 혼란이 ‘체벌 금지/인권 보장 시대의 첫 모습’이 아니라 ‘체벌/인권 침해 시대의 끝물’이라며 희망을 씨앗을 이야기한다.

2부 - 교육과 인권, 그 사이


2부에서는 학교 안에서 교육과 인권의 가치가 어떻게 긴장하고, 충돌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교육과 인권, 그리고 교사의 딜레마’(최형규)는 학생인권과 만난 한 ‘평범한’ 교사가 어떤 딜레마와 변화를 겪었는지 고백한다. 교실 안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 상황 속에서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일과 교사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던 장면들을 통해 교육과 인권의 가치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학생의 탄생과 인권의 유보’(이혁규)는 근대교육과 함께 탄생한 ‘학생’이라는 존재와 한국적 문화 속에서 학생의 위치가 어떻게 규정돼 왔는지를 이야기한다. 인권이 문제시될 정도로 학생들의 현재를 유예시키며 영위해 온 학교는 이제 훈육의 공간으로서 지위를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배움의 공간으로서 학교로 재탄생하는 길밖에 없다. ‘왜 ‘학생’의 인권인가’(오동석)는 헌법에서 보장한 기본권마저 유린당하고 있는 학생인권의 실태를 고발한다. 군인, 교도소 수용자와 함께 ‘특수신분’인 학생의 인권을 왜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지, 교권이 과연 학생인권과 대립하는지, 학교 민주주의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헌법학자로서 명쾌하게 풀이해 냈다. ‘인권의 한계가 교육의 한계다’(정용주)는 학생인권이 결국 ‘범생이’들만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지 지적하며 인권의 문제는 늘 주변과 경계에 선 주체들의 문제였음을 강조한다. 학교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사고와 행위를 강제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 이상 교사는 권위가 아니라 폭력과 강제적 처벌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며 필자는 ‘인권의 한계는 곧 교육의 한계’임을 강조한다.

3부 - 인권적인 학교는 어떻게 가능한가


3부에서는 인권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한 제언을 담았다. 두려움과 혼란을 위해 학생인권이 학교에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는지 앞서 실천한 사례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가르치는’ 인권을 넘어’(한낱)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의무화된 학교 내 인권교육의 한계와 그럼에도 인권교육이 필요한 이유를 이야기한다. ‘비인권’적인 학교 문화 속에서 ‘인권’교육은 불가능하기에 인권교육이 ‘이벤트’가 아닌 일상이 될 수 있는 진짜 힘은 ‘내부’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인권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한 고군분투기’(임동헌)는 공교육 안에서도 가장 열악한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인권이 꽃피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기록을 담았다. ‘교육’이 아니라 ‘징벌’에 불과했던 생활지도를 생활교육으로 바꾸어 내는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를 통해 학교는 ‘사법기관’이 아니라 ‘교육기관’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다. ‘학생인권 원론 넘어서기, 질문 새롭게 하기’(이수광)는 이우학교 사례를 통해 자치와 자율이 학생들을 어떻게 학교의 주체로 성장시키는지를 이야기한다. 학생 자치와 자율을 보장하는 것은 지知정情의意체體 각 요소가 중층적으로 결합하는 전인적 성장 과정이기도 하다.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인권’(박복선)은 학생인권이 ‘교육 불가능 시대’에 ‘학교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임을 이야기한다. 모든 학생이 국가경쟁력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존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학교가 바로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우리가 꿈꾸어야 할 학교라는 것이다.

에필로그 - 세상은 1㎝씩 움직인다
: 학생인권조례가 탄생하기까지


에필로그에서는 치열했던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 뒷이야기들을 담았다. ‘학생인권조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배경내)에서는 파란만장했던 경기도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대한 생생한 르포이다. 특히 곽노현 교육감 부재와 보수 세력의 총공격이라는 악재 속에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학생인권은 왜 우리를 뜨겁게 하지 못했나’(조영선)는 이른바 ‘전교조 키드’ 교사가 바라본 참교육과 학생인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학생인권 문제에 대해 학교 현장, 특히 전교조 교사들조차 왜 그렇게 싸늘했는지에 대한 통렬한 성찰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학생인권조례는 착한 어른들의 선물이 아니다’(공현)는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 배경과 역사를 학생들의 저항과 행동과 연관 지어서 설명한다. 학생인권조례가 단지 김상곤 교육감이나 곽노현 교육감의 업적이나 착한 어른들의 선물이 아니라 학생들의 작지만 꾸준한 저항과 직접행동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사용 설명서’(이형빈)는 학생인권조례가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지에 대해 경험을 통해 이야기한다. 필자는 당장은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요란함은 무질서가 아니라 잔치라고 말한다. 그 속에서 학생들은 침묵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주체로 성장할 것이며, 교사 역시 통제 구조 속의 톱니바퀴가 아니라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어 가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학생인권조례 사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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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2.01.30 14:23

왜 "학생인권조례"인가


2012.01.30.


많은 분들이 이 지역 저 지역에서 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 시행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학생인권조례가 시행 중인 곳은 경기도와 광주광역시, 단 두 곳뿐이다. 그나마도 경기도가 2010년 10월에 공포되어 1년여 시행됐으며, 광주의 경우는 바로 며칠 전인 2012년 1월 1일부터 시행이 시작되었다. 그럼 다른 지역은? 서울이 얼마 전 공포가 되었는데, 교과부가 법원에 이를 정지 가처분신청을 하고 시행령을 개악하는 등 태클을 걸려고 기를 쓰고 있다. 그밖에는 학생인권조례가 추진 중이거나 학생인권조례가 아닌 다른 어떤 것(교육공동체인권조례, 학교인권조례, 대구교육권리헌장 등등)을 추진하고 있거나, 아예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지역들이 대다수이다. 전국적으로 학생인권조례라는 형태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고 있거나 논란 중인 지금,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 왜 "학생", "인권", "조례"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왜 "학생"인권조례인가?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가장 많은 이야기 중에 하나가 왜 학생의 인권만 보장하는 제도를 만드냐는 것이다. 주로 교사의 인권은 그럼 없다는 거냐는 식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학부모/보호자의 인권도 보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 말에 혹해서 "교육공동체인권조례"나 "학교인권조례" 같은 형태로 조례를 만들려고 하는 지역이나 교육청․단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조례이기 때문에 가지는 의미가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그간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던 현실을 직시하고,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또는 아동/청소년)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보지 않고 미성숙하고 인간이 덜 된 존재로 보고 각종 인권을 전방위적으로 억압, 규율, 침해하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학생인권운동(또는 아동/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와 관점 속에서 탄생한 제도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에게 인권이 있다는 선언이기 때문에 학교를 교육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고, 학생인권조례는 학교 안에서 가장 권력과 권리가 없는 존재였던 학생들에게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학교 안의 지형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를 두고 교사의 인권은 그럼 없냐는 식의 이야기는 마치 장애인 인권을 보장하라고 했더니 비장애인 인권은 없냐고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추측건대 이는 학생들의 인권 보장 자체가 기존의 질서에 대해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위협적으로 느끼고, 그 느낌을 학생 인권 보장이 그 질서 안의 다른 이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학교인권조례"나 "교육공동체인권조례"로 만들겠다는 것은, 마치 겉보기에는 더 나아간 것처럼 꾸미고 있지만,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인권운동의 관점에서 제안되었고 만들어진 것을 외면하며, 학생인권 보장의 역사적 사회적 요구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도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먼저,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는 대체로 "교사, 학부모, 학생"의 소위 교육3주체의 인권을 보장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교사의 인권은 (주로 정치적 권리나 노동권 등이) 한국의 여러 법률적 문제나 교육정책 등에 의해 제한되거나 침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조례의 형태로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또한 교사에게 필요한 인권이 무엇인가, 또는 교권(이는 교사의 인권과 다른 개념임에도,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에서는 함께 다루는 경우가 있다. 교권으로서의 권리와 교사의 인권을 혼동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이 무엇이며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충분한 고민 없이 피상적으로 구색 맞추기로만 들어가기도 한다. 학부모의 인권으로 가면 더욱 모호하다. 학교에서 보장해야 하는 학부모의 인권은 정확히 무엇이며, 이를 조례로 규정하는 것은 무슨 효과가 있는가? 결국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라는 형식은 학생인권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무마시키기 위해 교사, 학부모를 동원해서 생색을 내고 있을 뿐 아닌가? 이는 오히려 교사, 학부모들이 분개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그밖에도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는 ▲ 학교구성원들 중 학교 직원(교사가 아닌 학교의 여러 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배제하기도 하고 ▲ 학생인권조례에 비해서 학생인권의 문제를 학교 안의 문제, 소위 교육3주체만의 문제로 한정시키기도 하며 ▲ 학생의 인권을 학교나 교육공동체라는 관념의 틀 때문에 제한하기도 한다. 더 조화로운 공동체/학교를 지향한다는 착각 속에서 학생인권에 대한 불충분한 보장이나 제한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학생을 대등한 인간으로 보지도 않으면서 무슨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조례이기 때문에 가지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실제 제정된 학생인권조례 내용에 일부 한계나 문제가 있더라도 학생인권조례가 그나마 환영받고 정당화되는 이유이다. 교사나 학부모의 권리 문제 그리고 학교공동체의 문제는 학생인권을 요구해온 것과는 역사도 맥락도 차원도 다른 문제이며, 별도의 연구와 운동과 제도를 통해서 만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육공동체/학교인권조례를 추진하는 이들은 그것이 학생인권조례의 이런 의미와 이유를 축소시키고 훼손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것이 필요한 이유를 따로 정당화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서,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의 인권만을 보장하므로 문제가 있다. 아동·청소년인권조례로 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일부 있다. 청소년인권이 학생인권으로 한정되지 않고, 더 폭넓게 생각되고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의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학생인권조례가 아닌 아동·청소년인권조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교라는 공교육기관 안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에 처해있는 다수 청소년들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학교와 교육청이 그 시행을 책임지는 기관이 되는 것이고, 학생들의 인권이 침해되어온 상황, 그리고 거기에 맞서서 계속 문제제기하고 운동이 벌어져온 맥락 위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학생인권이 먼저 제기되는 이유가 있고,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으로 한정해서 다루고 보장함으로써 생기는 구체성과 장점이 분명 있는 것이다.

아동·청소년인권조례라는 것을 만든다고 했을 때, 어떤 영역 어떤 분야의 어떤 내용이 포함될 것이며 어떤 기관이 책임지고 보장하도록 할 것인지 등에 대한 연구 없이, 학생인권만 얘기하면 안 되니까 아동·청소년인권조례를 만들자고 막연하게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다. 또한 만약 아동·청소년인권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제도를 만든다고 할 경우에는 가정, 학교, 일터, 문화, 정치, 기타 각 분야를 넘나드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지방자치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조례라는 형식 역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근로기준법을 만들 때 실업자, 임금노동하지 않는 사람의 권리는 왜 얘기하지 않느냐고 하지는 않지 않는가? 학생인권뿐만 아니라 아동·청소년인권 전반을 어떻게 신장시킬지 논의하고 운동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학생인권조례가 아닌 아동·청소년인권조례를 만들자"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다.



왜 학생"인권"조례인가?


다음 문제제기는 왜 "인권"만 보장하냐는 것이다. 이에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미일 수 있는데, 하나는 "학습권"과 "인권"을 대립하는 걸로 보고 왜 "인권"만 보장하고 "학습권"은 보장하지 않느냐는 식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왜 "인권"만 명시하고 "의무"는 명시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첫 번째, "학습권"과 "인권"을 대립시키는 논리는 일단 학생인권조례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학생인권조례는 인권 중에 교육권의 구체적 실현으로서 학습권을 포함하고 있으며, 학습권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서 구체적 기준들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학습권이 부당하게 침해당했다면 이 역시 학생인권조례의 구제 절차 등을 통해 구제를 요청할 수 있으며, 학교․교육청 등은 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교육환경을 개선시킬 의무를 진다. 만일 학생이 다른 학생의 학습권을 저해하는 행동을 할 경우에는, 학생들이나 학교에서는 이를 충분히 제지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과정에서 그 학생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하며 비폭력적이고 합리적 방식으로 제지․징계․지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이다. 학습권은 다른 인권과 같이 인권의 한 내용으로 보장되는 것이고, 다른 인권에 비해서 더 우위를 가지거나 할 이유도 없다.

학습권을 입시 공부 또는 그 동안의 수업방식 유지라는 매우 한정적인 의미로 이해하거나, 또는 권리가 아닌 학생의 '의무' 비스무레한 걸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런 태클을 걸곤 한다. 마치 학생들이 원하지 않는 보충수업 등을 강제로 하지 않고 여가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거나, 또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떠들거나 수업에 흥미를 잃고 반항하는 학생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입 다물게 하고 닥치게 하는 것 정도를 학습권 보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의 학습권(제대로 된 학습권이라 하기 어렵지만!)이라면 이미 우리 사회나 학교에서는 이를 지겹도록 강조하고 집착해왔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학생들의 학습권을 비롯하여 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인권"조례가 필요한 것이며, 학습권의 의미 역시 다시 한 번 인권의 관점에서 새롭게 짜야 할 것이다.

두 번째의, 왜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의 "의무"는 권리만큼 명시하지 않느냐는 식의 비판은 인권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인권은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이며, 근대 이후 만들어진 현대 국가에서 국가의 존재 목적은 1차적으로 구성원의 인권을 보장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러 그 때문에 처벌을 받고 인권을 제한당하더라도, 이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리를 박탈한다는 식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저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인권에 있어서는 의무를 다해야 권리를 보장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에게, 공동체에게, 때로는 개인에게) 필요한 의무를 부과하는 논리가 적용된다. 즉, 인권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학생들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 일, 마음대로 제한하거나 침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때문에 학생인권조례라는 형태로 기본적인 인권의 기준을 제시하고 명시하고자 한 것이다. 반면에 지금까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자의적으로 의무를 부과하는 경우는 매우 많았다. 이러한 의무 부과 역시 학생의 인권이 먼저이고, 그 인권의 기준을 지키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민주적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학생인권조례는 그러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며, 학교 안에서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이나 지켜야 할 의무 등은, 학교마다 다른 상황과 여건과 경험들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자치적 자율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학생에게 의무만 강조하고 권리에 인색했던 우리 사회에 익숙해진 이들이 학생인권조례에 의무가 없다고 길길이 뛴다. (정확히는 학생의 의무(타인의 인권 존중이라거나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거나)에 관한 내용도 일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장애차별금지법은 왜 장애인들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만 보장하고 장애인들의 의무는 명시하지 않았냐고 물을 셈일까? 세계인권선언이,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이,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왜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냐고 물을 셈일까? 의무보다 인권이 먼저라는 것, 그것이 왜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지가, 그리고 학생인권조례에 왜 의무의 명시를 인권 항목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라는 식으로 요구하는지가,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왜 학생인권"조례"인가?


마지막으로 왜 학생인권"조례"여야 하냐는 비판이 있다. 이 역시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므로 "법률"로 하여 전국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례는 법적 효력이 있으므로 학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헌장 같은 선언적 내용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학생인권을 법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권의 보편성이 조례의 형태로 인권을 보장하는 것을 막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인권은 말 그대로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에 한 국가의 법률로 이를 보장하는 것도 부당한 것이고 전세계에 통용되는 뭔가로만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반대로, 각 국가와 지역에서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장려해야 할 일일 것이며, 이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와 지역을 변화시켜야 할 일일 것이다.

실제로 청소년운동은 학생인권법(학생인권의 내용을 포함시킨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만들려고 운동했던 적이 있고, 또 법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조례의 장점도 있다. 조례는 지역 사회 또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학생인권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지역 교육청과 학교 등에 더 구체적으로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 오히려 법률로 선언적 내용만 들어간다면 제대로 학교 현장에 적용되지 않을 법한 내용들이 조례의 형태로 만들어지고 교육청과 지역사회를 통해 효과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인권에 관한 법률과 조례, 두 가지 다 필요하고 있으면 좋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애초에 학생인권법의 제정 필요성을 옹호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어째서 일부 언론 등에서는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하는 근거로 사용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생인권을 조례가 아닌 헌장 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솔직히 인권을 옵션 정도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소리다. 학생인권조례는, 비록 과태료 부과처럼 직접적인 처벌조항은 없지만, 조례의 형식이기 때문에 학교와 교육청 같은 행정기관에 의무를 부과할 수 있고, 학생인권옹호관과 같은 구제 기구의 설치도 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비록 형법 같은 것에 비해 강제성은 약하지만 나름대로 조례의 수준에서 학생인권을 점진적으로 개선, 실현시켜갈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헌장으로 만들게 되면 그러한 개선을 위한 제도와 장치들을 둘 수 없으며, 단순한 말의 성찬이 되어버릴 위험성이 적지 않다. 일부 기구가 추진한 헌장 등의 형태로 만들게 되면, 조례가 가지는 지역사회의 자치법규로서의 의미도 상당 부분 퇴색해버린다.



학생인권조례라는 우리 시대의 과제


그러므로 학생인권조례는 "학생" "인권" "조례"여야만 한다. 그것이 학생인권을 요구하며 운동해온 역사와 맥락에도, 학생들의 현실에도, 학교와 교육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실효성에서도 필수적이다. 학생인권조례를 학생인권조례가 아닌 다른 것으로 하려는 사람들(특히 대구의 "교육권리헌장" 같은 -_-)은 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학생인권을 반대하거나 부담스러워 하는 것인지. 학생이 인간이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지. 학생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개선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인지. 학생인권조례 이상으로 학생인권 그리고 청소년인권 보장이 이루어지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학생인권조례는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넘어서고 시행하고 정착시켜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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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2.01.21 11:39

서울 학생인권조례의 의미, 꼼꼼히 들여다보기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의미 톺아보기 ⑦

공현

2011년 12월 19일, 서울 학생인권조례가 서울시의회에서 가결되었다. 2010년 9월 경기도, 2011년 10월 광주광역시에 이어서 세 번째로 학생인권조례가 입법기관에서 가결된 것이다. 비록 그 뒤에 서울시교육청에서 재의 요구를 하면서 언제 시행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해졌지만, 지방의회가 학생인권조례를 통과시킨 것 자체의 의미도 결코 작지 않다. 이날 통과된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여러 단체들이 모여 만든 주민발의안에 교육상임위 시의원들이 일부 수정을 가한 안이다.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서울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이 어떠한지, 내용 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두발자유의 보장, 그러나 복장의 한계

우선 학생인권운동이 가장 오랫동안 제기해온 이슈 중에 하나이자 학생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던 “두발자유”, 나아가 용의복장에 관한 조항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이에 대해 “학생의 의사에 반하여 복장, 두발 등 용모에 대해 규제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강력하게 천명함으로써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두발자유에 관해서 길이 외에 다른 부분은 규제할 수 있다는 듯이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와는 달리, 두발자유 등 개성 실현권에 관해서 완전하게 보장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교육상임위원회에서 수정되는 과정에서 이 조항에도 단서 조항이 붙었다. “다만, 복장에 대해서는 학교규칙으로 제한할 수 있다.”라는 조문이다. 교복폐지 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광주학생인권조례의 경우에도 두발의 경우 완전한 보장을 하려 하지만, 복장에 관해서는 “교복을 학교 규정으로 정할 수 있다.”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의 조문이 더 문제가 많다. 광주에서는 교복을 학교 규정으로 정할 수 있다고 했을 뿐, 교복 외의 용의 복장 부분이나 교복의 착용 여부 등을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복장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서울학생인권조례의 경우 매우 자의적이고 포괄적인 복장 규제가 가능하게 되어버렸다. 물론 학생인권조례의 취지상 학교 현장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당장은 여러 자의적 용의복장 규제들도 완화될 가능성이 높기는 하나, 심각한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진보된 학습권 조항

서울학생인권조례가 비교적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는 조항 중 하나가 학습권에 관련된 조항이다. “제8조 학습에 관한 권리”는 주민발의안에 들어갔던 내용에 더해서 서울시교육청의 자문위원회가 냈던 학생인권조례 초안에 있던 것을 합하여 보완하여 수정된 내용이다. 주민발의안 원안은 아니더라도 더 진전된 수정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항에서는 학습권을 “소질과 적성 및 환경에 합당한 학습을 할 권리”로 명시하고, 현장실습 과정에서의 안전과 학습권 및 소수자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을 담았다. 또한 부당한 상대평가가 아니라 정당하게 평가받을 권리를 학습권으로 포함시켰고, 과도한 경쟁이 오히려 학습권을 침해한다고 보았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 등이 한국 정부에 교육권에 관련해서 권고했던 것이 일부 반영된 결과이다. 마지막으로는 “과도한 선행학습을 실시하거나 요구”하는 것도 학습권 침해로 보고 금지했다.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과정에 맞는, 적절한 시간을 들여 배울 권리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학습권 조항은 다소 개략적이고 추상적으로 “배울 권리”, “학습에 참여할 권리”, “공부할 권리”로만 학습권을 파악하던 풍조에서 벗어나서 학생에게 적합한 교육을 받을 권리로서의 학습권을 적극적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그리고 상대평가․경쟁․선행학습 등 한국의 교육환경에서 일어나는 구조적인 학습권(교육권) 침해를 다룬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다만 학생들이 학습에서 부당하고 자의적으로 배제당하거나 학교에서 쫓겨나는 등의 문제에 관해 명확하게 학습권의 차원에서 보장하는 조항을 만들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이다.

국내 학생인권조례 최초로 명시된 집회의 자유

서울학생인권조례에서 확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제17조 의사 표현의 자유”이다. 이 조항에서는 국내 학생인권조례 최초로 학생들에게 집회의 자유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2009년에서 2010년에 걸쳐, 경기도에서 국내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질 때에도 집회의 자유 조항은 큰 논란이 되었다. 결국 경기도교육청은 논란이 된 집회의 자유 부분을 명시하지 않은 안을 발의했다. 당시 경기도교육청에서는 집회의 자유를 명시하지 않더라도 의사표현의 자유에 대한 조항에서 의사표현의 방법 중에 집단적 표현으로서 집회가 포함되는 것이므로 집회의 자유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했다. 그러나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 이를 놓고 “학생들 교내에서 집회 못한다”라고 표제를 뽑아서 보도하는 등 사람들 사이에서 집회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식의 인식이 퍼졌다.

사실 경기도교육청의 말이 맞긴 하다. 만일 경기도학생인권조례의 취지가 학생에게 집회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었다면, 이는 유엔아동권리협약과 헌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상위법 위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집회의 자유가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자의적으로 침해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조례로 이를 재확인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래서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의사표현의 자유에 대한 조항에서 “학생은 집회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이러한 권리를 확인하고 보장했다. 여기에서 집회의 자유는 교내에서 집회를 열 권리 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 집회에 참여할 권리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조항 역시 교육상임위원회에서 일부 수정되고 말았다. “다만, 학교 내의 집회에 대해서는 학습권과 안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학교규정으로 시간, 장소, 방법을 제한할 수 있다.”라는 단서 조항이 붙은 것이다. 다른 학생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나 안전 등의 문제로 필요최소한의 제한을 둔다는 것 자체는 일견 합리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는 이를 매우 포괄적으로 해석하여 집회를 규제할 우려가 있다. 예컨대 학교 안의 어디에서 열든 ‘면학 분위기’를 저해하니까 학습권 보호를 위해 집회를 금지한다면? 좀 더 명확한 조건 명시 등을 통해, 학생들의 집회의 자유 행사에 실질적으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꼼꼼하고 촘촘하게 구성한 권리들

그밖에 서울학생인권조례는 학교 현장의 사례들과 연구들을 반영하여 학생인권 보장의 기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자 애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조항이다. 이 조항에서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등의 의견을 반영하여, 단순히 종교의식을 드리는 수업에 대한 선택권뿐만 아니라 학생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학생의 종교 선전을 제한하는 행위” 및 각종 차별 등을 포함하여서 좀 더 구체적으로 유형별로 명시하였다. 또 다른 예로 자치활동에 관한 권리가 있다. “제18조 자치활동의 권리”에서는 학생자치조직과 학생회가 어떠한 권리를 가지는지, 임원 선출, 회의 개최, 예결산 등을 비롯하여 구체적으로 보장하고자 했다. 학생자치조직들이 말뿐인 자치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치를 보장받기 위해서 어떠한 것들이 필요한지 세심한 연구와 고려가 엿보이는 조항이다.

소수자 학생의 권리 보장에 관한 조항에서도 경기도와 광주광역시에서 제정된 학생인권조례에 비해서 서울학생인권조례는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이 조항에서는 8개 항에 걸쳐서 구체적으로 소수자 학생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다. 경기도의 경우 “빈곤, 장애,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운동선수 등 소수 학생”으로만 예시하고 있는 데 비해, 서울은 “빈곤 학생, 장애 학생, 한부모가정 학생, 다문화가정 학생, 외국인 학생, 운동선수, 성소수자, 근로 학생 등 소수자 학생”이라고 하여 좀 더 많은 예시를 들어 조금 더 촘촘한 권리 보장을 목표로 했다.

그런데 현재 서울학생인권조례 중 소수자 학생의 권리 보장에서는 성소수자에 관해 이런 조항이 있다. “교육감,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학생의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관한 정보나 상담 내용 등을 본인의 동의 없이 다른 사람(보호자는 제외한다. 이하 같다)에게 누설해서는 아니 되며, 학생의 안전상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도 본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여야 한다.” 이 조항은 본래 보호자/친권자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에게 본인 동의 없이 알릴 수 없도록 했다. 이는 보호자/친권자에게 알리는 것이 성소수자 학생들을 더 많은 폭력과 차별에 노출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교육상임위원회에서는 이에 대해서 “내 자식이 동성애자인 걸 부모인 나한테도 알려선 안 된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라는 식의 반발을 의식하여 결국 “보호자는 제외한다”라는 조문을 넣고 말았다.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이 각계에서의 사례들과 연구들을 반영하여 최대한 꼼꼼한 권리 보장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이러한 후퇴는 더더욱 큰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인권 증진 및 구제 제도 개선

경기도․광주광역시 학생인권조례에 서울학생인권조례를 비교해봤을 때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학생인권의 증진에 관한 부분과 학생인권 침해에 대한 구제 ― 학생인권옹호관 등의 부분이다. 이 부분은 경기도에서 지난 1년간 시행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좀 더 실효성 있게 규정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 역시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회가 공들여 만든 부분에서 많은 부분 가져와서 더 나아지도록 교육상임위가 수정한 부분이다.

우선은 인권교육에 관한 부분에서, 인권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교육감과 학생인권옹호관 등이 할 역할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인권교육을 실시하도록 해도 준비가 부족하여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교들이 많은 현실 속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분이다. 홍보에 관해서도 경기도와 광주광역시의 조례는 “교육감은 … 노력하여야 한다”라고만 되어 있으나, 서울의 조례는 이에 더해서 조례 전문을 알리도록 하고 학생인권옹호관 역시 홍보를 위한 계획을 수립할 책임을 지도록 했다.

또한 학생인권옹호관과 학생인권교육센터라는 기구의 설치를 통해서 학생인권에 관한 정책 추진과 학생인권침해 구제에 관한 업무를 책임지고 총괄할 수 있도록 했고 학생인권옹호관의 신분, 업무, 위상을 좀 더 명확히 했다. 이는 경기도의 시행 경험을 돌이켜보면, 학생인권 정책을 책임지고 추진할 주체가 교육청에 따로 없고 기존의 장학사 등 교육 관료들은 학생인권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왕왕 보이며, 학생인권옹호관의 교육청 안에서의 위상이 다소 불안정했던 것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나아가서 학생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조사 및 구제에 대해서 상세한 의무, 조건, 절차, 권한을 명시한 것은, 학생인권이 학교 현장에 정착하도록 하는 데 매우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규정개정심의위, 학생의 규정 개정 참여 문제

마지막으로, 내가 서울시의회를 최종 통과한 서울학생인권조례에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규정개정심의위원회” 문제이다. 이 위원회는 경기도․광주광역시의 학생인권조례에서 모두 두고 있는 기구인데, 서울에서만 제외되고 대신에 학교운영위원회 밑에 “학교규칙소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주민발의안 원안에서는 규정개정심의위원회를 두도록 했는데, 교육상임위에서 수정된 안이다. 아마도 기존의 규정개정심의위원회가 학교운영위원회와의 관계 및 위상 설정이 애매하다는 법적 의견에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문제는 이러한 수정이 규정개정심의위원회냐 학교규칙소위원회냐 하는 이름의 차이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본래 규정개정심의위원회에서는 위원회에 학생 대표가 참여할 것을 명문화하고 있었다. 경기도의 경우에는 더 나아가서 학생 대표와 “인권 관련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전문가”로 구성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규칙 개정을 학교가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하고 학생들이 규칙 개정에 반드시 의미 있는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학교규칙소위원회는 이러한 학생 대표의 참여에 관한 명문화된 부분이 없다. 학교규칙소위원회를 어떤 구성원으로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항도 없다.

물론 경기도의 경우에도 규정개정심의위원회를 조례가 명시한 대로 제대로 꾸리지 않은 학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학생 대표의 참여를 통해 학생들이 원할 경우에 규칙 개정에 의미 있는 존재로 개입할 길을 확보한 의미는 있었다. 서울에서는 위원회 구성에 학생 참여를 명시하지 않아서, 결국 규칙 개정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 제출이 들러리만 서는 게 될 위험성을 안게 되었다.

조례는 지렛대일 뿐이다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최초로 주민발의를 통해 서울시 만 19세 이상 유권자 10만여 명의 참여로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시민들의 학생인권에 대한 지지와 관심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용적으로도 두발의 완전한 자유와 집회의 자유 명시 등, 서울학생인권조례는 분명 10~15년 가량 이어온 학생인권 운동의 커다란 성과이다.

또한 서울시의회에서 통과되는 과정 역시 어렵고 고비가 많았던 만큼 의미가 있었다. 동성애자, 임신·출산한 청소년 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려 하고 차별 금지에 반대하는 강력한 반인권적 공세를 정면으로 돌파했던 것이다. 비록 경기도나 광주광역시 학생인권조례에도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조항은 있었으나, 이 조항은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서울에서 반인권적 공세를 이겨내고 통과됨으로써, 차별 금지 조항은 역설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차별금지와 관련된 쟁점이 과잉 부각되면서, 앞서 언급한 학습권 부분을 포함하여 서울학생인권조례의 한층 더 나아간 내용들이 잘 부각되지 못한 것이나, 규정개정심의위 삭제 문제 등 심각하게 수퇴된 부분들을 놓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좀 서글픈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와, 학교 현장에서 학생인권이 잘 뿌리내릴 수 있을 거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미 만으로 1년이 넘게 학생인권조례를 시행해본 경기도를 살펴보면, 학생인권조례가 온전하게 입학한 게 아니라 널리 알려진 일부, 두발 길이 자유화나 체벌금지, 자율보충학습 강제 금지 등만 그나마 힘을 발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밖에 학생인권조례가 담고 있는 풍부한 내용들이 모두 다 반영되기 위해서는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과 교사들 등 교육주체들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서울학생인권조례에도 학생인권에 관해서 복장의 자유나 집회의 자유 등 학교에서 제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한계들이 군데군데 있다. 이는 결국 교육청이 조례에 관해서 해설하여 전달하는 지침,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 학생인권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역량과 의지에 의해 좌우될 부분들이다. 물론 조례의 개정이나 법률 개정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예컨대 보호자에게는 성소수자 학생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아웃팅할 수 있게 한 조항은 개정이 필요하다. 규정개정심의위와 관련된 것도 조례를 개정하면 좋겠으나 이와 관련해서는 아예 학교운영위원회에 학생 대표가 참여할 수 있도록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버리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 방법일 수도 있어 보인다.

학생인권조례는 하나의 지렛대일 뿐이다. 그 지렛대를 눌러서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다. 이 경우에 지렛대를 움직일 사람은 첫 번째로는 학생들일 것이고, 두 번째는 교직원 및 보호자일 것이며, 세 번째로는 교육청과 지역 사회의 시민들일 것이다. 그런 지렛대 하나 놓으려고 주민발의를 하고 재의를 해서 다시 의결을 해야 하는 등, 여러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겪고 넘어야 하니 참으로 한숨이 푹푹 나온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고생해서 놓은 지렛대를 이렇게 꼼꼼하게 찬찬히 뜯어볼 때면 좀 뿌듯한 것도 사실이다. 학생인권, 이제 또 다른 출발점이다.
덧붙이는 글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의 작성에도 참여했고,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운동에도 같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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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83 호 [기사입력] 2012년 01월 18일 13: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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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2.01.18 03:23

미조직된 시민들의 호응으로 만들어진 서울학생인권조례

- 서울 학생인권조례 제정, 주민발의의 경험



  2011년 12월 초,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학생인권조례주민발의 운동을 하던 경남에서, 주민발의에 필요한 숫자인 2만5천여명을 훌쩍 넘긴 3만6천여명으로 서명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아수나로 경남중부지부의 사람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되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아쉽다고 했다. 서울 주민발의처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호응을 얻으면서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말했다. 서울보다 더 안정적으로 주민발의를 성사시킨 경남을 부러워하고 있던 나로서는 새로운 관점의 평가였다.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의 험난했던 과정

  서울에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의 과정은 험난 또 험난했다. 처음 주민발의를 시작할 당시에는, 전교조 서울지부 활동가가 내놓은 낙관적인 전망을 믿었었다. 전교조 서울지부에서는 친환경무상급식조례 주민발의 당시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주민발의 서명을 모을 계획을 내놓았었고, 그에 따르면 2011년 1월까지 3~4만명 정도는 모을 수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2011년 1월,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참담했다. 주민발의 기간 6개월의 반이 지났는데도 모여 있는 건 고작 6000명 남짓의 서명이었다. 서울시 투표권자의 1%, 최소 8만2천명을 모아야 하는데… 3개월만에 7만6천명을 더 모아야 할 판이었다.

  사실 처음에도 친환경무상급식조례와 학생인권조례를 비슷한 것으로 보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무리가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었던 적이 있었다. 교사인 전교조 조합원들이나 학부모들에게 친환경무상급식조례와 학생인권조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청소년운동에서 반복적으로 던졌던, "왜 우리 사회는 '애들 밥 먹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이면서 '학생들에게 자유를 보장하는 문제'에는 소극적, 부정적인가?"라는 질문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학생인권조례는, 친환경무상급식에 비해서 청소년들, 학생들을 시혜와 보호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좀 더 근본적인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주제였다. 결과적으로 전교조 교사 조직을 비롯하여 처음에 계획했던 '조직서명'은 충분히 움직이지 못했고, 2011년 2월부터는 '거리서명'이라는 방법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거리서명은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이유에서 주요한 서명 방식으로 생각되지 않았었다. 12월에 2차례 해봤지만 추운 날씨에다가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까지 적어야 하는 주민발의 청구인 서명의 특성상 3시간을 해도 40~50여명의 서명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조직으로부터의 서명을 기대할 수 없다면 발로 뛸 수밖에. 2월 들어서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6시간 풀타임 거리서명을 개시했다. 목표는 하루 200명. 남은 3개월동안 하루 200명씩 꼬박꼬박 받을 수 있다면 3만여명을 거리서명으로 채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 매일 거리서명에 나선 사람들은 주로 청소년활동가들이었다. 첫날에는 6시간을 했는데도 100명밖에 못 받았지만, 점점 요령이 붙고 어느 지역이 잘 되는지 정보가 축적되면서 하루 200명씩 받아내는 게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감동적이었던 시민들의 호응

  2, 3월은 매일 아침 9시에 모여서 그날의 서명 일정을 정리하고, 11시부터 5시나 5시30분까지 거리서명을 한 뒤(3월이 되어 날이 따뜻해지자 저녁 6시까지 서명을 연장한 날도 비일비재했다.), 저녁에는 온갖 행사나 강연이나 다른 단체 총회에까지 찾아다니면서 서명을 호소하고 받아내고, 밤 8, 9시쯤 사무실로 돌아와서 그날 받은 서명을 다 세고 정리하고 서명 물품을 정리한 뒤에 11시가 넘어서 집에 가면 바로 쓰러져 자는 생활로 2개월을 보냈다. 노동시간으로만 따지면 하루 12~13시간이 넘었고, 무거운 앰프와 가판대와 전단지와 서명용지를 들고 옮기고 추운 날씨에 6시간 동안 서명을 받으러 서있고 돌아다니는 육체노동과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서명을 받아내야 하는 감정노동이 골고루 섞인, 강도 높은 노동의 나날이었다. 처음에는 쉬는 날 없이 하다가 한 명 한 명 몸살로 쓰러져서 쉬는 일이 속출하면서 그제야 한 사람당 1주일에 하루나 이틀은 의무적으로 쉬기로 했다. 2, 3월의 그 지옥 같았고 이를 악 물고 보냈던 시간들, 단순한 노동강도로는 말할 수 없는 울분과 절치부심의 시간들을 더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4월 11일, 이제 주민발의 기간은 원래대로라면 보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 되었다. 서울시에서 중구청장, 강남구의원 등 재보궐선거가 있어서 재보궐선거 기간 동안 그 지역에서 주민발의 서명이 금지되어, 금지되었던 기간만큼 그 지역만 연장이 되어서 서명 최종 마감일은 5월 10일로 미뤄져 있었지만, 어쨌건 한 달도 채 안 남은 시점이었다. 그때 모인 서명은 3만2천명 남짓. 그 중 2만명 넘는 숫자가 거리서명으로만 모은 숫자였다. 조직서명은 여전히 당초 목표의 반에도 못 미치고 있었다. 11일 중간보고 기자회견 전까지 최소한 절반, 4만명은 모으고 발표하려 했던 소기의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4월 11일에 기자회견을 하고 여러 언론에 소식이 알려진 뒤, 그리고 주민발의 청구인 대표였던 홍세화 씨가 한겨레에 자신의 칼럼에서 서울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소식을 전한 뒤, 시민들의 호응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홍세화 씨 칼럼이 실린 날에는 서울본부 전화로 어떻게 하면 서명을 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전화가 수십 통 걸려왔다. 홈페이지에 올려뒀던 우편서명용지를 시민들이 다운로드하면서 홈페이지가 트래픽 초과로 다운, 리셋시켜 복구하는 일이 반복됐고 결국 홈페이지 트래픽 용량까지 늘렸다.

  나는 아직도 그때가 생각난다. 4월 26일, 원래대로라면 주민발의 서명이 마감되었어야 할 날, 그 날은 아무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은 어느 서울시민 분들이 한 명 한 명 보내준 우편 서명만 800명이 넘게 들어왔다. 어느 분은 4월 26일에 바로 제출해야 하는 건 줄 알고 혹시라도 늦을까봐 자기 서명 한 장을 퀵으로 보내오시기까지 하셨다. 비록 4월 26일에도 서명은 7만명에 못 미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날과 그 다음날만큼은 밀려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우편서명에 즐거워할 수 있었다. 학생인권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호응이 이만큼이나 많았구나, 하고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거리서명 역시 날이 좀 풀리고 우리도 요령이 붙으면서, 그리고 주민발의 막바지가 되어 다른 단체들도 거리서명에 힘을 집중하면서 더 놀라운 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어린이대공원에서는 평균적으로 주말마다 하루 500명, 최고 기록을 세운 날은 하루에 900여명의 서명을 받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부모들의 호응이 높았다. 학생인권이 자기 아이가 곧 겪을 문제라고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펜을 들고 서명에 참여해주는 부모들의 힘으로 어린이대공원 서명은 성공적일 수 있었다.

  5월 10일, 주민발의 서명을 마감한 날, 모인 서명이 8만 5천명으로 집계되자 서울본부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사실 5월 초까지만 해도 우리는 주민발의 무산을 점치며 우울해하고 있던 차였다. 아무리 쥐어짜봐도 3천~5천명의 서명이 부족하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부족한 서명을 각계각층에서 서울본부 소속이 아닌데도 힘을 보태준 단체들, 그리고 예상 이상으로 몰려든 시민들의 자발적인 우편서명이 채워주었다.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 등에 거리서명이 중구와 강남구에서밖에 못 받았는데도 대박이 터졌던 덕분도 있었다. 기쁨도 잠시, 주민등록번호나 이름, 주소 기재 오류로 7만2천명밖에 유효 서명이 없다고 하여 보정기간 5일만에 1만여명의 서명을 더 받아야 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이때도 태풍 속을 뚫고 거리서명을 받고 또 많은 서울시민들의 계속되는 호응과 참여로, 총 약 11만명의 서명, 최종적으로 유효하다고 인정된 97,702명의 서명으로 주민발의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미조직 대중과 조직 대중 사이 어디쯤

  서울에서 마지막에 대략적으로 서명을 집계해봤을 때, 굵직굵직했던 것은 거리서명으로 모은 게 약 3만, 전교조 서울지부 7~8천, 민주노총 서울본부 서명이 1만4천, 대한불교청년회가 1만2천, 우편서명이 6천 등이었다. 그런데 민주노총 서울본부의 1만4천명 중에서도 8천명 이상은 거의 담당 활동가 2명이 매일 따로 거리서명을 뛴 결과였기에, 민주노총 서울본부도 노조 조직 서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7천명 남짓이었다.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에서는, 절반 이상을 거리서명, 우편서명 등 미조직 시민들로부터 받은 것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경남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에서는 거리서명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서명수의 20% 미만이다. 3만6천명 중 1만명 이상을 민주노총 경남본부에서 받았고, 전교조 경남지부도 5천명 이상 받았다. 학부모단체들과 어린이책시민연대, 그리고 지역운동을 하는 단위들도 많은 수의 서명을 모아왔다.(중간까지는 각 단위별 목표 서명과 달성한 수가 공개되어 있었으나 최종 마감 이후 공개되지 않아서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이런 차이는 지역특성이나 그 지역에 지역조직, 노조 등 대중조직들의 조직화 정도 차이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경남은 학생인권조례 운동을 2008년 무렵부터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조직 대중들의 학생인권에 대한 의식이 더 우호적이기 때문인 걸 수도 있다. 아니면 서울 주민발의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미리 수임인 교육이나 조직을 통한 서명 계획을 좀 더 철저하게 세운 것도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서울에서 주민발의에 학을 뗐던 청소년활동가들은 경남처럼 조직 서명의 힘으로 주민발의를 성사시킨 것을 보고 매우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졌다. 때문에 경남의 활동가에게서 서울의 주민발의를 부러워하는 듯한 말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서울이었기 때문에 더 이슈화가 됐고 그래서 더 많은 미조직 대중들이 알고 호응하고 참여하는 과정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거리서명과 우편서명으로 턱걸이 하듯이 피 말리는 기분 속에 겨우 성사시킨 주민발의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말은 바꿔 말하면 그만큼 미조직 서울시민들의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호응이 예상 이상으로 높았던 것이고 그것 역시 우리가 감동할 일이었고, 또한 우리가 지난 수년간 학생인권운동을 해온 성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조직 대중들의 호응으로 성사시킨 주민발의는 너무나 취약하기도 하다. 우리는 원래 각계각층의 조직된 대중들, 특히 교사들에게 학생인권에 대해 알리고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운동의 목표 중 하나로 잡았었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한 것은 좌파적․개혁적 시민사회운동에 조직 대중들 사이에서도 학생인권이 별로 통하지 않고 있으며, 노조 등의 대중조직들 역시 그런 사회적 의제를 자신의 조직 대중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할 만한 조직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전교조 안에서의 의식 차이는, 간부들 사이에서도 심각할 정도로 컸다. 미조직 대중들에 크게 의존하여 주민발의를 성공시켰지만, 당초 기대했던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에 학교 안에서 변화를 돕는 주체로서 교사․학부모 등을 만들어내는 계기로서 주민발의는 성공이라고 볼 수 없다. 결국 학생인권조례 운동은, 비단 주민발의의 형식이 아니더라도, 조직 대중과 미조직 대중, 그 둘 모두를 향해 전개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마도, 서울과 경남 주민발의 사례의 중간 어디쯤에 적절한 균형점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 나는 청소년활동가이고, 청소년의 경우에는 절대다수가 미조직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교 현장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는 제도이기도 하지만, 미조직된 초중고등학생들을 조금이라도 더 조직화해내기 위한 계기이기도 하다. 아수나로 서울지부에서 지금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될 때를 대비하여 준비하고 있는 것은 '학칙개정 대응 메뉴얼 발간'과 개별 학교 대응 등이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당시에 있었던 학칙개정에 대한 여러 경험들로부터 배워서, 좀 더 면밀하게 학생들이 주인이 되어서 학칙개정에 참여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을 조직화해낼 수 있는 계획을 고심 중에 있다. 주민발의는 어쨌든 끝났다. 거리에서 '비청소년'들에게 청소년, 학생들의 인권을 위해서 서명을 해달라고 구걸해야 했던 끔찍했던 시간도 끝났다. 비청소년들도 이렇게 많이 학생인권에 대해 호응해주는구나 하는 감동도, 분노와 억울함도, 모두 가슴에 남겨두고. 이제 다시 청소년운동으로 돌아올 때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곧 병역거부로 감옥에 갇힌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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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2.01.09 15:15
법적 요건조차 갖추지 않은 서울학생인권조례 재의 요구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 부정!
이대영 부교육감은 재의 요구를 즉각 철회하라!

 
서울시교육청 이대영 부교육감이 오늘 서울시의회에 서울학생인권조례 재의를 요구했다. 재의 요구는 서울시의회에 다시 한 번 심의․의결을 하라는 것으로, 이는 이대영 부교육감이 민주적으로 제정된 서울학생인권조례의 공포와 시행을 사실상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록 예상했던 행보이기는 하나 끝끝내 정략적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접하니 커다란 실망과 분노를 감출 길 없다.

학생인권의 보장은 학생들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익히고 자발성의 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며, 교육기본법과 유엔아동권리협약 등에 명시된 교육의 기본 목표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서울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의 기준을 구체화하는 한편, 여러 장치를 통해 학생인권을 실질적으로 실현하고 차별과 폭력 없는 학교를 만들기 위한 조건을 담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과 교육복지의 신장은 물론 민주적 학교 구조를 만들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최근 사회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와 관련해서도, 폭력과 차별 없는 학교를 만들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학생인권조례가 필수적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이대영 부교육감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자 약속인 인권은 물론, 교육의 기본적 목표와 가치까지도 거부한 반교육적 행위를 선택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재의 요구는 10만여 서울시민들의 주민발의로 발의되고, 시의회에서 숙고를 거쳐 제정된, 가장 민주적이고 적법한 조례에 대한 전면 부정이다. 지난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정략적 이익을 위해 무상급식 시행을 거부하고 서울시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던 것보다도 더한 무리수라고밖에 볼 수 없다.

나아가 이번 재의 요구는 지방교육자치에관한법률이 허용한 재의 요구의 요건에도 전혀 맞지 않는 불법적 행위다. 지방교육자치법에는 상위법 위반이나 공익의 현저한 침해 우려가 있을 때만 재의가 가능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울교육청 내부의 법률 검토에서도 법리적 문제는 없다는 결론이 이미 난 바 있다. 또한 공익을 오히려 드높이는 학생인권 보장 조례가 공익을 현저하게 침해한다는 것 역시 중대한 오독이다. 지난 1월 3일,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 역시 서울시의회에 공식 서한을 보내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을 환영하는 뜻을 밝혔다. 이대영 권한 대행은 어이없는 주장을 내세운 무리한 재의 요구로 국제적 망신까지 초래하고 있다.


백번 양보하여 이대영 부교육감이 내세운 재의 사유가 논리적으로라도 타당한지 살펴보자. 이대영 부교육감은 재의 요구의 사유로 ▲ 학교에 자율성을 부여한 상위법과 충돌 가능성 ▲ 교육감의 인사권 및 정책결정권을 제한 ▲ 집회의 자유,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금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두발 자유 등 개성을 실현할 권리, 사생활의 자유에서 휴대폰 소지 및 사용 자체를 금지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이 우려가 있음 등을 들었다. 그러나 각각의 논리들은 참으로 궁색하기 짝이 없다.

서울학생인권조례가 학교에 자율성을 부여한 상위법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은 상식적으로나 법적으로나 가장 말이 안 되는 내용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교의 학칙을 일괄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학칙이 지켜야 할 기본 선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근거 조항으로 들고 있는 초중등교육법 8조 역시 "법령의 범위 안에서" "지도․감독기관의 인가를 받아" 학칙을 정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학생인권조례는 전혀 상위법 위반이라 볼 수 없다.

교육감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주장도 빈약하다. 근거로 든 헌법 제117조 1항이나 지방자치법 제22조를 살펴봐도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주민의 권리 제한 또는 의무 부과에 관한 사항이나 벌칙을 정할 때에는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란 조항이 있을 뿐인데, 학생인권조례는 주민(학생)의 권리 보장, 그리고 이를 위한 국가기관의 의무를 정하고 있으므로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학생인권조례는 교육감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감의 업무를 자문․보조하는 기구를 두도록 하고 있을 뿐이며, 교육감의 인사권 및 정책결정권 등은 충분히 존중되고 있다. 경기도 등에서 이미 이러한 기구들이 설치되어 잘 운영되고 있으며, 교육감의 권한을 침해했다는 이야기도 나온 적이 없다.

그밖에 이대영 권한 대행이 든 재의 요구의 이유들은 모두 인권에 대한 무지와 시대착오적 거부감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집회의 자유, 차별금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개성실현권, 사생활의 자유 등이 우려된다는 건데, 이러한 권리들은 국제인권협약 및 국제인권기구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해온 사안들이다. 한국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체벌금지, 두발자유, 휴대전화 소지 및 사용 허용, 학내 집회자유 보장 등을 이미 권고한 바 있다. 또한 집회의 자유가 경기도와 광주 학생인권조례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재의를 요구할 이유가 전혀 되지 못한다.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금지의 경우에도 교육청 자문위원회가 논란 끝에 제외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다. 외려 교육청 자문위원회는 공청회를 거친 이후 성적 지향을 명시한 최종안을 마련한 바 있다.


우리는 반교육․반인권․반민주의 전형이라 할 만한 이번 재의 요구를 강력히 규탄한다. 또한 이번 이대영 부교육감의 결정 뒤에는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끊임없이 제동을 걸어온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버티고 있음을 확신한다. 오늘 서울시의회 교육위원들이 재의 요구를 철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우리는 이같은 서울시의회의 입장을 환영하며, 설령 재의를 하게 되는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시의회에서 서울학생인권조례가 다시금 가결될 것임을, 그것도 더 높은 찬성표를 받아 가결될 것임을 믿는다.

이대영 부교육감은 정략적 소모전을 즉각 중단하고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올 신학기에 조속히 시행될 수 있도록 재의를 즉각 철회하여야 한다. 만약 철회하지 않을 시 우리는 이대영 부교육감의 사퇴 요구를 포함하여 서울학생인권조례의 조속한 공포를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임을 단호히 밝힌다.

 

2012년 1월 9일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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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2.01.06 17:58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

                                        2012년 1월 3일

허광태 의장님께


지난 2011년 12월 20일, 서울특별시의회가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부합하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를 성공적으로 제정하여 서울시 학교에 재학 중인 아동과 청소년들의 권리를 보장하게 된 바에 대하여 환영하는 바입니다.

본 조례가 그 무엇보다 학생들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고, 학생들의 사생활, 표현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며, 성적 기호(성적 지향) 등 다양한 사유로 행하여지는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 한민국의 학교 환경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의 권리를 보장하는데 있어 본 조례의 제정이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및 성전환자의 권리의 명시적 보호를 보장한다는 관점에서, 본 조례의 제정이 향후 성적 기호(성적 지향)를 이유로 행하여지는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의 국가차원적인 채택으로 이어지는 기반을 닦는 발판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서울시 시민의 인권향상을 위하여 중요한 첫걸음을 내딛으신 의장님과 서울특별시의회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해니 메걸리
중동아주국 
현장지원 및 기술제휴부 대표




근데 '참조'가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랑 이대영 서울시 부교육감이네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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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2.01.06 15:59

치안, 정치, 청소년인권운동, 학생간폭력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치안’과 ‘정치’를 구별하며 대립적인 개념으로 정립합니다. (저도 번역된 책 하나 안 읽고 소개하는 글들만 읽은 잘 모르는 자크 랑시에르의 개념들을 여기서 무리해서 설명할 생각은 없지만... 감히 자크 랑시에르의 논의의 중요한 부분을 다 생략해버리고(?!) 개략화해서 이용해보겠습니다.) 자크 랑시에르에 따르면 치안은 이미 합의된 것 속에서 공백, 보충, 불일치를 제거하는 것이고, 정치는 지금의 사회와는 불일치를 일으키는, ‘몫 없는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고 보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더 거칠게 요약하면 치안은 현재 사회의 ‘합의’ 속에서 지금의 사회를 유지하는 작용이고, 정치는 ‘불일치’를 일으키며 지금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작용입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인권 역시 마찬가지 관점에서 봅니다. ‘성문화된 인간의 권리’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들 또한 인간이며 그 권리가 자신의 권리임을 주장할 때, 그 실천과 불화 속에 인권의 의미가 있고 그러므로 인권은 곧 정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인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권은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가지지 않고, 자신들이 갖지 않은 권리를 가진 자들의 권리”라고.


학생인권조례 제정 등을 포함한 청소년인권운동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인권운동은 인간의 권리로 성문화되어 있는 것들이 어째서 현실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보장되지 않는지 질문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청소년은 어째서 가정이나 학교에서 폭력을 당해도 그것을 폭력이라 부를 수 없지? 청소년은 어째서 자기 사생활의 자유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지? 청소년은 어째서 학교 운영 같은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지? 청소년은 어째서 공부해야만 하는 존재로만 생각되고 놀 시간도 여가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지? 이처럼 ‘미성숙한 존재’로 규정당하고 사회적 합의의 과정에서 배제당한 청소년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청소년인권운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청소년인권운동도 분명 ‘정치’의 일종입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집중적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는 소위 ‘학교폭력’ 문제, 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학생간 폭력․차별․괴롭힘’(너무 기니까 앞으로 그냥 ‘학생간 폭력’이라고 부르겠다.)은 청소년인권운동의 문제일까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학생간 폭력’은 이미 사회적으로 합의된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학생간 폭력’은 폭력이고 범죄이며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말이지요. 그리고 ‘학생간 폭력’에서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다거나 하는 과정 역시 이미 사회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합의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학생간 폭력’에 국가․사회가 대처하는 것은 현재 합의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치안’ 활동이며, 정치와는 반대되는 활동이고, 청소년인권운동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학생간 폭력’에는 합의되지 않은 부분들, 불일치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학교폭력’이라는 명명에 대한 문제제기에서부터(“왜 ‘학교폭력’은 ‘학교에 의한 폭력’이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아니고 ‘학생들에 의한 학생에 대한 폭력’만을 뜻하는가?”), ‘학생간 폭력’의 피해자가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된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학교가 은폐하는 문제, 피해에 대한 구제의 미흡함, 그밖에 학생간 폭력 사건에 대한 대응 방식이나 관행의 문제점 등), 또는 ‘학생간 폭력’ 중에서도 장애․성소수자․이주민․경제력 등 다른 사회적 차별의 요소가 포함된 경우들, 그리고 ‘학생간 폭력’의 성격을 규정하고 대응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등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쟁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쟁점들은 초중고등학생들이나 청소년들 일반의 사회적 조건과 권리 문제와 연관되어 있거나, 또는 그 안에서도 다시 또 다른 소수자인 이들이나 폭력 피해자들의 권리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의 영역에 속합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국가가 ‘학생간 폭력’ 문제를 ‘치안’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면, 청소년인권운동의 차원에서는 비교적 ‘학생간 폭력’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들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청소년인권운동은 ‘학생간 폭력’의 문제가 치안의 방식만으로 해결 불가능하며 (치안 역시 필요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음을 역설합니다. 조악한 비유를 들자면, 예를 들어 절도 등 ‘생계형 범죄’가 증가한다면 국가는 그 범죄를 제거하고 처벌하고 대응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고, 좌파나 빈민운동 단체 등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구조적 해결책(부의 재분배나 빈곤층, 노동자계급의 권리 문제 등)을 이야기할 텐데, 그와 대충 비슷한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냥 ‘학생간 폭력’ 문제가 모두들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듯해서 ‘학생간 폭력’ 문제를 접할 때마다, 어줍잖게도 자크 랑시에르의 ‘치안’과 ‘정치’ 개념이 떠오르는지라 적어보았습니다. ^^;; 운동 단체에 ‘치안’적 역할을 요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날 때가 있는가 하면, ‘정치’ 차원에서만 학생간 폭력 문제에 접근하는 게 너무 공허해보일 때도 있지요. 사안을 정리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그리고 학생간 폭력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저 말고도 다른 활동가 분들도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올리고 논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매우 짧은 지식으로 쓴지라 호...혹시 자크 랑시에르 공부하신 분께서 태클을 걸어오셔도 뭐라 할 말이 없는 글이니;; 랑시에르의 개념 자체을 가지고는 '지적질'해주시면 겸허히 받아들입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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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1.12.01 16:43

[나의 대학거부] 못 가는 건지 안 가는 건지 묻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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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거부를 생각하게 된 시점은 아마 중3 때(2008년) 촛불집회를 겪고 일제고사반대‘Say-No(세이 노우, 아니라고 말해요)’라는 활동을 하게 되면서부터인 것 같다. 그냥 미국산 쇠고기가 먹기 싫었고, 돈 많은 사람들은 한우 먹으면 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젤라틴이 들어간 많은 제품들에 노출되기 때문에 꼭 막아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국민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면 무엇인가 바꿔낼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이 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등교를 거부하고 나서

하지만 촛불은 그렇게 식어들었고 나에게 새로운 활동이 다가왔다. 그때 나는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평범한 중학생이었고, 일제고사를 반대한다는 것은 오히려 거부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 지역에서 초등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중학교 3학년 애매한 시점에 전학을 간 나는 공부에 대한 의욕도 없고, 내가 왜 이런 걸 주구장창 암기식으로 외워야 할까 지루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등교거부라는 행동을 할 때엔 겁이 나서 선생님에게 병결 처리를 받고 그렇게 기자회견장으로 갔다.

그렇게 등교거부라는 것을 치루고 다음날 학교로 돌아가 오엠알(OMR)카드에 ‘Say-No’로 표시하고 신나게 자고 있는 와중에 채점하는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와 태클만 걸지 않았어도 그 해에 일제고사는 꽤나 무난하게 지나갔을 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학생부장 선생님을 불러와 나와 대화를 시도했고 결국 담임의 귀에까지 들어가 상담을 받게 되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뭐가 대학거부와 이어지는 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날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기(별칭입니다)야, 너가 이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바꿔야 하는 거지 이런 식의 행동은 옳지 못해. 지금 이 제도를 만들어낸 국회의원들 교육감 교육의원들 등등 그 위치에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고 만들어낼 수도 있는 거 아니니?” 사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나를 지킬 무기가 없었다.

잘 살고 있었다

나를 설득할 수 없었기에 선생님도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마디도 못하고 집에 오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즉 내가 경험한 것)이나 나와 만나는 사람들을 보니까 사실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잘 살고 있는 것이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나름의 신념이랄까 가치 있는 것이랄까 그걸 두고 움직이고 행동하려는 모습들이 나는 잘못된 것, 이 시기에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즉 선생님이 나에게 던진 말은 너도 똑같이 경쟁해서 남들보다 더 높은 위치(권력자)가 되어 사회를 바꾸라는 말인 건데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이만 줄이지만 선생님이 내던진 이 말 한마디가 당시 나에게 대학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많은 영향을 준건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그해 11월 입시폐지대학평준화라는 슬로건으로 ‘대학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이란 건 나와 멀어보였고 내 주변 친구들은 이미 그 경쟁의 레이스를 뛰고 있었다. 나는 그 시기에 많은 것을 결정했다. 고등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것과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두 선택 중 하나는 좌절이 되고 이후에 실현되었지만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이 선택은 이미 실행되고 있다. 지금도 앞으로도 쭉 이어지길 바라며.

사회의 시선들

하지만 대학을 안 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이 사회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한 결정으로 보는 시선이 있고, 대학을 안 간다는 것이 배움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연상시키는 것 같은데 어찌 보면 그러한 연상과 시선들은 아마 대학을 가지 않는 것은 곧바로 노동현장으로 간다는 그 다른 경로가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부 못하면 공장 가서 일해야 한다(공순이 된다)’거나 ‘기술이라도 배워야 먹고 살 수 있다’거나 하는 말들이 이미 이런 경로를 전제하고 있다. 돈 주고 공부하기 싫으면 기술이라도 배워서 사회를 유지시키는 노동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내가 대학을 갈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등록금을 낼 형편도 안 되며, 학자금을 빌리더라도 갚을 처지도 되지 못하는 형편 때문이었다. 그렇게 빚쟁이로 몰락해버리면 도저히 나 자신을 건져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수능이라는 시스템의 부당함에서 온다. 그것은 정말로 자기가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온다는 환상과 무관하다. 소위 스카이(SKY)라고 불리는 상위권 대학을 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외고나 특목고를 다니고 강남과 청담 일대에 있는 비싸고 질 높은 학원들에 다닌다. 이미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집에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일찍이 이 사회의 대학진학률이 80퍼센트를 넘어가고 있지만 포기하는 게 더 빠를 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나에게 대학거부란 거부가 아니라 못 가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네가 못 가는 걸 왜 거부란 말을 쓰며 거창하게 그러냐?’라는 말에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난 지금의 대학,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대학을 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문제만이 아니기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요구해보려고 한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바라며 대학을 가지 않아도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지 않는 그런 삶을 상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을 요구하면 좋겠다. 나는 이제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요구하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 또한 발 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도 나의 목소리를 애써 용기내지 않더라도 당연하게 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못 가더라도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그러기 위해 행동했고, 앞으로도 당신들과 직접행동으로 이 사회에 문제를 던지고 싶다.
덧붙이는 글
공기 님은 아직은 하고 싶은 것, 재미있는 것을 더 하고 싶고 추구하고 싶답니다. 대학도 꿈도 스펙도 없는 그냥 그런 사람, 청춘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라는 소개를 보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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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77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28일 17: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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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11.17 16:44
[논평] 청소년단체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의 활동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의 입장에 대해



  청소년단체가 무슨 활동만 하면 '배후'에 뭐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나 '청소년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거의 공식이 된 것 같다. 며칠 전, 전교조의 기관지인 <교육희망>에 한 청소년단체의 운영, '배후'에 관한 의혹 제기 기사가 실렸고 해당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됐다. 아울러 전국교직원노동조합(다음부터 전교조)은 "청소년단체 이용한 전교조 죽이기 음모 즉각 중단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모두, 교사들의 수업 중 개인 의견을 담은 발언을 녹음해서 "정치 편향 교육"이라며 고발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다음부터 한청연)이라는 단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굳이 쓰자니 종이가 아까울 정도로 당연하게도, 우리는 한청연의 이 같은 활동에 비판적이다. 정치적이지 않은, 편향되지 않은 교육이란 불가능하며, 정치적 중립이란 많은 경우 보수적인 태도를 의미하곤 한다. 예컨대 지금 학교에서 입시경쟁을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되지만, 적극적으로 입시교육을 하는 것은 비정치적인 것, 정치적 중립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비정치적 태도란 지금의 사회·정치·교육체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는 정치적인 태도이다. 우리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관계가 만들어지고 교사도 학생도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교실에서 다양한 정치적 견해들이 오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한청연의 이번 활동과 같이, 교사와 학생 사이의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이 가능한 여건을 만들려고 노력하기는커녕, 교사들의 의견 표현을 사냥하듯이 고발하는 것은 반인권적인 행동이다. 우리는 교사와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은 전세계적으로 공인된 인권 기준이고 민주주의의 당연한 가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한청연이 이러한 활동을 그만둘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한청연의 활동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우리는 관련 기사, 특히 전교조의 성명에서 보이는 심각한 편견에 대해 문제제기하고자 한다. 청소년단체의 활동을 놓고 "어른들의 정치이념놀이에 …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하는 것, 누군가가 "청소년단체를 이용"하고 있다거나, "청소년들의 영혼을 파괴"하고 있다고 하는 것 등은, 청소년들의 사회․정치활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견에 편승하는 것이고, 청소년단체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회계나 재정 운영의 투명성을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후원을 받은 적이 있다거나 어디서 지원한다는 의혹이 있더라는 '카더라' 식 내용만으로 '이용'이니 '꼭두각시'니 표현하는 것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활동하는 능력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꼰대질'에는 좌우가 없고 상하만 있다고 했던가? 우리는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전교조가 아이들을 조종해서 나오게 했다는 공정택 전 서울시교육감의 발언이나 보수․수구언론들의 무책임한 발언 등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한청연의 활동에 대해 반대하고 비판하려면, 단체 대 단체로서 당당하게 문제제기하고 대응하라. 청소년단체든 어떤 단체든, 그 단체가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고 다른 단체나 정부의 조종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려면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말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은 미성숙하고 청소년들의 활동은 누군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이용하는 것이라는 편견에 편승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사회․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 모두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만든다. 청소년들은 스스로 사회․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주체이며 누가 배후에서 청소년단체를 조종하고 있을 거라는 식의 무리한 예단은, 누구든 함부로 내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전교조 등이 이러한 발언에 대해 반성하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2011년 11월 17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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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11.16 01:21

[나의 대학거부] 내가 배우고 느끼고 싶은 것

고예솔


나는 지금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는 고3이다. 학년으로 고3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초등학교 졸업이 내 학력의 전부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학력인정이 안 되는 학교라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력을 취득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중․고졸 검정고시를 보지 않을 것이고 대학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을 하면서 그런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을 하면서

사람들은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직 청소년에 대한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분위기는 여전하다. 올해 초 나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에 참여했다. 조례를 제정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청소년들의 서명이 아니라 유권자의 서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청소년 인권에 대한 생각들을 들었다.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례를 제정해 반인권적인 행동에 대한 규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사회구성원들의 인식의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근본적 원인이 되는 입시 위주의 무한경쟁 교육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입시거부 모임에 함께하게 되었다.

간디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에 대해 별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학이란 가면 가는 것이고 안가면 안 가는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게 행복한 것이다. 결과를 위해 과정을 희생하지 마라. 대학은 의무가 아닌 선택이다.” 우리는 이렇게 6년간 배워왔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친구들은 나의 대학입시 거부 행동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고 격려도 해 주었지만 동참하려 하지는 않았다. 나 자신은 무한경쟁 입시제도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것일까. 하지만 좋든 싫든 학벌만으로 평가받는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 있는 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학입시 따위랑은 전혀 관계가 없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도 19세 혹은 고3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니 무언가 압박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낮에 학교나 학원이 아닌 곳에 있는 나를 뭔가를 포기한 사람쯤으로 취급하곤 한다.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삶의 방식을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뭔가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나의 삶은 대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런 질문 속에 지내다보면 나도 대학엘 가야하는 것 아닐까?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먹고살 수나 있을까? 하는 압박감으로 초조해지기도 한다. 무한경쟁 교육 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있다고 할 수 있는 내가 이정도로 압박을 느끼는데 그 속에 살아온 아이들이 느끼는 압박은 얼마나 심할까 싶었다. 그런 압박감 속에서 청소년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교사들도 학생들도 대학에 매여 있는 사회

학교 현장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환경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학교 교육은 민주사회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한 민주적 인간이 되는데 필요한 소양을 기르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벌 위주의 사회 속에서 보다 나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학교는 대학만이 목표인 것처럼 학생들을 몰아세우고 그 속에서 인권을 논의 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인 논의로 치부된다. 교사들 또한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얼마나 보내는가로 능력이 평가되는 환경 속에서 학생들을 경쟁으로 몰아세우고 권위적으로 억압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 십년 후의 행복을 위해 십년동안의 시간을 공포와 초조함으로 가득 채우고, 마음을 나누어야 할 친구들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삶을 낭비하는 것이다. 삶의 가치는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매순간 순간이 모여서 미래가 되는 것인데 미래에만 의미를 두고 현재를 저당 잡히는 삶을 나는 살고 싶지 않다.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십년이 지나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행복이 찾아올까? 그렇게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을, 학벌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실 불안한 일이다. 대학졸업장이 없으면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이 사회에서 초졸로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지금까지 보호 아래 살던 내가 이 문제 많고 험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더군다나 사회가 요구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걷고자 한다는 것이 두렵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은 대학을 목적으로 한 그런 공부가 아닌데 그것 말고 다른 배움을 추구한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건 이 사회의 어딘가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의 다양한 꿈들이 존중되고 그들이 다양한 선택을 당당히 말하고 꿈 꿀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대학을 가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대학은 지금처럼 학벌로 줄 세우는 사회에 의해 강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 교육의 목표가 대학입시에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학교 현장에서나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청소년들의 인권이 존중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이 운동은 입시위주 교육이 낳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문제제기라고 봐주면 좋겠다. 문제 당사자인 청소년들 스스로가 주인의식을 갖고 청소년들의 목소리로 대안을 찾고 교육의 진정한 목표를 찾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교육의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답을 다시 찾아나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나는 졸업을 하고나면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로 살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흰머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귀농할 생각이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많은 것을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대학졸업장을 따는 일에 매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이 아니라도 이 세상에는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이 많고 거기서 배우고 느끼는 것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고예솔 님은 대안학교를 다니며 투명가방끈들의 모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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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74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08일 15:5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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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11.16 01:19

[나의 대학거부] 대학은 大學(대학)이 아니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대학생다운 행동은 ‘대학 거부’

김서린

대학에 입학한 것은 나의 선택,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대학거부선언을 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 내 맞은편에 앉은 교복 입은 여학생을 보며 머릿속으로 문득 어떤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교복을 입고 부모님 앞에 진지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네가 대학에 가서 굳이 공부할 생각이 없고 그냥 지금 취직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 꼭 대학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라는 부모님의 말씀이었다. 나는 그때 “대학에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때 전혀 망설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분명히 내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바로 ‘나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선택은 어떤 면에서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선택받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서 대학은 필수라고 여겼다. 나는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조차도 대학에 가려고 했기 때문에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는 궁금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때 나는 대학이 어떤 곳인지, 대학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막연히 대학생이 되면 자유로워지고 국․영․수 같은 주입식 교육, 혹은 죽도록 싫은 입시공부에서 해방될 것이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심지어 예뻐지기 까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수준이었다.

반면 대학을 안 가서는 안 되는 이유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고졸이 받는 사회적인 차별에 대한 이야기, 전문대를 졸업한 사촌이 더 많은 월급을 받기 위해서 결국에는 4년제 대학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요즘에는 대학 나와도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 가방끈이 짧으면 사람은 좋아도 교양이 없다는 이야기 등 참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내게 한 목소리로 말하는 듯 했다. “대학을 가지 않은 너의 삶은 너무 고될 거야. 이제까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참으며 살아왔니?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당연히 대학에 가야해. 대학에 가면 너의 꿈을 펼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잘 모르겠다.”라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입을 선택했다. 고3인 내 눈에 질 높은 삶을 위한 단 하나의 길이 ‘대입’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그에 대한 나의 애증

(1)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1학년 때 가장 싫었던 것은 선배들이 강요하는 술과 노래였는데, 지금 가장 싫은 것은 선배가 된 내가 토익공부나 아르바이트로 바쁜 1학년 후배들을 불러 술 한 잔, 밥 한 끼 하기가 미안한 현실이다. 1학년 때부터 열심히 스펙을 쌓고 학점을 따 놓아야 취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벅찬 등록금과 거주비용 등으로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대학생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오늘날의 대학생활이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대학생들은 무엇을 두고 경쟁하고 있을까? 대부분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 경쟁한다. 그런데 이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작업이 모두가 노력만 한다고 다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경쟁에서는 절대로 모두가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준비가 미흡한 어떤 이의 존재’는 불가피하다. 준비가 미흡한 어떤 이, 이른바 낙오자는 ‘나’이거나 ‘내가 아닌 다른 학생’ 중에서 무조건 나오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 것은 참으로 무서운 전제이다.

대학에서의 경쟁 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상대평가제도’가 아닌가 싶다. 이는 내가 얼마만큼 배움의 완성을 이루어 냈는지 상관없이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보다만 더 좋은 점수를 받으면 되는 것이니 학생들은 일단 다른 학생들보다만 시험을 잘 볼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하려 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이 들었었다. 교수님들은 상대평가 때문에 학생들의 학습수준이 떨어졌다고 말씀하셨지만 그와는 상반되게 노트하나 빌리기도 민망할 정도로 강의실의 분위기는 차가워졌다.

그러는 사이 대학 안에서 공부와 학점 사이의 간극은 커졌다.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은 주로 ‘학점’ 쪽이었다.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현명하게 공부하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학점만 현명하게 받아내라’라는 주문이었다. 그 말은 “시험에 나오지 않을 부분을 붙들고 있지 말고 그럴 시간에 교수님께 가서 눈도장 한 번 더 찍어라.”라는 식이었다. 그런 말이 ‘현명하게’라는 단어를 앞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실속’이 있어야 ‘취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점 외에 토익, 토익 스피킹, 봉사활동 및 기타 학내활동, 학외활동을 하고 아르바이트까지 해내기 위해서 공부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학생들이 겉포장에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은 겉포장이 취업경쟁의 ‘참여요건’이 되는 사회의 모습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 나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남에게 인증받기 위한 공부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내가 의도한 적도 없는 경기에서 남에게 지거나 혹은 이겨야 한다는 사실은 도서관에 앉아있는 나를 무기력하게 했다. 더군다나 경쟁에 필요한 비용도 우리집 형편으론 만만치 않았고 그럴수록 나의 부담은 커져갔다. 이러한 부담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 지라도 무조건 ‘안정적인’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다른 사람들은 열중하고 있는 이 경기에 나 혼자 의문을 가져서 괜히 이도저도 아닌 게 될까봐 두려운 적도 많았다.

(2)
대학에 와서 무조건 안 좋은 추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했으며 많은 것들을 느꼈다. 물론 그게 어떤 공부이든 공부도 하긴 했다. 검도 동아리에 들어서 함께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경험도 했고 스터디 그룹에서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도 알았다. 학내기관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뿌듯함도 많이 느꼈다. 나는 나 스스로 ‘대학생활다운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대학은 이제까지 젊음을 대표하는 곳이고 그만큼 에너지 넘치는 곳이다. 내가 대학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도 그런 부분이다.

하지만 그 에너지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대학이 그러한 에너지들을 어떻게 소모시키고 있는지가 주목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에서 느낀 많은 것들이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점점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대학의 현실은 어둡다. 그런데도 언제까지나 대학의 낭만을 노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대학의 공부와는 무관한 활동들을 꼭 대학에 들어와서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실은 그만큼 다양한 교육이 보장되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3)
애착과 불만이 뒤섞인 대학생활에 졸업이라는 지점이 가까워 올수록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요동쳤다. 경쟁 속에 끼어든 많은 불합리한 사건들 앞에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눈을 감고 귀를 닫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내가 본 많은 학생들이 생각하려 들지 않거나, 모르는 척 하고 싶어 했다. 그러는 사이 한쪽에서는 자살을 하고, 꿈을 잃고, 생존을 위한 아르바이트에 허덕였다. 대학교 축제가 벌어지던 어느 날, 한창 인기 있던 노래에 맞춰 하나가 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내 머릿속으로는 언젠가 보았던 생동성실험에 대한 방송, 등록금 때문에 휴학을 했다는 선배의 얼굴, 대출금이 쌓여서 무섭다던 친구의 문자 메시지, 축제날임에도 사회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며 모인 달랑 두 명인 동아리원의 모습, 그리고 갖가지 기사들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생각했다. 대학의 진실한 모습은 무엇일까? “축제에 흥겨워하는 저 모습이 대학의 진짜 모습일까?”라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대학생다운 행동은 바로 ‘대학 거부’

대학의 문제, 더 나아가 우리 교육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침묵하는 동안 그 폐해는 사건들로 나타났다. 나는 그것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는, 혹은 대학에 적응하지 못 하는 소수의 문제라고 치부하며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심각해진 대학의 문제 덕분에 학교와 사회에서도 대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등록금을 ‘반값’으로 내리는 것, 물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등록금투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지금의 구조 자체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다양한 학문을 추구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며,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의 공부를 할 수 있는 그런 진짜 대학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등록금이 반값이 된다고 해도 대학은 반값으로 내린 등급별 취업자격달성소가 될 뿐이다.

나는 ‘대학생’이라면, 아니 ‘젊은이’라면 이 시대의 순수한 지성으로서 행동하여야 한다고 배웠다. 내가 뼛속까지 느꼈던 많은 문제들을 다른 누군가가 죽음으로 말해주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졸업한다면 나는 그 졸업장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내가 ‘진짜 대학’을 원한다면 나 역시 ‘진짜 대학생’으로 행동하자는 생각에 도달했다. 내 후배들, 내 동생들을 나와 같은 어쩌면 더 심해질 문제의 한 가운데에 방치시켜놓지 말자.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부터 이 무의미한 경기에서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대학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기에 나는 대학을 거부하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가로등이 있는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거슬렀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함께 대학을 거부하고 이런 교육과 사회를 바꾸어야한다고 외치는 우리가, 가로등이 아니더라도 성능 좋은 휴대용 손전등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김서린 님은 바람 같은 여자, 얼마 전까지 대학생이었지만 대학을 거부하기로 마음먹고 중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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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74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08일 22: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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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11.14 10:18

대학입시거부선언



우리는 대학입시를 거부한다. 오늘 우리와 같은 청소년들 수십 만 명이 대학수학능력평가, 수능시험을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안다. 그 시험은 대학에서 배울 준비가 되었는지 알아보는 시험이 아니라 수십만명을 점수로 등급으로 줄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걸. 대학입시경쟁은 남의 꿈을 밟고 올라가는 전쟁이라는 걸. 우리의 삶에 가격을 매기는 상품화의 과정이라는 걸. 이 경쟁에 미친 입시위주 교육과 불안정한 모두의 삶을 무시한 채 폭주하는 사회에 제동을 걸기 위해 우리는 대학입시라는 단단한 제도에 시비를 건다. 조용히 경쟁에서 지쳐 떨어지는 대신, 경쟁에 뛰어들어 남을 짓밟고 뜀박질 하는 대신, 사회가 붙여준 루저라는 딱지를 버리고 스스로 거부자의 길을 택한다.

우리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낼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부추기는 사회에게 묻는다. 어째서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배움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공부만을 해야 하고 주어지는 정답만을 외워야 하는지. 서로를 도우며 즐겁게 공부하고 성장하지 못하고, 무한경쟁을 견뎌내야만 하는지. 대학은 왜 선택이 아닌 의무처럼 강요되고, 다양한 삶의 길이 아닌 "명문대"에 가는 것만이 성공이라 하는지. 왜 대학만이 독점적으로 ‘학력’, ‘자격’, ‘지식’을 판매하고, 대학 밖에서는 다른 배움의 길을 찾기 어려운지. 정부와 사회는 왜 교육을 책임지지 않고 우리 개개인에게 무거운 책임을 떠넘기는지. 점점 가혹하게 자신을 채찍질해도 우리의 삶의 조건은 나아지지 않는다. 오늘의 불행을 저축해도 내일의 행복이 오진 않을 것 같고, 불안과 경쟁만이 이어진다.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이런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강요하는가.

우리는 대학입시를 거부한다. 우리의 거부는 그저 대학을 안 가겠다는 선택이 아니다. 지금의 입시가, 대학이, 교육이, 그리고 사회가 잘못되었음을, 온몸으로 외치는 것이다. 일단 그래도 대학은 가고 보라는 유예의 주문에 맞서, 지금 여기서 바꾸자고 말하는 것이다. 더 이상 교육에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혀만 차지 말고, 지금부터 같이 바꿔나가야 한다고 손을 내미는 몸짓이다. 우리는 낙오자라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거부가 낙오가 아니라 온전한 선택이 될 수 있는 사회를 꿈꾸기에, 우리는 거부라는 길을 택한다. 잘못된 쪽은 우리가 아니다. 획일적인 경쟁에서 밀려난 누군가는 불행해져야만 하고, 그래서 모두가 불안과 불행을 안고 살아야만 하는 이 사회이다.

모두가 자유롭게 배우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이제는 이 교육과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교육이 우리의 보편적 권리로서 존재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누릴 수 있기를 원한다. 대학 밖에서도 다양한 배움의 길, 삶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원한다. 무한경쟁교육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교육을 원한다. 학력이 학벌이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으며 학교가 서열화되지 않은 사회, 우리를 상품이 아닌 인간으로, 우리의 모습 그대로 보는 사회를 원한다. 불안과 두려움에 쫓겨 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 우리 사회가 모든 이들의 최소한의 생존, 사람다운 삶,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기를 요구한다.

우리에게 수능만을, 순응만을 요구하는 교육, 남을 밟는 것 외에 살 길은 없다고 말하는 이 사회. 이것들을 위해 희생하기에는 우리의 오늘이 너무 아깝기에. 학력과 학벌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에 갇혀있기에는 우리들의 배움이 너무 소중하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선언한다. 여기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노라고. 자유로운 배움을 위해, 존엄하고 안정된 인간적인 삶을 위해, 유예되지 않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행동하겠다. 살아가겠다.


2011년 11월 10일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


고예솔 김민성 김재홍 김해솔 문동혁 민다영 박제헌
양현아 이찬우 이현지 임준혁 장주성 전경현 정열음
조만성 최경수 최난희 한소영 (1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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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
걸어가는꿈2011.11.10 17:20



대학입시거부선언

우리는 대학입시를 거부한다. 오늘 우리와 같은 청소년들 수십 만 명이 대학수학능력평가, 수능시험을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안다. 그 시험은 대학에서 배울 준비가 되었는지 알아보는 시험이 아니라 수십만명을 점수로 등급으로 줄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걸. 대학입시경쟁은 남의 꿈을 밟고 올라가는 전쟁이라는 걸. 우리의 삶에 가격을 매기는 상품화의 과정이라는 걸. 이 경쟁에 미친 입시위주 교육과 불안정한 모두의 삶을 무시한 채 폭주하는 사회에 제동을 걸기 위해 우리는 대학입시라는 단단한 제도에 시비를 건다. 조용히 경쟁에서 지쳐 떨어지는 대신, 경쟁에 뛰어들어 남을 짓밟고 뜀박질 하는 대신, 사회가 붙여준 루저라는 딱지를 버리고 스스로 거부자의 길을 택한다.

우리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낼 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부추기는 사회에게 묻는다. 어째서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배움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공부만을 해야 하고 주어지는 정답만을 외워야 하는지. 서로를 도우며 즐겁게 공부하고 성장하지 못하고, 무한경쟁을 견뎌내야만 하는지. 대학은 왜 선택이 아닌 의무처럼 강요되고, 다양한 삶의 길이 아닌 "명문대"에 가는 것만이 성공이라 하는지. 왜 대학만이 독점적으로 ‘학력’, ‘자격’, ‘지식’을 판매하고, 대학 밖에서는 다른 배움의 길을 찾기 어려운지. 정부와 사회는 왜 교육을 책임지지 않고 우리 개개인에게 무거운 책임을 떠넘기는지. 점점 가혹하게 자신을 채찍질해도 우리의 삶의 조건은 나아지지 않는다. 오늘의 불행을 저축해도 내일의 행복이 오진 않을 것 같고, 불안과 경쟁만이 이어진다.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이런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강요하는가.

우리는 대학입시를 거부한다. 우리의 거부는 그저 대학을 안 가겠다는 선택이 아니다. 지금의 입시가, 대학이, 교육이, 그리고 사회가 잘못되었음을, 온몸으로 외치는 것이다. 일단 그래도 대학은 가고 보라는 유예의 주문에 맞서, 지금 여기서 바꾸자고 말하는 것이다. 더 이상 교육에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혀만 차지 말고, 지금부터 같이 바꿔나가야 한다고 손을 내미는 몸짓이다. 우리는 낙오자라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거부가 낙오가 아니라 온전한 선택이 될 수 있는 사회를 꿈꾸기에, 우리는 거부라는 길을 택한다. 잘못된 쪽은 우리가 아니다. 획일적인 경쟁에서 밀려난 누군가는 불행해져야만 하고, 그래서 모두가 불안과 불행을 안고 살아야만 하는 이 사회이다.

모두가 자유롭게 배우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이제는 이 교육과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교육이 우리의 보편적 권리로서 존재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누릴 수 있기를 원한다. 대학 밖에서도 다양한 배움의 길, 삶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원한다. 무한경쟁교육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교육을 원한다. 학력이 학벌이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으며 학교가 서열화되지 않은 사회, 우리를 상품이 아닌 인간으로, 우리의 모습 그대로 보는 사회를 원한다. 불안과 두려움에 쫓겨 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 우리 사회가 모든 이들의 최소한의 생존, 사람다운 삶,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기를 요구한다.

우리에게 수능만을, 순응만을 요구하는 교육, 남을 밟는 것 외에 살 길은 없다고 말하는 이 사회. 이것들을 위해 희생하기에는 우리의 오늘이 너무 아깝기에. 학력과 학벌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에 갇혀있기에는 우리들의 배움이 너무 소중하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선언한다. 여기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노라고. 자유로운 배움을 위해, 존엄하고 안정된 인간적인 삶을 위해, 유예되지 않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행동하겠다. 살아가겠다.


2011년 11월 10일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


고예솔 김민성 김재홍 김해솔 문동혁 민다영 박제헌
양현아 이찬우 이현지 임준혁 장주성 전경현 정열음
조만성 최경수 최난희 한소영 (1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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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일에 수능거부선언,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본 게 벌써... 직접 본 것만 3번.

올해는 이례적으로 18명의 참가자

100명을 목표로 했지만 18명에 그쳤다.

꼭 거부자가 아니어도 좋으니, 아니 거부자 말고 다른 분들 많이 많이 오시라고 마련한 자리이니

거리행동 많이 오시랍!

경쟁과 학벌만을 강요하는 교육과 사회를 바꾸는

11월 12일 거리행동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 언제?

11월 12일 토요일, 오후 3시 (사전행사는 오후 1시부터)

★ 어디서?

청계광장 옆 파이낸스 센터 앞 (1,2호선 시청역 4번출구, 5호선 광화문역 5번출구)

★ 누구와?

19살 대학입시 거부자, 20대 대학거부자, 그리고 대학입시거부 운동과 대학거부자들을 지지하는 여러분과 함께!

 

 

11월 12일 거리행동 소개

 

더 좋은 성적,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만을 향해 달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학교와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불행하고 불안합니다. 끝없는 경쟁 속에서 교육은 이미 대학에 가기 위한, 학벌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고 그 안에서 진정한 교육의 의미는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경쟁만을 강요하는 지금의 이 교육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진정한 교육을 찾기 힘든 지금의 입시를 철폐하고 대학을 평준화하기 위해 당당하게 대학을 거부하는 대학거부자들의 목소리와 이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 이 사회에 전달하고자 이번 거리행동을 준비합니다.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홈페이지 cafe.daum.net/wrongedu1

트위터 @wrongedu

후원계좌 우체국 014019-02-153534(김해솔)

 

 

공동주최_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교육혁명 공동행동 (관 악동작학교운영위원협의회, 교육노동운동의전망을찾는사람들, 경기교육운동연대꼼, 노동해방실천연대, 노동전선, 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 다함께, 사회당, 사회주의노동자정당공동실천위원회, 사회진보를위한민주연대, 서울대법인화반대공대위,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본, 전국공무원노조, 전국교수노조, 진보교육연구소,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 학벌없는사회, 한국비정규교수노조,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학술단체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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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11.10 09:58

[나의 대학거부] 내가 배우고 느끼고 싶은 것

고예솔

나는 지금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는 고3이다. 학년으로 고3이긴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초등학교 졸업이 내 학력의 전부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학력인정이 안 되는 학교라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력을 취득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중․고졸 검정고시를 보지 않을 것이고 대학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을 하면서 그런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을 하면서

사람들은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직 청소년에 대한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분위기는 여전하다. 올해 초 나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에 참여했다. 조례를 제정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청소년들의 서명이 아니라 유권자의 서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청소년 인권에 대한 생각들을 들었다.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례를 제정해 반인권적인 행동에 대한 규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사회구성원들의 인식의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근본적 원인이 되는 입시 위주의 무한경쟁 교육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입시거부 모임에 함께하게 되었다. 

간디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에 대해 별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학이란 가면 가는 것이고 안가면 안 가는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게 행복한 것이다. 결과를 위해 과정을 희생하지 마라. 대학은 의무가 아닌 선택이다.” 우리는 이렇게 6년간 배워왔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친구들은 나의 대학입시 거부 행동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고 격려도 해 주었지만 동참하려 하지는 않았다. 나 자신은 무한경쟁 입시제도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것일까. 하지만 좋든 싫든 학벌만으로 평가받는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 있는 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학입시 따위랑은 전혀 관계가 없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도 19세 혹은 고3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니 무언가 압박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낮에 학교나 학원이 아닌 곳에 있는 나를 뭔가를 포기한 사람쯤으로 취급하곤 한다.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삶의 방식을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뭔가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나의 삶은 대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런 질문 속에 지내다보면 나도 대학엘 가야하는 것 아닐까?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먹고살 수나 있을까? 하는 압박감으로 초조해지기도 한다. 무한경쟁 교육 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있다고 할 수 있는 내가 이정도로 압박을 느끼는데 그 속에 살아온 아이들이 느끼는 압박은 얼마나 심할까 싶었다. 그런 압박감 속에서 청소년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교사들도 학생들도 대학에 매여 있는 사회

학교 현장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환경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학교 교육은 민주사회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한 민주적 인간이 되는데 필요한 소양을 기르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벌 위주의 사회 속에서 보다 나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학교는 대학만이 목표인 것처럼 학생들을 몰아세우고 그 속에서 인권을 논의 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인 논의로 치부된다. 교사들 또한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얼마나 보내는가로 능력이 평가되는 환경 속에서 학생들을 경쟁으로 몰아세우고 권위적으로 억압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 십년 후의 행복을 위해 십년동안의 시간을 공포와 초조함으로 가득 채우고, 마음을 나누어야 할 친구들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삶을 낭비하는 것이다. 삶의 가치는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매순간 순간이 모여서 미래가 되는 것인데 미래에만 의미를 두고 현재를 저당 잡히는 삶을 나는 살고 싶지 않다.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십년이 지나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행복이 찾아올까? 그렇게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을, 학벌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실 불안한 일이다. 대학졸업장이 없으면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이 사회에서 초졸로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지금까지 보호 아래 살던 내가 이 문제 많고 험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더군다나 사회가 요구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걷고자 한다는 것이 두렵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은 대학을 목적으로 한 그런 공부가 아닌데 그것 말고 다른 배움을 추구한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는 건 이 사회의 어딘가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의 다양한 꿈들이 존중되고 그들이 다양한 선택을 당당히 말하고 꿈 꿀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대학을 가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대학은 지금처럼 학벌로 줄 세우는 사회에 의해 강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 교육의 목표가 대학입시에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학교 현장에서나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청소년들의 인권이 존중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이 운동은 입시위주 교육이 낳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문제제기라고 봐주면 좋겠다. 문제 당사자인 청소년들 스스로가 주인의식을 갖고 청소년들의 목소리로 대안을 찾고 교육의 진정한 목표를 찾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교육의 목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답을 다시 찾아나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나는 졸업을 하고나면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로 살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흰머리가 생기기 시작하면 귀농할 생각이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많은 것을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대학졸업장을 따는 일에 매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이 아니라도 이 세상에는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이 많고 거기서 배우고 느끼는 것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고예솔 님은 대안학교를 다니며 투명가방끈들의 모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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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74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08일 15:5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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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꿈2011.11.10 09:57

[나의 대학거부] 대학은 大學(대학)이 아니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대학생다운 행동은 ‘대학 거부’

김서린

대학에 입학한 것은 나의 선택,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대학거부선언을 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 내 맞은편에 앉은 교복 입은 여학생을 보며 머릿속으로 문득 어떤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교복을 입고 부모님 앞에 진지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네가 대학에 가서 굳이 공부할 생각이 없고 그냥 지금 취직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 꼭 대학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라는 부모님의 말씀이었다. 나는 그때 “대학에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때 전혀 망설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분명히 내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바로 ‘나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선택은 어떤 면에서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선택받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서 대학은 필수라고 여겼다. 나는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조차도 대학에 가려고 했기 때문에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는 궁금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때 나는 대학이 어떤 곳인지, 대학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막연히 대학생이 되면 자유로워지고 국․영․수 같은 주입식 교육, 혹은 죽도록 싫은 입시공부에서 해방될 것이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심지어 예뻐지기 까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수준이었다.

반면 대학을 안 가서는 안 되는 이유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고졸이 받는 사회적인 차별에 대한 이야기, 전문대를 졸업한 사촌이 더 많은 월급을 받기 위해서 결국에는 4년제 대학에 들어갔다는 이야기, 요즘에는 대학 나와도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 가방끈이 짧으면 사람은 좋아도 교양이 없다는 이야기 등 참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내게 한 목소리로 말하는 듯 했다. “대학을 가지 않은 너의 삶은 너무 고될 거야. 이제까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참으며 살아왔니?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당연히 대학에 가야해. 대학에 가면 너의 꿈을 펼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잘 모르겠다.”라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입을 선택했다. 고3인 내 눈에 질 높은 삶을 위한 단 하나의 길이 ‘대입’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그에 대한 나의 애증

(1)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1학년 때 가장 싫었던 것은 선배들이 강요하는 술과 노래였는데, 지금 가장 싫은 것은 선배가 된 내가 토익공부나 아르바이트로 바쁜 1학년 후배들을 불러 술 한 잔, 밥 한 끼 하기가 미안한 현실이다. 1학년 때부터 열심히 스펙을 쌓고 학점을 따 놓아야 취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벅찬 등록금과 거주비용 등으로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대학생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오늘날의 대학생활이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대학생들은 무엇을 두고 경쟁하고 있을까? 대부분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 경쟁한다. 그런데 이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작업이 모두가 노력만 한다고 다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경쟁에서는 절대로 모두가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준비가 미흡한 어떤 이의 존재’는 불가피하다. 준비가 미흡한 어떤 이, 이른바 낙오자는 ‘나’이거나 ‘내가 아닌 다른 학생’ 중에서 무조건 나오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 것은 참으로 무서운 전제이다.

대학에서의 경쟁 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상대평가제도’가 아닌가 싶다. 이는 내가 얼마만큼 배움의 완성을 이루어 냈는지 상관없이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보다만 더 좋은 점수를 받으면 되는 것이니 학생들은 일단 다른 학생들보다만 시험을 잘 볼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하려 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이 들었었다. 교수님들은 상대평가 때문에 학생들의 학습수준이 떨어졌다고 말씀하셨지만 그와는 상반되게 노트하나 빌리기도 민망할 정도로 강의실의 분위기는 차가워졌다.

그러는 사이 대학 안에서 공부와 학점 사이의 간극은 커졌다.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은 주로 ‘학점’ 쪽이었다.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현명하게 공부하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학점만 현명하게 받아내라’라는 주문이었다. 그 말은 “시험에 나오지 않을 부분을 붙들고 있지 말고 그럴 시간에 교수님께 가서 눈도장 한 번 더 찍어라.”라는 식이었다. 그런 말이 ‘현명하게’라는 단어를 앞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실속’이 있어야 ‘취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점 외에 토익, 토익 스피킹, 봉사활동 및 기타 학내활동, 학외활동을 하고 아르바이트까지 해내기 위해서 공부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학생들이 겉포장에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은 겉포장이 취업경쟁의 ‘참여요건’이 되는 사회의 모습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 나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남에게 인증받기 위한 공부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내가 의도한 적도 없는 경기에서 남에게 지거나 혹은 이겨야 한다는 사실은 도서관에 앉아있는 나를 무기력하게 했다. 더군다나 경쟁에 필요한 비용도 우리집 형편으론 만만치 않았고 그럴수록 나의 부담은 커져갔다. 이러한 부담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 지라도 무조건 ‘안정적인’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다른 사람들은 열중하고 있는 이 경기에 나 혼자 의문을 가져서 괜히 이도저도 아닌 게 될까봐 두려운 적도 많았다.

(2) 
대학에 와서 무조건 안 좋은 추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했으며 많은 것들을 느꼈다. 물론 그게 어떤 공부이든 공부도 하긴 했다. 검도 동아리에 들어서 함께 땀 흘리며 운동하는 경험도 했고 스터디 그룹에서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도 알았다. 학내기관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뿌듯함도 많이 느꼈다. 나는 나 스스로 ‘대학생활다운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대학은 이제까지 젊음을 대표하는 곳이고 그만큼 에너지 넘치는 곳이다. 내가 대학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도 그런 부분이다.

하지만 그 에너지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대학이 그러한 에너지들을 어떻게 소모시키고 있는지가 주목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에서 느낀 많은 것들이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점점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대학의 현실은 어둡다. 그런데도 언제까지나 대학의 낭만을 노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대학의 공부와는 무관한 활동들을 꼭 대학에 들어와서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실은 그만큼 다양한 교육이 보장되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3) 
애착과 불만이 뒤섞인 대학생활에 졸업이라는 지점이 가까워 올수록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요동쳤다. 경쟁 속에 끼어든 많은 불합리한 사건들 앞에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눈을 감고 귀를 닫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내가 본 많은 학생들이 생각하려 들지 않거나, 모르는 척 하고 싶어 했다. 그러는 사이 한쪽에서는 자살을 하고, 꿈을 잃고, 생존을 위한 아르바이트에 허덕였다. 대학교 축제가 벌어지던 어느 날, 한창 인기 있던 노래에 맞춰 하나가 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내 머릿속으로는 언젠가 보았던 생동성실험에 대한 방송, 등록금 때문에 휴학을 했다는 선배의 얼굴, 대출금이 쌓여서 무섭다던 친구의 문자 메시지, 축제날임에도 사회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며 모인 달랑 두 명인 동아리원의 모습, 그리고 갖가지 기사들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생각했다. 대학의 진실한 모습은 무엇일까? “축제에 흥겨워하는 저 모습이 대학의 진짜 모습일까?”라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대학생다운 행동은 바로 ‘대학 거부’

대학의 문제, 더 나아가 우리 교육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침묵하는 동안 그 폐해는 사건들로 나타났다. 나는 그것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는, 혹은 대학에 적응하지 못 하는 소수의 문제라고 치부하며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심각해진 대학의 문제 덕분에 학교와 사회에서도 대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등록금을 ‘반값’으로 내리는 것, 물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등록금투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지금의 구조 자체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다양한 학문을 추구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며,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의 공부를 할 수 있는 그런 진짜 대학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등록금이 반값이 된다고 해도 대학은 반값으로 내린 등급별 취업자격달성소가 될 뿐이다.

나는 ‘대학생’이라면, 아니 ‘젊은이’라면 이 시대의 순수한 지성으로서 행동하여야 한다고 배웠다. 내가 뼛속까지 느꼈던 많은 문제들을 다른 누군가가 죽음으로 말해주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졸업한다면 나는 그 졸업장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내가 ‘진짜 대학’을 원한다면 나 역시 ‘진짜 대학생’으로 행동하자는 생각에 도달했다. 내 후배들, 내 동생들을 나와 같은 어쩌면 더 심해질 문제의 한 가운데에 방치시켜놓지 말자.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부터 이 무의미한 경기에서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대학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기에 나는 대학을 거부하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가로등이 있는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거슬렀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함께 대학을 거부하고 이런 교육과 사회를 바꾸어야한다고 외치는 우리가, 가로등이 아니더라도 성능 좋은 휴대용 손전등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김서린 님은 바람 같은 여자, 얼마 전까지 대학생이었지만 대학을 거부하기로 마음먹고 중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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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274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08일 22: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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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현